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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급여
평생 동안 공만 차고 사는 사람이 있고, 평생 동안 스키만 타고 사는 사람도 있고, 평생 동안 그림만 그리고 사는 사람도 있다.
골프 선수가 그렇고, 야구, 배구, 농구, 스키어, 등등 그들의 직업이 생산성과는 거리가 먼 직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직업적 가치는 무엇인가? 생산성과 직 간접적 연관 된 직업은 그 직업을 통하여 인류와 사회에 풍요와 안전 등에 공헌 된다, 이것이 직업적 가치이고 또한 그 직업을 가지고 땀 흘리는 직업인의 존재 가치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직업이 생산성과 직 간접적으로 연관 되지 않는 직업이라면, 그 직업적 가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 직업에 땀 흘리는 직업인의 존재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스포츠 선수의 직업적 가치는 관중에서 찾아야 한다. 보아주는 이가 없는 스포츠 선수, 이 선수는 자신이 하고 있는 스포츠에서 전혀 가치를 찾을 수 없다. 따라서 그자신의 존재 가치도 찾을 수 없다. 만약에 그가 또 다른 직업을 가지고서 인류와 사회에 공헌하는 어떤 무엇이 있다면, 그는 선수라는 명목만 있을 뿐이지 그는 결국 취미 생활에 불과 한 것이다.
스포츠, 문화 공연, 예술 등의 관중은 각각의 직업을 가지고 인류와 사회에 헌신 한다. 그들이 짬을 내어 경기를 즐기는 동안 그들이 쉼을 얻어 생활과 직업에 활력을 얻는다. 그들의 직업으로 인한 가중으로 허약해 졌거나 병들었던 마음에 활력을 얻고 심지어는 심적 질병까지 얻었을 때, 스포츠 선수 등, 오락적 직업을 가진 이들의 활동을 보고 삶의 활력을 얻기도 하고 심적 질병의 치료를 받았거나 그 외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각종 스포츠 문화인들의 직업적 가치와 존재 가치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모든 직업은 인류와 사회에 또 우주에 공헌 됐을 때 그 직업과 그 사람의 존재 가치가 있다할 것이다.
그렇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청장년기가 되어서 직업이 없다면, 그는 존재
하고 있을 뿐 그의 존재 가치는 없다 할 것이다. 그렇다고 지구를 떠나라는 말은 아니다.
현대에 청장년의 실업 율이 높은 때에 직업이 곧 가치다, 라고 말하는 것이 가혹 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직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 가치가 있다고 할양이면, 그는 직업을 찾기 위해 부단히 힘쓰고 있음이 있어야 한다.
“직업은 인류와 사회와 우주에 공헌 됐을 때, 그 직업과 그 사람의 존재 가치가 있다.”라는 사고를 가진 사람은 현재는 직업이 없다 하더라도 그는 직업을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계속 할 것이고, 그는 결국 미구에 직업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급여의 크고 작음을 따라서 직업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급여의 크고 작음이 직업 선택의 우선순위가 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이 더 적절 하다. 심지어는 급여가 없는 일이 인류와 사회에 공헌 되고 있다고 판단 될 때, 이 사람은 기꺼이 그 일을 선택함에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서문을 장황하게 쓰고 있는 이유는 아래의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직업의 가치는 그 직업의 일 자체에 있지 급여에 있지 않다
직업인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인류와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력이 크냐? 작으냐? 하는 논의는 무의미 하다. 왜냐하면 지구촌 시대를 살고 있는 지구촌 직업인들은 각각의 직업을 통하여 거미줄 망처럼 얽혀져 있다. 생명체들의 몸이 각각의 지체들을 가지고 있고 그 지체들이 생동하는 일들은 각각 다르다 그러나 그 지체들은 몸 안에서 유기적 연결망을 통해서 그 각각의 지체들이 하는 활동을 통해서 그의 몸이 건강체로 유지 되고 활동하는데 헌신 되고 있다.
생명체를 유지 하는데 있어서 각각의 지체들은 더 긴요하고 덜 긴요한 차이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있어야할 것이 다 있을 때, 그 생명체는 온전하고 아름다운 생명체인 것이다.
