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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그후 그들이 사는 세상(5년후)
“엄마! 엄마!”
“기리우. 엄마가 경고했을 텐데.”
“리아도 그랬단 말이예요.”
“알아, 똑같이 혼날 거야. 어서 이리와.”
“아빠! 아빠!”
“에이. 리아 비겁하게 지금 아빠한테 도와달라고 하는 거야? 같이 잘못했으면 같이 혼나고 해결하는 거라고 했어? 안했어?”
“히잉... 아빠... 나는...”
분주하게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주리의 주변을 리우와 리아가 빙글빙글 돌면서 주리의 옷을 잡아 당겨서 하마터면 들고 있던 주방기구가 아이들에게 떨어질뻔했던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단단히 놀라고 또 화가 난 주리의 어조에 아이들은 겁을 집어먹었고, 그 와중에 도와달라며 손을 뻗은 둘째 리아에게 조곤조곤 스스로 해결하도록 두는 해율.
* * * * *
어느덧 5년이 흘렀다. 그리고 치료감호를 끝내고 사회에 발을 내딛는 복우리. 눈부시게 비추는 한낮 봄날의 햇살에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뜨고는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뱉어본다.
“드디어 끝났어.”
“우리야!”
“......!!”
“고생했다. 어서 가자.”
익숙한 차량 뒷좌석에 몸을 담는 우리. 치료감호를 받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 복우리의 표정. 또 뭔가를 구상하듯 머리를 굴리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 딸,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응. 없어. 나 갈 데가 있는데 이 근처에서 좀 내려줘.”
“집에 안가고?”
“어. 여기 가야돼.”
“엄마가 음식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많이 늦어?”
“아, 쫌! 그냥 세워달라고! 원래 친부도 아니면서 다정한척 굴지 좀 마. 역겨우니까! 세워, 당장!!!”
* * * * *
‘모르는 번혼데... 뭐지?’
“여보...!!!!”
익숙한 음성에 말문이 턱하고 막혀버리는 듯 한참을 휴대폰만 들고 듣고 있는 주리.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주리에게 다가가 휴대폰에 뜬 번호를 확인하고, 통화에 혹시나 방해가 될까 싶어서 입모양으로 누구냐 묻는 해율에게 꾹 다문 입을 쉽게 열지 못하는 주리.
상대방의 말이 끝났는지 통화를 끊고,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쉬듯 힘겨워 보이는 주리의 어깨를 감싸 쥐고 상태를 살피는 해율.
“나, 나가봐야 될 거 같아.”
“무슨 일인데. 같이 가.”
“자기는 애들이랑 좀 놀아주고 있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여보! 그렇게 사색이 된 얼굴로 누굴 만나러 나간다는데 내가 아무렇지 않게 갔다 오라고 할 수 있겠어. 뭐야, 무슨 전화야 어?”
한참을 고민하는 듯 입술을 꾹 다물고 손톱을 ‘툭툭’ 튕기듯 물었다, 떼었다를 반복하던 주리가 결심한 듯 해율에게 통화의 내용을 털어놓는다. 조금 전의 주리의 표정이 그대로 해율에게 옮겨진 듯 닮아있다.
“내가 갔다 올게. 여보 집에 있어.”
“아니야, 나한테 걸려온 전화였잖아. 괜찮을 거야.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할게. 걱정 하지 마. 응?!”
걱정스럽지만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해율은 주리의 말대로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 꼭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는 신신당부만 서너 차례 반복하고 나서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주리의 뒷모습을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고 선 해율.
* * * * *
“왔어?!”
“...어.”
“5년만이네. 결혼했다며.”
“어...괜찮아?”
아무렇지 않게 살갑게 구는 우리의 태도에 더 당황스러운 주리는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애써 뗘 보려고 노력한다. 그런 주리의 표정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들켜버린다.
“내가 그렇게 불편해?”
“아니... 좀... 편하진 않지.”
“그래, 그럴 수 있겠다. 그 생각을 내가 못했네.”
“.......”
“미안했어. 그동안의 일들.”
“......!!”
“5년이란 시간동안 치료감호 받으면서 계속 그 생각, 그 마음뿐이었어. 너한테 꼭 이 말을 하고 나야 나도 좀 편히,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우리야.”
생각했던 것만큼 나쁜 일은 생기지 않았다. 조금은 어색하고, 조금은 불편한 분위기는 있었지만 5년이란 시간동안 우리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마음의 짐이었던 사과라는 것을 해야만 홀가분해질 것 같아서 주리를 찾아왔다는 말에 조금은 낯설지만 나쁘지만은 않은 감정으로 마주하고 앉아서 얘기를 들어줄 수 있었다.
* * * * *
드디어 8년이란 길고 긴 연애의 종지부를 찍게 된 민기태와 은혜주. 결혼과 동시에 족보가 윗사람이 되는 혜주에게 ‘형님’이라 부르며 장난을 치는 주리. 찾아주는 하객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느라 경황이 없는 기태 곁에는 해율이 서 있다.
“시똘!”
혜주의 결혼소식을 듣고 유학중이던 승재가 오랜만에 모습을 보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동안 주리 언저리에서 맴도느라 승재 옆에 여자는 본적도 없던 주리와 혜주는 낯선 상황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우선, 인사해. 내 학창시절 친구들. 이쪽은 봉주리, 그리고 오늘 결혼하는 은혜주.”
“안녕하세요. 결혼 축하드려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니까 어떻게 된 거냐고. 나 결혼하고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이제야 나타나서... 그것도 한사람 더 데리고.”
“첫사랑 시집보내고 괴로워하다 우연히 알게 됐는데, 내가 왜 그때까지 봉주리한테 매달렸나 싶더라고. 은혜주 다음은 나겠네. 자, 받아.”
“어머, 웬일이야! 대박! 축하해 시똘.”
“축하해 시똘! 그리고 축하드려요. 진짜 미인이시네요.”
“감사합니다.”
* * * * *
5년이란 시간동안 한 사람은 마음의 치유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중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을 앞두고 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만큼 못 다한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다.
결혼행진곡의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있는 웨딩홀 안. 긴장이 많이 되는지 얼굴이 한껏 상기된 혜주는 기태의 손을 맞잡는 순간 안도를 하듯 표정이 편안해진다. 모든 것이 그렇다. 사람은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주기도 하고 또 불안을 안정으로 바꿔주는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시간이란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겠지만 또 다른 말로 하면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에 하루하루 살아내는 재미가 있는 거 라고도 말한다.
아직은 완벽하지 않을지언정, 언제가 완벽해지는 날이 올 거라 믿으며 우리 모두에게 웃음이 가득한 하루하루가 이어지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
‘가만히 있어! 내 사랑하는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