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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
 
 
 
카페 게시글
현재의 기억 불교의 토대 - 정법의 기준
방문객 추천 0 조회 1,225 16.01.01 23:00 댓글 1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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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01.04 12:24

    첫댓글 늘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그 감동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는 각자의 몫이니... 돌아앉은 중생은 부처도 어쩔 수 없다는 말도 있지요? OTL

  • 16.01.04 12:27

    인생에 괴로움이 없다면 종교도 없겠지요. 수요가 없을테니...
    그런 점에서 불교도 괴로움에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

  • 16.01.04 12:28

    뭔가 걸리적거리는 것이 있고,
    그 걸리적거리는 것이 괴로움이니...
    불교적 사유의 시작은 제행무상 일체개고이고
    불교 사유의 끝은 무아연기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음(심, 유식)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나가도 삼법인과 무아연기법을 만날 수 밖에 없고
    반야의 공으로 풀어나가도 삼법인과 무아연기법을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연기법과 삼법인이 정법의 기본이다
    또는 알파요 오메가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

  • 16.01.04 13:49

    다만
    무아연기법의 이해가 천차만별이어서
    학인들 사이에 끝없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현재 어떤 종교의 개념, 이론, 패러다임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 16.01.04 13:50

    그렇다고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논쟁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잉태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학논쟁도 부처님의 가피요 원력이며 예정이요 은총이라고 믿습니다.

    예컨대,
    도론도담의 이강님 스타일의 다양한 사유도,
    머물러 잡아 내 것이라고 탐착하지 않는다면,
    부처님이 보여주신 생명의 길로 이르는 길이라고 봅니다.

  • 16.01.04 13:51

    결국
    한 생각에서 비롯된 괴로움과 전도몽상이
    그 한 생각의 이해로 구경열반(인류구원)이 된다고 봅니다.
    된다기 보다는 오해가 풀린다는 말이 더욱 적합한 말이라고 봅니다.

  • 16.01.04 15:00

    지기님 ..반갑습니다. 새해엔 자주 뵐수 있었으면하는 바램입니다,

  • 작성자 16.01.05 03:13

     본글에서 적었듯, 연기는 본래 상이 없어 한량 없는 상으로 알려집니다. 그런즉 당연히 연기에 대한 해석은 여럿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여, 아무 해석이나 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위 없는 지혜를 갖추신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의 조건을 살피시고, 가장 기본으로 제시한 연기의 상이 "조건적 성립 해체"와 "무상, 고, 무아"의 네가지 상입니다.
     부처님보다 빼어난 지혜를 갖출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위 없는 지혜를 갖추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기껏해야 동등한 지혜를 주장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가장 기본이 되는 연기의 네가지 상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지혜를 부정하는 겁니다.

  • 작성자 16.01.05 04:15

     종교로 접근하자면, 부처님의 지혜를 부정할 바에야 그냥 불교를 신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솔직하고 적절합니다. 혹여 학문으로 접근하자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면서 어떻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학문적으로 접근한다는 겁니까?

     불교의 "일체"는 "오온(12처 내지 12처의 대상, 18계 내지 18계의 대상)"입니다. 조건적 성립과 함께 조건적 해체까지 다루는 연기의 취지상, 불교에서는 오온의 생멸을 떠나 일체를 논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오온(12처 내지 12처의 대상, 18계 내지 18계의 대상)이 아닌 일체를 말하고자 한다면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스스로도 모르는 것을 말하려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작성자 16.01.05 03:42

    ===
     위 본글에서 제시된 연기의 네가지 상 중 무아라는 상을 부정하려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무아라는 상을 부정한다기 보다는, 위에서 제시한 "일체"를 부정하려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체의 예외를 긍정하려는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체의 시도는 결국, 부처님께서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스스로도 모르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라는 취지로 지적한 바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최소한 불교에서는 그래요.

     불교는, 경험할 수 있는 것 그리하여 알려질 수 있는 것에 입각합니다. "와서 보라"는 가르침입니다. 말로만 있는 것을 말하면, 그것도 중심에 세우면 불교가 아닙니다.

  • 작성자 16.01.05 03:55

    ===
     "무상, 고, 무아"라는 세가지 상을 이해함에, 연기를 고려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특히 상좌부 행자들 중에서 좀 있는 것 같던데요.
     상좌부 대장경, 소위 니까야를 생각하더라두요. 당장 니까야에서도 부처님께서는 연기를 깨달으셨다고 나옵니다. 심지어 과거의 부처님까지도 그러셨다는 내용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무상, 고, 무아"는 "연기"와 무관하다? "무상, 고, 무아"가 연기와 무관하다면, 니까야에 수도 없이 나오는 "무상, 고, 무아"를 철견하라고 하는 사성제의 내용으로는 깨달을 수 없게 됩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결론입니까?
     위 본글에 제시된 가장 기초가 되는 네가지 상을 이해하는 거요.

  • 작성자 16.01.05 04:07

    그것도 그 기본적인 뜻이나마 이해하는 거요. 그거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조건적 성립과 해체, 무상, 고, 무아라는 네가지 단어의 뜻을 안다고 이해한게 아닙니다. 암기는 암기지, 이해가 아닙니다. 암기는 아는게 아니예요.

    ===
     사실을 본다고, 곧장 불교적 이해에 이르진 않습니다. 왜 그런가? 사실의 성립 자체에 이미 판단이 개입하거든요.
     사람마다 끌리는 것도 다르고, 그래서 중요시하는 것이 다르고... 그게 정상이죠 뭐...
    ---
     위 본글과 관련해, 이상하거나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 주세요. 적절히 수정을 하거나 해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올해는 자주 봤으면 좋겠습니다. 올 한해 모두 원만하기를 바랍니다. (^-^)

  • 16.01.07 16:56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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