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경주 양동마을과 서백당 풍수적 분석
1.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말한 양택 명당이란?
조선 중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전국의 현지답사를 토대로 편찬한 택리지(擇里志)란 지리서에서 가거지(家居地)의 조건으로 6가지 사항을 제시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수구(水口)이고, 그다음이 야세(野勢), 그다음이 산형(山形)이며, 그리고 토색(土色)과 수리(水理), 조산조수(祖山朝水)를 순서대로 나열하였다.
6가지 사항 중에서 풍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수구(水口)와 산형(山形), 조산조수(祖山朝水) 등이고 나머지 조건은 오늘날 부동산 입지선정과 관련이 많다. 야세는 일조량과 일조권을, 토색은 양질의 땅을, 수리란 마을과 양택 주변의 물길과 도로와 관련이 깊다. 그리고 조산조수란 마을을 잇는 산세와 명당 안의 물길과 연관성이 크다.
택리지에서 수구(水口)의 중요성을 이렇게 나열하였다.
「..무릇 수구가 엉성하고 널따랗기만 하면 비록 좋은 밭, 만 이랑과 넓은 집, 천 간이 있어도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수구가 꼭 닫힌 하수사(下水砂)의 유무를 먼저 판별하고, 그 안과 밖으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지를 눈여겨보고 구해야 한다. 그러나 산중이라면 수구가 닫힌 곳을 구하기가 쉽지만, 들판에서는 수구가 굳게 닫힌 곳을 찾기가 어려우므로 반드시 거슬러 흘러드는 물(逆水)이 있으면 충족할 수 있다. 높은 산과 그늘진 언덕, 또는 횡수(橫水)나, 역수(逆水)로 흘러드는 물이 힘 있게 판국(版局)을 가로막는 형세라면 가거지로 좋은 곳이다. 막은 것이 한 겹이라도 진실로 좋지만 세 겹, 다섯 겹 등 겹겹으로 감싼다면 더욱 크게 좋다. 이런 입지를 구비 하면 완전하게 오랜 세대를 이어 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 택리지 복거총론 지리편-
바로 이러한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한 마을이 이곳 양동마을이다.
2. 양동마을과 서백당
양동마을의 입지 조건을 보면 북(北)에서 남(南)으로 흐르는 기계천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형산강이 마을 입구에서 합수(合水)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포항을 지나 동해(東海)로 들어간다.
두 개의 큰 하천이 만나 유속이 느려지고, 이로 인해 상류에서 실려 온 퇴적물이 쌓이면서 기름진 안강 들녘을 만들어 이곳 들에서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어 양동마을이 오랫동안 안정된 주거지로 지속되었다. 마을의 수구(水口)가 좁고 구불구불한 구곡수(九曲水)로 흘러야 하는 것은 수구가 좁아야 급하게 쏟아지는 물길을 막고, 구불구불 물이 흐른다면 높낮이가 없는 평탄한 들판을 물길이 지나는 동안 자연히 유속도 느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기(大氣)가 일구는 바람 외의 자연이 만드는 자생풍(自生風)도 수구사(水口砂)가 생략되거나 물길이 직거수(直去水)로 흐른다면 물길을 따라 역(逆)으로 부는 바람이 마을 안까지 불어닥친다.
그리고 유속(流速)이 느리면 상류의 퇴적물 등이 쌓여 농토가 비옥(肥沃)해지고 물살도 급하지 않아 토사(土砂)의 유실이 적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 마을의 원형을 보존할 수 있다.
양동마을의 경우 동네 어귀에서 양수(兩水)가 합수(合水)되는데 강수량이 많을 경우, 물이 넘치는 등 홍수피해를 예상할 수 있다.
그래서 이곳 마을의 서백당과 관가정, 향단 등 중요 주택들은 대부분 높은 곳에 조성되어 안산(案山)과의 높낮이가 적절한 고도를 유지하고 물길의 피해를 사전에 방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낮은 동내 입구는 서민들의 주택이 배치되어 반상(班常)에 따른 집의 위치나 높낮이가 서로 다르게 배치되었다. 즉 안동의 하회마을도 물가 쪽에는 대부분 서민주택이 배치되고, 양진당이나 충효당 같은 양반댁은 마을 안쪽으로 비교적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이곳 마을과 유사한 배치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서백당이나, 관가정, 향단처럼 높은 곳에 있는 집들은 주변 하천이 범람해도 물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었을 거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유추하면 양동마을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말한 사람이 살만한 가거지의 조건을 충분히 갖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디.
그리고 풍수적 갈형(喝形)의 관점에서 양동마을을 형성하는 산자락을 보면 ‘물(勿)’자 형상으로 유추할 수 있다.
동네가 위치한 언덕과 계곡 등이 마치 말 ‘勿’자 모양을 갖추고 있어 물자형(勿字形) 명당이란 명칭이 등장한 것이다.
