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贊成公行狀
先君, 諱柱天, 字叔勳, 安東豐山縣人. 在高麗忠敬王朝, 有諱之慶, 文科壯元, 國學直學. 生諱侃, 都僉議舍人, 號洪厓, 有文集, 以直諫顯. 生諱侑, 賜紫金魚袋, 密直使事. 生諱演, 寶文閣大提學. 生諱龜, 龍騎巡衛司右領郎將, 始卜葬於高陽高峯下. 生諱俶, 左軍司正. 生諱繼宗, 司圃署別提, 贈左通禮, 於公先君五代祖也. 高祖諱禹甸, 副司勇, 贈左承旨. 曾祖諱脩, 副司直, 贈左贊成. 祖諱履祥, 杏村閔先生純之門人也. 號慕堂, 大司憲, 贈領議政. 考諱𩆸, 通政南原府使, 贈左參贊. 妣, 貞夫人, 平壤趙氏. 我朝開國功臣平讓府院君諡文忠公諱浚之九世孫, 楊口縣監諱昌勳之曾孫, 副司勇諱紹之孫, 副司勇安國之女, 社稷署參奉成德隣之外孫也.
參贊府君有四男, 先君卽第二也. 生於戊午十一月初八日, 自在幼穉, 受業不怠, 旣長, 益自謹飭. 壬午登上庠. 戊子拜禧陵參奉. 辛卯遭參贊府君喪. 癸巳拜康陵參奉. 甲午遷廣興倉副奉事, 以相避遆, 旋拜氷庫別檢, 以事罷. 丁酉拜義禁府都事. 時有一名官, 坐贜被繫, 朝廷將覈其實, 幷囚官吏. 先君在直時, 其名官使羅卒, 陰說其吏, 顯有往復狀. 先君詰得其事, 杖治羅卒, 仍擧法, 禁人往來, 一府肅然. 事解后, 其名官當路用事, 一家子弟, 或有憂者, 而先君終不以得失介意也. 戊戌遷司瞻寺直長. 己亥遷掌樂院主簿. 壬寅秩落, 換典牲署主簿.
是年除陽城縣監, 新蒞之初, 國家量田, 先君設施區畫, 務合便宜, 慈詳簡約, 剗革民瘼, 飭諸任事者, 毋敢濫升田等. 時或徃省于田, 考其上下, 苟有一毫差錯, 則必罪其人, 而降其等. 均使詰其田等之不高, 還退簿書, 先君嘆曰“量田之擧, 秪爲均民役, 而爲守令者, 不念日後害民之弊, 徒思一身免罪之証. 下下之田, 躐等以報, 吾豈忍爲此哉!” 論報均使, 仍上前簿, 至于再三, 得施後已. 均使行到本縣, 親自量之, 比諸隣邑, 厥等最下, 均使必欲少加, 先君堅拒不許, 憂民之誠, 溢於言表, 均使終莫之强爲. 以此, 本縣田政之均, 優於列邑, 民賴以安, 稱頌不衰.
量田之時, 費用尾閭, 官儲匱詘, 無以蘓殘, 先君務捐官俸以贍之. 涖邑未久, 囷廩倍溢. 至於輸納民租, 嚴戢官人, 斗量必輕, 民多便之. 縣有一士人, 卽京宰侄也. 先君下車初, 卿宰以勿任量田事囑之, 先君以爲田政監任, 宜擇士夫之有識者, 不可以容私請, 竟授之. 無何, 其宰按節本道, 修其宿憾, 以微事啓罷之, 吏民無不嗟惜, 去後益見思.
乙巳爲訓局郞, 掌戎器. 丁未遭貞夫人喪. 庚戌又爲訓局郞, 掌粮餉. 本局句管之事, 素稱煩劇, 先君處之裕如注措. 當一日赴衙, 稱量銀貨, 簿書塡委之隙, 微察庫子容止之異常, 親扣心筭, 則果縮百金. 先君乃曰: “厥數難詳, 明日當改量.” 遂封鎖而歸. 翌朝使庫子持櫃來, 庫子取一封, 泣訴曰“昨日入櫃時, 忘遺此封, 故仍藏置以獻.” 自稱死罪, 乃命幷其封, 而改稱之, 無所縮焉, 先君秖以遺忘之罪治之. 或言擧實發覺, 則先君曰“我示微意, 渠旣還金, 今若發覺, 在法當死. 人命至重, 何可乃爾.” 其御下之量, 愛人之德, 類如此. 以辛亥四月二十日, 因微恙奄棄諸孤, 享年五十四. 此無非不肖等誠孝淺薄, 未能感天. 鳴呼痛哉! 鳴呼痛哉!
