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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송 유병헌 의사 격문[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
(자료: 경상북도 칠곡군 향토문화백과)
이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은
당시 대한제국의 고관대작, 관료, 유림들이
왜국의 은사금과 재물, 작위에 유혹되어
국권(國權)을 일본 오랑케에게 넘기는 사례에 대하여
애절 통탄하여 통열(痛裂)히 비판하는 글을
일본내각, 총독, 미국, 청국, 러시아, 영국, 불란서 대사관과
각처 관공서, 향교유림에 통문(通文) 하였고,
황제에게 올리신 상소문 내용의 일부이기도 하다.
특히 세금은 왜국 총독부에 내거나 빼앗기지 말고 조선조정에 바치도록
전국 각처 사림(士林)들에게 선통(先通)한 격문(檄文)의 한 부분이다.
이후 1919년 강우규(姜宇奎, 1855~1920, 연해주),
1920년 박재혁 의거(朴載赫,1895~1921, 부산)을 비롯하여
1932년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상해) 등,
전국 각지와 중국에서 의거가 일어난 것도
만송선생의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과 무관하지 않다.
이 후 만송 유병헌 의사는 여러 차례 투옥을 거듭하다가,
1918년 대구옥에서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 하며
단식자진(斷食自盡) 하셨다.
[晩松 劉秉憲 義士 영정]
* (生)壬寅(1842년)11월9일~(卒)戊午(1918년)7월20일(양,8월26일).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
영어의 미역: Eunsubyeonparok Anti-Japan Discours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시대: 일제강점기/일제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성격: 논설격문.
작가: 만송(晩松) 유병헌(劉秉憲)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의 만송(晩松) 유병헌(劉秉憲)이
은사금(恩賜金)을 거부하며 쓴 항일 논설격문.
[개설]
1910년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합한 뒤 은사금과 작위를 수여하였다.
1911년 5월에 칠곡군 북삼 출신의 유생인 유병헌은 은사금 수령을 거부하고,
논설격문「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을 통해
일제를 규탄함으로써 국민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구성]
유병헌은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단식·순국하고자 하였으나
마음을 돌려 일제의 강제병합과 매국 역적을 성토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1911년 5월에 일제가 수여하는 은사금 수령을 거부하라는
논설격문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을 지어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였으며,
1911년 10월부터 일본에 납세거부운동을 일으켰고
이를 통해 일제의 모든 통치행위를 부정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유병헌은 약목헌병대(若木憲兵隊), 김
천헌병대(金泉憲兵隊), 김천경찰서(金泉警察署) 등에 호출되어
문초를 받고 대구감옥(大邱獄)에 수감되었다.
논설격문 「은수변파록」은 구국의 의지를 보여주고
국민의 납세거부운동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은혜와 원수를 변별하여 배격 파멸시켜야 함(恩讐辨破錄)]
(全文)
“夫恩讐之判, 猶白之於黑, 不待辨明而燎然於一目之下也,
鳴乎, 島夷猖蹶, 奪我國逐我君, 塗炭我生民,
乃我不共戴天之讐也, 彼反以財誘我耆老, 謂之恩賜,
是何異於指黑爲白哉, 不過以奸譎爲穽, 財利爲餌,
欲盡驅朝鮮之人, 納諸此穽而後己也, 苟能稍辨黑白者,
孰肯自陷於必死之穽乎, 若誤入此穽, 終無脫出之期矣, 豈
非互相戒懼者乎, 受金而, 居住姓名圖印, 給於日本則,
日本之奴隸也, 日本之酋種也, 載之鐵券, 傳之無窮,
愛及苗裔則, 奴隸鳥可贖也, 酋種不可免也, 究其包藏禍心,
彌久彌酷則, 不勝憤鬱, 腸摧膽裂, 夜不能寢, 晝不能食,
寧死於讐賊之劍, 誓不受讐賊之金, 自投死穽也,
凡我朝鮮之人, 覽此而戒愼哉.”
(국역)
대저 은혜와 원수는 마치 백(白)과 흑(黑)과 같아서
변별할 필요조차 없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아! 섬나라 오랑캐가 세력을 얻어
내 나라를 빼앗고 내 임금을 쫓아내고
내 생민을 도탄에 빠트리니
이는 나의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그런데 저놈들은 도리어 재물로 우리 늙은이들을
'은사금'으로 유혹 하니,
이 어찌 흑을 가리켜 백이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간교한 꾀로 함정을 삼고 재물과 이익으로 미끼를 삼는데
불과하니 조선 사람들을 함정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진실로 흑과 백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즐겨 죽을 함정에 빠지겠느냐.