예컨대, 사람의 심장은 사람의 생명유지에 긴요한 지체이다. 그러나 열 손가락 중에 하나가 또는 열 손가락 모두가 없다 해도 생명에 직접적 영향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을 우리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로 보건대, 어떤 직업이든지 인류와 사회와 우주에 공헌 되는 직업과 직업인은 가치 있고 중요하다.
그러므로 직업, 일,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지 급료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직업과 일에 가치가 있음을 얼마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아래의 성경 말씀을 궁구해 보자
개역 마 20: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 삼시(오전9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5 제 육시(오전12시)와 제 구시(오후3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 십일시(오후5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일꾼을 구하신다.
- 오전 일찍
- 오전 9시
- 오전 12시
- 오후 3시
- 오후 5시
하나님께서는 오후 6시에 이를 마치신다.
이 내용만 봐서는 일꾼이 필요한 하나님께 일꾼을 고용하시는 일이 당연하지 이 일이 특별하다거나 주목 받을 일이겠는가?
맞다, 품꾼을 고용하시는 내용에는 특별함이나 주목 받을 일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음의 처사에서 특별함과 주목 받을 일을 발견케 된다.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여기에서 세 가지의 이런 의문이 생기죠?
1.단지 일꾼이 필요했다면 파트타임 급료가 아닌 온 하루의 급료를 줬을까?
2.형평성에 어긋나다는 비난을 감수했을까?
3.비난하는 이를 단 한 마디의 말로 잠재울 수 있던 것을 무엇일까?
당연한 것 같은 부당한 가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세상에서의 통상적인 관점에서 보는 형평성의 가치는 수치와 계량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밝혀 주시는 것은 인간이 일을 할 때, 인간 가치가 발현 되는 것이고 그 가치는 직업의 외형적 수치와 계량에 의한 크고 작음,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그 일을 하고 있는 인간과 그 인간이 하고 있는 일, 그 자체에 있음을 밝혀 주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의 관점에 길들여진 자가 수치와 계량에 의한 정당한 대우를 받고도 불만인 사람들의 불행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앞서 쓴 글에서 ‘하나님 나라는 준법의 나라’ 라는 글에서 밝혔듯이
하나님 심중의 의중은 “약속”에 있습니다.
약속대로 하시는 하나님
스스로 약속에 스스로 묶이시는 하나님(자신이 십자가에 심판 받으심)
단 한 번도 약속을 범하신 일이 없으신 하나님(민23:19)
약속은 다른 말로 “법”입니다.
온 우주를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영원히 온 우주는 법대로 운영 됩니다.
창조의 때가 그랬고, 세상 끝 날에도 그렇고, 영원 세계도 그렇습니다.
단 한 시간 일 한 일꾼에게 하루의 품삯을 계산 하신 것은 직업인 모두에게 던져 주시는 멧시가 들어 있습니다.
“직업의 가치는 일 자체에 있다”,
“일하는 이에게는 필요의 공급이 반듯이 된다.”(신25:4, 고전9:9, 딤전5:18)
이 두 가지 멧시지입니다.
직업과 일에 대한 왜곡된 가치 기준을 가진 자들의 형벌
원망, 불평, 무자비, 독선
형평성 이란 천평, 저울에 달아 계량 했을 때,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것을 말함입니다.
일의 량, 또는 일의 시간에 대한 그 대가로 일당 급여를 한 경우라면, 달아보아 형평이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형평에서 기울기에 속한 자신이 인식되고 부당한 대우 받았다고 판단 될 때,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없을 겁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이니까요 당연히 인간의 이성에 있는 감정에는 불이 나도록 돼있습니다.
분노, 불평, 원망, 좌절, 등등 삭혀 내기 어려운 감정에 불길이 이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고용주가 이 노동자들의 감정에 굴복하여 사용자가 하루의 노농 량과 시간 량에 한 데나리온 주기로 한 약속을 깨고, 형평성에 맞게 12데나리온을 지급 했다면, 이것이 진정한 형평성 일까? 사회 정의가 실현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도 알게 됐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데나리온(일당)은 그 시대 그 사회 환경에 의해 합의된 사회적 합의에 의해 정해진 노동의 대가이다. 이 사회적 합의가 일순간 깨져서 1,200%의 임금 상승이 된 사회는 인류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내가 경제학자가 아니지만, 상식적 수준에서 생각해도 사회 경제의 혼란은 즉시로 일어날 것이다.
사회 경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사회정의”는 아닌 것이다. 더더욱 약속 대로 된 것은 아니다.
