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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음력 4월 13일인 오늘은 제천 교육청이 있던 병마골의 남산에서 의병인 호좌의병진이 패하며 결국 블라디보스톡에까지 가게 된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날이다.
1부 24. 존사지행(尊師之行)
제천의 칠성봉은 세상 어느 도시에도 없는 일곱 개의 정기어린 봉우리로써 다음과 같은 전설을 지니고 있다.
오랜 옛날부터 첩첩산중으로 산세가 험하고 척박하여 人跡(인적)을 구경하기 힘든 제천 용두산 아래 의림지에는 우리 민족의 정기를 수호하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황룡이 살고 있었고 상주 함창의 공검지에는 황룡의 부인인 청룡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동해 바다 건너 화산과 지진으로부터 왜국백성을 구하다 검게 그을려 더욱 흉하게 된 욕심 많은 흑룡이 황혼 녘에 후지산 정상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한 번의 용트림에 구만리를 솟아오르는 황룡의 당당한 모습을 보았다.
넋을 잃은 흑룡은 상사병으로 앓다 앓다가 못 견디고 제천의 황룡을 찾아 바다를 건넜다.
흑룡의 가련한 사연을 들은 황룡은 아량을 베풀어 아내인 청룡 몰래 제천 땅에 잠시 머물게 하였는데 흑룡은 이 땅의 정기를 바꾸어 황룡과 영원히 살고자 모사를 꾸미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그만 청룡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청룡은 민족정기를 바꾸려하는 흑룡을 제거할 계략을 꾸미고 제천 땅에 살고 있는 활을 잘 쏘는 朴義(박의)에게 부탁하여 흑룡을 제거하기로 하고 박의의 사냥을 방해하였다.
하루 종일 짐승을 쫓으며 결정적인 순간마다 빗나가는 화살을 보며 사냥 할 마음이 사리진 박의가 집으로 귀가하기 위해 산모퉁이를 도는데 흰 소복의 여자를 보았다.
귀신 인듯하여 두려움에 활을 잡고 겨누는 박의를 보고 청룡은 말을 하였다.
" 저는 상주 함창 공갈 못에 사는 청용입니다. 제 남편이 왜국 수호신인 흑룡의 꾀임에 빠져 민족정기를 흐리고 있습니다. 저를 도와 흑룡을 제거하여 주신다면 그 보답으로 제천을 농사짓기 좋은 평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
박의가 가만히 들어보니 청룡을 도와주면 자손대대로 편히 살 수 있는지라 혼쾌히 승낙을 하였다.
청룡은 연못 속으로 들어가 흑룡을 밖으로 몰아 낼 터이니 그 때 활로 쏘아 죽이라 하고 이내 연목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연못이 들끓더니 검은 빛의 용이 솟아오르는데 담대한 박의지만 그 기세에 머뭇거리다 때를 놓치니 흑룡이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연못 속으로 숨었다.
청룡이 나타나 박의를 보고 어찌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 약속을 어긴 죄로 너를 죽이겠다고 하자 박의는 말했다.
"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이번에는 틀림없이 쏘아 죽이겠습니다. "
청룡은 어쩔 수 없는지라 다시 약속을 하고 연못 속으로 들어가 흑룡을 연못 밖으로 몰아 내니 흑룡은 다시 솟구쳐 올랐다.
박의가 활을 겨누고 있다가 흑룡의 정수리를 향해 살을 쏘자 흑룡은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그 바람에 화살은 흑룡의 눈에 맞고 말았다. 그러자 흑룡은 벼락 같은 비명을 지르며 동해 바다 건너 왜국으로 사라지며 언젠가는 복수를 하겠노라는 여운을 남기고 사라졌다.
청룡은 비록 흑룡을 죽이지는 못하였지만 박의와의 약속대로 불을 뿜어 제천일대를 평지로 만드는데 정기가 강한 일곱 봉우리는 끄떡없이 우뚝 솟아 남게 되었다.
후대에 사람들은 이 일곱 봉우리를 일컬어 제천의 정기를 지키는 칠성봉이라 하였다.
음력 4월13일(양력5월25일) 새벽, 제천의 호좌의병진의 대장 유인석은 참모들과 작전회의를 통하여 칠성봉을 중심으로 수립한 제천방어 전략을 시행하였다.