양동마을의 전반적 입지는 주산(主山)인 설창산(雪倉山, 161m)에서 갈라져 나온 4개의 지맥(地脈) 사이사이에 집들이 들어서 있다.
양택지에 있어 ‘물(勿)’ 자형 형국의 의미는 ‘勿’ 자가 지닌 글자의 뜻으로만 보면 특별한 풍수적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지만, 글자의 모양처럼 능선을 이루면서 좌우(左右)를 잘 감싸는 모습이 되어 상대적으로 바람의 영향을 막을 수 있고 풍수적으로 보호사 역할을 한다.
즉 ‘勿’자 형국의 장점은 4개의 언덕과 같은 능선이 바람을 막아주는 담장 역할을 하여 바람과 추위의 영향을 덜 받는다고 본다.
‘물(勿)’ 자를 쓸 때, 획의 순서에 따라 1, 2, 3, 4번으로 번호를 붙이면 글자가 처음 시작되는 곳이 이곳 마을의 진산(鎭山)인 설창산이다.
그리고 1획이 끝나는 지점에 관가정이 위치한다. 그중에서도 관가정은우측 능선에 위치하며, 향단은 1획의 좌측 능선에 자리 잡아 향단에서 보면 관가정이 있는 산등성이가 백호의 역할을 한다.
여강이씨(礪江李氏) 종택(宗宅)인 무첨당은 3획의 능선에 위치하여 1획이 우백호가 되고. 4획과 2획이 좌청룡이 된다.
서백당은 4획이 안산(안채의 안산) 겸 백호가 되고 2획이 크게 감싸면서 청룡의 역할과 함께, 사랑채의 안산이 된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서백당이 다른 집보다는 잘 감싸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양동마을 중에서도 월성손씨 종택이면서, ‘손동만 가’ 로 알려진 서백당이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특히 서백당은 세 명의 현인(賢人)이 탄생한다는 삼현지지(三賢之地)로 알려졌는데 그중 2명은 이미 태어났고 이제 남은 한 명에 대하여 기대를 하고 있다.
이미 태어난 2명은 우재 손중돈(孫仲墩) 선생과 월성손씨(月城孫氏)의 외손(外孫)인 여강이씨(礪江李氏, 驪州李氏) 회재 이언적(李彦迪) 선생을 말한다.
양동마을을 풍수적으로 관찰하고자 하면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본다면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저 집구경으로 그치고 만다.
따라서 양동마을을 풍수적 잣대로 보려면 반드시 안산(案山)에 올라가 마을 전체를 살펴야 한다.
양동마을의 대표적 건물인 관가정, 향단, 무첨당, 수졸당, 서백당에 대해 안산에서 관찰한 결과를 기준으로 풍수의 대강을 보면 다음과 같다.
▶ 관가정(觀稼亭)
보물 442호인 관가정은 조선 성종 때 청백리인 손중돈의 고택이자 손씨 문중 종택으로 1514년(중종 9년)에 지었다.
관가정은 "勿" 字의 1획에 해당하는 능선 끝자락에 위치한다.
"勿" 字의 1획이면 글자의 제일 왼쪽에 해당하는 획이 되어 청룡은 여러 겹을 이루지만 백호가 전무(全無)하다.
따라서 좌우를 완벽하게 감싸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는데, 풍수에서는 청룡만 있고, 백호가 없는 것을 좌단제(左單提)라 하는데, 그림처럼 마을 입구의 능선에 있으며 백호가 없어 안강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취약하고 양택의 금기사항인 산등성이에 위치하여 좋은 모습은 아니다. 그리고 관가정 우측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기계천이 형산강과 만나는 합수처(合水處)까지 직출(直出) 하는 썩 좋은 모습이 아니다.
▶ 향단(香壇)
월성손씨 외손인 회재 이언적이 지은 집이다.
역시 "勿" 字의 1획에 해당하는 능선에 위치하는데 다만 능선의 안쪽에 있어 바깥의 관가정의 능선이 백호 역할을 하고 있다.
전체적인 국세로 볼 때 백호 쪽에 치우쳐 마을의 중심 터에서는 벗어나 있다.
▶ 무첨당(無添堂)과 수졸당(守拙堂)
무첨당과 수졸당은 이언적의 손자들 호를 따 지은 집이다.
"勿" 字의 3획에 해당하는 능선에 위치하며, "勿" 字의 1획에 해당하는 능선이 우백호에 해당하고 "勿" 字의 4획에 해당하는 능선이 청룡이며, 2획에 해당하는 능선이 외청룡이면서 앞으로 감싸고 진행하여 본신 안산(案山)을 일군다. 청룡과 백호가 잘 감싸는 모습이지만 마을의 중심은 아니다.
▶ 서백당(書百堂)
월성손씨 종택이면서 "손동만 가" 로 알려진 집이다. 서백당(書百堂)이란 명칭은 사랑채의 당호(堂號)이다.
