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국사의 연혁
●선국사의 설경
■위치와 창건
선국사(善國寺)는 남원시 산곡동 419번지 교룡산(蛟龍山)에 있는 교룡산성 안에 자리한다.
남원시내에서 서북쪽으로 약4km 되는 지점에 있으며, 교룡산성 안에 있으므로 흔히
"산성절"로 부른다.
선국사는 685년(통일신라 신문왕5년)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할 때
남원소경(小京)이 설치되면서 함께 창건 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이곳에 용천(龍泉)이라는 맑은 샘물이 있어 절이름을 용천사로 했는데, 유사시 국운
의 안전을 빌고 아군의 승리를 비는 사찰이란 뜻에서 선국사라 개명한 사찰로서, 경내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4호인 선국사 대웅전(大雄殿), 민속자료 제5호인 선국사 대북과
민속자료 제27호인 교룡산성승장동인(蛟龍山城僧將銅印) 등의 문화재와 함께 선국사를
품고 있는 교룡산의 교룡산성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곳은 동학
의 성지며,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인 백용성 조사의 출가지 이기도 하여 매우 유서 깊은
문화유산이다.
그 밖의 연혁은 전하는 것이 별로 없는데, 다만 절은 창건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교룡산성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발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교룡산성이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현재까지 명확하지 않지만 예로부터 이 지역 뿐만 아니
라 국방의 요충지로서 큰 역할을 했던 것은 확실하다.
고려 말 빈번했던 왜구의 침략과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등 나라의 국운이 위태
로웠을 때마다 전라좌영(全羅左營)이 설치되었던 남원부(南原府)가 중심이 되어 곡성,옥과,
구례, 창평, 장수, 운봉 등 6개 군현에서 거둔 군량미를 전부 이곳 교룡산성 안에 저장하고
병력을 배치한 사실은 문헌에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이렇게 국가적으로 중요시되던 교룡산성이기에 이곳을 지키고 운영하기 위해 용천사,
곧 지금의 선국사가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국운의 안보를 빌고, 전쟁에서 승리하여 나라가 편해질 것을 염원하는 뜻에서
절이름도 용천사에서 선국사로 바뀐 것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실제로 현재 전하는 {교룡산성선국사법당상량문}을 보면 창건부터 산성과 절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사실이 보인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져 현재 대웅전에 보관된 {큰북}도 교룡산성 승군(僧軍) 수비대와 관련있는
유물일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절은 교룡산성을 지키는 본부로도 사용되어 수성장(守城將)과
별장(別將)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한창 때는 절에 300여명의 스님이 머물렀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1803년(순조 3년) 대웅전 등을 중건했으며, 1891년(고종28년)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1893년(고종30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이곳 동학의 접주(接主)였던
김개남(金 開男) 장군이 남원의 동학군들을 전부 모아서 교룡산성으로 들어가 선국사를 점령
하여 관군과 일대 접전을 벌였다. 그 때 건물의 일부와 10섬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컸던
장독이 부숴졌다고 한다.
근대에서는 1917년 현암(玄巖)스님이 중수했다. 최근에는 법능(法能)스님이 1984년 칠성각을
늘려지었고, 1991년 미륵입상을 세웠으며, 1994년 보제루를 중수했고 1995년에는 화장실을
새로 지었으며, 1998년에는 대웅전을 중수했고, 1999년에는 관음전을 중수했으며, 2002년에는
칠성각을 중수했다.
■성보 문화재
절에는 현재 대웅전. 관음전. 칠성각. 보제루 등의 전각이 있다.
교룡산성 동문으로 들어서 계곡을 따라 오솔길을 올라가면 얼굴 위로 보제루 처마가 보인다.
보제루를 지나 마당에 올라가면 서쪽에 대웅전 과 칠성각이 있고, 남쪽에는 ㄴ자형의 관음전
이 있다.
●대웅전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14호)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써 조선시대 후기에 지어졌다.
현재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은 처음 685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하지만, 지금의 건물은 물론 그 당시의 것은 아니고,
1803년(순조 3년)에 중건된 것이다.
기단은 자연석을 메쌓기 했고, 일반적 수법대로 초석은 자연석 덤벙주초를 사용했다.
기둥에는 민흘림이 있으며, 귀솟음 수법을 사용하여 추녀 끝의 곡선이 더욱 가볍게 느껴지
도록 했다. 추녀마루는 활주(活柱)로 받치고 있다.
