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겨울, 오대산 상원사에서 주봉 비로봉과 상왕봉을 올라 두로령 삼거리에서 원점 회귀한 적이 있었다. 친구 셋과 신년 일출산행을 겸해 비로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 등 1400고지 이상의 오대산 환종주를 계획했는데 혹한과 폭설로 두로봉으로 향하지 못하고 중도포기하고 만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당시 완주목표를 달성하는 게 열정 같은 걸로 착각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완벽한 등산은 평지에 안전하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1953년 처음으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가 한 말이다. 동감이다. 그래야 또 산에 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는 이미 다 자랐지만 내 꿈은 계속 자라나고 있다. 다시 돌아와 반드시 정복할 것이다”
1952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실패한 그는 바로 그 이듬해 자신이 한 말을 행동에 옮겼다. 힐러리의 위대한 업적에 슬쩍 빗대는 게 민망스럽기는 하다.
상원사에 머문 세조의 혼
3년이 지나서야 날 좋은 초여름에 다시 왔다. 그때 포기했던 그대로의 코스, 상원사에서 비로봉으로 올라 상왕봉, 두로봉을 거쳐 동대산을 지나 원점 회귀하는 환종주코스이다.
446번 지방도로를 타고가다 월정사 부도탑을 지나면서 비포장도로로 바뀌자 맑고 수려한 오대천계곡에 이르게 된다. 신선골, 동피골, 조개골에서 흐르는 물이 합수하면서 오대천상류를 형성하여 남한강의 시원이 되며, 역시 오대산골짜기에서 시작된 내린천은 북한강의 시원이 되니 곧 한강의 발원이다.
동피골야영장을 지나 상원사입구에 주차한 후 등산화 끈을 조여 맨다. 이른 아침인데도 햇빛이 창창하다.
“땀깨나 흘리겠군.”
그래도 체감온도 영하 20도가 넘었던 3년 전의 추위를 떠올리면 이코노미 석에서 비즈니스 석으로 옮겨 앉은 거나 다름없다.
오대산은 지리산, 설악산에 이어 세 번째로 크고 넓은 산이다. 월정사지구, 소금강지구, 계방산지구의 셋으로 나뉘는 오대산영역은 각각의 산세가 판이하게 다르다. 다섯 개의 연꽃잎에 싸여 연꽃의 마음을 품었다는 월정사지구의 오대산이기에 이번엔 홀로산행이지만 보살핌이 있을 걸로 믿고 주봉인 비로봉을 다시 오른다.
“이번 산행엔 폭염으로 포기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네 번째 이 길을 오른다. 상원사 들머리에서 비로봉까지의 길은 늘 만만치 않았다. 급경사오름길을 숨 몰아쉬며 땀범벅이 되어 버겁게 올랐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겨워하면서도 다시 찾고 또 찾는 것은 그만큼 멋진 곳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은 대개 험상궂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월정사스님들은 여름철 비오는 풍광은 월정사에서 바라보고, 겨울설경은 오대산에서 느끼라는 의미로 우중월정 설중오대雨中月精 雪中五臺라는 말을 했는데 사시사철 월정사와 오대산의 아름다움에 한 치 어긋남이 없는 표현이다.
육중한 산세를 병풍삼은 상원사는 월정사와 함께 유서 깊은 불교성지이다. 두 사찰 모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무수한 암자 등 산전체가 불교성지를 이룬 곳은 국내에서 오대산이 유일하다니 얼마나 많은 국보급문화재를 보유하고 있겠는가. 상원사에도 예술적 가치가 높은 역사유물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그중 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을 보고 스스로도 모를 표정을 짓게 된다.
오대산 상원사에 와서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의 수종사를 언급하는 게 뜬금없기는 하다. 피부병을 고치려고 금강산을 다녀오던 조선 7대 세조가 운길산 밑에서 하룻밤을 묵던 중 바위굴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종소리처럼 들려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수종사水鐘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일화와 맥락을 같이 하는 상원사 문수동자를 보며 또 하나의 일화가 떠올려진다. 종기로 고생하던 세조가 이곳 오대천계곡에서 지나가던 동자승을 불러 등을 씻어달라고 한다.
“누구에게든 임금의 등을 씻어주었다고 말하지 말거라.”
목욕을 마친 세조가 동자승에게 당부하자 동자승이 정중히 말을 받았다.
“대왕께서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보았다고 말씀하지 마시지요.”
오대신앙을 정착시킨 신라의 보천태자가 근처 수정암에서 수양 중이던 문수보살에게 매일 물을 길어다 친히 공양을 했는데 바로 그 문수보살이 씻겨주었으니 불치병인들 고쳐지지 않겠는가. 보천태자가 공양한 물이 속리산 삼파수, 충주 달천수와 함께 조선 3대 명수에 속한다는 우통수于筒水이며 그 샘터가 한수의 발원이라고도 전해진다.