새벽닭이 울자 병사들에게 아침을 지어 배불리 먹이고 운량관 이필근을 시켜 약식을 모두 풀어 장좌와 군사들에게 약식 한 자루 씩 배포하며 급한 때에 사용하도록 하고, 동북쪽으로 독송정과 동남쪽으로 수도산과 남산에 병력을 배치하고, 서쪽으로 하소리에서 주요한 길목마다 매복하여 서로 협력하에 지키게 하였다
우수한 화기 속에 잘 훈련된 경병들과 일본군이더라도 완강하게 저항하는 의병들의 방어막을 쉽게 뚫을 수가 없었다.
참령 장기렴은 군사들을 독려하며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별다른 소득없이 병사만 잃고 물러난 후 고장숲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전략을 바꾸었다.
성동격서(聲東擊西) 말 그대로 동남쪽을 공격하는체하면서 하소쪽을 집중 공략하기 하고 공격하는 경병들을 보호하기 위해 진격로마다 우선 불을 질러 연막을 피우고 서로간 유기적인 협공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에 의병들은 가창산 방향에서 공격하는 적들과 남당서원 쪽에서 공격하는 적들을 막느라 병력을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병과 일본군들의 주력부대는 하소 쪽을 집중 공략하기 위해 은밀히 이동하고 있었다.
오후 들어 일부를 남당서원 쪽과 독심봉 방향으로 공격하는 체하며 하소방향으로 주력부대를 진격시켰다. 그러나 넋고개에 매복하고 있던 의병들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넋고개는 칠성봉 중 6봉인 아후봉(현 중앙공원으로 최초의 제천의병진이 구성되었 곳)에서 한전과 제천중학교 뒷길에서 배우장 뒤로 이어지는 고개였다.
이 고개는 제천의병이 제1의 사상으로 여기는 의(義)로움의 바탕이 되는 충(忠)과 효(孝)중에 효자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고개로써 다음과 같은 이야기 전해져 온다,
조선 숙종때, 제천 향교골에 사는 정혼이라는 선비가 연로하신 아버지가 병환이 깊어 나날이 위독하기에 이르자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좋은 약으로 처방하였으나 효험이 없고 병세는 호전되지 않아 근심걱정이 깊어 가던 차에 어느 날 스님을 만나 아버지의 병환을 이야기 하고 좋은 약을 처방해 드릴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과도 바꾸겠으니 방법을 알려 달라 하니 스님은 당신이 죽으면 누가 그 약을 아버님께 가져다 드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되묻자 약을 구하여 아버님께 드린 후에 죽을 수만 있다면 후회하지 않겠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관세음보살’을 30번 외우고 북쪽에 있는 감악산의 왼쪽 깊은골 큰 바위 밑에 가서 천마라는 약초를 구하여 드리면 병이 낳을 것이라 일러주고 사라졌다.
정혼은 스님이 알려준 대로 ‘나무관세음보살’을 30번 외우고 감악산으로 찾아가 약을 캐는 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염라대왕 앞에 서게 되었다.
너는 어이해서 인간이 만지면 안되는 약초에 손을 대었느냐, 너는 아직 젊으나 약초를 캔 죄로 죽음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호통을 쳤고, 정혼은 지금까지의 일을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고 아버지에게 약을 드린 뒤에 죽음을 맞게 해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이 때 옆에 있던 저승사자가 염라대왕에게 알려주기를 “ 정혼의 효도에 감동한 문수보살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약초를 가르쳐 주게 되었다고 고하자 염라대왕은 네 효성이 지극하여 너를 돌려보내지만, 너의 아버지는 약을 먹고 병이 낫게지만 너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소원을 말하라 하였다. 이에 제가 죽고 아버지의 병환이 나으시면 여한이 없겠습니다하고 답하자 과연 보기 드문 효자로다. 오늘 사시까지 고개에 도착 못하면 혼령이 될 것이니 빨리 가라 하였다.
정혼은 큰절을 네 번하고 약초를 가지고 단숨에 고개에 도착하니 이미 고개 아래쪽에서 상여꾼들이 자신의 시신을 옮기고 있었는데 정혼이 자신의 몸에 들어가 벌떡 일어나니 모두들 깜짝 놀라 자빠지고 넘어지고 난리가 났다. 정혼은 아버지께 약초를 다려 드릴 수 있었고 그 뒤 아버지의 병환이 씻은 듯이 나아졌다 하여 넋고개라 부르게 되었고 정혼은 80세까지 장수하였다 한다.
