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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법정의 최종심(最終審)이 남아 있다
이한규목사(들꽃사랑교회,시인)
봄이 되었다. 움츠렸던 나무들이 꽃망울을 머금고 터뜨릴 때를 기다리고 있다. 힘겨웠지만 인고의 겨울을 잘 이겨낸 나무들에게는 꽃이 핀다. 이겨내 자에게만 돌아가는 보상을 보는 것 같다. 우리의 부활도 눈물이 사순절을 보낸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다. 얼마 전에 재판정을 잠깐 들여다 본적이 있다. 형사재판이었다. 그 곳에는 재판을 받을 피고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재판중에 포승줄에 줄줄이 묶인 피고인들이 들어오는 것도 보였다. 저마다 판사의 선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판결이 어떻게 떨어지는지 판사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재판장은 두터운 증명서류를 읽어나갔고 이에 대하여 이의가 있는 사람은 법정 기한 내에 항소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재판서류를 읽어나가는 동안 억울하고 할 말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피고인들의 고개가 서서히 떨어뜨려지는 것도 보였다. 사회에서 제법 한 가닥 했을 것으로 보였던 사람들의 죄목은 인간 재판장의 손에 의하여 여지없이 들춰지고 말았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람은 선고대로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같은 법정 안이었지만, 재판받는 사람이 누구든 누가 무슨 처벌을 받든 나는 간섭받지 않고 자유로웠다. 잠깐이었지만 ‘죄에서의 자유’가 과연 무엇인지 생각났다. 성경은 죄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그 처벌까지도 다룬다.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가가에 못박은 자들의 죄를 여지없이 고발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감히 인간 빌라도가 ‘네가 왕이냐?’ 다그치는 장면은 가소롭기 짝이 없지만, 죄 없으신 주님을 고발하고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는 데 대한 책임은 실로 통렬했다. 성경은 가룟유다와 빌라도, 대제사장들의 책임도 엄중이 묻고 있다. 주님의 소재를 밀고했던 가룟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도 분명히 있었음을 성경은 증언한다. 법의 엄중함을 만천하에 분명히 드러내 보인 중국의 명판관 포청천에 관한 드라마가 몇 년 전 인기리에 상영된 적이 있었다. 그의 입의 선고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만큼 너무나 명확했고, 철저하게 집행함으로써 법을 위반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사람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사형에 해당되는 죄수들에게는 개작두, 용작두, 호작두 3개의 작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형수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죽는 일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만이 전부였다. 집행의 시간도 재판장이 정하고 수동적으로 아무런 희망이 없이 마지막 처형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 재판언도를 내린 재판관이 집행을 알리는 표지판을 내던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문득 주님 앞에서 서있는 우리의 실존을 생각해 보았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는 말씀과 동시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데, 두 성구를 이어보면, 이미 우리는 ‘사형언도를 받고 집행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최종선고이므로 더 이상 재심의 희망도 없고 집행만을 기다리며 경각에 달려있는 목숨을 붙잡고 발버둥치고 있는 불쌍한 존재! 그것이 우리의 실존이다. 그래서 깨닫고 보면 주님의 십자가는 이미 내려진 사형선고를 무효화시키는 위력을 발휘하므로 너무나 놀랍고 고맙고 또 고마운 은혜다. 그런데 한 가지 더 화들짝 놀래야 할 사실은 우리 앞에는 포청천보다 더욱 더 엄중한 아니 완전한 하나님의 법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억울하면 3심까지라도 갈 수 있지만, 하나님의 법정은 단 한 번의 영원한 최종심(最終審)이다. 그 재판은 이 세상의 재판관까지도 칼날보다 더 예리한 심판대 위에 세우는 재판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최종 재판인 4심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 법정은 인간 재판관이 모를 수도 있을 모든 행위들이 백일하에 들춰지고,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고, 정확하게 증명이 되는 곳이다. 종교개혁가 깔뱅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못 배우면 제멋대로가 된다. 사순절은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죄악된 삶을 슬퍼하는 기간이며. 그것 때문에 아직도 주님을 못박고 있는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연약함을 탄식하면서 보내는 기간이다. 희망없이 집행만을 기다리던 죄수를 사면하신 그 은혜를 다시 기억해내고 주의 자비를 구하는 자만이 부활을 기다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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