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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4일 하늘언어교회 강론
본문: 새번역성경 누가복음 10:30-34
30절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31절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2절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3절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34절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제목: 선한사마리아인과 선한사마리아주일
몇주 전에 기독교와 기독도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기억하십니까? 기억이 가물가물하시다고요? 하하 괜찮습니다. 다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교회가 발생하기 시작한 초창기에는 기독교라는 말이 없었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그 도를 따르는 무리”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 도”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도이므로 그 도를 한자로 표기하면 기독도(基督途)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초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교가 아니라 도라고 부른 이유가 뭘까요? 교는 사람을 교리화하고 시스템화해서 하느님의 도를 따르기보다는 종교의 관습을 따라 시계추 운동을 하게 만드는 역작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고방식이 틀에 박히고 율법화해서 좀처럼 참신한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늘 그리스도 즉 구세주가 오시기를 기다렸다고 말해왔는데 막상 예수님이 나타나서 하늘나라의 도를 전하시자 그 모든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바울도 종교의 상태에 있을 때 얼마나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했는지요? 이처럼 교의 상태에만 머물러 있고 도의 경지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없으면 그 교는 무도한 교가 되어 하느님이나 구원과는 아무 상관없는 폐쇄된 집단이 되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이 교와 도의 가장 확실한 사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를 죽도록 때려서 길가에 버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종교지도자인 제사장이 거기를 지나가다가 그를 봤는데 그냥 가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성전에서 섬기도록 지정받은 레위인도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봤는데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만이 그를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현대의 한국교회의 상황으로 말한다면 목사, 신부, 교인 등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기독교에 속한 이들입니다. 사마리아인은 현대 한국적인 시각에서 보면 비교인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이들은 모두 강도 만난 자를 지나쳤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종교의 체제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들이 오히려 하느님의 도를 따라 선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비록 기독교화되지는 않았지만 기독도화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 중 예수님이 인정하신 것은 기독도화가 된 사마리아인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하느님의 뜻을 살피지 않고 종교적인 관습에만 얽매여서 살면 이처럼 소중한 기독도의 본질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비유로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많은 이들이 습관적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에서 자기 자신을 빼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예외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행하고 실천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그냥 지나간 이유는 상황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성전에 가서 제사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성전에서 직접 동물을 바치던 시대에는 동물을 태워서 바치고 고기를 나누는 등 일손이 상당히 많이 들고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에서는 그러한 제사의식은 없지만 대신 예배 절차가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늦지 않도록 가정에서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깨워서 교회에 갈 준비를 시킵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 실랑이를 하거나 부부싸움을 하거나 아이들이 반항하는 등 난리도 아닙니다.
그리고는 능숙한 솜씨로 도로를 달려 교회에 도착합니다. 도착하기까지 도로상에서 보게 되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넘어져서 구조가 필요한 사람들, 장애인이나 노인들이 위태하게 돌아다니는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가는 일이 급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지각하지 않으려고 못 본체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게중에는 교통사고나 강도를 만나서 정말로 본문과 유사한 경우를 당한 이들도 있을텐데 그들이 구조를 기다리며 하는 일들이 참으로 본문과 흡사합니다. 교회 근처에서 쓰러져서 도움을 기다리는데 사람들은 많이 지나다니는데도 30분이 되고 1시간이 되어도 아무도 도우러 다가오지 않더랍니다.
왜 사람들은 그토록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도 선한사마리아인과 같은 선택을 좀처럼 하지 않는 것일까요? 하지 않는다기보다는 하지 못하는 상태에 묶여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봅니다.
종교화된 교회들은 하나같이 시간을 강조해서 정해진 시간까지 꼭 교회에 도착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주일에 교회 외에 다른 곳에 가는 것을 죄악시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건물을 중심으로 살도록 훈련하게 되면 주일에 교회에 가면서 최대한 딴짓을 하지 않게 되고 결국 강도만난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치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이 구절을 강해하면서 그러니까 우리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선하게 이웃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어느정도는 맞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선한사마리아인처럼 실천할 수 있는 준비된 능력은 아무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봤을 때 긍휼이 우러나오고 서슴없이 다가가게 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렇게 하려고 결심하고나면 십중팔구는 오래 못 갑니다. 그리고 다시 제사장과 레위인이 되어 집과 교회를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경로로 반복해서 시계추 운동을 하는 것으로 생활이 굳어지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 참으로 좋지 않은 양극단의 사고가 있습니다. 하나는 행위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으니 굳이 실천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말씀대로 다 순종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한국교회에는 이런 양극단의 사고가 굉장히 많습니다.
