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돌이끼
김 금용
둔해지자고 속삭인다
목소리를 안으로 저며둔 돌이 되자고 타이른다
각은 감춰
입은 다물어
참지 못하고 대들고 거꾸로 달리던 청개구리 짓은 그만둬
어둠을 빨아봐
무릎을 모으고 둥글게 어깨를 낮춰봐
소리도 없고 향기도 없어서 누구든 짓밟고 지나가지만
도시의 매캐한 오보뉴스까지 받아 안고 기다려봐
금 간 틈바구니로 빛을 받아먹은 내 안의 씨
주둥이가 벌어지고 있어
빛살 건반을 밟는 푸른 발바닥
물기 문 채 미끄러지는
갓 눈 뜬 떨림
그래, 꽃이야
푸른 꽃이야
나의 시, 나의 삶
최근 모 잡지에 ‘돌’에 대한 연재시 10편을 내 적이 있다. ‘돌’에 대한 시가 많은 것에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위 시도 역시 돌멩이에 난 이끼를 들여다보다가 쓴 근작시이다.
고2 때, 처음 써본 시가 ‘돌’이었다. 그 때 ‘돌’을 내 이상형의 남자로 의인화해서 쓴 것이었는데, 당시 내 첫 사랑의 남자는 “발로 차도 꽃을 달아줘도 그림을 그려도 돌처럼 과묵하고 너그러운 큰 바위”였으면 했던 것이었다. 늘 말없음표로 내 주변 삶 여기저기서 부딪치게 되는 돌이 그래서 더 마음이 가곤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때부터 무심한 돌멩이에서 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마음을 읽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몇 백 년, 혹은 몇 천 년 지하 어둠속에서 자기와의 고단한 견딤과 싸움을, 극기를 통해 변하지 않는 빛과 색을 만들어낸 루비,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같은 광산의 보석돌에서부터, 제주 화산폭발로 놀랜 눈동자가 여기저기 구멍을 낸 현무암까지 숱한 인간의 삶이 그 감성의 역사가 돌 안에서 번뜩이며 말 건다는 걸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제각각의 모습을 갖고 있는 돌멩이를 들여다보면 고단하게 살아가는 내 이웃의 친구의 울음이 하소연이 성냄이 들리는 듯하다. 아니, 어쩜 내 안에도 돌의 근성이 있어서 수없이 더 좀 견디자, 참자, 이겨내자, 나를 달래는 소리가 돌멩이 안에서 들려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작은 돌멩이에서 거대한 너럭바위까지도 빗물이 스며들며 만들어낸 틈으로 풀뿌리를 들어앉히고 혹은 이끼를 키워내는 걸 가만 들여다보면, 오랜 세월 자기를 죽이며 삭히며 기다리고 또 기다려온 돌의 끈질김이 보인다. 결국 무생물인 돌이지만, 자기를 죽이고 깎아내어 그 틈으로 생명을 피워낸다는 것이니 이만한 기적이 어디 있겠는가 싶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것보다 더 위대하다 할 수 있겠다.
나는 여전히 시의 어둠 속을 헤매고 있지만, 시의 길은 여전히 먼 여정이기에, 내 안에 탑을 쌓으며 평생을 걸어갈 길이기에, 푸른 이끼를 키워내는 돌을 보며 나를 달래본다.
유유자적 신호등 없이도 길을 찾아내며 앞으로 걸어 나가는 몽고초원의 소떼 양떼처럼 속도를 버리고 천천히 걷자, 나를 다독여본다. 바위에 쉬었다 가는 새나 바람이나 풀꽃이나 언젠가는 스스로 뿌리를 내리게 나를 더 좀 놓아두자 싶다.
비가 오면 맞고 눈이 오면 웅크려 긴 밤을 새우다 보면 각진 모서리도 깎여 “금 간 틈바구니로 빛을 받아 먹”고 마침내 “내 안의 씨”가 “주둥이가 벌어지고 있어/ 빛살 건반을 밟는 푸른 발바닥/ 물기 문 채 미끄러지는/ 갓 눈 뜬 떨림”이 생기지 않을까. 그게 비록 하찮은 돌이끼일지라도 내가 피어낸 “그래, 꽃이야/ 푸른 꽃이야” 외칠 수 있지 않을까. 수없이 무릎이 깨져도 나를 들어앉힌 돌멩이는 언젠가 푸른 돌이끼, 작은 풀꽃 하나는 피워내지 않겠나, 그 발등에 뺨을 비비게 되는 것이다.
김금용 서울 출생. 1997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핏줄은 따스하다,아프다』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