이러한 넋고개에는 여국안 등 청나라 군인들과 의병들이 굳게 지키며 용맹스럽게 지키고 있었다.
장기렴은 주력부대와 함께 하소천을 따라 호좌의진의 본진이 있는 아후봉으로 이어지는 넋고개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여국안 등 청국군사 여러 명과 의병들이 매복하여 결사 항전하니 쉽게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대치하는 것을 본 청병 여국안이 남쪽 하늘을 보다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안승우가 있는 정봉산 진영으로 급히 달려 갔다. 여국안이 안승우를 보며 하늘이 심상치 않다며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하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무심한 하늘은 호좌의진을 버리는 듯 서남쪽으로부터 돌풍이 몰려오며 흙비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돌풍을 동반한 흙비가 쏟아지자 의병들의 화승총은 심지가 젖어 불을 당길 수가 없게 되었다. 경병들은 이 때라 생각하고 돌진하며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에 서쪽을 수비하던 의병들이 당황하며 이리 저리 흩어져 몸을 숨기기 시작하니 의병들의 사기는 갑자기 뚝 떨어지며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국안 등 청병들이 적들을 맞아 총을 쏘니 순식간에 수 십명이 꺼구러졌다. 그러자 양총으로 무장한 경병들과 일본군들은 밀밭과 보리밭 그리고 논두렁으로 몸을 숨기며 사격을 해 대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전 내내 용맹스럽게 싸우던 청나라 군인 여국안 등 수명은 고립되게 되면서 탄환마저 떨어지게 되었다. 여국안과 의병들이 급히 탄환을 찾았다.
“ 총알! 총알을 가져와라.”
“ 탄환을 가져와라.”
이 때, 탄환은 본부의 수교 양학석이 담당하였는데 적들에게 매수되어 보리밭 한가운데에 숨겨버렸다. 매수된 양학석 형제들이 탄환을 숨겨 놓는 바람에 탄환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여국안 등 청군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물러서자 여러 곳에 매복해 있던 의병들도 전의를 상실하고 일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바람에 팽팽하게 균형을 유지하며 대치하던 호좌의진의 진영은 서쪽부터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장 숲과 남당서원 뒤쪽을 돌아 공격해오는 적들과 교전하며 포수들에게 화약을 재어주던 안승우와 홍사구는 돌풍과 흙비로 화승총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돌을 던지며 항전하는데 서쪽으로부터 군사들이 밀려오며 탄환이 없다고 하자 대세가 기울어졌음을 직감했다.
서쪽과 남쪽으로부터 경병들이 남산성으로 개미떼처럼 밀려오자 대치하고 있던 의병들이 이리저리 분산되기 시작했다. 안승우는 고함을 지르며 독전을 하였다.
“ 흩어지지 마라. 흩어지면 죽는다. 모두들 자리를 사수하라.”
그러나 이미 떨어져 버린 사기에 겁을 먹은 의병들은 이리저리 피하기에 바빴다. 이 모양을 지켜보던 안승우는 잠시 생각하다 여국안 등 청병들에게 후퇴하여 목숨을 보존하라 이르고 종사이며 제자인 홍사구에게도 떠나 후일을 도모하라고 명령했다.
“ 사구야! 대세가 기울어지고 있구나! 통탄할 일이지만 나는 여기서 뼈를 묻어야겠다. 너는 지금 여기를 떠나 대장님께 이 전황을 보고하고 후일을 도모하거라.”
“ 스승님! 그건 안됩니다. 종사로써 장수를 따라 끝까지 함께 할 것입니다.”
“ 떠나라! 명령이다.”
“ 그럴 수 없습니다. 장군님!”
그런 사구를 향해 안승우는 다시 말했다.
“ 나는 이미 의병의 중군장으로 마땅히 죽을 때 죽기로 작정하였지마는 너는 왜 홀로 가지 않느냐? 몸을 보존하여 후일을 도모하기 바란다.”
그러자 사구는 다시 말한다.
“ 스승이 죽음에 이르렀는데 제자가 어찌 홀로 가오리까, 장군이 위해로움을 당했는데 따르는 군사가 어찌 홀로 면하겠습니까, 구차스럽게 면하는 것은 맹세코 하고 싶지 않은 바입니다. 지하에서도 길이 모시기를 원합니다.”