先君天資温厚, 志操堅確, 訓承家庭, 行篤孝友, 恬靜自守, 不喜交游. 凡有作事, 務爲篤實. 參贊公, 常倚重之. 父母有疾, 則憂形於色, 湯藥必親, 居喪盡禮, 前後如一. 貞夫人在世時, 與諸兄弟日夕團聚, 嬉戱膝下. 凡有諸侄登科之慶, 喜悅之心在己. 至於慶席宴需, 勞心營辦, 雖是細微之事, 其在悅親之方, 亦無不盡其誠焉.
先君外祖妣成夫人無子, 養育先君, 以主其祀. 先君事之如事親, 供滫瀡省寒燠, 至老不衰. 成夫人族黨貧窮無依者, 則眷顧撫恤, 曲順成夫人之意, 親戚亦稱其敦睦, 而心悅之. 成夫人嘗謂曰“雖是吾之己出, 豈有如此孫之盡孝乎!” 成夫人棄世, 先君哀慟之節, 喪葬之事, 畢盡其情禮.
嘗謂子弟曰“外氏之慈, 欲報德, 則罔極, 而服制有定, 不敢過之. 汝軰軆此, 祀至三代, 雖違古禮, 恩豈敢忘.” 逮至涖邑, 陪貞夫人杯酒懽娛, 每忽忽不樂, 以養不逮成夫人爲恨. 居家不事産業, 居官務主廉謹, 以此家計淸貧, 糲飯弊衣, 人不堪苦, 而處之淡如也. 公事之外, 未嘗出入, 所進來厪親戚若而家. 雖髫齡故舊, 彼旣華顯, 則一不往候其門, 仕路蹭蹬, 蓋由於此也. 少勤科業, 累就公車, 而竟未得成名. 敎督子弟必嚴, 恒戒諸子曰“先祖慕堂公經學行誼, 爲世名卿, 未嘗好議論當權勢. 先君子歷典六邑, 淸白如水, 此乃吾家遺業也. 汝曺他日, 毋替先訓.” 又以愼言語擇交游飭之. 與人談諧, 不設畦畛, 而至於論議是非之間, 一言不合, 則正色折之. 見人趋時附勢者, 則擯之如恐不及, 盖其天性然也.
配, 安東金氏, 高麗太師諱宣平之後, 曾祖諱大孝, 三嘉縣令, 祖諱尙憲, 左議政, 諡文正公, 號淸陰, 考諱光燦, 同知中樞府事, 贈領議政, 外祖金琜, 淸州牧使, 贈左承旨. 生於丙辰九月二十四日. 性慈仁, 懿德夙彰, 逮歸先君, 克盡婦道, 娣姒相敬, 人無間言, 臧獲咸悅, 不見怨色. 參贊公甚愛之, 嘗稱以佳婦曰 “柔順貞靜, 得於名家之懿範也.” 性不喜世俗侈靡之風, 巫覡祈禳之事, 殖産求利之言, 不出於口. 事無巨細, 毋敢自專, 必告夫子. 喜怒不形於色, 雖僕御之賤, 未嘗盛氣訶責, 待子女主於慈愛, 閨壼之內和如也.夙嬰疾病, 積年沉痼, 小子無狀, 醫藥莫效, 以甲辰十月二十四日, 奄至棄背. 嗚呼痛哉!嗚呼痛哉!
後妣, 完山李氏, 大王世孫曾祖德新正諱鸞壽, 祖諱弘吾, 靑山縣監, 考諱柱國, 通仕郎, 外祖張仁源, 副司果. 生於崇禎辛巳正月初九日. 天稟和順, 行事務主眞實. 事夫子, 盡其道, 待子女如己出. 辛亥遭先君喪, 日夜哭擗, 哀毁過節, 大致損敗, 遞纒疾恙, 服除後, 以癸丑十一月三十日, 竟至棄背, 享年三十三. 嗚呼痛哉!嗚呼痛哉!
先君喪, 權窆于高陽高峯先塋側乾坐庚向之原, 以後祔葬焉, 先妣喪, 亦權窆于山內辛坐乙向之原.