앞면의 어간(御間),곧 가운데칸에는 삼분합(三分閤)의 빗살문을 달았고 옆면에도 동선(動線)
을 고려해서 외짝문을 달았다.
내부 구조를 보면 창방(枋) 위에는 기둥머리에만 공포를 얹은 주심포 양식으로써 내외2출목
형식이다. 또한 각 공포의 끝에는 쇠서가 장식되었고, 공포 사이의 공간에는 탱화를
그려넣었다.
내부의 불단에는 아미타삼존불상 및 지장보살상과. 삼세후불탱화. 지장탱화. 신중탱화
그리고 {큰북}과 중종, 현판 4매가 걸려있다.
아미타삼존불상은 몇 해전 복장(腹藏)이 나온 바 있다. 구슬과 시주기 등이 나왔는데,
시주기를 통해 조선시대 후기에 봉안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아마도 1803년의 중건 당시
조성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 그 복장물은 절에 전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다고 한다.
삼세후불탱화는 가로 177cm, 세로196cm로서 1778년(정조 2년) 순천 송광사에서 조성된 뒤
이곳으로 옮겨 봉안된 것이다. 그림을 그린 금어는 쾌윤(快玧). 복찬(福粲). 강운(講云) 등의
3인인데, 쾌윤 스님은 이 그림외에 1780년 순천 송광사 16조사진영, 1796년 선암사 지장보살
도. 신중도 등을 그렸으며, 특히 16조사진영은 복찬 금어와 함께 작업했다.
하지만 삼세후불탱화는 2000년 11월 12일 도난사고로 사라졌고, 현재 모셔져 있는 것은
2001년 9월 12일에 다시 모신 것이다.
그리고 신중탱화는 1929년에 봉인(奉仁). 완성(完惺). 법상(法尙) 금어 등에 의해 조성되었다.
현판은 1803년의 {법당신건기}와 1891년의 {칠성각창건기}, 그리고 1935년의 {축원문}과
1986년의 {금불사시주방명기}가 있다.
남원시 산곡동 교룡산성내 선국사(善國寺)에 소장되어 있는 ‘건칠 아미타불 좌상이 불상 속
에 보관되어 있던 복장유물과 함께 지난 7월 13일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 제1517호로 일괄
지정 되었다.
이번에 지정된 보물 제1517호는 건칠 아미타불 좌상 1구와 그 복장유물 1,158장으로 고려
후기 14세기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과 불교 인쇄사 및 서지학 분
야에서 중요한 자료 평가되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유행한 건칠기법으로 조성된 이미타불 좌상은, 체구가 장대하고
각 부의 비례가 균형감 있는 불상으로 착의형식이나 가사의 금구장식, 내의를 묶은 매듭의
표현 등 양식적으로 1346년 제작된 장곡사 금동 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과 같은 고려
후기 14세기 전반 불상들과 공통된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며, 재료가 건칠이라는 점은 이
불상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킨다는 평이다.
특히 현존하는 건칠상은 대부분이 보살상으로 그 수가 많지 않은데 선국사 아미타불좌상은
14세기 중반의 조각양식을 잘 보여준다는 점과 그리고 보기 드문 고려시대 건칠여래상이란
점에서 보물로 지정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
또한 아미타불 좌상에서 나온 복장물은 4세기말에서 15세기말에 제작된 인본다라니로
1,158장이나 된다. 이 인본다라니는 기존의 회화적인 도상 기법을 탈피하여 범자(梵字)를
원상(圓相)으로 배치한 관념화된 도상이란 점에서 불교사상과 관련하여 인쇄사 및 서지학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그 가치가 인정되어 아미타불 좌상과 함께 일괄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지 정 사 유
선국사 건칠아미타불좌상 및 복장유물
(善國寺 乾漆 阿彌陀佛坐像 및 腹藏遺物)
ㅇ 규격 : 불상 : 높이 132cm, 폭 93cm
복장유물: 세로 36.7~38.5㎝, 가로38~40.1㎝
선국사 건칠아미타불좌상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유행한 건칠기법으로 조성된 상으로,
체구가 장대하고 각 부의 비례가 균형감 있게 느껴진다.
상호(相好)는 원만하고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정상계주(頂上髻珠)와 중앙계주(中央髻珠)
가 있다. 어깨가 둥글고 가슴부분이 융기되어 있으며 측면 역시 두터워 풍부한 양감이 느껴
진다.