만약 이 함정에 잘 못 빠지면
빠져나올 기회는 다시없을 것이니
경계하고 두려운 일이 어찌 아니겠느냐.
돈을 받고 거주성명(居住姓名)의 도장을 준다면
끝내 왜놈의 노예가 되고
왜국의 종자가 되어
그 내용이 철권(鐵券)에 기재되어 무궁토록 전하여
그 자손들에게 까지 영향이 미칠 것이니
노예가 되면 다시 속죄할 수 없고
오랑캐의 종자(從子)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심장은 갈수록 혹독한 분통과 울분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니
창자와 쓸개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받을 것이며,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낮에 밥을 못 먹을 지경이 될 지어다.
차라리 원수의 칼에 죽을지언정
원수의 돈을 받지 말고
스스로 죽을 함정에 빠지지 않을 것을 맹세하라.
무릇 우리 조선 사람들은
이 글을 보고 또 경계하고 경계하여 삼가 할 지어다.
= 晩松集에서 =
[晩松集]
만송선생의 유묵(遺墨).
[만송 유병헌 의사 석벽(石壁)유적(遺蹟)]
(全文)
北望痛哭 吾王不忘(북녘향해 통곡하니 우리임금 못 잊어라)
仙李江山 只有此疆(이황(李皇)폐하, 이 강산 이 땅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朝鮮上江, 劉秉憲 書, 壬子七月二十五日
(조선 상강리 유병헌 서, 임자년(1912년)7월25일
이 석벽에서 만송선생께서 매일 의관을 정제하시고 통곡하시며
황제에게 북향재배 하시던 유허지 이다.
* (소재), 경북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만송선생 통분의 글 때문에 총독부서기와의 문답]
대한제국의 당시 고관대작, 관료, 유림들이
일본의 ‘은사금, 뇌물, 작위’의 유혹으로
나라를 팔아넘기는 사례에 만송선생은 애절 통탄한 비판의 글을
각처 향교유림, 일본내각, 총독부, 관공서, 미국대사관, 청국황실,
러시아대사관, 영국대사관, 불란서대사관에 통문한 연유로,
경성의 총독부 수석서기 산음(山陰) 이란 자(者)가
선생을 회유할 목적으로 거주지까지 내려왔으나
오히려 감화되어 “조선에도 이런 절의선비가 있는 줄 몰랐다!!”
감탄하며 물러갔다.
(전문)
갑인년3월16일(양,1914년4월11일)
양복 입은 두 사람이 찾아와 인사하는 말이,
“나는 총독 수석서기 ‘산음’이란 사람으로
총독(總督)의 명령으로 문안드리려 왔습니다.”
내가 답하기를,
“총독은 내가 가장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인데?
사람을 보내 나를 죽일 수는 있을지나
‘문안’한다는 것은 지극히 해괴한 일이로다.”
‘산음’이 놀랜듯이 한참동안 묵묵히 있다가
붓을 찾아 시(詩) 한 구절을 쓰기를,
“春風春雨能開花(봄바람 봄비가 꽃 잘 피게 하나)
春風春雨亦散花(봄바람 봄비가 꽃 떨어지게도 하오이다)
昨日知音今日仇(어제 친구가 오늘 와서 원수가 되니)
人間萬事恰如花(인간만사 모든 것 꽃과 흡사하더이다.)”
내 즉시 써서 보이기를,
“夏竹夏松隨世態(여름죽 여름송 세태 따라 같아 보이나)
冬松冬竹有誰知(겨울솔 겨울대 그 마음 그 누가 알까보냐)
靑天只有朝鮮日(하늘 위에는 다만 조선태만 있을 뿐이니)
滄海椎聲必不遲(창해력사 철퇴소리 멀잖아 있으리다.)”
‘산음’이 그 답시(答詩)를 읽고 나서 얼굴
색이 새빨개지며 하는 말이,
“유 학사깨서 나라를 ‘빼앗기고 임금을 쫒아냈다.’는
열국(列國)에 보낸 장서(長書) 때문에
국내외의 여론이 흉흉하여 민심이 불안하니
모쪼록 자중하시어 침묵하시길 바라옵니다.”
내 답하기를,
“일본의 패망이 멀지 않았으니 어찌 불안하지 않겠느냐,
내 비록 어리석고 늙었으나
반드시 나라를 광복(復國)시켜 정의를 바로세우고 말 것이니,
물러가 이 말 대로 총독에 가서 복명(復命)하라.”
