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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이해
불교의 이해와 수행
고운 전만수 편찬
靑山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하고
蒼空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이 시는 고려 말 큰 스님이신 惠勤(나옹 1320~1376) 스님이 지으신 것이다.
I was never born.
I will never die.
I am visiting this world from 1949 to 2029.
이 글을 편찬하면서
삼보님께 귀의 하옵니다.
저는 이 글을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나 마땅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불교에 접근하지 못하시는 분들에게 바칩니다. 제가 그러했듯이 불교에 뜻은 있으나, 절에 가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불교의 교리가 무엇이며, 어떻게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치심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몰라 망설이는 분들을 대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분들에게 필요한 지침서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이글을 편찬 하였습니다.
불교교리에 일천(日淺)하기 이를 데 없는 필자가 새로운 이념이나 지식을 찾아내어 밝히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기존에 발간된 많은 불교문헌을 참고하여 엮은 것입니다. 글을 옮기면서도 혹여 한자라고 잘못이 있을까봐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습니다. 참고한 문헌은 뒤에 적어 둠으로서 저작권을 가지신 분들께서 무명의 후학에게 법보시(法布施) 하셨다는 마음으로 양해하여 주시기를 구하고자 합니다.
또한, 나름대로 노력하였다고는 하나 이 한 권에 불교의 모든 것을 소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다만 막연히 “불교가 무엇이지?”하고 고민하던 부분을 해소하는데 다소나마 기여하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글은 먼저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와 불교사상의 흐름을 간략하게 적어서 불교를 전체적으로 조감(鳥瞰)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다음에는 불교사상의 양대 산맥이라고 나름대로 판단하여 공사상(空思想)과 유식사상(唯識思想)을 소개하였습니다. 공사상은 초가불교의 근본사상 이었으며, 대승불교에서도 이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불교의 기본사상입니다. 또 유식사상은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 하여 우리의 마음을 강조한 사상으로서 석가모니부처님의 근본사상이기에 이 두 사상을 이해하면 불교의 이념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여 적었습니다. 끝으로 불교는 실천불교(實踐佛敎)이며 자력불교(自力佛敎)입니다. 그래서 불교수행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남방불교의 사마디(samadhi)와 위빠사나(vipassana, 혹은 비빠사나)를, 북방 대승불교의 간화선(看話禪)을 간략하게 소개하였음을 밝힙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바쁘다는 이유로 자신을 깊이 있게 생각하지 못하고, 이미 지나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매달리고 있으며, 또 아직 오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 목말라하면서 허둥대고 있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갈증(渴症)을 해소하기 위하여 내 마음을 다스리는 자기 수양입니다. 내 마음이 우주를 머금으니 내 마음 머무는 곳이 곧 우주의 중심이 됩니다.
우리 모두 불교에 대한 믿음<信>을 갖고 이 한권의 책을 통하여 불교를 이해<解>하고 그 앎을 하나하나 실천<行>하면 반드시 집착과 분별, 사견(邪見)에서 벗어나 청정적연(淸淨寂然)하고 평온(平穩)한 삶<證>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을 내면서 잘못된 내용이 있을까 두려움이 앞섭니다. 넓으신 마음으로 이해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涅槃經열반경」에
『온갖 惡악 짓지 말고,
모든 善선 실천하여
내 마음 맑게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치심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불교의 모든 것을 함축한 좋은 경구라고 봅니다.
불자여러분의 정진(精進)을 기대하면서 성불(成佛)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2009. 5. 27
환갑을 맞이하여
孤雲 전 만 수 합장배례
읽 는 순 서
이 글을 편찬 하면서 5
불교 11
제 1 편 불교의 이해
제 1 장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 17
출생과 성장 17, 구도의 길 24,
성도 26, 설법 32,
교화활동 38, 열반 42
제 2 장 불교의 사상사
초기불교 49
부파불교 ․ 아비달마불교 53,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56
대승불교 사상사 63
공사상 63, 중관사상 64,
유식사상 65, 여래장사상 68
제 3 장 불제자의 예법
사찰의 구조 71, 불상 79,
보살상 79, 사물 84
절에서 갖추어야 할 올바른 예법 86
제 4 장 불제자의 계율
재가불자의 계율 100
제 2 편 공사상과 유식사상
제 1 장 공사상과 불교이론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115
반야심경의 불교사상사적 위치 117
반야공사상의 불교교리사적 위치 119
반야심경의 해설 122
제 2 장 유식사상
유식이란? 262
팔식 267
유식사상사 288
무상유식과 유상유식 292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다. 294
전의 - 자기완성 300
제 3 편 불교 수행
선정[명상, YOGA] 307
제 1 장 사마디(samadhi), 위빠사나(vipassana)
몸에 대한 마음 챙김 310
느낌에 대한 마음 챙김 312
마음에 대한 마음 챙김 313
법에 대한 마음 챙김 317
제 2 장 간화선 323
조사선 324, 간화선 325, 좌선법 326
편찬을 마치면서 330
인도의 불교역사 332
불 교(佛 敎)
인간의 생명과 능력은 유한(有限)하다. 유한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은 종교(宗敎, religion)를 찾았다. 종교는 유한한 인간이 현세에서 가지는 고통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나와 우주를 주재(主宰)하는 존재와의 재결합(re+ligate)을 시도하는 과정(process)이다. 나와 우주를 주재(主宰)하는 존재를 불교에서는 「나의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절대자라고 보고 인간을 그에게 위탁하고 있다.
종교는 여러 가지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나,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도 하나의 가치 기준이 될 것이다. 즉 그 종교의 핵심이 불교와 같이 인간중심(人間中心)이냐, 아니면 기독교와 같이 신중심(神中心)이냐 하는 것이다.
먼 옛날 인류가 지혜를 깨치지 못했을 때는 모두가 평등했을 것이다. 그러나 화산이 폭발하여 인간이 죽음에 이르고,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면서 가족을 집어삼키는 일을 당하였으며, 비바람과 혹한으로 사냥을 나가지 못하여 가족이 굶주려야 하는 등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자연력과 일월성신(日月星辰), 풍운뇌우(風雲雷雨), 산천초목(山川草木) 같은 자연물과 그 현상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인간들은 차츰 하늘을 포함한 자연물과 자연현상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주종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 때 자연과 대지의 기(氣)를 민감하게 감지(感知)하는 사람이 있어 “내일은 비가 많이 내릴 것이다. 멀리 사냥을 나가지 말라.”고 했다. 그 다음날 정말 큰 비가 내렸다. 그러나 예언자의 말을 믿지 못하고 멀리 사냥을 나간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큰비로 갑자기 불어난 계곡물에 휩쓸려 사고를 당했다.
그 예언자는 또 “머지않아 땅이 흔들릴 것이니 미리 산위로 대피하라.”고 하였다. 영락없이 땅이 흔들리고 갈라졌다. 이런 일이 자주 있은 후 이웃 사람들은 그를 차츰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의 말이라면 이유를 따지지 못하고 복종하였다. 그는 곧 그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하늘과 산천과 성신에게 제사지내는 제사장이 되었다.
인류는 하늘에 계신 임(하늘-임)을 포함한 대 자연물과 현상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그들을 신으로 받들게 되었고, 제사장은 그 신과 인간의 중간적 위치에서 신과 인간의 뜻을 교감(交感)하는 종교지도자가 되었다. 하늘-임의 존재도 그렇게 하여 탄생하였다고 본다. 인간에 의하여 차츰 절대적 권위를 갖게 된 신은 인간을 지배하고, 자기에게 거역하는 자에게는 엄히 벌한다. 이러한 자연신(自然神)은 전지전능(全知全能)을 전제로 한다.
인간이 신(神)을 신으로 알고 숭배하고 신앙하는 이유는, 신은 최고의 가치를 가진 자이며, 무한하고 완전한 전능(全能)의 강자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결함(缺陷)과 죄악(罪惡)을 가진 유한하고 불완전한 약자로 보고 있다. 신은 그의 절대적인 능력으로 인간을 지배하고 상을 주고 벌을 내린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신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신에 의하여 인간은 철저하게 부정되고 있다. 인간은 오로지 신에게 복종함으로서만 그 존재를 겨우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신으로부터 부정된 인간은 신에게 예배와 기도를 통하여 인간으로 긍정받기 위하여 애걸(哀乞)하고 의탁(依託)한다. 이것이 구원(救援)이다.
여호와는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였다. 그 후 인간으로 하여금 금단의 열매로 인하여 원죄(原罪)를 짓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여 인간이 여호와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얽었다. 이것이 하나의 좋은 예일 것이다.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신은 인간이 처음부터 벌 받을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바르게 창조하여 아예 벌을 만들지 않았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인 신(하늘-임)은 인간이 죄를 짓도록 하고나서 벌하고 있다. 그리고서는 그 책임을 모두 인간에게 돌리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입장은 어떠한가!
자연물이나 현상이 신(神)으로 격상되었다고 하여도 그 것들은 의지<意志, 마음(心)>라는 것이 없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의지가 없는 자연물과 현상보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중생(인간만이 아니고 모든 생명체)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는 인간중심의 현실세계를 중시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고(思考)이다. 불교는 인간을 부족하고 결함이 있어 어디엔가 의지해야 하는 약한 존재로 보지 아니하고, 모든 가치와 가능성으로 충만 되어 독립자존(獨立自存)하는 주체적(主體的) 강자로 굳게 긍정하고 자기완성(自己完成), 자기실현(自己實現)의 모든 능력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는 책임도 오르지 인간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문제를 통째로 의탁해 두고 그 앞에 예속 되어야 할 절대 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부처님은 긍정적 인간을 인정하고 어리석은 무명(無明)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서 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안내자요, 스승이시다. 부처님은 항존불변(恒存不變)의 절대자이다. 그러나 신은 아니며,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면서 우리를 초월해 있다. 부처님은 모든 사람의 자기 안에 존재한다.
다섯 개의 감각기관이 대상물을 만나서 마음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의식(意識)이다. 중생, 특히 인간은 자신의 의식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느끼며, 감각되는 물체나 현상이 영원한 것으로 착각한다. 모두가 무명(無明)의 탓이다. 그러나 자연과 우주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은 없다. 심지어 이 우주도 220억년 뒤에는 산산조각이 나 결국 빅립(big rip)으로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고 최근 과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우리들이 영원하다고 전도된 몽상에 빠져있던 우주마저 티끌먼지로 되돌아가는데 하물며 다른 것이야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그래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제법무아(諸法無我)이며, 일체개고(一切皆苦)이며, 오온개공(五蘊皆空)이다. 그러므로 모든 집착(執着)과 분별(分別)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인간이 번뇌(煩惱)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불교는 자기의 행위, 즉 업(業)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오늘의 나에 대한 현상은 모두가 전생 또는 과거의 업의 결과이며, 오늘의 행동과 마음작용은 그 결과가 미래 또는 다음 생에 반드시 나타난다고 본다. 이를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한다. 인과응보는 ‘원인이 그에 상응하는 결과로 맺어 진다’는 뜻이다. 오늘 생각과 행동을 바르게 해야만 다음 생, 또는 미래에 좋은 곳(하늘, 사람 중에서도 좋은 환경)에 태어난다고 한다. 의지를 가진 모든 중생 - 자연물에 대응하는 것 - 은 자신의 선악(善惡)의 행동(業)에 따라 윤회하면서 과보(果報)를 받는다. 이것이 인과응보 사상이며 불교윤리의 근본이다.
팔만대장경을 한 손으로 쥐어짜면 마지막 남는 것은 오직 마음 심자[心]하나라는 말이 있다. 그 만큼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셨으며, “마음 다스리는 것이 불교이다”라고 한다. 불교는 나와 우주의 주재자(主宰者)인 나의 마음을 다스려 집착심과 분별심을 떠나서 무득(無得), 무애(無碍)함을 얻는 것, 즉 깨달음을 얻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무속(巫俗)과 타종교는 선악의 판단과 실천은 자연물인 하늘에 의한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선악의 판단과 실천은 인간의 자율성에 맡기고 있다. 지극히 인간적인 종교임에 틀림이 없다. 불교는 한마디로 마음을 청정적연(淸淨寂然)하게 다스리고, 적선(積善)을 쌓아 평온한 중생의 세계를 만들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이며, 인간의 선악의 판단과 실천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을 알고자 하는 일이 불교공부의 목표일 것이다.
제 1 편 불교의 이해
제1장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
불교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우주의 진리를 깨우치고 이를 전파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였다. 불교의 교조(敎祖)이신 석가모니부처님이 이 세상에 살았던 생애는 80년에 불과하지만 그가 끼친 영향은 이 우주를 덮고 있으며, 세월이 지날수록 그 향기를 더하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을 부르는 명호는 여러 가지다 있다. 한국과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석존(釋尊)」「세존(世尊)」「석가모니부처(Sakyamuni-Buddha)님」등으로 부르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는 일반적으로 붓다(Buddha)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이란 뜻은 석가족의 성자(聖者)로서 깨달음을 얻은 분이라는 의미이다. 석가는 석가족(Sakya族)을 뜻하고, 모니는 무니(muni)의 음역으로 성자(聖者)라는 의미이며, 부처는 붓다(Buddha)의 음역으로 완전히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석존은 석가족의 존자라는 의미이고, 세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스러운 분이라는 뜻이다.
출생과 성장
석가모니부처님은 샤카족(Sakya족)이며, 샤카족은 일반적으로 불교문화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3천 5백 여 년 전에 서북인도 방면에서 침입해 와서 인도의 지배 족이 된 아리아족(Arya족)이 아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샤카족은 히말라야 남쪽 산기슭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카필라」라는 조그마한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이 왕국은 고타마(Gotama)라는 성을 가진 숫도다나(Gotama Suddhodana)가 다스리고 있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BC 624년 음력 4월 8일에 숫도다나를 아버지로 하고, 마야(Maya)를 어머니로 두고 태어났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연도와 입멸한 연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1), 불교계에서는 BC 624년(혹은 623)에 오셨다가 BC 544년(혹은 543)에 입멸하신 것으로 보고 있다. 불교의 기원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불기(佛紀)는 BC 544(혹은 543)년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태어나신 연도 보다는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에 드신 시점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는 것은 인도인의 역사관 때문이다. 인도에는 역사가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인도인들은 전통적으로 세속적인 일은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는 성격이라는 의미다. 그들은 영원한 우주의 진리를 중요시 하였지 윤회하는 한 과정 속에 있는 인간의 존재를 중요시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개인에 관한 기록이 없다시피 하다. 그나마 석가모니부처님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 현재만큼 존재하는 것은 인도 역사에서 석가모니부처님과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느 날 마야 왕비는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가 왕비의 오른 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도솔천(tusita, 天)에 계시다가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코끼리를 타고 인간 세계로 내려오신 것이다. 도솔천은 선행을 하여 공덕을 쌓은 사람이 죽은 후에 태어나는 안락한 하늘나라[천당, 天堂]의 하나이다. 현재는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때를 기다리는 곳이다.
산달이 되어 왕비는 친정인 콜리성으로 떠났다. 당시 풍속에는 여자는 친정에서 해산을 하였다. 마야왕비가 친정으로 가는 도중 룸비니(Lumbini) 동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산기를 느껴, 무우수(無憂樹)2) 나무 아래에 휘장을 처 급히 산실을 마련하고 왕자를 낳았다. 그가 후에 인류를 고통의 바다에서 구제해 주는 길을 열어주신 석가모니부처님 이시다. 왕자는 태어나자마자 오른손은 하늘을 향하여 높이 들고 왼손은 땅을 향하고서 좌우로 일곱 발자국을 옮기고 나서「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외쳤다.
이 뜻을 두고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온 세상이 모두 괴로움에 잠겨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하게 하리라」이고, 다른 하나는「우리 스스로 노력 여하에 따라 최고의 진리를 깨닫고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이다. 나 홀로 존귀하다는 것은 비록 석가모니부처님 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나’의 주체는 석가모니부처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가진 모든 중생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선언한 것이다.
아버지 숫도다나는 왕자가 ‘모든 일이 뜻한 대로 다 이루어지라’는 뜻에서 이름을「싯다르타(Siddhartha, Siddhattha)」3)라고 지었다. 그러나 이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왕자를 낳은 마야왕비가 출산 칠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왕비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당시의 풍속에 의하여 왕비의 동생인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가 어린 싯다르타를 생육하였다.
어느 날 아시타 라는 선인(仙人)이 카필라성으로 찾아왔다. 아시타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조부 때부터 궁중 사제를 지내며 석가족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신통력을 갖춘 현자였으며, 숫도다나왕이 열반한 후 은둔생활을 하였다. 싯다르타의 얼굴을 본 그는「싯다르타는 뛰어난 이인의 상을 갖추고 있습니다. 만약 왕위에 오르면 무력을 쓰지 않고 전 세계를 통합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고, 출가하여 수행하면 반드시 부처님이 되어 모든 중생을 구제해 줄 것입니다.」하고 예언을 하였다.
싯다르타는 어려서부터 깊은 사색에 잠기기를 좋아하였고, 서로 먹고 먹히는 자연계의 먹이 사슬에 대해 회의심을 갖게 되었다. 늙어서 지팡이에 겨우 몸을 의지하고 힘들게 걷는 노인을 보고「저 사람은 왜 저렇게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하고 회의심을 갖고, 길가에 누더기를 입고 쓸어져 신음하는 병든 사람을 보고는「저 사람은 왜 병에 걸려 고통을 받아야 할까? 늙음의 고통이나 질병의 고통은 왜 생기는 것일까?」하는 문제를 놓고 싯다르타의 마음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체를 앞세우고 슬피 울며 지나가는 행렬을 바라 본 싯다르타는 자기 자신이 죽음에 닿은 것 같이 가슴이 내려 앉았다. 싯다르타는 지금 자기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죽음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날부터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 숫도다나왕은 늘 깊은 명상에 잠겨 얼굴빛이 어두운 싯다르타를 보고 ‘혹 출가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서 많은 신경을 썼다. 싯다르타의 나이가 열아홉 살이 되자 결혼 시켰다. 그의 부인은 같은 샤카족이며 대신의 딸인 야쇼다라(Yasodhara)이다. 싯다르타는 결혼한 후에도 늘 변함없이 실존적(實存的) 고뇌를 가지고 깊은 사색에 잠기거나 침울한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다.
싯다르타의 마음이 이와 같이 감각적 쾌락을 떠났음을 알아차린 브라흐민4)의 아들인 우다인은 싯다르타에게
“이 세상에서 감각적 쾌락과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하고 충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싯다르타는 목소리를 높여,
“그대는 나를 잘못 알고 있다. 내가 감각적 쾌락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며, 즐겁게 사는 것이 자연적 현상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이 덧없다고 생각하면 내 마음은 그 속에서 즐겁지가 않구나. 만약 늙음과 죽음과 병듦이 없다면 나도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즐길 것이다. 만약 여인의 아름다움이 변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은 열정에 집착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아름다움이 늙음으로 시들어 갈 때 받아들이기가 어렵구나. 그런 아름다움 속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어리석음일 뿐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알기 때문에 그 속에서 만족이나 평화, 기쁨을 얻을 수 없다.”라고 일갈(一喝)하였다.
싯다르타의 나이가 어느덧 스물아홉 살이 되었다. 야쇼다라와 결혼한 지도 벌써 십년이 되었다. 그 동안 아들 라훌라(Rahula)를 낳았다. 그러나 싯다르타의 마음속 깊이에는 태어남과 늙음, 병들고 죽어가는 고통의 속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만이 깊어 갔다.
고심 중에「그렇다! 출가 사문의 길을 찾아 나서자」하고 결심 하였다. 싯다르타는 아버지 숫도다나왕에게 출가를 허락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숫도다나왕은 완강히 부인하였다. 싯다르타는
“내 목숨이 죽지 않는다면, 내가 질병으로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면, 늙음이 나의 젊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나는 출가하지 않겠습니다.”하고 말씀 드렸다. 그런데도 숫도다나왕은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이 네 가지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불타는 집을 떠나려는 사람을 붙잡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서로 이별한다는 것은 분명한 이치이오니 가르침을 위하여 떠나는 것이 다른 헤어짐보다 훨씬 더 났습니다. 그러니 저의 목표를 이루지 않고는 저에게 만족은 없습니다.”하고 출가의 결심을 말씀드렸다. 그날 밤 모두가 잠들은 사이에어머니 마하파자파티와 아내 야쇼다라에게는 알리지 않고 카필라성의 성문을 나서 수행자의 길을 걸었다. 이 때가 싯다르타 나이 스물아홉 되는 해 음력 2월 8일이다. 싯다르타는 따르는 시종 찬다까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패물을 건네주면서「이것을 이모님과 야쇼다라에게 전하여라. 그리고 내가 출가사문이 된 것은 세속을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智慧)와 자비(慈悲)의 길을 얻기 위해서라고 전하여 다오」하고는 홀로 구도자의 길을 떠났다.5)
석가모니부처님의 가족관계는 정반왕인 아버지 숫도다나(Suddhodana), 어머니 마야(Maya), 이모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 아들 라훌라(Rahula), 부인 야쇼다라(Yasodhara), 아난다(Ananda),6) 아난다는 25년간 항상 곁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시중을 들었다. 사촌동생 데바닷타(Devadatta). 데바닷타는 석가모니부처님께 반역하였으며, 교단의 분열을 꾀하는 등 석가모니부처님에게 많은 괴로움을 끼친 사람으로 전하여 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의견도 있다. 같은 샤캬족인 이발사 우팔리(Upali), 우팔리는 후에 계율에 통달하였다.
구도(求道)의 길
구도의 길을 찾아 출가한 싯다르타는 가까운 숲에 들어가 마음을 집중하는 명상을 시작했다. 한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면서 명상을 계속했다. 그러나 세속의 번거로운 기억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우주의 진리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고 굳게 결심을 하였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싯다르타는 혼자서 진리를 구하는 것보다 수행의 힘이 뛰어난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진리 탐구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천상(天上)에 태어나기 위하여 고행을 하는 박가바 라는 선인을 찾아갔다. 박가바는 당시 많은 수행자들이 그러하듯이 혹독한 고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그가 단순히 자기 하나만이 천상에 태어나기 위하여 수행하는 것을 알고는 ‘어떤 보상을 바라고 고행을 한다면 괴로움은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그의 곁을 떠났다.
싯다르타는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여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왕사성, 王舍城)7)에 이르러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를 찾았다. 알라라는 마음의 작용이 정지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에 이르는 수행을 가르쳐 주었다. 싯다르타는 밤낮 정진하여 마침내 알라라가 가르쳐 준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알라라 깔라마는 자아(自我, atman)는 영원하다고 말하였다. 무지와 업과 욕망을 버리면 윤회에서 벗어난다고 하였는데 자아도 버려야 할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알라라 깔라마의 가르침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아차리고서 이보다 더 높은 경지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웃다카 라마풋타(Uddaka Ramaputta)라는 수행자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는 ‘상념(想念)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관(觀)하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이 경지에도 쉽게 도달하였다. 싯다르타는
‘웃다카 라마풋타도 역시 자아에 집착 돼있구나 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면 설령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다 하여도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싯다르타는 자기가 출가한 궁극의 목적이 여기에 있지 않음을 알고는 또 다시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싯다르타는 세 명의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나 자기가 바라는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고 깊은 명상 끝에 얻은 결과 「진정한 스승은 나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는 홀로 고행의 길을 찾아 나섰다. 싯다르타는 우선 홀로 머물러 명상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나섰다. 라자가하 서남쪽의 가야(Gaya) 교외에 있는 우루벨라(Uruvela)의 세나(Sena) 마을에 있는 숲이 마음에 들었다. 그 곳에는 훌륭한 숲이 있고 쾌적하고 완만하며 맑은 물이 흐르는 강이 있다. 또 가까이에서 탁발할 수 있어 명상을 하기에 적절한 곳 이다. 더구나 이곳은 네란자라(Neranjara)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여 수행의 장소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여기를 명상의 장소로 정하였다.
성 도(成道)
싯다르타는 결심하였다.「사문들 중에는 마음과 몸을 쾌락에 맡기고 탐욕과 집착에 얽힌 채 겉으로만 고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젖은 나무에 불을 붙이려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몸과 마음이 탐욕과 집착을 떠나 고요히 자리 잡고 있어야 그 고행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리라」이와 같이 고행에 대해 근본적인 태도를 확실히 하고 나서 혹독한 고행수행에 들어갔다. 싯다르타의 고행은 다른 사람이 감히 따를 수 없을 만큼 혹독했다. 하루에 곡식 몇 알과 물 한 컵으로 연명하면서 수행에 정진하였다. 그의 몸은 뼈만 남아 앙상한 몰골로 변해갔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 정상이 아닌 성 싶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아직도 번뇌를 끊지 못했으며, 삶과 죽음을 뛰어 넘지도 못했다. 그의 고행은 계속되었다. 그가 고행을 하는 목적은 육신의 번뇌와 망상, 욕망을 여의어 영원히 평온한 마음인 열반을 얻고자 함이다. 깨닫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거듭 다짐하면서 고행을 계속하였다.
그는 이따금 모든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의 삼매경에 들어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으나, 삼매는 곳 흩어지고 현실의 고뇌가 파고들었다. 고행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오년이 되었다. 혹독한 고행을 계속해 보았지만 자기가 바라던 최고의 경지인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 싯다르타는 문득 지금까지 자기가 해온 고행에 대해 회의심이 일었다.
싯다르타는 육체를 괴롭히는 일은 오히려 육체에 집착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육체를 괴롭히기 보다는 육체를 맑게 가짐으로서 마음의 고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동안 싯다르타는 수행의 방법에만 집착한 나머지 형식에 빠져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하게 가지는 일에는 소홀했다.
그는 고행과 단식을 중단했다. 지친 몸을 회복하기 위하여 네란자라 강가로 내려가 맑은 물에 몸을 씻었다. 그 때 마침 강가에서 우유를 짜고 있던 수자타(Sujata)8)라는 소녀에게서 우유 한 그릇을 얻어 마셨다. 이때 함께 수행하던 다섯 명의 비구들은 싯다르타가 고행을 포기하고 음식물을 취한다고 비난하면서 모두 떠났다. 싯다르타는 우유를 마시고 나니 몸에 새로운 기운이 돋고 마음이 맑아졌다. 싯다르타는 가벼운 몸과 맑은 정신으로 혼자서 숲 속에 들어가 아사타(Assatta)나무(무화과나무의 일종) 아래에 앉았다. 아사타 나무는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 보리수라고 부르게 되었다. 네란자라 강이 시원스럽게 보이고 고요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니 마음이 한결 평온하다. 싯다르타는「이곳에서 육신이 다 녹아 없어져도 좋다. 우주와 생명의 실상(實相)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라」하고 마음을 단단히 다짐하였다.
그는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깊은 명상에 잠겨 우주의 실상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 늙음과 죽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는 진리를 온전히 꿰뚫어 사유한 후에 그것은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였다.
⒝ 그러면 태어남은 어데서 오는가? 그것은 업(業)의 결과인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원인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 존재는 어데서 오는가? 집착에서 온다.
⒟ 집착은 어데서 오는가? 갈애(渴愛)에서 온다.
⒠ 갈애는 어데서 오는가? 느낌에서 온다.
⒡ 느낌은 어데서 오는가? 접촉에서 온다.
⒢ 접촉은 어데서 오는가?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온다.
⒣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어데서 오는가? 이름과 모양에서 온다.
⒤ 이름과 모양은 어데서 오는가? 의식작용에서 온다.
⒥ 의식작용은 어데서 오는가? 형성에서 온다.
