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21장 강해 행21:17-26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
오늘은 사도행전21장 말씀입니다.
오늘 사도행전21장 전체 내용을 보면,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을 가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가면 사도바울을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거나 심지어 죽이기를 모이하고 실제로도 죽일려는 시도를 여러번 했습니다.
당연히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으러 사자굴로 들어간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의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이 만류한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는 목숨도 아까워 하지 않았던 바울이었습니다.
결국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왔고, 야고보와 여러 지도자들과 만나게 됩니다.
그때 예루살렘이 있던 야고보와 지도자들이 이런 사도바울의 위험을 알고 몇 가지
제안을 합니다.
그게 뭐냐하면, 사도바울과 같이 온 일행 중에 몇 사람은 하나님께 서원한게 있어서
머리를 깍게 하자는 것이고, 유대인의 결례에 따라 결례를 행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제안을 사도바울에게 했느냐.....
유대인들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율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떠들고 다녔다는 겁니다.
그래서 할례도 받지 않게 하고, 유대인 규례도 무시하고 다녔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을 모독하고 다니는 이런 자를 그냥 놔둬서는 안된다고 하는 생각들이 팽배해 있었고, 예루살렘에는 익히 이런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이를 이미 듣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있다는 자체가 위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인식과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사도바울과 같이 온 일행에게
사도바울이 머리를 깍게 하고 결례를 행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율법을 모독하거나 무시한게 아니라는 오해를 풀어주자는게 야고보와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의견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사도바울의 그동안의 신앙적 가치관과 신념과는 정반대 되는 행위를 하라는 뜻이 되는 겁니다.
이럴 경우 대부분은 자신이 지켜온 신념과 가치관에 대한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요구라고 생각하기 쉬운 상황이자,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로 여길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기꺼이 이 의견에 대해 순종하고 따릅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유대인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이방인들에게도 우상의 제물과 피, 그리고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 하고 지키라는 요구도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도바울은 모두 수용하고 따릅니다.
우리가 이 성경본문을 읽을 때는 이게 별 이야기 아닌 것 같고 그냥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문제로 쉽게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이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요구를 다 받아주면,
사도바울의 인격과 지도자로서의 리더쉽에 상당한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도자가 한 입으로 두말 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지역에 가서는 율법에 나오는대로 다 지킬 필요가 없다해 놓고,
막상 예루살렘에서는 규례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한 규례를 본인이 직접 실행에 옮긴다면 여러분들은 사도바울을 신뢰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제가 밖에 나가서 전도할때는 십일조 안해도 됩니다....그렇게 말하고 돌아다녔는데
성도들은 목사님 아무리 그래도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명령인데, 안해도 된다고 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목사님이 직접 십일조 헌금은 해야 된다고 말씀을 하시지요.. 그랬다고 칩시다.
제가 그동안 십일조는 의무가 아니고 내도되고 안내도 된다고 실컷 이야기 했는데
성도들이 목사님 십일조는 해야 됩니다. 안 그러면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목사님에 대해 항의할 겁니다.
그러니 목사님이 직접 십일조 내는 모습을 보여 주시고, 십일조 해야 된다고 말씀해 주세요...그렇게 요청하는 상황이라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십일조는 반드시 해야 된다고 말하면, 교회 밖에서 말한거와 배치되고,
십일조는 의무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제가 밖에서 의무가 아니다라고 말한게 다를 때,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다.
아마 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 될 겁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바울이 처한 상황은 이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무거운 상황이라는 겁니다. 이해 되시겠습니까?
아니, 내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하라고 강요할 수 있나...
난 그럴 수 없다....이렇게 나올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비단 이런 문제뿐만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이런저런 문제로 서로 의견이 나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교리문제로, 또 성경공부하면서 이런저런 문제로 서로 의견이 갈릴 때가 많죠.
나는 그동안 이 문제를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이렇다라고 이야기 하라고 요구하면 여러분들은 순순이 그렇게 따라 하시겠냐고요.
내가 주장한 이야기를 자꾸 부정하고 뒤집어 이야기 하라고 하면 하시겠어요?
아마, 대부분은 자기의 주장을 꺽지 않을 겁니다.
특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더더욱 반발하겠죠. 그런 사람 의외로 많습니다.
자기 주장에 대해 반박하거나, 극단적으로 당신 이야기가 잘못 됐다라고 이야기를 할 때는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을때가 많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죠?
서로 상처를 받고, 마음 상하는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중요한 문제일 경우는 또 이해가 되지만,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혹은 지나가는 말에도 우리가 상처받고, 상처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마, 이런 경우가 수도 없이 많을 겁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어떻합니까?
