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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시절을 되돌아본다
‘보통’학교에서 ‘심상소’학교, ‘국민’학교로
내가 모교 부산유락국민학교에 입학한 것은 1956년 3월이었으니 이미 60년전의 일이다.
당시의 우리 사회는 일제의 2차대전 패배에 따른 해방의 감격도 잠깐이었을뿐, 정치적 불확실성・경제적 궁핍・사회적 혼란이 극도에 이르렀던 그야말로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1945년 해방 직후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 1948년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인한 체제 분단,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 발발, 1953년 휴전에 따른 남북분단의 고착화로 이어진 해방정국의 와중에서 나의 초등학교 시절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은 오늘날의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 1941년의 천황칙령에 따라 1943년부터 심상(尋常)소학교로부터 개칭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배경에 대해서는 두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의 ‘國’자와 ‘民’자에서 따온 것이라는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독일의 Volksschule를 번역해서 사용했다는 설명이다. 식민지시대 천황칙령을 같이 적용받았던 일본과 대만은 2차대전 이후 제국주의 잔재청산 차원에서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폐기하고 소학(교)로 개칭한데 비해 우리는 해방 50년을 맞은 1995년에 와서야 뒤늦게 초등학교로 바뀐 경위를 가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근대 이후 우리나라 초등교육기관의 명칭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19세기말 ‘서당’ 대신 생겨났던 ‘소학교’는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통학교’ 라는 명칭으로 바뀐데 이어 1938년의 3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보통학교는 일본인 아동들의 초등교육기관인 ‘심상소학교’라는 이름으로 통합된 역사를 거쳐왔다.
이러한 제도개편 속에서 우리 모교도 1912년 개교 당시에는 동래공립보통학교 여자부로, 1925년에는 동래제2공립보통학교로, 1938년에는 동래제2공립심상소학교로, 1943년에는 부산유락공립국민학교로 개명을 거듭해온 것이다.
개교 당시 동래지역 유일의 공립보통학교내에 남・녀부가 따로 설치되었다가 1925년에 남학교는 제1보통학교로, 여학교는 제2보통학교로 분리되었으며 오늘날 각각 내성・낙민초등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참고로 동래지역에 거주했던 일본인 학생들을 위해서는 부산제11심상소학교 (약칭‘11학교’)가 개설되었으며 이 학교는 오늘날 명륜초등학교의 전신에 해당한다.
의무교육・남녀공학의 시작과 6・25전쟁의 발발
우리나라 초등교육에서 의무교육과 남녀공학이 시작된 것은 1945년 미군정의 정책에 따른 것으로 모교의 경우도 1945년 9월에 입학한 26회부터 남녀구분 없이 학구에 따라 학교배정과 취학통지서를 받아 입학했던 것이다. 내가 입학했던 당시 유락국민학교의 학구는 수안동 일부, 낙민동, 연산동, 안락동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다.
오늘날 동래지역은 산업화 이후 대도시로 바뀌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수안동과 낙민동은 복천동, 칠산동, 명륜동과 함께 동래읍 5동에 속했지만 연산동과 안락동은 근교 농촌지역에 속하고 있어 학생들의 구성도 농가와 비농가 자제들이 섞여있는 복합적 성격을 지녔다.
1956년 3월에 입학한 우리는 모교 재학중 해방정국의 혼란에 이어 1948년 8월의 대한민국 건국과 1950년 6・25전쟁 1960년 4.19의거 혁명 1961년 5.16 군사혁명등 엄청난 역사적 진통을 겪으면서 1962년 2월에 졸업을 맞이하였다.
건국 이후 우리 정부는 5년에 걸쳐 매년 한달씩 신학년도를 앞당겨 1953년부터 3월 입학이 이루어지도록 단계적 조정작업을 추진하면서 다음 학년(모교 28회 해당)의 졸업은 1953년 2월에 각각 맞추어진 것이다.
