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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글은 <공지>, 그것도 <"전체" 공지>라는 특성상, 필요시 수정 보완될 수 있습니다. 단 기본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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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가르침은 쉽지 않다. 아니,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에는 두가지 평면이 있다.
첫번째, 우리가 불교의 기본을 바르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두번째, 바르게 받아들이고 나서는 이제 아주 본격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우선 '어렵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사실은 사실이다. 욕망으로 사실을 왜곡하면 곤란하다.
여기서는 '첫번째, 불교의 기본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기준'에 대해서만 다룬다.
불교의 기본, 불교의 토대는 무엇일까? '연기'다. 불교에서, 일체는 연기에 따라 성립하고 알려진다. 성립하고 알려진 일체는, 연기다. 이에는 예외가 없다.
위와 같이 예외가 없는 측면, 평등한 측면에서, 불교는 '괴로움 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다. '열반 중심주의'가 아니다. '괴로움 중심주의'다. 연기에 따라 성립하고 알려진 일체는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괴로움은 괴로움에서 일어나고, 괴로움은 괴로움에서 스러진다.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괴로움이 아닌 것을 찾는 것이 아니다. 열반을 찾는 것이 아니다. 단지 괴로움을 직시한다. 그래서 괴로움의 생성과 소멸만을 말한다. '괴로움의 소멸'이 열반이지, 괴로움을 떠나 있는 어떤 열반을 말하지 않는다.
연기는 무엇인가? 연기는 본래의 상이 없어, 한량 없는 상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위 없는 지혜로 (오늘날에도 유효한) 우리의 조건을 살피시고,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는 정형구로 연기의 상을 제시하셨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즉 조건으로 있고 없고, 내지 조건으로 발생하고 소멸한다.
위에서 제시된 연기의 정형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다가오는가? 어려운 단어가 없음에도, 의외로 그 구체적인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래도 보다 쉽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상이 필요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정형구로 제시된 상의 의미를 보다 용이하게 파악하도록 역시 우리의 조건을 살피셨다. 그리고 '무상, 괴로움(고), 무아'라는 세가지 상을 추가로 제시하셨다.
조건으로 성립되고 해체된다는 것은 무상하다는 것이며, 무상함은 괴로움이고, 괴로움은 나가 아니다. 여기서 '무상, 고, 무아'는 연기의 정형구를 구체화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조건 성립과 해체'라는 상은 논리필연적으로 '무상'이라는 상으로 연결되며, '무상'이라는 상은 '괴로움'이라는 '상'이며, '괴로움'이라는 상은 '무아'라는 상으로 연결된다. 즉 '무상, 고, 무아'는 (한량 없는) 연기의 상들 중 세가지이다.
조건 성립과 해체이므로, 무상은 변화가 아니다. A가 B로 변화하는게 아니다. 성립한 A가 해체되고, B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A에는 철저하게 B가 없고, B에는 철저하게 A가 없다. 그런즉 무상한 것들은 서로를 (직접) 알지 못한다.
무상하다는 것은 머물 수 없다는 것이다. 머물 수 없다면, 이런 저런 압력에 노출되어 시달리는 위험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처럼 위험한 상태는, 괴로운 상태다.
머물 수 없다면, 예로 A에는 철저하게 B가 없고 B에는 철저하게 A가 없다면, 애초에 '나'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다. 또한 머물 수 없는 위험한 상태이므로, 특정한 하나의 상태를 '나'로 삼으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부질 없는 짓이다. 불필요한 괴로움, 피할 수 있는 괴로움까지 만들 뿐이다.
이상에서 '무상, 고, 무아'라는 세가지 상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수행함을 알 수 있다.
ⓐ '조건적 성립과 해체'라는 상을, 우리가 경험적으로 보다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무상'이라는 상으로 구체화시키고
ⓑ '무상'이라는 '상'을, '머물 수 없는 상태' 그런즉 '위험한 상태'라는 주관적 상으로 구체화시켜 수용하기 용이하도록 하고
ⓒ '무상'이라는 '상'에서는 애초에 '나'가 성립할 수 없을 뿐더러, 위험한 상태를 '나'로 삼아 머물러 즐기지 않도록 설득한다.
