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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윤회,그리고 현상세계에 대하여 (대지의 2013.12.25. 16:50)
진짜로 영혼이라는게 죽음후에도 살아남아서 다른 생명체로 환생 하는 건지,아님 현대과학이 밝혀낸 DNA의 조상으로부터의 유전인지? 알수 있을까요? 또 내가 인식하는 이세상에 대한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궁리해봐도 이세상! 내의지로 만든 것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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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변에 앞서 올린 댓글을 옮김 >
(앱솔 13.12.25. 20:22)
순간은 영원으로 이어져 있기도 합니다. 조금전과 지금의 사이에는 수 많은 생과 사가 겹쳐져 왔으나, 일상중에 이 잠시의 거대함을 쉬이 느껴 볼 기회가 어렵기도 합니다. 그러나,이 잠시의 시간에 윤회와 영원이 숨어있다 할 수 있습니다. 쉽게보면, 조금전이 전생이고 잠시후가 내생이게 되는 것이며, 이는 '나'라는 자아의 대속관계 속에서 성립되는 것일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라는 인식자의 본질은 태어남과 죽음을 통하여 낳음이라는 대속관계속에서 영속하고 있는 중인것입니다. 분리된 현재가치인 지금의 '나'에 국한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함으로써
(┗ 앱솔 13.12.25. 19:51)
여러 모순이 생기게되어 여러가지 미혹을 헤메이며 살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대함에 있어 이러한 부조화된 생각으로 살게되면, 성경의 바벨탑 사건처럼 자신의 욕심에 사로잡혀 타인의 마음을 무시하여 상대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게되며, 무시되었던 상처받은 그가 또다른 상대에게 아무런 죄책감을 눈감기우고 상처를 주게되는 악순환의 세상을 스스로 선택한 세상에서 살게된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본질자는 육체만 대속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감정.정서를 조건반사처럼 고스란히 다음 대로 대물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현생에서 자신을 위한 선행을 찾아 채우려함이 아니라,
(┗ 앱솔 13.12.25. 22:12)
자신을 잊고 오히려 그의 마음과 함께하는 가운데의 생각과 행위로 사는것이 본질적인 자아에 충족되는 삶이게 될것입니다.
자연문명의 과거인류는 하늘 아래의 세상이 모든 것이고 영원할 것이라고 여겼으나, 과학문명의 현대인류는 지구,태양계,은하계의 유한성에 대하여 조금씩 인지하고 있습니다. 애벌레의 알에서 깨어나 세상을 처음 인식하는듯 하나, 이 우주는 시간이라는 개념조차 의미없는 영원의 시간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주는 극과 극이 만나 우주가 되었고, '나'라는 존재 또한 극과 극의 자아가 내재함으로서 성립되어 있다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어른으로 성숙의 시간을 갖듯이 지구인류 또한
(┗ 앱솔 13.12.25. 20:16)
우주문명을 완성할 인류로 성숙되어가는 과정에서 현재의 삶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존재케 하는 근원적 성질을 성적인 욕구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 아래의 세상을 전부로 하였던 과거인류에게는 너와 내가 되었고 이성의 대상이 되었으나, 이 시대의 인류를 포함한 미래인류는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 우리의 영원함을 약속하는 이성의 대상은 물질계인 우주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림으로 지배받는 동물적 본성인 개체자아로부터 또 다른 극인 우주적 본성인 우주자아로거듭나는 삶을 추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진실과 오해는 그 스스로의 이해범위에서 결정되어 질 것입니다. 진실의 값을 내는 이해요소의 깊고깊은 확장으로
(┗ 앱솔 13.12.25. 20:36)
'나'라는 존재로서 존재함의 진실된 이유와 의미에 더욱 가까워짐으로써, 영원의 과거와 영원의 미래에 부합되는 진정한 기쁨의 삶이 주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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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님, 의문의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하나마, 7부분별로 나누어 나름의 답변을 드려 볼까합니다.
