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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무엘하16장1~14절
제목 : 시바의 환대, 시므이의 저주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오늘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시길 소망합니다.
다윗은 피난길에 두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가져온 법궤를 돌려보내고, 아렉 사람 후새를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냅니다.
오늘 본문은 피난길에서 다윗은 자신을 선대하는 자와 저주하는 자를 만납니다.
한 사람은 시바요, 또 한 사람은 시므이입니다.
시바는 풍성한 음식으로 환대하지만 사울의 친족 시므이는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합니다.
1. 다윗을 선대하는 시바(1~4절)
1)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다윗을 맞지합니다(1절).
“[1]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다윗이 감람산 마루턱을 조금 지났을 때 므비보셋의 종 시바를 만나게 됩니다.
- 여기서 '마루턱'(top of hill)이란 감람 산 마루턱 곧 감람 산 꼭대기를 의미합니다.
므비보셋의 종 시바. - 본래 사울의 종이었으나 다윗의 명에 의하여 사울의 아들 므비보셋을 섬기게 된 자입니다 (9:2, 9-11).
그는 성품이 간사하고 교활하였는데,
그의 그 같은 성품은 본장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여름 실과.-여름이 끝나갈 무렵 완전히 익은 열매를 가리킵니다(암 8:1,2). 이 실과는 열매 야자수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70인역(LXX)에서는 '대추야자'(포 이닉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열대 지방이나 중동 지방의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행시에 종종 이것으로 갈증을 해소한다고 합니다.
2) 왕이 시바에게 무슨 뜻으로 나귀와 떡과 과일과 포도주를 가져왔느냐 묻는 말에 그 용도를 설명하니다(2절).
“[2]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하니 시바가 이르되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라고 대답합니다.
시바가 현재 압살롬의 반란(15:10-12)을 피해 피난길에 나선 다윗 왕에게 이처럼 음식물을 공궤한 것은, 아마 압살롬의 반란이 결국 실패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훗날 다윗 왕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이같이 많은 음식물을 날라 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3) 왕이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있느냐고 묻습니다(3절).
다윗은 시바가 가져온 물건 보다 더 관심이 가는 상황이 있었는데,
그것은 시바의 주인인 므비보셋의 행방이었습니다. 3절입니다.
“[3]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시바의 대답이 므비보셋이 여전히 예루살렘에 있고, 그 이유는
이스라엘 족속이 자기 아버지의 나라를 자신에게 돌릴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 이와 같은 시바의 말은 철저한 위증(僞證)입니다(19:26, 27).
왜냐하면 므비보셋은 지금까지 왕위 찬탈을 위한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은데다, 그는 절뚝발이로서 이미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는 결격 사유(缺格事由)를 지닌 자였기 때문입니다(4 :4 주석 참조).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바가 마치 므비보셋에게 왕위 찬탈에 대한 야욕이 있는 것처럼 꾸며댄 것은 물욕(物慾) 때문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즉 시바는 피난 중에 경황이 없는 다윗을 흥분시켜 므비보셋의 모든 소유를 자신이 차지하려는 사악한 목적 하에서 이같은 모함을 일삼고 있는 것입니다(4절).
4) 왕이 시바에게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것이니라 합니다(4절)
“[4]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하니라 시바가 이르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 말에 다윗은 므비보셋의 재산을 빼앗아 시바에게 줍니다.
이에 시바는 다윗에게 감사의 절을 하고 왕의 신하가 되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사실 시바는 예전부터 다윗의 신하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므리보셋과 사울의 신하로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시바의 출세에 지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불편이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므비보셋을 배반하고 다윗에게 오게한 동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바의 모함은 나주에 거짓으로 들어나게 됩니다.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 이는 시바의 악한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다윗 왕의 경솔한 결정입니다.