그 후 세조의 종기는 깨끗이 치유되었고 세조는 허름했던 상원사를 번듯한 사찰로 증축시켜 임금의 원당사찰로 만들었다. 거기 더해 기억을 되살려 화공에게 동자로 나타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다. 그 그림을 표본으로 조각한 것이 상원사본당인 청량선원에 모셔진 목조 문수동자좌상이다.
청량선원 앞에 두 마리의 고양이 석상을 보면서도 야릇한 미소를 흘리게 된다. 상원사를 방문한 세조가 법당에 들어가 예불을 드리려 하는데 별안간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옷소매를 물고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기이한 일이로다. 법당안팎을 샅샅이 뒤지어라.”
결국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 숨어있는 자객을 잡았다. 고양이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세조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에 묘전描田을 하사하였다. 또 봉은사 등 한양근교의 여러 곳에 묘전을 설치하고 고양이를 기르게 했다.
불교를 배척한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전국의 사찰이 황폐해졌지만 왕의 원찰이 되는 등 오히려 상원사는 승승장구 거듭 발전하였다. 여러 차례 중창을 거듭하다가 1946년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는데 당시 월정사 주지였던 이종욱 스님이 그 이듬해에 금강산 마하연의 건물형태를 본떠 청량선원을 지으면서 다시 중창되기 시작했다.
막 지나온 관대걸이라는 안내판에도 세조가 목욕할 때 의관을 걸어둔 곳이라고 적혀있는 걸 보면 세조가 피부병 때문에 금강산을 다녀오다가 결국 오대산에서 고치고 한양으로 가던 중 수종사를 지었다는 일화가 연결되는 맥락일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를 죽이면서 그 업보로 얻었을 피부병을 절 두 채의 값으로 고쳤으니 세조는 부가가치가 높은 거래를 한 셈이다.
오대산의 다섯 개 대臺는 중대를 비롯해 방위에 따라 동대, 서대, 남대, 북대를 가리키고 각 대마다 사자암, 관음암, 수정암, 지장암, 미륵암의 암자가 있다.
중대사자암을 가리키는 길로 진입하기 전에 돌아보다가 이명처럼 은은하고도 청아한 종소리를 듣는다. 불교에서는 사찰에서 울리는 범종梵鐘소리를 진리를 설하는 부처님의 사자후와 같으므로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들어야한다고 가르친다. 모든 중생의 각성을 촉구하는 부처님의 음성이며 정신을 일깨우는 지혜의 울림이라는 것이다.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인데 이 종 또한 세조에 의해 상원사로 옮겨졌다. 전국에서 가장 소리울림이 좋은 종을 찾게 해 안동에 있던 3300근이나 되는 종을 찾아 이리로 옮긴 것이다.
“세조랑 상원사는 절대궁합이야.”
무얼 해도 상생의 결과를 도출하는 세조와 상원사의 인연을 새겨보다가 중대사자암 쪽으로 진입하면서 비로봉으로의 산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혹한 대신 폭염을 감내하고
이전엔 없었던 돌계단이 깔끔하게 깔려있다. 적멸보궁까지 계속되는 계단이다. 풍수지리상 적멸보궁이 자리한 곳이 용의 정수리부분이란다.
샘터 하나가 있는데 마시면 눈이 맑아진다는 용안수이다. 용안수를 지나 국내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이곳의 적멸보궁을 왼쪽으로 두고 지나가게 된다. 두 번이나 다녀왔으므로 오늘은 들르지 않고 바로 올라간다.
없던 공원지킴터 막사가 생기고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더니 다시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비로봉 오르는 이 길은 그리 급경사도 아니고 긴 길이 아닌데도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다. 올 때마다 그랬던 것 같다.
아름드리나무들이 햇빛을 가려주어 크게 덥지는 않아 좋다. 처음 보는 버섯이 고목에 피었고 둥근이질풀, 투구꽃 등이 눈에 띄는가 싶더니 아기자기한 야생화군락이 보인다. 그리고 곧 비로봉에 다다른다. 해발 1563m의 오대산 주봉과 네 번째의 해후이다.
대관령 삼양목장의 초지가 푸릇푸릇하다. 오대산 다섯 봉우리 중 위치상 외떨어져있어 가지 못하는 효령봉이 푸른 능선을 따라 이곳 비로봉까지 부드럽게 다가온다. 북쪽으로 점봉산과 설악산을 보게 되고 동쪽으로 노인봉과 황병산, 남쪽의 가리왕산, 서쪽 방태산 등 내로라하는 강원도의 명산들이 두루 눈에 잡힌다.
“벌써 네 번이나 뵙는군요. 언제 봐도 이곳은 멋집니다.”
“자네는 볼 때마다 주름 하나씩 느는 것 같구먼.”