참고로, 표현력이 부족하여 다소 난해한 문장일지라도,
보시기 쉬운데로 끊어서 차근히 보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생소한 세상을 접하게 되면서 부모로부터 그리고 사회로부터 언어를 매개로 하여 물려받은 과거적인 가치관의 눈으로 사물에 대한 진실을 각인하며 어른이 되어집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자라다 보면 자연문명의 과거시대에 의한 가치관인 '윤회'라는 말도 접하게 되나, 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져 보려 하지만 현실의 사실로서 쉬이 와 닿지 않기도 한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어쩌면, '윤회' 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적인 오해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체성의 인지부재로 인한 차이만큼이나, 여러 문화권에서 형식된 종교에서 표현하는 여러가지 방편적인 말들이 다소 혼란스러움으로 다가 올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할 것이라고 여겨 집니다. 어차피, '나'라는 우주적인 존재의 정체성을 깨닫지 않은 상태라면 어떤 진실된 말일지라도 자신과 일체화되지 않고 이질적으로 겉도는 헛된 말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Q1. 여러 글들을 봤는데도 명확히 풀리지 않는게 윤회입니다.
다음 국어사전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 윤회 [輪廻] : ① 생명이 있는 것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이 반복된다고 하는 불교 사상
②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사를 반복하다
◆ 윤회설 [輪廻說] : ①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자신이 지은 업보에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육도 혹은 육취에서의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는 불교 교리의 하나
◆ 윤회론 [輪廻論] : ① 인간은 해탈하기 전까지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는 불교의 이론
◆ 방편 [方便] : (1)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일을 쉽고 편하게 치를 수 있는 수단과 방법.
(2) [불교] 십바라밀(十波羅蜜)의 하나. 보살(菩薩)이 중생을 근본적인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쓰는 묘한 수단을 말한다.
◆ 업보 [業報] : 자신이 행한 행위에 따라 받게 되는 운명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의 방편된 이해는 아래와 같은 주된 내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1) 인과의 법칙으로 전생의 과보로 현생에서 태어나게 되었으며,
2) 현생에만 국한하여 살지 않고, 전생처럼 내생이 있을 것이며,
3) 현생에서의 선행과 수행으로 내생에 지옥(지옥,아귀,축생)이 아닌,
극락(아수라,인간,천상)에서의 안락한 삶이 결정(보장)될 수 있다.
'윤회론'은 '깨달음'의 의식에 비추어진 생명성(生命性)에 관한 추상적인 진실을 본질적인 이해인 '깨달음'의 의식에 닿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돕기 위한 가시적인 쉬운 개념으로 표현한 방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의 현실적인 삶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에 대한 이해와 결부성을 찾기 어려움에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이에 대한 의문은 입문절차에서 무시되거나 일방적인 믿음만 강요하는 결과가 지속되어, 삶에서 쉬이 접목이 되지 않고 '윤회'와 '현실'의 이질적인 의심을 망각하지 않고는 머리를 지속적으로 어지럽히게 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대중들에게 있어서 '윤회론'은 그 주된 이야기에 의심함이 없이 일방적인 믿음을 요구하고 교리에 대한 강제성을 띠는 모순된 것일지라도, 전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로서의 삶에서 반드시 가져야 할 성숙된 도덕과 윤리를 이끌어내어 사회적으로 추구하는 결과의 효과를 내게 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윤회의 실재적인 진실성과 동떨어진 방편된 이야기일 뿐이기에 전혀 의미를 둘 필요가 없는 것이라 치부할 수도 없는 긍정적인 면이 있기에 사실된 이야기가 아니라며 일방적으로 부정하지 못하는 현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현실이 그렇더라도, 성경에서의 표현인 '심판'을 포함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론'은 수 천년 전의 과거인류에게 어울릴만한 성인용이라고 본다면, 어린이용은 아이들에게 산타할어버지와 같은 효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이에게 왜 울기만 하여서는 안되는지 그리고 왜 선한일을 베풀면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무엇보다 진실되고 중요할 것이나, 복잡한 이해를 줄여서 이해가 닿지 않는 사람이나 아이가 솔깃할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이나 선물을 먼저 제시함으로서 의도하는 효과를 쉽게 얻을 수 있는 목적으로 방편된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윤회'에 대한 방편적인 표현이라 하여도 무방할 것입니다.
따라서, '윤회론'은 현생에서 일생의 삶을 갖는 동안 여러가지의 지은 일들이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주게되며, 선업이 쌓이게된 업보가 사후의 내생에도 영향을 주게되어 만족할 수 있는 염원하던 삶이 연장된다는 약속을 목적으로 하므로, 동물적 본성에 지배를 받는 현재의 삶에서 선악을 구분하기 어려운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포괄적인 도덕과 윤리성에 준한 합리성으로 다시금 검증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에게 제공하는 매개로서 보다 인간다운 삶을 갖게 하는 중요한 가치를 갖는 역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Q2. 진작에도 윤회라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왔지만
그 근본이 무었일까요?
