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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솔님을 귀찬게 하여 죄송한데 또 질문을 드려야 겠습니다. 제겐 가장 큰 화두 이기도 한 문제 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죽은 후에도 남아서 존재 할 수 있는것이 있을까요? 육신은 썩어서 없어 진다고 한다면 영적인 그 무엇은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만약 죽은 뒤에도 영혼이 남아 있다면 그 영혼은 생전의 기억들을 할수 있을까요? 앱솔님의 말씀에 나라고 하는 본래자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동일자 라고 하셨는데 그 나라는 본래자는 어떤 기억이나 의지나 사고작용을 할수 있는가요? 인간과 같은 인격체는 설마 아니겟지요? 질문이 뒤죽박죽 되는 같은데..과연 내가 죽으면 아무것도 없이 소멸되어 버리는가요? 그렇다면 석가나 예수 같은 분들도 소멸되어 없어진 것인가요? 결론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영혼이 있다면 생전의 삶과 어떤 연결성이 있습니까? 생전에 익혔던 학습이나 기억등을 가지고 있을가요? (질문자가 질문을 하면서도 무엇을 물어야 할지 정리 하지 못하여 질문이 괴상합니다.이해하시고 말씀 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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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의 말씀을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부족하나마, 나름의 의견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나'라는 존재로서 존재함의 참 의미에 대하여 '깨달음'의 의식에 입각하여 본다면, 하나의 개인 또는 개체로서 개체적인 태어남과 죽음에 국한한 이해의 범위(시각)를 둔 의미가 아니라, 우주라는 물질계의 성질과 우주가 현화(現化)된 생명체의 성질과 동일시 하는 이해에서 영원성을 갖는 포괄적인 '나'라 할 수 있습니다.
우주의 실상에서 존재함의 의미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미성숙한 의식이라 할 수 있는 동물적 본성에 의한 개체적인 자아를 위주로 한 상태에서 숭고하여야 할 자아(自我)의 영원성을 찾기 때문에 '깨달음'과 같은 영원한 생명성으로서의 자아를 발견할 수 없음으로 인하여, 현실의 삶에서 추구함과 주어짐의 차이에서 여러 불협화음이 일어나는는 원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태어남과 죽음에 대하여,
1차적인 이해는 순간이 연결된 조금 전과 지금의 차이라 할 수 있겠으며,
2차적인 이해는 하나의 개인으로서 개체적인 태어남과 죽음이라 할 수 있겠으며,
3차적인 이해는 2차적인 이해를 수용하는 영원한 우주의 생명성과 함께하는 모든 자아로서 '나'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위의 1차적인 이해로 보면, 순간 또는 조금 전과 지금의 차이에서 현재를 그 과거를 떠난 사후(死後)의 세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2차적인 이해는 우리가 개념하는 일생으로서 삶과 죽음이라고 인식하는 마디적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1차적인 이해의 범위에서는 어느 정도의 영속성을 찾을 수 있으나, 2차적인 이해의 범위에서는 영속성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각이 기억에 의존한 개체적 자아를 위주로 한 이해의 범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1차적인 이해에서 일정한 영속성을 찾을 수 있다고 한 것은 기억에 의존하여 자아를 찾으려고 한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시각차이 때문에 신(神)과 인간(人間)과의 관계를 과제로 하는 종교(宗敎)가 생기게 된 처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영성(靈性)의 진화(進化) 또는 성숙(成熟)에 관건이 되는 3차적인 이해는 우선적으로 개체적인 자아를 중심으로 하는 이해에서 벗어나는 심상(心像)이 요구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개체적 자아를 중심으로 하여 자아를 찾으려 하기 때문에 간곡히 추구하고자 하는 '깨달음의 의식'이 꿈결같이 요원한 처지인 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미숙한 개념 이전에 이미 우리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주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정부관리의 한 사람이 개체적 자아의 지배에 치우쳐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처리한 결과는 또 하나의 '나'인 우리가 그 피해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 비유할 수 있습니다. 비단, 예를 든 경우 뿐만 아니라 가족 또는 우리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미성숙한 의식으로 인하여 우리가 서로에게 고통을 만들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개체를 중심으로 기억에 의존한 '너'와 '나'라는 분리된 이해는 미래인류의 삶을 위태롭게 할 수 있음을 자각하여야 할 과제가 주어진 현재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이후의 삶에서 자신의 생각이 개체적 자아에 의한 것인지 또는 우주적 자아에 의한 것인지 구분하고 정화하여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며, 또 정화된 생각으로 행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나태함보다도 위기의식을 가져야 할 필요성이 있기도 합니다. '다 된 밥에 코 빠트린다'는 속담도 있듯이 우리의 노력으로 100중에 99를 이루었다 하여도 누군가의 기회적인 생각으로 1이 유지가 되어 어느 한 순간에 나머지 99도 무너질 수 있는 위기로 도태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우주의 현실은 2차적인 이해를 떠나, 이미 1차적인 이해와 3차적인 이해가 동일시된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해의 편협함으로 오해되고 있거나 착각을 하고 있는 2차적인 이해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현재의 삶에서 느끼는 자아는 마치 한 장의 사진 속의 추억과 같다 할 것입니다. 만질 수도 없으며 돌이킬 수도 없는 오직 마음 속에서 자리하는 추억이게 될 현재라는 것입니다. 우주의 실상은 영원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영원함 속의 어느 한 점에서 추억을 가지는 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점은 어느 순간이라 할지라도 선택의 의미가 없는 공평함으로서 충분한 그 점으로서 현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현재란 갓 태어난 아이와 같은 마음(靈)으로 현재를 공유하고 있는 중인 것이며, 삶에서의 추억(魂)은 '그'와 '나'를 구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의 이해를 통하여, 스스로에 대하여 의문의 여지가 없는 승복(承服)의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후에 인식된 사실에 대하여 부정하려 하거나, 그 사실에 대하여 스스로 기만을 하려 하거나 하게 되면 그 자신은 혼란스러움을 겪기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장 단순하고 간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완전한 과거적인 지식에 의존하여 이러한 진실을 외면하려 하였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아무런 지식에 매이지 않고 진실을 바라 보고 스스로에게 승복을 받아서 한 결 가벼운 마음이 되어 서로가 기쁠 수 있는 삶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죽게되고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현재까지 쭉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 속에는 현재의 순간처럼 늘 변화된 순간만 존재하여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의 연속 중에서 어제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오늘의 다시 태어나 있음에 대하여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이해에서는 불특정한 '나'의 영원한 존재성에 대하여도 전혀 합리성을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태어나고 죽고 그 가운데 영속적인 존재로 성립되어 있음에 대하여 이해를 갖게 되시면, 개체로서 태어나고 죽는 형식에 대하여 보다 진실 또는 사실된 이해에 가까워 지시리라 봅니다. 그가 죽고 내가 살아 있고, 내가 죽고 그가 살아 있다는 모순된 이해는 '나'라는 존재의 본질성을 깨닫지 못함에서 일어나는 불협화음으로서 모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본성은 어제의 '나'에 국한되지 않듯이 일생을 갖는 개체적 자아에 국한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개체적인 자아를 범위로 한 국한된 이해의 범위에서는 과거와 미래의 영원한 생명성에 대하여 아무런 진실된 이해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질문하신 내용을 다시 읽어 보셔서 저의 답변과 함께 검증을 하셔서 답변되지 않은 내용이 있는지 확인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부족한 표현의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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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내용 : 앱솔의 세계로 본 - 전생과 사후세계와 윤회에 대한 진실 http://cafe.daum.net/absoul/HnL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