⒦ 형성은 어데서 오는가? 어리석음에서 온다.
⒧ 어리석음은 모든 것의 원인이 된다.
이어서 이러한 진리를 거꾸로 관찰 하였다.
⒜ 어리석음[無明]에서 형성[行]이 생기고,
⒝ 형성에서 의식[識]이 생기며,
⒞ 의식에서 모양[名色]이 생기고,
⒟ 모양에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6處]이 생시며,
⒠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접촉[觸]이 생긴다.
⒡ 접촉에서 느낌[受]이 생기고,
⒢ 느낌에서 갈애[愛]가 생기며,
⒣ 갈애에서 집착[取]이 생기고,
⒤ 집착에서 존재[有]가 생긴다.
⒥ 존재에서 태어남[生]이 생기며,
⒦ 태어남에서 늙고 죽음[老・死]이 생긴다.
싯다르타는 이와 같이 최상의 지혜와 통찰력으로 우주의 실상을 관찰하였다.
그는 어디에서도 영원한 자아[atman]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팔정도(8正道)의 최상의 통찰력으로 그의 마음을 고요함과 평온함으로 가득 찼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인연이 있어 생기고 저절로 생기는 것이 없으며, 인연을 다 하면 사라지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와 같이 존재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어느 것이고 영원하고 고정된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무상(無常)하게 인연에 의하여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였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하여 생겨나 잠간 존재했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연기생멸(緣起生滅)의 실상을 깨달았다.
마침내 주위는 신비로우며 고요한데 샛별이 하나 둘 돋기 시작한다.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는 문득 마음이 형언(形言)할 수 없는 희열(喜悅)로 넘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모든 이치가 밝게 드러났다. 태어나고 죽는 일까지도 환히 깨닫게 되었다. 욕망의 제어로 온갖 고뇌가 자취도 없이 풀렸다. 우주가 곧 나 자신이고 나 스스로가 우주임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과 우주의 배후에 있는 참다운 존재는 바로 ‘나의 마음’임을 알게 되었으며, 명상을 통하여 체험으로 인간을 초월한 진리를 깨달았다.
이때 네란자라강 저 너머에서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마침내 싯다르타는 해탈(解脫)을 얻었다.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깨달음을 얻어 Buddha9)가 되었다. 이 때가 서른다섯 살이 되는 해의 음력 12월 8일이다. 이날을 성도일 이라고 한다. 깨달은 사람, 곧 부처가 된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구할 필요가 없었다. 부처인 석가모니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결가부좌 하고 7일 동안 해탈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율장』에『그때 석가모니부처님은 깨달음을 완성하여 우루벨라 네란자라강 근처 보리수 아래에 있었다. 그리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결가부좌한 채로 7일 동안 해탈의 기쁨을 누리며 앉아 있었다.』라고 하였다.
그런 석가모니부처님에게 고민이 생겼다.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널리 펴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데 일반 중생이 그의 심오한 깨달음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또 어떠한 방법으로 그들을 교화할 수 있을까를 놓고 고심하였다. 망설이고 있는 석가모니부처님에게 브라흐마(Brahma, 梵天)10)가 나타나 설법하기를 권청하였다. 드디어 그는 많은 사람이 겪는 고통이 곧 자기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우주의 진리를 밑바닥까지 들여다 본 부처님의 자비(慈悲)였다. 그는 이제부터 중생을 구제하는 길로 나아가기로 뜻을 세웠다. 자비(慈悲, maitri-karuna)는 고통을 없애주고,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은 어떤 내용인가를 놓고 여러 설이 있다. 먼저, 사성제(四聖諦), 12연기(緣起)와 같은 법리(法理)라는 설이 있고, 두 번째는 4념처(4念處), 4정근(4正勤), 4여의족(4如意足), 5근(5根), 5력(5力), 7각지(7覺支), 8정도(8正道)와 같은 수행도의 완성에 의했다고 하는 설이 있으며, 세 번째는 5온(5蘊), 12처(12處), 4계(4界)와 같은 제법(諸法)의 여실(如實)한 관찰에 의했다고 하는 설이 있다. 끝으로 4선(4禪), 3명(3明)의 체득에 의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여러 설이 전해지는 이유는 석가모니부처님은 깨달음의 내용을 특정한 교설로 고정시켜서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교육수준이나 신분 등에 맞도록 방법을 달리하여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깨달음은 인연(因緣). 연기(緣起)11)였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명상에 의하여 6근(6根), 12처(12處), 18계(18界)를 관찰하여 감각기관(6근)을 통제하여 욕망을 제어함으로서 집착에서 벗어나고 마음을 다스리는 진리였을 것으로 생각하며, 4성제(4聖諦)가 그 다음 이었을 것으로 본다.
삼보(三寶)의 성립
석가모니부처님은 먼저 누구에게 설법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래도 깨달음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마음의 눈에 먼지가 적은 사람이어야 함을 알고 그가 처음 찾았던 알라라와 웃다카를 적임자로 생각했으나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한 사람이 네란자라 강가에서 한 때 함께 수행을 했던 다섯 사문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그들이 고행하고 있는 바라나시(Baranasi)에 있는 녹야원(鹿野園)을 찾았다. 바라나시는 당시 인도에서 가장 오래되고 번창한 도시였다. 여기는 상업,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전도하기로 결의한 후 네란자라 강가에서 400km나 떨어진 바라나시로 간 것은 사상과 문화의 중심지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대중에게 펴고자 했던 의지가 담겨 있었다고 할 것이다.
다섯 사문은 처음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경계하고 멸시하였으나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은 자의 모습을 보이므로 자리를 마련하고 공손히 맞이하면서 “벗이여”하고 불렀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엄숙하게 말씀하셨다.「비구들이여! 이제부터는 내 이름을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부르지 마라. 나를 여래(如來)라고 불러라. 나는 이제 여래가 되었다. 여래는 아라한12)이며, 바르고 온전히 깨달으신 분이다. 나는 불사의 경지를 성취하였다. 내가 가르치리라. 그대들에게 달마(dharma, 법)를 가르치겠다. 내가 가르친 대로 실천한다면, 그대들은 오래지 않아 청정한 삶의 최고의 지혜를 스스로 깨달아 성취할 것이다.」
여래란 진리의 세계에 도달한 사람이란 뜻도 있고, 진리의 세계에서 설법하러 우리의 세계에 오신 분이라는 뜻도 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이들 다섯 사문들에게 최초로 설법을 하였다. 이를 초전법륜(初轉法輪) 이라고 한다. 먼저「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사문들은 감각적 쾌락에 몰두하여 육체의 요구대로 맡기는 쾌락주의와 육체를 지나치게 학대하는 자세를 버리고 중도(中途)의 길을 가야 한다.」고 설하셨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계속해서 설법을 하셨다.「그렇다면 중도란 무엇인가? 중도는 여덟 가지로 되어있다.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관찰(正念), 바른 선정(正定)이다.」바로 8정도(8正道)를 설하셨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이어서 고(苦), 집(執), 멸(滅), 도(道)의 4성제(4聖諦)를 설하셨다.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다음과 같다(고성제, 苦聖諦)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괴로움이며, 싫은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며,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 괴로움이며, 오성이 치성한 것이 괴로움이다.
한 마디로 말하여 집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가 괴로움이다.
괴로움의 근원의 거룩한 진리는 다음과 같다(집성제, 集聖諦). 갈애는 쾌락과 욕망을 수반하여 여기저기 쾌락을 찾아 헤매고, 윤회로 이끈다. 갈애에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다시 태어남에 대한 갈애, 다시는 태어나지 않겠다는 갈애가 있다.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다음과 같다(멸성제, 滅聖諦).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하고 포기하고 버려서 더 이상 갈애에 집착하지 않고 갈애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다음과 같다(도성제, 道聖諦). 이 길은 여덟 가지 바른 길이다(8정도).」
이어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무아와 무상의 가르침을 주셨다.
「육신은 무아(無我)이다. 만약 육신이 영원한 자아가 있다면 몸이 병들지도 않을 것이고, 육신에게 ‘이렇게 되라, 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육신은 무아이기 때문에 병들게 되고, 이래라저래라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몸이 무아인 것처럼 느낌, 지각, 형성, 의식 등이 자아가 없는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육신은 무상한가, 영원한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즐거운 것인가? 괴로운 것인가?”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수시로 변하는 것을 두고 ‘이것이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 이것은 나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습니다.”
“느낌은, 지각은, 형성과 의식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수시로 변하는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 이것은 나이다’하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육신,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은 ‘나의 것이 아니며,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하고 바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몸과 느낌과 지각, 형성, 의식(5온을 말함)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해탈할 수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던 다섯 사문들 중 콘단냐(Kondanna)가 제일 먼저 집착에서 벗어나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을 얻어 최초의 제자가 되었고, 이어서 나머지 네 명도 깨달음을 얻어 제자가 되었다. 그들은 석가모니부처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해서 석가모니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치심인 법, 그리고 다섯 명의 아라한이 탄생하여 불・법・승의 삼보(三寶)를 갖추게 되었다.
어느 날 석가모니부처님이 강가에서 경행(걷는 명상)을 하고 계시다가 한 청년이 고성을 지르며 괴로워 날뛰는 것을 목격하였다. 베나레스에 사는 장자의 야사(Yasa)라는 이 청년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보시, 도덕적 습관, 감각적 쾌락에 따른 재난과 위험, 또 이것들을 놓았을 때의 이익에 관하여 설법을 듣고, 마지막으로 인생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출가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야사의 소식을 듣고 야사의 아버지가 석가모니부처님을 찾아왔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야사의 아버지에게 먼저 삼보에 귀의하게 하고 나서
“내가 말하는 바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하셨다. 야사의 아버지는
“신명을 다 바쳐 지키겠습니다.”한다. 이 때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첫째, 생명을 존중해야 합니다. 둘째, 남이 주지 않는 것을 가져서는 아니 됩니다. 셋째, 항상 바른 말만을 해야 합니다. 넷째, 남의 여자를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다섯 번째, 술을 마셔서는 아니 됩니다.”하고 재가 5계를 설하셨다. 야사의 아버지는 이를 지킬 것을 약속하였기에 최초의 재가 신자가 되었다. 그 후 야사의 친구들이 부처님께 귀의하여 재가신자(在家信者)가 되었다.
야사가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네 명의 가까운 친구들이 그의 뒤를 이어 출가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아라한이 되었으며, 뒤이어 50명의 야사 친구들이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부호집의 자식들 이였다. 이제는 이 세상에 아라한이 모두 61명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와 재가신도를 비롯한 교단이 형성되었으며 비구, 비구니, 우바새(남자 재가신자), 우바이(여자 재가신자)의 사부대중(四部大衆)을 갖추게 되었다.13) 이후 석가모니부처님은 하루도 쉬지 않고 북인도 전역을 다니면서 5온(5蘊)과 무아(無我)의 법을 설하셨다.
교화활동(敎化活動)
석가모니부처님이 설법할 때 마다 많은 사람이 출가하여 아라한이 된 자가 60여명에 이르렀으며, 재가 신자가 된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아라한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나는 인간을 얽어매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다. 그대들도 인간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이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나아가라. 그러나 같은 길을 두 사람이 함께 가지는 말아라. 한결같이 훌륭한 법문을 중생들에게 들려주고 언제나 깨끗한 수행자의 생활을 하여라. 이 세상에는 때가 덜 묻은 자도 많으니 그들이 법문을 들으면 곧 깨달아 아라한의 지위에 오를 것이다. 나도 또한 가르침을 설하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세나니 마을로 가야겠다.」하시고는 길을 떠나셨다.
많은 아라한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을 널리 세상에 펴서 중생을 괴로움으로부터 건지는 교화활동이 시작되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바라나시를 떠나 마가다로 갔다. 여기에서 불을 섬기는 사문인 카샤파14) 삼형제를 제도하여 제자가 되게 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일천 명의 무리도 함께 귀의 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일천 여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라자가하(왕사성)로 떠났다. 그곳에는 빔비사라왕이 기다리고 있었다. 빔비사라왕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감명을 받아 그 자리에서 신하들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 하였다. 그리고 그는 라자가하성 밖 숲 속에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지어 기증하였다. 이 정사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교단이 가지게 된 최초의 절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교단은 날로 번창해 갔다.
라자가하에는 당시 인도사회의 보편적 가치인 바라문과 이념을 달리하는 육사외도(六師外道)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인 산자야가 있었는데 그의 제자 중에 사리풋타(Sariputta, 舍利佛・사리불・)와 목갈라나(Moggallana,目健連・목건련・목련)를 만나 귀의하게 하여 후에 훌륭한 제자가 되었으며, 이들은 250명의 무리를 이끌고 함께 귀의하였다. 이렇게 해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가 1,250명이 되었다. 이제까지 삼보를 갖춘 승단과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 빔비사라왕의 후원과 상류계층의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이 대거 출가하는 등 불교는 초기부터 그 기초를 튼튼히 다져나갔다.
이 무렵 수다타(Sudatta) 장자가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위성 남쪽에 있는 코살라국의 왕자 제다(Jeta)가 소유하고 있는 동산을 매입하여 정사(절)을 지어 석가모니부처님께 봉헌하였다. 이 사원은 「기수급고독원」이라고도 하는데 집단 수행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춘 정사로 죽립정사와 함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많은 기간동안 머무시면서 설법을 하신 곳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고향인 카필라성으로 향했다. 아버지 숫도다나왕과 모든 사람들이 그를 귀하게 대접하며 환영해 맞았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그의 가족과 카필라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였다. 샤카족 청년들이 앞을 다투어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석가모니부처님에게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그를 키워주신 이모 마하파자파티 왕비가 낳은 동생 난다(Nanda)가 있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그를 교화하여 출가시켰다. 이어서 이제 열두 살이 된 아들 라훌라도 출가시켰다. 왕위를 이을 아들과 손자마저 출가시켜야 했던 숫도다나왕은 비통한 마음을 진정하고 석가모니부처님께「앞으로는 미성연자의 출가는 반드시 부모의 허락을 받은 후에 하도록」건의 하였으며, 석가모니부처님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때 이발사 우팔리도 출가하였는데 그는 후에 계율을 지키는데 제일인자가 되었다. 또 아난다와 데바닷타도 출가하였는데 아난다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곁을 떠나지 않고 25년 동안 그의 시봉을 들었다. 그러나 데바닷타는 부처님 교단에 반역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을 몹시 괴롭혔다고 전한다.
숫도다나왕이 세상을 떠났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카필라성 밖에 있는 니그로다 정사에 머무르고 계셨다. 이 때 마하파자파티 왕비가 찾아와 출가를 부탁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거절하고 카필라를 떠나 베살리로 가셔서 교외에 있는 마하바나 정사에서 대중들과 함께 머무르고 계셨다. 마하파자파티 왕비는 맨발에 노란 가사를 입고 많은 무리의 샤카족 여성들과 함께 이곳까지 찾아와서 출가를 간청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여러 번 거절하다가 아난다의 청이 있어서「출가한 사문은 청정한 계율을 닦고 세속의 애착을 떠나야 한다. 그런데 여인은 세속의 애착이 강하므로 도에 들어가기 어렵다. 그리고 여인이 출가하면 청정한 법이 이 세상에 오래 갈 수 없다. 그것은 잡초가 무성한 논밭에는 곡식이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다. 가정에 여인이 많고 사내가 적으면 도적이 들기 쉽듯이 이 교단에 여인이 출가하면 청정한 교법이 오래 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물을 넘치지 않게 하기 위해 둑을 쌓는 것과 같이 교단의 질서를 위해 따로 여덟 가지 제법(尼八敬戒)을 마련한다. 출가한 여인은 반드시 이 여덟 가지 계법을 지켜야 한다.」하시고는 비구보다 더욱 강화된 계율을 별도로 제정하여 이를 지킬 것을 조건으로 출가를 허락하였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비구보다는 비구니가 지켜야할 계율이 더욱 많다. 이렇게 해서 마하파자파티 왕비는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다.
석가모니부처님 제자 중에 지혜(智慧) 제일의 사리풋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옆에서 슬프게 우는 아난다를 보고「너희들은 내가 항상 하던 말을 잊었느냐? 가까운 사람과는 언젠가는 이별해야 하는 법이다. 세상에서 무상하지 않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세월에 따라 변해간다.」 고 말씀하셨다. 사리풋타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목갈라나도 죽었다. 유능한 두 제자를 잃은 석가모니부처님은 「사리풋타와 목갈라나가 보이지 않는 모임은 어쩐지 텅 빈 것 만 같구나.」하시면서 서운한 생각을 감추지 못했다. 다만 슬픔에 집착하지 않을 뿐 이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만년에 이르러 슬픈 일이 되풀이 되었다. 아버님의 죽음, 아끼던 두 제자의 죽음에 이어 카필라를 노려오던 코살라가 기어이 쳐들어 와서 정복하고 말았다.
열반(涅槃)
불교에서 죽음을 열반, 또는 입멸(入滅)이라고 한다. 열반은 깨달음을 의미하는데 살아서 깨달음에 이른 상태를 유여의열반(有餘衣涅槃)이라 하고, 완전한 열반, 즉 죽음의 상태를 무여의열반(無餘衣涅槃)이라고 한다. 특히 석가모니부처님의 열반을 반열반(般涅槃, 완전한 열반), 또는 대반열반(大般涅槃)으로 표현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나이도 어느덧 여든이 되었다. 노쇠한 몸을 이끌고 라자가하에서 갠지스강을 건너 밧지족의 서울인 베살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우안거에 드셨다. 그해에는 인도 전역에 극심한 흉년이 들어 많은 수행자들이 한곳에 머물면서 밥을 빌기가 곤란했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각자 흩어져서 지내도록 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아난다만을 데리고 벨루바 마을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곳에서 혹심한 더위에 병을 얻어 몹시 고생하였다. 어렵게 병에서 회복이 되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었다. 이때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여래의 법에는 스승이 특별한 자에게만 전하는 은밀한 비전(秘傳)은 없다. 여래는 ‘나는 교단을 통솔한다.’ 거나, ‘교단은 나에게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자기를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 처로 삼아 남을 의지 처로 삼지마라. 법을 등불로 삼고, 법을 의지 처로 삼아 남을 의지 처로 삼지마라.」하고 소위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을 가르치셨다15)
우안거를 마치고 석가모니부처님은 베살리로 탁발을 나갔다. 이때 석가모니부처님이 아난다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일 겁(劫)16), 또는 그 이상 동안 수명을 연장할 수도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도 아난다는 잠시 악마에게 사로잡혀서 이를 듣고도 석가모니부처님께「그러시다면 석존이시여! 부디 일 겁 동안 이 세상에 머무르시어 중생을 제도하여 주시옵소서.」하고 간청을 드리지 못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같은 말을 두 번 더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아난다는 악마에게 사로잡혀 그렇게 하시기를 청원하지 못하고 흘러듣고 말았다. 아난다는 이 일로 인해서 후에 많은 공격을 받게 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악마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나는 3개월 후에 입멸해야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입멸을 결심한 석가모니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베살리를 떠나면서 코끼리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바라보는 것처럼 베살리를 뒤돌아보고 아쉬워하며 북쪽으로 길을 재촉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베살리를 떠나 말라국의 파바라는 마을에 이르셨다. 여기에서 대장장이 아들 춘다(Cunda)가 올리는 수카바 마다바(Sukava-maddava)17)공양을 드셨다. 이것이 석가모니부처님에게는 마지막 공양18)이 되었다. 이 음식을 드시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이질과 비슷한 병에 시달리시게 되었다. 매우 아픈 고통을 참으시면서 계속 여행을 하여 쿠시나가라(Kusinagara)에 도착하셨다. 교외의 숲 속으로 들어가신 석가모니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아난다, 나는 지금 몹시 피곤해 눕고 싶다. 사라(Sara)나무 아래에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 깔아다오. 나는 오늘 밤 여기에서 열반에 들겠다.」고 하시면서 두 그루의 사라나무19)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두시고,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시고는 두 발을 나란히 포개고 누우셨다. 그리고서는 비탄에 젖어 슬피 울고 있는 아난다에게 4대 성지20)와 입멸 후 장례방법, 그리고 탑 공양 등에 대하여 설명하셨다. 아난다는 슬픔을 참으면서 석가모니부처님께 열반에 드신 후에 그 몸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너희 출가 수행자는 여래의 장례 같은 것에 상관하지 마라. 너희는 오르지 진리를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여래의 장례는 재가신도들이 알아서 치러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말라족 사람들이 슬퍼하면서 모여들었다. 이 때 수닷타라는 사람이 찾아와 석가모니부처님께 가르침을 청하였다. 아난다가 만류하였으나 석가모니부처님은 기력을 다하여 그에게 가르침을 주신 결과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수닷타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최후의 제자가 되었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부처님은 수행자에게 아낌없이 그 법을 설하여 출가자에게는「자기의 완성」을 이루게 하고, 재가 신자에게는「평온한 생활」이 가능하도록 가르치심을 주셨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입멸한 후에 교단이 나아가야할 자세에 대하여 자세히 훈계를 하시고 나서 주위를 돌아보시면서「그 동안 내가 한 설법에 대하여 의심나는 점이 있거든 묻도록 하여라. 승단이나 계율에 대해서도 물을 것이 있으면 물어라.」하고 이르셨다. 제자들은 이미 성자의 경지에 이르렀을 뿐만이 아니라 최후를 맞이하시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안타까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수행자들이여!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노라. 내가 지금까지 가르치고 규정한 법과 율이 내가 열반한 후에는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현상[諸行]은 소멸해 가는 것이다. 게을리 하지 말고 노력하여라.」하고 마지막 말씀을 남기시고 편안히 열반에 드셨다. 이 때가 불교계의 문헌에 의하면 BC 544, 혹은 BC 543년 음력 2월 15일이다21)
다비(茶毘)는 입멸 7일 후에 치러졌다. 화장 후 유골은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 왕과 베살리의 릿차비족, 카필라밧투의 샤카족, 알라카파의 불리족, 라마촌의 콜리야족, 베타섬의 어떤 바라문, 파바시(市)의 말라족, 쿠시나라의 말라족 등이 서로 연고권을 주장하면서 부처님 유골을 자기들이 모시겠다고 나섰다. 이들은 석가모니부처님이 유랑을 하시면서 교화활동을 한 지역이 주로 갠지스강 유역이므로 그 지역에서 권력을 가진 종족과 세력가 들이다. 이들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 나름대로 인연을 가진 관계로 일정한 연고권을 주장했던 것이다. 처음에 그들의 주장이 팽팽하여 사리를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때 도나 라는 바라문22)이 와서 여덟 개로 나눌 것을 제의하여 8등분 하여 나누어 가졌다. 뒤 늦게 이 사실을 알고 찾아 온 드로나 바라문은 유골이 담겼던 병을 차지하였고, 모랴족은 재를 각각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유골23)과 병, 재는 탑을 건립하고 그곳에 모셨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유골은 10개의 탑에 모셔졌다. 그 후 기원전 3세기경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이 여덟 개의 탑을 열어 사리를 다시 나누어서 8만 4천개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8만 4천 이라는 숫자는 실제 8만 4천이 아니고, 아주 많다는 인도식 표현 방식이다. 탑은 후에 불상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하여도 가장 신성한 숭배의 대상 이였으며, 이 탑 공양은 대승불교 탄생의 모티브(motive)를 제공한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교화활동의 경로나 우안거 장소, 또 정사를 세운 장소를 보면 주로 도시 근처의 숲 속이다. 이는 사람들의 왕래가 편리하고 낮에도 시끄럽지 않으면서 밤에는 사람의 통행이 없어 명상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음식을 구하기가 쉬웠던 점도 고려가 되었을 것이다.
초기 불전에 나오는 16대국(大國)은 동쪽으로는 방글라데시 경계지역에서 서쪽으로는 델리를 지나, 인도 북서지역의 간다라와 파키스탄지역까지이다. 북쪽으로는 네팔 남부에서 남쪽은 중인도인 고다바리강 유역까지가 당시 불교의 영향을 받은 지역이다. 이 지역을 불교중국(佛敎中國) 이라고 한다. 그러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직접 교화활동을 위하여 방문한 지역은 동쪽으로는 마가다의 수도 라자가하로부터 서쪽으로는 코살리의 사밧티 사이이다. 주로 야무르강 북쪽의 갠지스강 주변지역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여기에는 죽립정사(竹林精舍)와 망고 숲, 영취산(靈鷲山, 독수리의 봉우리라는 뜻), 칠엽굴(七葉窟, vebhara산 중턱에 있는 굴)이 있으며 이곳 정사에서 많은 설법을 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바라문의 세력이 강했던 코살라국의 사밧티에서도 오랫동안 교화활동을 하였다. 성도 후 20년이 되는 해부터 입멸 한해 전까지 25년의 안거를 이곳에 있는 기원정사(祇園精舍)와 녹자모 강당(鹿子母 講堂)에서 보냈다고 한다. 사밧티는 석가모니부처님의 후반기 교화활동의 중심지 이였다. 또 고향인 카필라밧투와 밧지국의 베살리, 밤사국의 코삼비 등도 주 활동지역 이었다. 24)
제2장 불교의 사상사(思想史)
초기불교(初期佛敎) - 근본불교(根本佛敎),
원시불교(原始佛敎), 아함불교(阿含佛敎)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입멸하셨다. 그 분의 유시에 따라 장례는 재가신자(在家信者)들이 맡았다. 재가신자들은 장례를 마치고 나서는 불교교단에서 발을 뺏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주 불교와 관계를 끊은 것은 아니고 여전히 출가수행자에게 공양물을 제공하는 등 재시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출가수행자들은 재가자들을 관심에서 멀리하면서 출가수행자 그들만의 불교를 만들어 갔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직후에 교단에는 중심적 인물이 없어 교단이 흔들리는 현상이 일었다. 이때 사실상 제일 장로인 마하갓사파(마하가섭)이 라자가하에서 출가수행자 500명을 모아 놓고 불교교단의 단합을 꾀하였다. 이를 불교사에서는 제1결집(弟1結集)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마하가섭이 회의를 주재하고, 25년간 한결같이 곁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시봉을 든 아난다(Ananda)가 평소 가까이에서 정확하게 들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설법(법, 法, dharma)을 기억하고 있다가 이를 하나씩 암송(暗誦)하였다. 그 다음에 그것이 틀리지 않으면 500 아라한이 함께 합송(合誦)하고서 이를 확인하고 승인하면 하나의 경으로 인정하는 절차를 밟아서 경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팔리(Upali)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르신 계율을 잘 따르고 잘 기억하기로 정평이 나 있으므로 그가 계율(戒律, vijaya)을 암송하고 나면 500아라한25)이 확인하고 승인하는 식으로 하여 교단의 계율이 성립되었다. 이 자리에서 율은 바꾸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정하였다. 불교교단은 처음부터 체계 있는 계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때 그 때 사례에 따라 정해진 것이다. 즉 불교계율은 오늘날 헌법이나 법률과 같이 일시에 제정된 것이 아니고 많은 비구와 비구니가 출가하여 승단에 참여하면서 승단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비구 자신의 수학하려는 결의를 결속시킬 필요가 있었고, 교단의 질서유지를 위하여 계가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계는 비구와 비구니 개인의 결의를 뜻하고 율은 승단 전체가 지켜야 할 단체규정이다.