'윤회'라는 표현은 본질적으로 보면 전혀 거짓되지 않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으나, 무엇보다 방편된 표현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진실된 '깨달음'의 의식에서만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며, 오해가 사라질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또, 깨달음의 의식에서만이 왜 그렇게 표현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오해를 풀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깨달음'의 순간에 대하여 좀 더 정확한 표현을 구하여 보자면, 물질적인 우주라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생겨난 인간으로서 우주를 대할 때, 어느 순간에 자연의 현상을 통찰하여 얻은 자연섭리에 대하여 불에 덴듯한 체득의 결과로서 우주가 존재하는 일정한 순환법칙 또는 섭리질서 속에서 '나'라는 존재로서 존재하게된 정체성을 찾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체득한 정도와 이에 대하여 이성적인 지각에 따라 갖게된 '깨달음'의 크기로, 오직 자신만의 우주 속에서 일통즉만통(一通卽卍通)의 삶을 갖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동시에, 주변의 모든 요소의 존재들은 합리적이고 평화로운 자신의 우주를 구성하는 우호적이고 긍정의 요소로서 어우러져 동화된 삶을 갖게 되는 하나됨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윤회'의 현실적인 차이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는 '깨달음'의 의식으로 본질적인 이해와 합리성을 가질 수 있겠지만, 이는 2차적인 문제로 하고, 많은 이해가 결부되어야 하겠지만 현실의 실재와 추상의 실재의 양면(兩面)을 간단히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지금의 '나'라는 본질자는 개체(個體)인 육체를 기준으로 하여 살아오는 동안의 기억에 의존되어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나'의 기준이나, 실재의 모든 생명자는 물질적 여건인 위치와 형식(문화)만 다를 뿐 언제라도 동일한 감정을 가진 생명자임을 인정할 수 있는 의식이 요구됩니다. (광의로서 모든 생명자의 범위에는 물질도 포함이 됩니다.)
(2) 조금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기억에 의존되어 일자(一者)로서 동일자로 인식하고 있으나, 물질적 여건으로서 시간을 잘라 보면 젼혀 다를 수도 있는 생(生)과 사(死)가 중첩된 타자(他者)일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의식이 요구됩니다.
(3) '나'의 본질은 순간이 연속적으로 기억된 정보에 의존되어 생겨난 상대성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과거의 누구라도 그러하였듯이 이미 자신도 그 과거의 누군가처럼 태어남에서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과거가 될 자신이지만, 500년 전의 자신이나 500년 후의 자신이나 지금의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일자(一者)일 수도 있음을 인정할 수 있는 의식이 요구됩니다.
(4) 우주가 존재하는 속성이 변화의 값으로서 생명성을 갖게되어 존재하는 속성에 따라 모든 만물이 존재하는 속성이 그러하며, 그러한 속성에 따라 존재하게 되는 인간 또한 동일하게 생겨나고 없어지는 속성의 과정에서 삶을 갖게 되는 것이며, 이의 형태로서 부모와 자식의 차이라 할 수 있으나, 조금전과 지금의 '나'에 대한 차이처럼 물질적 여건의 차이라 할 수 있는 시공간만 차이일 뿐 동일자일 수도 있음을 인정할 수 있는 의식이 요구됩니다.
(5) 우주적인 시각으로 보면, 지구라는 존재 또한 생겨나고 성숙의 과정이라는 삶을 통하여 죽음을 맞게되는 하나의 개체로서 생물체라 할 수 있으며, 그 성숙의 주체는 인간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과거인류는 나의 어릴 때의 모습이 되고 미래인류는 나의 성숙된 모습이게 됨에 대하여 인정할 수 있는 의식이 요구됩니다.
(6) 우리가 갖는 모든 삶의 형식들은 깔때기에 쏟아 놓은 물처럼 그 의미가 종국(終局)으로 모여지게 되나, 우리가 존재함으로 갖게 되는 삶의 의미는 미래의 성숙을 위한 과거로서 주어진 정화과정의 역할로서, 누군가는 동물적 본성인 개체적 자아에서 일으키는 부정의 감정을 정화해야 하는 몫으로 주어진 삶임을 다시금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의식이 요구됩니다.
