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꽃
정진명
봄비에는
물감이 들어있는지
젖는 대로 저절로 흘러나온다.
밤새 내린 비로
검은 가지에는 형광빛 초록이 돌고
때 이른 단풍은 뜬금없이 더욱 붉다.
겨울바람을 견딘 솔은 더욱 푸르고
바퀴 등쌀에 지친 아스팔트마저
제 검은 빛을 되찾는다.
꽃 중에 푸른 꽃은 없다지만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는 나무들은
하나하나가 푸른 꽃송이이다.
꽃이 될 수 없는 색깔로
나무가 통째로 아름다운 꽃이 되는
봄비 한 나절.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꽃은
푸른 빛깔일지 모른다.
한 송이 지구처럼.
2018.4.25.
4월 바다
4월 초록 손톱 가득 돋은 나무 밑은
잊은 꿈이 철썩이는 바다,
나는 눈망울 큰 물고기가 된다.
아주 오래 잊었던 등지느러미가 돋고
쥘부채 꼬리를 천천히 저어
가볍게 하늘로 날아오른다.
가슴에서 어린 별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황도나 백도 언저리
허블 망원경 속 12지신이 달려들고
물질 몇 번에 은하가 꺼졌다 켜진다.
아기 별이 늙은 별에게 폭죽을 터뜨리는 우주 저쪽에서
대님 같은 파도가 발치까지 밀려드는 오후
4월 푸른 물 번지는 나무 밑은
잊은 꿈이 철썩이는 바다,
하늘 끝까지 설레는 해류에 몸을 맡겨
시간 밖 별 사이로 떠간다.
2018.4.27.
연초록에 대하여
행복은 연초록 빛깔일지도 모른다.
삶에 답이 더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벼랑 끝을 밟고 선 4월의 끝,
가지마다 돋은 초록 손톱에서
공기 속으로 퍼져가는 눈부신 형광빛!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간이 다시 흘렀다.
사람들 사이로 굽이치던 숱한 초록 능선이
그대와 나의 어깨를 갈매빛으로 물들일 때
길은 목적지가 없어도 어디론가 흘러가고
삶 또한 답이 없어도 충분한 축복일 수 있음을,
다시 만난 연초록 입술이
또 다른 벼랑에 선 누군가에게 속삭일 것임을 믿는다.
걸어갈 길이 내 뒤로 따라온다.
연초록 가득한 저 허공 속으로 한 발 더 내딛는다.
솜털처럼 구름 밟으며 두둥실 떠오르는
지금은 4월의 끝,
걸음마다 연초록 물결이 퍼져간다.
2018.4.29.
다시 4월의 끝
다시 4월의 끝에 서면
고사리 손 다 편 잎사귀들 우르르 훑으며
물든 바람은 5월로 넘어가고
저만큼 여왕을 내려놓고 막 떠난 마차에서
하얀 나비떼가 점멸등처럼 흩어진다.
눈부신 4월은 늘 어두웠다.
거리 가득했던 외침들은
양지바른 언덕에 검은 비석 몇 줄로 비켜서고
골목까지 쫓기던 바람은
노래 몇 구절로 남아 추억의 언저리에 떠도는
지난 4월의 20년.
공원 벤치에는 푸른 그늘이
가슴의 구멍 속까지 엷게 깔려 시리다.
이제 4월은 다시 올 것인가?
남은 시간에게 물끄러미 안부를 묻는 저녁
일찍 핀 민들레 흰 꽃이
기운 햇살속으로 낙하산 펴는 지금은,
다시 4월의 끝.
2018.4.30.
정원수
정원의 나무들
상처로 몸을 일으켜세웠다.
솟으려다 잘린 키와
뻗으려다 깎인 팔들로
그불구불한 마디를 쌓아올려 천수관음처럼
바닥에 얇은 방석을 깔아놓았다.
어깨위로 나무의 관절염이 내려온다.
내 머리 쓰다듬는 손가락이
퉁퉁 부은 할머니의 뼈다.
거기서 한참을 떠나지 못한다.
할머니, 심청가 한대목 들려줄까?
심봉사 눈 뜨는 용궁에서
으이구 내 새끼, 할머니 눈시울이 촉촉해진다
먼 해류에 지느러미를 적시고온
인어의 눈꺼풀에서 산호빛 진주가 만들어진다.
사과
아침 사과는 금사과
점심 사과는 은사과
저녁 사과는 똥사과
내가 먹는 사과는
사과사과
사과나무 밑에서 똥누면
나무가 그걸 먹고
사과를 매달지요.
별이기에
정진명
툭 하고 끊어진 막다른 곳에서
신에게 길을 물었다.
신은 늘 침묵으로 대답했다.
가다보면 누군가
벌써 오래전에 마련해둔 길이었다.
또 다시 끊어진 길 끝에서 물었다.
이번에도 침묵이 돌아왔다.
긴 침묵 끝에서 별이 하나 돋았다.
그 별을 따라가다 보니
길이 생겼다.
눈을 감으면
침묵 너머 별 하나 돋는다.
길을 떠나야 할 때다.
신발끈 동이고 따라나선다.
별이기에.
2020.03.26.
별
정진명
아침이면 별은 사라지지만
낮에도 나는 별을 보려 한다.
찬란한 빛에 눈이 속는 순간에도
별은, 하늘에서 빛난다.
한낮의 거품 같은 욕망들이 꺼지는 밤에서야
별은 머리 위에서 빛난다.
밤에만 보이는 저 별을
낮에도 보려 애쓴다.
없어진 듯하지만 여전한 별.
한낮의 빛에 가려진 별이 그리우면
나무 밑에 앉아 눈을 감는다.
컴컴해질수록 별 더욱 빛난다.
2020.04.28.
반구대에서
정진명
정자 툇마루에 앉으니
돌거북 한 마리 100억 년째 엉금엉금 기어와서
개울 건너편에 멎었다.
공룡이 남기고 간 발자국 따라
잠시 멈춘 걸음마를 다시 떼려는지
등껍질 가득한 나무들 바람결에 설레는 동안
집청정 처마 밑으로
여름 가고 가을이 온다.
이제 차오르는 물살 따라
먼 바다에서 고래들이 돌아오는
7,000년 전 바위 속으로 떠나야 할 시간.
양팔 가득 활시위 팽팽히 당겨
뿔사슴 겨누는 사냥꾼이 된다.
역사의 새벽을 여는 사내가 된다.
2021.08.25.
가을
정진명
교복에 지친 아이들
방학하자마자,
머리를 울긋불긋하게 염색하고
거리로 몰려나와 춤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