이렇게 해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남기신 법(法)과 율(律)을 수집하고 확인하여 경장(經臧)과 율장(律藏)이 완성 되었으며, 후에 선사님들이 경장과 율장을 해석하여 이론을 세웠는데 이를 논장(論藏)이라고 하며 경장, 율장, 논장을 삼장(三臧)이라고 한다. 장은 바구니라는 의미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언행록이 경전으로 만들어진 경위는 복잡하다. 제1차 결집에서 확인된 경과 율은 곧 바로 문자화 되지 않았다. 이들이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각 부파별로 필요하여 일부 문자화 한 경우가 있었으나 나름대로 통일된 문자화 경전을 갖추게 된 것은 기원전 94~80년대 제4차 결집을 통하여 빠알리(pali)어로 된 빠알리 경전이 완성된 시기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당시에 서민들의 언어인 빠알리어로 설법을 하였는데 이것을 빠알리 경전이라고 한다. 인도의 불교역사에서 가장 큰 후원자였던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이 무너지고 뿌샤미뜨라(기원전 187~151)가 슝가왕조를 세웠다. 그는 브라흐만 출신 이였다. 이때부터 브라흐만(사제계급)이 득세하게 되었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상류 언어인 산스크리트(sanskrit)어가 공용어가 되었다. 이때부터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산스크리트어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산스크리트어 경전은 설일체유부의 영향을 받아 서북인도(간다라)와 중국,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동에 전파되었다.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한 경전이 아함경전이다.
빠알리경전(Pali sutta pitaka)은 ① 디가 니까야(긴 길이의 경전), ② 맛지마 니까야(중간 길이의 경전), ③ 쌍윳띠 니까야(주제별로 모은 경전), ④ 앙굿따라 니까야(부수별로 묶은 경전), ⑤ 쿳다까 니까야(15개의 독립된 경전으로 구성) 등 다섯 분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분야별 경전이 한자로 번역된 시기는 서로 다르지만 4세기 말, 5세기 초이다.
디가 니까야는 장아함경으로, 맛지마 니까야는 중아함경, 쌍윳띠 니까야는 잡아함경으로, 앙굿따라 니까야는 증일아함경으로 각각 번역되었다. 그러나 쿳다까 니까야는 법구경과 같이 여러 단일 경전으로 각각 번역되었다.
아함경은 출가수행자 중심으로 내용이 구성되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출가수행자와 재가 수행자를 아울러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그에 맞는 법을 설하셨는데도 아함경의 내용 중 80내지 90% 이상이 출가수행자를 위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초기 불교시기에 재가 신자는 교단을 떠나고 출가자만이 남아서 경을 편집하였기 때문이다. 초기불교를 달리 원시불교, 근본불교, 아함불교라고 하는데 그 시기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때부터 입멸(入滅) 후 100년(혹은 110년)경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분파가 발생하기 이전을 이른다. 이 시기는 제1결집에 의하여 정리되고 발전된 아함경이 중심이 되던 시기이다. 아함경은 출가 교단에 의하여 편집되고 전승되었기 때문에 재가신자에 대한 교설은 대부분 산실된 흠이 있으나, 불교 경전의 원전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초기불교에는 연기(緣起), 무아(無我), 고(苦), 무상(無常),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등 석가모니부처님의 본래적 사상과 실천이 잘 보존되어 왔다.
부파불교(部派佛敎) ․ 아비달마불교. - 승단의 분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100년(혹은 110년)26)이 되는 해에 베살리에서 제2결집(弟2結集)이 있었다. 제1차 결집 때 계율은 바꾸지 않는 다는 원칙을 세웠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전통을 존중하여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승단이 있는가 하면, 계율을 현실성 있게 변화시켜 적용하는 승단이 있었다.
코삼비국 출신 장로인 야사(Yasa)가 있었다. 그는 자이나교도와 바라문교도들이 많이 사는 중서부 인도 지방의 아반티, 데칸 등지에서 교화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러한 야사 장로가 베살리27)를 방문하였는데, 베살리 거리에서 비구장로들이 신자들에게 금과 은을 보시하라고 권유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보시가 실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계율로는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금・은 보시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야사는 깜짝 놀랐다. 그 외에도 베살리에서는 ① 싱거운 음식을 간하기 위하여 소금을 지니고 다녀도 된다. ② 정오 후에 음식을 먹어도 된다. ③ 공양 후에 신자가 초청하면 마을에 들어가도 된다. ④ 같은 지역에서 거주하는 비구들이 각각 포살예식을 하여도 된다. ⑤ 구성원들이 공식적인 일에 불참하여도 후에 불참자의 동의를 구하면 된다. ⑥ 스승이 행하였다면 어떤 것을 해도 된다. ⑦ 공양한 후에도 버터가 되기 전의 우유를 마셔도 된다. ⑧ 발효되지 않은 야자술을 마셔도 된다. ⑨ 테두리가 없는 정해진 크기가 아닌 앉을 깔개를 사용해도 된다. 등 당시 계율에서 금기하는 10가지가 베살리에서는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야사는 이러한 부당함을 바로잡기 위하여 서방의 상좌들을 베살리 바리까 승원에 집결시켰다. 서방장로들과 베살리 장로 등 700아라한이 모였다. 이 때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100년(혹은 110년)이 지나서이다. 인도 서방의 쏘레야에서 수도하던 정통파 좌장 레와따 장로가 의장이 되고, 베살리의 원로 장로인 삽바까민(당시 120세)이 의장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10가지 계율 하나하나의 옳고 그름을 질문한 결과 삽바까민은 모두가 잘못된 계율이라고 밝혔다. 결국 이 결집(제2차 결집)에서 베살리의 밧지족 비구들이 변경하여 적용하는 계율은 부당하다고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밧지족 비구들은 그 결과에 불복하였다. 그래서 어떠한 계율도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장로를 중심으로 한 정통보수파를 상좌부(上座部, theravada)라고 부르게 되었고, 어떤 계율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꾸어야 한다는 일반 비구를 중심으로 한 진보적 집단을 대중부(大衆部, mahasanghika)라 부르게 되었다.
이때부터 불교교단은 분열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근본분열(根本分列)이라고 불교사에서는 부른다. 그 후 상좌부는 상좌부대로, 대중부는 대중부대로 자체분열을 계속하여 결국 상좌부가 11개 부파로, 대중부는 9개 부파로 분열하여 20개의 부파가 생겨났다. 분열하게 된 이유는 비단 세력 다툼만은 아니다. 문자화 하지 못한 경전이 구전(口傳)되면서 변화를 가져왔을 수도 있고, 같은 달마와 율이라 하여도 견해의 차이로 인하여 변혁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유력한 지도자의 영향력이나 지리적 여건도 다른 달마와 율을 만들어 내는 환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각 부파마다 서로 다른 경장과 율장으로 승단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이를 부파불교(部派佛敎)라고 한다. 후대에 와서 부파별로 교리연구에 중점을 두고 논리를 발전시켜 나간 것을 아비달마(abhidharma)불교라고 한다.
부파불교의 경전인 아함경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독특한 설법인 대기설법(對機說法), 응병여약(応病與藥)에 의하여 즉흥적, 우연적인 요소가 많았다. 아함경은 내용이 중복되고, 같은 내용이지만 표현방식을 달리한 경우 등 체계적이지 못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초기경전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교설속의 어구(語句)에 대한 주석적 설명이 필요했고, 여러 교설을 정리하고 재배열하여 조직할 필요가 절실했다. 교설에 대한 주석과 체계적인 정비를 통하여 점차 아비달마적 경향이 발달하여 마침내 경에서 독립된 아비달마론서[論藏]인 「아비달마발지론」, 「아비달마구사론」, 「청정도론」 등 불후의 논서들이 출현하였으며, 바수만두(세친), 붓다고사(불음) 등 논사(論師)가 나타나 불교이론을 정립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결과적으로 삼장 중에서 논장을 아비달마라고 볼 수 있다.
부파불교는 제2결집이 있은 시기부터 BC1세기경까지 35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소승불교(小乘佛敎)와 대승불교(大乘佛敎)
부파불교가 곧 소승불교이다. 소승불교는 대승불교인들이 상대적으로 붙인 명칭일 뿐이다. 부파불교, 아비달마 불교가 소승불교이다. 소승불교는 출가자 중심의 승단을 운영하면서 출가자를 위한 교리만을 주장하였으며, 불타가 아닌 아라한이 수행의 최종목적 이였다. 이들은 석가모니부처님도 아라한의 범위에 두고, 그 분을 인간으로 인정하여 입멸한 것으로 봄으로서 불교승단은 다만 그분의 가르침인 다르마와 율을 지켜 아라한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수행의 전부였다.
소승불교의 경전은 초기에 구전되어 오다가 부파별로 관리하여서 내용이 서로 다른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소승경전은 빠알리(pali)어로 통일된 상태로 보전되어 왔다. 빠알리어 경전은 기원전 94~80년경에 스리랑카 마딸레 지방의 알루워하라 승원에서 500명의 장로가 모여 경장, 율장, 논장의 전체 3장을 체계적으로 문서화 하여 집대성 하였다. 이를 불교사의 제4차 결집이라고도 한다. 이 경이 후에 산스크리트어로 번역되었고, 다시 한자로 번역된 것이 아함경임을 앞에서 알아본 내용이다. 소승불교의 경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기록하여서 소박하고 알기 쉽게 되어 있으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상대방의 지식이나 사회적 신분 등을 참고하여 그에 알맞도록 같은 내용이라 하여도 다른 말로 표현 하다보니 중복된 부분과 체계가 바로서지 않은 부분이 다수 있다. 소승경전은 용수(150~250년경 사람으로 중관학을 발전시켰다)의 저술 속에 나타나는 경전을 초기경전이라 하고, 그 외의 것을 후기 경전이라고 한다.
기원을 전후하여 대승불교가 일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소승불교가 소멸된 것이 아니라 둘은 공존하였다. 소승불교의 주된 활동지역은 동인도 이였으며, 차츰 스리랑카, 태국, 버마 등 동남아로 전파되어 현재 이를 남방불교라고 부른다. 대승불교는 서북인도 지역에서 발전하다가 중국, 한국, 일본, 티베트 등지로 전파되어 이를 북방불교라고 한다.
인도에서 불교가 왕성하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아쇼카왕(기원전 268년에 즉위)의 영향이 크다. 그는 불교정화와 전파에 큰일을 하였다. 아쇼카왕 17년경에는 이교도(異敎徒)들이 불교를 등에 업고 명성을 얻기 위해서 정식 비구인양 행세 하면서 불교승단을 교란시켰다. 이를 알게 된 아쇼카왕은 가짜비구 6만 명을 색출하여 불교교단에서 추방하여 승단을 깨끗하게 정화 하였다. 이를 불교사에서는 제3차 결집이라고 한다. 이후 아쇼카왕은 북으로 간다라, 캐시미르, 서부펀잡 지역, 그리스인의 세계, 히말라야 설산지역, 황금의 땅 미르마, 스리랑카 등지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강력한 불교전파 정책을 펼쳤다. 그 영향으로 불교가 서부지역과 로마 등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다.
아쇼카왕은 세자시절에 당시 서북인도(현재의 파키스탄)인 간다라 지역에 총독으로 부임하여 근무한 적이 있다. 그 인연으로 왕이 된 후에 그곳에 많은 불탑과 정사(절)를 세우고 포교사절단을 파견하여 그곳에 불교를 확실하게 심었다. 간다라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이 잠시 정복하였던 이유로 인도문화와 헬레니즘문화(그리스)가 혼합된 간다라문화를 세웠으며, 비교적 기존 질서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유스런 창작문화를 형성하였다. 또 아쇼카왕은 당초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열개나라의 왕들이 사리를 모셔다 10개의 불탑을 세웠던 것을 해체하여 8만 4천개로 사리를 나누어 8만 4천개의 불탑을 세웠다. 불탑은 출가자가 아닌 재가신자가 관리를 맡았다. 아쇼카 왕은 탑을 관리하는데 드는 비용에 충당하기 위하여 많은 토지를 기증하였다. 그들은 불탑벽면에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 중 중요한 사건이나, 설법의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림을 그려 넣는 등의 방법으로 불탑을 찾는 많은 참배객에게 석가모니부처님을 알리고 그 분의 가르침을 전달하였다. 이러한 재가신자들의 꾸준하고 신선한 노력이 점점 확산되었으며, 당시 인도 대중들은 깨달음 자체에 목적을 두고 깨달은 후 회향(回向)에는 관심이 부족한 아라한 중심의 부파불교보다는 탑 중심의 대중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때 숲속에서 명상수행에만 정진하던 숲명상가들이 이 새로운 기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숲명사가들은 석가모니부처님 재세기에도 있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 중에는 허락을 받아 숲 속에서 홀로 명상수행을 하는 자가 많았을 것으로 본다.
석가모니부처니의 여섯 번째 제자인 베나레스의 장자 아들 야사가 있다. 야사의 친구 네 명이 야사에 이어서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 중에 우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석가모니부처님의 허락을 받아 숲(아란야)에서 명상수행을 하였다.
이발사 출신의 우발리가 석가모니부처님에게 숲 속에서 명상을 하겠다고 허락을 구하였으나, 석가모니부처님은 이러한 비유를 들면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코끼리가 연못에서 기분 좋게 목욕을 하고, 귓속까지 깨끗하게 씻었다. 이를 보고 있던 토끼가 코끼리가 떠난 다음에 자기도 목욕을 하려고 연못에 뛰어 들었다. 그런데 연못이 깊어서 수영을 못하는 토끼는 익사하고 말았다.」 아마도 우발리는 이발사 출신인데다 숲속명상에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판다하셨던 듯 하다.
또 한편에서는 숲속명상가 중에는 부파불교의 아비달마적 사상과 승단에 대한 불만이 있어 불단을 떠나서 숲속으로 들어간 수행자도 있었을 것이다. 재가신자와 숲속명상가가 뜻을 같이하여 불교를 일대 혁신을 가져왔는데 이것이 대승불교이다.
소승불교에서는 아라한만 있고 불타는 없다. 아라한은 자리(自利)적이다. 그들은 아라한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대중을 위한 마음이 부족하다. 그러나 불탑을 중심으로 대중 속에 전파된 석가모니부처님과 그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으며, 이 때 숲명상수행자들이 합세하여 새로운 차원에서 불교를 보게 되었다.
이들은 불타를 내세운 것이다. 깨달은 후에 열반에 들기를 원했던 아라한의 석가모니부처님이 아니라 범천(梵天)의 권청을 받아들여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는[利他] 불타를 보게 되었다.
서북인도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생담(前生談)을 만들어 이제까지 단순한 아라한 이였던 석가모니부처님을 시아본사, 사생자부이신 석가모니부처님으로 격상시켜 나갔다. 영생(永生)의 존재로 신격화 된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생은 보살(菩薩, bodhisattva)28)로 태어나게 되었다.
불교를 일명 숲의 종교라고도 한다. 이러한 명상파(yoga師)는 정신적으로 석가모니부처님과 법담(法談)을 나누면서 석가모니부처님이 현현(顯現)하여 설법을 하고 부처님을 배알하는 명상체험(瞑想體驗)을 가질 수 있었다. 숲 속 수행자들이 명상체험을 통하여 현현하신 석가모니부처님을 기리기 위하여 불상(佛像)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소승에서는 아라한인 석가모니를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도서부의 마투라와 서북인도 간다라 지방을 중심으로 불상을 만들어 모시기 시작하였다. 이 때를 기원 전후로 보고 있다.
한편, 앞에서 논한 아비달마적 사고는 대승불교 발생의 맹아(萌芽)가 되었다. 즉 대승불교는 아비달마의 사고 속에서 발생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초기경전의 해석과 체계적 정리를 통하여 논장(論藏)이 성립되고 나서 경전을 달리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설법한 내용 중 공통사항을 뽑아서 한 곳으로 모아 단일경전을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초기경전에 있는 공사상만을 발취하여 주석을 달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대승불교의 최초경전인「반야경」이다. 반야경은 기원전 1세기에서부터 기원후 1세기 경에 남인도에서 탄생하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서북인도에서도 만들어 졌다. 이렇게 각지에서 만들어진 반야경전은 무려 640편이나 된다. 반야경을 집대성 한 곳은 서북인도로 본다. 이곳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세력이 강한 곳 이였기에 초기 반야경은 이들과 대립이 심했다고 한다.
반야경의 종류는 ⅰ대품반야경(총28권, 또는 30권, 40권, 마하반야바라밀경), ⅱ 소품반야경(총10권, 마하반야바라밀경), ⅲ 대반야경(총600권, 대반야바라밀경), ⅳ 반야심경(1권, 반야바라밀다심경), ⅴ 금강경(1권, 금강반야바라밀경)이 있다.
반야경은 대승불교의 기본사상인 공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인도에서 반야경을 시작으로 화엄경, 법화경, 해심밀경, 여래장경 등 대승불교 경전이 만들어 졌고, 새로 만들어진 경전에 정통성을 인정하여 정식 불경으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주 경전을 소의(所衣)로 하여 여러 종(宗)이 생겨났다. 인도에서 파(派)라고 하였다면, 중국으로 와서는 종으로 불리어져 인도의 부파불교는 중국에서 대승이 종으로 갈라진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승불교가 발전하면서 반야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공사상(空思想)과 중관사상(中觀思想), 해심밀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유식사상(唯識思想), 여래장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을 만들었고, 중국으로 와서는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천태종(天台宗),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화엄종(華嚴宗)과 무량수경・아미타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정토종(淨土宗)을 비롯하여 선종(禪宗)이 성행하였고, 티베트에서는 밀교(密敎)가 크게 일어났다.
불교사를 시대구분해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ⅰ석가모니부처님의 재세시대, ⅱ 초기불교, ⅲ 부파불교, ⅳ 아비달마불교, Ⅴ 대승불교이다. 초기불교와 부파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하며, 아비달마불교는 소승과 대승의 중간적 역할을 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승불교가 일어났다고 하여 소승불교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병존하여 왔다. 지금도 남방불교는 소승이며, 북방불교는 대승이다. 대승이 일어난 기원 전후를 불교의 대개혁이라고 볼 수 있다.
대승불교 사상사(思想史)
대승불교의 기본사상은 공사상(空思想)이다. 중관사상이 되었든, 유식사상이 되었든 불문하고 공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이를 설명하는 수단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할 것이다. 공사상은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 1세기 무렵으로 본다. 발생한 장소는 남인도이며, 남인도에서「반야경(般若經)」이 저술되어 서북인도로 확장되었으며, 이곳에서 집대성 되었다. 반야경은 경전군(經典群)의 이름이지 단일경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반야경이 최초의 대승경전이며, 대승불교는 이를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그 중심사상이다. 우리나라 조계종은 반야 중 비교적 초기에 집성된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다.
공사상(空思想)
인간은 유한(有限)한 생명으로 인하여 불안, 즉 죽음에 대한 불안과 늙고, 병드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중생들을 이러한 고통의 세계에서 구제할 수 있을까를 놓고 6년 동안 고민하였다. 그 결과 네란자라 강가에서 여명을 맞이하는 순간 깨달음을 얻으셨다. 그것이 연기(緣起)이다. 모든 사물과 현상[一切法, 萬法]은 인연(因緣)에 의하여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소멸하는 존재라는 우주진리를 깨달으신 것이다.
이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이 있으면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없어지므로 항상 함이 없다는 원리가 공사상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인연 따라 생(生)・주(住)・괴(塊)・멸(滅)하는 존재에 대하여 일체법이 마치 영원히 존재하는 것처럼 집착(執着)하거나 분별(分別)심을 가져 중생이 괴롭다고 하셨다. 중생은 우주의 진리, 만고불변의 진리인 인연의 법칙을 모르므로[무명, 無明] 고통 속에서 윤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법이 인연생멸(因緣生滅)하므로 공이다. 그래서 공(空)하므로 가유(假有)인 일체법에 집착하지 말고, 분별심을 내지 말라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누누이 당부하셨다.
중관사상(中觀思想)
모든 존재와 현상이 공이라면 수행은 어떻게 결과를 가져오고, 깨달음은 또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등 당시 다른 종교로부터 비판과 공격을 받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계 내부에서도 회의론자(懷疑論者-의심을 품고, 부정하는 사람)가 많이 발생하였다.
중생이 공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사에 유전하고 있다면 중생과 보살, 깨달은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모두가 공인데 중생은 누구이며, 보살은 무엇이고, 깨닫는 다는 사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서 용수(150~250)보살은 8불(8不)을 제시하였다. 8불은 만법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二), 불래불출(不來不出)한다는 진리를 말한다. 낳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절되는 것도 아니며, 같지도 아니하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오지도 않고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만법은 무변중심(無邊中心)에 존재한다는 이치다.
중관에서는 연기에 의한 것은 공임과 동시에 가유(假有, 가짜로 그렇게 인식될 뿐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이다. 공이므로 비유(非有)이며 가유이므로 비무(非無)이다. 그러므로 공은 비유비무(非有非無)의 논리가 성립된다.
유식사상(唯識思想)
공사상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므로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중관사상이다. 그러나 중관사상도 오히려 논리를 모호하게 할뿐 명쾌한 이해를 주지 못했다. 그 결과 ‘일체는 공이니 허무하다’는 허무주의가 일어나는 등 악취공견(惡取空見)으로 흐르는 문제가 제기 되었으며, 또 윤회의 주체는 무엇일까 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시 등장한 것이 유식사상(唯識思想)이다. 유식사상은 인도에서 Upanisad 시대부터 존재하던 요가(Yoga) 수행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초기경전에서는 항상 현실의 인간 자체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속제(俗諦)를 중심과제로 다루는 유식사상이 현실성 있는 불교이론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 등 다섯 개의 감각기관[根]으로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 등 다섯 가지 대상[境]을 받아들이고[前5識], 감각기관에 포착된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제6식, 識]을 통하여 사물을 판단하게 된다. 이때 제6식은 제8식 아뢰야(alaya)식에 저장된 종자를 활용하여 인식한다. 이 과정에서 제7식 말라식[manas]은 자아의식을 발동하여 아만(我慢)․아치(我癡)․아견(我見)․아애(我愛)를 일으켜 번뇌를 만들어 내게 된다. 이를 4번뇌29)라 한다.
제8식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때부터[無始] 우리의 생각과 행동[業]이 하나도 빠짐없이 저장되어 잠재의식으로 존재하다가 근이 경을 인식할 때 의식으로 전환 된다.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알고, 감촉을 느끼는 것은 제8식에 저장된 종자의 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같은 물건이나 현상을 가지고 사람마다 느끼고, 반응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예를 들면, 길에 떨어진 돈을 보고 어떤 사람은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누가 볼까 봐 두리번거리면서 몰래 주머니에 넣기도 한다.
깨달음이란 이 제8식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는 나뿐 종자[惡種子]를 하나하나 제거하고, 좋은 종자[善種子]를 가득 채우는 것을 말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30)사상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유식사상은 모든 존재와 현상은 오르지 제8식(아뢰야식)에 있는 식의 표상(表象)일 뿐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의한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이다. 즉 ‘만법은 오르지 식의 표상일 뿐 달리 그 형체를 가지지 아니한다’는 이 아뢰야식이 우리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마음이다. 31) 32)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
여래장이란 우리들 범부(凡夫, 衆生)의 마음속에 부처가 될 씨가 들어 있어서 누구나 수행을 통하여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33) 사상이다.
여래는 깨달음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에서 우리들 중생이 살고 있는 사바세계에 오신 분을 말하니, 곧 부처님을 뜻한다. 장(藏)은 본래 ‘저장하다’, ‘감추다’는 뜻에서 비롯되어 ‘바구니’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태 집’, ‘태아’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래장이란 ‘부처의 씨’, ‘불성’을 뜻한다.
한 사람의 마음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우주를 품을 수도 있을 정도로 넓은가 하면 바늘 한 끝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기도 하다. 한 마음 속에 사랑도 미움도 품고, 좋고 나쁨도 함께하며, 자비심과 적개심도 같이한다. 마음에는 미혹의 마음도 있을 수 있고, 깨달음의 마음도 있을 수 있다. 미혹(迷惑)한 마음은 범부(凡夫)․중생(衆生)의 마음이요, 깨달음의 마음은 부처님․여래의 마음이다. 중생에서 여래를 향하여 정진수행 중에 있는 사람을 보살(菩薩)이라 한다. 여래장이란 모든 중생의 마음에는 여래가 될 수 있는 「씨」, 「태아」를 간직하고 있으니, 자기 노력에 의하여 누구나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범부의 마음은 무명(無明, 煩惱 - 집착심과 분별심)에 의하여 깨달음의 씨인 여래가 때로 가리어져 보이지 않은 뿐이다. 마치 태양이 구름에 가려서 볼 수 없는 경우와 같다. 태양은 영원불변이고, 구름은 수시로 변하듯이 여래의 씨, 불성은 영원불변의 진리이나 마음은 구름과 같이 오락가락 수시로 변하며 번뇌에 쌓여 심란하다.
공사상에서는 일체가 무라고 하였으나, 유식사상에서는 아뢰야식이 찰라생멸을 하면서 존재한다고 하였듯이 불성은 영원불변이다. 유식사상에서는 아뢰야식 속에는 청정식(淸淨識)과 오염식(汚染識)이 함께 존재하는 정오혼합식(淨汚混合識)이라고 한다. 의타기자성, 즉 아뢰야식 속에는 변계소집성(오염식)과 원성실성(淸淨識)이 같이 존재하는데, 정진수행을 통하여 변계소집성을 여의면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 갈 수 있다. 여래장사상은 유식사상을 좀더 현실성 있게 발전시킨 사상이라 할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어느 누구나 마음속에 생멸문(生滅門, 중생심 - 번뇌에 찬 마음)과 진여문(眞如門, 번뇌를 여읜 청정한 마음)이 함께 존재한다고 일심이문(一心二門)을 내세웠다.
대승불교사상중에서 공・중관・유식・여래장사상은 인도에서 성행하였고, 중국에서는 달랐다. 후한시대에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특정한 경전이나 논서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파적 성격을 띤 종파(宗派)가 성립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정토종(淨土宗), 선종(禪宗)이 있다. 중국불교는 절대・보편의 진리를 성(性), 리(理), 총(總), 체(體) 등으로 표현하며, 현상세계를 상(相), 사(事), 용(用), 별(別) 등으로 표현한다. 본질[性]과 현상[相], 특수[事]와 보편[理], 부분[別]과 전체[總], 생사와 열반, 중생과 보리는 둘이 아니며, 하나도 아닌 원융(圓融)관계이다. 이러한 사상은 태극이 음과 양으로 상극(相剋)인 듯하지만 상즉(相卽)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같은 취지라 하겠다.
제3장 불제자의 예법(禮法)
사찰의 구조(構造, 배치)
사찰 내에 있는 건축물 등의 배치는 시대에 따라 변모하였고, 사찰의 입지 여건과 규모에 따라 다양하게 배치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사찰을 기준으로 살펴볼 때 큰 원칙이 있다. 사찰의 경지(境地)에 다다르면 부도밭이 있고, 당간지주가 있으며 이어서 차례로 일주문, 천왕문, 금강문, 해탈문 등이 있다. 문을 모두 지나고 나면 요사채가 있고, 누각이 있다. 누각을 지나면 석등, 그 뒤에 석탑이 있으며, 그 좌우 한 편에 선방과 강당이 자리한다. 석탑 다음에는 대웅전(금당)이 있으며, 그 앞에 괘불대가 있고, 좌우나 그 뒤에 관음전, 지장전, 산신각 또는 칠성각 등이 들어선다. 물론 이러한 배치는 해인사 등 대규모 사찰에나 가능하고 규모가 작은 곳은 일주문, 천왕문(또는, 금강문), 석등, 석탑, 대웅전과 요사채 정도가 보통이다.
