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태양볼트 박대용 대표가 개발한 r국내 소형 자동차볼트를 보며 활짝 웃는다, 요즘도 매주 3회 혈액투석으로 고단한 노년을 맞고 있지만 자신의 40년 쌓아온 보석 같은 열매(볼트)를 보는 순간 고통도 기쁨으로 반감되는 듯 했다.
자동차가 굴러가는데 주요한 요소인 볼트는 차의 안전을 위해서나 현대화될수록 볼트의 중요도는 더하다, 보통 승용차 한 대당 바퀴에만 20여개가 들어가고 대형차는 100개 넘게 들어가는데 이중 어느 한개만 문제가 있어도 사람의 생명과도 직결되기에 첨예한 정밀기술을 요하는 부품이다.
국내최대 자동차종합시장인 서울 장안평에서 40년 넘게 볼트부품사업을 하는 박대용 친구는 자신이 연구개발한 볼트를 국내는 물론 동남아 등 해외 수출도 하며 장안평 자동차종합시장을 이끌었다.
1970년 초, 맨손으로 청산고향을 떠난 친구는 전세방이라도 마련하고자 월16만원 급여 중, 9만원은 계돈을 들며 기술공으로 일하던 중, 대용친구의 추천으로 취업한 친구들이 8만원을 받아 정작 술한잔도 못마시는 자신이 떠밀려 술값을 지불해야했다. 그러나 한번 술값을 갚으려면 몇 달을 나눠 고생하므로 이러다 전세방도 못 얻고 발전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급여는 현저히 낮았지만 월급여 8만원 수입도 낮추며 볼트부품시장에 (중간상)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비포장도로로 교통사정도 좋지 않았던 경기도 안양, 수원 등 일대를 눈이오나 비가 오나 오토바이로 누비며 다녔다, 한겨울엔 너무 추워 눈을 헤치고 잡풀로 불을 쬐어가며 언 손과 발을 녹이며 이를 악물고 다녔다, 친구는 당시를 회상하며 "요즘 같은 친구들은 감히 그렇게까진 하진 못할거야," 라고 했다. 그토록 혼힘을 다해 수금해 올렸더니 사장은 월급을 배로 올려주었다. 책임감 있고 성실한 대용친구의 능력을 평가한 것이다,
1979년 군을 제대하곤 100만원을 투자해 독립했다. 1980년대는 국내 자동차산업 전성기라 웬만큼 신용이 없으면 부품구하기도 어려웠는데 친구는 국내최대부품공장인 한국볼트공장 입구 차안에서도 자며 남다른 공을 들였다. 어느 날 사장이 출근시간 차에서 자고 있는 친구를 목격하곤 직원들에게 누구냐고 묻자, 태양볼트 박대용 사장 이라 하자, 그날 이후 담당이사에 지시를 내려 모든 부품을 우선으로 내주라 했다고 한다, 신용 있고 철두철미한 친구의 근성을 알아차린 것이다.
치열한 생존경쟁이 펼쳐지는 장안평자동차시장서 성장한 친구는 "친구하나 잘 되면 모두가 잘 된다." 라는 묘한 운을 띄웠다. 이는 누가 잘 되면 주위사람 모두 잘 되듯 친구들이야 이루 말할 수 없는 거 라며 서울장안 한복판서 터득한 인간관계성의 본질을 설파하는 듯 했다.
몇 해 전부턴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가끔 장안평 사업장엘 나가본다. 인근 창고에 들어서니 수십만 개는 됨직한 자동차볼트들이 가득 메웠다, 볼트종류도 수 천종이 넘어보였다. 이 많은 볼트종류를 파악하는데도 수년은 걸릴 텐데, 개발까지 해내다니 친구의 투지가 놀라왔다.
그 시절 우리들은 대용친구만이 아닌 대부분 친구들이 빈손으로 출발해 강인한 정신력과 의지력 하나로 첨예한 경쟁사회를 살아왔다. 자녀들도 잘 자라 건강한 가정을 일구고 살지만 정작 자신의 몸은 돌볼 겨를 없이 여기저기 육신의 병을 얻어 노후 고생하는 친구들도 많다.
대용친구도 수년째 신장투석을 하며 팔에 튀어나온 상처를 볼 때마다 친구들이 놀라곤 한다. 하루 3~4시간씩 매주 3번 이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가정적인 대용친구는 종종 가족여행을 하며 필자와도 우연히 강원도 평창식당 앞에서 만난 적이 있어 "요즘도 가족여행 종종 하느냐," 며 묻자, 요즘은 아파서 못한다고 한다. 귀여운 손자손녀들이랑 이 좋은 계절 단풍놀이라도 다녀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루속히 기적 같은 일이 생겨 고통이 해소되어 평생 일궈놓은 대용 친구의 결실들이 온가족과 함께 행복으로 승화되기를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