특히 목사님의 사고방식이 이 양극단일 경우 교인들은 몹시 고통을 받게 되거나 나태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양극단에 빠지지 않으면서 본문의 본질을 잘 살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그러한 길을 찾는 것이 바로 기독도화의 길입니다. 종교화는 아무 생각없이 왔다갔다만하면 되지만 진리화와 도화는 끊임없이 진지한 고민과 기도를 통해 어떻게 하면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공부하고 더 잘 실천할 수 있는 노하우 등을 배워나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적용할 때 고려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자체가 강도만난 사람인 경우도 대단히 많다는 점입니다.
저와 아내가 요즘 코로나에 걸려서 고생하는데 뉴스를 읽어보면 서울지역에서 물폭탄이 쏟아져서 사람이 하수도로 빠지기도 하고 반지하 주택에 갇혀서 일가족이 죽음을 당하기도 하는 등 세상에는 온갖 어려움으로 신음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따라서 아무에게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라고 강박하거나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각 사람의 상황에 따라서 가장 적절한 실천의 정도를 가늠해야 합니다. 만일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강도만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자기를 위한 힐링과 치유의 시간도 꼭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을 종교화하는 가장 전형적인 방법은 끝없이 반복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게 하는 것입니다. 원래 예배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진리화보다는 종교화에 치중하는 많은 교회들은 하느님의 뜻에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보다는 그냥 생각 없이 교회와 집 사이를 왕래하는 것으로 모든 의무를 다했다고 자위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들입니다. 하느님의 아들딸들이기 때문에 날마다 하느님을 닮아가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닮는 일이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을 너무 무리하게 추진하다가는 오히려 시험에 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만 왔다갔다하면 다 되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길이 하늘나라의 도를 따라 사는 길일까요? 선한사마리아인에게는 강도 만난 자를 물질적으로 돕고 감정적으로 불쌍히 여기고 사회적으로 완전한 곳에 의탁하는 등 모든 방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민은 강도만난 사람을 물질적으로 돕기는 고사하고 당장 밀린 부채 갚기도 벅찬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자기 자신의 미해결 문제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우울증이라는 강도, 의욕상실이라는 강도,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기 어려운 상황, 신체적, 정신적으로 왕따 당하거나 학대당하는 상황 등 세상에 강도 만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가지 문제로 강도만난 사람을 돕거나 본인 자신이 다양한 강도에 봉착한 상태일경우 어떻게 그것에 대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본분을 다할 수 있을까요?
우선 한가지 추천해줄 수 있는 방법은 교회에 습관적으로 출석하는 일을 자제하는 일입니다.
교회에 자주 모이는 이들이 주변의 강도만난 사람이나 자기 자신의 강도만난 상황을 제대로 케어하지 못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오직 교회만을 중심으로 살도록 세뇌받기 때문입니다.
교회나 성당에 간다고 해서 옳고 바른말만 들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설교나 강론도 사람의 말이고 해석이기에 수많은 오류와 부적절한 해석들이 판을 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완전한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완전하신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평등주의를 철저히 따라가야 합니다. 즉 목사든 신부든 고명한 철학자든 우리하고 다를 것이 전혀 없는 연약한 그릇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약간의 조언을 구할 수 있을 뿐이고 완전한 지혜와 해답은 오직 하느님께만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없이 시계추 운동을 반복하게 되면 하느님과의 진지한 대화가 없어지고 문제를 외면하고 보지 않으려는 아집에 빠질 우려가 높습니다.