有三男, 長曰萬源, 次曰萬潮, 生員. 次曰萬東. 女長適申休錫, 次適士人趙文奎. 萬原娶縣監李景沆女, 生二子, 曰重績. 萬潮娶奉事權瑱女, 生三子一女, 曰重載, 餘幼. 萬東未娶. 申休錫, 生二子一女, 曰德涵, 餘幼. 皆前妣出也.
歲戊辰, 合窆三位於高陽高峯下城洞里先塋外麓寅向之原, 埋誌墓側, 而誌文自宗家見失, 不得幷載. 趙文奎後改名泰興, 重載後改重亨, 其餘子孫錄, 祥載表石陰記. 此行狀先君, 癸丑年遭繼妣喪以後所撰, 而出詳年條.
戊辰周甲之嵗追識
찬성공행장
선군의 휘는 주천(柱天), 자는 숙훈(叔勳)으로 안동 풍산현 사람이다. 고려 충경왕(원종)조에 휘 지경(之慶)이 있었는데, 문과에서 장원하여 국학 직학(國學直學)을 역임하였다. 휘 간(侃)을 낳았는데, 도첨의 사인(都僉議舍人)을 역임하였으며, 호는 홍애(洪厓)로 문집이 있고 직간으로 널리 알려졌다. 휘 유(侑)를 낳았는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으며 밀직사사(密直使事)를 역임하였다. 휘 연(演)을 낳았는데,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다. 휘 귀(龜)를 낳았는데, 용기순위사(龍騎巡衛司) 우령낭장(右領郎將)을 역임하였으며, 처음으로 고양 고봉 아래를 장지(葬地)로 정하였다. 휘 숙(俶)을 낳았는데, 좌군사 정(左軍司正)을 역임하였다. 휘 계종(繼宗)을 낳았는데,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를 역임했으며,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되었는데, 공이 선군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우전(禹甸)으로 부사용(副司勇)을 역임하였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수(脩)로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이상(履祥)으로 행촌(杏村) 민순(閔純)선생의 문인이다. 호는 모당(慕堂)으로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탁(𩆸)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원 부사(南原府使)를 역임하였으며,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으로 평양조씨(平壤趙氏)이다. 조선 개국공신 평양부원군(平讓府院君) 시호 문충공(文忠公) 휘 준(浚)의 9세손이며, 양구 현감(楊口縣監) 휘 창훈(昌勳)의 증손이며, 부사용(副司勇) 휘 소(紹)의 손녀이며, 부사용(副司勇) 안국(安國)의 딸이며, 사직서(社稷署) 참봉(參奉) 성덕린(成德隣)의 외손이다.
참찬부군(參贊府君: 홍탁)은 4남을 두었는데, 선군이 곧 둘째이다. 무오년(광해군 10, 1618) 11월 8일에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부터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장성해서는 더욱 더 신중하고 조심하였다. 임오년(1642)에는 상상(上庠: 성균관)에 올랐다. 무자년(1648)에는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신묘년(1651)에는 참찬부군(參贊府君: 홍탁)의 상을 당하였다. 계사년(1653)에는 강릉 참봉(康陵參奉)에 임명되었다. 갑오년(1654)에 광흥창 부봉사(廣興倉副奉事)로 옮겼는데, 상피제(相避制)로 체직되었다가 이내 빙고 별검(氷庫別檢)을 받았으나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정유년(1657)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었다. 당시 명망있는 어떤 관리가 불법으로 재산을 취득하여 옥에 갇혀 조정에서 그 실상을 조사하고 연루된 관리들을 가두려 했다. 선군이 재직 시에 그 명관이 나졸로 하여금 은밀히 해당 관리에게 말을 전하려 했으나 오고가는 형상이 분명히 드러났다. 선군이 힐문해서 그 사실을 파악해 장형으로 나졸을 다스리고 이내 법을 집행하여 사람들의 왕래를 금지하니 의금부가 숙연해졌다. 일이 해결되고 나서 그 명관이 요직에 앉아 권세를 부리자 집안의 자제들 중 혹여 근심하는 사람이 있어도 선군은 끝내 득실을 가지고 개의치 않았다. 무술년(1658)에 사첨시 직장(司瞻寺直長)으로 옮겼다. 기해년(1659)에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로 옮겼다. 임인년(1662)에 품계가 하락되어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로 바뀌었다.
