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서는 새우깡 맛이 난다 외 9편
변 종 태
신호등이 있고 버려진 나무 의자가 있고 새우깡 빈 봉지가 있고 시인이 있고 신호등에 하이힐을 신겨주고 나무 의자에 양말을 신겨주고 새우깡에 신발을 신겨 바다로 보내면 어느 해변에서 알을 낳을까 뽀리뱅이가 피는 언덕에서 기다리면 보리새우가 돌아오려나 내가 떠나보낸 새우의 요통은 다 나았으려나 봄이 왔는데도 날씨는 따뜻해지지 않고 꽃이 피었는데도 벌들이 보이질 않아 양봉업자 시완 씨는 꿀벌을 찾아 공사 현장을 떠돌고 새 건물로 입주하는 새우깡은 안개비 내리는 날 눅눅해진 기분으로 낮잠을 자려나 보온병에 드립커피를 담아 강가에 두면 에티오피아가 찾아와 주려나 쓸데없는 질문이 많아지는 안개비 속에서 자꾸만 떠나버린 새우깡을 그린다 알은 무사히 부화가 될까 해연풍海沿風을 맞으며 피어나는 뽀리뱅이도 아삭한 새우깡을 그리워할까 눅눅해지는 봄 바닷가에 빨간 하이힐을 신은 새우깡이 걸어간다
구름의 기원
너를 기다리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무거운 빗방울이 걸리면 낚싯대가 파르르
그 뒤로 다시 구름이 지나가고
빗물을 한 방울씩 낚아 올리며 아침을 기다린다
사랑해라는 말은 굽은 낚싯바늘
손끝에 전해지는 떨림, 그 느낌으로
시작은 알 길이 없는데 끝에 이르렀다
시작이라는 말이 싹트기도 전에 시작되었을
언제부터일까 어디부터일까
엄마 손에 이끌린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
오늘 밤은 비가 내리면 어때?
자동차 시동을 건다
저 뿌리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저 산은 바다는 저 자갈은 저 울음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저기 커다란 비석에 깊이 새겨진 이름은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수면 위로 참새가 바삐 날아간 뒤
처마 밑으로 똑,똑,똑 떨어져 보면 어때?
트럭이 덜컹거리며 지나가고 나서
펄떡이는 나뭇잎이 툭툭 어깨를 친다
병신처럼 알 수 없는 구름이 흘러간다
그 너머에서 짖다
창밖엔 비 내리는데
창안의 나만 혼자 짖고 있는, 칠월 말일 하루 전날
탁자 위에는 찻잔, 주둥이가 둔탁한
그 너머에 녹슨 벤치, 새똥이 묻은
그 너머에 벚나무 한 그루, 벌거벗은
그 너머에 야트막한 돌담, 상처로 구멍 난
그 너머에 커다란 창문, 먼지 앉은
그 아래에 가슴이 턱 막히는 말 한마디, 갈까
그 아래에 노란 팬지, 철모르는
그 아래에 스미는 빗방울, 에로틱하게
그 아래에 젖어 드는, 그동안 주고받은 대화들
뱉어냈던 숨소리, 식어버린
쏟아냈던 단어들, 와르르
조립했던 문장들, 천천히 새로운 창이 열리며
빗길을 달려온 인연 길게 미끄러지며 미끄러지며
다시 천천히 시선을 거둬들이며
손가락 지문을 폭폭 찍으며
안고 가야 할 것들이 많아서
구석 자리에서 자라는 꽃과 나무와 풀들마저
창문 안쪽을 무수히 오갔던 사람들의 투명한 발자국
한꺼번에 목줄이 풀려 걸음 붙잡는
컹컹
문이 물다 혹은 묻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투명한 門이 있다 때로는 問이다가 聞이다가 文이다가 蚊이 되어 팔꿈치를 따끔 물어뜯는 모기에게서 시작되어 수많은 질문으로 돌아가는 문은 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서 시작된 것인지 빈 손짓 휘휘 저어봐도 잡히지 않는 蚊이 엥엥 들려 聞이 되었다가 궁금한 問이 되었다가 다시 스르르 여닫히는 門이 되어 나무 사이에서 불어오는 물음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햇살을 타고 내려와 팔꿈치를 물어뜯는 바람의 방향에서 다시 물음이 시작된다 들어가도 될까요 나무와 나무 사이에 문이 있어 열고 들어서면 다시 열리는 門은 文이 되지 못하고 問과 聞 사이에서 다시 들려오는 엥엥, 묻다
버럭, 비에 젖다
비가 온다고 은혜가 곳곳에 미치는 것은 아니기에 식물이 자살하지 않도록 물을 준다
그렇게 건조하게 물을 준다고 말하면 어떡하냐 이 멍청아! 비가 온다고 화분이 듬뿍 젖는 건 아니라고 몇천 번을 말해줘야 해?
