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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야고보서5장7~12절
제목 : 인내하는 자의 복
지난 주에는 “청지기적 재물관”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인내하는 자의 복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세 가지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좀 더 즐겁게 살 걸’ 하고 후회한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웃고 즐겁게 살아도 될 것을,
짜증내고 불평하다가 세월을 허송합니다.
두 번째는 ‘좀 더 베풀며 살 걸’ 하고 후회한답니다.
어차피 없어질 물질 남에게 인심 쓰면서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다 사라진 다음에야 후히 쓰고 나누며 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세 번째는 ‘좀 더 참고 살 걸’ 하고 후회한답니다.
그 때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이 행동했던가? 하고 후회한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내가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좀 더 참을 수 있었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참았더라면 내 인생이 좀 달라졌을 텐데.
참지 못해서 일을 그르친 것이 후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순간을 참지 못하여 일생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2000년도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당시 고려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은석이라는 사람은 가정생활에 충실하지 못한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에게 불만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석이는 어머니로부터 심한 꾸중을 듣다가 말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은석이는 부모와 말다툼을 벌 인 후 엿새가 지났는데도 분을 사키지 못하고 결국 이천년 5월 21일 집에서 주무시고 계시던 어머니 아버지를 망치로 살해한 후 어머니의 시체는 열 토막, 아버지의 시체는 열한토막을 내서 삼일동안 과천과 서울시 일원에 내다 버리며 사건을 은폐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경찰에 붙잡혀 구속됐습니다.
그가 재판과정에서 한 말과 그의 친구들, 주변 사람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연세대학교 이훈구 교수께서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라는 제목으로 된 책을 출판했는데,
책 제목이 그렇게 지어진 것은 그가 부모 살해한 것을 후회하며 만약 부모가 자기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했어도 부모를 살해하지 않았을 텐데 그 말 한마디 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느냐며 부모를 원망하는 말을 했기에 책 제목이 그렇게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인내(忍耐)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게 되었고,
인내(忍耐)하면 기적적인 일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려면 인내(忍耐)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인내(忍耐)해야할 이유(理由)와 인내의 방법(方法)과 인내의 결과(結果)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인내(忍耐)해야 할 이유(理由)
왜 인내해야 할까요?
1) 종말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먼저 본문이 인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이유를 살펴봐야겠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7절에서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권면하고는 이어서 8절에서“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심판”과 “심판주”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에 7절로부터 9절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인내는 종말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강림, 심판, 심판주 라는 말들을 모두 종말론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종말에 관계된 이유일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신앙의 결정판은 인내(忍耐)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어서입니다.
내 신앙의 유무(有無)와 대소(大小)는 인내(忍耐)가 판가름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노력(努力)하는 자를 인내(忍耐)하는 자와 동일시하곤 하는데
이는 시간을 참아내고, 환경을 참아내고, 자신을 참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말(終末)이란 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끝이 있기 때문에 인내(忍耐)를 할 수 있는 것이고,
본문은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주님이 세상(世上)을 심판(審判)할 날은 반드시 옵니다.
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이 말씀은 종말의 날이 임박했음과 더불어,
종말의 날은 반드시 올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내(忍耐)를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인내(忍耐)의 가능성(可能性)과 의무(義務)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인내의 세 가지 모본(模本).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인내(忍耐)의 세 가지 모본(模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7~9절에서 “농부의 인내를 본 받으라”
10절에서는 “선지자의 인내를 본 받으라”
11절에서는 “욥의 인내를 본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재림 때까지 인내(忍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1) 농부의 인내를 본받으라.(7-9절)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농부(農夫)는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참고 기다립니다.
열매는 하루아침에 거두는 열매는 없습니다.
열매를 맺는 데는 순서가 있습니다. 막4:28절입니다.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싹이 나오고, 이삭이 나오고, 다음에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농부는 싹이 나오게 하는 이른 비(10~11월네리는 비)를 기다리고,
결실을 위해서 늦은 비(3~4월에 내리는 비)를 기다리게 됩니다.
서로 협력하며 일하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의 신앙(信仰)에도 농부(農夫)의 인내(忍耐)가 필요합니다.
순서대로 되는 원리를 생각하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고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서로 원망하지 말고 자신을 살피는 심정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주님의 강림’은 시련 속에서도,
부의 유혹 속에서도 우리가 참고 견뎌야 할 이유입니다.
열매를 바라며 인내하는 농부처럼,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1:6),
마음을 굳게 하며 주님의 강림을 기다려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폭염(시련)중에
여물어가는 열매(구원)를 바라며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세상 악이 가져다준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지만,
그 눈물을 멈추게 할 만큼 우리 소망 또한 분명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만나시고 재림으로 만나시기 바랍니다.