그런데 평소 지혜로운 다윗 왕이 이처럼 경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던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1) 다윗은 현재 압살롬에게 쫓기는 입장(15:14)이므로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 시바가 공궤한 음식(1, 2절)이 다윗을 감동시켜 공정성을 잃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3) 다윗에게 다소나마 사울가의 부상(浮上)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다윗이 미처 사실 여부도 확인해 보지 않은 채 이처럼 실언(失言)을 한 것은 크나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결국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금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게 되는데, 실상 아무리 조심하여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곧 언행(言行)의 신중성입니다.
2.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5~14절)
1)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시므이가 나오면서 계속 저주합니다(5절)
“[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바후림. - 바후림(Bahurim)은 예루살렘에서 감람 산을 넘어 요단 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 6km지점입니다. 15:17 지도 참조.
이곳은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서, 과거 다윗이 옛 아내인 미갈을 당시의 남편 발디엘로부터 취하여 왔을 때 발디엘이 울며 따라오다가 되돌아간 역사적인 성읍이기도 합니다(3:16).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 사울의 친족 중 한사람으로 여겨지는 시므이(Shimei)는 자기 지파와 가문에 대하여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유다 지파인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 됨을 시기하고, 이제 다윗이 쫓기는 신세가 되자 이를 반기면서 다윗을 저주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시므이는 훗날 압살롬의 반란이 수습되자 다윗 왕을 찾아와 이와 같은 과거의 망령된 행실을 시인하고 다윗의 용서를 받긴 하였습니다(19:16-23).
하지만 그는 결국 솔로몬 왕 때에 왕명을 어겨 참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왕상 2:36-46).
우리는 여기서 극단적인 지파주의자 또는 혈통주의자(血統主義者)의 편협한 사상과 그의 비참한 말로를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오늘날 가문, 혈통, 지연(地緣) 등 소아(小我)에 사로잡혀 대아(大我)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표상으로 이 시므이를 들 수 있는 것입니다.
2) 시므이가 다윗과 그 신복들을 저주하며 돌을 던집니다(6절)
“[6]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 여기서 돌을 던진 행위는 상대방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극도의 분노를 표시한 행위입니다(Wycliffe).
그런데 시므이가 이처럼 다윗과 그 신복들을 저주하며 돌을 던진 까닭은 다윗이 사울가의 피를 흘렸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8절).
물론 여기서 '사울가의 피'란 사울 왕의 비참한 죽음이 아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사울의 군장 아브넬의 죽음을 의미 합니다.
왜냐하면 사울 왕의 죽음은 블레셋과의 전투인 길보아 전투에서 생긴 죽음으로(삼상 31장) 다윗 왕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았으나,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죽음은 어느 정도 다윗 왕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3:27;4:6).
즉, 시므이는 여기서 다윗 왕이 과거 이스보셋과 아브넬을 죽인 장본인이며 따라서 베냐민 지파의 쇠퇴와 사울가의 몰락의 책임이 바로 다윗에게 있다고 믿으면서 돌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Hertzberg).
그러나 이러한 시므이의 비방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울가의 어느 누구도 살해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을 마치 자기 아들처럼 예우하며 아껴주었을 뿐입니다(9: 9,10).
따라서 시므이의 이 같은 행위는 그릇된 자기 선입견(先入見)의 결과였음을 알 수 있는 바, 우리는 여기서 선입견의 무서운 실상을 보게 됩니다.
3) 시므이의 독설입니다(7절)
“[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피를 흘린 자여.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쉬 하벧리야알'을 직역 하면 '벧리알의 사람아'란 뜻입니다.
여기서 벧리알이란 말은 무익한 것, 무가치한 것, 또는 파괴, 파멸이란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아', 또는 '파괴를 일 삼는 자식아'란 뜻입니다(Wycliffe).
이렇게 볼 때 시므이의 욕설은 보통 사람이면 도저히 참기 어려운 독설(毒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후일 신약 시대에 이르러 벧리알(Belial)이란 말은 사단을 지칭하는 말로 발전되었습니다(고후 6:15).
