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시간은 나와는 다르다 외 9편
유 성식
고양이가 눈을
감았다 뜬다
눈 깜빡할 사이…
녀석의 시간은 내 시간보다
10배 빨리 흘러간다.
고양이가 눈을 감았다 뜬다.
오, 자꾸 눈을 감지 마라,
바람 같다 너와의 인연.
고양이가 눈을 깜빡인다
나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
저 언덕 너머
아니면
지나간 그 어떤 것을.
눈물 흘리며 찾아다녔던
번개와 무지개와 황홀경을.
눈을 깜빡이고 나면
고양이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길모퉁이
더 이상 가지 마라
그것을 돌아가면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마주칠 것이니.
쌍무지개
비가 갤 때 나타난다는
쌍무지개 찾아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지만
비만 잔뜩 맞고 돌아왔네.
비가 갤 때 나타난다는
쌍무지개
폐지 줍다 비를 피하던 노인이
다리 밑에서 봤다고 하네.
장미는 죽는가
장맛비가 쏟아지자
하늘에서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붉은 입술처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혼자만의 성감대
봄바람에 성급히 달아올랐던
5월의 장미
제 죽는 것을 감추고
살구처럼 배시시 웃으면서
행인들의 발치에
온 몸을 내던진다.
세련되고 음란한
저 우주의 비밀…
순진한 지구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떨어진 입술들을 품는다.
바쁘다
폐지가 가득 담긴 손수레
삶의 무게보다 더해 보이는
짐을 끌고 가는 노인
내리막길을 버티는 팔뚝에는
땀에 찌든 잔주름이
해골 문신처럼 번뜩이고
잔주름 밑의 앙상한 근육들은
해질녘 물고기처럼
바쁘게 움직인다.
갈 길이 멀기 때문인가
날이 저물기 때문인가
비탈길
중력이 이끄는 길이지만
노인의 온 몸의 근육은
시간의 부름에 저항한다.
바쁘게.
고양이는 오후면 열반에 들어가신다
사료를 배불리 먹고는
탁자 밑에 길게 누워
하품하는 고양이
내일도 없다
꿈도 없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게으른 혓바닥 뒤로
후루룩 숨어드는 순간
녀석의 비밀이 드러난다.
어떤 고뇌도 허용하지 않는
저 열반의 아타락시아.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는
하오의 낮잠.
얼굴을 보려는가
보려 하지 마라
그것은 거대한 허공
온 밤내 속삭였다 새벽이면 사라지는
달콤한 미혹迷惑의 허깨비
이미 지워진 발자국을
덧없이 밟아 보는 것과 마찬가지니.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
마음은 그곳에 머문다.
돌아보지 마라
문은 등 뒤에서 닫히고
발은 제 갈 길로 간다.
바다가 더 이상 부르지 않을 때
바다는 오래 전부터
우리에게 손짓해 왔다
갈매기는 노래 부르고
모래는 발가락을 간지럽히고
파도는 너와 같은 처녀들을
설레게 했다.
너는 머리에 꽃을 꽂고
해변을 거닐었다
꽃처럼
너는 시들어 가고
바다는 세월을 먹지 않는다.
낙엽들은
바다로 가지 못하고
마을 언저리에서
조용히 울다 사라진다.
바다가 더 이상
너를 부르지 않을 때
너는 바다와 하나가 된 것이다.
봄은 살랑살랑 가벼웁고
가을은 끝없이 넓다.
꼬마 마녀를 기다리는데
코흘리개 시절
싸리 담장 너머 댕기머리와 단짝이었네.
내가 사랑한다고 했을 때
깔깔깔 웃던 그 아이
나는 꼬마 마녀라고 불렀지.
이삿짐 싸서 울며 떠나던 날
그 애는 말했네
어른이 된 후에도 알아볼 수 있도록
너를 영원히 아이로 남겨 둘 거야
수리수리 마하수리.
세월은 흘러
그 애는 어른이 됐겠지만
나는 아직 어린 아이로 남아 있네.
싸리 담장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본 듯한 얼굴이 지하철에서 스쳐 지나고 나면
밤마다 칭얼거리듯 혼자 읊어보네
아브라카다브라
아브라카다브라.
효력 없는 외짝 사랑의 주술을.
보일러의 에로스를 버리지 말라
가끔씩 헛돈다는 이유만으로
아내는 보일러를 바꿔 버렸다
아직 건장한 몸뚱이에
팔다리도 멀쩡히 붙어 있는 보일러가
교통사고 환자처럼
캐리어에 실려 나갔다.
태어나자마자 노동을 시작해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쉼 없이 물을 돌리면서
남의 온도만 맞춰 주던
저 오즈(Oz)의 심장.
정작 자신을 위해
한 번도 화끈하게 타올라보지 못한
억울한 정열은
산신이 분해돼
바닥 모를 매립지로 떠나갔다.
바닥이나 빨리 쓸어,
아내의 말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대꾸했다.
넌 쟤처럼 누구를 따뜻하게 해 줘 봤어?
산문
시간을 되찾다
유성식
두 번째 시집을 내고 10여 년 동안 제대로 쓰지 못했다. 감각은 무뎌졌고, 생활은 진부해졌고, 도깨비에게 홀린 것처럼 어디에서도 길을 찾지 못했다. 그 동안 소중한 가족을 잃었다.
시간이 정말 무시무시하게 흘렀다. 그렇게 무서운 시간에 대해 다시 쓰기 시작했다.
함께 10년을 살아 왔던 고양이가 병원을 자주 찾게 되면서, 녀석이 나보다 빠른 속도로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어느 날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을 보다가 ‘고양이가 눈을 감았다 뜬다/ 오, 자꾸 눈을 감지 말아라// 바람 같다 너와의 인연’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나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점점 궁색해지는 것을 느끼면 自我라는 것이‘온 밤내 속삭였다 새벽이면 사라지는/ 달콤한 미혹의 허깨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롯한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남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아 왔던 세월은 ‘남의 온도만 맞춰 주던/ 저 오즈(Oz)의 심장’이라는 자각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모두 ‘꽃처럼 시들어’가는 존재… 바다처럼 ‘세월을 먹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선망이 마음속에 공존함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배시시 웃으며’ 떨어지는 꽃잎처럼 ‘세련되고 음란한 비밀’을 아직도 갖고 있기를 욕망하지만, 결국은 몸과 마음에 어떤 충동도 일지 않고 ‘바다와 하나가’ 될 운명이라는 것 역시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었다.
첫 시집을 냈을 때 내 시를 읽고 ‘무섭다’고 한 친구가 있었다. 그 때는 난해하고 강렬한 이미지들을 많이 사용했다. 이제 ‘무섭지’ 않게 쓰려 한다.
유성식 서울 출생. 1992년 《현대시》 등단. 시집 『얼음의 여왕』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