만나면 기적이 이루어집니다.
2) 선지자의 인내를 본받으라(10절).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고난 받은 주의 선지자들의 모본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고난 받은 선지자들의 많이 있습니다.
[엘리야] 이사벨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피신하여 그는 죽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엘리야을 붙여 주십니다.
[예레미야]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요시야 왕 13년부터 (예레미야 나이 30세쯤에) 소명을 받고 유다 예루살렘의 멸망까지 약 40년간 사역했습니다.
예레미야가 40년간 말씀을 선포할 동안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70세가 넘도록 아내도 자녀도 없이 홀로 사역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레미야를 매국노로 매도했지만 그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감당했습니다.
[다니엘]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하면 죽을 줄 알면서도 그는 하루에 세 번씩 공개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사자 굴에 들어가게 되지만 하나님을 그를 지켜 주셨습니다.
[바울]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지만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후에 그는 은혜를 은혜로 여기고, 부르심의 목적을 알게 되고, 온전한 순종의 사람이 되어 주의 복음을 전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베삭과 아베느고 세 친구는 절대로 다른 신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화가 나서 그들은 풀무 불에 넣으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폴리갑] 86세,
【서머나 교회는 105년경에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이 맡고 있었다.
폴리갑(AD.80-165)은 본래 안디옥 출신이었다.
구전에 의하면, 서머나의 어느 과부가 안디옥에서 폴리갑을 노예로 샀는데,
그가 너무 똑똑해서 그녀가 죽게 될 즈음에 폴리갑을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폴리갑은 젊었을 때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다.
성격은 직설적이고, 정열적이었다.
20대의 청년 나이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86세 때에(아우텔리우스 황제) 순교했다.
익나티우스가 순교한 후 약 반세기 후에 폴리갑이 순교했다.】
폴리갑이 순교할 때에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하라는 집행관에게 ‘내가 80평생 살면서 주님은 나를 한 번도 부인 하지 않으셨는데 부인할 수 있느냐’하고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3) 욥의 인내를 본받으라(11절).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그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었고,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마리요 소가 오백겨리요
암나귀가 오백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였습니다.
사탄이 욥을 시험하게 되었는데
욥은 시련 중에도 하나님을 원망,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섭리(攝理)를 깨달았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농부의 이야기(7절)와
선지자의 이야기(10절) 욥의 이야기(11절)를 각각 들려줍니다.
사실 인내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참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주님도 이것을 알고 계십니다.
10절 보면 “오래 참음”이라는 단어 앞에 “고난”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오래 참아야 하는 것은 고난(苦難)에 대해서입니다.
그러나 오래 참음 그 자체가 고난(苦難)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에게는 이 두 단어가 실과 바늘처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내 신앙의 유무와 대소를 측정하는 가늠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10절은 이를 본으로 삼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3. 인내의 결과.
1) 인내의 결과는 기적 인생을 만듭니다.
전도자는 전도서 3장에서 매사에 때가 있으니 참고 기다리라고 하면서
전3:10절에서 “[10]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박국서에 보면 기가 막힌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악인이 날뛰는 것을 보고 견디다 못해 울부짖었습니다.
합1:3절에서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렇게 악한 상황을 눈으로 보고 이제는 더 이상 참기 어렵습니다.
라고 하박국 선지자의 간청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응답을 주신지 아십니까?
합2:3절에서“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억울해도 참으십시오.
기가 막혀도 참으십시오.
모든 일은 반드시 결말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때가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라고 하셨습니다.
2)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인내의 결과는 심판을 면하게 하여 줍니다.
오늘 본문 9절에서는 인내하기 위해서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고 하셨습니다.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인내를 잃으면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인내를 잃으면 남에게 책임을 돌리고 헐뜯게 됩니다.
인내를 잃으면 자제력을 잃게 됩니다.
때로는 분개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서로 상처입고 맙니다.
누가복음15장에 집나간 탕자 이야기를 모르는 크리스천들은 많지 않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인내하며 기다렸기에 아들이 돌아오자 너무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탕자가 돌아온 것에 대해 불평하고 불만을 터뜨린 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탕자의 형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언제나 말이 많습니다.
참고 가만히 있었으면 큰 사람으로, 인격적인 사람으로 인정받았을 텐데
집을 나갔다가 돌아와서 잔칫상까지 받는 동생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고
아버지께 따졌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있습니까?
그런데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다 없앤 아들이 돌아왔는데 뭐가 좋다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합니까?”
3) 인내하면 좋은 결과로 보상받습니다.
