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서른살에 이르러 비로소 대중 앞에 자신을
뚜렷히 드러내어 설법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서른세살에 십자가형을 통해 짦은 삶을
마감하면서 남긴 한마디... “다 이루었다”
삶을 마감할 때 까지 불과 3년 남짓한 설법의
기간이었으나 “다 이루었음”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대로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비록 국가 마다 차이는 있지만 세계적으로 번성하였다
우리 인간은 모든 사물에 대해 분석을 통해 해석하고자
한다. 특히 과학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러하다
실험적인 지식을 동원하여 사물을 해석하고 분석
하고자 한다
그러나 사물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규명하고자 하는
과학적 수단이 증거할 수 있는 것은 대자연과 세계가
생성되어 온 과정일 뿐이다. 만약 과학적 수단으로써
그 과정에서의 근원 마저 추론하고자 한다면 그 과학적
시도는 이미 과학의 영역을 이탈하여 신념의 범주로
넘어 가고 있는 것이리라
이처럼 과학적 수단으로써 규명할 수 없는 것이
우주와 대자연의 근원에 관한 문제이다 보니
파스칼(1623~1662, 프랑스, 수학.물리학자, 종교.철학자)은
신앙을 “하나의 모험적 결단”이라 평가하였다
인간이 지니는 논리성과 지성은 종교심과 신앙 보다는
의구심과 회의적懷疑的 사고성향 쪽으로 가동되기
마련이다. 그러하기에 어리석은 사람은 의심이 적을 것이요
술에 취한 사람은 더욱 더 의심이 적을 것이며
아예 의심 자체가 전무한 사람이라면 뇌 자체가 마비된
사람이리라
이처럼 우리 인간은 인지능력의 숙명적 제약이 있기에
기독교가 지닌 “하나님 신앙”은 파스칼이 말한 “모험적
결단”과 그리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모험적 결단
이라고 하는 신앙의 기조基調가 있기에 예수께서
짧다면 짧은 3년여 동안 대중을 대상으로 한 설법 끝에
죽음을 맞이하며 “이제 다 이루었다”고 감히 말씀하실 수
있었으리라. 물론 예수께서 일반인들처럼 기독교 신앙을
갖기 위한 모험적 결단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점은
잘 안다. 하늘의 기운과 교감하는 영감이나 예지력이
우선했음이리라. 그러나 아무리 맑은 영감이나 예지력이라
할지라도 그것 또한 눈으로 보고 만져 본 끝에 얻는
인식작용은 못된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모험적 결단
이라고 말해도 무리는 없으리라. 이 정도의 결단이 있기에
우리 인간의 인식 능력 바깥에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태시태초 절대자 하나님을 마음으로 영접할 수 있는 것
이리라
이에 대비하여 석가께서는 80세 되던 해에 생을 마치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항상 해탈解脫을 구하여 방일放逸하지 말라...(중략)
이 세계는 무상한 것이다. 굳고 강하게 영구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중략) 내가 말한 모든 법은
참으로 너희들의 스승이다"
여기에서 말씀하신 해탈에 이르는 과정은 기독교 신앙
처럼 결단에 의존하는 것과는 다르다. 해탈을 향해 가는
구도求道의 과정은 오랜 세월을 요한다는 점 그리고
석가께서 50여년의 기인 세월 동안 말씀하여 누적되고
쌓여 온 법이라는 면에서 어느 한 순간의 결단이 아닌
점진적이고 과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와 불교의 신앙적 과정과 궤도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불교가
철학적 사유思惟에 근간을 두고 있다면 기독교는
모험적이기 까지는 아닐지언정 결단에 그 근간을
두고 있다
따라서 불교는 아무리 심오한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인식의 차원이 높아지게 될지언정
여전히 우리 인간은 인식의 한계에 놓여져
있을 수 밖에 없기에 하나님의 존재라고 하는
태시태초의 근원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 신앙은 철학적 사유의 과정이
결핍되어 있기에 우주와 대자연의 상이相異
하고 다채로운 진리의 모습을 정밀하게
들여다 볼 수 없는 한계에 갇힐 수 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기독교와 불교의 2大 종파가
상호 배척과 견제의 울타리를 허물고
융화.교류될 수 있다면 비로소 정법正法의
온전한 진리가 서게 되리라 믿는다
“이제 다 이루었다”는 예수의 말씀이나 “내가 말한
모든 법은 참으로 너희들의 스승”이라는 석가의