부 도(浮屠)
탑이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구조물이라면 부도는 일반스님들의 사리와 유골을 봉안하는 구조물이다. 탑이 사찰의 중앙에 조성되는 것과 달리 부도는 사찰의 외곽에 만들어 진다. 조선시대 이후에는 부도를 사찰입구에 모아 부도밭을 조성하는 것이 일반적 이였다. 고승들의 부도에는 그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 함께 건립되기도 하는데 고려시대까지는 국왕의 허락에 의해서만 비석을 건립할 수 있었다. 승려들의 비석은 일반적으로 거북의 몸에 용의 머리를 한 귀부위에 올려져 있으며, 윗부분은 얽힌 용들의 몸으로 구성된 이수가 덮고 있다. 부도를 만나면 반배를 세 번 올려야 한다.
당간지주(幢竿支柱)
사찰의 깃발을 걸던 당간(깃대)을 받쳐주는 것으로 사찰의 입구에 조성된다. 대개 철로 만들어 지지만 돌로 만든 것도 있다. 요즘에는 당간(깃대)은 없고 돌로 된 지주만 서있는 경우가 보통이다.
일주문(一柱門)
사찰영역의 초입에 있는 문으로 산문(山門)이라고도 한다. 기둥이 한 줄로 서 있어서 일주문이라고도 하며, 한 마음[一心]을 가다듬으라는 뜻도 담겨있다. “oo산”, 혹은 “oo사”와 같은 산과 사찰의 이름을 적은 현판이 걸려있다. 불자는 일주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든 짐을 모두 내려놓고 법당을 향해 합장하고 반배를 올리면서 속세의 마음을 버리고 일심을 다짐하는 예를 올려야 한다. 절에서는 가급적 가운데 통로를 피해야 하므로 여기에서도 옆으로 길이 있다면 그 길을 택해야 한다.
부처님의 법을 믿고 따르는 불자는 항상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공경할 줄 알아야 한다. 사찰 안에서는 경건한 몸가짐으로 좌측통행을 해야 하고, 옷차림은 단정하게 해야 하며, 경내에서는 항상 차수를 하고 이동해야 한다.
천왕문(天王門)
천왕문은 사천왕(4天王)을 모시는 문이다. 원래 동서남북의 세계를 주관하는 하늘나라의 국왕이었던 사천왕은 부처님께 귀의하여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동쪽의 지국천왕은 비파, 남쪽의 증장천왕은 칼을, 서쪽의 광목천왕은 용과 여의주를, 북쪽의 다문천왕은 탑과 깃대를 각각 들고 있다. 사천왕은 제석천왕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며, 사찰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역시 이곳에서도 합장하고 반배를 올리면서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금강문(金剛門)
인상이 험악한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는 금강문은 인왕문이라고도 한다. 인왕이라 불리는 금강역사는 부처님과 사찰을 수호하는 신으로 보통 둘이 서 있다. 험악한 표정에 ‘아’하고 입을 벌린 역사는 밀적역사로 나뿐 세력을 공격하는 신이며, ‘음’하고 입을 다문 나라역사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신이다. 금강문을 지나면서도 반배를 올려야 한다.
해탈문(解脫門)
사찰의 중심부인 법당구역 입구에 있는 문이 해탈문이다. 앞의 문들을 거치면서 번뇌를 잊고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 왔음을 의미한다. 깨달음의 세계에는 부처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도 역시 반배를 올려야 한다.
누각(樓閣)
누각은 본당 앞에 있으며 밑으로는 일반인이 출입하는 문이며 각은 사무를 보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누(樓)는 2층 이상 복층을 말하고, 각(閣)은 단층을 말한다.
요사(채)
요사(채)는 스님들과 신자들의 생활공간이다. 큰방, 선방, 강당, 사무실, 후원(부엌), 창고, 수각, 해우소 등을 통칭한다. 요사라고도 한다.
선방(禪房)
선방은 스님이 공부와 선을 하는 공간으로 함부로 출입해서도 안 되고 이 앞을 지나갈 때는 조용히 하고 단정한 마음을 가져야한다.
강당(講堂)
강당은 일반신도나 대중을 대상으로 불법을 전달할 때, 또는 회의용 등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석등(石燈)
석등은 부처님이 계신 사찰을 밝히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장명등(長明燈), 또는 광명등(光明燈)으로 불리기도 한다. 부처님께서는 무명에서 허덕이는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하여 진여의 세계에서 사바세계에 오셨다. 그러나 밤이면 광명이 가려져 등을 밝혀 부처님의 법이 한시도 멈춤이 없이 사바중생을 비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해가지면 켜고, 해가 뜨면 불을 끈다. 석등은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과 함께 법당(대웅전) 앞에 설치한다.
석탑(石塔)
석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곳으로 고대 인도에서 성인의 유해를 화장하고 그 유골을 봉안하던 무덤인 스투파(stupa)에서 비롯되었다. 기원전후에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불상이 만들어 졌다. 그 이전에는 석탑이 가장 중요한 예배의 대상 이였으며, 재가불자들이 참배하고 기도하는 사찰도 탑을 중심으로 만들어 졌다. 인도의 고대 탑은 요즘 우리나라에서 보는 탑의 규모가 아니고, 둥근 원형을 한 대형 건물 규모이다.
동아시아의 탑은 재료에 따라 목탑, 석탑, 전탑(벽돌로 만든 탑)으로 구분 되는데 자연적 여건과 관련되어 중국에서는 전탑이 유행하였고, 일본에서는 목탑이 유행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초기에는 목탑이 주였으나 통일신라시대 이후부터는 석탑이 주로 건립되었다. 탑에 봉안하는 사리는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인데 후대에 사리 대신에 불경이나 소형탑 등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탑은 시대에 따라 탑신과 기단에 불상과 여러 장엄조식이 조각되기도 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찰에서 탑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낮아져 고려 후기 이후에는 소규모의 탑이 조성되고, 조선시대에는 탑을 두지 않는 사찰도 생겨나게 되었다. 탑 앞에서는 반배로 3배의 예를 올린다. 탑돌이 할 때에는 오른쪽으로 돈다.
전각(殿閣)
대웅전(大雄殿, 金堂금당, 本堂본당)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법당이다. 본존불인 석가모니부처님의 좌우에 협시하는 분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모셔진다. 때로는 십대제자이신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모시기도 한다.
대웅전에는 삼세불(三世佛)이나, 삼신불(三身佛)을 모시기도 한다. 삼세불은 과거불인 연등불 등 여섯 부처님이 있고, 현세불인 석가모니불,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있다. 삼신불은 법신불(法身佛, 비로자나불), 보신불(報身佛, 아미타불), 화신불(化身佛, 석가모니불)이 있다. 삼신불을 법당에 모시는 경우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봉안하기도하는 데, 이 경우 법당을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한다.
대웅전은 사찰 내에서 가장 신선한 곳으로 최고 경배의 대상이다. 사찰을 들렸을 때에는 언제나 먼저 대웅전에 들려 부처님께 인사를 올리고 볼일을 보아야 하며, 사찰을 떠날 때도 그와 같이 해야 한다. 불상이 모셔진 곳을 대웅전이라 하고, 그 외의 것은 각(칠성각, 산신각 등)이라 한다.
대적광전(大寂光殿)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신 곳이다. 비로자나불은 화엄세계의 주불이며, 화엄세계를 나타내기 때문에 화엄전이라고도 한다. 비로자나불은 화엄장세계의 교주이신데 화엄장세계는 진리가 가득한 세계를 말한다. 대적광전에는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고, 보신불인 아미타불, 화신불(응신불)인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것이 상례이다.
적멸보궁(寂滅寶宮)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전이다. 그래서 이 곳은 불상을 별도로 봉안하지 않고 불단만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상남도의 양산 통도사와 강원도에 있는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설악산 봉정암 등 5대 적멸보궁이 있다.
극락전(極樂殿)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다. 아미타불은 광명이 끝이 없고 수명이 한량없다고 하여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다.
미륵전(彌勒殿)
미래의 부처이신 미륵보살을 모신 곳이다. 현재는 도솔천에 계시지만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미래에 부처가 되어 세상을 밝힐 것이라는 수기를 받았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는 미래부처님이다. 금산사의 미륵전이 유명하다. 미륵보살은 대부분 법당 밖에 모시는 것이 상례이나 금산사의 미륵전은 예외이다.
원통전(圓通殿)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하는 사찰에서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을 말한다. 관세음보살이 주불이 아닌 사찰에서는 관음전(觀音殿)이라고 한다.
약사전(藥師殿)
현재에 살고 있는 모든 중생의 질병과 재난을 없애주고 고통에서 구제해 주는 약사여래를 모신 곳이다.
나한전(羅漢殿)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에 마하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봉안하고 있으며, 그 주위에 열여섯 명 나한의 형상을 배치하고 있다. 나한은 번뇌를 모두 끊은 성자라는 뜻이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시왕(十王)을 모시고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때까지 구제활동을 하겠다고 서원하시고 보살로서 그 사명을 다하고 있다. 시왕은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심판하는 염라대왕 등 열 명의 왕이다.
조사당(祖師堂), 장경각,(藏經閣) 천불전(千佛殿) 등
조사당은 그 종파를 세우고 종지를 일으키신 스님을 모신 집이며, 장경각은 법보전이라고도 하며 경전, 경판과 같은 것을 보관, 관리하는 장소를 말한다. 천불전은 현겁천불을 모신 곳으로 삼천불을 모신 삼천불전도 있다.
산신각(山神閣), 칠성각(七星閣) 등
산신각이나 칠성각 등은 민간신앙의 숭배대상을 사찰에서 받아들이고 중생에게 모실 기회를 주는 배려 차원의 조치이다. 혹자는 왜 민간신앙을 사찰 내로 들여오느냐고 못 마땅해 하지만, 불교는 포용력이 크기 때문에 어떠한 신앙과 신이라도 배타하지 아니하고 기꺼이 받아들인다. 다만 모든 신과 숭배 대상은 부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가능하다. 우리들이 절에 가서 대웅전의 부처님과, 관음전, 명부전 등을 먼저 들러 경배를 드린 다음에 산신각이나 칠성각에 들러야지 이곳을 먼저 들리면 안 된다.
불 상 (佛 像)
부처님은 법신불(法身佛)과 응신불(應身佛, 化身佛), 보신불(報身佛)이 있다. 법신불은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근본불이다. 비로자나불이 법신불이며 지권인(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수인상)을 하고 계신다. 응신불(화신불)은 석가모니가 중생구제를 위하여 인간의 몸으로 현세에 나타난 부처를 말한다. 그리고 보신불은 중생이 보살도를 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 불이다. 법당에는 불상 외에 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보살상은 관세음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등이 있으며 약사여래가 모셔지기도 한다. 미륵보살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법당 안에 모시지 않고, 밖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불상의 명칭은 재료 +상호 +자세의 순서로 짓는다. 즉 돌로 만든 자리에 앉은 비로자나불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된다. 불상의 세부 명칭은 머리 위로 살이 솟은 모양을 육계(살 상투)라고 하며, 머리카락이 한 올씩 소라껍질처럼 오른쪽으로 말린 나발, 민머리, 양 눈썹 사이에 있는 백호(하얀 털), 목에 난 세 가닥의 주름인 삼도 등이 있다.
한 종파나 사찰의 가장 중심이 되는 불상을 본존불(本尊佛)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미륵불, 약사여래 등이 있다. 형식에 따라서 불상은 단독상, 삼존상, 병좌상 으로 나누고 불상의 자세에 따라서 입상, 와상(열반상), 좌상(길상좌, 항마좌, 기좌, 교각좌, 반가좌, 유희좌, 윤왕좌) 등이 있다. 부처님의 의상을 가사라고 하는데 가사는 고대 인도의 복식에서 유래하였으며 삼의, 오의가 있다.
불상 머리 뒤의 광채를 두광, 몸 뒤의 광채를 신광, 머리와 몸을 감싼 광채를 거신광이라고 한다. 이를 통틀어 광배라고 한다. 불상이 앉아 있는 자리로는 연화좌, 수미좌, 상현좌, 하엽좌, 암좌, 생령좌, 운좌 등이 있다. 불상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지물이라고 하며, 불상의 재료로는 돌, 금, 청동, 철, 나무, 종이, 흙, 천 등이 있다. 불상은 기원전 ․ 후에 대승불교가 성행할 무렵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유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마음으로 기려야 하는데 열반에 드신지 오래되다보니 그 기억이 희미해지므로 실제 석가모니부처님은 아니지만 형상을 만들어 모시고 바라보면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연상하기 위하여 불상을 모시는 것이다. 우리가 부모님의 사진을 수첩에 고이 간직하고 다니며 그분이 그리울 때에 한번씩 바라보면 마음에 와 닺는 정도가 그냥 상상할 때보다 진한 것을 느낀다. 불상도 그런 이유에서 모시는 것인데 일부에서 우상 운운하는 것을 진실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석가모니불상
여래(如來)란 본디 석가모니불을 말한다. 석가모니불상은 나발(불상의 머리 형태로 소라모양과 같이 오른쪽으로 감긴 모양을 말함)과 육계(불상의 정수머리에 솟아있는 상투 모양의 혹)와 백호(눈썹 사이에 난 터럭)가 있으며, 법의(法衣)를 입고 장신구가 없다. 다른 불상과 달리 석가모니불상은 우견편단(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손의 모양은 천지인, 항마촉지인, 선정인, 전법률인,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다. 천지인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태어나시어 곧 바로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고 왼손을 땅을 향하고서 “천상청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셨는데 바로 그 모습이다. 선정인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위해 결가부좌 상태로 선정에 들 때의 수인이다. 왼손 손바닥을 위로해서 배꼽 밑에 놓고, 오른손도 손바닥을 위로해서 외손위에 포개 놓고서 두 엄지손가락을 살며시 맞댄 손 모습이다.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에 마왕 파순의 항복을 받기 위하여 자신의 수행을 지신(地神)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지은 수인이다. 선정인 상태에서 왼손은 그대로 두고 위에 놓인 오른손은 풀어 손바닥을 무릎위에 대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깨달음의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석굴암의 부처님상이 이 모습이다. 설법인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에 다섯 비구에게 첫 설법을 하며 지은 수인이다. 첫 설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는데 설법인은 우리나라에는 많지 않다. 이 수인은 후에 비로자나불상의 수인으로 발전하였다. 시무외여원인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같이 부르는 수인으로 중생에게 두려움을 없애주고(시무외인),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여원인) 것을 표현한 수인이다. 시무외인은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위로 뻗치고 손바닥을 앞으로 하여 어깨높이까지 올린 상태이며, 여원인은 왼손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손가락을 펴서 밑으로 향하여 손 전체를 아래로 늘어뜨린 모습이다. 이 수인의 예는 서산에 있는 마애삼존불상을 들 수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협시(挾侍 - 좌우에서 가까이 모심)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또는 가섭존자나 아난존자가 있다.
아미타불상
정토종의 주불인 아미타불은 가사를 양 어깨에 걸친 통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협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보통이다. 아미타불이 모셔진 전각을 무량수전, 극락전, 미타전이라 하며, 수인은 상품상생에서 하품하생까지 9가지 형이 있다.
비로자나불상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은 통견에 지권인(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죈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비로자나불 좌우에는 석가모니불, 아미타불과 약사여래 등 삼존불을 함께 모시기도 하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로 모신다.
미륵보살
미래불인 미륵보살은 대부분 전각 밖에 모신다.
약사여래상
약사여래는 질병치료, 수명연장, 재난소멸 등을 구족시키고자하는 부처로 왼손에 약병이나 약상자, 또는 보주(寶珠)를 들고 있으며, 협시로는 월광보살과 일광보살이다.
보살상(菩薩像)
관세음보살상
보살상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출가하기 전의 모습이다. 보살상은 보관(모자)을 쓰고(지장보살은 예외로 스님머리에 두건을 둘렀음), 천의를 입고, 목걸이 등 화려한 장신구를 갖추고 있다. 대승불교의 꽃인 관세음보살은 보관에 아미타불상을 모시고 있으며, 왼손에는 연꽃 가지나 연꽃 봉우리, 정병(淨甁)을 들고 있으며, 더러는 천수천안(千手千眼)의 모습을 하기도 한다. 자비를 상징한다.
문수보살상
왼손에 연꽃을 들고 사자를 타고 있다. 지혜를 상징한다.
보현보살상
흰코끼리를 타거나 연화대에 올라 서 있는 모습을 하며, 실행을 상징하는 보살이다.
지장보살
삭발한 스님머리 모양에 두건을 둘렀으며, 육환장을 들고 있는데 육환장 꼭대기에는 아미타불의 화현을 모시고 있다. 지옥 중생을 구제하는 일을 사명으로 하고 있다.
사물(四物)
사찰 경내에는 사물이 있다. 사물은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말한다. 범종은 땅 속에 있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부지런히 자기 일에 정진하라고 28번 타종하며, 저녁에는 하루를 반성하면서 휴식을 취하라고 33번을 타종한다. 법고는 지상(地上)에서 살아가는 중생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하여 친다. 법고를 울릴 때는 마음심자(心)를 그리며 두드린다. 목어는 나무를 물고기 모양으로 깎아 만든 것으로 물 속에 사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또 목어는 물고기가 잠잘 때도 눈을 뜨고 있듯이 항상 깨어 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운판은 구름 모양의 쇠로 만든 판으로 하늘에서 날아다니며 살아가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사찰 내의 시설을 알아보았다. 여기에 소개한 시설은 표준일 뿐 우리나라 사찰 마다 모두 이와 같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사찰을 방문했을 때 아무 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나 하나 잘되기를 빌고, 내 가족 무사하고, 돈 잘 벌고, 승진 잘 할 수 있도록 기도만 하는 것은 잘못이다. 시설을 하나하나 정확히 이해하고 그 시설이 가지고 있는 뜻을 바로 새겨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출 때 보다 더 큰 뜻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법당(法堂)의 구조
법당 안은 보통 상단, 중단, 하단으로 구분한다.
상단(上壇)
법당의 정면에 위치한 단으로 중앙에 불상을 모시고 보살상을 모신다. 그래서 불보살단 이라고도 하는데 불단이라고 한다.
중단(中壇)
호법신장을 모신 단으로 신장단(神將壇), 신중단(神衆壇)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제석천・사천왕・대범천 등과 같은 천상의 성중과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긴나라, 기루라, 마흐라가 등 팔부신장을 모신다.
하단(下壇, 영단-靈壇)
영가(靈駕)의 위패를 모신 단이다.
불교 회화[繪畵]
불교회화는 예술성 보다는 불교 이념을 얼마나 훌륭하게 표현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탱 화
탱화는 비단이나 삼베 등 천에 불상이나 보살의 모습을 그리거나 경전에 있는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벽 등에 걸 수 있게 만든 그림이다.
탱화의 종류는 쓰임에 따라 신단・중단・하단 탱화로 구분되며, 석가모니불・아미타불・비로자나불・약사불 탱화가 있다.
벽 화
대웅전 등 사찰 전각의 벽에 그린 그림을 말한다. 대개 부처님의 일생이나 불보살의 모습, 비천상, 조사스님의 일화, 심우도 등이 그려진다.
감로도(甘露圖)
조상이나 영혼을 숭배하는 신앙을 표현한 그림이다.
괘 불(掛佛)
법당 밖에서 불교예식을 행할 때, 즉 야단(野壇)에 걸어놓는 예배용 그림이다. 야외에서 괘불을 걸어놓고 행하는 법회나 의식을 괘불재(掛佛齋)라고 한다.
변상도(變相圖)
복잡한 불경의 내용을 간략하게 그림으로 표현하여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하여 그린 그림이다. 화엄경 변상도, 관경 변상도, 법화경 변상도, 지옥 변상도 등이 있다.
법 구(法具)
목 탁
의식을 집전할 때 주로 쓰이며, 대중에게 알림을 위한 신호음으로도 사용된다. 예를 들면, 목탁을 두 번 치면 공양시간이고, 세 번 치면 울력시간을 알리는 신호와 같다.
죽 비
선방(禪房) 등에서 수행자를 지도할 때 사용한다. 선방에서 입선・방선을 알리는 신호용, 졸음 등 마음이 흐트러진 수행자에게 경각을 일러주기 위하여 쓰인다. 주로 통대나무로 만든다.
발 우
발우는 석가모니부처님 당시부터 사용된 수행자의 밥그릇이다. 발우는 나무, 사기, 돌, 쇄, 흙 등으로 만드는데 그 만든 재료에 따라 이름이 각각 다르다. 발우는 크기가 다른 네 개가 하나의 세트를 이룬다. 밥, 국, 반찬, 물을 각각 다른 발우에 담아 공양한다.
요 령
요령은 법요식 등에 사용된다. 본래 밀교에서 사용하던 법구인데 북방에서 사용하다가 지금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염 주
염주는 부처님께 기도하거나 절을 하면서 참회할 때 그 수를 세기위하여 사용된다. 보통 108개로 되어있으며, 재료는 본래 보리수 열매로 만들었으나, 율무, 보석 등 다양한 재료가 사용된다.
절에서 갖추어야 할 올바른 예법(禮法)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절에서는 그에 맞는 예절을 지켜야 하며, 우리 불자들은 이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여 생활화 하여야 한다. 혹자는 절에 가기를 꺼리는데 이유는 예법을 잘 몰라서 서먹하여 먼발치로만 바라보고 접근을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음을 확인하였다. 이 글은 이와 같은 사람을 위하여 아주 초보적인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자 노력하였다. 잘 익혀서 자신 있게 절에, 불교에 접근하기를 기대한다.
합장(合掌)
합장은 글자 그대로 손바닥을 합친다는 의미이다. 이 예법은 불자들이 갖춰야할 가장 기본이 되는 예법으로서 제일 많이 사용된다. 합장하는 방법은 두 손을 짝 펴고 마주 붙인다. 이 때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가 벌어지면 안 된다. 특히 엄지와 새끼손가락이 벌어지기 쉬우므로 조심해야 한다. 그 다음 두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이고 마주 댄 손바닥의 밑 부분을 명치끝 부근에 갖다 대고서 허리를 굽힌다. 허리를 굽힐 때 머리만 까닥한다거나 어깨만 마지못해 숙이면 경솔하므로 허리를 깊숙이 굽혀야 한다. 두 손을 모아 마주하는 것은 마음을 모은다는 뜻이며,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로 합쳐진 한 생명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를 정리하면,
① 두 손바닥을 빈틈이 없도록 밀착한다.
② 두 손바닥의 대칭 손가락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맞대어 있어야 한다.
③ 특히 엄지와 새끼손가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④ 손가락을 벌리면 안 된다.
⑤ 합장한 손의 밑 부분(손목 부분)을 명치끝 부근에 댄다.
⑥ 두 팔꿈치는 양 겨드랑이에 밀착한다.
⑦ 수계식 때에는 장궤합장을 한다. 장궤합장은 합장한 상태에서 무릎을 바닥에 대고, 대퇴부를 세운상태를 말한다.
차수(叉手)
차수는 두 손을 교차한다는 뜻이다. 손에 힘을 주지 말고 오른손의 손바닥으로 왼손의 손등을 살며시 감싸 쥐는 자세이다. 그 반대도 가능하다. 잡은 손은 단전(배꼽 밑 5cm 부근) 위에 가볍게 얹는다. 차수는 오랜 법문을 들을 때와 같이 합장을 장시간 해야 할 경우에 힘이 들으므로 합장대신 하면 된다. 또 어른 앞에서 이야기를 할 때, 경내를 돌아다닐 때에 하며, 앉아 있을 때도 차수를 한다. 스님 앞에서 뒷짐을 지면 안 되며, 경내를 돌아다닐 때도 두 팔을 휘 젖고 다닌다거나 뒷짐을 지면 안 된다. 반드시 차수나 합장을 해야 한다.
반배(半拜)
불자는 부처님이나 불탑, 스님께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큰절을 올리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부득이 큰절을 하지 못할 곳에서는 반배를 하여야 한다. 반배는 합장을 하고 허리를 60 ~ 90도로 깊게 굽히는 자세를 말한다. 정리하면,
① 합장을 한 채 허리를 60~90도로 깊이 굽혀 절한다.
② 손끝이 위로 향하게 하고 합장한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
③ 몸과 손이 일체가 되어 함께 움직인다.
④ 앉아서 반배를 올릴 때는 꿇어앉은 자세를 취한다.
다음 경우와 같이 큰절을 올릴 수 없을 때는 반배를 올린다.
① 부도 앞을 지날 때는 반배로 삼배한다.
② 일주문, 4천왕문 등 각종 경배의 시설을 지날 때
③ 옥외의 불상이나, 불탑을 지날 때
④ 길에서 스님이나 법우를 만났을 때
⑤ 큰절을 할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절 할 때
⑥ 큰절을 하기전과 마친 다음에
⑦ 불전에 향, 꽃, 초 등 공양물을 올리기 전후
⑧ 법당에 들어선 후
⑨ 법당에서 나오면서 부처님께 절할 때
⑩ 음식을 먹기 전후와 경전을 읽기 전후
⑪ 야외 법회 때
⑫ 탱화나 벽화 등 불화를 대할 때
⑬ 법당 앞을 지날 때
⑭ 기타 예를 표하고자 하는 모든 경우에 가장 보편적으로 반배를 올린다.
큰절
큰절은 오체투지(五體投地)를 의미한다. 삼보에 예경을 올릴 때는 오체투지의 큰절을 올리는 것이 원칙이다. 오체투지는 양 팔꿈치, 양 무릎, 그리고 이마 등 신체의 다섯 곳이 땅에 닿도록 절을 하는 형태를 말한다. 이 예법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상대에게 존경심을 나타내 보임으로서 자신의 아만과 아애, 아견, 아치 등을 없애고 사물을 바로 보아 무득(無得)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그 목적이다.
큰절은 이와 같이 해야 한다.
① 차렷 자세로 합장을 하고 바로 선다.
② 반배를 한다.
③ 합장하고 선 자세에서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는다.
④ 엉덩이를 뒷 발꿈치에 붙이면서 양손을 땅에 댐과 동시에 발은 등이 땅에 닿도록 꿇어앉는다. 이 때 왼발의 발등이 오른발의 발바닥 위에 포개져서 ‘×’자가 되게 한다.
⑤ 두 손의 간격은 어깨넓이 만큼 벌리고 15도 정도 손끝이 안으로 오게 한다. 이마, 양 팔꿈치, 양 무릎 을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발뒤꿈치에 붙인다.
⑥ 양손을 뒤집어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하고서 귀높이까지 들어 올려 받드는 모습을 취한다. 이를 접 족례라고 하는데, 접족례는 엎드려 절하면서 부처님의 발을 받드는 것으로 마음을 다하여 부처님께 존경의 예를 표하는 것이다.
⑦ 손을 뒤집어 바닥에 대고 머리를 들면서 일어선다.
⑧ 일어나면서 합장한다.
⑨ 일어서서 처음 절할 때의 자세와 같이 합장한다.
☞절은 부처님께는 3배, 돌아가신 분에게는 2배 살아계신 분에게는 1배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절하는 방법은 몇 번을 하던 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되풀이 되나, 마지막 절을 할 때는 고두례라고 하 여 좀다르다. 고두례는 무수히 예경하고 싶은 마음의 아쉬움을 표하는 예법이다. 고두례는 3배, 7배, 108 배, 1080 배, 3000배를 하든 마지막 한 번만은 다음과 같이 한다.
⑩ 마지막 절을 했을 때 오체투지의 상태에서 잠시 손바닥을 뒤집어 귀 위까지 올린 다음 다시 오체투지 상태로 돌아간다.