(7) 주어진 삶에서 정화해야 할 부정의 감정의 주체는 지구인류의 성숙을 위한 과정에서 깨어남으로서 주어지게 된 ①개체의 본성이자 동물적 본성인 개체적 자아로부터 ②태초에 주어진 우주의 본성이자 우주적 본성인 우주적 자아로 승화됨으로서 ③인간이라는 존재로서 존재함의 의미가 완성되고 귀결되어짐에 대하여 인정할 수 있는 의식이 요구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존재함에 따른 의미의 귀결은 결국 동물적 본성인 개체적 자아와 우주적 본성인 우주적 자아와의 대립관계에서 모든 인류가 역사를 통한 성숙의 과정에서 우주적 자아로의 승화로 귀착됨의 목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8)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지구인류로서 가질 수 있는 인식의 범위를 4,8,12차원으로 표현하여 나누어 본다면,
1) 자연문명의 과거인류는 깨달음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4차원의 의식 속에서 3차원의 우주를 인식하며 4차원적인 의식인 종교적인 영성을 추구하며 살았으나,
2) 오랜 자연문명의 역사를 통하여 성숙된 현대인류는 깨달음을 통한 종교적인 껍질을 깨어 낸 4차원적인 영성으로 8차원의 의식 속에서 7차원을 인식하는 동안 개체적 자아가 정화된 의식으로 풍요로운 삶이 주어질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3) 우주문명을 가질 미래인류는 12차원의 의식 속에서 11차원을 인식하며, 민들레 홀씨처럼 영원의 과거동안 수 많은 지구와 같은 별에서 삶을 가졌듯이, 지구의 모든 생명을 새로이 부활시키게 되는 것이 지구인류에게 주어진 미래문명의 완성을 말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Q3. 진짜로 영혼이라는게 죽음후에도 살아남아서 다른 생명체로 환생 하는 건지,
추상의 실재로는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오직 산 자들의 세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며, 과거의 그가 지금의 나이고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이기도 한 이유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자연문명의 과거인류들은 이러한 동일한 '나'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동물처럼 육체를 중심으로 한 자신만을 '나'의 범위로 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고통을 주는 생각과 행위가 그치지 않기 때문에 추상의 4차원적인 의식인 종교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삶을 중재하는 역할로서 종교가 만들어지고 갖게 되는 이유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모든 형식의 종교는 생사의 의미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살아있는 산 자들의 이야기일 뿐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영원한 생명성을 가진 상태 또는 생명성이 보장된 상태에서 생명성에 대한 모든 의미를 가지게 하는 역할로서 방편된 종교가 유지되어 오고 있는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바탕은 우리는 태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원의 과거라 할 수 있는 비존재에서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기에, 그 염원을 지키기 위해 내재된 본성에 의한 본능으로 영속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죽음으로부터 회피하려는 심리로 공포스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종교의 유효성 또한 이러한 바탕으로 유지되어 오고 있는 이유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공포의 진원지를 찾게되는 의식인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자연문명의 과거인류들은 스스로를 위한 과제로 위안하며 내세관(來世觀)을 키워오게 된 이유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Q3'에 대한 답변에 언급한 대로 자신은 태초의 우주로부터 이미 존재하여 왔으며, 영원을 약속할 수 있는 능력이 내재됨을 알게하는 깨달음의 의식에서 비롯된 내세관은 진실과 크게 동 떨어지지 않는 진실이 되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일생의 삶을 깨달음의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3차원적인 의식으로 보면, 살아있을 때의 정신작용은 생체의 작용으로 기반되어 있기 때문에 죽게되면 전깃불이 꺼지듯이 소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게된 그가 살아오는 동안 가져온 문화적 가치는 살아있는 다른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본다면, 과거에 누군가가 지어 놓은 집에 오늘의 내가 이사를 가서 편히 살 수 있는 문화의 바탕이 되거나, 그가 살아오는 동안의 지식,생각,행위는 누군가에게 유익한정보,기쁨,상처로 남게하여 전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이 그의 죽음을 통한 정신의 소멸함과 반대로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전달되는 '윤회'라는 형식의 갈고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윤회, 환생, 영생'이라는 것은 실재와는 사뭇 다른 추상의 개념적인 실재로서 깨달음의 의식에서만 유효할 수 있는 영속적인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깨달음이 없는 인간 이외의 동물들의 차원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깨달음이 없는 인간에게도 아무런 의미가 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생명을 개념하지 않고 살았던 그 자신이 가졌던 해악의 행위에 대한 결과는 불특정한 자신이 그 결과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 날의 고통은 과거에 자신이 자신의 이익을 앞세워 주위의 생명을 대하였던 과보를 받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궁극적인 깨달음의 의식은 인간과 동물 그리고 물질과 생명이 구분되지 않는 자아의식이기도 하나, 과정적인 이해가 없이는 의미가 완전할 수 없기에 임시적으로 배제코자 합니다. )
동물들과 달리 인간에게는 우주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는 완전한 값을 내재함으로서 삶을 갖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완전한 값을 '회복된 양심'이라고 지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삶에서의 모든 생각과 행위는 완전한 양심의 영역에 검증을 받아서 만족 또는 불만족 그리고 행복과 불행을 감지할 수 있는 감정으로 스스로 갖게 되는 기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족의 지속성에 따라 온전한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하여도 무방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잣대에 부합할 수 있는 것은 "의하여 존재하므로 위하여 존재하는 본성에 충실할 때"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Q4. 아님 현대과학이 밝혀낸 DNA의 조상으로부터의 유전인지? 알수 있을까요?
