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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꼭 그렇게 아프지만은 안을 수도.
“이제 다들 가.”
“필요할 때만 이용하고 가라? 너무하네.”
“우리도 우리만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눈치가 있다면 알아서 좀 빠져주지?!”
해율의 태도가 당연할 수도 있기에 이들은 장난스럽게 툴툴거리는 척을 하다 하나 둘 그곳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정적이 흐르는 낯선 공간에 나란히 마주하고 앉은 해율과 주리. 주변은 온통 화려한 장식들과 촛불로 둘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오늘만큼은 자기가 내 앞에서 눈물 보이길 기대했었는데, 아쉽긴 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물 보이는 게 좋아?”
“아니, 그 말이 아니라... 그러니까 내 말은.”
“알아, 감동했으면 더 좋았겠단 거잖아. 맞지? 감동했어. 다만 평범하지 않은 결과 때문에 웃음이 먼저 나고, 당황해서 그렇지. 그리고 나처럼 프러포즈 받는 일이 흔치는 않잖아. 그래서 난 이게 더 특별하고 좋아. 고맙고.”
“어~어? 고맙다니?! 당연한 거지. 내가 해줘야하는!! 그리고 설마 내가 자기랑 결혼 안 할 거라 생각한 거야?! 아니,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거야? 그렇게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했는데?!”
“아니. 당연히 결혼할거라 생각했지.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야.”
주리의 말이 끝나자 말없이 지그시 바라보는 해율. 주리도 해율의 모습에 가만히 눈을 맞추고 말을 아끼듯 입술을 앙 다문다. 조심스럽게 주리에게 다가가 팔로 목을 감아 당겨 안으며 조용한 톤으로 귓가에 속삭이는 해율.
‘사랑해.’
해율의 고백에 답이라도 하듯 고개를 살짝 떨어트려 다시 한 번 마주보던 주리는 해율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짧게 ‘쪽’하고 대었다 뗀다. 갑작스런 행동에 해율이 두 눈을 살짝 감았다 뜨고는 조금 더 뜨거워진 듯한 눈빛으로 주리를 본다. 둘은 좀 전보다 더 강한 밀착으로 서로가 엉기어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 * * * *
시련을 당한 것도 아닌데 시련당한 사람처럼 기운이 없고, 마음이 쓸쓸한 기분을 훌훌 털어 내버려 지지가 않던 승재는 탁자 앞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만 연거푸 피워대고 있다. 어느새 수북이 쌓여버린 꽁초를 보면서 벽에 걸린 거울에 다가 서본다. 피워댄 담배꽁초 수만큼 얼굴이 칙칙해져버린 듯 하다.
빈속에 연거푸 담배만 피워댔더니 속안까지 담배연기가 차있는 듯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기 위해 집앞 편의점으로 향하려고 슬리퍼를 대충 신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승재.
“10,500원입니다.”
입을 열었다가는 연거푸 피워댔던 담배냄새가 역하게 뿜어 나올까 싶어 상대를 위해 입을 꾹 다물고 트레이닝바지 주머니에서 꾸깃한 만원짜리 지폐 한 장과 5백원을 찾아서 계산대에 내어놓고, 슬리퍼를 끌며 편의점 안 빈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저기...”
“......?”
“여자친구 있으세요?”
“......!!”
말없이 승재는 얼떨결에 고개를 가로 두어번 저어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고, 그런 승재의 반응에 두눈을 둥글게 접어 웃어 보이는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는 여자.
“좋아하는 사람은요?”
“......?!”
무심결에 승재는 고개를 가로 저으려다 잠시 멈칫한다. 그런 승재의 반응에 실망하려는 듯 눈매와 입매가 동시에 아래로 푹 쳐지려는 모양을 보이는 여자의 반응에 실례가 될까 싶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며 자신도 모르는 웃음을 뱉어버리는 승재.
“내가 완전 꼴초라... 실례가 될까봐 말 안하고 입 다물고 있으려고 했는데, 어린친구가 너무 기대에 차 있는 것 같아서 정중히 말을 해줘야 될 것 같아서.”
“꼬... 꼴초요? 어... 어린 친구요? 누구요? 설마 저 말씀이신가요?”
“그럼, 여기 또 누가 있나?!”
“하...”
승재의 말에 여자는 갑자기 표정이 180° 다른 사람이 되어 승재를 다시 본다. 좀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여자의 표정과 태도에 조금 당황한 듯한 승재는 자세를 바로 잡고 영문을 알수 없단 얼굴로 여자를 본다.
“왜 그러시는...지...”
“꼴초가 실례인 게 아니고, 사람 겉모습만 보고 나이 추정해서 다짜고짜 말부터 까고 보는 그게 더 실례인거는 모르시나 봐요?!”
“뭐, 뭐?! 이 꼬맹이가. 어른한테 까부네.”
여자의 이마 쪽으로 슬쩍 손가락을 터치하듯 닿았다 떼어내며 하는 승재의 말에 더는 못 참겠다는 얼굴로 씩씩거리던 여자가 입을 연다.
“그 쪽이 보는 것보다 저 나이 먹을 만큼 먹었거든요. 사과하시죠.”
“네?! 아니... 그럼 나이가 어떻게 되시길래...”
“서른 둘. 이요.”
“네... 네?! 아... 죄, 죄송합니다. 초면에 제가 너무 무례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됐고, 사겨요 우리.”
“네에에????”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사귀자구요. 나 그쪽 3개월 전부터 좋아하고 있었어요.”
“아, 저.. 그...”
“거절하는 거예요?”
고등학생 소녀처럼 다시 승재의 반응에 금방이라도 울어버릴듯한 표정을 하고선 승재의 답을 기다리는 여자. 당황스러운 상황에 사태파악이 잘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가로 마구 저어보는 승재.
“제가 아직 마음이 정리가 안돼서 지금 좀 당황스럽거든요.”
“알았어요. 하루 줄게요. 내일 이 시간, 이곳에서 다시 봐요. 그리고 그때 답 줘요.”
통보식으로 자기 할 말만 하고 홀연히 그곳을 벗어나는 여자. 정신을 놓고 담배만 피워대다가 외출해서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은 승재가 넋을 잃고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다. 그리고는 뒤이어 실실 영문을 알수 없는 미소를 짓는 승재.
‘꼭 그렇게 아프지만은 안을 수도 있겠네. 내일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