이해에 양성 현감(陽城縣監)에 임명되었는데, 부임 초에 나라에서 양전(量田)을 시행하자 선군께서 (전답의) 구획을 실시하였는데, 적합함에 힘쓰고 자상하고 간소하고 요약하므로 백성들의 폐해를 줄여 주고 임무를 맡은 자에게 감히 외람되게 전답의 등급을 함부로 올리지 말게 하였다. 이따금 전답에 직접 가서 살펴 그 상하등급을 조사하여 털끝만큼의 착오가 있으면 반드시 그 담당자를 처벌하고 그 등급을 내렸다. 균사(均使)가 토지의 등급이 높지 않다고 힐책하며 장부를 되돌려주자, 선군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양전을 측량하는 일은 다만 백성들의 역을 균등하게 하고자 함인데, 수령된 자가 백성을 해하는 폐단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일신만의 죄를 모면할 계책만 생각하여 하하등급의 토지를 등급을 뛰어넘어 보고하는데, 내가 어찌 차마 이렇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균사(均使)에게 의견을 보고하면서 이내 전(前) 장부를 올려 두세 번을 반복하여 시행하게 하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균사(均使)가 본 현(양성현)에 이르러 직접 스스로 측량할 때 이웃의 고을과 견주어 그 등급이 최하였는데, 균사(均使)가 반드시 조금이라도 높이려고 하자 선군께서 굳건하게 지키며 동의하지 않으니 백성을 근심하는 정성이 말끝에도 넘쳐나 균사도 끝내 억지로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본 현(양성현)의 전정(田政)의 균등함이 다른 고을보다 우세하게 되어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자 칭송함이 그치지 않았다.
양전할 때에 비용이 미려(尾閭)되어 관아의 비축이 바닥나 쇠잔한 백성들을 소생시킬 수 없었는데, 선군께서는 녹봉을 덜어 그것을 보충하는데 힘썼다. 현감으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균름(囷廩)이 갑절이나 넘쳤다. 백성의 세금을 수납할 때에도 관리를 엄하게 단속하여 두량(되질이나 마질)을 반드시 가볍게 하니 백성들에게 편리한 점이 많았다. 현에 사인(士人) 1명이 있었는데, 서울 재상의 조카였다. 선군이 부임한 초기에 재상이 그에게 양전하는 일을 맡기지 말라고 부탁하였는데, 선군은 전정(田政)을 감독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식견이 있는 사대부에서 골라야 하므로 사사로운 청을 용납할 수 없다고 하며, 끝내 그에게 직책을 주었다. 얼마 안 되어 그 재상이 본도 감사로 와서 묵은 감정을 일으켜 작은 문제로 보고서를 올려 그를 파직하니 향리와 백성들이 모두 탄식하고 애석해하였으며, 떠난 뒤에도 더욱더 생각하였다.
을사년(1665)에 훈국 낭장(訓局郞掌)이 되어 병기를 관리하였다. 정미년(1667)에 정부인 상을 당하였다. 경술년(1670)에 또 다시 훈국 낭장(訓局郞掌)이 되어 군량을 관리하였다. 본국(훈국)에서 관리해야 하는 일이 몹시 번거롭고 바쁜 것으로 일컬어졌는데, 선군은 그 대처가 매우 여유로웠다. 하루는 관아에 나가 은화를 잴 때 쌓여있는 장부와 문서의 틈에서 고자(庫子)의 행동거지가 이상한 것을 포착해서 직접 계산해보니 과연 백금이 축소되어 있었다. 선군이 이내 말하기를 “그 숫자가 상세히 알기 어려우니 내일 다시금 개량을 해야겠다.”라고 하며, 드디어 봉쇄하고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에 고자로 하여금 궤를 가지고 오게 하자 고자가 한 봉을 가지고 와서 읍소하며 말하기를 “어제 상자에 넣을 때 이 봉지를 잊어버려서 보관해 두었다가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하며 스스로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자 그 봉지와 함께 다시 측량하게 하니 모자란 것이 없었다. 선군이 다만 잊어버린 죄만을 물었다. 혹자가 발각된 사실대로 집행해야한다고 하자 선군이 말하기를 “내가 넌지시 의사를 보이자 그가 돈을 돌려주었다. 이제 발각된 죄대로 한다면 마땅히 죽을죄이다. 인명은 매우 중한 것인데,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아랫사람을 대하는 도량과 사람을 사랑하는 덕이 대개 이러하였다. 신해년(1671) 4월 20일 작은 병으로 갑자기 자녀들을 저버리고 떠나셨으니 향년 54세이다. 이는 불초 소생 등이 정성과 효도가 모두 미천해서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한 탓이다. 아, 애통하구나! 아, 애통하구나!
