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적의 칼에 죽은
우리 조선의 백성수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300만명의 조선백성이 왜적의 칼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나마 살아나신 분은 코와 귀가 짤린 채로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야만 하였습니다
우리선조 할머니들은 왜적과 명군에 의하여
수많은 분이 능욕을 당하여 목숨을 버렸습니다
이러한 선조들의 피눈물나는 역사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지요
1591년기준으로 조선 인구수는 500만명 이었습니다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 직후
1636년 기준으로 조선의 인구수는150만명 이었습니다
350만명, 조선의 인구 70퍼센트(%)가 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원통하고 애통한 일입니까 ?
왜놈은 우리 청안이씨의 원수이기도 합니다
우리 청안이씨 큰집 용천공파 9가구 일족 전부를 도륙하여
큰집이 절손 되게 만들었으며
금성공파(백파큰집) 3가구도 절손 되었습니다
시조이신 양길 할아버지가 제주도에서 순절한 공로로 받은
포항대잠에 있든 많은 재산, 산과 논 밭을
다른 씨족에게 빼앗기게 만든 불구대천의 원수 이기도 합니다
두촌공 할아버지가 돌아 가신지(1596년) 421년이 흘러
오늘에 이르렀고
표충각(1784년)이 세워진지 233년이 흘렀습니다
두촌공이 돌아 가신지 188년이 흘러
이술현(진사) 할아버지와 이수인(통정대부) 할아버지의 끊임 없는 노력과
두촌공의 업적이 민몰되어 있음을 한탄한 경상도 관찰사와 경주부윤등
사림 선비 700여분이 서명하여 상소한 결과
두촌공의 공적이 인정되어
정조대왕이 장문(1783)으로 그공로를 치하하고 백성에게 널리 알리어
본보기가 되라 명 하시어서 충신지문이 건립되었습니다
1년(1784)뒤 영의정 정존겸의 상언으로 증직이 되시면서
표충각이 세워졌습니다
421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청안이씨 후손들은 두촌공과 표충각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지 . . .
청안이씨 후손들이 얼마나 무능력 하기에
아직도 표충각이 지방문화재로 선정 되지도 못한 채
마을입구에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은
우리 청안이씨 선조들이 지켜온 업적을 후손들이
너무 무관심하게 방치하지 않았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후손들이 너무 할 일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시작 해보자고 하여
자료를 모으고 공부를 시작 했습니다
자료가 하나 둘 그수가 쌓이기 시작 하면서
청안이씨 가문의 위대함과
두촌공 할아버지의 숭고함과 선비정신에 머리가 절로 숙여 졌습니다
두촌공 할아버지의 충효에 정조 임금이 감동 하였으며
두분의 영의정이 신도비와 정려비문을 찬하시었고
당대의 문장가들이 하나같이 두촌공을 칭송하며 글을 올렸습니다
사림의 선비들도 시로 칭송한 글이 무려 60여수에 달합니다
1592년 당시 청안이씨 인원은 9대 기준으로 36분에 불과 하였습니다
나라를 구하고자 하여 의병장으로 의거자로
나서신분이 18분 이었습니다
무과에 급제하여 왜적과 싸운 의거자가 8분 이었습니다
왜적에게 도륙당한 용천공파(큰집) 9가구와
금성파(백파큰집) 3가구를 제외하면 청안이씨 전부가 의거 하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합니다
우리 씨족도 여느 가문처럼 도피하여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 가셔서
목숨을 부지하였다면 왜적에게 큰집 자손(12가구)들이
도륙 당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하늘을 나르는 새와 들판의 짐승들도
하나같이 목숨이 두려워서 숨을 죽이고 숨어있는 세상에
목숨을 부지하지 위하여 숨는다고 하여
어느 누가 비겁하다고 손가락질 하였겠습니까 ?
하지만 우리 청안이씨들은 비겁하게 숨거나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이순신 곽재우 권율 등은 역사적인 인물로 우뚝 섰지만
우리 청안이씨 가문은 이순신 곽재우 권율 그들의 공적보다
그 공적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청안이씨들은 씨족 전체가 일어나 왜적과 싸웠다는 사실입니다
씨족 전체가 문중의 깃발을 세운채 목숨을 두려워 하지않고
왜적과 싸워 수많은 공을 세웠다는 사실 입니다
이런 가문의 역사는 동서고금 전체에도 없는
훌륭한 가문임을 우리는 망각하였고
이런 사실을 몰랐으며 이런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이런 자랑스런 역사를 우리는 알아야 하고
널리 전파 해야 합니다
우리 청안이씨 후손들은 알아야 합니다
청안이씨 가문은
실로 너무나 위대하고 장엄하며 충효를 숭상하며 살아가는
숭고한 가문 입니다
세계사 어디에도 찿아볼수 없는 훌륭한 가문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며 후손들에게 이사실을 가르켜야 합니다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
300년이 흐른후 1910년 8월29일 우리나라의 경술국치일 한일병합
매번 되풀이 되는 한민족의 한심함
98년전 1919년 3.1운둥으로 조선의 백성들은 독립을 외쳤지만 일제의 군화발에 무참히도 잣밟히고 고통받든 시절
경북 유림의 선비들은 옥산서원에 모여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신
두촌공 이팽수를 배향하는 서사를 짓기로 결의 하였습니다
독립은 요원 하여지고 3.1운동 정신은 점점 세월에 희석되어
잊혀져 가는 시점에 유림의 선비들은
두촌공을 배향하는 서사를 세워
항일투쟁 정신을 일깨우고자 하는 뜻으로
1924년 덕산서사를 건립하였습니다
덕산서사는 암울한 시기 독립의 열망을 담은 민족의 정기가 담긴
서사입니다 항일투쟁 정신의 얼이 담긴
우리 민족의 투쟁정신의 산물인 역사적 사료 입니다
덕산서사는 또 한번의 한민족 고통의 산물이자 아픔 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료들을 접하면서
이 모든 것은 혼자만의 일이 아니고 우리 씨족의 일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겨례의 일입니다
그리하여 뜻이 통하는
이진국 사무국장님과
이진택 편집국장님과
이정해 대외국장님.
청안이씨 백파문중의 문장 이장식님
총무님인 이원락님
청년회 회장인 이지태님
부회장인 이상식님과
포항에 계시는 청평군 회장님이신 이경락님
그리고 시조 이양길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울산에 계시는 이용찬님
여러분들과 어울려 청안이씨 문화재,보존,추진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고
이 문추위 구성으로 인하여 조상님들을
다시 찿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덕산서사에서는
매년 3월 중정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향사를 모시는 날 일년에 한번만 이라도 우리 선조들을 돌아 봅시다
청안이씨의 피속에는 조상님들의 숭고하고 위대한 피가 흐르고 있으며
청안(도안)이씨의 자긍심은
우리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 아닐까요
첫댓글 정말 수고사 많으십니다.
선조님들의 업적을 일께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상님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많은 업적을 알게해주신데 대해 감사 드림니다 ...
선조님들의 업적에 후손으로서 해놓은 일이 없어 너무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