그러나 인내하지 못하는 자는 우매자이기에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전7:8~9절 “[8]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인내가 어려운 것이지만 사랑하면 인내할 수 있습니다.
(1) 인내는 사랑의 첫째조건입니다.
고전13:7절에서“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래참지 못할 때 하나 됨의 결혼관계는 파괴될 수 있습니다.
오래참지 못할 때 하나 됨의 성도관계도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결과를 생각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배소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엡4:1~2절“[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인내의 결과는 열매와 상금입니다.
① 농부의 인내의 결과는 열매입니다.
② 선지자의 인내의 결과는 상금입니다.
③ 하나님을 위하여 받은 고난은 복이 되며 상금이 크므로 기쁨입니다.
마5:11~12절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빌3:13~14절에서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하였습니다.
고후4:17-18절에서도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히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여기 담대함은 죽으면 죽으리라. 어떤 핍박에도 굴하지 않는 인내에서 나온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마5:11-12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상이 크다 하셨습니다.
세상에 인내 없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즐겨 먹는 꿀 한 숟가락은 꿀벌이 4천 2백 번이나 꽃을 왕복하여 얻은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한 방울이라도 흘릴 수 없어요.
작곡가 하이든은 8백 개의 작품을 작곡했는데 가장 유명한 “천지창조”라는 오라토리오는 8백 번이나 작품을 써본 후 그의 나이 66세가 되서야 완성했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만찬’도 8년 동안 2천 번이나 스케치해본 결과로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렇게 하는 것이 인내가 아니고 목적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것이 인내입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세요. 신앙의 장성한 분량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랑을 목표로 열심히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약1: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우리는 선지자의 고난과 인내를 본받아야 합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은 상급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한 고난을 기쁨으로 받고 있습니까?
=고난 중에서도 상급을 바라보고 인내하고 있습니까?
욥은 인내하므로 기적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욥42:12~17절 “[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15]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16]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17]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욥은 말년에 물질의 복, 자손의 복, 장수의 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본문 11절 하반 절에 주님의 성품이 소개되는데,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인내하라고 하면서 왜 예수님의 성품을 소개했을까요?
욥을 지켜보시며 복을 주신 그 주님께서
인내하는 여러분과 저를 지켜보시며 기적인생을 만드시겠다는 약속입니다.
(3) 선을 행하므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습니다(벧전2:20).
벧전2:19,20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성경은 인내(忍耐)를 강조(强調)합니다.
인내(忍耐)가 기적 인생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잠16:32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
잠29:11절“지혜로운 자는 노를 억제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래 참는 것은 내 신앙인격의 바로미터입니다.
인내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히10:36절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오래 참는 인격자들이 되어서 욥과 같이 기적인생의 주인공이 되기 바랍니다.
욥은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섭리(攝理)를 깨달았습니다.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고, 그 후에는 갑절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오는 시련과 고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도 고난 때에 원망, 불평하지 말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발견하여 더욱 큰 복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인내는 약속하신 복을 누리게 합니다.
① 아브라함입니다.
히6:13-15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나이 75세에 아들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데 25년 걸렸습니다. 노인이 약속을 25년 동안 기다린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꼭 25년이어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하갈로 시험도 해보시고 완전한 믿음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② 모세입니다.
모세도 40세에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서 40년 동안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는 40세에 사실상 사명을 받았습니다.
마음에 사명은 40세에 이미 불탔지만 40년이나 기다리게 하신 것은 그가 지도자로서 온전한 일군으로 구비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③ 요셉입니다.
요셉도 하나님께서 꿈으로 보여주신 통치자가 되는 약속을 받은지 오래 되었 건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형들의 시기와 미움,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에 10년, 무고한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에 3년, 모두 13년을 기다려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것은 그렇게 낮추어 준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④ <마가렛 미첼, Margaret Mitchel>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1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1,037페이지나 되는 소설을 완성했습니다.
그녀는 여러 군데를 찾아다녔으나 아무 성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갔습니다.
그녀의 소설원고는 닳아서 너덜너덜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한 지방신문에
“뉴욕의 한 대형 출판사 사장이 애틀랜타에 왔다가 기차로 되돌아간다.”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고, 그 기사를 읽게 된 그녀는 소설원고를 들고 기차역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녀가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맥밀란 출판사의 <레이슨> 사장이 막 기차에 올라타려던 중이었습니다.
“사장님, 제가 쓴 소설입니다. 꼭 한 번 읽어주세요.”
다시 세 번째 전보가 배달됐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1937년에 그 빛나는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정말 눈부신 인내의 사람이었습니다.
(5) 인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인을 만듭니다.
