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지난 9일은 568돌을 맞는 한글날 이었다. 그 과학성과 우수성으로 지구상의 모든 문자 중 최고의 찬사를 듣는 한글. 국력 신장의 원천으로 평가받고 있는 한글의 현재 위상과 민족의 운명과 궤를 같이 한 한글의 부침을 짚어보고 한글을 지켜내기 위해 헌신했던 선각자들, 운동가들을 살펴보기 위해 40여년을 한글의 지킴이로 보낸 ‘국어문화운동실천협의회’ 이대로 회장을 만나 보았다. 인터뷰는 지난 10월 8일 한글문화세계화추진본부 사무실에서 있었다. -한글날 행사 준비로 바쁘시겠다. 해외로부터 한글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는데,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설명해 달라. “글자의 발달사를 보면 그림글자->뜻글자->소리글자 순으로 발달해 왔다. 소리글자가 최신글자이고 좋은 글자인데 영어를 포함, 대부분의 유럽과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문자로 로마자(Roman script) 혹은 라틴문자(Latin script)라고 한다. 로마자는 한글과 같은 소리글자이다.
그런데 언어학자들은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기능면에서 로마자보다 한글이 더 우수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영어와는 달리 한글은 창제과정에서부터 과학성에 이르기 까지 명확하다. 한글은 목구멍소리 같은 신체구조를 따라 과학적으로 만들어져 ‘ㄱ’에 한 획을 더하면 ‘ㅋ’가되는 것처럼 ‘가획원리(加劃原理)’라는 과학성이 있고 체계가 있다. 반면 로마자는 사용한지 천년 이상이 되지만, 과학적 원리가 없고 만든 사람이나 글자와 소리의 체계도 명확하지 않아 수없이 개선되어 왔으며 과학성이 아닌 ‘규칙’에 의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로마자 'A'는 단어가 쓰이는 경우에 따라 8가지 이상으로 소리가 난다. 'Apple'이라 할 때는 ‘에(애)’로, 'Father'라고 할 때는 ‘아’로 발음해야 하기 때문에 소리글자로 정확하지 않아 비과학적이다. 반면에 한글은 ‘아’는 그냥 ‘아’로 소리 난다. 더구나 한글은 창제자가 세종대왕이며 창제 목적도 뚜렷하게 ‘애민사상’에 철학적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극히 과학적이다.“
이 회장은 우리가 지금 개발하려하고 하는 음성인식에 한글이 가장 적합하며 그 때문에 ‘구글’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면서 한마디로 한글은 ‘돈 덩어리’인데, 이러한 한글의 우수성을 무시한 채 한자병용을 외치는 정부의 정책을 거세게 비판했다. “또한 한글은 인터넷과 컴퓨터시대에 에 아주 적합하다. 같은 소리글자인 일본어도 표현의 한계로 한자와 로마자를 혼합하여 사용하고 있다. 한글은 사용하지 않는 4개의 글자를 뺀 24자만으로도 무려 11,172자를 표기할 수 있다. 사용하지 않는 네 글자는 우리가 한글을 쓰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글이 세계로 진출하자면 네 글자를 쓰는 것이 좋으며, 그렇게 될 경우, 표한하고 소리 낼 수 있는 글자가 무려 수십만 개에 달한다. 일제말기 때부터 주시경선생과 한글을 살리자는 분들과 오늘날 그 분을 따르는 한글운동가들도 사용하지 않는 네 글자를 살리자 했으나 사용 빈도가 낮아 현실화되지 못했다.
한글의 우수성은 국내는 물론 유엔에서도, 국외의 학자들에 의해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유네스코에서는 1889년부터 ‘세종대왕 상’을 제정, 매년 세계의 문맹률을 낮추는데 기여한 개인과 단체에 상을 수여하고 있다. 영국의 문화학자 존맨, 독일 함부르크 대학의 사세 교수도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펄벅여사도 ‘한글은 세계 으뜸글자다.’라고 평했다. 이 외에도 해외로부터 많은 학자들의 한글 예찬론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 국어문화운동 실천협의회 '이대로' 회장 © 은동기 | |
-기독교가 한국에서 부흥하게 된 이면에 한글의 큰 역할이 있었다고 한다. “고종은 1886년, 조선 후기, 한국 최소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설립하고 헐버트 등 3명의 미국인을 교사로 초빙, 신식교육을 시작한다. 한글을 배운지 일주일 만에 깨우치게 된 서양 선교사, 헐버트(Homer B. Hulbert)는 한글을 배운 후, 로마자보다 훌륭한 한글이 있는데도 백성들이 어려운 중국의 한문을 쓰고 있는데 대해 깨달은 바 있어, 3년 만인 1890년에 최초의 한글로 만든 세계역사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펴낸다. 사민필지는 서문으로 시작, 우주, 지구, 5대륙의 지리, 산업, 정세, 종교, 나라의 특징 등을 적고 심지어 대마도가 조선의 땅이라고 까지 적고 있다. 또한 그와 서양 선교사들은 한글 성경을 펴내면서 맞춤법과 띄어쓰기 등 국어문법 발전에 크게 공헌, 한글 범용의 시발점이 된다.“
한글이 빛나는데 기독교가 최고의 수훈을 세웠고 역으로 한글이 기독교 전파에 날개를 달아주며 한글과 기독교는 공생한 셈이다. 헐버트는 한국의 말과 글에 대해 최초로 체계적 연구와 한글의 우수성 및 세종대왕의 위대성을 국제적으로 소개, 한글사용을 주창하고 독립신문 창간에도 기여했다.