*고후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가거라 가거라 - 이는 약속의 땅에서 떠나 이방인의 땅으로 가라는 욕설입니다.
이와 같은 욕은 약속의 땅 가나안(창 13:14-17))을 자신들의 영원한 기업으로 믿고 있었던 히브리인들 에게는 아주 악랄한 저주였습니다.
4)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다윗에게로 돌리셨다고 합니다(8절)
“[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압살롬의 난(15:10-12)이 이스보셋과 이브넬을 죽인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시므이는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다윗을 정죄하고 있지만 실상 그의 정죄는 정하지 못하며, 지극히 감정적이고 무지에 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보쏀과 아브넬의 죽음은 다윗의 책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삼상 15:28).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압살롬의 난 역시 다윗의 사적(私的)인 범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12:10, 11).
5)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시므이의 머리를 베겠다고 청원합니다(9절).
“[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아비새. - 요압의 동생으로(2:18), 다윗 왕의 조카이자 그의 충성스런 신하입니다(3:30;10:10).
죽은 개. - 가장 보기 싫고 하찮은 인간을 뜻하는 히브리적 은어(隱語)입니다(3:8;9:8 주석 참조).
6)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나에게 저주하라 하심이니 합니다(10절)
“[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스루아야의 아들들아. - 스루야(Zeruiah))는 아비새의 어미입니다(2:18).
그런데 여 기서 '아들들'이란 복수(plural number)로 보아 아비새 곁에는 그의 형 요압도 함께 있었던 것에 분명합니다.
요압은 아마도 시므이를 단칼에 목 베어 버리자는 아비새의 의견(9절)을 지지했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 아비새의 제의(9절)를 일축해 버리는 말로서, '나의 생각과 너희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함축적 의미를 가집니다(왕상 17:18;수 22:24).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 시므이의 악독한 저주를 신앙 안에서 받아들이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즉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은 물론 시므이의 저주까지 포함하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런의 모든 사건들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저질렀던 그의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12:10-12)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 다윗은 자기를 괴롭히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보복하거나 불평하기 보다는, 자신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여기고 철저히 근신(謹愼)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 과거 실수한 자리에서 벗어나, 이제 인간에게 당하는 억울함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저질렀던 자기의 추악한 죄를 먼저 생각하는 다윗의 새로운 신앙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7)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그가 자기에게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라고 합니다(11절).
“[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
이는 시므이의 저주 역시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다윗의 역설(力說)입니다.
즉 자신의 아들 압살롬도 자신에게 반기(反旗)를 들었는데(15:10-12),
하물며 다른 지파 출신인 시므이가 자신에게 저주한 마디 한 것쯤이야
하나님의 징계치고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지 않겠느냐는 반문입니다.
8)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고 합니다(12절).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고 있는 본 구절에는 '원통함'과 '저주'라는 용어가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 중 '원통함'('아인')은 죄, 사악한 행동을 의미하는 말로서 여기서는 과거 다윗이 실제로 범했던 죄(11장)를 의미합니다.
반면, '저주'는 시므이가 다윗에게 행한 저주를 의미하는 바, 곧 다윗이 사울가의 어느 누구도 죽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울가의 피를 흘린 자라는 저주(7, 8절)를 받은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다윗은 자기가 이러한 수욕(受辱)을 묵묵히 감수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가해진 과다한 저주를 기억하셔서 자기를 궁휼히 여겨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현재 자기의 억울한 형편을 정확히 살펴보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일정한 징계의 기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위기 가운데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9) 시므이는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 따라가면서 저주합니다(13절).
“[13]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 - 여기서 '티끌을 날리다'는 말은 '먼지를 일으키다'는 뜻입니다(공동 번역).