비가 내린다고 마음까지 젖는 것은 아니라서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비를 가린다 가린다고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슬픔의 농도를 조절하기 위해 우산을 쓴다
비가 내린다고 우산을 쓴다고 슬플 때 눈물을 참는다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제는 오늘처럼 비가 내린다 비가 오는 아침에 우산을 쓰고 화분에 물을 줬다
화분처럼 다가올 수 없는 그대에게 촉촉하거나 축축하거나 감정선을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날씨 탓하지 말라니까!
오늘은 화분에 물을 주다가 문득 우산 안에만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곳에서 축축해지는 그대를 생각하다가 젖어도 젖지 않는 사랑을 생각하다가 저 화분들에서 피어날 꽃을 생각하다가
자꾸 비 오는 날 물 준다고 시비 걸지 말라니까, 등신아!
소나무 아래서 헤아리다
가자니아는 왜 어류가 아닌가
소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너를 기다리며 그 소나무 아래 벤치 아래 돌멩이 아래 기억하려는 순간 다시 처음부터 헤아려야 하는 근육질 언어들이 어금니에 질겅 씹히는 여름 한낮 거칠어진 소나무의 수피樹皮를 어루만지다가 흑송黑松인지 적송赤松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소나무 아래 벤치 아래 돌멩이로 눌러놓았던 담배꽁초는 아직도 연기를 피우고 있을까 다시 솔방울을 헤아린다 담배꽁초 몇 개를 돌로 눌러 놓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데페이즈망 남대천 가자니아 연어 숱한 언어들이 자꾸만 물관을 거슬러 오르는 둥치가 한 아름 넘는 소나무 아래서 입안을 맴도는 단어들을 헤아린다 몇 개까지 헤아렸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돌멩이 아래 눌러놓은 단어들 그 아래 숨어 너를 기다리며 흑송인지 적송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것이어도 상관없지만
내가 생선을 뒤집어 발라먹는 동안 몇 척의 배가 뒤집혔을까
어둠 속에서 과자 먹기
사람들이 나를 섬이라 불러요 밤이면 더 캄캄해지는 섬이에요 뭍과 섬의 경계가 아득하게 지워지고 나면 섬은 머리만 남기고 바다에 잠겨요 왕복 8차선 도로가 나와 너라는 섬 사이를 관통해요 낮에 출항한 배가 항구로 돌아가기 전에 옆구리를 한 바퀴 돌고 갔어요 집어등을 환히 밝힌 배들이 숙면을 방해하네요 난 가끔씩 신호등이 깜빡이는 도로를 건너 편의점엘 가요 아르바이트 학생이 추천하는 과자 한 봉지를 주머니에 넣고 얼른 자리로 돌아와요 물에 잠길 듯 말 듯 한 높이에서 맞은편 섬을 건너다보며 침으로 과자를 녹여 먹어요 어둠 속에서 과자 부서지는 소리가 바다를 깨우면 어떡해요 썰물이 되는 시간까지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봐요 썰물이 되면 너라는 섬의 실루엣이 드러날 거에요 그때까지는 조금 더 잠긴 채 숨을 참고 있어야 해요
하얀 시詩
만년설을 뒤집어쓴 만년필에 겨울 색 잉크를 넣고 씁니다
겨울은 흰 발자국을 남긴 채 저쪽으로 멀어지고
눈사람에 꽂혔던 솔방울 두 알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눈사람 대신 꽃을 피울 겁니다
겨울 색 꽃이 흰 종이 위에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어쩌면 겨울은 마당에 있던 게 아니었나 봅니다
만년필에서 슬금슬금 번지는 겨울로 그대 가슴에 가 닿겠습니다
어떨까요 시가 녹기 전에 당신이 와 주면 좋겠습니다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시 한 줄을 붙잡고 잠자리에 듭니다
전원 꺼진 침대에서 겨울을 끌어안고 잠들어야겠습니다
꿈속엔 눈이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종이 위에 눈사람을 굴리는 유년으로 겨울은 충분합니다
어떨까요 겨울 색 잉크가 마르기 전에 꽃이 피어주면 좋겠습니다
눈사람이 버린 솔잎 눈썹과 나뭇가지가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리는 밤입니다
허공에 만년필을 그으면 하얀 무지개가 뜹니다
그것이면 족합니다
하얀색 무지개가 종이에 그려지고 다시 녹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어떨까요 내 시가 허무하게 녹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한수寒樹에게 말해줄까