한반도 동남단의 임시수도 부산에서 자란 덕분으로 직접 피난살이의 고초를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모교에는 신병보충대였던 육군 제298부대가 주둔했고 지역주민들은 집집마다 밀려오는 피난민가족과 군인가족들을 맞아들여 온 식구가 방 한 칸에 모여 살았다고한다 . 또한 제주도 제1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마치고 부대배치를 기다리는 아들 면회를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시골할머니들로 동래 거리는 언제나 사람들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고한다.
모교가 자리잡은 낙민동 지역의 변모
모교가 자리잡은 낙민동은 원래 동래읍성의 동남쪽 외곽으로 농가와 전통수공업공방들이 모여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동해남부선 철도가 개통되어 동래역이 생기면서 몇몇 산업시설이 들어오고 비농가 주택들도 조금씩 생겨났다. 해방 직후 당시와 현재를 비교할 때 모교 인근지역에서 그 위치와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은 동래역사(驛舍)뿐이다.
당시 목조단층 기와지붕 본관과 시멘트마감 목조이층 별관만으로 구성되었던 모교의 모습은 오늘날 대형 고층 콩크리트 건물로 개축되고 다양한 종류의 특수목적교실을 갖춘 현대식 교사로 우뚝 서있어 시대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동해남부선 철도는 1925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철도12년계획⌟에 따라 석탄・목재・광물・해산물 등 자원을 반출하고 부산과 함경도(경원선 안변역)를 연결할 목적으로 추진된 동해선 건설의 일환으로 1930년에 착공하여 1935년에 부산진-울산 구간이 개통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2차대전 패배와 국토의 남북분단으로 전체계획은 무산되고 오늘날까지도 부전-포항 구간의 동해남부선만이 운행되고 있다.
근년에 와서 부산광역시의 팽창에 따라 1990년에 수립된 ⌜부산도시철도기본계획⌟의 일환으로 1993년에 착공된 동해남부선의 복선전철화공사가 최근 마무리되어 전기기관차와 통근형 전동차의 운행이 아울러 가능한 도시철도로 거듭나는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해남부선 복선전철화사업 과정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부산시내 전구간이 고가로 이설되고 수영-송정 구간이 장산을 관통하는 터널로 연결됨으로써 많은 역의 위치가 변경되는 가운데서도 동래역은 승강장이 고가(高架)로 바뀔 뿐 역사는 원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당시는 에너지원을 대부분 석탄에 의존하던 때여서 개솔린엔진을 이용한 자동차수송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수송기능의 대부분은 철도와 해운이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해남부선의 개통은 한반도 동남부지역의 화물 및 여객운송에서 혁명적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당시 동래읍의 외곽에 해당했던 동래역 인근에는 정미소, 유리공장, 기와공장, 고무공장 등 제조업과 관련시설들이 입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모교 정문에서 동래역으로 가는 도로의 오른 쪽에는 산업조합의 대형창고들이, 왼 쪽에는 유리공장과 기와공장 등이 있었고 모교와 옛날 동래전차역 사이 뒷 길에는 고무공장이 있었으며, 동래역에서 오늘날의 부산도시철도 4호선 낙민역으로 가는 도로의 오른 쪽에는 대규모의 정미공장과 목재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늘날 세화약품이 들어선 넓은 부지는 양곡과 비료 등 농업생산자재를 주로 보관하였던 산업조합의 대형 창고시설이 있었던 곳이다. 