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홍원 前 시인 · 대학 교수
박홍원 시인바라기의 그리움
고향 후학 / 시인 수필가 문우종
내 고향 ‘도초도’의 ‘큰산’을 닮은 ‘어등산’ 아래, 노년의 쉼터에서 밤하늘에 큰 별을 바라보며 그 분을 추억하고
그릴 때마다 까까머리 소년이었던 1969년 9월, 그 분의 첫 시집『雪原(설원)』을 아무런 의미도 모른 채, 그저
신기하고 좋아 호롱불에 비추어 보며 품에 안고 잠들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평생 흠모하고 우러르며 존경했던 그 분을 홀연히 떠나보낸 지 어언 20여 년, 감히 이제 천상에 계신 그 분,
경산 박홍원(鯨山 朴烘元. 1933.9.1.~ 2000.1.5.) 시인을 칭송하고 사랑하였던 순박하고 정 많은 고향 사람들의
애틋한 그리움을 그 분에게 고하고 그 분을 추억하고 기리는 우리 이웃들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뒷산에 오르면 발아래 마을에선 섬사람들의 슬픈 이야기와 정겨움이 부르고, 멀리 '우이도'와 '칠팔도 등대'며
’흑산도‘ 너머 서해의 수평선이 손짓하는 내 고향 섬마을은 지형이 다섯 꽃잎 매화와 같고 잔설의 추위에 그리움의
속내를 꽃잎에 살포시 드러낸 매화가 지천이어 「發梅(발매)」라고 이름하였으며, 마을에 매화 꽃잎 숫자만큼 다섯 사람의
훌륭한 인물이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생태수도섬'으로 지정(선포식 2013.10.31.)된
'도초도'의 중심이 된 우리 마을은 '문바위'를 비롯한 산천의 풍광이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다운 곳입니다.
65세대에 4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한복판에 빤히 바라보이는 瓦家(와가) 한옥이
우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 분의 형님 박병채 씨가 살고 계신 그 분의 고향집이었습니다. 선도 농업인으로 선정되어
'농림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한 형님께선 학식과 덕망이 높아 면민들이 따르고 의지하며 존경하는 면장님이셨습니다.
당시에는 15,0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던 제법 큰 규모의 면이었지만, 많은 竹馬故友(죽마고우)들이
만날 배불리 먹고 싶어 竹馬(죽마)를 내팽개치고 도회로 도시로 뿔뿔이 흩어져, 이제는 고작 3,0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손 모아 기다리던 여름이 찾아오면 반바지 하나에 온몸을 맡기고 불알 딸랑거리며
우리들의 놀이터인 서해가 온통 황금빛 노을이 들 때까지 뛰놀던 철부지 소년들에게도 요즘 명품배우 비주얼의
귀공자 박홍원 시인은 우리들의 자랑이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분께선 목포사범학교를 마치고 평소 마음에 간직한 뜻을 이루고자 ‘조선대학교 문학과’에 들어가 학업에
정진하였는데, 평소 그 분의 문학적 재능을 눈여겨 본 당시 문학과 교수로 있던 시인 김현승의 특별한 지도로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받게 되고, 스승께서 ‘현대문학’에 추천함으로써 문단에 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학창 시절, 박홍원 시인을 애제자로 가장 아끼셨다는 김현승 시인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저는 곧장 서점으로 달려가
그 분께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펴냈다는 ‘한국 현대시 해설’이라는 서책을 구하여 탐독하며 귀히 간직하였습니다.
경산 박홍원 (鯨山 朴烘元) 시인께서는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사범대학 학장(1980∼1988)으로
후학들을 양성하면서 '원탁시문학회' 동인으로 대표(1988∼1991)로 ‘圓卓詩集(원탁시집)’ ‘圓卓詩(원탁시)’
‘그대 젖은 영혼을 위하여’ 등의 문예지를 발간하고, '한국문인협회' 이사(1995∼1997)와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1996∼1998)를 역임하는 등 활발한 문학 창작과 연구 활동으로「국민훈장 동백장」(1999)을 받았으며
생전에 6권의 시집을 펴냈습니다.
제1시집 “雪原”(예문관, 1969), 제2시집 “옥돌호랑이”(형설출판사, 1973), 제3시집 “나무 龍의 웅얼임”
(시문학사, 1979), 제4시집 “날개펴는 老巨樹”(예원, 1991), 제5시집 “참대의 詩”(예원, 1994), 그리고
“朴烘元 詩全集”(도서출판 문원, 1999)이 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펴낸 “박홍원 시전집”은 제5시집까지를
5부로 編制(편제)하여 前載(전재)하고, 6부에 제6시집 “꿈의 變奏”라는 이름으로 제5시집 이후 작품 34편을 싣고 있습니다.