⑪ 오체투지 한 상태에서 고개를 들고 두 손을 얼굴 앞에서 모아 합장한다. 이때 손끝이 약간 들리도록 하되, 머리 바깥쪽으로 나가지 않도록 한다. 그런 다음 손바닥과 이마를 바닥에 대고 일어선다.
⑫ 일어서서 처음 절할 때의 자세로 돌아간다.
절할 때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허리힘으로 절을 하지 말고 다리 힘으로 해야 하며, 일어설 때 발을 먼 저 바닥에 붙이고서 다리에 힘을 주어야 오래해도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절을 마친 다음에는 좌 복(기도할 때 쓰는 방석)을 조심스럽게 제 자리에 갖다 놓는다.
서 있을 때의 자세
부처님이나 스님 앞에 서 있을 때, 경내에서 서있을 때는 경건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때는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서 손은 합장이나 차수를 한다.
앉아 있을 때의 자세
불자가 앉아 있을 때는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를 취해야 한다.
결가부좌는
① 허리를 지면과 수직이 되게 꼿꼿이 편다.
②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 위에 발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올려놓고, 같은 방법으로 왼쪽 발을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발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올려놓는다.
③ 두 발이 같은 각도로 교차 되어야 한다.
④ 두 무릎은 방석과 밀착되어야 한다.
⑤ 두 발은 바짝 당겨 아래 배에 가까이 붙여야 한다.
⑥ 항문과 두 무릎이 삼각형을 이루며 바닥에 밀착되어야 한다.
⑦ 이 때 손은 오른손바닥위에 왼손 등이 포개지도록 하고(그 반대도 된다) 두 엄지손가락은 반원을 그리는모양으로 약간 닿은 듯한 자세를 취하고 단전에 댄다.
결가부좌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자세가 아니므로 보통 반가부좌를 취한다.
반가부좌는 결가부좌와 같은 자세에서
① 오른쪽 다리를 당겨 발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하되 왼발 넓적다리 위에 얹는다(항마좌). 반대로 왼쪽 다리를 당겨 오른쪽 다리를 당겨 오른쪽 다리위에 올려 놓아도 된다(길상좌).
② 이 때 발을 바꾸어도 좋다.
선(禪)을 할 때도 결가부좌, 또는 반가부좌를 하는 자세는 같다. 다만
① 혀를 웃니 입천장과 이 사이에 가볍게 붙이고, 입술은 살며시 다물고 약간 힘을 주어 가볍게 미소 짓는 형태를 취한다.
②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다(필히).
③ 귀와 어깨가 일직선이 되게 한다.
④ 눈은 실눈 형태를 취하고 시선은 가볍게 콧등에 두든지 아니면 1m전방에 둔다.
⑤ 호흡은 단전으로 한다.
꿇어앉은 자세
예경이나 축원을 할 때는 꿇어앉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다. 허리를 곧게 펴서 몸의 균형을 유지하고 몸이 좌우로 흔들리지 않게 한다.
① 절할 때와 같이 두 무릎을 꿇고 앉는다.
② 두 발을 ‘×’자와 같이 교차시키되 오른발을 밑에 두고 왼발을 오른발 위에 얻는다. 이 자세는 큰절할 때의 발 모양과 같다. 이 자세가 불편하면 바꾸어도 된다.
③ 합장을 한다.
장궤(長跪)와 우슬착지(右膝着地)
<장 궤>
장궤는 길게 꿇어앉는 다는 의미이다.
① 두 무릎으로 땅을 디딘다.
② 허벅지와 상체를 곧게 세운다.
③ 발등을 땅에서 떼고 발끝으로 땅을 버티는 자세를 취한다.
④ 합장을 한다.
<우슬착지>
우슬착지는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댄다는 의미이다.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발가락으로 지탱한다. 왼쪽 무릎은 기억 자와 같이 무릎을 세우고 발바닥은 땅에 댄다. 역시 손은 합장이다.
향을 올리는 방법
향을 올리는 것은 염심(染心), 즉 더러운 마음을 정심(淨心), 즉 깨끗한 마음으로 바꾸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정성스런 마음이 앞서야 한다. 향을 올리는 예법은
① 합장을 하고 향이 든 함 앞에 나아가 반배를 올린다.
② 두 손으로 향을 한개 집는다.
③ 향에 불을 붙인다. 이때 촛불을 이용하여 붙여도 된다.
④ 만약에 향에 불이 붙어 불꽃을 내면서 탈 경우 입으로 불어 끄거나 흔들어 끄지 말고 손이나, 손바람으로 조용히 끈다.
⑤ 불이 붙은 향을 두 손으로 받들어 머리 위까지 올린후 경건한 마음으로 예를 올린다.
⑥ 향로에 똑바로 꼽는다.
⑧ 반배를 올리고 나서 합장하고 뒷걸음으로 물러난다. 법당에서 걸을 때는 까치걸음으로 조심스럽게 걷는다.
촛불공양 방법
부처님 앞에 촛불을 공양하는 의미는 어둡고 껌껌한 무명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 중생이 부처님의 밝은 법을 내려 주십사 하는 원을 올리면서 자기 마음의 무명을 씻고자 하는데 그 뜻이 있다.
① 촛대 앞에 나아가 먼저 반배를 올린다.
② 성냥이나 라이터에 불을 일구어 두 손으로 받들어 초에 불을 붙인다.
③ 불을 붙인 후 합장한 채 뒷걸음으로 절할 장소를 찾는다.
④ 절을 올린다.
⑤ 절을 마치고서 촛불을 끄러 촛대 앞으로 간다.
⑥ 촛불을 끈다. 이때 다른 법우가 있을 때에는 불을 끄지 않는다.
⑦ 합장한 채로 법당을 나온다.
재보시(財布施)하는 요령
재보시는 현대 우리가 흔히 하는 현물이나 현금을 부처님 앞에 공양하는 보시를 말한다. 보시에는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바로 알고서 이를 남에게 교화하는 법 보시와, 자비를 베풀어 남의 마음을 불안이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는 무외보시(無畏布施), 물건을 공양하는 재보시가 있다. 재보시를 할 때는 현금으로 할 경우
① 현금, 또는 현금이 든 봉투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들어들고 보시함 앞에 간다. 부처님을 향하여 반배를 올린다.
② 보시함에 공손히 넣고 합장하고 반배를 올린 다음 합장한 채로 뒷걸음으로 물러나온다.
법당에서의 예절
경내에 들어서면 마음을 정갈하게 가져야 하며 보행 중에는 차수를 하고 스님을 만났을 때, 부처님이 계신 법당 앞을 지날 때는 반배를 올린다. 또 경내에 들어온 이상 어떤 볼일이 있어서 왔던 먼저 큰 법당(대웅전)에 들러 예를 올리고 다음 일을 보아야 한다.
① 큰 법당에 오르는 가운데 길은 큰스님과 스님께서 사용 하는 길이므로 일반 신도는 양쪽 옆 계단을 이용한다.
② 법당에 들어설 때도 같다. 가운데 문은 스님께서 이용하시는 문이므로 일반신도는 양 옆문을 이용해야 한다.
③ 법당 문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열고 들어간다. 들어갈 때는 부처님을 기준으로 오른쪽 문을 이 용할 때는 오른발을 먼저 들여놓고, 왼쪽 문을 이용할 때는 왼쪽 발을 먼저 들여 놓고 들어간다.
④ 들어서면서 상단 부처님을 향하여 반배를 올린다.
⑤ 합장을 한 채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 향, 초, 공양물을 올린다.
⑥ 합장을 한 채 뒷걸음으로 물러나서 부처님을 향해 3배, 또는 7배를 올린다. 마지막에는 고두례를 잊지 않는다.
⑦ 불단(上壇)에 예배를 올린 다음에는 신중단(神衆壇)으로 가서 같은 방법으로 예배한다. 그러나 복잡할 때에는 같은 자리에서 신중단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고 나서 3배를 올린다.
⑧ 같은 자리에서 하단(영가)쪽을 향하여 3배를 한다.
⑨ 향불과 촛불을 끈다. 촛불은 입으로 불어 끄지 말고 촛불 끄는 도구를 이용한다.
⑩ 합장한 채 뒷걸음으로 출입문으로 향한다.
⑪ 나올 때에는 등을 부처님께 보여서는 안 된다. 들어갈 때와는 반대 순서로 발을 밖으로 내딛고 나서 문을 소리 나지 않게 살며시 닫는다.
⑫ 법당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놔야 한 다. 정갈한 마음은 신발을 벗어놓는 자세에서부터 나타난다. 짐이 있을 대는 법당 밖에 놓고 들어가야 한다.
법 회(法會)
불교의식에는
① 부처님께 경배하는 예불의식과
② 부처님께 향, 초, 꽃, 성금 등 공양물을 올리는 헌공의식
③부처님을 공양하고 불법을 듣는 등 일체의 의식 법회의식이 있으며,
④ 돌아가신 분의 영혼이 극락에 태어나도록 기원하는 천도의식 등이 있다.
법회에 참가하는 사람은 복장을 단정히 갖추고 법회장에서는 법당에서의 예절을 그대로 지켜야 하며, 법회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부처님을 향하여 삼배를 올리고 자리에 앉는다. 법회를 진행하는 순서는 대한불교조계종에서 발간한 <통일법요집>이 있다. 법회의 성격에 따라 진행순서도 달리 하고 있다. 가장 보편적으로 행하여지는 순서를 알아보기로 한다. 여기에서도 형편에 따라 생략과 첨가가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① 법회 염송
법회 때 문답식으로 염송하는 것으로 법사의 주제로 선창하면 신도는 후창하는 식으로 진행한다. 선창을 신도 대표가 해도 된다.
② 집회가 - 모두가 합창한다.
③ 삼귀의 - 삼귀의 노래로 진행한다.
④ 찬불가 - 모두가 합창한다.
⑤ 예불
아침예불에는 다게를, 저녁예불 때는 오분향예를 올린다. 그리고 헌향진언과 칠정예를 한다.
⑥ 반야심경 독송
함께 독송 한다. 이때는 중단을 향하여야 한다.
⑦ 입정
법문을 듣기 전에 마음을 고르기 위하여 잠시 참선에 든다.
⑧ 청법가
청법가는 법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스님께 법문을 청하는 의례이다. 노래로 한다.
⑨ 설법
스님께서 법문을 하신다.
⑩ 정근 및 헌공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정성껏 마련한 보시 금전을 불전함에 넣는다.
⑪ 축원(발원문)
스님이 집행하나 각자 축원을 해도 된다. 불도는 기도를 할 때 단순히 복을 비는 것보다 자기 스스로가 어떻게 힘쓰겠다고 부처님께 약속하는 서원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⑫ 공지사항 전달
⑬ 사홍서원 - 모두 합창한다.
⑭ 산회-산회가를 합창하고, 사회자의 인사말로 끝난다.
불교 명절
절에 가서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는 일과 자기의 서원을 다지는 일은 늘 하여야 할 일이지만 다음의 날에는 신자라면 가급적 찾아보는 것이 올바른 예이다. 불가의 명절이라 할 수 있는 날이 있다.
① 부처니 오신 날 - 음력 4월 8일
② 출가재일 - 음력 2월 8일
③ 성도재일 - 음력 12월 8일
④ 열반재일 - 음력 2월 15일
⑤ 우람분재일(백중재일) - 음력 7월 15일
이 날은 불교의 어버이 날이라고 한다. 삼보에 공양을 올리며 그 공덕으로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상 분들, 그리고 살아계신 부모님의 명복을 비는 날이다.
⑥ 그 외에 매년 입춘 날의 입춘기도, 동짓날의 동지기기도, 매월 24일 관음재일, 매월18일 지장재일, 매월 1일에 예불과 법회, 매월15에 예불과 법회, 천도재, 방생법회 등이 있다.
요즘에는 음력을 기준으로 한 법회보다는 현대생활에 맞도록 일요일에 하는 일요법회, 가족법회 등이 성행하는 추세이다.
이상과 같이 불자가 갖추어야 할 예법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예의는 어느 특별한 날과 특정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생활 속에서 지켜져야 그 값어치가 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불자 모두의 서원이 이루어지기를 기원 드린다.
재가불자끼리의 예절
재가불자끼리는 00법우님, 00거사님, 00보살님 등으로 불러야 한다. 법명이 있으면 법명을 붙여 부르는 것이 예의이다. 법우끼리 길이나 절에서 만나면 합장 반배로 인사를 나누고 법회 등 부득이한 경우에는 목례를 나눈다.
제4장 불제자의 계율(戒律)
재가(在家) 불제자의 계율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네란자라 강가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 맨 먼저 교화한 상대는 네란자라 강가에서 함께 수행하였던 다섯 사문들이다. 이들을 찾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다섯 사문을 향하여 『이제부터는 내 성을 고오타마 라고 부르지 마라, 나를 여래(如來)라 불러라.』고 하시고는 중도와 사성제를 설법 하셨다.
이후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45년간을 인도북부 전역을 손수 방문하시어 설법을 베푸셨다. 이 과정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한 교단이 점점 커지면서 그때그때 제자들이 지켜야할 계율을 내리셨는데 비구는 250계이며, 비구니는 348계가 되었다. 계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현대의 헌법처럼 일시에 만든 것이 아니고, 45년 동안 비구와 비구니, 우바새와 우바이가 지켜야할 것을 하나하나 말씀하신 것을 입멸하신 후에 마하가섭 존자가 중심이 되어 500아라한이 모인, 소위 제1차 결집 때 정리한 것이다. 이때에 결의하기를 차후에는 절대 계를 추가하거나 제외 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계는 주체적이며 자율적인 면이 있고, 율은 타율적인 면이 있다. 그래서 계를 위반하였다고 하여 제재를 가하기는 어려우나 율을 위반하면 제재를 받게 된다.
여덟 가지 계(戒)
초기 경전인『아함경』에 의하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초기 설법에서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설하시는 자리에서 여덟 가지 계를 말씀하셨다.
『첫째 마음을 다하여 여래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며, 둘째 애욕을 버리고 갈등을 없애며, 셋째 살생과 도둑질, 음행을 저지르지 않고, 넷째 속이고 아첨하는 나뿐 말로 꾸미는 일을 하지 않으며, 다섯째 질투하고 욕심내어 남들이 믿지 않는 일은 하지 않으며, 여섯째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고, 고(苦)이며, 공(空)이고, 무아(無我)임을 생각하고, 일곱째 몸은 더럽고 냄새나며 깨끗하지 않음을 생각하고, 여덟째, 몸에 탐착하지 아니하고 마침내는 흙에 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라고 설법을 하셨다.
또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사람이 세속에서 함부로 탐욕을 즐기면 다섯 가지 소모되는 현상이 있다. 스스로 방종하므로 재산이 줄어들고, 몸을 위태롭게 하고, 죽을 때는 뉘우치게 되며, 추한 소문과 나뿐 이름이 널리 퍼지고, 죽은 뒤에는 삼악도에 떨어진다.』라고 하셨다.
계 행(戒行)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을 설하시면서 계를 가장 중시 하셨음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많은 지혜와 안정된 마음을 얻었다 하여도 마음과 행동이 바르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계행을 위해서는 바른 행동으로 즐거움을 삼으며, 조그마한 허물도 두려워하고, 감관(感官)을 다스려 바른 지혜를 갖추라고 가르치셨다. 계속하여, 산목숨을 죽이지 말고, 주지 않는 것은 갖지 않으며, 이성을 범하지 않고, 거친 말을 쓰지 않으며, 바른 생활을 해야 한다고 설하셨다.
『장부사문과경』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① 살생을 하지 않고 모든 생물을 가엾이 여기며 ② 주지 않는 물건을 갖지 않고 ③ 떳떳하지 못한 음행을 하지 않고 ④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만을 하며 ⑤ 이간질을 하지 않고 화합하고 친밀한 말을 좋아하며 ⑥ 거친 말을 하지 않고 누구나 들으면 기뻐하는 말을 하고 ⑦ 부질없는 말을 하지 않고 교법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라고 설하셨다.
계율은 스승이다.
『유교경』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말씀하기기를
『여러 비구들! 내가 열반에 들거든 계율 존중하기를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난 듯이 하고, 가난한 사람이 보물을 만난 듯이 하여야 한다. 계율은 그대들의 큰 스승이요 내가 세상에 더 살아 있더라도, 이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항상 몸을 바르게 갖고 계를 지키며 살아라. 세상의 나뿐 일에는 참여하지 않으며 주술(呪術)을 부리거나 선약(仙藥)을 만들지 말라. 권세 있는 사람과 사귀어 서민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자기 마음을 단정히 하여 바른 생각으로 남을 구제하라. 또 자기 허물을 숨기거나 이상한 행동으로 남을 혹하게 하지 말라. 음식, 의복, 침구, 의약 등 네 가지 공양의 분량을 알고 만족하게 여기며, 받은 공양거리를 쌓아두지 말아라.』고 하셨다.
보살의 열 가지 서원(誓願)
『대품반야 금강품』에서
『보살은 모든 법을 알고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큰마음을 낸다. 그 마음은 금강석처럼 굳기 때문에 반드시 열반에 들고 열반에 드는 사람 중에서도 으뜸이 된다. 그 큰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보살은 다음과 같은 열 가지 원을 세운다.
① 이 세상을 청청하게 정화 시킨다. ② 모든 존재의 모양에서 집착을 버리겠다. ③ 모든 중생과 마음을 같이 하겠다. ④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하겠다. ⑤ 모든 중생을 구제할 지라도 한 사람도 구제했다는 생각조차 가지지 않겠다. ⑥ 모든 법의 생멸이 없음을 깨닫겠다. ⑦ 밝은 지혜의 마음으로 육바라밀을 수행하겠다. ⑧ 지혜를 닦아 모든 법을 알겠다. ⑨ 모든 법이 공하여 모양이 없다는 것을 알겠다. ⑩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 실상을 깨닫겠다.
보살은 또 지옥 아귀의 괴로움에서 허덕이는 중생을 가엾이 여겨 그 괴로움을 대신 받는 큰마음을 일으킨다. 그래서 더러운 마음, 어리석은 마음, 자기 이익에만 만족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일으켜 법을 믿고, 법을 참고, 법을 받고, 법을 수행하여 공에 머물러 열반에 드는 사람 중에 으뜸이 된다. 이러한 보살을 마하살이라 한다.』라고 설법하셨다.
우리 불제자 모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이 열 가지 서원을 지니고 지켜야 하겠다.
보살의 열 가지 행(行)
『화엄경 10행품』에
불자 여러분! 보살의 행은 넓고 커서 법계처럼 헤아릴 수 없고, 허공처럼 끝이 없습니다. 보살에게는 삼세제불께서 말씀하신 열 가지 행이 있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행, 이롭게 하는 행, 어기지 않는 행, 굽히지 않는 행, 어리석음과 산란을 떠나는 행, 잘 나타나는 행, 집착 없는 행, 얻기 어려운 행, 법을 잘 설하는 행, 진실한 행입니다.
「즐거운 행」이란 보살은 평등한 마음으로 자기가 가진 물건을 남김없이 모든 중생에게 널리 베풉니다. 베풀고 나서 대가를 바라거나 아까워하거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롭게 하는 행」은 보살은 계율을 청정하게 가지므로 어떠한 감각의 대상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나는 모든 얽힘과 속박과 탐욕과 시끄러움을 버리고, 부처님께서 찬탄하신 평등한 정법을 얻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기지 않는 행」이란, 보살은 항상 참고 견디는 법을 쌓아 겸손하고 남을 공경하며, 해하지 않으며, 탐하거나 집착하지 아니하고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내가 중생에게 법을 설하여 나뿐 짖을 못하게 하리라, 즉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교만하고 아첨하는 마음을 끊어 부드럽고 화평하며, 참고 견디는 데에 항상 머물게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굽히지 않는 행」이란, 온갖 정진을 수행함이다. 즉 모든 번뇌를 끓고 마음을 평온히 하기 위하여 정진하는 것이다.
「어리석음과 산란을 떠나는 행」이란, 보살은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이 흩어 지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동안 바른 법을 들어 지혜를 깨뜨리지 않음이다.
「잘 나타내는 행」은, 보살은 행동과 말과 생각이 청정하여 얻은 것 없는 데에 머물러 얻을 수 있는 행동과 말과 생각을 보이는 것이다.
「집착이 없는 행」은,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한 생각 중에 무수한 불국토를 생각하고, 한 없이 많은 부처님 처소에 나아가 예배하고 공양하는 것이다.
「얻기 어려운 행」은, 보살은 항상 여래의 수승한 법을 좋아하고, 오로지 최상의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잠시도 보살의 큰 원을 버리지 않으며, 무량겁을 들고 보살도를 닦는 것이다.
「법을 잘 말하는 행」은, 보살은 모든 중생을 위하여 맑은 법의 못이 되어 바른 법을 지키고, 여래의 씨가 끊이지 않게 함이다.
끝으로, 「진실한 행」은, 보살은 진실하고, 참된 말을 성취하여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하는 대로 설법함이다.
재가신자(在家信者)의 오계(五戒)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최초의 재가신자인 야사(Yasa)의 아버지에게 「진리를 깨달으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올바른 가르침에 귀의 합니다. 가르침을 수행하는 승단에 귀의합니다」하고 삼귀의를 외게 한 다음 오계를 일러 주셨다.
첫째, 산목숨을 죽이지 마시오.
둘째, 주지 않는 것을 갖지 마시오.
셋째, 삿된 음행을 범하지 마시오.
넷째, 거짓말을 하지 마시오.
다섯째, 술을 마시지 마시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야사의 아버지에게 “지킬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야사의 아버지는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키겠습니다.”하고 맹서했다. 이것이 재가불자가 지켜야 할 5계이다.
또 다른 경전에 의하면,
『살아있는 것을 스스로 해쳐서는 안 된다. 또 다른 사람을 시켜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죽이는 것을 묵인해서도 안 된다. 세상에서 힘이 세거나 또 약하거나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해 폭력을 거두어야 한다.
다음으로 가르침을 들은 사람은 주지 않는 것을 어떠한 경우라도, 또 어디에 있든지 남의 것인 줄 알면서 그것을 갖지 마라. 또 다른 사람을 시켜 가지게 하거나, 다른 사람이 가지는 것을 묵인해서도 안 된다.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가져서는 안 된다.
슬기로운 사람은 음행(淫行)을 피해야 한다. 붉게 타오르는 불구덩이를 피하는 것처럼, 만약 불음(不淫)을 닦을 수 없다면 적어도 남의 아내를 범해서는 안 된다.
집회 장소에 있든 단체 가운데 있든 누구든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사람을 시켜 거짓말을 하게 해서도 안 된다. 다른 사람이 거짓말 하는 것을 묵인해서도 안 된다. 모든 허망한 말을 회피하라.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이 가르침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재가자는 다른 사람에게 술을 마시게 해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이 술 마시는 것을 묵인해서도 안 된다. 술은 끝내 사람을 취하게 하고 미치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숫타니파타)
사미십계(10戒)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출가 전에 얻은 아들 라훌라가 석가모니부처님 앞에 나타나 출가를 애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사리풋타를 불러 “라훌라에게 계를 일러 주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사리풋타는 라훌라의 머리를 깎아 가사를 입히고 나서 삼귀의를 세 번 외게 한 다음 사미십계를 일러 주셨다.
『첫째,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 걸어 다니고, 날아다니고, 기어 다니는 보잘 것 없는 곤충에 이르기까지 목숨이 있는 것은 무엇이건 내 손으로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거나, 죽이는 것을 보고 좋아하지 말라.
둘째, 훔치지 말라. 바늘 한 개, 풀 한 포기라 하여도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말라.
셋째, 음행을 하지 말라. 재가 불자는 삿된 음행을 금하나, 출가 신도는 음행을 모두 끊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음욕으로 몸을 망치고, 집안을 망치고, 자신의 인격을 망치는데 세속을 떠난 수행자가 어찌 음욕을 범할 것이냐?
넷째, 거짓말 하지 말라.
다섯째, 술 마시지 말라.
여섯째, 꽃과 향 등 화려함을 가까이 하지 말라.
일곱째, 노래하고 춤추며, 악기를 가까이 하지 말라.
여덟째, 높고 넓은 큰 평상에 앉지 말라.
아홉째, 제때 아니면 먹지 말라.
열째, 금・은 등 보석을 가지지 말라, 이것들은 도를 방해 한다.
열 가지 중한 계(10重大戒)
첫째, 중생을 죽이지 말라.
둘째,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말라.
셋째, 음행을 하지 말라.
넷째, 거짓말 하지 말라.
다섯째, 술을 팔지 말라,
여섯째,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일곱째,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비방하지 말라.
여덟째, 제 것을 아끼려고 남에게 욕하지 말라.
아홉째, 성내지 말고 참회를 잘 받아라.
열째,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
이것이 보살의 열 가지 계본(戒本)이다. 이 중 한 가지라도 범해서는 안 된다.
마흔 여덟 가지 계(48輕戒)
『불설범망경(佛說梵網經)』에 48계가 있다.
첫째, 스승과 벗을 공경하라. 스승과 벗을 보거든 공경하는 마음으로 일어나 맞고 문안해야 한다.
둘째, 술을 마시지 말라.
셋째, 고기를 먹지 말라.
넷째,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말라. 마늘, 파, 부츠, 달래와 같이 악취가 나는 채소는 먹으면 죄가 된다.
다섯째, 계를 범한 사람은 참회시켜라.
여섯째, 법사(法師)에게 공손하고, 법을 청하여라.
일곱째, 설법하는 곳을 찾아가 설법을 들어라.
여덟째, 대승법을 그릇되게 여기지 말라. 이교의 사견으로 만든 학설을 배우는 것은 죄가 된다.
아홉째, 환자를 잘 보살펴라. 보살이 환자를 보살피는 것은 으뜸가는 복 밭이다.
열째, 살생하는 도구를 가지고 있지 말라.
열한 번째, 국가의 사신이 되지 말라. 어떤 이익을 바라는 마음에서 국가의 사신이 되거나, 전쟁을 일으키면 죄가 된다.
열두째, 나뿐 마음으로 장사하지 말라.
열셋째, 비방하지 말라,
열넷째, 불을 놓지 말라.
열다섯째, 딴 법으로 교화하지 말라.
열여섯째, 이익을 탐내지 말고 바르게 가르치라.
열일곱째, 세력을 믿고 무엇을 얻으려 하지 말라.
열여덟째, 아는 것 없이 스승이 되지 말라.
열아홉째, 두 가지로 말하지 말라.
스무 번째, 산목숨을 놓아 주고, 죽게 된 것을 구제하라.
스물한 번째, 성내고 때려 원수 갚지 말라.
스물두 번째,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법문을 청하라.
스물세 번째, 교만한 생각으로 잘못 일러주지 말라.
스물네 번째, 여래의 가르침을 잘 따르라.
스물다섯 번째, 대중을 잘 통솔하라. 법사나 주지승이 되거든 다투는 대중을 화해시켜라.
스물여섯 번째, 혼자만 이양(利養)을 받지 말라.
스물일곱 번째, 따로 초대받지 말라.
스물여덟 번째, 스님들을 따로 초대하지 말라.
스물아홉 번째, 나뿐 업으로 살지 말라.
서른 번째, 재일(齋日 : 불공을 올리는 날)을 공경하라.
서른한 번째, 재난을 보거든 구해내라. 스님이나, 발심한 보살이 욕을 당하는 것을 보거든 자비한 마음으로 어떠한 방편을 써서라도 구해내야 한다.
서른두 번째, 중생이 손해 보지 않게 하라.
서른세 번째, 나뿐 짓을 보고, 듣지 말라.