원래 산업조합은 자본주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경제적 약자의 입장에 놓이게 된 농민, 노동자, 소규모 자영업자 등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판매, 구매, 이용, 신용 등 사업을 영위함으로써 대자본의 지배에 대항하고자 한 방어적 조직을 말한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1913년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설립된 고성면산업조합을 효시로 주민 자율의 산업조합이 임의조직의 형태로 각지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1926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산업조합령에 근거하여 당시의 금융조합이 담당했던 신용사업을 제외한 구매・판매・이용 등 세가지 사업을 담당하는 법적 근거를 지닌 산업조합이 보조금 지급과 제도금융 지원을 바탕으로 전국적으로 조직됨으로써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식민지시대의 산업조합들은 쌀 등 농산물, 비료 등 농업자재, 곡물가공에 필요한 대규모의 농업창고를 보유하였으며 모교에 인접한 대형 창고시설은 동래역의 수송기능과 연계해서 입지한 것이다. 유리공장과 고무공장 및 기와공장도 대량의 원료 즉 규사와 고무원료 및 고령토 수송, 정미공장 또한 원료곡의 철도수송과 산업조합창고 보관・하역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모교 인근에는 남쪽으로는 철도 관사, 서쪽으로는 동래중학교 (중・고등학교 분리 이전의) 관사 등 주로 일본인 직원・교사 등 전근이 빈번했던 공직자들을 위한 공공주거시설이 많았고 모교 구내에도 후문과 동래중학교 관사 사이에 교장 관사가 있었다. 모교 정문을 나서 왼쪽으로 칠산동과 복천동으로 향하는 도로의 왼 편에 몇몇 채의 주택이 있었을 뿐 오른 편으로는 농지가 동래고등학교앞 대로까지 이어져있어 가을이면 황금들녁에 메뚜기가 뛰어놀던 목가적 정경도 볼 수 있었다. 모교 후문의 높다란 돌계단을 내려가 여러 가닥의 긴 골목길로 이어지는 낙민동의 풍경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스텐레스제품이 나오기 전 놋수저, 놋그릇, 장죽 담뱃대 등 유기제품을 수작업으로 두드려서 만들던 수많은 ‘댓방’에서 들려오는 정겨운 망치소리다. 하나같이 나즈막한 초가의 어두컴컴한 나무창살 틈으로 보이는 유기제조 장인(匠人)들의 모습을 오늘날에는 접할 수가 없게되었지만 금속절단기나 연마기와 같이 귀에 거슬리는 금속성 소음이 아닌 사람냄새가 풍기는 영롱하고 경쾌한 망치소리가 가내수공업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열악한 교육환경과 사교육 없던 학교생활
우리가 재학하던 시절의 한국 사회는 식민지시대의 경제순환구조가 붕괴되고 새로운 경제질서가 구축되기 이전의 ‘결핍의 시대’여서 학교시설이나 운영도 매우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해방후 의무교육 시행에 따른 학생수 증가에도 교육시설 확충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해 교실난 때문에 저학년의 경우는 오전반・오후반으로 나뉜 2부제 수업이 이루어졌으며, 정부 발행의 교과서만은 미국원조물자로 제공되었던 양질의 종이를 사용했지만 학과목 시험지조차도 ‘소똥지’로 불리웠던 저질의 재생지가 쓰였고 연필은 심의 흑연이 종이를 갉아먹을 만큼 조악한 ‘백두산연필’ 뿐이었다.
1층 건물의 본관과 2층 건물의 별관을 합쳐도 교장실과 교무실 등을 뺀 교실수는 12개를 넘지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한 학년 3개 학급으로 편성된 전체 학생을 수용하려면 저학년의 2부제 수업은 불가피한 조치였던 것이다. 우리 학년은 입학 당시 남여 혼성반 3학급이었다가 6학년때 남여 각 1학급씩 2개 학급으로 개편된 것으로 기억된다. 그 이유가 학교운영의 어려움 때문이었는지 5・6학년에 가서는 남・녀를 별개 학급으로 운영한다는 당시의 남녀공학운영지침에 따른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내가 속했던 1학년 1반은 취학연령인 6세보다 3~4세가 많은 급우들로부터 취학연령에 약간 미달하는 5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연령층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입학적령을 초과하는 신입생이 많았던 것은 주로 농가 자제들로 해방후 의무교육실시에 따라 뒤늦게 취학했거나 일본 등지로부터 귀국한 귀환동포 자제가 언어능력문제 등으로 1학년에 입학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몇몇 장난꾸러기 급우들이 있었지만 연령과 체력의 현격한 차이로 학급내 위계질서가 자연스레 정립될 수 밖에 없었던 셈이다.
당시는 사설학원은 물론 가정교사와 같은 초등학생 대상의 사교육이 거의 없던 때라 학교교육이 우리들 공부의 전부였으며 교과서 이외에 참고서나 학습지도서도 거의 없던 시절이어서 학교를 파하면 숙제를 빼고는 집에서 공부하는 일이란 거의 없이 각종 놀이에 전념하는 행복한 초등학교 생활을 누릴 수가 있었다.