착의형식이나 가사의 금구장식, 내의를 묶은 매듭의 표현 등 양식적으로 “장곡사 금동 약사
여래좌상”(보물 제337호, 1346년 제작) 및 지금은 망실된 “문수사 금동여래좌상”(충남도 유
형문화재 제34호, 1346년)과 같은 고려후기 14세기 전반 불상들과 공통된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둥근 얼굴이나 왼쪽 어깨에서 접혀져서 늘어진 옷자락 모습은 1274년에 중수하고
1322년에 개금을 한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1274년 중수, 1322년 개금) 및 “화성 봉림
사 목아미타불좌상”(보물 제930호, 1362년 하한)과도 비교가 된다. 재료가 건칠이라는 점은
이 상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현존하는 건칠상은 그 수가 많지 않으며 대부분이 보살상이다. 따라서, 이 아미타불좌상은
14세기 중반의 조각양식을 잘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드문 고려시대 건칠여래상이란 점에서
보물로 지정할만한 가치가 있다 하겠다.
선국사 건칠아미타불좌상에서는 복장물이 발견되었는데, 일부가 유실되고 현재는 14세기
말에서 15세기말의 자료들만이 남아있다. 현존하는 인본다라니는 회화적인 도상이 나니라
범자(梵字)를 원상(圓相)으로 배치한 관념화된 도상이란 점에서 불교사상과 관련하여 인쇄
사 및 서지학 분야에서 중요한 자료이므로 불상과 함께 일괄로 지정하고자 한다.
건칠불(乾漆佛)
나무로 골격을 만든 뒤 옻을 입힌 삼베나 모시를 여러 번 감싸 몸의 윤곽을 만들고, 세부모습
(코 귀 입 눈 등)은 나무 가루에 옻을 섞어 만드는 독특한 불상이다.
표면이 도금된 사찰불상은 내부 재료에 따라 소조불(흙), 목조불, 석불, 철불 등으로 구분된
다. 국내에서 건칠불은 극소수만 존재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건칠불은 주로 14∼15세기경에 제작됐다. 몸체는 가벼우며 천을 사용했기 때문에 불상의 옷
주름, 얼굴의 선이 목조나 석조와 달리 유려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삼베나 모시를 겹쳐 가며 칠을 입혀야 하기 때문에 극도의 섬세함이 요구된다. 제작
에 돈도 많이 든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아미타불(부처)은 이미 성불하였음에도 열반하지 않고 현재 속에서 중생 구제를 위해 설법
하는 '영원한 현재불'이라는 의미이다.
아미타불은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이라고 부르는데 열반에 들지 않는 영원한 시간 속의
부처로서 수명이 무량하고 빛이 무량한 부처라는 뜻이다.
인본다라니(印本陀羅尼)
다라니는 석가의 가르침의 정요(精要)로서, 신비적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 주문(呪文).
범문을 번역하지 아니하고 음(音) 그대로 외는 일. 자체에 무궁한 뜻이 있어 이를 외는 사람
은 한없는 기억력을 얻고, 모든 재액에서 벗어나는 등 많은 공덕을 받는다고 한다.
선법(善法)을 갖추어 악법을 막는다는 뜻을 번역하여, 총지(總持)·능지(能持)·능차(能遮)라
고도 한다. 인본다라니는 인쇄한 다라니라는 의미다.
●선국사 대북(전라북도민속자료 제5호)
{큰북}은 {선국사 대북}이라는 이름으로 전라북도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 되어있다.
재질은 소나무이며 통목에 소가죽으로 겉을 둘렀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교룡산성을 관리하던 승병의 훈련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는 길이 102cm, 둘레 260cm,이다.
●관음전
팔작지붕에 ㄴ자 모양의 건물로서 규모가 매우 크며, 현재 요사로 사용하고 있다.
안에는 관세음보살상과 42수관음탱화 및 신중탱화, 그리고 부엌에 조왕탱화 1점이 있다.
42수관음탱화는 1940년에, 신중탱화는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듯하다.
●보제루
보제루(普濟樓)는 팔작지붕에 앞면 4칸, 옆면 2칸의 규모로써, 사찰 앞면의 오른쪽 끝부분에
옆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뒷면은 평지에서 바로 올라가게 되어 있으며, 앞면은 밑부분의
돌기둥과 윗부분의 나무기둥으로 세워졌다.
보제루는 사찰 누각의 일반적 용도외에 군사적 목적으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960년에 보제루 마루 밑에서 "교룡산성승장인(蛟龍山城僧將印)"이라고 새겨진 동인(銅印)이
발견되었는데, 이 도장은 산성을 수비하는 책임을 맡은 별장(別將)이 동학운동 때 동학군에
성을 빼앗기고 도망하면서 빠뜨리고 간 것이라고 한다.