청나라가 기울면서 1895년에 반포한 공문서 사용에 관한 칙령 1호에서 고종은 한글 창제 당시부터 ‘언문’이나 ‘암클’이라고 천대받던 한글을 처음으로 국문(國文)이라고 명명하고 처음으로 나라글자(國字)로 인정했다.
주시경은 한글로 교과서도 만들고 서재필과 함께 독립신문을 만든 육영공원과 배재학당 교사를 지낸 미국인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서양 언어학에 대한 식견을 넓힌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면서 주시경은 본인 이름도 ‘한뫼’라 짓고 딸과 아들도 우리말로 이름을 지어 주는 등 한글을 사랑한 선각자들의 몸부림친 역사가 있다.
▲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한 헐버트박사 부조상 © 은동기 | |
헐버트박사는 1886년 우리나라 최초 신식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와서 한글과 한국문화에 반해 한글학자, 역사학자, 교육자, 대한독립 운동가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한국인보다 한국과 한글을 더 사랑한 그는 '양화진선교사묘원' 묻혀있으며 이번 한글날 기념식에서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 받을 예정이다. 그 이면에 전택부선생과 이회장의 숨겨진 얘기가 있다.
이대로 회장은 YMCA의 전택부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네가 꼭 할 일이 있다.”면서 한글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선생을 얘기하며 “이렇게 훌륭한 분이 계시는데 세상이 모른다. 꼭 알려라”고 간절하게 말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 회장은 그 후, 헐버트선생에 관한 자료 등 그의 업적을 수집하여 그의 공헌을 세상에 알리는데 힘썼으며 이번 한글날에 금관문화훈장을 받도록 추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세종문화회관 뒤, 경희궁의 아침 3단지 건물 바로 앞쪽의 건물이 주시경선생이 살던 집터로 ‘주시경 마당’이 조성되어 있고 주시경선생과 헐버트선생의 부조상이 있다. 헐버트는 고종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주시경선생과 함께 영어와 한글로 독립신문을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한글의 훌륭함을 헐버트같은 서양 사람들이 일찍이 깨닫고 한글로 성경을 만들어서 선교를 잘 했고, 주시경같은 조선인 선각자들은 지구상 가장 우수한 글자인 한글이 널리 퍼지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 셈이다. 그리고 이대로회장을 포함한 수많은 후배 한글운동가들이 20대 젊은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세종의 뜻을 받들어 한글을 국내는 물론 해외에 알리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 열매가 다름 아닌 국력의 신장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류’는 ‘한글’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세계는 지금 한글에 열광하고 있다.
▲ 한글날을 준비 중인 이대로 회장 © 은동기 | |
-20대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글운동에 전념하신 것으로 안다. 그 계기와 과정을 간단하게 말씀해 달라. “나는 충남 서산에서 6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60년대에 예산농고를 다녔다. 예산농고는 지역적으로 매우 농촌운동 의식이 높은 지역으로 나의 의식세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형제들을 모두 고등학교까지만 가르치겠다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로 한 나는 예산농업고등학교 재학 중, 64년부터 정부가 교과서에 한자 혼용을 하면서 사고의 혼란을 겪게 되고 나의 의식세계에 전환이 이뤄지는 계기를 맞게 된다. 농업수업 시간인데도 농업에 관한 공부보다 생경한 한자공부에 매달려야 했던 나는 대학을 가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고 고향 선배 이태규박사(후에 KAIST를 설립함)와 농촌운동가 한인수 고교 선배 강연을 들으면서 대학에 가서 사회개혁 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동국대 농대에 진학하면서 대학 재학 중, 국어운동대학생회를 조직하고 한글운동을 시작한 것이 내 한평생의 삶이 되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한국 현대사에서 위정자들의 편견과 친일인사들로 인해 갈지자 횡보를 이어왔다. 1964년 당시, 정부는 미군정 때부터 한글로만 표기된 교과서를 일제강점기처럼 한자혼용으로 바꾸고 1963년에는 ‘이름씨, 그림씨’같은 순 우리 한글 토박이말을 ‘명사, 형용사’ 같은 일본식 한자말로 쓰도록 강요했다.