롬5:3-4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래서 위대한 신앙인은 모두 고난을 통과했습니다.
계시록의 흰옷 입은 사람도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이었습니다.
큰 환난은 연단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인내야말로 우리를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6) 인내는 우리 구원의 완성을 이루어 줍니다.
약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인내는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온갖 고통과 수모를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은 마치 진주조개가 진주를 품는 것과 같습니다.
조개에서 진주를 얻기 위해 조개 속에다 모래알을 집어넣으면 그 모래의 고통 때문에 조개는 그 모래알을 부드럽게 감싸기 위해서 진액을 내어서 자꾸 둥굴게 감쌉니다. 그것이 진주입니다.
잠24:16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의인은 하나님께서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온전한 믿음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때로 우리의 인내에 한계가 온다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히브리서 12장 2절을 봅니다.
“[2]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주님을 바라보면 견딜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1절) 인내는 힘이고 경쟁력입니다.
4~5년의 기간을 땅속에서 오로지 죽순으로 뿌리를 퍼트리고 영양분을 섭취하여,준비하고 있다가 5년이 지나면 25m가 넘는 대나무로 불쑥 자라나는 것처럼,
인내 뒤에는 반듯이 결과가 있습니다.
4.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12절)
“[12]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고 하였습니다.
곤경에 처하여 당장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책임지지 못할 말로 서원하거나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용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미래에 대해 장담하면서 맹세하기보다 맹세가 필요 없을 만큼 진실하고 실천하는 신앙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니 내 입의 주인조차 되지 못하는(3:8)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맹세가 아니라 기도(13절)입니다.
신앙의 형제는 “말의 신의”를 지킴으로서 서로 화목하며 교제합니다.
*'함부로 맹세함으로 짓는 죄'는 앞에서 언급하였던 “부의 교만”
“인내하지 못하는 죄”에 비하여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기 말의 신빙성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맹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이름을 개인의 필요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고 말대로 행동하지 못할 때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레19:12절 “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5:34~37절에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야고보는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여기서 다시 한 번 반복강조해서 경고한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야고보서에 기록된 말씀은
모든 종류의 맹세와 서약을 다 금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마23:16~22절까지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내용을 보아도 그렇고,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에서 여러 곳에서 일종의 맹세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1:9; 고후 1:23; 11:11; 빌 1:8; 살전 2:5,10).
그렇다면 맹세하지 말라는 명령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중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말씀과
야고보가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라"는 말씀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즉 신자는 평소에 자신의 말에 대하여 신용을 쌓아 둠으로써 무언가 어떤 중요한 사실을 두고 남에게 말할 때에도 맹세 따위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신빙성을 가지게 되면
그 신자의 '예'는 아무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예'일 뿐이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아니오' 역시 무슨 공증을 받고 변호사를 세우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아니오'일 뿐임이 확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무슨 말을 했을 때 그 상대방이 내게 "그 말이 정말입니까?"라고 되묻는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평소에 자신의 말에 대하여 신용을 쌓아 두지 못했다는 증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어떤 사실을 두고 자신의 입장을 긴 말로 설명을 해야 하거나 상대방을 믿게 하기 위해서 '강력한 맹세'까지 동원해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평소에 거짓말을 많이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성도에게 항상 진실한 말만 해 온 신자라면
그저 '예'면 "예"라고, '아니오'면 "아니오"라고 딱 한마디만 해도 그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 이상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처럼 '예'와 '아니오'라는 이 두 단어만 가지고서도
서로가 서로를 충분히 납득하고 이해하고 믿을 수 있을 정도가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예수님 안에서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교회 안에 있는 신앙의 형제들끼리 진정 화목하는 교제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단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사이부터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피차 '말의 신의와 진실'을 지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뒤에서 딴 말을 하는 사람'은 형제는커녕 친구도 될 수 없으며
가까운 이웃보다 더 못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온갖 말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교회 안이지만
이처럼 평소부터 피차 '말의 신의'를 지킴으로써
서로 '믿을 수 있는 형제'처럼 교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인내하여야 할 이유와 방법과 결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 강림 하실 때 까지 인내하여 합니다.
이 인내(忍耐)는 종말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인내의 세 가지 모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열매를 기다리는 농부의 인내와 상급을 바라보는 선지자의 인내와 고난 중에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욥의 인내입니다.
인내의 결과는 기적 인생을 만듭니다.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인내하면 좋은 결과로 보상받습니다.
농부의 인내의 결과는 열매입니다.
선지자의 인내의 결과는 상금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받은 고난은 복이 되며 상금이 크므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맹세하지 말라고 합니다.
재림 예수를 만날 그날 까지 인내하므로 복을 받는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