선군은 타고난 자질이 온후하고 지조가 확고했으며, 집안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 효도와 우애를 돈독하게 실행하고 평온함으로 자신을 지키며 남들과 어울림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릇 일을 함에 있어 독실함을 힘썼다. 참판공은 항상 의지하고 중시하였다. 부모가 아프시면 염려하는 모습이 얼굴에 드러나고 탕약을 몸소 마련했으며, 상을 당해서는 예를 다했는데, 전상(前喪)과 후상(後喪)이 한결 같았다. 정부인이 살아있을 때 여러 형제와 함께 아침저녁에 단란하게 모여 그 슬하에서 즐겁게 놀았다. 여러 조카들이 과거에 급제하는 경사가 있을 때에는 뿌듯한 마음을 드러내었다. 경사스러운 잔치의 차림에 있어서는 힘껏 장만하였으며, 비록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정성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선군의 외조비 성부인은 자식이 없어 선군을 주로 양육하여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선군이 부모를 모시는 것처럼 모시며 음식을 공양하고 안부를 보살피는 등 늙을 때까지 봉양을 소홀하게 하지 않았다. 성부인의 친척 중에 가난하고 의탁할 곳이 없는 자가 있으면, 돌보고 구휼하여 성부인의 마음을 굽어 살펴주니, 친척들도 그 두텁고 화목함을 칭찬하며 이를 뿌듯해했다. 성부인이 일찍이 말하기를 “비록 내가 낳은 아들이더라도 어찌 이 손자처럼 효도가 극진할 수 있겠는냐!”라고 하였다. 성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선군이 애통해하는 마음과 장례의 절차 등에서 그 정의와 예의를 극진히 하였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외조모의 사랑에 대한 은혜를 보답하고자 하면 끝이 없는데, 상복제도가 정해져 있어 감히 그 기간을 넘길 수는 없다. 너희들이 이를 잘 헤아려 삼대가지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데, 그것이 비록 예법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그 은혜를 어찌 감히 잊겠느냐!”라고 하였다. 현감의 자리에 오를 때에도 성부인을 모시고 기쁨의 술잔을 들었으나 매번 즐겁지 않아 하며 봉양이 성부인에게 미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했다. 집에 계실 때에는 재산을 늘리는 일을 일삼지 않았고, 관직에 있을 때에도 청렴과 근면에 힘쓴 탓에, 집안이 가난하여 거친 밥과 헤진 옷을 입고 살았는데, 남들은 괴로워하여 견디지 못한 일임에도 담담에게 처신하였다. 공적인 일 이외에는 출입을 하지 않고 겨우 가까운 친척 몇 집을 드나드는 정도였다. 어렸을 때부터 사귄 친구라 해도 그가 높은 직책에 있으면, 전혀 그 집을 드나들지 않았으니 벼슬길이 순탄치 않은 것은 대체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젊을 때부터 과거 공부에 열중하여 여러 번 공거(公車)에 응시하였으나, 끝내 합격하지 못하였다. 자제들을 가르치고 살피는데 엄격하여 항상 여러 자식들에게 경계하기를 “선조 모당공(홍이상)께서는 경학(經學)과 품행으로 세상의 명신(名臣)이 되었는데, 일찍이 권력자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선군께서 여섯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어도 물처럼 청백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 집안의 유업(遺業)이다. 너희들은 훗날에도 선대의 유훈을 소홀히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또 말을 삼가고 만나는 것을 가려 하라고 당부하였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구획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시비를 논함에 있어서는 한마디 말이라도 부합하지 않으면 정색하며 그것을 물리쳤다. 사람을 만날 때에도 시류를 좇고 권세에 붙는 자들을 보면 혹시라도 물리치지 못할 까 우려했으니, 대개 천성이 그러하였다.
부인은 안동김씨(安東金氏)로 고려 태사(高麗太師) 휘 선평(宣平)의 후예이다. 증조는 휘 대효(大孝)로 삼가현령(三嘉縣令)을 역임하였으며, 조부는 휘 상헌(尙憲)으로 좌의정을 역임하고 시호가 문정공(文正公)이며, 호가 청음(淸陰)이다. 부는 광찬(光燦)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외조부 김래(金琜)는 청주목사를 역임하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병진년(1616) 9월 24일에 태어났다.