모교 교가의 작곡・작사자는 오경봉 선생님이라고한다. 선생님은 대단한 풍류문인이셔서 귀갓길에 약주가 약간 모자라실 때는 초저녁을 지난 시간에도 아량곳없이 이웃집 대문을 두드려 잠든 이웃을 깨워놓기가 일쑤였던 분이라고 하신다.
다재다능하셨던 선생님도 관리직에는 적성이 아니셔서 후에 동래군 바닷가 마을의 칠암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맞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의 기억을 드듬어 당시의 교가 가사를 적어본다.
태백산맥 뻗은 줄기 금정봉 되고
힘찬 파도 넘고 넘어 동해 푸르다
망월대 옆에 끼고 터를 잡아서
흰 구름 허리 속에 우뚝 솟은 집
이름도 즐거워라 우리 유락교
반만년의 단군 핏 줄 고이 받아서
이 나라의 태극 앞에 맹세하였다
무궁화 향기퍼질 어린 꽃송이
굳세게 명랑하게 부지런하게
새 일꾼 길러내는 우리 유락교
6・25 이후 본교사 시절의 기억
당시의 교과목은 국어・산수・사회・과학・음악・미술・체육 등 7개 정도로 편성되었으며 (성적)통지표에는 각과목 10점 만점으로 과목별 가중치 없이 단순평균한 성적과 학급내 석차가 기재되어있었다.
당시에는 음악・미술과목도 특별교실이나 전담교사가 없이 담임선생님 한 분이 맡으셨고 풍금(오르간)솜씨가 없으신 선생님들은 육성으로 동요 부르기를 지도해 주셨다. 체육시간은 맨손체조(국민보건체조)를 빼고는 달리기나 공놀이를 하는 것이 주된 수업내용이었다. 미국으로 부터 원조받은 옥수수 가루며 분유 배급을 받으려고 고사리 손에 그릇을 들고 운동장 한가운데 줄서서 기다리던 기억도 새롭다 .
기억에 남은 학교행사로는 봄・가을의 소풍, 가을 운동회, 대체로 봄 철에 열렸던 학예회 등이 있다.
당시의 소풍코스는 어린이들이 걸어서 왕복할 수 있는 편도 2~3킬로의 근거리에 국한될 수 밖에 없어 단골 목적지는 온천장 금강(공)원이나 범어사가 전부였으며 . 금강원은 예나 지금이나 부산의 벚꽃놀이 명소였으며 거의 유일한 시내교통수단이었던 전차 종점이어서 많은 인파가 몰려들곤 했다.
소풍 때는 모든 학생들이 주로 김밥 등 도시락과 과일, 과자, 사이다 등 간식을 각자 집에서 준비해왔고 1~2학년의 경우 할머니나 어머니와 함께 오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시대의 수학여행은 졸업을 앞둔 6학년때 2박 3일 정도의 일정으로 그리 멀지않은 경주 등지를 기차로 다녀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리 학년은 1961년 5.16 군사혁명으로 인해 수학여행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주로 10월에 열렸던 가을운동회는 많은 학부모들이 참여하는 최대의 교내행사였다. 전학년 학생들이 오전・오후에 걸쳐 다양한 종목에 참가하는 형식이어서 개인별 출전기회는 기껏 2~3회에 그쳤고 대부분의 시간은 청군과 백군으로 나뉜 응원전에 할당되었다. 해방 전의 홍군・청군 대항전이 남북분단 후 반공이념의 강화로 청군 대 백군으로 바뀐 사정은 지금도 그대로여서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않다.