동물에게서 갑작스럽게 인간이 태어날 수 없겠지만, 인간에게서 보다 나은 인간은 태어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예를 든다면, 임산부가 태어날 아이를 위하여 말과 행동을 조심히 하는 것을 태교라고 합니다. 우리가 쉽게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의 정서가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도 보이지 않게 전해질 것인데, 살아서 서로 교감하는 우리들의 사이에서도 태교처럼 전해지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타의 생명 또한 자식을 여기는 마음과 같이 동일하게 '나'의 범위에 포함하지 않고 있다는 현실을 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유로, 세상에 떠도는 부정의 감정들이 오랜 동안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정화되지 않고 번복된 고통으로 전해지고 있음으로, 오늘날의 '나'를 다시금 고통 속에서 살게 하고 있다는 것을 도외시(度外視)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우주가 만들 수 있는 또는 우주가 마지막으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주의 속성인 변화의 속성에 따라 생과 사를 결정짓고, 낳음을 통하여 스스로 복제하여 영속하며 성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변해가는 우주의 환경에 따라 갖게된 유효성을 상실한 굳은 과거적 정보는 죽음과 함께 소멸되며, 태어나는 아이에게는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를 비워놓은 상태에서, 새로운 유효한 정보를 습득을 기대하며 미래의 유효성을 밝히며 존재하는 효율적인 형식 때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우리의 본성 속에는 이미 우주가 존재하기 이전 부터의 속성을 내재함으로서 영원의 과거를 지난 오늘 날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생겨난 육체에 포함된 DNA 속에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기능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마지막 완성이 영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며, 인간은 우주의 온전한 질서로서 우주의 모든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기능이 내재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변화의 값으로서 생명성을 갖게되며, 이러한 생명을 기억함으로서 비로소 존재성을 말할 수 있는 생명성을 가진 존재로서 유효성을 갖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주에 대한 기억은 일깨워지지 않은 본성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갓난 아이가 배와 우주선을 만들 수는 없겠으나, 성장과 성숙의 시간을 통하여 필요한 때에 만들 수 있는 이미 가진 능력을 표출한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Q5. 또 내가 인식하는 이세상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인체오감을 통해 느끼고,보고,만져볼수 있지만 이게 모두 가짜라면?
홀로그램이라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질수도 있는 허상일뿐인데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나'라는 존재는 비실재하는 값의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 + 2 + 3 = 6 이라고 볼 때, 실재는 1,2,3이나 값인 6은 비실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라고 하는 존재는 실재하는 1,2,3의 값,그림자,홀로그램,환영 등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주인은 실재(1,2,3)와 비실재(6)의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식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데, 모든 있고 없고의 가치기준은 오직 인식의 기준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실재하는 1,2,3만 있다고 하여 이의 의미를 모두 갖는 6이 없다면, 1.2.3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인식자가 의미를 갖는 6이라고 하나, 1,2,3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성립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값,그림자,홀로그램,환영 등의 일방으로 치우침은 온전한 '나'의 온전한 정체성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의 의문에서 부분적으로 설명이 되었다시피, '나'의 범위를 협소하게 육체적인 기준으로 보아 '나'와 '너'를 구분하여서는 아무런 해답을 찾기 어려울 수 있을 것이며, 동질한 전체 속에서 '나'를 발견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 발견하게 된다면, '나'는 다른 옷을 입고 다른 문화 속에서 그 자리에서 지금 이 순간처럼 영속하여 왔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현재에 주어진 개체로서의 삶 또한 미래의 완성을 위한 그 과거로서 공여자의 삶으로 주어져 있음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오늘날의 우리는 과거의 수 많은 희생으로 오늘 날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미래 또한 오늘날의 우리의 헌신적인 삶의 의미를 바탕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부분에서 영원한 존재함의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Q6. 생각할수록 어렵습니다.