근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 한번도 안주고 살아 오셨어요?
나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 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하면 여러분들은 거짓말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상처 준 말이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상대방이 상처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상처준 일이 없다고 하지만, 나로 인해 상처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내가 몰라서 그렇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나만 상처받고 산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오산이고, 교만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성경을 읽어셨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사도바울의 이 상황은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자존심이 상할만한 상황이예요.
왜요? 그렇게 자기가 주장하고 가르쳤던거와는 반대적인 상황이거든요.
심지어 그 반대적인 상황을 요구하고 공개적으로 그렇게 하라고 하고 있잖아요.
아무리 예루살렘의 리더고, 대표자라고 해도 사도바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도의 한 사람으로서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냐고요....
근데, 사도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그걸 받아 들여요. 실행에 옮깁니다.....
여러분, 이게 쉬운 줄 아세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여러분, 이건 절대로 쉬운 상황이 아니예요.
사도바울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문젭니다. 심기가 불편할 수 있고, 화날 상황이예요.
그 제안을 단칼에 거부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두말 않고 결행에 옮깁니다.
여러분, 이걸 우리가 본받아야 됩니다. 왭니까?
왜 사도바울은 이 결례를 행하기로 결정하고, 머리를 깍게 했을까요?
이건 진리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본질적 문제가 아니라는걸 사도 바울이 안 겁니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문제라고 판단한 겁니다. 충분히 그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겁니다.
내가 비록 할례를 안받아도 된다고 했지만, 할례를 받았다고 구원 받거나
안 받았다고 구원을 못 받는게 아니잖아요. 그건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문젭니다.
내가 비록 안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해야 된다고 하는 사람에게 "너 그게 잘못된거야"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 사람의 신앙에서는 그렇게 하는게 맞다고 주장하면 쿨하게 인정해 주면 되는 겁니다.
왜요? 그것가지고 옳니 그러니하는건 유치한 신앙이다라는 겁니다.
과거에 이런 문제로 다툰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왜 교회 안에 십자가를 걸어둡니까? 우상 아닙니까?
또 심지어 우리교회 십자가에 흰 천을 걸어놓은걸 가지고 시비거는 사람들도 가끔 있어요.
제가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볼때마다 기억하기 위해섭니다.
우리가 저 십자가를 숭배하거나 거기에 절하는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래도 저 십자가를 걸어놓는건 우상숭배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특히 보수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래요.
아직도 주일날 물건 사는걸 주일을 범하는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걸로 주일날 어긴다고 정죄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그게 진리와 무슨 상관이예요.
복음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 십자가가 있던 없던, 그게 진리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십자가를 없앨 수도 있고, 걸어놓을 수도 있죠.
중요한건 그걸 우상으로 여기냐 안여기냐는 겁니다. 그게 더 중요하죠.
우상으로 여기면 십자가 떼면 되요.
있어도 우상으로 여기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볼 때마다 기억하면
걸어 놓는 거죠.
근데, 그게 맞니 틀리니 그런 옹졸함은 우리의 신앙을 병들게 하고 다투게 하고
상처가 되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거면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자존심 상하니 어쩌니 그런 마음 가지면 안됩니다.
사도바울처럼 좀 넓고 너그러운 마음을 우리가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쪼잔한 성도가 되면 안됩니다. 여유 있고, 넒은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되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좀 넓은 이해심을 가진 넉넉한 신앙인이 되야 해요.
물론, 진리에 관련된 문제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죠. 그런데 그런 일이 아니면
양보하고, 이해하고 사세요. 그러려니하고 사세요.
이런 말이 있죠.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덤빈다고....여유가 없으면 그래요.
제발 사소한 일에 목숨걸지 말고, 진리에 목숨거는 사람이 되세요.
보세요. 사도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이예요.
근데, 지금 예루살렘 지도자, 그것도 야고보가 요구한 제안은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물론, 사도바울 개인적으로는 자존심이 좀 상하는 문제이긴 하지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의 자존심이 중요한게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자신을 굽힐 수 있다라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가끔 아무것도 아닌 일에 자존심을 내세우고 그것 때문에 끝까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 어린애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진리가 아닌 문제에는 너그러움을 가지는 넉넉한 마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니, 그럴 수도 있지, 나도 그럴 때가 있지....
이런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야 진짜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 가운데서 사도바울의 이런 여유있고, 넉넉한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두란노교회 성도들은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많은 그런 성숙한 성도들이라는
칭찬 받는 교회,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