경우 없는 비로봉의 인사말에 얼른 상왕봉으로 발길을 돌린다. 많은 돌탑들과도 건성으로 눈만 맞추고 보폭을 넓힌다. 평탄한 길 오른쪽으로 지천에 야생화가 널려있다. 수줍어 고개 들지 못하는 금강초롱을 접사하려 허리를 굽혔다가 동자꽃을 보려 또 고개를 숙인다.
보호수패찰이 붙은 주목이 보이더니 다시 누울 듯 기울어지다가 가지를 추켜올린 기이한 모양새의 백양나무가 눈길을 잡아끌기도 한다. 3년 전 겨울엔 싸리나무와 고사목군락에 핀 새벽눈꽃이 절경이었었다. 조금 더 지나 동상 걸릴 만큼 추웠지만 멋진 일출을 보았던 상왕봉(해발 1491m)에 닿는다.
상왕봉에서 중앙 멀리 가리왕산 마루금을 조망한다
“역시 오대산에서의 조망은 모자람이 없어.”
비로봉에서 효령봉을 거쳐 계방산으로 이어지는 국립공원일대와 두타산, 청옥산에서 함백산과 태백산을 연결하는 백두대간을 눈에 가득 담고, 굽이치며 산허리를 휘감는 응복산과 구룡령너머로 점봉산에서 설악산 서북릉까지 눈길을 주다가 30여 분 내리막을 걸어 북대삼거리까지 당도한다.
햇빛 받아 더 창백하게 보이는 백양나무군락을 지나고 두어 개의 무명봉을 오르내려 백두대간 두로령 표지석(해발 1310m)을 다시 보게 된다. 여기서 진행을 포기하고 상원사로 내려갔었다. 지금부터는 초행길이다. 두로봉 들머리로 들어서며 살짝 가슴 설레는 걸 느끼게 된다. 가고 싶었던 곳, 가려했으나 늦게 온 곳, 그런 곳이 산일 때 설렘이 생긴다.
기둥줄기가 벗겨진 몇 그루의 거대한 주목을 매만지며 작은 숲길을 걷는데 간간이 멧돼지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비포장산간도로를 건너 완만한 능선에는 사람도 없고 멧돼지도 없고 부는 바람에 나뭇잎 떠는 소리만 들린다. 간간이 금강초롱이 고개 숙여 인사한다. 조망이 열리면서 동해가 보이는데 가까이 보이는 물빛은 주문진앞바다이다.
헬기장이기도 한 두로봉 정상(해발 1421m)에 이르자 선자령의 풍력발전기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하고 황병산도 그리 멀지않다. 방벽을 넘어와 지나온 비로봉 5.8km, 동대산 6.7km의 거리가 표기된 두로봉 이정표를 보고 동대산으로 향한다.
조금씩 버거워지나보다. 고도가 낮아지는 게 반갑지 않다. 그만큼 고도를 높여 다시 올라가야 한다. 두로봉과 동대산의 표고차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자작나무숲을 거쳐 신선목이 이정표를 지나게 되고 두로봉출발 4km지점에 몇 개의 커다란 차돌바위가 널브러진 차돌박이라는 곳까지 오게 된다.
매끈한 차돌의 촉감을 느끼면서 물 한 모금 마시고 내처 2.7km를 당겨 동대산 정상(해발 1433m)에 당도한다. 오대산 다섯 봉우리 중 동쪽의 만월봉이 지금의 동대산이다. 노인봉이 가깝고 그 왼쪽으로는 백마봉, 오른쪽으로 황병산을 또 보게 된다.
이제부터는 하산길이다. 이마에서 눈으로 흐르는 땀을 훔치고 동대산삼거리에서 진고개 반대방향인 동피골로 걸음을 내딛는다. 노루오줌꽃이 지천에 깔린 길을 내려와 동피골에 닿았으니 상원사까지 2.6km를 남겨두었다. 네 개의 봉우리를 넘으면서도 체득하지 못했던 지혜를 구하고자 선재길로 들어선다.
선재길은 지혜를 구하기 위해 천하를 돌아다니며 53명의 현인을 만나 결국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화엄경의 선재동자에서 유래한 길이다.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찾아갔다는 이 길은 널찍한 암반위로 쉴 새 없이 맑은 물이 흐르는데 월정사계곡의 양옆으로 울창하게 우거진 숲 덕분에 더욱 아늑하게 느껴진다.
섶다리, 출렁다리, 나무다리 등을 건너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다가올 삶을 명상한다. 월정사일주문부터 상원사까지 잘 조성된 9km의 아름다운 숲길, 활엽수의 푸름과 맑은 계류가 흐르는 쾌적한 숲길에서 지혜의 자취를 발견하지 못한 채 그저 길고, 무덥고, 외로운 산행을 마치는 것에 만족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