한수寒樹에 대해 얘기해 줄까 어릴 적 깨벗고 개울에서 함께 멱감던 한수 말고 까까머리 중학생 때 짝꿍이 돼서 처음 수음手淫을 가르쳐주던 문제아 한수 말고 인터넷이 고장나 A/S 신청했는데 수리를 마치고 돌아서며 고객 만족도 전화 조사에 매우 만족이라고 응답해 달라고 부탁하고 돌아서던 기사 한수 말고 세상에 많고 많은 동명이인 한수 말고 마당 구석에 잎이란 잎 다 떨군 채 겨울바람에 귀싸대기 맞고 섰는 한수 얘기 말야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고 벌벌 떨면서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주문을 외며 내 방을 힐끗거리는 겨울나무에게 오늘도 수많은 한수를 떠올리며 겨울 마당에서 떨고 있는 한수 이야기해 줄까
서귀포 쿰다
아침 새벽 문득 동쪽 하늘 봤지
실눈을 뜨고 날 보는 달이 떠 있는 거야
성산은 일출이라더니
아침 해가 달을 품고 있었던 거야
느 쿰곡 나 쿰곡 우리 쿰곡
살당 보민 살아진다 좋은 날 실 거여*
어스름 저녁에 서쪽 하늘 봤지
가느다란 실눈으로 날 보는 달이 떠 있는 거야
수월봉 낙조라더니
지는 해도 달을 품고 있었던 거야
느 쿰곡 나 쿰곡 우리 쿰곡
살당 보민 살아진다 좋은 날 실 거여
서귀포 남쪽은 태평양 바다
바다가 섬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어
성산에서 대정까지 동에서 서쪽까지
서귀포가 태평양을 품고 있었던 거야
느 쿰곡 나 쿰곡 우리 쿰곡
살당 보민 살아진다 좋은 날 실 거여
큼큼한 슬픔까지 품어줄게
힘들고 지칠 때 서귀포에 오면
기쁘고 즐거울 때 서귀포에 오면
너의 모든 걸 품어주는 산과 바다가 있어
느 쿰곡 나 쿰곡 우리 쿰곡
살당 보민 살아진다 좋은 날 실 거여
* 너를 품고 나를 품고 우리를 품고/살다 보면 살게 될 거야 좋은 날 있을 거야
-산문-
시적 에포케(epoche)를 위하여
E. 후설은 에포케(epoche)를 “틀린 판단을 내리지 않기 위해 먼저 눈으로 대상을 괄호로 묶어보는 것”이라고 했다. “올해는 유난히 여름이 덥네.”, “올해는 왜 이리 비가 많이 오지?”, “올해는 유난히 힘든 일이 많이 생기지?” 등등 지나간 시간과 비교하여 현재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다고 느낀다. 조금 더하고 덜하고의 차이는 있지만,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것은 여름의 본연의 모습이다.
지나고 나면 모두 아름다운 시간이 되는 것은 시간의 힘이 아닐까 싶다. 시간은 우리의 경험에서 고통은 제거하고 추억만 남겨준다. 어린 시절 힘들고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어렵사리 진학해서 자수성가한 사람도 어린 시절은 “좋았다”고 회상한다. 군대라고 하면 치를 떠는 남자들마저 군대 얘기를 하면 자기보다 더 멋진 군 생활을 한 사람은 없는 것처럼 거품을 문다.
시를 쓰는 순간 시인은 대상에 대해 철저하게 판단중지 상태가 되어야 한다. 대상에 대한 선입견 없이,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대상을 바라볼 때 다양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대상을 참신한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될 수 있으면 대상의 외형에 집착하지 말고 본질을 바라볼 일이다.
새장 안의 새를 바라본다. 새는 새장에 갇혀 있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내가 새장에 갇혀 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새장에 갇혀 새장 안의 새를 가엽게 바라보고 있다. 사진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데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다양한 해석을 한다. 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대상을 판단중지 상태로 자신의 눈으로 찍어 보여줄 뿐이다. 그것을 읽는 독자들은 그 시를 다양하게 해석한다. 그러기에 시인의 눈에 에포케의 렌즈를 착용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여긴다.
시를 쓸 때, 마음을 비우고 머리로 대상을 바라볼 것. 대상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은 버릴 것.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 그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현상이든.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판단하지 말 것. 글쎄, 그것이 가능한 일이기는 할까? 그래도 그러려고 폼이라도 잡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