서른네 번째, 잠시라도 마음을 놓지 말라. 불자는 계율을 금강석과 같이 알고 바다를 건너는 부낭같이 여기라.
서른다섯 번째, 원을 발하자.
서른여섯 번째, 서원을 세워라.
서른일곱 번째, 위험한 곳에 다니지 말라.
서른여덟 번째, 높고 낮은 차례를 어기지 말라.
서른아홉 번째, 복과 지혜를 닦게 하라.
마흔 번째, 계를 가려서 일러주지 말라. 남에게 계를 일러줄 때는 신분을 가리지 말고 누구나 받게 하라.일단 살인자는 제외한다.
마흔한 번째, 이익을 위하여 스승이 되지 말라.
마흔두 번째, 계 받지 않은 사람에게 포살(布薩)하지 말라.
마흔세 번째, 계 범할 생각을 내지 말라.
마흔네 번째, 경전에 공양하라.
마흔다섯 번째, 중생을 항상 교화하라.
마흔여섯 번째, 법답게 설법하라. 불자는 남을 교화할 때는 가엾은 마음을 가져야 하며, 대중 앞에서 법을 말할 때는 반듯이 높은 자리에 앉아 법답게 설법해야 할 것이다.
마흔일곱 번째, 옳지 못한 법으로 제한하지 말라.
마흔여덟 번째, 바른 법을 파괴하지 말라.
삼업(三業), 십계(十戒)
여러 계율을 종합하여 재가불자가 일상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계율을 요약하면 삼업10계(三業十戒)로 볼 수 있다. 이를 십계(十戒), 십선계(十善戒), 또는 십선업도(十善業道)라고도 한다.
신업(身業) - 몸으로 짓는 죄
① 살생(殺生) - 살생을 하지 말라
② 투도(偸盜) - 도둑질을 하지 말라.
③ 사음(邪淫) - 음행을 하지 말라.
구업(口業) - 입으로 짓는 죄
④ 망어(妄語) - 거짓말을 하지 말라.
⑤ 양설(兩舌) - 이랬다저랬다 말을 바꾸지 말라
⑥ 기어(綺語) - 말을 꾸며내지 말라.
⑦ 악구(惡口) - 남을 험하지 말라.
의업(意業) - 마음으로 짓는 죄
⑧ 탐(貪) - 탐하지 말라.
⑨ 진(瞋) - 성내거나, 남을 원망하지 말라.
⑩ 치(痴) -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말라.
앞의 말이 10악업(惡業)이며, 뒤에 풀어놓은 말이 10선업(善業)이다. 10선업은 10악업에 부정접두사인 불(不)자를 붙인 것이다.
살생을 하지 말라는 계는 단순히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뜻만이 아니고, 모든 생명을 존중하라는 의미가 크다. 우리들 인간만이 필요 이상으로 남의 생명을 마구 빼앗고 있다. 필요에 의하여 부득이한 경우에 최소로 허용된다 하여도 살생을 취미로 하는 경우와 남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은 삼가야 한다.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갖지 말라, 또는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는 계는 정당한 노력, 정당하게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면 내 것으로 하지 말라는 뜻이다. 부당하게 이윤을 취하고, 부정하게 돈과 재물을 취한다거나, 남을 이용하는 행위 등은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가 아니다. 사음을 하지 말라는 계는 재가불자는 부부간의 관계와 같이 정당한 관계는 허용하데, 부당하게 관계를 갖는 것을 금한다.
입으로 짓는 잘못은 한마디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남을 속여 자기의 이익을 취한다거나 남을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된다. 둘 사이에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을 하여 이간시킨다거나, 교묘하게 말을 꾸며 자기의 이익을 취하고 남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 공연히 남을 욕하는 마음을 금하여야 한다. 또 입을 가볍게 놀려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이 남에게 이롭지 못함을 알면서도 말을 옮기는 행위도 정당한 도덕심을 가진 자가 취할 바는 아니다.
마음으로 짓는 죄는 오욕을 탐하면 번뇌가 쌓여 괴롭게 되니 오욕을 끊어야하며 남이 나를 해롭게 한다 하여도 성내며 남을 험하지 않는 것이 현자의 태도이다. 마지막으로 치(癡)는 무명을 자초하여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번뇌에 쌓이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무명을 자초하는 행위라 하면 바른 수행을 통하여 우주와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는데 이를 게을리 하여 자기의 손바닥만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행동하다보니 가정과 직장, 이웃과 사회, 국가의 이익은 외면하는 어리석음에 놓이게 됨을 말한다. 즉 사견(邪見)에 빠져 사리(事理)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불제자 모두는 이 계를 익혀 지니어 실천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계를 어기면 죄가 되어 육도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제2편 공사상과 유식사상
제1장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통해서 본 공사상과 불교 이론
마하반야바라밀다 心經
觀自在菩薩 行深반야바라밀다時 照見五縕皆空 度一切苦厄 사리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相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受相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보리살타 依반야바라밀다故 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반야바라밀다故 得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知반야바라밀다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반야바라밀다呪 卽設呪曰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보디사바하.
고대 인도어로 된 부분은 한문표기하지 않았음.
반야심경의 현토(懸吐)
관자재의 보살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에 조견오온개공하야 도일체고액이니 사리자야 색불이공이요 공불이색일새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 수상행식도 역부여시니 사리자야 시제법공의 상이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이며 부증불감일새 시고로 공중에 무색이라 무수상행식이니 무안이비설신의요 무색성향미촉법이요 무안계요 내지 무의식계일새 무무명이라 역무무명진이며 내지 무노사라 역무노사진이며 무고집멸도니 무지라 역무득하야 이무소득일새 고로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니 고로 심무괘애요 무괘애고로 무유공포라 원리전도몽상하고 구경열반하나니 삼세제불도 의반야바라밀다고로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시니라 고지하라 반야바라밀다가 시대신주며 시대명주며 시무상주며 시무등등주니 능제일체고요 진실불허라 고로 설반야바라밀다주일새 즉설주왈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보디사바하라시니라.
원문은 한자로 표기하고 토를 단 것이나 편의상 모두 한글로 표기하였음.
반야심경의 불교사상사적 위치
『반야심경』은 공(空)사상을 대표하는 경전이다. 우리나라 조계종단에서는 『금강경』을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하고 『반야심경』을 예불할 때 봉송토록 하고 있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은 우리나라 불교의 상징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사상사는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지만 역사를 내려오면서 어떤 부분을 강조하였는가, 어떠한 경전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가에 따라 약간씩 그 교설의 초점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사상은 나름대로 하나의 근본 경전을 가지고 체계를 잡거나 여러 경전 가운데 중요하고 비슷한 사상들을 모아 하나의 사상으로 체계를 잡는 형식으로 자리를 잡아 왔다. 예를 들면 근본불교사상은 『아함경』을 위주로 하고, 반야 공(空)사상은『반야경』을, 유식사상은『해심밀경』『입능가경』『섭대승론』『성유식론』등을, 그리고 여래장사상은『여래장경』『열반경』등을, 밀교사상은 『대일경』『금강정경』을, 천태사상은『법화경』을, 화엄사상은 『화엄경』을, 정토사상은 『무량수경』『관무량수경』『아미타경』을 각각 그 사상의 근본 경전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사상과 경전이 직접적으로 동일하다고 할 수만은 없다는 뜻이다.
사상은 경전을 토대로 하여 핵심이 되는 경전의 가르침을 후대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사상과 중관 사상은 대승불교의 근본 경전인 『반야경』을 토대로 성립된 사상이다. 불교사상의 내용은 근본불교 사상의 경우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가르침을 제1결집 때 정리를 하였으나, 문자화 하지는 못하고 입에서 입으로 전승해 내려오다가 이후에 제자들이 문자화하였는데 이를 『아함경』이라 하여 그 근본 경전으로 삼고 있다.
부파불교 사상은 근본불교 사상에 나름대로 해석을 붙이거나 보다 심오하게 연구하여 세운 교학사상을 말한다. 이후 재가신자와 찬불승(讚佛僧)들이 중심이 되어 너무 현학적인 교학 연구에만 치중하는 부파불교 논사들을 소승(小乘)이라 폄하시키고,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 하여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이타적(利他的)인 교학사상을 성립시키게 되었는데 이것이 대승불교이다.
물론 이러한 대승불교 사상이 성립될 수 있었던 시점(기원 전후)은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이 대두되면서부터이다. 대승불교의 경전 중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경전으로 『반야경(般若經)』『화엄경(華嚴經)』『법화경(法華經)』『유마경(維摩經)』『무량수경(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모든 경전이 사상적 기반이 되며 대승불교의 선구적 역할을 한 경전이 바로 『반야경(般若經)』이다.
『반야경』이 없었다면 대승불교의 태동은 생각해 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반야경』은 사상사적으로 불교사의 커다란 축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총 640여 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을 가지고 있다. 이 방대한 『반야경』 속에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금강경(金剛經)』이나『반야심경(般若心經)』이 들어 있다.
『금강경』은『반야경』군의 앞부분에 속해 있으며『반야심경』은 뒷부분에 들어 있다. 이 두 경전은 640여 권이나 되는『반야경』핵심만을 간추려 요약한 경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반야심경』은 260자(字)라는 짧은 글로 『반야경』의 사상을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반야심경』이 비록 짧은 경전에 속한다고 해도 그 내용은 『반야경』의 깊은 속뜻을 모두 함축하고 있어 우리가 평생을 두고 공부한다 해도 그 이치를 제대로 깨닫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 하면 이 경전은 반야사상, 나아가 불교사상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을 공부하면서 불교의 중심이 되는 사상과 교리를 공부하게 될 것이다. 이 반야심경이 모든 사상을 함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야공(空)사상의 불교교리사적 위치
『반야심경』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공(空)사상이 나오게 된 교리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려면 부처님 당시의 근본불교(根本佛敎)까지 거슬러 살펴보아야 한다. 근본불교에서는 일체제법(一切諸法)을 오온(五蘊)과 십이처(十二處) 그리고 십팔계(十八界)로 설명하고 있다.34) 대표적인 것이 오온(五蘊)인데 오온에서는 제법을 정신과 물질로 분류한다. 자세히 말하면 물질을 색(色)이라 하여 지(地), 수(水), 화(火), 풍(風)으로 분류하며, 정신을 수(受), 상(相), 행(行), 식(識)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이렇게 분류하는 것은 물질과 정신이 여덟 가지로 나눈다고 하여 그 제각각의 요소에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온이 바로 무아(無我)임을 설명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방편(方便)이다.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를 비롯한 일체의 존재는 모두가 연기(緣起)하여 돌아가는 법이므로 고정되거나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
그런데 이후 부파불교로 오게 되면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비롯한 많은 부파(部派)에서는 일체의 존재를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이라 하여 75개의 요소로 분류하고 있으며 이 제각각의 요소에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보았다. 즉 연기하여 무상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 궁극의 실체는 항존(恒存)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이를 아공법유(我空法有)라 하여 나라는 존재는 무상하여 공이지만 나를 구성하는 물질적 정신적 모든 요소인 법체(法體)는 삼세에 걸쳐 항상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을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라고 한다. 이러한 부파불교, 특히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설에 대해 반대하며 부처님의 근본 교설인 연기 ․ 무아의 사상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바로 대승불교 『반야경』의 공(空)사상이다.
공사상에서는 아공(我空) 뿐 아니라 법공(法空)까지도 포함한 일체개공(一切皆空)의 공관(空觀)을 주장함으로서 일체의 존재는 그 하나하나의 요소까지도 모두 연기하는 존재로서 공하다는 부처님의 근본교설로 돌아가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대승반야경의 공사상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근본교설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며 부처님 열반 이후 한동안 현학적으로 흘렀으며 자칫 근본 사상과도 대치될 수 있었던 다양한 교설들을 바로잡고 파사(破邪)하여 다시금 부처님의 정법을 드러낼 수 있도록(顯正) 해 주어 불교교리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반야경의 공사상은 그대로 부처님의 연기(緣起), 무아사상(無我思想),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등의 근본 가르침의 내용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반야경의 핵심인 이 반야심경에서는 불교교리의 핵심사상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짧은 반야심경 경전 하나를 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은 더없이 밝고 훌륭한 마음공부의 텍스트가 될 것이다. 35)
반야심경의 해설(解說)
마하(摩訶)
마하는 산스크리트어 Maha의 음사로 한자로는 특별한 뜻이 없다. 그러므로 굳이 한자로 표기할 필요는 없다. 마하의 뜻은 크다, 많다, 뛰어나다는 의미로서 우리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미의 크고 많다는 개념을 훨씬 초월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마하는 절대적인 개념으로 우리들의 분별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크고, 다른 것보다 많고, 상대보다 뛰어나다는 정도의 개념이 아니라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으로 크고, 많다는 뜻이다.
마하를 크게 세 가지의 의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크다(大)의 의미로 우주, 허공, 삼천대천세계, 수미산36) 등을 부를 때 쓰는 공간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많다(多)로 팔만사천, 항하사(恒河沙), 미진수(微塵數)라는 불교 용어에서 지극히 많음을 표현하는 수식어로 양적인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불교 경전에서 팔만사천, 혹은 항하사 등의 비유가 나오면 그 말의 의미는 실제로 팔만 사천 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많다는 개념이다. 또 많다는 뜻으로 항하사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많다는 비유어 이다. 셋째는 초월하다, 뛰어나다, 탁월하다는 뜻으로 불변, 진실, 수승(殊勝)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처럼 마하의 의미는 감히 우리 범부의 눈으로, 자로 재듯이 재어 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처음 중국에 불경이 전해질 때, 그 뜻을 번역할 단어가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단어로 번역하면 의미가 변질될 것을 우려해 마하라는 말을 발음 그대로 옮긴 것이다. 괜히 기존에 있던 단어로 어설프게 표현하면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인하여 의미가 한정될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반야(般若)
반야(般若)라는 말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로 프라즈냐(prajna)라고 하며, 빠알리(pali)어로는 판냐(panna)라고 한다. 반야는 바로 빠알리어 판냐의 음역어로서 마하와 같이 그 발음만 따서 옮긴 또 다른 예이다. 이 또한 마하에서와 같이 반야라는 의미를 한자어로 옮기기에 적당한 단어가 없었으므로, 그 의미가 퇴색됨을 우려해 따로 번역하지 않고 반야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야 또한 우리 범부의 사량(思量)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라고 할 것이다. 반야를 굳이 번역한다면 지혜(智慧)37)라고 옮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지혜가 아니라 최고의 지혜, 깨달음에 이르신 부처님의 밝은 지혜를 의미한다. 지혜와 비슷한 단어로 지식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지식은 지혜와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우리들이 계산하고 암기하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극대화된 것이 지식 이라고 한다면, 지혜는 이러한 범부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생각하여 분별 함)을 초월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혜라고 하면 관조반야, 실상반야, 방편반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관조반야(觀照般若)다. 이것은 일체의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정견(正見)하는 지혜를 말한다. 제법(諸法)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고정된 생각 없이 비춰 보는 지혜를 말한다. 2,500여 년 전 고타마 싯다르타라가 오랜 수행 끝에 성취한 깨달음의 지혜가 바로 관조반야다. 싯다르타는 어떤 신(神)과도 같은 절대적 존재에게서 깨달음을 받은 것이 아니며, 누군가의 도움으로 깨닫게 된 것도 아니다. 오직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아 현실 세계의 모습을 여실히 깨달은 것이다. 이를 관조반야라 한다.
둘째는, 실상반야(實相般若)다. 실상반야는 제법의 실상 그 자체를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세계의 모습 그 자체이다. 여기에는 보는 자와 보여 지는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자가 보이는 현실 세계 우주와 하나가 될 때 이것이 바로 실상반야다. 이러한 실상반야를 우리가 올바로 깨달아 바르게 비추어 보게 되면 이것이 바로 관조반야(觀照般若)다. 우리가 흔히 일체의 모든 존재에 불성이 있고 법신 부처님이 두루 편만(遍滿)해 계신다고 할 때 이것은 실상반야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셋째는, 방편반야(方便般若)다. 이것은 문자반야(文字般若)라고도 하는데 실상반야와 관조반야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일체의 모든 경전을 의미한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반야는 아니지만, 반야지혜를 이끌어 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방편이 되는 것이므로 방편반야라고 한다. 이러한 문자반야, 즉 경전이 없다면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많은 혼란에 빠질 수 있다. 불법을 공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나침반과 같고, 뗏목과 같은 수단으로 쓰여 깨달음에 이르는 중요한 방편이 되므로 방편반야라고 한다. 이러한 세 종류의 반야는 부처님의 지혜인 깨달음의 실상반야에 이르기 위한 세 가지 단계라고도 할 수 있는데, 흔히 우리가 부처님의 지혜라고 일컫는 것은 진리의 당체(當體)인 실상반야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실상반야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단계를 밟아가야 한다. 먼저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경전을 읽고 공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방편반야, 문자반야다. 이렇게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나오는 것이 바로 방편반야의 지혜다. 방편38)반야로 공부한 뒤에는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그 실천이 바로 관조반야다.
싯다르타가 깨달아 부처님이 되신 것은 바로 관조반야에 의해서다. 이렇게 방편반야로 부처님의 법을 이해하고, 그 후 관조반야를 실천했을 때 나타나는 진리의 실상이 바로 실상반야다. 이 세 가지 반야는 불교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인 『신・해・행・증(信・解・行・證)』의 길과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신(信)이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믿는다는 것은 모든 불교 수행의 기본이 되는 밑거름이다.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고, 절을 하고, 매일 절에 나가 불공을 드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일체의 괴로운 경계를 방하착(放下着)하며 비우는 실천을 행하는 이들이 열심히 수행 정진함에도 불구하고 쉽게 포기하는 이유가 바로 믿음의 결여 때문이다. 믿음이 밑바탕이 되면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힘써 배워야 할 차례다. 이것이 바로 해(解), 즉 올바른 이해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을 올바로 이해하여야 실천 행이 뒤따라 올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실천 행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해에 대해서는 소홀히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수행은 열심히 하는 사람도 경전을 읽고 강의를 듣고 불법을 공부하는 것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듯 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부처님도 2,500년 전에 제자들을 교화하고 전법 하실 때, 법을 설함으로써 가르침을 전달하고, 깨달음에 이르게 하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굳은 믿음을 가지고<信>, 불법(佛法)을 배워 실천 수행을 하는 것이 행(行)이며, 이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증(證)이다. 증이란 작은 의미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수행을 하였을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크고 작은 깨달음을 의미한다.
반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문제에서부터 지금 이곳 우리의 사회에서 생겨나는 모든 문제 해결이 반야 속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인생살이의 자질구레한 문제에서부터 인간 개개인적인 문제, 사회, 환경, 정치, 경제, 노사문제 그리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문제 등 그 어떤 문제라도 반야의 지혜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반야의 지혜는 사회의 모든 현상을 선입견, 편견, 고정된 관념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안목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야는 부처님이나 출가 수행하는 스님들만이 얻을 수 있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지혜가 아니다. 누구나 수행을 통해서 바로 지금 이 곳에서 반야의 지혜를 구체적으로 획득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반야의 성취는 인생과 우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는 일이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행복을 성취하는 길이고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며 해탈을 성취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바라밀다(波羅蜜多)
바라밀다는 산스크리트어로 파라미타(Paramita)다. 그 뜻은 도피안(到彼岸) 등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자세하게는 바라는 저 언덕[피안] 이라는 뜻이고, 밀다는 건넌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그 뜻은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는 의미다. 이를 앞의 마하반야와 함께 번역하면 ‘크나큰 지혜로 피안의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는 뜻이 된다. 저 언덕이란 피안(彼岸)으로서 정토(淨土) ․ 불국토(佛國土)를 뜻하며,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 언덕이란 차안(此岸)으로서 우리가 사는 이곳 사바세계를 말하며 다른 말로 예토[穢土-더러운 땅], 번뇌의 세계라고도 부른다.
이 언덕과 저 언덕이 모두 내 한 마음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곳 저 곳 하여 나누어 놓은 듯하지만 실은 이 언덕은 어리석어 무명(無明)에 휩싸인 거짓 나이고, 저 언덕은 깨달아 밝아진 참 나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바라밀다의 뜻은 이 사바세계에서 저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거짓 나의 삶에서 참 나를 깨쳐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다시 말해 나의 삶[有我]에서 나 없음의 삶[無我]을 깨쳐가는 것이다. 예토라고 하면 흔히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말하는데 모든 것이 혼탁하고 오염되어 있는 탁한 세계를 말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몸[身]으로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청정하지 못한 음행을 하는 등의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입[口]으로는 온갖 거짓말과 이간질을 일삼고 삿된 분별심에 빠져 진실하지 못하여 꾸미는 말을 하며 거친 욕설 등을 일삼고 살아간다. 또 생각[意]으로는 탐욕에 빠져 오욕락을 즐기기 위하여 과다한 욕심을 부리고, 조그만 일에도 불끈 화를 내며 어리석은 삿된 사량심으로 온갖 악한 행위를 한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짓고, 탐・진・치(貪・瞋・痴) 삼독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오염된 이 땅을 사바세계[예토, 穢土]라 하여,『반야심경』에서는 이 언덕[차안, 此岸] 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 언덕[피안, 彼岸], 정토(淨土)란 어떤 세계일까? 정토란 우리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이 청정하여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이상세계(理想世界)를 말한다. 부처님의 세계, 열반 ․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우리들이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는 부처님께 우리의 힘들고 어려운 점을 이야기하여 잘 되게 해 달라고 빌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바라밀다! 즉 이 사바 예토에서 부처님의 저 세상으로 가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저 언덕으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일까? 바로 마하반야의 배를 타고 가야 한다. 큰 지혜의 배를 타야만 건너갈 수 있다. 그 배를 불가에서는 반야용선(般若龍船)으로 상징화하고 있다. 사십구재39)를 지낼 때 오색 띠가 달린 작은 배를 들고 봉송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배가 반야용선으로, 큰 지혜로 부처님의 세계에 영가를 데려다 줄 수 있는 배이다. 이 반야용선의 뱃머리에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타고 계신다. 우리가 가야할 부처님의 세계까지 길을 인도해 주시므로, 길을 인도하는 왕이라는 의미의 인로왕 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처럼 반야용선은 수많은 무명중생을 모두 태워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래서 큰 탈 것이란 뜻의 대승이라 한다. 반면 소승[작은 탈 것]의 배에는 많은 사람이 함께 탈 수 없고 오직 나 홀로 타고 갈 수밖에 없다. 세계에는 열 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한다. 이를 십법계(十法界)라 한다. 십법계는 우리들이 사는 인간계를 포함해 우리가 윤회하는 세계인 차안 ․ 예토[생사윤회의 경지]인 지옥・아귀・축생・인간・아수라・천상의 여섯 세계와 피안・정토[해탈열반의 경지]의 세계인 부처님의 세계가 있으며 차안인 이 언덕에서 피안인 저 언덕에 이르기 위하여 수행하고,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수행 과정에 있는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40)의 세계가 있다. 성문, 연각, 보살에 승(乘)을 붙인 이유는 반야용선을 타고[乘] 간다는 의미에서다. 성문이나 연각승은 소승의 수행방법이며, 보살승은 일체 중생을 함께 배에 태워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해 주는 대승의 수행상이다. 중생세계인 6도 윤회의 세계와, 보살 세계인 3승의 세계가 있고, 깨달음의 세계인 부처님의 세계가 있다. 이를 10법계(10法界)라 한다. 이렇게 이 언덕에서 저 언덕에 이르는 방법인 파라미타, 바라밀다에도 차이가 있다. 물론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바라밀다의 방법은 성문이나 연각이기 보다 도반과 중생들이 함께 가는 보살승이다.
이상에서처럼 육도 윤회의 중생세간에서 부처님의 세계로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볼 때 크게 성문 ․ 연각 ․ 보살의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중생의 근기(根器)에 따라서 저 언덕에 도달하는 방법도 또한 각각 다르다. 그렇듯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저 언덕으로 도달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방법상에도 갖가지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승의 수행, 소승의 수행하며 그런 분별이 있다 하더라도, 사실 모든 수행은 똑같은 하나이다. 내 공부가 되지 않고서는 남과 함께 갈 수 없으므로 소승이 될 때는 철저한 소승이 되어야 하고, 당장에 나보다 더 어렵고 힘겨운 상대가 있을 때는 조금 더디 가더라도 함께 나란히 걸어 볼 수 있는 대승의 보살심을 가져야 한다. 소승과 대승을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 혼자서 상구보리 할 때는 소승이 되고, 대중 속에서 하화중생 할 때는 대승이 된다.
수행 방법에는 참선(參禪)[간화선 등], 염불(念佛)[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을 염하는 것], 간경(看經)[금강경, 반야심경, 법화경, 화엄경, 아함경 등을 봉송하는 것], 주력(呪力)[관세음보살본심미묘진언, 수능엄신주, 신묘장구대다라니 등], 불사(佛事)[경전불사, 은전불사, 비전불사 등], 절[108배, 삼천 배 등], 기도[관음기도, 지장기도, 미타기도, 산신기도, 용왕기도 등], 지관(止觀)법[사마디, 위빠사나 등], 방하착 등 숫자로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의 많은 수행방법이 있다.41)
심 경(心 經)
심경은 핵심이 되는 경전이란 뜻인데 마음의 경, 진수(眞髓)의 경, 심장(心臟)의 경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심경이라고 하면 흔히 마음의 경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물론 심(心)을 마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불교에서는 진수(眞髓)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반야심경은 모든 경전 중에서 일체의 요의(要意)를 모은 것으로 핵심이 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반야심경』은 640여 권이나 되는 방대한 반야부 경전 중 하나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단순히 반야부 경전의 하나이기보다는 반야부 경전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가르침만을 모아 간결하게 정리해 놓은 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으로 심경(心經)이라고 한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전체 제목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위대한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길을 설한 핵심 되는 경전」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혜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경의 제목에서 가장 중심 되는 말은 바로 반야(般若)이다.
지혜! 이것이야말로 괴로움 속에서 생사 윤회하는 우리들을 피안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만 지혜반야 라고 하지 않고, 위대하고 크나큰 지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마하반야라고 한다. 바로 이 마하반야를 통해서 작게는 우리에게 당면한 일체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고 나아가 깨달음의 저 언덕에 오를 수 있게 된다.
2,500여 년 전(前) 저 인도의 부다가야 네란자라 강변의 보리수 아래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이루신 것도 바로 마하반야라는 대지혜를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며 우리들 무명 중생들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도 바로 이 마하반야라는 열쇠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마하반야를 통해서 일체 괴로움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가 바로 바라밀다이다. 요컨대 마하반야를 통해 바라밀다에 이르게 하는 소중하고도 핵심 되는 가르침이 바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다.
관자재(觀自在)
관자재는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이다. 관세음보살은 서방정토에 게신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불교를 잘 모르는 분들도 관세음보살이라는 명칭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예로부터 불교를 믿지 않는 분들도 어렵고 힘들 때면 의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명호(名號)를 부르는 것이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습관이 되어 왔다. 관세음보살이라는 명호의 의미는 세간의 음성을 관하는 보살이라는 뜻으로 사바세계의 중생이 괴로움에 처해 있을 때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일심으로 정성을 다하여 부르면 그 음성을 듣고 곧 구제해 주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보살사상은 대승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며 관세음보살은 보살의 꽃이다.
