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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란 무엇인가(1)
제1장 하나님의 의에 대한 해석의 변천사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나타나고(롬 1:17), 하나님의 의로 인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합니다(3:22). 반면에 의롭다 함을 얻고자 했던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은 것 때문이라고 했습니다(10:2-3).
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그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짐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덧입혀지는 의’라 했습니다. 또 존 칼빈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 ‘전가되는 의’라고 했습니다. 이는 로마 가톨릭이 인간의 공로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신앙을 왜곡하고 교회를 타락하게 한 것을 바로 잡으려는 의도였습니다. 루터 이후 탄생한 우리 개신교는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덧입혀지는 의 혹은 전가되는 의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이 하나님의 의가 덧입혀지거나 전가됨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 위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몇 년 앞둔 2013년, 훌러 신학교의 김세윤 박사는 『칭의와 성화』라는 책을 통해 하나님의 의에 대해 개신교의 기존 입장과는 조금 다른 주장을 폈습니다. 그는 유대교가 ‘언약적 율법주의’였다는 바울의새관점 학파의 주장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김세윤은 그들의 영향을 받아 개신교의 전통적인 칭의 교리에 수정을 가하고자 했습니다. 새관점 학파의 언약적 율법주의란 유대교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어내는, 또는 그런 관계로 진입하는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언약(구원)의 관계에 진입하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 관계 속에 ‘머무름’ 하는 종교였다는 것입니다. 이에서 힌트를 얻은 김세윤은 바울의 칭의론을 법정적 칭의와 관계적 칭의로 구분합니다. 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인이라고 선언 받는데, 이것을 ‘법정적 칭의’라 합니다. 그러나 이 법정적 칭의는 최후의 심판 때 받을 선언을 지레 받는 것으로써 칭의의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을 최후 심판 때 온전히 받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법정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그리스도인은 최후 심판 때 칭의의 완성을 받을 때까지 자신이 ‘진입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 사랑의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여 은혜를 베풀고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구원하시는데, 이를 ‘관계적 칭의’라 합니다.
김세윤보다 몇 년 앞선 2010년, 필자는 서울의 한 교회의 부흥사경회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 개신교의 칭의론과는 전혀 다른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 원고들을 모아 출판된 책이 『변질된 기독교』입니다. 이 책에서 필자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복음은 예수께서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내줌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입니다(롬 4:25). 이 복음을 믿을 때 하나님이 죄를 범하는 나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함으로써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선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새로 지으셔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십니다(갈 2:20, 5:24, 6:14, 롬 6:3-11, 엡 2:1-10 등).” 이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덧입혀지는 의로 말미암는 칭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로 지으심으로 의를 행하며 살도록 하는 ‘실제적인 의’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좀 더 확장되어 2015년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해석에서 김세윤은 개신교의 전통적인 교리인 법정적인 칭의에 관계적 칭의를 더함으로써 칭의의 개념을 보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개신교의 전통적인 주장을 전면적으로 수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해석이 옳은 것일까요? 이를 위해 하나님의 의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 기독교 역사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407)
요한은 수리아 안디옥에서 태어나 자랐고, 어렸을 때부터 신학교육을 받았으며, 은둔 수사의 길을 걸으며 성경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12년 동안 안디옥에서 설교자로 활동하다, 398년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는 대부분 강해설교를 했고, 그는 명설교로 인해 ‘황금의 입을 가진 이’라는 뜻의 크리소스톰(Chrysostom)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예언적인 설교와 대주교로서 성경대로의 강직한 교회 치리는 많은 적을 낳게 하였습니다. 그의 설교로 인해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내인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와 마찰을 빚었습니다. 또 한 사람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인 테오필로스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갑작스럽게 죽자, 그 후임으로 자기에게 충성하는 인물을 밀었지만 크리소스톰이 그 자리를 차지함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끝까지 크리스소톰을 괴롭혔습니다. 결국 크리소스톰은 유배되었고, 407년 폰투스의 외딴 유배지에서 죽었습니다.
