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천 번제와 백일기도
신실한 성도의 믿음의 기도란 일천번제, 백일기도 보다 더 높고 깊은 신앙의 생활이란 것을 말하고 싶다.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 받은 성도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모든 것이 번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헌신 된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교인의 삶은 교회에 출석했을 때, 예배드리고 있을 때, 전도하고 있을 때, 기도하고 있을 때, 찬송하고 있을 때, 그 때만 하나님께 헌신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성도는 종교적 신앙의 틀에 갇혀 있다 하겠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교조적, 또는 도그마의 종교적 의식화 된 자유롭지 않은 묶임의 삶이고 무거운 수고의 삶이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성도”는 그렇지가 않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거듭난 사람, 즉 “성도”의 삶은 예수를 믿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육신의 장막을 벗는 순간 까지 뿐 아니라 영원한 영생의 세계까지, 하나님께 헌신 된 삶인 것이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만 발견 되는 사람이다. 예수 밖에서는 죽어버린 사람이다.
“성도”는 믿음 안에서만 확인 되는 사람이다. 믿음을 벗어나는 순간 그는 이미 없는 사람이다.
“성도”는 성령 안에서만 존재 가치가 있는 사람이요 성령을 벗어나는 순간 그는 이미 “성도”는 아닌 것이다.
갈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성령의 인도 하시는 바” 이것, 오직 이것만이 율법에 묶여서 율법을 실행하는 “성도”가 아니라, 율법이 하라고 했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끌려가면서 무겁게, 중압감을 가지고 율법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랐더니 내 스스로 감각하지도 못하는 중에 인식 되지 않는 중에 자신이 성령님의 열매를 맺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신비한 삶이요, 자유로운 삶이요, 가볍고 쉬운 삶이 되는 것이다.
동양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 신앙의 근저에 동양 종교적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백일치성’ ‘삼보일배’ ‘삼치레’ 등등의 것들이다.
이것들이 솔로몬의 ‘일천번제’ 예수님의 ‘40일 금식 기도와’ 마주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자 하는 열망일 것이다.
내가 신학교를 다닌 그 때에도 내 동기 중에 “일천번제파” 가 있었다.
그 때, 그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야간 신학 이었으니까?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밤10시다. 그 시간이후 그들은 배낭을 메고 삼각산으로 올라간다. 정말 보통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 특별한 사람들 이었다.
그런데, 신학 졸업 후 27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 사람들 모두가 소식도 없는 존재가 됐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가 그렇다.
목회는 물론, 신앙생활도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전혀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그 그룹에 속해 있다가 중도에 탈락한 동기인 박?? 여의도순복음교회 교구장 목사를 만나서 그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박?? 목사는 그들과 함께 죽을힘을 다해 산기도를 같이 하다가 삼년 째 되는 해 어느 날, 하루를 빠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후부터 그들이 박?? 목사를 을 왕따 시키더라는 것이다.
그들이 일천번제를 마친 후에는 얼마나 영적으로 교만했던지, 그들의 그룹에 어느 누구도 같이 할 수 없었고, 그 후 박?? 목사도 그들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일천번제, 백일기도, 40일 금식기도, 이러한 것들이 성도의 신앙 훈련으로써 실행되고 있다면,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더라도 위험성은 그 자체로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했다고 하는 자부심이, 자기 공로로 자신의 영혼 안에 자리 잡기 때문이다. 이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한 신자가 되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신앙은 “매일매일” “항상” “매순간” 하나님께 헌신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는 자신의 현재의 일상이 자신의 일임과 동시에 하나님나라 일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예수죽음 내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이기 때문이다.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자기를 날마다 죽이는 신앙생활은 자신의 온 삶을 자신의 삶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생명으로 사는 예수의 삶으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삶인 것이다. 그래서 매일매일의 일상이 자신의 삶이지만 자신의 삶이 아니라 예수의 삶이라고 믿고, 꿈꾸고, 그리고, 말하여 믿음을 다져 가는 신앙이다.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豊盛히 居하여 모든 智慧로 彼此 가르치며 勸勉하고 詩와 讚頌과 神靈한 노래를 부르며 感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讚揚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主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感謝하라
그렇다.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실체인 것이지 생각 속에 머물러 있는 관념의 신앙이 아닌 것이다.
매일매일의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인 것을 입으로 시인해 보라, 설령 자신의 현재의 삶이 그리스도 삶과는 현저하게 차이가 있거나 심지어 정 반대되는 삶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말해 보라! 그러면, 자신의 의지로 되지 않던 더러운 삶이, 극복 되지 않던 악습들이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초자연적 믿음의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이다. 나의 옛사람, 어머님 태로부터 나온 자연적인 생명을 예수를 믿는 순간 이미 죽어버린 생명이다.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이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낳은 새 생명이다!
이 생명은 믿음 안에서 확인 되는 생명이다. 오직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 믿음 안에서, 인식하고 인지되는 신비한 생명이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十字架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肉體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爲하여 自己 自身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恩惠를 廢하지 아니하노니 萬一 義롭게 되는 것이 律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이 생명을 법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이라고 말한다.
國漢文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者에게는 決코 定罪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生命의 聖靈의 法이 罪와 死亡의 法에서 너를 解放하였음이라
3 律法이 肉身으로 말미암아 軟弱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罪로 말미암아 自己 아들을 罪 있는 肉身의 貌樣으로 보내어 肉身에 罪를 定하사
4 肉身을 따르지 않고 그 靈을 따라 行하는 우리에게 律法의 要求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래서 성령 세례 받아야하고 그래서 지속 적으로 성령 충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