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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생(重生)
성경은 구원을 또한 중생(重生, 거듭남)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중생이란, 죄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산 결과, 중생한 자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새로워진다. 그는 새 사람이 되고 새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성경은 중생을 ‘하나님께로서 남,’ ‘거듭남,’ 혹은 ‘성령으로 남’이라고 표현한다. 요한복음 1:13,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요한복음 3:5, 6,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야고보서 1:18,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아페퀴에센).” 디도서 3:5, “중생의(팔링게네시아스 παλιggενεσίας)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초대교회의 어거스틴은 중생과 회심을 구별하여 중생은 마음의 시초적 변화로서 하나님의 단독적(單獨的, monergistic) 사역이며, 회심은 중생에 따라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중생을 하나님의 단독적, 주권적 사역으로 본 것은 성경적이다. 그것은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의 사상이었고, 오늘날 개혁신학의 기본 입장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중생과 칭의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았다.
초대교회의 펠라기우스는 중생을 사람이 자기 생활과 습관을 도덕적으로 개선하는 행위 정도로 보았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다. 교회 역사상 어떤 이들은 중생을 하나님과 사람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보았다. 이런 견해를 신인협력설(神人協力說, synergism) 혹은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 Pelagianism)라고 부른다. 근세에 나타난 알미니우스주의는 본질적으로 이런 견해와 같다. 한편, 천주교회는 사람이 세례를 통해 부패성이 제거되고 의가 주입(注入)됨으로써 중생된다고 보았다. 이것을 세례중생설 혹은 주입은혜의 교리라고 한다.
중생의 성격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고 전적으로 부패되고 무능력해져 있다. 로마서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죽은 영혼은 스스로 살아날 수 없고 하나님의 활동에 협력할 수도 없다. 죽은 자는 중생 시 스스로를 도울 수 없다. 중생에 있어서 그는 전적으로 피동적(被動的), 수동적(受動的)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나사로야 나오라’고 불러내실 때 죽은 나사로가 주의 음성에 협력할 수 없는 것과 똑같다. 선지자 에스겔이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향해 대언할 때도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만 그것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겔 37장).
그러므로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적(單獨的), 주권적 활동이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중생에서 사람은 전적으로 피동적(被動的)이다. 중생에서 사람의 의지는 협력적 원인이 될 수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들을 중생시키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증거한다.
에스겔 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요한복음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5, “물과 성령으로(엑스 휘다토스 카이 프뉴마토스) 나지 아니하면.” ‘성령으로’(πνεύματος)라는 말은 중생에서 성령께서 원인자이심을 보인다. 에베소서 2:1, “[하나님께서] 허물들과 죄들로 죽었던 너희들을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4, 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디도서 3:5,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 . .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중생시키실 때 주로 복음의 말씀을 사용하신다. 따라서 성경은 말씀을 중생의 수단이라고 표현한다. 야고보서 1:18,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유아들의 경우는 다르나, 성인들의 경우, 중생은 복음을 듣고 믿는 것과 동시적이다. 그러므로 우리편에서는 오직 전도에 힘써야 한다.
중생은 사람의 영혼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가? 중생한 영혼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중생은 중생한 자의 이전 영혼이 새 영혼으로 교체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그 자신이다. 그의 영혼은 동일하다. 단지 그의 영혼이 중생으로 새로워진 것이다. 또 중생은 영혼의 지정의(知情意)의 기능들 중의 일부 혹은 전부가 단지 새로워지는 정도도 아니다. 죽은 영혼이 다시 산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을 의미한다. 중생은 중생한 자가 범죄할 수 없는 존재로 완전하게 변화되는 사건도 아니다. 사람은 중생한 이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 그것은 성경도, 경험도 증거하는 바다.
중생은 영혼의 지배적 성향(governing disposition)의 변화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중생은 “새 생명의 원소를 인간에게 심으시고 영혼의 지배적(혹은 주도적)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정의한다. 촬스 핫지의 설명도 비슷하다. 중생 사건에서 하나님의 영께서는 영적으로 죽은 죄인들 속에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셨고,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산 결과, 중생한 자의 영혼의 성향, 의향, 즉 마음가짐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진다. 그는 새 마음을 받는다. 비록 옛 죄악성이 그의 인성에 남아 있어 자주 실수하고 실패하기도 하지만(롬 7장), 그의 영혼의 이 새 성향은 의를 지향하고 의만 지향한다. 그것은 다시 불경건과 부도덕의 죄악성에 굴복할 수 없는 새 생명의 원리이다.