위와 같이 불교에서 제시되는 여러 상들은, 그 상이 제시되는 조건에 따른 적정한 역할 즉 의미가 있다.
'성립하고 알려지는 일체는 조건적 성립과 해체'라는 점을 긍정하지 않는 불교는 없다.
'조건적 성립과 해체'라는 상을 보다 구체화시킨 '무상, 고, 무아'라는 세가지 상을 긍정하지 않는 불교도 없다.
여기서 다음의 의문이 생길지도 모른다.
반야부의 경과 론등은, 무무상등을 말하지 않는가?
반야부의 경과 론에서 제시된 '무무상'등의 상들은, '무상'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긍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래에서 최대한 간략히 적는다.
반야부는 조건적 성립과 해체의 의미를 또 다른 측면 즉 조건에서 구체화시킨다. 참으로 있다면, 어떻게 무상할 수 있겠는가? 무언가 참으로 있다면, 예로 A에는 철저하게 B가 없고 B에는 철저하게 A가 없는 무상이 가능하겠는가? 그런즉 조건 성립한 것은, 참으로 있지 않다는 것이다. 참으로 있지 않으므로, A가 소멸한다는 말도 가능하지 않으며 결국 A가 무상하다는 말도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참으로 없다면, 어떻게 조건 성립이 가능하겠는가? 그런즉 참으로 없지도 않다는 것이다. '있지 않아 무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 없지도 않아 무상이 알려진다'는 말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 반야부의 무무상등은 무상등을 부정함이 아니고 오히려 무상등이 가능한 까닭을 알려주는 것이다. 즉 무무상은 무상을 긍정하는 것이고, 무고는 고를 긍정하는 것이고, 무무아는 무아를 긍정하는 것이다.
정리하자. 불교를 알고자 한다면, 불교 수행을 하려고 한다면, 다음의 두가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⑴ 불교에서, 성립하고 알려지는 일체는 연기에 따른 것이다. 이를 긍정하지 않는다면, 불교가 아니다. 불교는 평등한 가르침이므로, 예외를 긍정하지 않는다. 결단코 '연기에 따라 성립하고 알려지는 것도 있지만, 연기에 따라 성립하고 알려지는 것이 아닌 무엇도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⑵ '조건적 성립과 해체'를 긍정하지 않는다면, 불교가 아니다. 그런즉 논리상 필연적으로 '무상, 고, 무아'를 긍정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불교가 아니다.
위의 두가지 사항을 굳건히 하면, 문지방을 넘은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불교의 기본을 바르게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지 않았는가? 의외로, 위의 두가지 사항을 굳건히 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특정 단계를 넘어서지 않는 한, 어떤 의미에서는 나름 대단한 신심이 필요하다.
문지방을 넘는 것조차 쉽지 않으므로, 문지방 있는 곳까지라도 올 수 있도록 무언가 제시될 필요성도 있다. 그러한 경우, 위의 두가지 사항을 의도적으로 건너뛰기도 한다. 문지방을 넘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길러주는 것으로, 결국 특정 수준 이상으로 신심을 고취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신심은 힘의 일종이다. 이러한 측면도 잘 헤아려, 여러 글을 읽음에 혼동을 일으키지 말았으면 한다.
첫댓글 늘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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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감동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는 각자의 몫이니... 돌아앉은 중생은 부처도 어쩔 수 없다는 말도 있지요
인생에 괴로움이 없다면 종교도 없겠지요. 수요가 없을테니...
그런 점에서 불교도 괴로움에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
뭔가 걸리적거리는 것이 있고,
그 걸리적거리는 것이 괴로움이니...
불교적 사유의 시작은 제행무상 일체개고이고
불교 사유의 끝은 무아연기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음(심, 유식)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나가도 삼법인과 무아연기법을 만날 수 밖에 없고
반야의 공으로 풀어나가도 삼법인과 무아연기법을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연기법과 삼법인이 정법의 기본이다
또는 알파요 오메가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다만
무아연기법의 이해가 천차만별이어서
학인들 사이에 끝없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현재 어떤 종교의 개념, 이론, 패러다임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논쟁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잉태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학논쟁도 부처님의 가피요 원력이며 예정이요 은총이라고 믿습니다.