캄펜하우젠(Hans F. von Campenhausen)은 하나님의 의와 관련해서 “크리소스톰은 특히 바울을 좋아해서 바울 서신을 완전히 주석했는데 바울 서신의 각성시키는 면과 윤리적으로 내면화된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바울의 의인론(義認論)의 핵심에 대해서는 그가 이해하지 못했다. 펠라기우스가 바로 크리소스톰을 보증인으로 내세웠다.”라고 했습니다. 캄펜하우젠의 말에 의하면 크리소스톰은 개신교의 핵심교리인 덧입혀지는 의로 말미암는 이신칭의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여러 권의 책을 남겼는데, 그중 『로마서 강해』에 수집된 설교들은 397년 이전, 그가 안디옥에 있을 때 설교한 것들로 보입니다. 크리소스톰은 로마서 3장 9-31절을 본문으로 “믿음의 법”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 하심이라.’ 의로우심을 나타내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신의 부를 나타내신다.’는 말로 바꾸어보면 하나님이 친히 부하시다는 것을 보이실 뿐만 아니라, 사람을 부하게도 하신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말로 바꾸어보면 하나님은 스스로 사실 뿐만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연약한 자의 능력이 되시기도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죄가 충만한 사람들을 한순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이 죄가 충만한 사람들을 한순간 의로운 사람으로 새로 만들어 실제로 의롭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이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로마서 4장 1-22절을 본문으로 한 “믿음으로 얻는 의”에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행위의 영광을 거론함으로써 행위 자체가 믿음에 의해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에서 영광을 거두려는 사람은 자신의 수고와 행위를 앞세우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자기를 영광스럽고 존귀케 하신 하나님을 나타냄으로써 그분이 그 영광의 근원이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이는 크리소스톰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나는 의로운 행동’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의 로마서 강해 어느 곳에서도 오늘날 개신교도들이 믿고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의 의가 덧입혀지는 의나 전가되는 의라는 개념은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바울의 의인론의 핵심에 대해서는 크리소스톰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 캄펜하우젠의 평가는 개신교적 잣대로 평가한 것일 뿐, 어쩌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크리소스톰은 안디옥에서 출생했고, 어려서부터 성경과 신학을 연구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안디옥 학파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교회가 바울의 의인론(義認論)을 알고 있었다면 크리소스톰이 알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이는 개신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의인론은 본래 교회에서 전승되어 온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크리소스톰이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됨으로 인해 자신이 신임하던 이를 그 자리에 앉히려 했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인 테오필로스는 평생 크리소스톰의 대적이 되어 크리소스톰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심지어 크리소스톰의 과거 안디옥 생활까지 전부 조사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테오필로스가 크리소스톰이 바울의 의인론을 거부한다는 공격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는 당시 교회가 안디옥 학파이든 알렉산드리아 학파이든 개신교의 의인론을 알지 못했고, 인정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도 시대로부터 크리소스톰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에는 ‘덧입혀지는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개신교의 칭의론 전승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하나님의 의가 덧입혀지는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칭의의 교리는 어거스틴에게서 처음 발견되는데, “영과 문자에 관하여”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 타가스테(Tagaste)에서 이교도인 아버지와 기독교인인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문법학과 수사학을 공부했으나 마니교에 심취하였고 낯선 여자와 14년간 동거하며 회심하기까지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밀라노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밀라노 주교인 암부로시우스(Ambrosius)를 통한 감화로 386년 32세 때 비로소 회심했습니다. 388년 그는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가 수도원을 세웠고, 396년 히포의 주교가 되어 죽기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영과 문자에 관하여”는 고위 공무원인 마르켈리누스의 “인간이 스스로 죄 없이 살 수 있는가? 즉 죄 없음이 인간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가?”란 질문에 대해 답변한 글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죄 없음에 대해 세 가지 의견을 소개합니다. 첫째, 인간이 죄 없이 살았거나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이 스스로 죄 없이 살 수 있다고는 주장하지 않으나,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란 하나님께서 자유로운 의지의 결정을 가진 인간을 만드시고 또한 그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규정을 제시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의견은 당시 펠라기우스의 주장과 유사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견해는 충분치 않다고 했습니다. 셋째, 어거스틴은 두 번째 의견을 가진 이들의 주장 속에 담긴 ‘하나님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주신 규정’(율법)은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죽이는 문자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인간은 죄 없는 행동을 위하여 성령을 필요로 하는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 없이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의롭게 됨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 없이 살게 되는 것 외에, 다른 개념의 의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율법 외에 다른 의가 계시되었다.’는 로마서 3:21의 말씀은 하나님이 의롭게 만드실 때 그에게 ‘덧입히시는 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자만은 배제되고(롬 3:27), 하나님께서 어떻게 의롭게 만드시는가 숙고하는 것이 올바른 경건이다. 하나님의 의의 계시는 믿음의 대상이며(롬 1:17), 모든 삶의 근원인 하나님의 빛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지켜준다.”
