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는 1993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대전엑스포’, 1996년 일본 도쿄에서 ‘한일월드컵’을 주제로 작품을 발표해 수상한 경력의 소유자. 일본에서는 기술, 디자인, 베스트디자인 3개 부문을 석권해 현지 패션 전문지가 특집으로 다룰 정도였다. 남성패션문화협회(옛 맞춤양복기술협회) 감사로도 두 차례 재직한 이씨는 “서류 탈락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기능 인력을 뽑는 ‘대한민국 명장’ 선발 과정에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산업인력공단은 지난 9월 2일 기계조립과 용접, 미장, 한복, 제과 등 24개 각종 기능 분야의 대한민국 최고 기능인을 뜻하는 ‘대한민국 명장’을 선정해 발표했다. 하지만 ‘양복기능장’으로 불리는 맞춤양복 분야는 명장을 한 사람도 배출하지 못했다.
세계 최고 맞춤양복, 명장 계속 탈락
맞춤양복 분야에서 명장을 배출하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년 전인 2009년에도 명장 배출에 실패했다. 우리나라는 1967년 국제기능올림픽 맞춤양복 부문에서 금메달을 딴 후 이후 12년 연속 금메달을 석권했다. 섬세한 손기술을 자랑한 것이 무색할 정도다. 한복과 섬유가공 등 의복 분야에서 격년으로 명장을 배출하는 것에 비해서도 초라하다.
명장 선정 실무를 담당하는 산업인력공단 숙련기술장려팀의 강연식 차장은 “2009년과 2011년 맞춤양복 분야 명장을 배출하지 못한 것은 맞다”며 “하지만 이는 산업인력공단에서 임의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아니고, 서류심사와 현장심사를 실시한 결과 적합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남성용 맞춤양복이 사양산업인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12년 연속 기능올림픽을 석권한 국내 맞춤양복 업계에서 명장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업계의 반응이다. 더욱이 업계 일각에서는 “진정서로 인해 미리 내정된 모 인사에게 명장 자격을 줄 수 없자, 두 차례 연속으로 명장 선발을 무산시킨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한다.
문제의 인물은 남성패션문화협회 고위직에 있는 전모씨. 전씨는 올해 명장 선발 당시 2009년 심사에서의 표절 의혹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서류심사를 통과해 최종 실사까지 올라갔다. 전씨는 2009년 명장 선발 과정에서 2007년 맞춤양복 명장으로 선정된 백모씨의 ‘품질개선 및 사회기여도 실적표’를 그대로 베끼다시피 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기자가 입수한 전씨와 백씨의 ‘품질개선 및 사회기여도 실적표’는 주요한 문구와 단어가 거의 일치했다. 예컨대 “양복의 중심은 어깨에 있으므로(백씨)”가 “양복의 중심은 어깨에 있으며(전씨)” “어깨 다트를 보존하고 어깨 홈량을 충분히 제공하여(백씨)”가 “어깨 다아트를 보존하고 어깨 홈 주림 양을 충분히 제공해서(전씨)”로 바뀌는 식이다.
전씨의 표절 의혹을 최초로 적발해 산업인력공단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협회의 한 전직 고위 관계자였다. 이 관계자는 “과거 명장을 했던 사람의 서류를 베끼고 문장이 똑같아 거짓말하는 것이 100% 훤히 보이는데 이런 사람을 끝까지 완주시킨 것은 문제가 있다”며 “업계 내에서도 명장 심사와 관련해 ‘이래저래 누가 도와준다더라’는 말이 정황상 흘러나왔다”고 말했다.
이에 협회 관계자들은 “협회 고위직으로 나란히 재직 중인 전씨와 백씨가 서로 편의를 봐준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기능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백씨는 2007년 맞춤양복 명장으로 선발돼 협회 고위직에 있다. 반면 전씨는 “문건을 표절한 적이 없다”며 “산업인력공단으로부터도 표절 의혹에 대해 어떠한 통보도 받은 적 없다”고 극구 부인했다.
산업인력공단도 ‘표절 의혹’ 인정
강화된 제재 조항에도 불구하고 전씨는 올해 명장 심사에서도 최종 현장실사 단계까지 올라갔다. 산업인력공단 측도 “지원자 중 전씨 단독으로 현장실사 대상에 선정됐다”고 확인했다. 남성패션문화협회 일부에서는 “미리 내정된 사람을 명장으로 선정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들러리로 내세운 것 아니냐”는 반발이 강하게 나온다.
이에 명장 선정을 주관한 산업인력공단에서는 “전씨의 표절은 현장에서 잘못된 부분에 포함해 반영시켰다”며 “올해 현장실사에서 전씨의 기능 숙련도가 미흡해 명장으로 선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반면 한 업계 관계자는 “최종 발표를 앞두고 전씨의 표절 전력에 대한 항의가 고용노동부, 국민권익위 등에 제기되자 무산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지적에 전씨는 “명장으로 최종 선정된 것도 아니고 일부 경쟁자들의 음해에 불과하다”며 “실력이 부족해 6번이나 떨어졌는데 무슨 소리냐”라고 반문했다. 반면 협회 관계자들은 “산업인력공단이 신청자 관리를 그리 허술하게 하느냐”며 “특정인을 명장으로 만들기 위해 다른 신청자들의 현장실사 기회까지 박탈하는 게 말이 되냐”고 말했다.
‘상금 2000만원’ 놓고 이전투구
대한민국 최고의 기술 명장을 선발하는 명장 선정은 약 6개월간의 심사 과정을 거치게된다. 지난 4월 초부터 서울시장을 비롯해 시도지사 등 각계 기관장의 추천을 받은 인사를 대상으로 공적서류 검토, 현장실사, 심사위원회 등을 통과해 최종 선정자를 결정한다. 이는 맞춤양복 분야뿐 아니라 미장, 용접, 한복 역시 동일하다.
명장 선발을 두고 잡음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명장 선발자에게 주어지는 지원금과 각종 혜택 때문이다. 맞춤양복 분야의 명장으로 선정된 사람에게는 2000만원의 수상 장려금이 일시에 지급된다. 연간 120만원의 ‘계속종사 장려금’도 주어진다. 또 명장 휘장과 증서, 명패와 함께 해외 선진국 맞춤양복 업계의 산업 시찰 기회도 무료로 제공된다.
하지만 조건이 까다로워 맞춤양복 명장에 지원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2009년은 4명, 올해는 모두 5명이 명장에 지원했다. 국제 대회나 각종 대회에서 수상한 경력을 가진 기능장들이 대부분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맞춤양복 업계 종사자들 사이에서 명장 선정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과 이전투구가 벌어졌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익명을 요구한 맞춤양복 업계의 한 관계자는 “한 달에 양복 한 벌 짓기도 힘든 때에 지원금은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이 관계자는 “국가로부터 명장 칭호를 받는 것은 장인들의 숙원”이라며 “명장 선발 제도가 일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난다면 국가의 권위 실추로 이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End_m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