왜곡 된 가치
인간이 하는 노동의 가치는 임금에 있지 않다. 인간이 하는 노동의 가치는 공헌에 있다. 즉 한 사람의 노동을 통해서 자신과 더불어 인류와 사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어떤 공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가치인 것이다.
일의 가치는 곧장 그 노동을 한 그 인간의 가치다. 노동의 가치는 일당에 있지 않고 그 노동으로 인하여 인류와 사회 그리고 나아가 우주에 공헌한 그것에 있다.
그래서 노동은 숭고한 것으로 인정된다, 따라서 노동의 주체인 인간이 숭고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산에 누웠으나 방에 누웠으나 같은 존재
늙고 병들어 방에 누워 와병 중에 있는 노인의 참담함을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을 달리 해보자, “살았다 하나 죽은 자” 직설적인 말이다 평생을 노동하여 인류와 사회에 공헌하고 와병 중에 계신 노인이 “살았다 하나 죽은 자” 일까? 정말 그렇습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이 노인이 평생에 헌신한 업적도 물론 이려니와 또 다른 하나는 일자리를 하나 만들고 계십니다. ‘요양보호사’ 요양보호사 라는 직업이 노인 사회가 되면서 활발하게 병약한 노인과 사회에 헌신 되고 있는데, 병중에 계신 노인이 없다면, 요양보호사의 일자리는 없어지는 것 아닌가요?
또 하나 있습니다. 유아들이 그렇습니다. 유아기를 자라고 있는 어린 인간에게 노동을 통하여 자신의 가치를 실현 하라 말 할 수 없고, 그가 직업이 없으므로 가치가 없다 할 것이겠습니까?
와병 중의 노인이 일자리(요양보호사)를 창출함에 가치를 뒀듯이 양육하는 부모와 사회가 이들로 인하여 일자리가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는 그가 속한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가정에 장래의 꿈을 주고 있는 높은 가치가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살았다 하나 죽은 자’
건강한 노인이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시간과 정열을 허비하는 노인이 그렇다.
또 젊은가 일하지 않고 허랑 방탕 하는 자, 이런 사람이 ‘살았다 하나 죽은 자’입니다.
위에서 충분히 논의 한 거와 같이 사람의 가치는 일에서 주어집니다. 따라서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가치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 자신의 삶이 부하던지 가난 하던지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그가 일 하지 않음으로 가치가 없는 인간인 것입니다.
가치 없는 인간은 ‘살았다 하나 죽은 자’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봉사와 헌신
기업은 이윤을 추구해야하는 생리적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기업이 이윤을 내지 못하는 순간 기업은 사라진다.
기업이 이윤을 내느냐, 못 내느냐 하는 것은 기업의 생존에 직접적 문제이다.
따라서 기업으로 하여금 “봉사”하라 라고 하는 것은 ‘죽어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회봉사 활동에 있어서 대기업의 의료봉사, 독거노인봉사, 등등을 보아 오셨을 것입니다. 이 봉사에 헌신 된 것은 기업이 아닙니다. 물론 기업이 이 봉사에 소용되는 재화를 감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봉사로 헌신 된 것은 그 기업의 노동자들입니다.
즉 대기업의 봉사활동의 주체는 기업이 아니라 “인간 직업인” 인 것입니다.
봉사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봉사는 사람과 일이 하는 것입니다. 기업은 이윤을 내어 기업에 있는 일자리를 인간에게 제공하고 직업인이 그 일을 통하여 인류와 사회와 하나님나라에 공헌 되게 하는 도구인 것입니다.
양면성의 기업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들 모두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널리 회자되는 도구가 ‘식도’입니다. 식도가 바르게 사용 됐을 때, 인류와 사회와 하나님 나라에 공헌되는 것이요, 정도에서 벗어나는 순간 흉기로 변한다는 불변의 이치로 설명 되는 것이 기업이라는 도구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업이 일자리를 창출 하지 않는 다면, 이는 그 본연의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더 악한 것은 일자리를 축소하여 더 큰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은 이미 기업이 아니라 잘못 써지고 있는 식도와 같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고용주와 노동자
고용주는 기업을 주체적으로 관리하는 청지기다. 기업을 통해서 인간에게 일 할 수 있는 제반 환경을 만들고 관리 감독하는 청지기로서 고용주이며, 노동자는 고용주에게 선택 되어 고용주가 기업을 운용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노동을 제공하고 개인 스스로의 삶을 영위하는 재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기업의 이윤은, 고용주의 제반 투자와 노동자의 노동이 만들어낸 공동의 과실인 것이다.