하나님의 의는 덧입히시는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의를 성령으로 죄 없이 사는 것에 덧입히시는 의를 추가했습니다. 필자는 어거스틴이 “영과 문자에 관하여”라는 글에 ‘덧입히시는 의’의 개념을 추가한 것이 글의 맥락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성 어거스틴의 은총론 연구』의 저자인 권진호 교수에게 “‘영과 문자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왜 덧입히시는 의라는 개념이 나오며, 어거스틴이 덧입히시는 의의 근거로 제시한 성경 구절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권 교수는 어거스틴이 덧입히시는 의를 암브로시우스로부터 들은 것임을 말하고, 암브로시우스는 야곱이 염소 가죽으로 에서인 것처럼 꾸미고 이삭에게 나아가 에서 대신 축복을 받은 이야기(창 27:15-23)를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덧입히시는 의에 대해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을 알레고리적인 방법으로 해석한 것으로, 권 교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거스틴은 덧입히시는 의에 대한 성경의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뷰케넌(J. Buchanan)은 “어거스틴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공식적인 논쟁의 주제가 되었던 이 위대한 진리에 큰 공헌을 했고, 이러한 방법으로 루터와 칼빈의 길을 예비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가 전가되는 의라는 개신교의 입장이 사도들로 말미암은 기독교 고유의 전승에 따른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3. 종교개혁자들
16세기 이후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의’ 혹은 ‘전가되는 의’라고 주장했고, 그들의 주장이 개신교의 전통으로 굳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1)루터(M. Luther)는 하나님의 의를 ‘덧입히는 의’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루터의 인식은 어거스틴의 “영과 문자에 관하여”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로마서 주석』에서 3장 21-31절을 주석하며, 하나님의 의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영과 문자에 관하여” 제9장에서 “사도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다고 하시면서 사람에게 덧입히시는 그런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인내를 가지고 참아주시지 않았더라면, 그 어떤 죄 사함도, 하나님의 의에 대한 그 어떤 증거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그토록 길이 참으신다. 하나님은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죄인들을 의롭다고 하시기 위하여 죄인들을 용서하신다... 우리 믿는 자들이 죄들을 기뻐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죄들은 더 이상 우리의 죄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죄들이고, 대신에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된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다고 하는 ‘덧입히는 의’이며, 하나님의 용서에 의해 얻는 의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한 것 때문에 얻는 의라고 했습니다.
2)칼빈(J. Calvin)은 하나님의 의를 ‘전가되는 의’라고 주장했습니다.
칼빈은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3장 21절의 ‘하나님의 의’에 대해 “행위로 말미암은 공로가 배제되어 있고, 하나님의 긍휼만 존재한다. 여기서 행위는 예외 없이 모든 행위들, 심지어는 주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서 열매 맺으신 행위 일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칼빈은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의에 대한 다른 측면, 즉 “하나님의 의는 중생의 은혜요, 그리고 아무런 자격이 없는데도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새롭게 하신 까닭에 이 은혜는 값없는 것이다.”라고 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죄가 사함 받는 것만이 의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반론임이 분명하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의가 실제적인 의라는 것을 반대하고 전가되는 의라는 것에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또 칼빈은 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에 대해 “하나님의 의는 우리 행위의 흠점들이 그의 값없는 용서로 말미암아 가려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들을 완전한 것으로 보상해 주시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란 구절의 주석에서, “사람들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그처럼 의로운 까닭이 아니라, 의의 전가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거듭 확증해 준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는 용서와 의의 전가에 의해 주어지는 전가되는 의라고 주장했습니다.
3)웨슬리(J. Wesley)도 하나님의 의를 ‘전가되는 의’라고 했습니다.
웨슬리는 그의 신약성서주해에서 로마서 3장 25절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직무이신 보복적인 공의를 나타내시기 위함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속죄제물)로 세우신 것은 화가 나신 하나님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값을 지불해 주셨으므로, 그들 자신의 의나 행함으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어떤 공로도 없이, 용서 받고 용납 받았습니다.” 이처럼 웨슬리 역시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해 주심으로써 얻게 되는 전가되는 의로 해석했습니다.
