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끼의 말뚝
전 정 우
< 9, 마지막 회 >
내 주머니를 합법적으로 털어가는 그들에게
고자질 그만두고 빚이나 갚게.
우리 사이 거래는 아직 유효하네.
빚이나 갚게.
자네가 이리 온다면 그 빚은
저절로 청산되리라 믿네.
적절한 처신을, 회신을 바라네.
술 몇 잔을 거푸 들이켠 다음 카운터에 고개를 박고 눈을 감았다. 아름아름 머릿골 사이로 피어오르는 얼굴에 순서가 없었다. 어릴 때 친구, 동창, 혹은 군대 동기들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사라졌다. 같이 입사했던 직장 동료들, 친척들 얼굴까지 무절제하게 떠오르는 군상들, 나를 비웃는 상통뿐이지 않은가. 아내가 불쑥 나타나는가 하면 아이들 얼굴이 클로즈업 되었다. 이만 그들과 지상에서 하직할 때가 된 게 아닌가. 잠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갓난 애 손바닥만 한 총이 잡혔다. 깜찍해 보이는 총은 살상능력이 신통치 않은 물건, 옛날 우리 할머니들이 옷섶에 달고 지냈다던 장식용이자 정절의 표상, 장도칼 비슷했다. 유효사거리라 해보았자 수 미터에 지나지 않겠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하면 관통상을 입거나 절명하게 될 게 확실했다.
그 총은 나에게 겁을 줄 목적으로 전날 김연희가 휴대하고 왔던 것.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 백을 놓아두고 화장실에 간 틈을 노려서 슬쩍했다. 총이 사라진 것도 모르고 떠났던 여자는 그렇더라도 나조차 호주머니에 총이 든 것도 잊고 미니멈 베팅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뜨르륵 전화가 걸려왔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세운 김연희가 백 속에 든 총이 없어진 것을 겨우 알아차리고 하는 전화였다.
"강준홋씨! 내 가방 속에 든 물건 어쨌죠?"
총 말은 못하고 물건이라고 에둘러 말하는 것을 내가 비위 좋게 받았다.
"물건이라니 뭘 말하지요?"
"내 물건 말이에요."
"김 여사 물건이야 김 여사 몸 어딘가에....."
라고 능청을 부리던 내가 정신 차리고 말을 바로 잡았다. 장난칠 때도 그럴만한 상대도 아니었다.
"장난감 총 말입니까? 필요해서 내가, 실탄과 총을 함께, 다음에 만나면 꼭 돌려드리지요."
"장난감이 아니라니까요. 잘 못하면 큰일 나요."
"큰일은 김 여사가 바라던 거 아니요. 남의 수고 끼칠 것 없이, 나 혼자 해결할 생각으로. 그 점 걱정 그만 두시고, 어서 집에나 가요. 아이들이....."
"안 돼요. 내 돈 갚고 자살하든가, 말던가 해야지."
"그 말도 잊지 않고 기억해 두겠오. 김 여사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도. 나도 김 여사를 미치게 사모한다는..... 다음에 만나면 무릎 꿇고 고백하지요."
'어이구! 저 인간! 죽거나 말거나 해라.'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구제불능이라는 말을 들은 것, 그러고도 히죽 웃음이 나왔다. 김연희 빚을 모두 갚았을 뿐 아니라 저승 갈 노자까지 얻어 챙긴 꼴이 아닌가 하는 환상, 객혈을 하듯 결국 한 마디 뱉고 말았다.
“죽일 놈!”
사실 그녀가 말한 ‘죽거나 말거나’ 그것이 내 운명이었다. 아내와 재회를 하거나 말거나, 친구와 조우를 하거나 말거나. 내가 아이의 고사리 손 같은 피스톨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 시작된 또 다른 악취미였다.
총으로 머리통을 겨누거나 심장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실탄을 제거한 빈 총 소리는 맑고 경쾌했다. 격발하기 전에 총을 꺾고 약실을 확인하기도 했다. 가끔 실탄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의미 없는 웃음으로 흘리기도 했다. 이렇게 구질구질한 치욕의 삶을 어디까지 이어가야 하는지, 스스로 채근하는 웃음일 터였다.
총 다루는 솜씨가 익숙해진 것과 반대로 내 신경은 한 단계씩 무디어 갔다. 챌 칵 격발 음을 듣고 진저리가 쳐지는 대신 경쾌한 소리를 즐길 정도로 변해갔다. 격발할 때마다 똑같은 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를 분간해 내고 희열에 들뜨기도 했다. 그래도 생각하고 다시 고쳐 생각하기를 거듭했다.
살아 있으므로 생각하기는 쉬웠다. 격발 음이 매번 다르듯 희생도 서로 다를 수 있다고. 이런 식으로, 다른 격발 음 사이에서 목숨 하나 무의미하게 사라지는 것은 찰나라고. 죽음과 친숙해 가는 만큼 최후까지 살아남고 싶은 생각이 솔깃했던 게 바로 그 시점이었다.
삶이 맹목적이라고 죽음까지 맹목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생각이 가물가물 이어졌던 것. 유턴은 현제 자리에서 멈춰서는 안 되는 것, 더 오랜 된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
도박중독 표본으로 채집된 내가 카지노 채집상 안의 말뚝이 박힌 채 옴짝달싹 못하는 기분, 그 기분을 거부하고 이곳을 뜨기로 마음을 다잡고 나자 거치적거리는 게 하나 있었다. 윤가 한수가 정말 이곳에 오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 리는 없지만 미친놈들이 흔한 세상이 아닌가. 흠, 오거나 말거나, 그것은 놈의 운명? 아니지, 아니야. 메일을 다시 쓰기로 한다.
- 카지노 생각나거든, 친구여!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게.
이 정도로 충분할까? 아직 끝나지 않았다. 토닥토닥 몇 자 더 늘어 세웠다.
- 내 꼴 당하기 전에, 부디.
-끝-
첫댓글 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특이한 소재의 신선함으로 독자를 몰입시켜 나가더니, 무거운 주제를 던져 주며 끝을 맺는군요.
아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낯 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한 동안 머릿속을 맴돌 것 같네요.
그 동안 다음 회를 기다려 가며 잘 읽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왠지 소설의 끝이 아니라, 어쩜 이제부터 강준오 인생은 시작이라는 생각이 드는 결말이네요.
독자 입장에서는 뒷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넓은 셈이네요.
제가 모르는 세상구경을 한동안 잘 했습니다.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글감 찾으랴, 자료 모으랴, 인물 연구하시랴...그 모든 재료를 얼버무려서 김장을 하신 듯 합니다.
맵고, 자극적이면서도 텁텁한 고향 맛이 진한 김장김치를 낯선 이국 땅에서 맛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나뵙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