이 동인은 {교룡산성승장동인(蛟龍山城僧將銅印)}이라는 이름으로 전라북도민속자료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에는 최근의 {관음전보수불사방명록} 외에 보제루와 선국사 중수에 관련된 현판 10매가
전하는데, 이 현판들은 선국사의 연혁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교룡산성승장동인(蛟龍山城僧將銅印)/전라북도민속자료 제27호
●기타
경내에 1991년에 세운 미륵입상 및 {미륵입상시주비}, {지군임공진섭영세불망비
(知郡林公震燮永世不忘碑)}, 그리고 칠층석탑과 석조가 있다.
※교룡산성(지방 기념물 제9호)
현재 남원시 산곡동에 소재한 교룡 산성은 남원지역 20여개의 산성 중 그 형태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성으로 백제때 신라와 대적하여 처음 쌓았다고 전하며 고려말 이 성계 장군
이 왜구를 맞아 싸웠고 임진왜란 당시 승장 처영이 크게 수축하였다.
교룡산성은 518m의 교룡산 중턱을 둘러싼 약 3km의 규모로 높이 4.5m, 성안에 우물 99개,
치첩 1,016개, 그 밖에 군창과 무기고가 있었고, 동, 서, 남, 북 4대문이 있었으나 현재
동문(홍예문) 과 동서간 남벽이 남아 있다.
또 성안에는 별장청, 장대, 곡성창, 구례창, 염고, 장고, 군기, 산창 등 군사시설과 전쟁
에 대비한 각종 저장고등이 있어 정유재란시 남원도호부 관내 운봉, 장수, 임실, 구례,
곡성, 담양, 옥과 등의 양곡을 거두어 교룡산성에 보관하였는데 정유재란시 교룡산성이
파괴돼 98년부터 연차적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
/
/
/
/
▶찾아 오시는길 안내
①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우
현지교통 : 남원시내에서 택시이용 / 10 ~ 15분소요
남원 공용버스터미널 / 10 ~ 15분소요 063-633-1001
남원역 → 전라선 무궁화호, 새마을호 이용, 남원역 하차 / 택시 이용 / 10분 소요
KTX 도 남원 정차합니다.
남원고속터미널 → 서울강남터미널과 인천 연결 됨 택시 이용 / 15분 정도 소요
② 자가용을 이용하는 경우
도로안내 : 전주 -> 17번 국도 -> 춘향터널지나 서남대학에서 500m쯤에서 우측방향으로
순천, 곡성 방향으로 나와 직진하다 1.5km정도 지나 교룡산성 쪽으로 나와
교룡산성 이정표따라 우회전해서 오시면 됩니다.
경남권에서 오실때는 부산쪽에선 대진고속도로 타고 오시다가 함양 나들목에서
88고속도로 광주방향으로 오시다가, 남원 나들목으로 나오셔서 우회전
교룡산성, 만인의총 이정표 따라 오시면 됨,
대구에서는 88고속도로, 남원 나들목으로 나오시고요.. 우회전해서 오시다가
남원시내 -> 고속버스사거리 직진 -> 시청삼거리 직진 -> 삼성병원오거리 우회전해서 직진 ->
500m정도 지나 다리건너 좌회전 -> 남원중고등학교 -> 만인의총 우회전 ->
지리산하이츠콘도 앞을 지남 -> 우회전 -> 교룡산 관광지 -> 교룡산성 하차
혹시라도 그냥 지나쳐서 시내로 들어가시게 되면 '교룡산성'이라는 이정표만 찾아서
오시면 됩니다.
어느쪽에서 오시든지 시내에서 교룡산성이라는 이정표는 쉽게 찾을수 있습니다.
교룡산성에서 걸어서 10 여분 정도 올라 오시면 됩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선국사 063-625-7222
휴대폰 011-399-7335
멜주소 : 3D3Ds590150@hanmail.net">3Ds590150@hanmail.net">3Ds590150@hanmail.net">s590150@hanmail.net
방문하실분이 계시면 미리 멜이나 전화주시고 오십시요.
집에서는 휴대폰 사용을 잘 안합니다.
또한 주행중에도 휴대폰을 받지 않습니다. ()
카페 게시글
♣---공지사찰소식
선국사 연혁과 찾아 오시는 길 안내
다음검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