루터와 칼빈, 그리고 웨슬리가 로마서 3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의를 전가되는 의로 본 것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인식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로마 가톨릭의 행위구원론과 맞서 싸웠던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전가되는 의이며, 은혜로 얻는다는 것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종교개혁자들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은혜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의를 전가되는 의라고 해석한 것은 은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은혜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얻는 하나님의 의를 전가되는 의가 아니라 실제적인 의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엡 2:8-10)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8절에서 바울은 구원이 첫째, 은혜에 의해서, 둘째, 믿음으로 말미암아, 셋째,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해서 누구든지 자랑할 수 없습니다(9절). 그런데 10절에서 그는 구원의 내용에 대해서 말합니다. 구원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통해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아, 그 가운데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로 지으심을 받은 그것이 은혜에 의한 것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의를 실제적인 의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로마서 3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의는 실제적인 의를 가리킨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4. 김세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김세윤은 하나님의 의를 법정적 칭의와 관계적 칭의로 구분했습니다. 그가 정의한 법정적 칭의는 개신교의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리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은 죄인들인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요, 그리하여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버린 대속의 제사였다라고 이해하는데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이 그리스도 사건, 구원의 사건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인데, 이 복음을 믿으면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가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해서 우리가 무죄 선언을 받고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 이래 개신교가 믿고 가르쳐 온 칭의론인데, 개신교는 이를 바울신학을 비롯한 신약 전체 복음의 핵심으로 여기며, 중세 가톨릭교회나 다른 종교의 선행/공로 사상을 배격하기 위해 ‘율법의 행위 없이, 오직 은혜로만/믿음으로만’이라는 수식어구를 강조하며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브레데(W. Wrede)와 슈바이쳐(A. Schweitzer) 등이 이러한 전통적 칭의론에 대해서 심각한 비판을 가합니다. 비판의 신학적 근거의 핵심은 개신교에서 이해하고 있는 칭의론으로 바울 복음을 이해할 경우, 바울의 윤리적인 가르침과 연결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죄에 대해 하나님의 징벌을 받으심으로써 우리가 행위와 상관없이, 율법의 행위 없이 의인이라 칭함을 받고 종말에 최후의 심판에서 그것이 확인될 것이라면 의인으로 사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의 윤리적 가르침을 낳지 못하는 칭의론이 바울 복음의 중심일 수 없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김세윤도 그의 책 『칭의와 성화』 서문에서 현재의 한국 교회의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을 종교개혁의 중심 구호인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됨’으로 표현되는 칭의론의 복음이 많이 오해되고, 오해를 넘어서 심각하게 왜곡되고 변질된 것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김세윤은 개신교의 전통적 칭의론에 ‘관계적 칭의’의 개념을 도입합니다. 관계적 칭의에 대해서 김세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인이라 선언됩니다. 이것을 ‘법정적 칭의’라 합니다. 이 법정적 칭의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안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진입한 그리스도인은 최후의 심판 때 칭의가 완성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이 머무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에 순종하며 사는 것인데, 이 사랑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 머물 때 하나님도 자신의 의무를 다하여 그에게 은혜를 베풀고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구원합니다. 김세윤은 이를 ‘관계적 칭의’라 했습니다.
2017년 고경태 외 9인은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 고찰”이라는 부제를 붙여 『현대 칭의론 논쟁』이라는 책을 펴내 김세윤의 칭의론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국제신학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김재성은 그 책의 추천사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루터의 해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루터가 제기한 문제점들이 타당하다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루터는 오직 로마 가톨릭과의 대립에서 칭의론을 세웠기에 결국 바울의 칭의론을 심각하게 왜곡했다고 할 것인가? 과연 한국 교회의 부족한 모습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잘못된 칭의론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하여 김재성은 “한국 교회가 성경적인 칭의론에 대한 이해가 빈약하고 초보적인 신학도 터득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기에 빚어진 것이라는 진단에 동의할 수 없다... 한국 교회는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을 온전하게 터득하여 왔으며, 이신칭의 교리에 대해서 결코 왜곡시키지 않았다... 칼빈은 신자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칭의를 위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으며, 성화를 위한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게 된다고 강조하였다... 로마서 4:7에 대한 주석에서 루터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선이 우리 밖에 있고, 그 선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바울이 로마서 8:3-4에서 언급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율법의 의는 의의 전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토대를 두고 있다. 칼빈이 강조하는 전가는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의가 결코 그들 내부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의의 전가에는 비법정적인 요소를 첨가해서는 안 된다. 전가는 그들의 외부에서 오는 것이요, 전가된 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일 뿐이다.”