당시의 대가족제도 아래서 가을운동회에는 할아버지・할머니부터 꼬마동생까지 온 가족이 총동원되고 집에서 준비해온 도시락 뿐 아니라 감・밤・고구마・떡 등 계절의 자연식품이 풍성했던 지역공동체 최대의 행사였으며 간혹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주와 손을 잡고 달리기에 나서는 진풍경이 벌어져 한바탕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운동회의 개인필수종목은 100미터 달리기로 1・2・3등까지 공책・연필 등 상품이 주어졌지만 나의 달리기 실력은 8명 중 4~5위권 정도여서 입상했던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청군・백군으로 나뉘어 속에 모래를 넣고 천으로 싼 애기주먹만한 크기의 공기를 던져올려 높다랗게 매달린 지름이 1미터를 넘은 두 개의 커다란 종이공을 터뜨려 속에 든 비둘기들을 날려보내는 단체경기로 종이공이 터지면 모두들 환호성을 올렸으며 이 경기의 배점이 청・백군의 성적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을운동회와 대조적으로 대체로 봄철에는 학예회가 열렸다. 당시는 물자가 부족하던 시대여서 학예회에 쓰였던 소도구들은 대부분 종이를 잘라 색칠한 정도였으며 출연자의 복장도 소박한 검정 양복이나 흰 브라우스였다. 학예회 장소는 교내에서 열린 경우는 별관 2층 교실 세 칸의 간막이를 떼낸 공간을 활용했으며 비교적 대규모로 열렸던 한 차례는 당시의 동래전차역앞 옛 동래극장에서 열렸던 기억이 난다. 학예회의 프로그램은 음악과 연극이 중심을 이루었지만 당시는 음악 사교육을 통해 기악이나 성악을 따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어 독창과 합창이 대부분이었다.
당시의 모교 풍경에서 특이했던 점으로는 비오는 날 교정에 한지에 기름을 먹인 종이우산과 광목천으로 된 양산 이외에 농가의 전통 우비인 삿갓・‘도롱이’(짚으로 만든 판초우의)가 등장했으며 도시락도 알루미늄제품과 함께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초백이’가 나란히 쓰여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과도기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교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결핍의 시대’ 어린이들의 놀이는 비용이 드는 특별한 장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단순한 신체운동이 중심을 이루었다. 남학생들은 여름철에는 농사용 웅덩이나 개울에서 개헤엄치기, 미꾸라지・붕어 등 물고기잡기, 잠자리잡기 등으로, 겨울철에는 팽이돌리기, 썰매타기, 연날리기, 못치기, 자치기 등으로 소일하였으며, 4계절을 불문하고 날마다 골목마다 공차기, 병정놀이 등이 성행했다. 여학생들에게는 공기놀이, ‘씨차기’(납작한 조약돌을 발로 차서 그어놓은 선 안에 넣는 놀이), 고무줄 놀이, 줄넘기, 오자미 던지기 등이 가장 일상적인 놀이로 되어있었으며 고무줄놀이때는 당시의 세태를 반영하는 노랫말을 곁들인 ‘동요’가 불리웠던 기억이 난다.
동문들의 건승과 ‘새로운 100년’ 모교의 웅비를 염원하면서
우리가 모교를 졸업한 후 많은 동기들이 이미 우리 곁을 떠나 고인이 되었다. 현재 생존해 있는 급우들 가운데 약 2/3는 동래지역에, 나머지 1/3은 서울 등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 동래지역의 친구들은 유락국민학교 37기 동기회 조직을 가동하고 있어 매번 모임에 많은 동기들이 꾸준히 참여하여 변함없이 어린 시절의 우정을 나누고 있다.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당시의 시대상황과 학제변동, 변화무쌍했던 학교생활, 모교 인근지역의 상전벽해와 같은 변모 등에 관한 기술을 통해 지난 시대에 대한 후배들의 이해를 도와주는 것이 선배로서의 도리가 아닐까 하는 오지랖 넓은 생각 탓으로 너무 장황한 내용이 되고 말았다. 두서없는 이 글이 개교 100주년을 맞은 모교의 역사 가운데 현대사의 격동기에 해당하는 해방 직후의 한 시대를 이해하는데 다소나마 참고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식민지시대, 분단시대, 산업화・민주화시대를 거치면서 파란만장했던 지난 100년을 넘어 새로운 100년을 열어가는 모교의 밝고 힘찬 앞날에 영광과 행운이 함께하기를 염원한다. [끝]
2016년 03월17일
유락 국민학교 37회 동기회
글 쓴이 카페지기 안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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