‘산음’이 돌아가려고 일어서며
자기의 성(姓)이 박(朴)이라 하므로,
내가 웃으며
“개와 염소(犬,羊)도 성이 있느냐?”
“개에게는 개 이름이 있을 뿐이고,
염소에게도 염소 이름이 있을 뿐이거늘,
본디 오랑캐는 이름은 있어도 성은 없는 법이니,
우(虞)나라 때의 유묘(有苗),
상(商)나라 때의 귀방(鬼方),
주(周)나라 때의 험윤(玁狁),
한(漢)나라 때의 흉노(匈奴),
당(唐)나라 때의 돌궐(突厥)이
모두 성이 있었다고 밝혀지지 않았으니,
왜(倭)가 어찌 성(姓)이 있으리오.”
‘산음’이 뻘게진 얼굴로 웃으며,
“학사께서는 참으로 시(詩)도 잘 하시고 말도 잘 하시오.
과연 명성(名聲)이 날 만하오이다.”
“제가 조선사람 많이 보았으나
학사처럼 높은 절의(節義)를 가진 사람은 잘 보지 못했소.”
하면서 절하고 물러갔다.
따라온 사람은 서울에 있는 변영환(邊永煥)이란 사람인데,
역시 총독부에 있다고 했다.
[만송 유병헌 의사 독립운동 주거지]
* (소재), 경북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만송선생의 독립항거지.
독립항거 거택(居宅)은 지금 없어지고 황량한 빈 터에 무성한 수풀만 우거져 있다.
독립을 위해 투쟁한 시골선비의 그 기개(氣慨)는 찾아 볼 수 없고,
독립된 조국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친일이 와글와글 거리고 있으니....
아~ 아~
순국선열이시어!
이 나라를 용서 하소서!!
[만송 유병헌 의사의 墓 및 墓碑]
* (소재), 경북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산34번지.
만송선생은 1915년 3월에 안정근(安靖根;안중근의사 동생),
4월에 송상도(宋相燾;기려수필 저자),
10월에 한용운(韓龍雲) 스님,
그 외 수 많은 지사(志士)들이 내방(來訪)하여
독립군자금 조달처로 지목되니,
선생은 1918년 정월 대구검사국(大邱檢事局)의 취조를 받고,
동년 2월20일 법정에서
“너희 왜왕의 머리를 베어 내 술잔 못 만듬이 유감(遺憾)이다.” 라고
큰소리로 호통 쳤다.
선생은 감방(監房)에서도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인동 사는 유병헌이란 사람이외다.
나는 죽겠지만 여러 지사(志士)들은 부디 목숨을 부지하시어
조선독립을 위해 매진해 주시오,
대한독립을 꼭 이뤄 대황제 폐하(大皇帝 陛下)를 잘 보필해 주시오.”
선생의 옥중(獄中) 충절(忠節)의 내용과 글귀가
경상도는 물론 충청도까지 퍼져나가
인동, 영덕, 강동, 울산, 청산 등지에
그 행적의 목비(木碑)가 세워져 기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해, 장남 홍열(洪烈)씨를 불러 유명(遺命)하기를
“7월 20일(음) 아침에 옥문 앞에 와서 사체를 받아가라.”
자진(自盡)하실 것을 결심하시고,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 하시며
옥중에서 7일간 단식(斷食) 자결(自訣) 하셨다.
절명하신 날이 양력으로 환산하면 1918년 8월26일이 된다.
가족들이 시신을 받아 여관에서 렴습(斂襲)할 때,
옷 속에서 [절명시(絶命詩)]와 [기제축문(己祭祝文)]이 나왔다.
[만송선생이 안정근에게 줌(贈 安靖根)]
(全文)
愛君忠義弟兄同(그대 형제 義와 忠을 지극히 사랑하네)
一死一生扶我東(한사람 죽고 한사람 살아 내 나라 붙드셨네)
心切臥薪嘗越膽(마음은 와신상담 월왕같이 쓸개를 씹어도)
氣專懷匕入襄宮(기백모아 비수품고 머리 잘라 술잔 만들었네)
三千里內蒼茫跡(삼천리 이 땅에 옛 족적 없다하나)
五百年來慷慨風(오백년 내려오던 의로운 분개일세)
安氏家中雙節立(이제 안씨 문중 두 절개 세웠으니)
世人誰不頌其功(이 세상 누군들 그 공 찬양 않으리.)