에스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에베소서 4:22-23,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즉 새 생명]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중생의 증거
중생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중생한 자는 죄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고 죄로부터 돌이키며,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고 의지하게 된다. 요한일서 2: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7,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한복음 1:12, 13, “영접하는[영접한]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3:16의 말씀도 요한복음 3:3, 5의 중생에 대한 말씀과 관련해 생각하면, 중생으로 얻게 되는 영원한 새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확증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일서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중생한 영의 범죄 여부
중생한 영이 범죄치 않는다는 견해가 있는데, 그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생한 영은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입어 다시 살았으므로 그것이 범죄한다면 다시 죽어 그리스도의 대속이 무효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은 범죄할 수 없다. 중생한 사람이 범죄하는 것은 영이 아니고 심신(心身, 몸과 마음)이다. 영과 심신(心身)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며 죄성은 심신에게만 있고 영은 완전 성결하다. 믿는 사람에게 영의 구원은 이루어졌으나 육의 구원은 아직 안 이루어졌으므로 그의 심신은 중생한 영의 지배를 받아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이 견해가 의지하는 주요 근거 구절은 요한일서의 다음 몇 구절이다: 요한일서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한일서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중생한 영이 범죄치 않는다는 견해를 가지는 자들은 이상의 구절들이 중생한 영에 관해 가르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견해의 문제점은, 영과 마음(心)이 별개의 존재로 분리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전통적 개혁신학이 이해하는 대로, 사람은 영(프뉴마) 혹은 영혼(프쉬케 ψυχή)과, 육체(소마)의 두 실체로 구성되었고, 마음은 영의 기능이다. 육체는 물질적 실체이며 자체적으로 지정의(知情意)의 기능을 가질 수 없다. 물론, 영육의 결합체로서의 인간의 마음이 순전히 영의 활동뿐인가 하는 질문은 정당한 질문이며, 그것에 대해 영육의 결합체로서의 인간의 마음은 순전히 영의 활동만은 아닐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마음은 육체와의 결합 속에서 생성된 마음이다. 사람이 죽기 전에는 영육의 존재적 분리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육체와 분리된 영에 대해서만 무엇을 논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요한일서의 구절들은 실상 중생한 영의 문제가 아니고, 중생한 사람의 문제이다. 더욱이, 만일 그 구절들이 중생한 영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그것들은 요한일서 전체 교훈에 비추어 볼 때 필요성이 없다. 왜냐하면 요한일서는 중생한 성도가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이 범죄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는 요한일서의 교훈의 강조점에서 볼 때 실제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은 중생한 사람이 범죄치 않고 의를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일서의 강조점이다.
요한일서의 표현들은 동사의 현재시제의 현재진행적, 반복적 의미로 볼 수 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한다”는 요한일서 3:6의 말씀은 주 안에 거하는 자, 즉 중생한 사람이--중생한 영이 아님--현재진행적으로 혹은 반복적으로 범죄하고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잠시 넘어졌을지라도 즉시 일어나 회개하고 의롭게 살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라는 요한일서 3:9의 말씀도 중생한 자가 계속 죄를 짓고 있거나 죄 가운데 살고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새 생명이 그 속에 심어졌고 그 새 생명은 거룩하고 의롭게만 살려는 새 성향이기 때문이다. NIV 영어성경은 이 구절들을 그런 뜻으로 번역하였다.
또한, 중생한 자가 범죄하면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가 무효화되리라는 생각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법적인 칭의와 실제적인 성화를 오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한 자가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에 근거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법적 책임은 이미 제거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하고 영원한 의를 받았다(롬 3:21-22). 그러므로 중생한 자는 아직 죄성을 가지고 있고 때때로 범죄하기도 하지만, 그의 성화의 전 과정은 실상 죄책이 없는, 결코 정죄될 수 없는 과정이다(롬 6:14; 8:1).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는 단순히 중생한 자의 영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영육의 인격 전체에 적용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전인적(全人的) 구원이다. 성도의 중생뿐 아니라 또한 성화와 영화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의 구원과 육의 구원을 분리시켜 중생한 자의 현실적 죄 문제에 연관시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택자들의 모든 죄 곧 영육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영이 범죄치 않는다는 말은 성경적 근거가 약하다. 역사적 개혁신학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생한 자에게 있어서 육과 분리된 영의 순결성 혹은 완전성을 추론하는 것은 가능하다. 베드로전서 2:11,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카타 테스 프쉬케스) 싸우는 육체의 정욕(톤 살키콘 에피두미온)을 제어하라.” 이 구절은 ‘육체의 정욕’과 ‘영혼’을 구별하고 대조시킨다. 이것은, 육체 혹은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대조시키는 로마서 8장과 갈라디아서 5장의 구절들(롬 8:4-6; 갈 5:16-17)과 다르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7문답은 “신자들은 죽을 때 그리스도께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기를, “신자들이 죽을 때 그 영혼들은 완전히 거룩해지며 즉시 영광으로 들어가고, 그 몸들은 그리스도와 여전히 연합된 채 부활 때까지 그들의 무덤들에서 쉽니다”라고 하였다. 신자가 죽을 때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해진다는 생각은, 육체와 분리된 중생한 영의 완전한 순결성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비록 성경이 육체와 분리된 중생한 영의 순결성을 적극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그 가능성은 추론할 수 있다고 본다.
유아들의 구원 문제
의식적으로 회개하거나 신앙을 고백할 수 없는 유아 때에 죽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떤 이들은 유아 때 죽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보았다.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진술하기를, “우리는 유아 때에 죽는 모든 사람이 은혜의 선택에 포함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어느 방법으로나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해 중생하며 구원얻는다고 믿는다”라고 하였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유아 때에 죽는 모든 사람이 구원얻는다는 것이 복음주의적 개신교인들의 공통적 교리라고 하였다. 그는 그 근거로 로마서 5:18-19의 아담 안에서의 인류의 정죄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많은 사람들의 칭의를 든다. 그는 말하기를, “아담의 모든 후손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명백히 드러난 자들 외에는 다 구원받는다”라고 하였다.130)
그러나,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유아들만 구원을 얻는다고 보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3-4, “유아 시에 죽는 선택된 유아들은 그가 기뻐하시는 때에, 기뻐하시는 곳에서, 또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에 의해 중생하고 구원을 얻는다. 또 말씀의 사역에 의해 외적 부르심을 받을 수 없는 그 외의 선택된 사람들도 그러하다.” 우리는 이 두 번째 견해가 성경의 전체 진리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에베소서 1:4-5,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