서백당은 양동마을의 ‘勿’자 형국에서 가장 뒤쪽이고 배후지(背後地)에 위치하면서 이 마을에서는 풍수적으로 가장 핵심적 위치를 점했다고 볼 수 있다.
서백당은 여러 겹의 청룡과 백호가 감싸는 깊숙한 안쪽에 위치하며, 뒤에서 내려오는 세 겹의 맥이 파도치듯 힘 있게 내려온다.
‘서백당’ 으로 불리는 경주손씨 대종택은 20대에 걸쳐 55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서백(書百)’ 이란 뜻은 ‘참을 인(忍) 자를 100번 쓴다’ 는 의미를 담고 있어 10만 명에 달하는 손씨 집안 대종택을 이끌어갈 종손(宗孫)이라면 그만큼 참고 인내해야 한다는 뜻이다.
▶ 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
서백당은 양민공 송재(松齋) 손소(孫昭)의 아들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을 배출한 곳이다. 우재는 27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경상, 전라, 충청, 함경도 등에서 관찰사를 지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중종반정 직후 상주목사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그곳 주민들이 살아 있는 그를 사당에 모실 정도로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손중돈은 이곳 대종택인 서백당의 산실(産室)에서 태어났으며, 영남 성리학의 태두인 김종직의 제자로 역사적 인물이다.
조선 중기 학자인 이언적(李彦迪) 역시 외가인 서백당의 산실(産室)에서 태어났다.
이언적의 부친인 이번은 손중돈의 부친인 손소의 외동딸에게 장가를 들어 양동마을에서 처가살이를 하였다. 이번이 일찍 사망하자 그 아들들은 양동의 처가에서 성장하였으며, 그 둘째 아들이 바로 유명한 회재 이언적으로, 조선 18현에 오른 인물이다.
이언적이 대단한 인물이 되자 손씨 집 안에서는 '남의 가문만 좋은 일을 시켰다‘ 고 푸념 한다고 한다.
▶ 서백당의 산실(産室)
서백당은 관가정과 더불어 월성손씨의 대종가로 풍수적인 설화에 의하면 이곳에서 3명의 큰 인물이 태어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중 이미 태어난 두 명의 인물이 손중돈과 이언적이다.
지금도 손 씨 집 안에서는 시집간 딸이 해산하러 친정에 온다고 하면 손사래를 치며 다른 일가 집으로 보낸다고 한다.
즉 딸의 자식(외손주)이 이 집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 위인(偉人)이 나오면 그들이 기대하는 마지막 인물이 손씨 집안에서 나오지 못한다고 하는 이유이다.
▶ 도두맥(到頭脈)이 감싸는 일편(一片)의 터를 점한 서백당
서백당이 삼현지지(三賢之地)란 내용은 풍수적으로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우선 서백당이 물자(勿字) 형국의 핵심적 위치에 자리 잡았고, 고택 뒤로 둥근 도두(到頭)를 중심으로 팔을 벌려 감싸는 평평한 편(片) 안에 고택(古宅)이 조성되어 짱짱한 양기(陽氣)를 흡수하는 모습이다.
즉 “음택이란 산 능선에서 선으로 이어지는 일선(一線)의 맥에 혈처(穴處)가 형성된 1평 정도의 작은 공간이 혈심(穴心)에 해당하고, 양기(陽基)와 양택(陽宅)의 조건은 선(線)이 아닌 조각과 같은 일편(一片)의 평탄한 터를 이루고 국세가 관활(寬闊)한 곳이 적지(適地)다”란 지가서 고문(古文)의 내용이다.
▶ 양동마을을 일구는 설창산과 서백당 풍수
이곳 마을의 안산(案山)인 성주산에 올라 맞은편의 설창산에서 낙맥(落脈)하는 전체적인 세력(勢力)을 보면 활발하게 진행하는 내맥(來脈)이 돈복(頓伏)과 전환(轉換) 등을 하면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파랑맥(波浪脈)처럼 밀고 들어오는 생기발랄한 모습이 되어 양기적(陽基的) 역량이 대단하다.
그리고 서백당을 일구는 횡결맥(橫結脈)도 생동적인 모습으로 생기를 땅속에 다 감추지 못하고 지상으로 노출된 석맥(石脈)의 맥흔(脈痕)이 확연하게 산실(産室)로 이어지는 혈증(穴證)을 보인다. 아마 옛날에 지혜가 뛰어난 상지자(上智者)가 이러한 풍수적 혜안(慧眼)을 발휘하여 이 터를 삼현지지(三賢之地)라고 평가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서백당의 입지(立地)를 여러 각도로 살펴봐도 삼현지지란 이름에 걸맞은 형세적 조건과 함께 양택 풍수적 역량을 골고루 겸비한 터임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풍수지리연합회 회장 석초 채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