예컨대,
도론도담의 이강님 스타일의 다양한 사유도,
머물러 잡아 내 것이라고 탐착하지 않는다면,
부처님이 보여주신 생명의 길로 이르는 길이라고 봅니다.
결국
한 생각에서 비롯된 괴로움과 전도몽상이
그 한 생각의 이해로 구경열반(인류구원)이 된다고 봅니다.
된다기 보다는 오해가 풀린다는 말이 더욱 적합한 말이라고 봅니다.
지기님 ..반갑습니다. 새해엔 자주 뵐수 있었으면하는 바램입니다,
본글에서 적었듯, 연기는 본래 상이 없어 한량 없는 상으로 알려집니다. 그런즉 당연히 연기에 대한 해석은 여럿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여, 아무 해석이나 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위 없는 지혜를 갖추신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의 조건을 살피시고, 가장 기본으로 제시한 연기의 상이 "조건적 성립 해체"와 "무상, 고, 무아"의 네가지 상입니다.
부처님보다 빼어난 지혜를 갖출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위 없는 지혜를 갖추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기껏해야 동등한 지혜를 주장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가장 기본이 되는 연기의 네가지 상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지혜를 부정하는 겁니다.
종교로 접근하자면, 부처님의 지혜를 부정할 바에야 그냥 불교를 신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솔직하고 적절합니다. 혹여 학문으로 접근하자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면서 어떻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학문적으로 접근한다는 겁니까?
불교의 "일체"는 "오온(12처 내지 12처의 대상, 18계 내지 18계의 대상)"입니다. 조건적 성립과 함께 조건적 해체까지 다루는 연기의 취지상, 불교에서는 오온의 생멸을 떠나 일체를 논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오온(12처 내지 12처의 대상, 18계 내지 18계의 대상)이 아닌 일체를 말하고자 한다면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스스로도 모르는 것을 말하려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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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본글에서 제시된 연기의 네가지 상 중 무아라는 상을 부정하려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무아라는 상을 부정한다기 보다는, 위에서 제시한 "일체"를 부정하려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체의 예외를 긍정하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체의 시도는 결국, 부처님께서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스스로도 모르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라는 취지로 지적한 바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최소한 불교에서는 그래요.
불교는, 경험할 수 있는 것 그리하여 알려질 수 있는 것에 입각합니다. "와서 보라"는 가르침입니다. 말로만 있는 것을 말하면, 그것도 중심에 세우면 불교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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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 고, 무아"라는 세가지 상을 이해함에, 연기를 고려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특히 상좌부 행자들 중에서 좀 있는 것 같던데요.
상좌부 대장경, 소위 니까야를 생각하더라두요. 당장 니까야에서도 부처님께서는 연기를 깨달으셨다고 나옵니다. 심지어 과거의 부처님까지도 그러셨다는 내용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무상, 고, 무아"는 "연기"와 무관하다? "무상, 고, 무아"가 연기와 무관하다면, 니까야에 수도 없이 나오는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하라고 하는 사성제의 내용으로는 깨달을 수 없게 됩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결론입니까?
위 본글에 제시된 가장 기초가 되는 네가지 상을 이해하는 거요.
그것도 그 기본적인 뜻이나마 이해하는 거요. 그거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조건적 성립과 해체, 무상, 고, 무아라는 네가지 단어의 뜻을 안다고 이해한게 아닙니다. 암기는 암기지, 이해가 아닙니다. 암기는 아는게 아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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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본다고, 곧장 불교적 이해에 이르진 않습니다. 왜 그런가? 사실의 성립 자체에 이미 판단이 개입하거든요.
사람마다 끌리는 것도 다르고, 그래서 중요시하는 것이 다르고... 그게 정상이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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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본글과 관련해, 이상하거나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주세요. 적절히 수정을 하거나 해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올해는 자주 봤으면 좋겠습니다. 올 한해 모두 원만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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