말씀은 이제 이미 모두 실현되고도 남음이 있다
기독교와 불교는 이미 인류사회 곳곳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기인 줄기와 무성한 잎을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처럼 “이제 다 이루었다”면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이 나타나는게 대자연과 세상의 이치이고
석가의 말씀처럼 “이 세계는 무상한 것이요 굳고
강하게 영구히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면 석가께서
평생에 걸쳐 남기신 법만으로써는 앞으로 다가 올
새로운 시대, 후천 가을시대에 이르기 까지 불변의
절대법으로서 서 있을 수는 없는 것이리라
지금 이 시대에 즈음하여는 “다 된 것”이 아니라
“새로이 시작해야 할 때”가 다가 오고 있으며
“태시태초 절대자의 존재에 대해 무지한 가운데
지금 까지 쌓아 올린 불법佛法의 역사 위에
하나님의 존재가 드러날 수 있다면” 비로소
온전한 후천시대 정법正法의 역사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후천시대에 이 세상을 지배할 종교관과 세계관
그리고 인류관은 어렵고 난해한 법이 아니요
아주 쉬운 법이다. 이 세상에는 서로 다른 모습의
진리들이 다채롭게 혼재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단편적인 진리들이 서로 어우러져
비로소 온전한 정법의 진리가 세워질 수 있다는
점을 깨우치면 되는 것이다
우리 선남선녀들이 길게 뻗은 강가江街를
음미하며 걸어 가면서 이 강이 아닌 또 다른
모습의 강줄기가 존재한다는 점을 수긍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미처 우리들이 바다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저 멀리 바다의 어슴프레한 모습을
느낄 수만 있다면 후천시대에 도래할 일원一元의
정법正法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요 “이제 다 이루었다”고
서둘러 말할 수 있는 것이리라
후천시대에 이 세상을 지배할 정법은 마치 밤하늘의
달 처럼 예수나 석가 같은 어느 한 위대한 현자가
밝히는 법이 아니요 이 세대의 모든 선남선녀들이
마치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과도 같이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진리를 창조하는 주인공이 되는 법이다
들어 보라. 서로 다른 악기들이 모여 이루는
멋진 음율을.
이런 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라
단 1분의 잠도 이룰 수 없었다. 지금이 07시 51분...
어느덧 성탄일의 아침이 밝아 오고 있다
도반이 사다 준 초컬릿 덕분에 지새우는 밤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았다.
첫댓글 1.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의
“하나님과의 참다운 만남”이나 “참다운 해탈”이 있다면
인간 각자가 스스로를 완성하는 영적靈的인 체질개선을
이룸으로써 실현되는 것.
여태껏 하나님을 찾아 울부짖던 우리 인류가
하나님과의 참다운 만남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고
해탈을 위해 먼 구도求道의 길을 가고 있는 수행자가
참다운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 개개인의 영적인 완성에 이르는 길이며
이 것이 실현되려면 모든 사람의 일상생활에
적응되어 실현될 수 있는 생리심법生理心法이
나와야 되는 것.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의무로서
정도정법正道正法을 실현하여 영적인 완성체가
되어야 하는 것인 바 여기에는 물질과학의 힘이
따를 수 없고 종교적인 신神의 도움이 필요치
않으며 철학사상의 힘만으로도 미치지 못하는 것.
2.
고로 진정구세주의 정체란 바로 진아眞我의 초시공적
기운이며 정신과 물질을 모두 초월하여 나타나는
신성불가침의 주체성인 것으로서 이를 발견하는데
있어서는 과학의 힘이 필요치 않으며 종교적인
의타적 힘으로도 미칠 수 없는 것이요 나 자신의
체질을 구성하는 세포 하나 하나가 바로 진정구세주의
정체요 거기에 신성불가침의 주체성이 갖춰져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자각할 때 실제로 나 자신이
그러한 능력체能力體가 되는 것이니 여기에서
위대한 사상이 나오는 것이요 철학의 정체가 발견되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법신法身을 인간 개개인이
얻을 수 있는 것.
- 2023년(癸卯年) 기쁜 성탄절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