본성이 자애롭고 인자하며 아름다운 덕이 일찍이 드러났는데, 선군(先君)에게 시집와선 부인의 도리를 극진히 하여, 오누이간에 서로 공경하였으며, 사람들이 이견이 없어서, 노비〔장획, 臧獲〕 들도 모두 기뻐했으며, 원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참찬공(參贊公)이 일찍이 훌륭한 며느리라고 칭찬하며 “부드럽고 순응하고 정숙하고 차분함은 명문가의 아름다운 법으로부터 터득된 것이다.”라고 했다. 본성이 세속의 사치하는 풍속과 무격(巫覡)들이 기도하는 따위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재산을 늘리고 이익을 구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큰 일이 건 작은 일이 건 감히 제멋대로 하지 않고 반드시 부군에게 물었다.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비록 미천한 종들에게도 일찍이 큰소리로 꾸짖지 않았다. 자녀들은 자애로움으로 대하여 규방 안이 화목했다. 일찍이 병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하셨는데 소자가 볼품이 없어 마련해드린 치료약이 효험을 보지 못해 갑진년(1664) 10월 24일 갑자기 세상을 등졌으니, 아! 슬프고 슬프다.
후비(後妣)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대왕의 후손으로 증조는 덕신정(德新正) 휘 난수(鸞壽)이며, 조부는 휘 홍오(弘吾)로 청산 현감(靑山縣監)을 역임했고, 부는 주국(柱國)으로 통사랑(通仕郎)을 역임했고, 외조부 장인원(張仁源)은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했다. 숭정(崇禎) 신사년(1641) 1월 9일에 출생했다.
타고난 품성이 온화하고 순응했으며 일을 거행할 때는 진실로 힘쓰고, 부군을 섬길 때는 그 도리를 다하고, 자녀를 대할 때는 자신의 소생(所生)처럼 했다. 신해년(1671)에 선군(先君) 상을 당하여 밤낮으로 가슴을 치며 곡을 하며 슬픔이 예절에 벗어날 정도로 슬퍼해 몸이 크게 손상을 입어 병에 휩싸임으로서 복을 마치고 난 뒤 계축년(1673) 11월 30일 마침내 세상을 버렸으니 향년 33세였다. 아! 슬프고 슬프다.
선군(先君)의 상 때는 고양(高陽)의 고봉(高峯) 선영 건좌(乾坐) 경향(庚向)의 기슭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이후 합장하였고, 선비(先妣) 상에도 역시 고봉산 신좌(辛坐) 을향(乙向)의 기슭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슬하에 3남이 있는데 장남은 만원(萬源)이고, 둘째는 만조(萬潮)로 생원이며, 셋째는 만동(萬東)이다. 장녀는 신휴석(申休錫)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사인(士人) 조문규(趙文奎)에게 시집갔다. 만원(萬源)은 현감 이경항(李景沆)의 따님에게 장가가서 두 아들을 낳았으니 중적(重績)등이고, 만조(萬潮)는 봉사(奉事) 권진(權瑱)의 따님에게 장가가서 3남 1녀를 두었는데 중재(重載)등이다. 나머지는 어리다. 만동은 아직 장가가지 않았다. 신휴석(申休錫)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덕함(德涵)등이다. 나머지는 어리다. 모두 전비(前妣)의 소생이다.
무진년(1688)에 고양(高陽) 고봉(高峯) 아래 성동리(城洞里) 선영 바깥 언덕의 인향(寅向) 언덕에 세분을 합폄(合窆)하고, 묘 옆에 묘지(墓誌)을 묻었는데, 묘지문을 종가에서 잃어버려 함께 실을 수가 없다. 조문규(趙文奎)는 태흥(泰興)으로, 중재(重載)는 중형(重亨)으로 후에 개명하였으며, 그 나머지 자손들은 표석 음기(陰記)에 자세히 싣는다. 이 선군의 행장은 계축년(1673) 계비(繼妣) 상 이후에 지은 것으로 연대가 상세하게 나와 있다.
무진년(1688) 60주년 되는 해에 추가로 쓰다.
아산시문화유산과 팀장 지원구 박사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