홍사구는 안승우의 명령에도 기어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안승우는 깃발을 부여잡고 남은 의병들과 최후의 항전을 위해 깃발을 잡고 소리쳤다.
“ 국모님의 복수와 대의를 위해 힘을 내라. 최후의 일인까지 싸워야한다.”
이 때, 깃발을 잡고 독전하는 안승우를 본 경병들의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탄환이 안승우의 오른 다리 허버지에 적중하자 안승우는 짧은 신음과 함께 하늘이 원망스러운 듯 잔뜩 찌푸린 하늘을 쳐다보았다.
참으로 비통한 잿빗 하늘이었다. 그 잿빛 하늘 속으로 부모님과 처자들....원통하게 시해당한 국모님과 신음하는 이 나라 강산이 스쳐간다.
안간힘을 써서 안승우는 그 자리에서 단정하게 앉았다. 안승우를 등 뒤로 한 사구는 몰려드는 적들을 막아섰다.
경병들은 약관 밖에 안되는 사구를 보자 항복하라고 권유했다.
“ 나이가 아깝구나. 항복하라.”
이 말을 들은 사구는 눈을 부릅뜨고 단칼에 적장의 목 줄기를 향해 휘둘렀다. 칼을 맞은 적이 짧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지고 깜짝 놀란 경병들이 사구의 다리를 쏘았다. 사구는 외마디 신음과 함께 비틀거리며 버티었다. 이 때 경병 중 하나가 사구의 칼을 든 팔을 내려치니 사구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고통스러운 듯 사구가 다시 왼팔로 잽싸게 집어 들며 적을 향해 휘두르며 외쳤다.
“ 이놈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너희들이 금수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각이 있다면 충신·역적과 사람·짐승의 구별은 알 것이다. 우리가 대의를 의지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인데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이 말을 들은 경병들은 다시 사구의 왼팔을 쳤다. 사구의 왼팔이 또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사구는 또다시 호통을 치며 발길질을 한다. 그러자 적들은 다시 사구의 다리를 향해 총을 쏘았다.
쓰러진 사구가 사력을 다해 일어서자 남은 다리마저 사정없이 쏘아 버리니 사구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홍사구의 눈가에 어머니와 함께 어린 아내의 얼굴이 스쳐가며 향미의 수줍은 미소가 스쳐갔다.
사구가 엷은 미소를 띠자 적들은 소름과 함께 전율이 일어나면서 사구의 심장을 향해 총을 쏘니 이 때 홍사구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총애하는 제자이며 종사인 사구가 두 팔이 떨어져 나간 채 적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안승우는 적장 장기렴을 향해 마지막 힘을 다하여 꾸짖었다.
“ 이 창귀같은 적 기렴놈아! 너는 충숙공의 자손으로써 어찌 달갑게 원수 오랑캐의 앞잡이가 되어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어지는 이 때에 개 돼지 같은 원수놈에게 붙어 충의의 선비를 죽인단 말이냐. 이 죄를 따지면 만번 죽여도 오히려 싸다. 그러나 지금 내가 너를 죽이려다 도리어 죽기는 하지만 옳은 죽음은 사는 것보다 낫다. 잊지 말거라. 네 놈들은 지금 이 땅에 의리를 저버린 난신적자들이다. 국모님의 복수는 고사하고 고립된 임금님을 구출할 생각도 없으며 외세에 놀아나는 너희들은 진정 역적들이구나.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총구를 저 일본 놈들과 친일간적들 그리고 러시아 놈들을 몰아내는 쓰거라. ”
안승우가 깃발을 부여잡고 놓지 않자 적들이 안승우의 어깨를 칼로 내리쳐서 끊어낸다. 하지만 더욱 엄하게 꾸짖자 적들은 무자비하게 모진 매를 쳐
안승우를 죽이니 그의 나이 서른 두 살이었다.
적들은 이런 안승우와 홍사구를 보면서 한 결 같이 큰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약관의 제자인 홍사구는 스승의 길을 따라갔다.
중군장인 스승 안승우를 따라 제자인 종사 홍사구가 남산에서 전사하자 의병들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패퇴하였고, 몰려드는 경병들로 인하여 유인석과 지휘부는 독송정으로 물러났다가 송학 지실의 방아다리로 진을 옮겼다.