즉 시므이는 다윗 앞서 행하면서 다윗을 모독하는 의미로 짐짓 그 앞길에 먼지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 그 흙먼지는 다윗은 물론 시므이 그 자신의 머리 위에도 덮였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 우리는 시므이가 다윗에게 퍼부은 저주 역시 홅먼지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합니다.
즉 그것은 시므이가 다윗에게 퍼부은 저주가 합당치 아니한 것일 때 그 저주는 도리어 저주를 발했던 시므이에게로 되돌아갈 뿐이란 사실입니다(12절). 삿 17:1-6 강해, '저주에 대하여' 참조.
10) 왕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들이 피곤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쉽니다(14절)
“[14] 왕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피곤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피곤하여.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예핌'은 '피곤하다'는 뜻의 동사 '아이프'의 형용사형으로, '피곤하여'라고 해석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KJV).
그런데 혹자는 '아예핌'이 여기서는 지명(地名)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사
용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근거로 본절에서 '샴' 이라고 하는 지시 부사가 사용되었음을 듭니다.
즉 이 '샴'이란 용어는 '거기에서'란 뜻으로, 다윗과 그 일행이 휴식을 취한 한 장소를 지시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 중 어느 견해가 보다 타당한지는 판단키 어렵다. 그러나 둘 중 어느쪽을 취하여도 문맥에 큰 변동은 없습니다.
다만 '아예핌'을 고유 명사로 볼 경우, 17:18, 21에 의거할 때 '아예핌'은 바후림을 지나 요단 강 근처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했는 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다윗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모든 곳에서 자신을 외면하는 상황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인정 할 수 있는 믿음이 발동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말씀을 듣는 분 중에 이러한 설상가상과 같은 상황으로 인해서 좌절을 경험하는 분이 있으시다면 다윗이 회복하고 있는 믿음이 발동되시길 기도합니다.
고난 가운데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길 소망합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감람산 마루턱을 넘을 즈음,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풍성한 음식을 준비하여 다윗 일행을 맞이합니다(1~3절).
이는 많은 음식으로 다윗을 맞이한 아비가일을 연상시킵니다(삼상25:18).
하지만 아비가일은 가문 전체가 몰락할 위기에서 가족을 변호하기 위해 나섰지만 시바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달콤한 환대로
다윗의 마음을 흔들고 무고한 말로 주인을 모함합니다.
그는 이웃의 곤경에 진심으로 동참하기보다 때를 이용하여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에 능한 기회주의자입니다.
아무리 뇌물과 모함과 왜곡이 출세로 가는 지름길이더라도,
그리스도인은 명예로운 패자의 길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 까요?
2) 다윗은 도망자 신세인 자신을 환대한 시바에게 무고한 사람의 재산을 넘겨주는 경솔한 결정을 내립니다(4절).
시바의 호의에 감복하다 그의 술책에 말려든 것입니다.
지금도 악은 선의(善意)를 가장하여 성도들에게 다가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신의(信義)를 저버리도록 유혹합니다.
3) 다윗을 향해 환멸을 느끼던 사울의 친족 시므이가 온갖 욕설을 퍼붓습니다(5~8,13절).
그는 사울 집안의 몰락을 다윗의 책임으로 돌리며 압살롬의 반역이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라고 저주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근거 없는 왜곡이요 부당한 저주입니다.
그는 “가문과 혈통과 지연 등 소아(小我)에 사로잡혀 대아(大我)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우둔한 자의 표상”입니다.
4) 아비새가 왕을 모욕한 시므이를 처단하려 하자 다윗은 그의 분노를 잠재우며 만류합니다(9~14절).
시무이의 저주를 단순히 원수의 저주가 아닌 그를 통한 하나님의 저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시11:4)고 고백합니다.
이 순간에 다윗이 바란 것은 시므이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이 수치를 다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스스로 올무에 걸리지 않도록 부단히 자신을 되돌아보고 근신하되, 유연한 정신으로 둔탁한 세상을 헤쳐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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