따라서 건강한 기업이 유지 되려면, 고용주와 노동자의 이윤 분배가 합리적으로 적적하게 실행 돼야 한다.
고용주와 노동자의 합리적 이윤 분배
청년 노동자들이 대기업을 선호하고 중소기업을 기피하는 현상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미래에 대한 확실성의 차이 때문이며, 년 봉의 차이 때문이며 복지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차이를 취사선택하는 젊은 노동자들을 탓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고 싶다.
대기업에 입사한 모든 노동자가 다 잘나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지가 않다, 그들 중에도 역시 20%의 노동자만이 고위직에 올라가고 년 봉이 보장되고, 복지 혜택이 주어지는 것이다.
20%의 법칙은 중소기업에도 적용 된다. 중소기업에서 자신의 꿈을 펼쳐 볼 수 있는 기회가 더 많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창조성을 가진 꿈의 젊은이는 판에 박은 듯이 제한된 업무 환경에서 노동하는 것 보다는 무한한 세계에로 열려 있는 중소기업의 노동의 환경에서 일해 봄이 생기 있는 삶의 환경은 아닐까싶다.
또 다른 측면은 합리적 이윤 분배에 있다. 노동의 대가로 계상 되는 ‘일당’은 오늘의 사회적 배경과 환경에 따른 사회적 합의와 노사의 합의에 의하여 결정 된다. 그렇다면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이익분배에 걸 맞는 수준을 정하고 중소기업의 이윤에 대하여 초과하는 이윤은 사회복지의 재원으로 기부 돼야 한다.
이러므로 이 땅에 노동자는 직접적 임금의 혜택에 부가하여 전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복지혜택을 공평하게 받음으로 초일류 복지 국가의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직접 손에 넣은 재화가 많고 사회복지 혜택이 전무한 사회가 바람직한가? 아니면 직접 손에 넣는 재화는 대등 소이하며 사회복지 혜택을 모두가 함께 누리서 사회 안정망이 확고하고 인간적 삶을 영위 할 수 있는 최상의 복지국가가 바람직한가?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 ‘대한미국’이 이러한 노동 환경, 대기업 중소기업의 기업환경을 꿈꾸어 보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의 균형이 이렇게 설계되고 실행 될 때, 대한민국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은 우주에서 가장 살기 좋은 삶의 터가 되고 자손 만만대에 번영과 발전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먼저 된 자로 나중 됨
노동의 가치는 ‘일당’에 있지 않다는 논의를 앞에서 끝낸 바 있다.
그러함에도 노동의 대가를 ‘일당’에 두고 있는 사람은 만족한 노농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같은 환경에서 일하는 또 다른 이가 자신 보다 더 많은 ‘일당’ 받는 것을 보고 원망하며 분노하며 좌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의 노동환경에서는 자신의 일과 똑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이 인데도 자신 보다 더 많은 ‘일당’을 받고 있는 사람을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의 가치를 ‘일당’에 두고 있는 한 그는 만족 할 수 없다. 그러나 노동의 가치를 자신의 땀 흘리는 그 노동으로 인하여 인류와 사회, 국가, 하나님의 나라에 헌신 된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 사람은 일당의 크기에 따라 마음의 동요를 느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의 노동에 숭고함이 부여되어 신바람 난 노동을 즐길 수 있고 더불어 창의적 노동 수단도 발견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눈에 보이는 한정 된 일당 외에 보이지 않는 부가적 혜택을 받으며 살게 되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는 노동의 스트레스를 받기는커녕 즐거움을 얻는다. 그는 웬만한 정신적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안전하다. 그의 노동환경은 밝고 맑음에 있을 것이고 이로서 창의적 새 것들이 창안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재화로 환산 할 수 있을 것인가?
종료 한 시간 전
직업, 노동할 수 있는 환경에 선택 됐다는 것, 일당이 얼마인가? 누구와 비교하여 더 받을 것인가? 이런 것들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다만 일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에 행복해 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노동 현장과 고용주의 가치관 등 이 모든 것들이 성경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의 진리위에 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샬롬
정정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