『법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는 관세음보살이라 부르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은 어떠한 인연으로 이름을 관세음보살이라 하십니까?” 부처님께서는 무진의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약 무량백천만억 중생들이 여러 가지 괴로움을 받게 될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 명호를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곧 그 음성을 관하고 모든 괴로움에서 해탈케 하시느니라.”』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이 과연 어떤 분이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부르고 신앙하고 있는 것일까? 천수경(千手經)에서의 관세음보살이 반야심경에서는 바로 관자재보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두 이름 모두 범어 「아바로키테 스바라 보디사트바」를 번역한 것이다. 이것이 중국에 들어와 번역되면서 처음에는 관세음보살로 불리었으나 이후에 관자재보살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세간의 음성을 관한다(관세음)는 의미는 ‘나’라는 주관과 객관계의 일체의 경계를 온전히 바로 관함을 말하며 보살이라고 함은 우리 내면의 본래자리 깨달음 보살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이라고 염불하는 의미는 나와 내 밖의 일체 경계를 관하여 본래면목 깨침의 보살자리에 온전히 방하착 하고 경계를 공양 올린다는 자기의지의 표현이다. 우리가 관세음보살 염불수행을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관세음보살 염불은 나를 비롯한 일체 세간의 온갖 경계를 바로 관하고 그러한 모든 경계를 녹이고자 온전히 자기내면의 보살자리인 참나 본래자리에 놓을 수 있도록 하는 밝은 방편 수행이다. 세간의 음성인 자신과 바깥 경계를 온전히 관하고 녹여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염불을 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의 가피에 관해 관음경에서는,
『큰물에 떠내려가더라도 그 이름을 염하면 곧 얕은 곳을 얻게 되며 또, 도적으로부터 해를 입게 되었을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염하면 그들이 가진 칼과 무기가 조각조각 부서져서 벗어나게 되느니라. 또, 어떤 사람이 수갑과 고랑과 칼과 사슬이 그 몸을 속박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염하면 모두 부서지고 끊어져서 벗어나게 되느니라. 어떤 중생이 음욕이 많더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문득 음욕을 여의게 되고, 만일 성내는 마음이 많더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문득 성내는 마음이 없어지며 만일 어리석은 마음이 많더라도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문득 어리석음을 여의게 되느니라.』
명호를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였을 때 이렇게 되는 도리가 있다. 다만 이러한 경전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형상을 가진 관세음보살님께서 하얀 선녀복을 입고 나타나셔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고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그런 형상을 가진 분으로서 관세음보살님을 불러서는 안 된다. 관세음보살이란 내면에 있는 참 나를 의미한다. 다만 가만히 내면 깊은 곳에 숨어만 있는 참나 주인공이 아닌 적극적으로 세간의 음성을 관하여 온갖 경계를 밝게 녹여줄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 참 성품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관세음보살을 염불한다 함은 “관세음보살님 어서 오셔서 내 괴로움 좀 가져가 주세요.”하는 의미가 아니라, 내 스스로 세간의 온갖 경계42)를 관하여 내면의 본래면목 보살자리에 공양 올려 밝게 닦아가겠다는 자기 수행의 철저한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며, 내 안의 관세음보살님을 굳게 믿어 내면의 주장자를 밝게 세우겠다는 철저한 서원을 말한다. 누구나 염불하라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자력 수행력과 보리심이 없고서는 결코 아무리 좋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염불수행이다.
보 살(菩 薩)
보살은 빠알리어 Bodhisatva의 음역이며,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보살이란 이름은 우리나라에서 시대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 왔으나, 일반적으로 “3보(3寶)에 귀의 하고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실현하기 위하여 부단히 힘쓰는 수행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구보리란 지혜(智慧)를 구하는 자세이며, 하화중생은 자비(慈悲)를 베푸는 자세라고 할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지혜를 얻어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 수행의 목표였으나, 대승불교에서는 자비를 베풀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힘쓰는 수행덕목이 하나 더 추가 되었다. 이러한 모습이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보살의 또 다른 의미는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등과 같은 보살님들은 이미 지혜를 충분히 닦아서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 있으나, 이를 거부하고 많은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자신의 궁극의 목적인 열반에 드는 것을 연기하겠다는 보살의 서원(誓願)에 특별한 의미를 두신 분들이다. 이러한 보살사상이 대승불교에서 나타나게 된 원인은 대승불교가 재가신자의 대거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 졌으며, 논리연구에만 치우쳐 현실성을 외면한 아비달마불교의 모순점을 시정하기 위하여 현실성을 반영한 현세이익(現世利益)적인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보살님들은 우리가 현실세계를 살아가면서 겪는 각종 고통을 간절한 마음으로 염(念)하면 해결해 주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보살은 대자비의 관세음보살이 있고, 대지혜의 문수보살이 있으며, 대행 보현보살과 대원 지장보살 등이 있다.
관세음보살은 우리에게 가장 널리, 친숙하게 알려진 보살로서 관자재보살 등으로 불린다. 이 보살은 우리가 도움을 간절히 염하면 언제 어디에서 라도 나타나 고통을 덜어주는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보관(寶冠, 머리에 쓴 관)에 아미타부처님의 상을 갖추고 있다. 또 손과 눈이 천개나 되는 천안천수(天眼千手)로 중생의 고통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고 하여 많은 손이 있는 것으로 상을 짓기도 하며, 얼굴이 11개나 되는 자비의 상징으로 11면 관음상 등이 있다. 관세음보살은 대세지보살과 함께 아미타부처님의 협시보살43)이다.
문수보살은 묘음보살(妙音菩薩)이라고도 하는데 지혜가 뛰어나 부처님의 여러 가지 덕 중에서 지식과 지혜와 깨달음을 관장한다. 보현보살과 함께 석가모니부처님과 비로자나부처님의 협시보살이다.
보현보살은 보살행을 실천하게 하는 힘이 강하며, 이치와 명상[禪定]을 관장하고 있다. 이 분은 흰 코끼리를 타고 석가모니부처님의 오른쪽에서 보필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보현보살은 중생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졌으므로 연명보살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은 억압 받는 자, 죽어 가는 자, 지옥으로 떨어지는 벌을 받게 된 모든 사자(死者)의 영혼을 다 구제할 때까지 자신의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실천하고 있다. 그는 석가모니부처님께 사악한 자기 어머니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기도하기도 했었다. 그러한 인연으로 인해서 지장보살은 효행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모습은 삭발한 승려의 모습에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으며, 한 손에는 지옥의 문이 열리도록 하는 힘을 지닌 석장(錫杖)을 쥐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여의보주(如意寶珠)를 들고 있다.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에서 널리 신앙의 대상으로 숭앙받고 있는 미륵보살이 있다. 삼세불(三世佛)로 연등불과 같은 과거불이 있으며, 현재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광명으로 중생세계가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부처님의 광명은 그분이 입멸하신 후로 56억 7천만년이 지나면 불력이 다하게 된다. 이 때에는 현재는 제석천에서 수도하고 있는 미륵보살이 깨달음을 얻어 이 세상에 광명을 밝히게 된다. 그러니 미륵은 현재는 보살의 신분으로 대기하고 있는 미래부처님 이시다.
그 외에 우리나리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집금강보살이 있고, 대세지보살이 있으며, 일광보살, 월광보살 등이 있다.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은 약사여래의 협시보살이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관자재보살[이후부터는 관세음보살 이라고 표현]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보고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났다는 이것이야말로 반야심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뽑아놓은 부분이다. 나머지 뒷부분은 이 사실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부분은 관세음보살이 일체의 고통과 액난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장면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실천함으로써 오온이 모두 공(空)한 것임을 보았고, 그로 인해 일체의 고액(苦厄,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의 주요 실천 덕목이 바로 반야바라밀다라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를 실천함에 있어 단순한 실천이 아니라 완벽하고도 치우침 없이 그리고 온전히 실천하는 것이 바로 ‘깊은’ 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다. 그렇다면 대승보살의 주요한 수행 덕목인 반야바라밀다 라는 것은 어떠한 수행인가. 반야바라밀이란 말 그대로 해석한다면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르는 깊고도 뛰어난 지혜를 의미한다. 이는 공의 도리인 연기, 무아, 무자성, 중도의 이치를 올바로 조견(照見)하여 진리를 밝게 깨칠 수 있는 지혜를 의미한다. 공은 곧 연기이며 중도의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공, 연기, 무아, 중도, 무자성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실천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만법이 공이고 연기된 존재이어서 어떤 것에도 집착할 바가 없으므로 무집착(無執着)이며, 어떤 대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고 하는 분별을 지을 필요가 없으므로 무분별(無分別)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며 무소유(無所有)의 가르침이 여실히 녹아 있음을 바로 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무집착, 무분별, 무소득, 무소유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의 삶은 온갖 대상에 집착(執着)하고 머리 속으로 사량(思量)하고 분별하며 보다 많이 얻으려는 소유의 관념에 노예가 되어 있다. 이는 바로 공의 이치, 연기의 도리를 모르는 데에서 오는 어리석음이 가져온 결과이다. 그러므로 공 ․ 연기의 이치를 올바로 비추어 봄[조견]으로써 우리는 확연한 지혜[반야]를 얻을 수 있고, 그로 인해서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생사가 없는 열반의 저 언덕에 오를 수 있게 되는 것[바라밀다]이다.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이다. 반야바라밀다 실천 수행의 핵심은 무집착(無執着), 무분별(無分別)이다. 바로 여기에서 반야바라밀다 수행의 요점을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떤 것에도 집착할 바가 없다는 공의 도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 수행, 마음공부는 집착을 놓는 방향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 핵심적인 실천방법이 바로 방하착(放下着)이다. 일체의 집착을 놓는 것이야말로 공의 세계, 연기의 세계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는 수행이다.
경전에서는 반야바라밀다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을 여섯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다. 이 육바라밀이야말로 반야지혜를 닦아나가는 수행자가 공의 실상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실천의 지름길이다. 소승에서 8정도라면 대승에서는 6바라밀이다. 우리는 이 모두를 실천하여 바라밀다를 성취해야 한다. 육바라밀에서 바라밀은 바라밀다와 같은 의미로서 범어 파라미타를 한역(漢譯)한 것이다.
육바라밀이란 보시(布施)바라밀, 지계(持戒)바라밀, 인욕(忍辱)바라밀, 선정(禪定)바라밀, 정진(精進)바라밀, 반야(般若, 智慧)바라밀을 말하는데 마지막의 반야바라밀은 앞의 다섯 가지 바라밀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육바라밀의 실천을 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대품반야경』에서,
『비유하건데 나[아, 我]라는 소견 가운데에 예순 두 가지 소견을 낱낱이 포섭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보리야 이 깊은 반야바라밀은 모든 바라밀을 낱낱이 포섭하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명근(命根)이 없어지는 까닭에 다른 감각기관이 전부 따라서 없어짐과 같다.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모든 바라밀이 전부 따르는 것이다.』
이처럼 『대품반야경』에서는 반야바라밀이 일체 모든 바라밀을 모두 포섭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 또한 관세음보살처럼 반야바라밀을 행함으로써 올바른 지혜가 열리고,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바라밀은 육바라밀이라 하여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지혜]바라밀을 의미 하지만 화엄경에서는 방편(方便), 원(願), 역(力), 지(智)바라밀을 추가하여 십바라밀이라 하고 있다. 한편 구산스님은 월요일엔 보시바라밀, 화요일엔 지계바라밀, 수요일엔 인욕, 목요일엔 정진, 금요일엔 선정, 토요일에는 반야바라밀을, 그리고 일요일에는 자비바라밀아라 하여 칠바라밀을 가르치기도 한다.
육바라밀(六波羅蜜)
바라밀이라고 하면 우리는 쉽게 육바라밀을 떠올릴 수 있다. 육바라밀이란 보살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하여 수행하고 닦아 가는 여섯 가지 실천 수행방법을 말한다. 저 언덕에 도달하는 도구인 깨달음을 얻기 위한 여섯 가지의 주요한 수행 방법이다.
육바라밀 1 - 보시바라밀 수행
보시(布施)란 ‘베풀다.’라는 뜻이다. 베풂의 수행을 통해서 괴로움의 이 언덕에서 피안의 저 언덕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보시바라밀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한 베품과 보시바라밀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베품 이라는 것은 그저 남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의미이므로 여기에는 보답을 바라거나, 과보(果報)를 바라는 마음이 남을 수 있다. 베풀기 싫은데 억지로 베풀 수도 있다. 그러나 보시바라밀은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상이 남아있지 않은 맑고 청정한 베품인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의미한다. 무주상보시란 상(相)에 머물지 않고 하는 보시를 말한다. 즉 보시를 하고 내가 했다는 상이 남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무주상보시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을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고 한다. 이는 보시하는 사람[施者], 보시하는 물건[施物], 그리고 보시를 받는 사람[受者]의 셋을 말하며 이 셋이 모두 청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보시를 했다는 생각을 비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나다’ 하는 상이 껴들기 때문에 작은 것을 베풀고도 내가 누구에게 얼마의 보시를 했다는 상에 집착하게 된다. 이는 결국 보시를 하면서도 내가라는 상이 그 근본이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보시는 유주상보시(有住相布施)이다. 우리는 남과의 관계 뿐 아니라 부부, 부모, 자식, 형제, 친구 간에도 이러한 상을 갖게 된다.
보시의 종류에는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가 있다. 재시는 돈이나 재물 등으로 하는 물질적인 보시이며, 법시는 부처님 가르침을 펴서 선근(善根)을 자라게 하는 정신적 보시이다. 금강경에서는 이 보시야 말로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이 위대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외시는 계를 지켜서 남을 침해하지 아니하며, 두려움이나 근심 걱정을 없애주고, 위태로울 때 목숨을 구하거나 병을 고쳐주고, 곤경을 모면하게 해주는 보시를 말한다. 보시에는 베푸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무주상보시를 정시(淨施)라 하고, 보시함으로서 복 받기를 바라거나 대가를 기대하면서 하는 보시를 부정시(不淨施)라고 한다. 우리는 이룬 다음에는 반드시 회향(回向)할 줄 알라야 한다.44)
육바라밀 2 - 지계바라밀 수행
지계(持戒)는 계율을 지키는 수행을 말한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말과 뜻과 행동을 절제할 줄 아는 것이다. 지계는 우리가 부처님 법을 공부하고 수행하는 데 울타리와도 같은 역할을 하기에 아름다운 구속, 성스러운 구속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치 수풀이 우거진 밀림에서 온갖 거친 짐승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치듯이 우리가 정진하면서 계는 주위의 온갖 거친 경계, 온갖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잘 보호해 준다. 지계바라밀은 모든 수행자들을 오직 정진에 몰두할 수 있도록 온갖 유혹을 제어해 주고 정과 혜를 증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계를 지키지 않고 정(定)에 들거나, 밝은 지혜(慧)가 생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삼학(三學)에서 계(戒)를 먼저 언급한 연후에 정(定)과 혜(慧)를 얻을 수 있다고 한 바도 그러한 연유인 것이다. 계는 다만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 규정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행하라는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의 가르침이다. 또한 나만 혼자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함께 지킬 수 있도록 적극 권장하는 이타정신이 깃들어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계에는 출가나 재가의 구분 없이 지켜야 할 윤리적이고도 실천적인 것이 있으니 바로 십선계(十善戒)이다. 이것은 신(身), 구(口), 의(意)로 우리가 지을 수 있는 일체의 악업을 짓지 않도록 하며 적극적으로 몸과 입과 생각을 청정히 하여 복덕을 지을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우리가 짓는 업에는 몸으로 짓는 세 가지, 말로 짓는 네 가지,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가 있다. 이것은 본래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십업설(十業說)로 잘 알려진 교설인데 십선업을 적극적으로 지키는 것은 몸과 입과 생각을 삿되게 물들지 않게 하여 수행자를 잘 단속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 십업(十業)을 자세히 나누어 보면 신업(身業)에는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의 세 가지가, 그리고 구업(口業)에는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의 네 가지가 있고, 의업(意業)에는 탐(貪), 진(瞋), 치(癡)의 세 가지가 있다.
신업(身業)
① 살생(殺生) - 산목숨을 죽이는 것
살생을 하면 내세에 인간으로 태어나도 수명이 단축된다고 한다. 소극적으로는 불살생해야 하며 적극적으로는 생명을 살려주는 방생(放生)을 하면서 자비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살생계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업을 무조건 악업, 선업이라고 단정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업을 지었는가에 따라 살생, 도둑질, 거짓말 등도 바르게 쓰일 수가 있다. 로스탕의 자전적 명상록에 보면 “한 사람을 죽이면 그는 살인자이다. 수백만 명을 죽이면 그는 정복자이다. 모든 사람을 죽이면 그는 신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보살은 그저 놓아두면 모든 중생을 죽일 것 같은 살인자를 일체 중생을 구하려는 마음에서 죽여 줄 수도 있는 것이다.
② 투도(偸盜) - 다른 사람이 주지 않은 물건을 취하는 것
도둑질을 하면 내세에 인간으로 태어나도 재물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소극적으로는 불투도 할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부지런히 힘쓰고 노력하는 근면(勤勉)한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보시바라밀의 실천에 힘써야 한다. 이렇게 실천하는 이는 무한한 복덕을 짓는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불투도계이다.
③ 사음(邪淫) - 청정치 못한 남녀관계를 갖는 것
음행을 저지르면 내세에는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자기 아내와 남편이 남의 유혹을 받아 삿된 음행을 하게 된다고 한다. 소극적으로는 불사음하며 적극적으로는 올바른 이성관계를 가지고 정음(正淫)하는 청정한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구 업(口業)
④ 망어(妄語) - 거짓말하는 것
거짓말을 하면 남의 놀림을 받는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 소극적으로는 불망어하며, 적극적으로는 바른 말, 정어(正語)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부처님 경전과 조사 어록 등을 배우고 선설(宣說)하면서 항상 진실한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⑤ 양설(兩舌) - 이간질하는 것, 간사스런 말.
이간질하는 말을 하면 절친한 친구에게 배반을 당하는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 소극적으로는 불양설(不兩說) 하고, 적극적으로는 허망하지 않은 진실 된 말인 진어(眞語)를 해야 한다. 또한 서로를 화합시켜 “모두가 하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주위를 장엄해야 한다.
⑥ 악구(惡口) - 거친 말 하는 것, 욕하는 것.
거친 욕설을 많이 하면 다음 생에 추한 음성을 갖게 된다고 한다. 소극적으로는 불악구하고 적극적으로는 사랑스러운 말 애어(愛語)를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선한 행위에 대하여 따뜻한 마음으로 칭찬하고, 악을 행하는 이에게는 올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충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⑦ 기어(綺語) - 꾸미는 말하는 것.
꾸미는 말을 많이 하면 신용이 없어진다. 소극적으로는 불기어 해야 하고, 적극적으로는 실다운 말을 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정직하고 진실하게 대해야 한다.
의 업(意業)
⑧ 탐(貪) - 탐욕스러운 마음을 내는 것.
탐욕이 많으면 욕심내는 마음이 점점 더 치성하여 탐심이 늘어간다. 이러한 사람은 다음 생에 아귀지옥에 태어난다고 한다. 소극적으로는 불탐이나 적극적으로는 널리 무주상보시를 베풀어야 한다. “내 것이다.”라는 아상을 놓고 모든 것은 잠시 나에게로 온 것일 뿐이며,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⑨ 진(瞋) - 성내는 것. 분노 ․ 원한
성냄이 많으면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내는 난폭자가 된다. 이러한 사람은 다음 생에 아수라에 태어난다고 한다. 소극적으로는 성내지 말며, 적극적으로는 다른 이를 대할 때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⑩ 치(癡) - 어리석은 것
어리석음이 많으면 다음 생에 축생이 되거나, 사람으로 나더라도 어리석은 바보가 된다고 한다. 소극적으로는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야 하며 적극적으로는 슬기로운 지혜를 닦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 없는 악한 행동, 악한 말을 하고, 악한 마음을 먹으며 살고 있다. 때로는 모르고서 행하는 악행이 있는가 하면 알고서도 하는 악행이 있다. 왠지 남에게 잘해 주고 보시하면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바보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섭섭함은 일시적인 현상이며 십 선업 실천을 통하여 마음의 본성을 가리는 먼지를 떨어내면 해결된다.
육바라밀 3 - 인욕바라밀 수행
세 번째, 인욕(忍辱)바라밀은 참는 실천행이다. 탐(貪), 진(瞋), 치(痴) 중에서 성내고 화내는 진심(瞋心)을 잘 닦을 수 있는 실천행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 마음의 변화를 관찰하게 된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주위의 경계를 대할 때 다른 이가 욕을 한 마디 했을 경우, 혹은 폭력을 행사했을 경우 등 많은 상황에서 우리 마음속에는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고, 욕됨을 참기 어려운 일들이 많게 마련이다. 이럴 때마다 그 괴로운 상황에서 성내지 말고 잘 참아내라고 한다. 여기에서 인욕이란 말은 그냥 성나는 마음을 꾹 누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마음에 걸리거나 휘둘리지 말고 잘 놓아야 한다. 그 올라오는 마음이 공(空)한 줄을 바로 깨쳐 알 수 있게 되면 자연스럽게 성나는 마음이 놓이게 된다. 그러니 인욕바라밀은 지혜로운 안목으로 행할 일이지, 그냥 꽉 눌러 참기만 한다고 해서 인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연기(緣起)라는 존재의 실상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나라고 했을 때 이것은 다만 연기되어진 인연화합의 산물일 뿐임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다 하는 집착을 가지게 되며,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 화를 내고 성을 내게 된다. ‘나다’는 상이 없다면 누가 화를 내겠는가? 화를 내고 있는 주체가 바로 나인 것이다. 화가 날 때 그 마음을 진실로 잘 다루기 위해서는 나다 하는 상을 놓아야 한다. 화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그 마음을 놓았을 때 성내는 마음은 이내 고요해 질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나쁘게 꾸짖는 말을 기쁘게 참아 받아서 감로(甘露)를 마시는 것과 같이 하지 못하는 자는 도에 들어갈 지혜인 이라고 이름 하지 못한다.』 『유교경』
『다툼으로써 다툼을 그치려 하면 필경 그치지 못한다. 오직 참아야 능히 다툼을 그치느니라.』『중아함경』
『인내는 보리의 바른 인(因)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인내의 결실이다. 』『우바새계경』
인도의 성인 「간디」는 “수행자는 중생의 맨 뒤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나를 낮추고 양보하는 자세야 말로 인욕의 기본일 것이다.
육바라밀 4 - 선정바라밀 수행
선정(禪定)바라밀은 잡념을 제어하여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수행이다. 진정한 이치를 사유하고, 생각을 고요히 하며 마음이 산란치 않고 평온하게 하는 수행방법이다. 나아가 생각을 끊고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고자 하는 실천행이다. 이 실천을 위해서는 사량 분별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존의 고정된 관념을 과감히 타파 하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비추어 보기 위해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 오랫동안 곰곰이 사량 분별하고 따져 본다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정에 들어 고요해졌을 때 일체 사물의 관찰과 판단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선정바라밀의 올바른 실천이다.
『앉아 있다고 해서 좌선이 될 수는 없다. 삼계에 있으면서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 한다. 무심(無心)한 가운데 행동하는 것을 좌선이라 한다.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드는 것을 좌선이라 한다.』 『유마경』
이처럼 참된 선정이란 앉아 있을 때만 마음이 고요하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 고요함을 생활 속에서 몸이 움직이는 가운데에서도 그대로 써먹을 수 있어야 참된 좌선이 된다. 무심한 가운데 행동한다는 것은 일상 가운데 몸은 바쁘게 움직이고 일하고 생활하지만 마음은 그대로 놓아두고(방하착) 행동해야 함을 이르는 것이다. 경계[대상]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은 산란한 마음이다. 바로 그 마음을 놓아 생활 속에서 그 어떤 경계라도 턱 놓고 여여하고 고요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활참선이다. 생활참선이란 이처럼 몸은 움직이고 생활하더라도 마음은 턱 놓고 살기에 고요하며 평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방하착의 실천이 바로 생활참선의 길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생활 속에서 올바른 선정의 실천을 위해 우리는 항상 마음을 관찰하여 비추어 보아야 한다. 마음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이 바로 무심으로 살아가는 생활선정의 구체적인 수행방법이 된다.
『중아함경』의 가르침에,
『탐욕을 버리고(방하착) 악한 법을 여의며, 각(覺, 깨달음)과 관(觀, 알아차림)으로써 욕계의 악을 떠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초선을 얻는다.』라는 말씀이 있듯이 항상 복잡하고 어수선한 마음에 이끌려 살아갈 것이 아니라 마음을 관찰하여 스스로 마음을 단속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항상 관찰하여 어떠한 경계가 닥쳐도 집착하지 않고 그 집착심을 놓을 수 있을 때에 선정이 완성된다.
『잡아함경』에
『비구가 모든 사물에 집착하지 않으면(방하착), 그런 비구는 사물(외경계)이나 자신의 거칠고 미세한 마음으로부터도(내경계) 자유롭게 선정을 닦을 수 있다.』라고 한 것처럼, 집착을 놓았을 때 모든 분별심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선정을 닦을 수 있다. 바깥으로부터의 일체 외부 경계가 닥칠 때, 안으로부터의 마음속 온갖 내부의 경계가 일어날 때, 바로 바로 방하착하는 것이 진정한 선정바라밀이다. 그리하여 어떠한 집착에서도 훌훌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수행자의 바른 삶이라고 할 것이다. 바른 선정으로 이 정신없는 세상에 홀연히 깨어있어야 한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선정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으셨다. 현재 동남아 지역에서 성행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점차 관심이 높아가는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a)는 선정의 기본이다. 사마타로 정신을 집중한 다음, 위빠사나를 통하여 분별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 깨달음에 도달하는 수행방법이다. 이러한 선정수행 방법이 중국으로 건너와서 화두선정으로 변모하였으며, 요즘에는 간화선이라 하여 우리나라 조계종의 기본수행법으로 정해져 실행되고 있다. 선정수행을 하는 입장에서 불입문자(不立文字)라 하여 부처님의 가르치심인 경전을 무시하고 선정수행만을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수행자가 있다. 어떤 경우에나 불경을 먼저 터득하여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알고 난 다음에 선정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통하여 돈오점수(頓悟漸修)하는 수행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육바라밀 5 - 정진바라밀 수행
정진(精進)바라밀은 게으르지 말고, 근면하게 부지런히 닦아 나가라는 것이다. 보시, 지계, 인욕, 선정, 반야(지혜)바라밀을 끊임없이 계속해서 닦아 나가는 것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새해가 밝아오거나, 무언가를 시작할 때면 항상 무언가 크나큰 다짐을 하고 원을 세우곤 한다. 그러나 이것을 끝까지 잘 실천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아마도 자신이 세운 원을 반드시 끝까지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정진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정진의 과정에는 항상 유혹이나 마장이 뒤따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진을 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유혹이나 마장도 과감히 이겨낼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목표가 뚜렷해야 할 것이다. 어떤 난관도 극복하기 위해서 원을 뚜렷이 세워야 한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성자를 찾아왔다. 성자는 그때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 젊은이는 성자에게 어떻게 하면 신(神)을 찾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성자는 그 젊은이를 붙잡아 깊은 물 속에 집어넣었다. 젊은이가 숨이 막혀 거의 죽을 상태가 되었을 때에야 끄집어냈다.
“왜 그러셨습니까?”