하긴 생각조차도 내 것이 아니지요. 내마음대로 제어가 않되니까요.
이세상! 내가 만들어낸 홀로그램 일까요?
나는 그 홀로그램세상에 존재하는 아바타인가요?
저의 경험으로 두 번의 애로점을 경험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로보트의 비애'였고,
두번째는 '삐에로의 비애'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카페 대문에 '우주가 깨어난 나'라고 되어 있고,
게시판 '앱솔의 단상(斷想)'에 공지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 우주가 깨어난 「 나 」..
우주는 존재하나 존재함을 느낄 수 없는 깊은 잠 속에서 무한의 시간을 통한 염원으로
비로소, 인간으로 깨어나 스스로 존재함을 느끼는 우주본체자이며 분신자인 '나'라는 인식자입니다. (하략) 》
'Q5'의 답변처럼, '나'라는 존재는 값의 존재임을 알게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첫번째는 '값의 존재'임을 알게 된 로보트처럼 느꼈고,
두번째는 '정하여진 프로그램'대로 희노애락을 겪으며 살아야만 하는 삐에로처럼 느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원화된 지각마저도 개체적 자아에서 비롯된 마지막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는 물질계의 우주가 스스로의 의지로 깨어난 '우주의 당사자'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깨어남으로서 비로소 우주의 모든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며, 순간에서 영원의 모든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홀로그램이라든지 자신이 아바타라든지의 고뇌도 궁극의 입장에서 보면 온전하지 않음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비존재와 존재의 의미를 모두 가지며 주관하는 우주에서 유일한 주관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쪽에서 의문에 대한 답을 가지려는 것은 무모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보여지는 세상이 환영이든 실재이든 이미 양자를 가진 '나'라는 존재로서 실상에 대한 인정함 속에서 유일한 평온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한 연속 선상에 어느 점에서나 지금처럼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현재가 과거의 어느 지점일 수도 있고 미래의 어느 지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 염원하던 미래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며, 미래에 염원할 미래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미래를 좇으나 과거를 좇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서 '나'라는 존재는 우주의 영원함 속에서 순환의 마디를 거치며 영원히 존재하고 있는 존재의 속성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Q7. 그런데 아무리 궁리해봐도 이세상! 내의지로 만든 것같지 않습니다.
너무 마음에 안들어서 말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린 아이가 모든 일에 서툴고, 소년이 실수가 많다고 하여 모조리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구인류는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처럼 또는 갓난 아이로부터 소년으로 성숙하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머물러 존재하는 우리는 세상이 온통 조화롭지 못하며 불만족 투성이인 자유롭지 못한 세상으로 보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주의 모든 존재는 생성,성숙,소멸이라는 일정한 순환 속에서 존재하게 되므로, 지구에서 깨어나 성숙하고 있는 인류 역시 그 순환의 리듬에서 오늘날이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당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완전함에서 왔기에 삶에서 일으나는 불만족은 만족이라는 과제로서 오늘 날의 불완전한 삶이 의미가 있게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수레바퀴의 한 조각처럼 각 개체마다 가질 수 있는 좁은 통로에서 존재하게 된다고 할 수 있으나, 그 가운데는 모든 존재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중심자리가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으로서 주어진 온전한 의식인 '깨달음'이라는 의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동물적 본성인 개체적 자아를 정화시킨 가운데의 의식에서 비로소 주어질 수 있는 우주적 본성인 우주적 자아라는 우주의 중심자리에서 존재함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함께하게 되는 개체적 자아에 있어 구애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을 갖는 것이, 불에 덴듯한 자각으로서 일체의 망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깨달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부족한 표현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ㅅ
(2014.01.07 1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