우리네 독자들에게는 현대시의 난해한 時流(시류) 때문에 그 분의 시 또한 詩想(시상)에 다가서기 어려움이
다소 있었는데 ‘조선대’ 교수 백수인의 「관용과 화해의 시학 –박홍원 론 」이란 글을 읽고 많은 도움이 되어
그 분의 시 세계에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현승은 박홍원의 작품들이 “지니고 보여주는 가치에 상당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면서
그의 시적 특질을 다음과 같이 적시하고 있다.
홍원의 시는 소재를 객관적인 사상(事象)이나 자연 가운데서 구하면서도, 그 표현 속에 반드시
어떤 삶의 의미를 담고야 마는 것으로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는 삶의 의미라는 사상적 깊이만에 전념하거나 과열하지는 않는다.
시의 무게를 적당히 이룰 만큼 터치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사상만을 들입다 파지도 않고,
소재만을 가지고 가볍게 유희하지 않는 것 같다. 말하자면 형식과 내용이 조화된 중용의 길을
지향하는 것이 그의 독자적인 시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현승, “序文”, 박홍원 시집 雪原(예문관, 1969.) 14쪽.]
이러한 김현승의 지적은 그의 시가 ‘사물시’이면서도 단순한 시적 대상에 대한 묘사에 그치지 않고,
항상 철학적 깊이를 지님으로써 형식과 내용이 조화된 미적 질서를 갖추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김현승이 파악한 박홍원의 시적 특질은 그의 전 시 세계를 관류하고 있는 바탕일 뿐만 아니라,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시 문법의 틀로 판단된다. 그는 언어 사용면에 있어서도 감정어나 관념어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일이 없고, 일상적 언어들을 그대로 쓰면서도 언어의 내포성을 잃지 않음으로써
정서적 감동과 예술적 쾌감을 일으킨다.
[구창환, “詩의 藝術性과 思想性”, 조대학보 제7호(조선대, 1974), 94쪽. ]
최근 박홍원 시인께서 남긴 발자취를 찾던 중, 1992년 5월 개관하여 호남 지역의 역사적 유물 등을 간직했던
‘조선대 박물관'이 2016. 5.12. 재개관하여 이제 그 곳, 제 3전시실(김현승 문학실)에 가면 그 분의 귀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2019 광주시 문화예술상’ 시상식(2019.12.11.)에서는 故(고) 박홍원 시인께서, 다형 김현승(茶兄 金顯承) 시인의
예술 정신을 이어받아 평생 동안 활발한 문학 창작과 연구 활동을 통해 문학 분야의 창조적 계승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김현승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는데, 故(고) 박홍원 시인의 따님인 박소영 '휴먼닷컴' 대표가
고인을 대신하여 수상하였으며, 사위 류희성 '가온고등학교' 前전 교장과 조카 박영선 '광주광역시 농협쌀조합'
대표이사(前전, 지방 부이사관)가 참석하여 영광된 자리를 빛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그 동안, 박홍원 시인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그 분과 그 분의 시 세계를 기리고
세상에 널리 알리는데 애쓰고 계시는 백수인 교수와 후학들에게 경의와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며칠 전, 길한 예지몽을 꾸고 들떠있는 시간, 박홍원 시인의 가족으로부터 ‘광주예총’의 지원으로 그 분의 유고
시집을 내게 되었다는 가슴 벅차오르는 기쁜 소식과 함께 유고 시집에 고향 마을 후학으로서의 소회를 올려주었으면
한다는 당부를 받았습니다. 저로선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당부에 성스러운 유고 시집에 누가 될 수 있다며 극구
사양하다가, 그 분을 평생 흠모하고 우러르며 기리는 우리 후학들과 이제 그 분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순박한
고향 마을 사람들의 애틋한 사랑을 그 분에게 배달하라는 順命(순명)이라 여기고 소회를 내보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광주예총’과 그 분과 함께하였던 문인들과 학자들, 그 분을 추억하며 기리는 후학들의 성심과 사랑으로
그 분의 유고 시집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 소중하고 귀한 선물을 가슴에 품고 여느 때처럼 평생 그 분을 기리고
추억하며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리움은 신이 우리 인간에게 내린 가장 순결하고 귀한 선물이요 으뜸의 가치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
■ 참고 사항
▼ 제목 「 박홍원 시인바라기의 그리움」에 대하여
시인바라기를 합성어로 써도 될 듯 싶었습니다.
이를 띄어 쓰면 바라기라는 어휘를 사용할 수 없어섭니다.
「시인 박홍원바라기」라고 할 수도 있으나 「박홍원 시인바라기」가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참고 자료)
*엄마바라기 : 엄마 없이는 못 사는 엄마만 바라본다는 의미로 엄마와 해바라기의 합성어입니다.