이러한 아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한 사마리아주일을 지정해서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일을 쉬는 날로 정하면 여러가지로 유익함이 많이 있다고 봅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 중심이나 인간 목사를 의지하려는 태도에서 한 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건물과 사람을 넘어서서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하느님만을 의지해야 참된 기독도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를 빠짐없이 나가서 예배 절차를 반복해서 경험하면 나중에는 그런 경험을 겪어도 아무런 감동이 없고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이럴 때 한 달에 1-2회정도 선한 사마리아주일을 가지면 교회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을 회복할 여지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꽃놀이도 한두번이지 자꾸 같은 어조로 반복하면 우리의 뇌는 그것에 대해 참신한 감동을 못 받게 됩니다.
그렇게 얻게 된 소중한 시간은 아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진정으로 하느님 말씀대로 돌아가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교회순방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혼자서 성경을 깊이 읽고 기도하며 하느님과 깊은 교제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기독교와 기독도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교라기보다는 도라는 것입니다. 교는 종교단체에 열심히 왕래하기만 하면 오케이입니다. 그러나 도 즉 기독도는 꾸준히 하느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열매맺는 삶을 사는 길입니다.
오늘 제시한 본문의 비유는 교에 속한 사람과 도에 속한 사람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그냥 지나친 제사장, 레위인은 종교에 속한 이들이고 그를 돌보아준 선한 사마리아인은 도에 속한 사람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에 보면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왔다갔다하는 행위가 사람을 종교화하고 도화되지 못하게 가로막는 작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주일을 정해서 교회에 대한 습관적인 출석을 쉼으로서 여러가지 다양한 효과들을 볼 수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구절을 실천으로는 구원을 못 받는다고 해석해서 방종해도 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철저히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강도만난 사람은 다른 누구 아닌 자기 자신일 수도 있으며 그러한 자기의 문제를 잘 힐링하고 케어하는 길이 가장 기본적인 기독도의 길일 수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선한 사라마리아주일을 정하셔서 그날 교회순방도 해보고 혼자서 성경을 깊이 묵상하기도 하는 등 깊은 은혜로 들어가는 시간으로 일구어보시기를 권면해 드리는 바입니다.
금주의 메시지
1. 코로나19 격리 기간
저희는 지난 토요일(8월6일)에 병원에서 코로나판정을 둘 다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독한 약을 먹으며 자가격리를 시작했습니다. 목이 엄청 붓고 입맛이 망가져서 아무것도 맛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약을 먹기 위해 억지로 음식들을 먹고는 약을 삼켰습니다.
겨우 1주일을 보내고 다시 이비인후과에 가보니 아직 목이 너무 많이 부어 있으니 약을 꼭 계속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코로나가 초창기의 호랑이 수준에서 지금은 고양이 수준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위중증이 되는 등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아무에게나 고양이가 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는 드래곤 수준의 악몽이 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2. 코로나 격리를 위한 준비물 3개 이상의 베개, 상상적 청각, 고우림의 상상적 목소리
저는 평소에 베개를 세 종류 이상 구비해놓고 차례로 바꿔가며 베고 있습니다. 우선 가장 부드러운 보통베개, 딱딱한 지압베개, 아주 딱딱한 지압베개 등이 있습니다.
누워서 한소네로 공부할 때 이렇게 베개를 삼분법적으로 바꾸면서 책을 읽으면 뇌 혈행에 유익하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 격리중에 견디기 어려울 때마다 베개를 순환시켜서 사용해보니 견디기가 한층 수월해지는 듯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고우림의 성악하는 목소리도 상상 속에서 많이 활용해 보았습니다. 하필 왜 고우림이냐고 묻는다면 김연아선수 남편될 사람이고 전공이 성악이라는 것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서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활동 중에 노래만큼 값지고 아름다운 활동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저는 청력이 소실되어서 직접 음각을 들으면 잘 알아듣기 어려운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상상 속에서 음각을 재생하면 모호한 귀로 듣기보다 훨씬 깔끔합니다.
이래서 감각의 장애인들은 상상감각의 훈련을 자꾸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선한 사마리아주일(교회와 거리두기하는 주일)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교회의 반복적인 종교 행사에 생각없이 부응하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습니다. 적당히 거리두기를 할 줄 알아야 진정으로 종교중심 신앙에서 하느님 중심신앙으로 옮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부터 그런 교회 즉 출석하라고 요구하지 않는 교회로서 있는 듯 없는 듯 활동해가려고 합니다.
