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리론.
색심불이(色心不二)의 가르침
예수의 가르침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도,
신리(神理)는 하나이다.
두분이 빛의 천사인 것이다.
다만 방편이 다른 것일 뿐, 인간으로서의, 마음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는 것은 변함없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잘 깨달아야 한다.
가르침은, 생활의 방법, 신과 인간의 관계,
우리와 천사의 관련등을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서술하고 있다.
결코 어려운 학문도 아니고, 하물며 철학도 아니다.
마음과 행위의, 색심불이(色心不二)의 가르침,
자신의 마음이 신앙, 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렵게 만든 것은, 천년, 이천 년의 역사의 흐름 위에서의 인간이었고,
그 결과 오랜 기간, 신리는 인간의 마음에 닿지 않고,
지(智)와 의(意)의 인생으로 바뀌어,
정(精)인 마음의 자세가,
그것에의 가르침과, 먼 것으로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동물적인 자기보존사상의 사회,
물질 경제, 컴퓨터의 노예로, 인간은 되어갔던 것이다.
대자연의 열, 빛의 에너지를 시작으로 해서,
생활에 필요한 일체의 환경을, 신불(神佛)은 제공하고 있다.
이 만물만상(萬物萬象)에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마음이, 인류의 조화, 상호 신뢰, 협력으로 연결되어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집을 짓는 경우, 환경에 대해서도,
그 생활의 조건에 적합한 입지조건을 찾는 것이다,
토지환경, 수도, 도로, 전기의 편리 등이 제일 먼저 정해지고,
교통의 편리, 상점가, 병원, 학교 등의 편리를 다음으로 고려한다.
이윽고 하나의 집이 건축되고,
하나의 환경이 차츰 정리되고, 집단 택지화 되어 간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자기 보존적으로 되어,
평온한 환경을 스스로 파괴해 간다.
마음을 잃은 사상적 집단이 되어,
전쟁과 파괴의 부조화를 만들어내고,
물질욕에 사로잡혀서, 노예처럼 마음의 평안을 잃어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타력본원(他力本願)에 의해 자기를 잃고,
어떤 때는, 자기 형편에 따라 세상사를 판단하여 부조화를 일으키고 만다.
마음을 잃어버린 인간은 애처롭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빨리 되찾아
물질 경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제일(第一)이다.
자기에게 족(足)함을 알면,
스스로 마음은 넓어지고 구애됨이 없어져서,
모든 면(面)에 혜택 받은 환경이 완성되어 간다.
족(足)함을 모르는 인간은,
그저 밤이나 낮이나 아득바득하고, 물질에 사로잡혀,
마음이 편해질 틈이 없다.
결국 몸도 부조화가 되고,
주위의 사람들과도 조화되는 것 없이,
쓸쓸한 인생을 보내게 된다.
최후는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상응한, 똑같은 괴로움이,
또 저 세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관성의 법칙으로)
지금 우리의 그룹 중에는, 영적 현상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물질주의적 사상으로 완전히 변모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신(神)의 자식다운 자각을 되찾도록 하기 위한 현상으로서,
목적은, 올바른 인간으로서
후회없는 인생을 보내도록 하기 위한 신의 마음의 참뜻이 나타나는 것이다.
영적인 현상은,
이후 더욱더 광범위하게 크게 일어나고,
양심을 잃은 사람들에게 신의 빛을 소생시키기 위해, 많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선 우리는, 이러한 현상에 사로잡히는 것 없이,
인간답게 바른 인생을 보낸다.
이것이 제일(第一), 옳은 길(義)인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우리 마음의 마음가짐에 의해, 육체적인 현상이 일어난다는 문제는,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또 자신의 마음의 조화에 의해,
생활이 좋아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터이다.
최초의 의문에 대해서는,
육체는 인생 항로의 배이며 언젠가 노후된다고 하는 것,
선장(魂)의 조종 방법에 의해 어떤 것으로도 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혼(魂), 의식(意識)에 의한 일념(一念) 노력의 상념은,
사물을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의문은 풀리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신리의 실천 생활 속에서부터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제2의 의문에는, 팔정도,
즉 인간으로서 중도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에 의해,
자기 자신의 가치를 아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에 의해, 마음이 얼마나 광대(廣大)하고,
게다가 우리는 각자가 신불의 자식으로서 얼마나 위대한가를 깨닫는 것이 가능하다.
자기중심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
사람은 평안이 있는 조화된 자(者)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이 없는 생활이 확립된다.
자신의 상념 행위가 신리에 맞는 것이라고 하면,
마음은 신의 빛으로 뒤덮여 간다.
한 사람의 작은 존재인 마음의 조화가,
가정에 행복을 부르고,
더욱더 옆집 이웃으로, 이윽고는 나라의 조화로까지 파급되고,
화목한 집단은,
세계 인류의 마음에 투쟁과 파괴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여 간다,
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종교적 투쟁이라는 것은,
자기 보존의 종파적 사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을 설명하는 종교인이,
마음을 잃고 종파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있는 현실은 곤란하다.
지도자는, 종교의 바람직한 자세를 반성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면, 내가 설명하는 신리에 모순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무지(無智)든가, 우상(愚象)의 파수꾼이든가,
자기 보존의 에고이스트든가.
종파(宗派)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미끼로 하고 있는 위선자든가,
돈과 지위에 미련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 자격 등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