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모비 건립기(感慕碑 建立記) 명성황후 불망 추모비 건립 (1903년)
1895년(고종32년) 8월 20일 일본의 계략(計略)에 의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弑害) 당하고 7년 여가 지난 1903년 3월에 5명의 감모비사무소(感慕碑事務所) 주요인사들이 주축(主軸)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 추모비(追慕碑) 건립과 관련하여 항일(抗日)에 뜻을 같이 하는 인사들에게 당위성(當爲性)을 알리고자 포고문(布告文)을 발송하였다.
감모비사무소(感慕碑事務所)의 5명 주요 인사들 중에는 1907년 일본에서 차관한 나랏빛을 갚아 일본의 속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제창하신 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광제(金光濟)의 또 다른 이름인 김홍제(金弘濟)로 총무원(總務員)을 역임하면서 감모비(感慕碑) 건설 제반사무에 대하여 총괄하여 추진하였다.
- 총무원(總務員) 김광제(金光濟) : 이명(異名) 김홍제(金弘濟), 충남 보령 웅천출신, 1907년 대구출판사 광문사(廣文社) 사장으로 부사장 서상돈과 함께 일본에서 차관한 1,300만원을 갚아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하였으며 1910년 직후까지 대한협회활동, 마산구락부 문예활동,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동경유학생들과 제2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국내외에 배포하고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려다 일본경찰에 잡혔다.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사무장(事務長) 민치헌((閔致憲) : 1885년(고종 22) 9월 증광별시문과에 병과 등제, 10월 홍문관부수찬, 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 사간원대사간,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 승정원우승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경주부윤, 중추원1등 의관,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회계원경, 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하였다.
- 찬의장(贊議長) 박기양(朴箕陽) : 1888년(고종 2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사정(副司正),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 겸문학(兼文學), 성균관대사성, 이조참의, 함경도관찰사, 궁내부특진관, 참령,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 의정부찬정, 궁내부대신서리, 장례원경 등을 역임하였다.
- 사무원(事務員) 심상희(沈相禧) :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애국지사들과 1896년 초 의병을 일으켜 여주의진의 대장이 되어 여주장날을 이용하여 수백 명의 동지와 더불어 거사하여 전선(電線)을 끊고 일본인들을 살해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감독원(監督員) 정한규(鄭翰圭) : 군수(郡守) 재임(在任)
◆ 본문 내용 ◆ 敬啓者鳴呼感慕之碑夫豈忍爲而爲之也哉薪膽非與於復雪指之則爲誓羹墻非與於追慕托之則爲減瀝衆血特書懸衆目而常在一片之石得以扶萬古綱相卽天道無不腹之理人事有可爲之時不自得已爲之也OO / 明成皇后徽音永閟宿寃OOO爲我大韓臣子者執不臥薪寢苦圖雪壞OO哉切恐歲深月久誠惑不擊玆圖營堅警我萬億民泣血之志以矢不忘而己刱役務事巨力綿竣工末由用此仰佈幸須 / 覽則聲應以忠捐助以義竣完大事之地千萬爲要
삼가 말씀드립니다. 오호라 마음에 느끼어 사모하는 비, 왜 참아야 하겠는가!...복수하여 설욕해야 하지 않겠는가!...명성황후를 그리워하는 백성이 감모비를 세워 오랜 세월 동안 전하는 것은 하늘의 도리를 다하는 일로 자기 스스로를 얻는 일이니라
명성황후의 아름다운 덕행과 언어를 영원히 볼 수 없어 숙원으로 대한의 백성들 모두가 복수와 설욕을 한다는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오랫동안 정성을 다하고 굳건히 살피어 우리 만백성이 피눈물로 뜻을 같이하여 맹세를 잊지 않고 어렵게 큰 힘을 모아 준공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는 다행으로 생각한다.
바라보건데 소리가 응하고 충성스런 마음으로 기부되어 의로운 기운으로 감모비(感慕碑) 건립을 준공한 큰일은 만백성에게 중요한 일이었느니라.
光武七年 癸卯 三月 日 / 감모비사무소(感慕碑事務所)
- 본문내용 해제는 본 카페지기가 임의대로 해제한 것으로 사실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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