*남편바라기 : 남편+-바라기의 합성어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듯 남편만을 바라보며 내조에 힘쓰는 아내.
*기타
: ‘개밥바라기, 맞바라기, 맞은바라기, 먼산바라기, 볕바라기, 천상바라기, 해바라기’ 등의 ‘바라-’는 ‘바라다’와 의미가
다른 ‘바라보다’ 혹은 ‘마주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우리 사전에서는 이때의 ‘바라-’를 ‘바라다’의 ‘바라-’와
의미가 멀어진 것으로 보아 어근으로 분석하였다.
▼ 작은 따옴표(' ') , 낫표 (「 」) 의 쓰임에 대하여
[한글 맞춤법(문교부 고시 제88-1호)] 【 문장 부호】Ⅲ. 따옴표[引用符]
가로쓰기에는 작은 따옴표, 세로쓰기에는 낫표를 쓴다.
(1) 따온 말 가운데 다시 따온 말이 들어 있을 때에 쓴다.
"여러분! 침착해야 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2) 마음 속으로 한 말을 적을 때에 쓴다.
'만약 내가 이런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모두들 깜짝 놀라겠지.'
[붙임] 문장에서 중요한 부분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드러냄표 대신에 쓰기도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
▷ 저는 이 곳 [붙임] 의 규정과 최근 흐름과 추세에 따라 인명은 제외하고 산이나 강,
단체나 회사명 등 고유 명사에는 작은따옴표(' ')를 썼으며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몇
곳에는 낫표 (「 」)를 썼습니다.
▼ 띄어쓰기에 대하여
: [한글 맞춤법(문교부 고시 제88-1호)] 제5장 띄어쓰기
우리글에서 가장 어려운 게 ‘띄어쓰기’라고 합니다.
※ 심지어 이 곳, [한글 맞춤법(문교부 고시 제88-1호)] 【 문장 부호 】Ⅲ. 따옴표[引用符] 규정에서도
복합어로 인정되어 한 단어인 ‘작은따옴표’‘마음속’을 붙여 써야함에도 띄어 썼습니다.
또한 '띄어쓰기'와 '띄어 쓰기'는 다릅니다.
*‘띄어쓰기’ 는 '띄다'(동사)의 활용형(부사형)인 '띄어'와 '쓰다'(동사)의 활용형(명사형)인 '쓰기'의
합성어입니다. 예문) 나는 띄어쓰기가 서툴다
*'띄어 쓰기' 는 ‘띄다’의 어간에 방법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 ‘-어’가 붙은 ‘띄어’의 형태로 ‘쓰다’의 명사형
‘쓰기’를 수식하는 경우에는 ‘띄어 쓰기’와 같이 띄어 적습니다.
▷ 본문에서의 '예시)
: 이 글의 첫 단락의 첫 줄, ‘큰산’은 붙여 쓰고 ‘큰 별’은 띄어 썼습니다.
'큰'은 ‘크다“ (형용사)의 어간 ‘크-’에 관형사형 어미 ‘-ㄴ’이 붙어서 이루어진 말로 뒷말의 명사나 명사구를
꾸미므로 띄어 써야하나 '도초도'의 '큰산'은 山(산) 이름인 고유 명사로 붙여 쓰기가 허용됩니다.
'서울 대학교'처럼 두음절과 세 음절의 어휘는 띄어서 써도 보기 싫지 않으나 각 한 음절인 '큰 산'은 붙여 씀이
보기에 좋아섭니다. 다음에 오는 '큰 별'은 당연히 띄어 썼습니다.
▼ '인용한 글'의 교정 작업에 대하여
8번째 단락, ‘조선대’ 교수 백수인의 「관용과 화해의 시학 –박홍원 론 」중에서
'5부로 편제하여 전제하고' → '5부로 編制(편제)하여 前載(전재)하고'
11번째 단락,[김현승, “序文”, 박홍원 시집 雪原(예문관, 1969.) 14쪽.]중에서
' 텃치' → '터치' / '디렵다' → '들입다' / '시세계'→ '시 세계'(시의 세계)
첫댓글
『 작업 일지 』
2020. 11. 24. (화) 저녁 시간에, 故 박홍원 시인의 따님인 박소영
'휴먼닷컴' 대표로부터, 선대인의 애제자인 백수인 ‘조선대’ 교수께서
나에게 스승님의 유고 시집에 올릴 회고의 글을 부탁하라는 당부가
있었다며 이를 긴히 청하여, 감히 말이 되지 않는다며 극구 사양하다가
밤새워 글을 구상하여 다음 날, 초고를 완성하고 이틀간 수십 번의
퇴고를 거듭하여 교정을 끝내고, 2020. 11. 28.(토) 아침 시간에
이메일로 전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