대장소가 진을 이동하자 의병들은 곳곳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이에 유인석은 모든 장졸들은 향교 골에 있는 학다리로 집결하도록 령을 내렸다. 이에 좌군장 이희두와 전군장 정운경, 우군중군 윤영훈, 이인영 별영장, 참진장 한동직 등 여러 의병장들이 모였으나 중군장 안승우와 우군장 이강년이 오지 않아 걱정하였다.
승기를 잡은 장기렴도 전투를 중지시켰다. 비록 임금의 뜻과는 다른 조정의 명령으로 의병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출전 하였지만 대의로써 의를 바로 세우고 국모님의 복수와 임금을 위해 일어선 의병들을 공격하기에 떳떳치 못함을 느끼고 있었던 데다가 의병들이 병참을 옮기기 가기 전에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라 여긴 때문이었다.
경병들은 진을 치고 대치하면서 호좌의진이 구축해 놓은 병참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 바람에 그동안 공들여 힘겹게 확보했던 군량미와 병참들이 모두 경병의 손에 넘어갔다. 이 사이 날이 밝아 오기 시작하자 유인석은 병력을 이끌고 단양으로 부대를 옮기는데 이강년이 수십 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이들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15일에 비로소 안승우와 종사 홍사구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이에 낙심한 대장 유인석이 하늘을 쳐다보고 통곡 한다.
“ 아! 하늘이 이 나라를 버리는구나. 국모님의 복수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보형하고 의를 바로 세우려 일어섰건만 어찌 하늘은 이다지도 가혹하단 말인가?”
말을 마치자마자 칼을 빼어들고 목을 겨누고 찌르려는 찰나, 종사인 이조승이 잽싸게 유인석의 팔과 칼을 잡고 큰 소리로 말한다.
“ 대장님! 대장은 어느 편장과 달라서 목숨을 가볍게 버릴 수 없습니다, 즉 안승우, 주용규, 이춘영, 홍사구 등 많은 장졸들이 죽고 또 실종된 사람도 많지만 아직 수많은 장졸들이 남아 있는데, 이들을 어떻게 하고 대장이 죽을 수 있으며, 또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있는데 한 번의 패했다하여 그만 둘 수 있으며, 또 선생님은 대도의 존망이 한 몸에 매어있어 다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소홀히 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을 들은 유인석은 차마 죽지 못하고 통곡하였다. 다시 경병들의 추격이 시작되어 대진은 소백산 죽령을 넘어 풍기까지 갔는데 이조승의 부상이 낫지 않고 출혈이 심하여 생명이 경각에 달리니 유인석은 두 군사에게 업혀 귀가시켜 치료하게 하였다.
다음날 16일에 논란 끝에 전사한 안승우 대신 이완하를 중군장에 임명하고 장의진의 군사들은 모두 중군에 배속하고 대장 진도 장림으로 옮겼다.
이날 밤, 우군장 이강년과 후군장 신지수가 승리에 취해 있을 경병들이 있는 제천을 야습하였다.
먼저 조용히 진격하여 의병을 배신하고 탄약을 숨긴 양학석과 원석 형제를 잡아 처형하고 경병들의 진이 있는 아후봉을 공격하였지만 장기렴이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어 실패하였다. 이 때 중군참모 박정수가 적들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남들이 알아 볼 수 없는 안승우와 홍사구의 시신를 수습하여왔다.
한편, 장기렴은 호좌의진의 병참을 모두 접수하고 의병에 관계한 사람을 잡아다 처벌하여 진사 민철훈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호좌의진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했다. 군량이 부족하고 형세가 어려우니 영남사족들의 호응을 받고 그 곳의 군량을 이용하여 재기하자는 주장에 풍기로 이진하기로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권재기가 신임 풍기군수로 부임함에 따라 꺼려했으나 유인석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전군, 좌군, 소토군 등 각 장수에게 명하여 병력을 인솔하고 따르게 하였다.
유인석은 이희두의 좌군에게 죽령을 방어하게 하고 대진을 이끌고 죽령을 넘어 풍기로 옮긴 것은 음력 4월 18일(5월30일)이었다. 염려했던 권재기는 아전을 데리고 호좌의진을 맞았고 유인석은 대장소를 이청에 정하면서 전군으로 하여금 좌군을 도와 죽령을 지키도록 하여 뒤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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