박정희대통령 당시, 이대로는 서울의 젊은 대학생들과 함께 한글운동을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펼쳐 나가며 이은상, 한갑수 등 선배들과 힘을 합해 외연을 넓혀나갔다. 그런데 민족의식으로 각성되고 의병처럼 일어난 젊은 대학생들의 한글운동에 의외로 박대통령은 귀를 기울였고, 1970년부터 교과서를 한글로 출판하게 했고, 1968년에는 광화문의 현판도 한글로 바꿔 써서 달게 했다. 또한, 국회의 휘장과 명패도 한글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가 군을 제대하고 돌아와 보니 다시 친일 반민족 세력에 의해 일본식 한자 혼용정책으로 전환, 국회 휘장이 다시 한자로 바뀌고 광화문 한글현판도 2010년에 한자로 되돌리고, 군정 때부터 휴일이었던 한글날도 1990년부터 법정 공휴일에서 삭제당해 있었다. 이에 이대로는 동료들과 함께 다시 1972년에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를 조직, 한글쓰기 반대 세력에 맞서 오늘까지 싸워 온 결과, 광화문 현판만 제외하고 모두 원 상태로 되돌려 놓은 셈이다.
이 회장이 함께 일해 오고 있는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에서는 금년 한글날에 ‘한글으뜸 지킴이’로 국회를, ‘한글 으뜸 훼방꾼’으로 한자교과서 혼용 병기를 내세우는 ‘교육부’를 선정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 70대를 바라보는 수많은 ‘늙은 한글운동가들’이 젊었던 시절에 혼신을 기울였던 한글 전용운동의 ‘숨겨진 이야기들’은 ‘한글의 역사’가 되었고 그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오늘의 국운을 융성케 한 밑바탕에 세종대왕의 ‘한글’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헐버트선교사, 주시경, 최현배선생 등 수많은 국어학자와 국어운동가들, 그리고 민족운동 차원에서 한글을 지켜냈던 수많은 젊은 ‘한글운동가’들의 헌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듯하다.
-글로벌 시대에 왜 한글인가?“세계화 시대이기 때문에 한글을 써야한다. 우리문화가 꽃을 피우지 못해서 대동아공영권이나 중화사상이 발호했으며 우리는 외세에 눌러 살았다. 우리 일상에 외국어가 너무 깊이 침투해 있는데 그게 바로 ‘얼’이 빠져서 그렇다. 김영삼대통령은 1993년에 영어를 권장하고 조기교육 시키는 등 민족 말살과 같은 짓을 했다. 세종대왕을 존경한다면 한글을 쓰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영어가 세계의 대세라면 안중근의사, 김구선생 등은 왜 독립운동을 했겠는가? 우리가 한글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국력이 신장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대학생 때, 10명에 글 아는 사람들이 2명 정도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글 덕분에 문맹률이 세계 최저 수준으로 낮아졌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제 권리를 찾게 하자는 뜻이었다. 즉, 깨어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민주주의, 경제, 문화가 이만큼 신장되고 발달한 것은 우리에게 한글이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잘 자라도록 하려면 토양과 밑바탕이 좋아야 하고 씨앗이 좋아야 하듯 민족이 융성하려면 모든 부문에서 한글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한자혼용 주장 뒤에 일본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 회장은 국어운동을 큰 틀에서 민족운동으로 인식하고 일찍이 반민족문제연구소(지금의 민족문제연구소) 초기에 후원회를 조직하고 조직위원장을 맡으며 초석을 다지는데 기여한바 있다.
이 회장은 한자병기 정책에 대해 “한자병기는 일제가 심어 놓은 민족의식 말살 교육정책의 찌꺼기”라면서 “지금 일본이 큰소리치는 것은 한국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일본이 가르친 대로의 친일의 뿌리가 득세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하고, “한글 관련 사업을 좀 해보려고 하면 친일세력들이 들어와서 판을 흐트려 놓는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영어교육의 과잉현상에 대해서도 또한, 미국의 문화 침략으로 규정짓는다.
-미대사관은 왜 한글날을 축하하나?“캐슬린 스티븐스(한국명 심은경) 주한대사 재직 시, 국회 외통위에서 북한문제와 통일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스티븐스대사의 표정이 어둡고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스티븐스대사는 1975년부터 1977년까지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한국 체류 중, 충남 예산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으며 한국인과 결혼했다."