저희는 오전에 가급적 다른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오후에 오시기를 권면합니다. 오는 빈도는 매주마다, 매달 1-2회정도 등 다양하게 각자의 사정에 맞게 조절하면 됩니다.
하지만 코로나가 확산되고 있어 모임보다는 성도님들의 안전을 우선시하여 이렇게 온라인 강론을 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그 대신 교회에 자주 안 나오더라도 함께 교제하거나 좋은 것을 나누는 친교를 프로그램을 통해 구현해볼 생각입니다.
만물은 양면성, 다면성을 띱니다. 태양이 있어서 빛을 받지만 노화의 위험이 있습니다. 교회도 그것이 존재하는 한 순기능과 역기능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런데 역기능의 조짐이 보이면 목사든 교인이든 교회와 거리두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주변의 강도 만난 사람이나 자기 자신의 문제를 돌아볼 수 있고 교회의 유한성에 갇히지 않고 하느님의 무한성을 중심 삼는 신앙을 일구어갈 수 있습니다.
4. 코로나 투병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목이 너무 부어서 물 한모금 마시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저도 아내도 위중증이 아닐까하여 입원을 계속 고려했는데 결국 끝내 이겨냈습니다.
투병 중에 많은 분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힘과 격려를 아낌없이 보내주셨습니다.
성표 형제가 소식을 접하자마자 순대국밥을 사서 문고리에 걸어주고 갔는데 그 의리가 너무 큰 힘이 되어주었네요.
조샘이 보내주신 본죽도 도경 할머니의 밑반찬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하늘이와 하은이네 가족도 목 안 아프고 잘 넘어가는 음식들을 보내주어서 너무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하영엄마의 선물도 감사했고 여러분들의 격려와 위로의 전화와 문자들 모두모두 큰 힘이 되었습니다.
힘들고 외로울 때 힘 주신 기억들은 영혼을 치유하는 생명수입니다.
여러분 덕분에 이제는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저도 세상을 위해 기여하며 살길을 열어주십사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첫댓글 우리 주변에는 여러 형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즉 강도 만난 이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신문방송에서 자주 나오는 사건사고 뉴스 중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외면하고 자리는 떠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선한 사마리아인은 극소수이기에 미담이 되곤 하지요.
회피하는 사람들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도움을 주기란 쉬운일이 아니기에 어쩌면 나도 그런 분류에 속하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돕고 배려하고 함께 한다는 것은 불편과 희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외적인 성장이 부흥이고 선교활동이 전부라고 생각을 하는지 머리는 커졌고 돈이 그득해도 너무나도 인색하고 몸을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인이나 사회봉사하는 사람들 보기에도 창피할 정도이지요. 실천 없는 사랑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 나부터........
코로나후유증을 극복할 수 있게 충분히 쉬시고 몸에 도움되는 음식 많이 드세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종교인들이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서 교회로 가는 것은 그만큼 교회출석을 율법화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교회출석 자체를 우상화하지 않도록 선한 사마리아주일을 지정해서 그날만큼은 출석보다는 강도만난 사람을 돕거나 자기 자신을 강도만난 사람으로 간주해서 자기를 돕는 등 신앙의 본질을 실천하는 날로 삼아보자는 겁니다.
즉 교회출석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도록 거리두기를 하며 해야만 강도만난 사람을 외면하는 일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겠는가하는 것이죠.
한편 세상에는 강도만난 사람이 너무 무한하기에 인간의 힘으로 전부 돕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선 인간 자체가 죄라는 강도에 붙들린 존재여서 온 인류가 강도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과도하게 돕는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인 자체가 강도 만난 사람이기에 본인을 돕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2022년도 사회복지시설 평가를 받았는데 그동안 열심히 했고 선생님들의 헌신적이 수고와 준비가 있었기에 시설평가를 잘 받았습니다.
두 분의 기도와 사랑에 항상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징검다리가 시설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은 것 정말 축하드립니다.
원장님과 직원들이 한결같이 노력하고 성실해서 받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늘 너무 무리되지 않도록 늘 힐링과 휴식도 잘 챙기면서 일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우주인(조영찬)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