김세윤을 비판하는 김재성의 글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한국 교회, 더 나아가 개신교의 입장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개신교의 입장은 철저히 루터와 칼빈이 해석한 ‘덧입는 의’나 ‘전가되는 의’에 기초해 있으며, 그 의는 결코 내 안에 있지 않고,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은 외부로부터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맺는 말
1. 하나님의 의에 대한 해석의 변천사를 살펴본 결과, 개신교가 믿고 있는 ‘전가되는 의로 인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는 기독교 초기에는 교회가 알지 못했던 것이며, 어거스틴의 글에 처음 언급되었고, 그것이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극대화되었으며, 마침내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물려받은 개신교의 중심교리로 발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신칭의의 교리가 사도들로부터 전승되어 온 신앙의 유산이 아니며, 후대에 만들어져 교회에 들어온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2. 브레데와 슈바이쳐 김세윤 등이 “개신교에서 이해하고 있는 칭의론으로 바울 복음을 이해할 경우, 바울의 윤리적인 가르침과 연결이 안 된다.”고 지적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윤리적 덕목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있고, 칭의 후에 성화와 영화를 가르친다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목회 현장에서 살펴 본 결과로는 칭의의 교리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는 성도의 견인 교리와 결탁해서 그리스도인들의 거듭남과 윤리적인 삶의 필요성을 현저히 떨어뜨리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의를 크리소스톰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죄가 충만한 사람들을 한순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라고 해석할 경우, 바울이 전한 복음과 그가 가르친 윤리는 조화가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인들의 윤리 실천을 가능하도록 합니다. 필자가 『변질된 기독교』와 『사도들이 전한 복음』를 통해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덧입혀지는 의로 말미암는 칭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통해 나를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게 하고, 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로 지으심으로 의를 행하며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는 주장은 크리소스톰이 해석한 하나님의 의의 개념과 일치합니다.
3. 어떤 이들은 개신교의 신학적 입장 위에 서서 캄펜하우젠이 지적한 것처럼 “크리소스톰은 바울의 의인론(義認論)의 핵심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장에서는 개신교에서 법정적 칭의의 성경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구절들을 검토함으로써, 과연 성경이 개신교의 칭의론/의인론을 지지하고 있는가를 보겠습니다.
신부동교회 강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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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을 읽는 내내 많은 학자들의 글을 알기 쉽게 정리하신 목사님의 수고가 느껴집니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실제적인 의가 회복되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통해 나를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게 하고, 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로 지으심으로 의를 행하며 살도록 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인정토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P.S 오탈자 수정 요청 : 이를 타개하기 위해 김세윤은...그에게 은혜를 베풀고 (그리스)의 ->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구원합니다. 김세윤은 이를 ‘관계적 칭의’라 했습니다.
오래되고 묵은 교리를 내려놓는 것이 쉽진 않겠지만, 성령님께서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의 눈을 밝게 해주셔서 진리를 깨닫게 되길 기도합니다!
제1장이라는 말은 그 다음 챕터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정말 기대됩니다! 이 글을 모든 지도자 및 신학도들과 한국의 모든 성도들이 읽고 깨닫기를 원합니다!
'실제적인 하나님의 의'에 대한 목사님의 외침을 위해 중보합니다. 하나님이 목사님을 사용하셔서 이 땅에 왜곡된 교리들을 바로잡고, 목회자들에게 진리는 깨닫게 하는 일들을 더욱 행하시길 기도합니다.
정독하고 또 정독하려고 출력을 하였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목사님의 글은 다른 사람의 그것과는 다르게
논리정연하고 세련됨을 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진리임도 알게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듣는 마음 깨닫는 마음을
갖게해달라고 중보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값을 치뤘으니,
이 예수님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용서함 받고, 그 의가 내게 전가되고, 덧입혀져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칭의의 교리가 개신교의 중심교리입니다.