[만송선생의 절명시(絶命詩)]
(全文)
九年塵雨裏(구년간 흙비 바람 몰래 불었다네)
三入楚因中(세 번 감옥살이 가시처럼 아팠지만)
夢渡桑乾水(꿈속에선 누에치던 고향 길 오갔소)
魂飛柴市風(내 넋 티끌 되어 저자거리 흩어져도)
漢祚終難復(나라 운수 끝내 회복되기 어려우니)
燕樓死亦甘(옥에서 죽는 것 달갑기만 하다오)
此心誰可識(아! 이 마음 그 누가 알꼬)
對影聽雞三(그림자 마주보며 삼경 닭 울음 들으니)
寧爲湯钁死(차라리 끓는물속 괭이처럼 죽을지언정)
不作犬羊臣(개 염소 같은 왜놈신하 될 수는 없다)
嗟呼我死後(아~! 나 죽은 후에)
埋骨首陽隣(수양산 곁에 묻어다).
[만송 유병헌 의사 순국추모비]
순국추모비 뒷면에 만송선생 추모시(晩松先生 追慕詩) <임은 어데 가시고(이효상 작>가 새겨져 있다.
* (소재), 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동 선암봉(扇岩峰) 아래 (1963년 건립).
만송선생 추모시(晩松先生 追慕詩)
<임은 어데 가시고>
한 솔 李 孝 祥.
金烏山은 예와 같이 솟아있고
洛東江은 끊임없이 흐르건만
아 아 임은 어데 가시고
말 없는 石碑만 서 있는가
富貴와 榮華를 다 버리시고
不義와 暴力에 抗拒하시어
오르지 죽은 祖國을 안고
天下에 告發하시던 임아
붓대는 銃보다 勇猛하였고
말씀은 칼보다 날카로웠거니
千秋에 빛날 임의 忠誠은
木石이라도 능히 뚫고야 마르리
愛國愛族의 불타는 가슴이어
百折不屈의 높으신 氣槪여
아 아 白雪이 땅에 찼을 제
호을로 푸르런 저 소나무여
이제 죽음으로 願하시던 光復
그다지 願하시던 光復은 왔건만
아 아 國土가 兩斷된 채로
임을 뵈올 얼굴이 없구나
어쩌면 統一된 나라가 되올가
어쩌면 幸福된 나라가 되올가
어쩌면 임이 가르쳐 주신
正義로 싸워서 이기리올가
그리워라 갈수록 임의 忠節이
그리워라 갈수록 임의 넋이가
아 아 임은 어데 가시고
말없는 碑石만 서 있는가
一九六三年 九월 七일.
[의사 만송 유병헌선생 추모노래]
(義士 晩松 劉秉憲先生 追慕歌)
1963년9월
李應昌 작시.
金興敎 작곡.
社稷은 바야흐로 무너지는데 祖國은 바야흐로 빼앗기는데
亡國의 痛憤을 가슴에 안고 自由와 獨立위해 바치신 목숨
겨례 얼 깨우쳐서 大義에 사신 아~ 아~
거룩하신 거룩하신 義士 晩松先生
山川은 무찌르도 正義야 어찌 肉身은 빠앗아도 魂이야 어찌
愛國의 횃불은 날이 갈수록 民族의 앞날을 더욱빛내리
겨례 얼 깨우쳐서 大義에 사신 아~ 아~
거룩하신 거룩하신 義士 晩松先生
* (追慕歌 사진) p1/2
[만송 유병헌 의사 사당(祠堂)]
1963년 4월 전국 사림(士林)들이 결집 발의 협찬하여,
경북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에 숭의제(崇義齊)를 건립하고,
한식(寒食), 기일(忌日) 불천위(不遷位) 제사(祭祀)를 모시고 있다.
* (소재), 경북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1963년 건립).
[칠곡군 독립운동 기념비]
칠곡군 출신의 독립운동을 고취시키기 위해,
<독립운동사 기념비>를 왜관 순심고등학교 교정에 세웠다.
여기에 <만송 유병헌 의사>의 활동 내역도 포함되어 있다.
* (소재), 경북 칠곡군 왜관읍, 순심고등학교 교정.
[국가위패봉안장소 및 위패]
<순국선열(殉國先烈)>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싸우다
일제에 피체되어 광복되기 이전에 피살, 옥사, 처형으로 목숨까지 바치신 분들을 말한다.
반면에 독립투쟁을 하다가 광복을 맞은 분들은 <애국지사(愛國志士)>라 한다.
지금 서대문독립공원 독립관-헌충사(獻忠祠)에는 순국선열 2,833인의 위폐를 모시고 있다.
* (소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대문독립공원 독립관-헌충사(獻忠祠) (1996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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