외통위가 끝나고 질의시간에 이회장이 일어나 스티븐스대사에게 “왜 지난 한글날에 미국대사관이 축하 플레카드를 달았느냐?”고 물었더니 주위에서 “왜 이런 자리에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사회자가 불편함을 드러내자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티븐스대사가 얼굴에 생기가 돌며 말하기를 "참 좋은 질문이다."라면서 "대사관 앞에 세종대왕 동상이 선 것이 너무 좋다. 한글날을 축하하는 것은 우방국으로써 당연하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세종대왕이고 한글이 너무 훌륭하다. 이것이 내가 한국을 무시하지 않고 존경하는 이유이다."라고 힘 있게 대답하는 바람에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바뀌고 모두들 좋은 질문을 했다고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회고하면서 "이렇게 한글은 외국인도 알아주는 우리 자랑이고 자존심이다.“라고 강조했다.
-한글문화특구, ‘한글마루지 사업’이란?“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려 서울과 한국의 문화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서울시 관계부처 담당자와 만나 세계가 부러워하는 문화적 자산인 한글을 통한 문화관광특구 조성에 관해 협의했고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냈다. 이 사업은 주시경 생가터, 세종대왕 태어난 곳, 한글학회, 글자마당, 주시경과 헐버트 부조상, 광화문 광장 조성 등을 통해 한글 관련 시설이 풍부한 세종대로 일대를 한글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관광 중심지로 조성하는 사업으로 부분적으로 완성도 시켰고 진행 중이기도 하다.”
▲ 한글마루지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한글 글자마당 © 은동기 | |
-해외에서 한국어 열기와 위상은 어느 정도인가?“세계의 각종 언어 관련 공식적인 통계 자료를 제공하는 세계적 언어정보 제공 사이트인 '에스놀로그'(Ethnologue,http://www.ethnologe.com)는 5천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세계의 언어 순위에서 한글을 종전 18위에서 13위로 상향 조정했다. 비교하자면, 51개 국가에서 사용하는 프랑스어(14위)보다 더 많은 세계인들이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어 능력시험에 전 세계 61개 국가에서 16만여 명이 응시할 정도로 한글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동남아는 물론 서구에서도 한글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에서 한글을 가르쳐 본 경험이 있는 내가 본 중국의 젊은이들은 머리도 좋고 똑똑하다. 한마디로 중국은 ‘무서운 나라’이며 불현 듯 ‘우리 살아있을 때, 기틀이 튼튼하게 다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계의 한국어 열풍은 대단하다”
20대 젊은 시절부터 시작하여 40여년 이상을 미친 듯이 한글운동에 전념해 온 이대표는 “지도층과 학자, 지식인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세종대왕과 한글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렇듯 오늘도 수많은 ‘이대로’들은 독립운동 하듯 한글운동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아직도 그가 할 일이 산적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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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국어문화운동실천협의회 회장 약력] 1967년 동국대 국어운동학생회 창립 초대회장
1968년 전국국어운동대학생회 초대 감사
1972년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초대회장
1989년 한말글사랑겨레모임 창립 대표
1998년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창립 공동대표
2003년 한글날국경일제정범국민운동추진회 사무총장
2007년 중국 절강월수외대 한국어과 교수
2009년 한글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운영위원장
2009년 한글학회 부설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2010년 한글날공휴일추진범국민연합 상임대표
2013년 언어문화개선범국민연합 공동대표
2014년 국어문화운동실천협의회 회장
이대로 회장은 지난해까지 ‘한글학회’ 부설 ‘한말글문화협회’ 대표를 맡는 등 여러 한글관련 단체들과 직.간접으로 함께 일하고 있다. 한글학회는 한글학자들과 국어독립운동을 하는 한글운동가들이 같이 하던 단체로 1908년 주시경선생의 주도로 제자들인 최현배 등 젊은 사람들 중심으로 국어연구학회를 만들었지만, 나라가 망한 후, 일제 때 ‘조선어학회’로 부활했는데, 후에 한글학자인 최현배는 안호상, 김법린, 이은상, 백낙준 들과 북으로 간 이극로, 김두봉 등과 함께 한글운동을 펴 나갔으며 이들은 갖은 핍박을 받아 감옥에 가기도 했다.
광복 후, 그 맥을 YMCA맨인 전택부회장, 세종대 설립자인 주영하 등이 ‘한글문화협회를 창립, 이어 오다가 근래에 ‘한말글문화협회’로 개칭한 뒤에 이대로 회장이 대표를 맡고 한글날을 공휴일로 제정하고 서울시에 한글마루지 사업을 하게 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