예수님 믿기만 하면 덧입는 의로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다 용서함 받는다는 교리가 맞다면,
죄 안짓고 선하고 거룩하게 살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 교리때문에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죄를 지어도, 어차피 또 용서해주실텐데 여기며 죄에 대해 무뎌지고
무감각한 채 죄를 짓고 살아가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죄를 뒤치다꺼리 해주시려고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 대신 죽으시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의는 외부에서 오는 덧입는 의, 전가되는 의가 아니라,
우리가 더이상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의의 종으로 살게 하는 실제적인 의입니다.
목사님을 통해 덧입는 의, 전가되는 칭의의 개념이 사도들에게서 전승되어 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칼빈의 주장처럼 죄사함 받는 것만이
의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면,
연약한 인간은 죄사함 받아도,
다시 계속 죄지을 수 밖에 없고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죄 문제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게 됩니다.
크리소스톰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것은 하나님이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죄가 충만한 사람들을 한순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해석처럼 복음에 나타난 의는
죄 가운데 사는 죄인인데 의롭다 칭해주는 덧입는 의, 전가되는 의가 아니라
실제 의로우신 하나님처럼 우리로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살게 하는 실제적인 의입니다.
이신칭의의 교리때문에 대부분 교인들은 예수님 믿으면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고, 구원받는 것은 참 쉽다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죄짓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비윤리적인 삶을 살면서도 자신은 천국 갈거라 믿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수님 믿어도 불의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미혹을 받지 말라(고전6:9)
분명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
목사님의 글을 통해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해석이 어거스틴, 루터, 칼빈을 통해 어떻게 변화되고 왜곡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루터와 칼빈이 주장한 이신칭의의 교리가 아니라,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게 하는 복음으로 회복되어야만,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과 진리를 목사님을 통해 듣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목사님을 통해서
500년 동안 전해내려오는 기독교의 교리가 성경대로의 진리로, 바른 복음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목사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의에 대한 내용을 여러차례 들어왔지만 이렇게 정리된 글을 읽어보니 한번에 쭉 꿰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번 읽기에는 다 내 것으로 소화할 수 없어 읽고 또 읽고 있습니다!!
이 귀한 진리를 언제 어디서 누구와 이야기하든 목사님처럼 지켜낼 수 있도록 복음의 군사로 준비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글을 기대하며, 또 한번 시작된 진리를 위한 영적 싸움을 중보하겠습니다!!!
목사님의 가르침 감사합니다. 힘이 됩니다. 마음이 시원해 집니다. 특히 다음의 글에서 답답했던 가슴이 뻥뚫어 집니다. 크리소스톰은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이 죄가 충만한 사람들을 한순간 의로운 사람으로 새로 만들어 실제로 의롭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크리소스톰의 말처럼 나를 새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목사님의 한국교회뿐 아니라 온 세상 교회를 향한 외침을 응원합니다.
목사님의 올바른 분석과 바른해석에 감사드립니다. 다음편을 기대합니다.
크리소스톰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죄가 충만한 사람들을 한순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며, 하나님의 의에 실제적인 면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원래 없던 개념인 '전가되는 의', '덧 입히는 의'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루터, 칼빈, 웨슬리가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현대에까지 많은 교회들이 이 전통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하나님의 의'를 성경에 근거하여 올바르게 해석하신 것을 봅니다. 이것이 다시 이 땅 가운데 회복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시 한 번 기독교가 개혁되기를..!
실제적인 의!
덧입는 의나 전가되는 의가 진리가 아님을 성경에 능통하지 않은 나도 알겠는데
루터나 칼빈 웨슬리 같이 뛰어난분들과 진리를 들었어도 깨닫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왜 실제적인 의를 깨닫지 못하는지...
참 안타깝습니다.
진리를 부르짖는 우리 목사님을 담임 목사님으로 섬기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도 중보로 나아갑니다.이 곳에, 온 열방에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이 선포되어지는 그 날까지~
하나님이 엘리야때 칠천명을 남겨 두신것처럼 진리를 깨달은 모든 성도들이 함께 중보할 것입니다.
목사님 진리 선포를 위해 항상 건강하세요^^
살롬!
목사님의 가르침을 늘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귀한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다음 말씀이 기다려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