젊은이는 노여움을 꾹 참으며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가 물 속에 들어가 있는 동안 공기를 원하였던 것같이 간절히 신을 찾을 때에만 너는 신을 발견할 것이다.”라고 성자가 대답했다.」
이처럼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만 정진바라밀은 쉽게 실천될 수 있다.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견고한 서원 또한 성립될 수 있다. 굳은 서원을 세워 그 서원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가진다면 그 마음은 그대로 정진바라밀 수행이 되는 것이다.45)
육바라밀 6 - 반야[지혜]바라밀 수행
반야[지혜, 智慧]바라밀은 완전한 지혜라는 의미로서, 우리 존재의 근원적 실상이 환히 밝아져서 일체의 모든 실상을 투철히 깨달아 보는 것을 말한다. 이 반야라는 밝은 지혜는 분별하고 사량하는 지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올바로 관찰했을 때 나타나는 존재 근원의 바탕자리를 깨치는 지혜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우주의 진리이다. 있는 그대로 관찰해 보면 모든 법은 무상(無常)이며, 무아(無我)이고, 개고(皆苦)이다. 이는 인연 따라 연기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이 이치를 아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그러나 중생은 무지하고 번뇌에 싸여 이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반야를 통해서 우리는 그 동안 어리석은 마음으로 집착해 왔던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 내 맘대로 한다고 하는 아상의 굴레에서 시원스레 벗어날 수 있다. 그래야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진리(眞理)를 볼 수 있다.
조 견(照 見)
조견(照見)이란 ‘비추어 본다.’는 뜻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라고 하면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이나 어떤 상(相)을 짓지 않고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의 관찰이다. 부처님도 바로 이 현실의 조견을 통해 확연한 깨달음을 이룰 수 있었다. 이것은 팔정도의 정견(正見)을 의미하기도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세계라든가, 절대자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 아니다. 다만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셨기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셨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깨달음은 전적으로 조견에 의한 현실에 대한 비춤의 결과이다. 나에 대한 조견, 현실에 대한 조견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자의 바른 길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나 그리고 현실 이외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다. 스스로 나와 나 밖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봄[조견]으로써 나와 나 밖의 현실이 어떠한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떠한 법칙성을 가지고 돌아가고 있는지, 어떠한 성질,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대한 온전한 깨침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근본불교 교설이라고 하는 연기법, 삼법인, 오온, 육근, 십이처, 십팔계, 업, 윤회, 사성제, 팔정도, 사념처 46)등 이 모든 교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고타마 싯다르타의 현실[일체, 제법, 우주, 세계]을 올바르게 관찰하였기에 나올 수 있었다. 현실을 가만히 관찰해 봄으로써 연기법이라는 현실의 법칙을 조견할 수 있었고, 그 연기법을 통해 현실의 속성, 성질인 삼법인의 교설이 나오게 되었다.
현실에 대한 조견(照見) - 불교근본교설
연기법(緣起法) - 현실의 법칙
연기(緣起)는 온갖 현상은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이 모여 성립한 것이므로 독립자존(獨立自存)의 것은 없고, 조건과 원인이 없어지면 그 현상도 사라진다는 진리이다. 불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라이타라는 원인[因]이 있고, 켠다는 동작[緣, 조건]에 의해서 비로소 존재가 가능하다. 이 때 라이타를 켜는 동작을 멈추면 불은 사라진다. 연기법은 이론적으로 이 세상에 항구적인 실체(實體)가 없음을 밝히고, 실천적으로는 우리의 괴로움은 만법이 실체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있는 듯이 집착하고 분별하는 데서 온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 원인과 조건[緣起]을 제거함으로서 현상의 세계(괴로움의 세계)에서 해탈[벗어나]하여야 한다는 불교의 기본교리이다. 공사상은 이 연기론(緣起論)에서 비롯된다.
삼법인(三法印) - 현실의 속성
일체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되어 생(生)하고 인과 연이 다하면 멸(滅)한다는 진리는 이 세상 어떤 것도 항상 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현실의 속성이며, 모든 법의 속성이다. 모든 법은 인과 연의 화합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이 인과 연의 화합이 다하면 반드시 어떠한 존재도 멸한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어떠한 존재도 반드시 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현실의 첫 번째 속성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제행이란 가변적(可變的) 일반현상, 온갖 존재 전체, 유위(有爲)와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것과 현상[만법, 萬法]은 무상이고 무아이다.
이렇게 일체 모든 법은 어떠한 것도 항상 하지 않으며[無常] 반드시 언젠가는 멸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 사실이 의미하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을 유추하여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떠한 존재도 ‘나다’ 고 할만한 고정된 아(我)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나’는 인과 연이 서로 화합하여 잠시 일어난 존재일 뿐이며, 인과 연이 다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멸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은 고정된 ‘나’가 아니고, 연기된 존재로서 인연 따라 잠시 만들어진 나, 거짓된 나 일 뿐이다. 그렇기에 현실의 두 번째 속성을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한다. 제법은 존재하는 온갖 것과 정신적, 물질적 현상을 망라 한다. 연기하는 세계는 무상하고 무아이므로 다음에 올 수밖에 없는 존재의 속성은 괴로움[苦]이다. 이것을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한다.
오온(五蘊) ․ 십이처(12處) - 현실의 구조
현실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현실이란 일체(一切)라고도 하며 제법(諸法)이라고도 하고, 이 세계, 이 우주 전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을 보는 안목을 요즈음 용어를 사용해 표현하면 우주관, 혹은 세계관이라 하겠다. 과학이란 본래 물질세계의 법칙을 알아내고 관찰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곳에 약간의 정신세계가 들어가면 과학에서는 혼동이 일어난다. 불규칙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세계까지 포함하여 생각한다면 전혀 혼동될 수 없는 인과 연의 지극히 규칙적인 연기로서의 진짜 과학, 참 과학이 된다. 이러한 연기로서의 규칙적인 세계를 불교에서는 법계(法界)라고 부른다.
불교에서는 바로 지금[시간], 이 곳[공간]에서의 나를 중심으로 일체 세계, 우주를 바라본다.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한 현실이라는 것은 바로 나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뜻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온(五蘊)과 십이처(十二處)의 교설이다. 오온이라고 하면 색(色), 수(受), 상(相), 행(行), 식(識)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물질세계는 색으로 간단히 표현되는 반면에 정신세계는 오히려 더 많은 비중을 두어 수・상・행・식으로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십이처라고 하면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六根)과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인 육경(六境)으로, 육근은 인간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을 말하고, 육경은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을 말한다. 다시 말해 ‘나’라고 하는 육근의 감각기관에서 느낄 수 있는 대상만을 일체의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혀로 맛을, 몸으로 감촉을 느낄 수 있고, 의지로 생각할 수 있는 영역만을 일체제법인 현실의 세계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불교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우주관을 내세우고 있으며, 우리의 육근, 즉 나를 중심으로 우주를 바라보고 있다. 47)
업(業)과 윤회(輪廻) - 현실의 존재방식
우리는 연기(緣起)의 진리를 알지 못하므로 나쁜 짓을 하고도 그 과보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며, 피해가길 바라고, 무상(無常)의 진리를 알지 못하기에 내 육신, 내 재산, 내 명예에 집착하여 그것이 멸할 때 괴로움에 빠지게 되고, 무아(無我)의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 내 마음대로 한다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온갖 나를 위한 이기심을 키워가고 있다. 이렇게 진리를 올바로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으로 인해 우리는 ‘나다’는 생각에 갇혀 몸과 말과 뜻으로 나를 위한 이기적인 행위를 짓고 살게 된다.
이렇게 신(身)・구(口)・의(意)로 세 가지 어리석은 행위를 지음으로서 우리는 그에 합당한 결과를 받게 된다. 그것은 업(業)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하여 언젠가 우리에게 과보(果報)를 가져다준다. 다시 말해, 진리를 올바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몸으로, 입으로, 뜻으로 짓는 모든 행위가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을 만들게 된다. 이러한 삼업(三業)은 우리의 삶을 윤회의 수레바퀴로 몰아간다. 업을 짓기에 그 업에 대한 과보를 받아야 하고 과보를 받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지은 업의 종류에 따라 여섯 갈래의 길[육도(六道)]을 언제까지고 돌고 돌게 된다.
조견의 체계 - 사성제(四聖諦)
현실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 본 결과 얻은 결론은 현실의 여실한 모습은 바로 괴로움 이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 현실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만 말씀을 하셨다고 경전에 수차례에 걸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팔만 사천의 대장경이 있고 수많은 경전이 있으며 45년 여 동안 전법포교를 하셨지만, 그 많은 양의 경전과 기나긴 기간 동안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바로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것이 전부다. 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체계적인 정리가 바로 사성제(四聖諦)라 할 수 있다. 이는 말 그대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의미이다. 사성제는 고성제(苦聖諦), 집성제(集聖諦), 멸성제(滅聖諦), 도성제(道聖諦)를 말한다.
고성제 - 4고(苦), 8고(苦)
현실세계(사바세계)는 고통의 연속이다.
고성제란 “현실을 여실히 살펴보니 괴로움이다.”라고 하는 괴로움의 진리이다. 태어남이 괴로움이며 늙는 것이 괴로움이고 병드는 것과 죽는 것이 괴로움인데 이를 4고(4苦)라 한다. 또 사랑하는 대상을 보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고 미워하지만 보아야 하는 것도 괴롭고, 구하고자 하나 얻지 못하는 것이 괴로우며 오온이 치성하여 괴로운데 이들 모두를 8고(8苦)라 한다.
집성제 - 집착심, 분별심[번뇌, 煩惱]
현실세계가 고통의 연속인 원인은 무명, 즉 번뇌가 원인이며 번뇌는 집착하는 마음과 분별하는 마음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현실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왜 괴로운지를 알아야 그 원인을 소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성제란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인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노・병・사(老・病・死)의 괴로움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하여 고요히 일체의 경계를 여실히 조견하시고는, 그 원인이 생(生)에 있음을 아셨다. 태어났기에 노 ․ 병 ․ 사(老 ․ 病 ․ 死)의 괴로움이 있다. 그렇다면 생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니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48)의 생사 윤회하는 테두리인 유(有)에서 비롯됨을 아셨고, 그 원인은 다시 어떤 대상을 집착하는 취(取)에 있음을 아셨으며, 또 그 원인은 애(愛) 그리고 그 원인은 수(受) ……,
이렇게 하나하나 그 원인을 고찰해 올라가니 결국에는 무명(無明)이 생로병사의 근본 원인임을 여실히 아셨다. 이것이 바로 십이 연기(12緣起)이다.
무명이 생사윤회의 근본 원인임을 알았지만, 무명은 말 그대로 근본이 되는 원인이기에 보다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현실에 비추어 보니 애(愛)와 취(取)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말해 좋아하는 것을 취하고, 싫어하는 것은 버리려는 집착심과 분별심이 바로 생사윤회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사의 괴로움을 없애려면 그 원인을 없애야 하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수행의 초점(焦點)은 무집착・무분별에 있다. 그래서 모든 수행의 핵심, 본바탕은 집착을 놓는 방하착(放下着)과 무분별이 되어야 한다. 이렇듯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미혹하게 하여 더럽게 하는 모든 정신작용을 한마디로 번뇌(煩惱)라고 한다. 이 번뇌가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번뇌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괴롭히는 나뿐 정신작용의 총칭이며, 망념(妄念), 혹(惑)이라고도 한다.
멸성제 - 열반, 해탈
무명[번뇌]을 소멸시킴으로서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된 상태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라 하여 멸성제(滅聖諦)하고 한다. 이러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기 위해서는 실천이 필요하다. 그 실천의 길이 바로 도성제(道聖諦) 이며,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진리다.
도성제 - 중도, 팔정도
도성제는 괴로움의 소멸, 즉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 도성제는 괴로움을 멸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그 열반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중도(中道)라고도 하며 양극단을 떠난 길이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바로 팔정도다. 팔정도의 정(正)이 바로 중도의 중(中)을 의미한다. 팔정도는 불교 수행의 세 가지 핵심인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의미한다. 따라서 팔정도는 삼학을 중도설(中途說)에 입각하여 세분하여 구체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은 계(戒)를 의미하며, 이러한 계행을 통한 올바른 생활을 바탕으로 올바른 수행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한 바른 수행이 바로 정(定)이며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세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바른 수행을 통하여 밝은 지혜를 증득 할 수 있으니, 이것이 혜(慧)이며 정견(正見)과 정사(正思)가 여기에 속한다.
팔정도에서 수행의 핵심은 정견(正見)과 정정(正定)이라고 할 수 있다. 정견, 정정을 말하기에 앞서 나머지 정사유[바른 사유 - 의업], 정어[바른 말 - 구업], 정업[바른 행동 - 신업], 정명[바른 생활], 정정진[바른 노력], 정념[바른 관찰] 등은 종교적, 윤리적 생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불교 윤리 사상을 살펴볼 수 있다. 불교 윤리의 핵심이 바로 십선업(十善業)이다. 이러한 윤리 생활이 바탕이 되어 수행생활로 나아가면 팔정도의 핵심인 정념과 정정을 만나게 된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정념(正念)이다. 이 원리에 입각해 지관겸수(止觀兼修), 정혜쌍수(定慧雙修) 등의 교학이 나올 수 있었다. 반야심경의 조견(照見) 또한 이 정념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정념과 정정을 올바로 끊임없이 수행하는 것이 정정진이며, 이렇게 수행했을 때 나타나는 올바른 견해가 바로 정견(正見)이다. 정념이란 우리의 몸과 느낌, 마음을 가만히 비추어 보는 관찰 수행법이다. 정정이란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것, 즉 일체경계에 집착하여 시달리지 않고 항상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 실천이 바로 참선이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시냇물처럼 꾸역꾸역 흐르는 것이 마음이다. 이 마음을 한 곳에 붙잡아 놓는 것이 정정(samatha)고, 집중된 마음상태에서 법을 관찰하는 것을 정념(vipassana)이다.
오 온(五 蘊)
조견이란 현실 세계의 근본 밑바탕까지 꿰뚫어 비추어 본 것을 말한다. 올바로 조견했을 때 반야의 지혜가 나타난다. 그 결과 나타나는 깨달음의 내용이 부처님이 깨달으신 연기법이며 삼법인, 사성제, 오온 등의 교설이다. 그런데 이 모든 교설은 절대 서로 다른 교설이 아니다. 연기법의 세계이므로 삼법인이라는 현실의 속성을 알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일체가 공하며 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이나 무아는 없다는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일체 제법이 연기 한다는 사실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연기(緣起)이므로 공(空)이고, 무아(無我)이며, 중도(中途)이고, 무분별(無分別)이다.
오온은 일체 현실의 세계를 다섯 가지로 나눈 것이다. 또한 인간을 다섯 가지 요소로 나눈 것이기도 하다. 이 오온을 특별히 인간에 적용시켜 말할 경우 오취온(五趣蘊)이라고도 한다. 오온의 온(蘊, Skandha)은 모임이라는 뜻이다. 때로는 음(陰)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일체의 현상세계는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 가지 모임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낸 것이다. 오온은 좁은 의미로 볼 때 인간 존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일체의 존재를 가리킨다. 일체의 구조를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말인데, 색은 현상계의 물질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며 수, 상, 행, 식은 정신세계의 총체를 네 가지로 나눈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분류법은 물질보다는 정신에 중점을 두고 있는 분류법이다. 오온설은 물질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서 무상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정신은 실체적이며, 영원하다고 믿고 그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법한 교설이다. 그러므로 오온은 물질보다 정신을 더 자세하게 분류하고 있다. 인간과 일체만유는 물질적인 요소인 색(色)과, 정신적인 요소인 수, 상, 행, 식(受, 想, 行, 識) 등 다섯 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을 고정적인 자아[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취]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색온(色蘊) - 물질(物質)
색이란 빛과 모양을 가진 물질을 의미하며, 인간은 육체를 가리킨다. 이러한 색은 네 가지의 요소로 이루어졌다. 이를 사대(四大)라고 하며 지(地)・수(水)・화(火)・풍(風)의 네 가지를 말한다. 현대과학은 모든 물질은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하나가 모두 플러스 마이너스의 스핀 운동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물체는 고정불변이 아니고, 온도에 따라서 항상 변화한다. 물을 예로 들어보면 고체인 얼음에서 액체인 물, 기체인 수증기로 변화를 거듭한다. 이러한 현상은 쇠나 돌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확인 해 보면 모든 물체는 기(氣-energy)에서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기로 다시 돌아간다. 결국 모든 법은 항상 하지 않는다. 우리의 몸도 세포 하나하나가 죽고 새로 생기기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우리의 몸이 전혀 새로운 세포로 변화되는데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색온은 무상한 것이며 항상 하지 않는다.
수 온(受 蘊) - 느낌, feel
수란 감수작용(感受作用)을 말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다. 고수(苦受)와 낙수(樂受), 그리고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다. 즐거운[좋다] 감정과 괴로운[싫다] 감정, 그리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정을 말한다. 우리의 주관적, 내적인 감각기관인 육근(六根)과 그것에 상응하는 외적인 대상인 육경(六境)이 서로 만날 때, 이러한 세 가지의 감정이 생겨난다. 안근(眼根-눈으로 보는 것)으로 색을 바라볼 때 아름다운 경치를 볼 때 좋다는 감정이 생기며, 공포영화나 징그러운 것을 보든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볼 때는 싫다는 감정이 일어난다. 그러나 무심코 지나다니는 사람을 멍하니 지켜볼 때처럼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을 때도 있다. 이근(耳根-귀, 소리)으로 무언가를 들을 때, 즉 욕을 듣든가 꾸지람을 들으면 싫은 감정이 생길 것이며 칭찬을 들으면 좋다는 감정이 생긴다. 이와 유사하게 비근(鼻根-코, 냄새), 설근(舌根-혀, 맛), 신근(身根-몸, 접촉), 의근(意根-뜻, 생각)들도 이러한 세 가지의 감정을 나타낸다. 이러한 수온(受蘊)의 감정은 그때그때 인연이 생함에 의해 잠시 나타났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
상온(想蘊) - 분별작용(分別作用)
상은 개념(idea) 또는 표상(表象) 작용이다. 대상을 식별하고(무엇이지?) 그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는 작용(아! 부처님이시구나)을 말한다. 즉 법당의 부처님을 뵙고 아! 저 분은 부처님이시구나! 하고 개념을 만드는 작용을 말한다. 일체의 모든 것에 대하여 상을 짓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보면 이전에 지어 놓은 이름을 되살리어 그것이 무엇이다 하고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상은 고정 불변한 것일까? 우리들은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고정관념・편견・선입견에 빠져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없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 - 일체 대상에 대한 표상 - 은 우리가 그렇게 정해놓은 것이지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오랜 관습에 의하여 하늘, 나무, 스님, 꽃, 집, 절, 아버지, 자식…… 등의 개념을 대상에 접목시켜 이름 붙인 것뿐이다. 흔히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온 환경, 사회가 제공하는 고정관념에 빠져 그것이 절대적인 것처럼 생활하기 쉽다. 상을 짓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크게 작용 하는가를 알 수 있다.
『금강경』 여리실견분에서는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하리라.』하였다. 그 뜻은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안다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 이다. 「모든 상은 실상이 아니며 인연에 의하여 가합(假合)한 가상(假相)이므로 일시에 존재할 뿐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허망한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이 이름과 상에 머무르지 아니한다면 상은 상이지만 진실한 실체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여래를 보게 된다. 우리가 상을 짓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환경과 조건에 따라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항상 변하고 있다. 그것을 모르고 자신의 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행 온(行 蘊)
행이란 ‘형성하는 힘’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히 인간의 의지작용을 가리킨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작용과 행위로 인해 업을 짓게 된다. 행온은 아름다운 꽃을 보고 좋은 생각이 일어 꺾어 갖는 행위와 같이 정신작용이 실천적으로 움직여지는 것을 말한다.
식 온(識 縕)
식은 일반적으로 6근(눈, 귀, 코, 혀, 피부, 생각)이 6경(색, 성, 향, 미, 촉, 법)을 접하였을 때에 “아~ 무엇이다”하고 알아차려 분별하는 상온의 다음에 오는 인식작용이다. 제6의식 이라고도 한다. 식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를 근거로 이런 저런 인식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보면 연꽃을 보았을 때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며, 주위 환경이 더럽더라도 자신은 곱고 깨끗함을 유지하는 고귀함이 있다.’라고 알아차리는 인식을 말한다.
그러면 이상에서 이야기했던 각각의 다섯 가지 온에 대하여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한다.
입안에 사탕이 하나 들어왔을 때 ‘~사탕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 상온이고, 달고 맛있다는 느낌이 수온이며, 맛있으므로 빨아먹는 행위는 행온이다. 식온은 사탕은 사탕수수에서 축출한 즙을 고아서 만들고 사탕수수는 열대에서 나는 식물이다. 등 사탕과 관련된 연상을 하는 작용을 말한다. 사탕자체는 색이다.
개 공(皆 空)
오온설이 대두된 이유는 무아(無我)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오온 이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존재란 5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 각 요소들은 모두 비실체적인 것이므로 이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진 인간 존재 역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모이는 성질을 가진 것[5온]은 모두 흩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 오온설은 무아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이며 이러한 오온무아설은 불교 가르침의 핵심인 고(苦)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답이 된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은 욕망 때문에 생기고 욕망은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에 발생한다고 하셨다. 즉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 ‘나다’라고 하는 생각이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라고 하셨다. ‘나다’는 생각도 없고 ‘나의 것’이라는 생각과 ‘내가 옳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한다면 우리들은 무엇에도 집착할 것이 없으며, 분별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49)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조견오온개공은 “오온의 실상은 모두가 공이다.”라는 뜻으로 이 경전의 핵이다. 오온개공은 즉 불심의 실체(實體)로 깨달음을 말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성, 즉 부처님의 실체를 보면 자기완성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부처님의 실체가 곧 오온개공이다. 그러므로 불생불멸하고, 부증불감이며, 불구부정이며 공이다.
일체를 모두 공한 것으로 비추어 본다는 의미로 현상적으로 본다면 나라고 하는 존재, 너라는 존재, 그리고 이렇게 우주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조견해 보면 모두가 텅 비어 있어 공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일체가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 볼 수 있는 지혜가 바로 반야이다.
아름다운 여자 직장상사가 있는데 이 여자를 사모하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미워하는 남자도 있다. 한번은 두 남자가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둘 다 얼굴에 밥알이 붙어있었다. 여자상사가 이것을 보고 씩 웃었다. 그 여자를 사모하는 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좋아해서 웃은 줄 알고 흥분하였고, 그 여자를 미워하는 만자는 자기를 무시하고 비웃었다고 더욱 서운한 마음이 쌓였다.
하나의 같은 사물이나 현상을 놓고 이렇게 받아들이는 입장이 다른 것은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실체(實體) - 얼굴에 밥알이 붙음 - 는 파악하지 못하고 실체위에 쌓여있는 마음[染心, 염심] -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 이 사실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견오온개공이란 ‘실체위에 쌓여있는 마음[염심]을 걷어내고 실체를 보았더니’라는 뜻이다. 그 실체가 바로 부처님의 본질, 성(性)이다. 성은 곧 공이다.
그러면 좀 더 쉽게 현대 과학을 예로 들어 공(空)을 생각해 보겠다.
물체는 전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전자 따위의 입자들은 질량을 가지는 작은 덩어리이지만, 이것은 파동이라는 아주 미세한 떨림으로 바뀔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물질이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모든 것은 변화 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고정된 입자라고 생각한 것이 어느새 파동이라는 떨림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어느 것도 고정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공(空)한 것이다. 이처럼 현대과학의 물리학도 불교의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교설, 그리고 공(空) 사상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고 본다. 앞으로 끊임없이 과학이 발전할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과 증명이 전개될 것이라 생각한다.50)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란 일체의 고액[번뇌]을 건너, 해탈, 열반에 이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란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봄으로써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경전에는 세 가지 괴로움과 사고(四苦), 팔고(八苦)가 있다. 일반적으로 괴롭다는 말은 그 성격상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사리불에게 여쭈었다.
“사리불이여, 모두들 고・괴로움이라고 하는데 어떤 것을 고라고 합니까?”
“벗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가 고이다. 그것은 고고(苦苦), 행고(行苦), 괴고(壞苦)이다.”라고 하셨다.
첫째, 고고(苦苦)란
괴로움의 괴로움이란 의미로서, 인간의 감각적인 괴로움을 의미한다. 즉 육체적 고통을 의미한다. 내 육체가 직접적으로 괴로움을 느끼는 것으로, 누군가에게 맞아서 아프고, 병으로 몸이 아프며, 배고파서 겪는 육신의 괴로움과 추워서 느끼는 괴로움 등이다.
둘째로 행고(行苦)란
행의 괴로움이란 의미로서, 변하기 때문에 겪는 괴로움이다. 삼법인 중 제행무상의 진리 때문에 오는 괴로움으로 모든 것이 항상 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괴로움을 말한다. 이 괴로움이 바로 불교의 고성제에서 말하는 괴로움과 가장 가까운 괴로움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 괴로움이라고 하면 육체적 괴로움이나 혹은 다른 어떤 괴로움을 의미하기보다는 일체 만유는 항상 하지 않고 반드시 변화한다는 진리에 따른 괴로움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며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괴로움이며, 늙고 병들어 예전처럼 한 십 년 정도 젊어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괴로움 등이 모두 행고에 속한다. 우리가 흔히 괴로움이라고 말하는 생, 노, 병, 사의 인생사고(四苦)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셋째로 괴고(壞苦)란
부서지는 괴로움 이다. 항상 하기를 바라지만 일체의 법은 항상 하지 못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부서지게 되는 괴로움이다. 자연을 보면 성(成)・주(住)・괴(壞)・공(空)하여 반드시 변하여 부서지게 되고, 인간을 보더라도 생・노・병・사하여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뿐 아니라 현재는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없어졌을 때 느끼는 괴로움도 괴고에 속하는데, 이는 우리가 재물, 지위, 혹은 명예 등을 상실했을 때 느끼는 괴로움이다. 돈이나 나의 소유물 등이 인과 연이 다해 나에게서 멀어질 때 느끼는 괴로움도 바로 이 괴고에 속한다. 이러한 괴로움 등은 괴고이면서 동시에 행고이기도 하다. 항상 하지 않고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경전에서는 괴로움의 성격상 세 가지로 나누고 있기도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고가 바로 사고(4苦)와 팔고(8苦)의 교설이다. 경전에서는
『태어나는 것은 괴로움이다. 늙는 것은 괴로움이다.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며, 죽어야 하는 것 또한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또한 고통스러운 일이다. 원한이 있는 사람과 만나는 것 또한 고통스럽다. 구하나 얻어지지 않는 것도 고통스러움이니, 요컨대 번뇌의 수풀 위에 뿌리를 박고 있는 내 몸이 존재하는 것이 고통이다. 비구들아, 이것이 괴로움이라는 진리이다.』 라고 설함으로써 여덟 가지의 괴로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생(生)은 태어나는 괴로움이며, 노(老)는 늙는 괴로움이고, 병(病)은 병드는 괴로움, 사(死)는 죽는 괴로움으로 이상 네 가지가 사고(四苦)이다. 여기에 다시 네 가지 괴로움을 더해 팔고(八苦)라고 한다. 그 네 가지는, 미워하는 대상과 만나서 괴로운 원증회고(怨憎會苦),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인 애별리고(愛別離苦), 원하지만 얻지 못해서 괴로운 구부득고(求不得苦), 마지막으로 오음성고(五蔭盛苦)는 오음이 치성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다. 오음이란 앞에서 배웠던 오온(五蘊)을 말한다. 다시 말해 오음성고란 나다하고 아상을 내세우는데서 오는 괴로움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아상(我相), 아집(我執)이다. ‘나다’하는 상이 없다면 우리는 괴로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모든 괴로움의 주체는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말한 인생팔고는 무조건 괴로움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아니다. 아상이 있는 중생들의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공부를 착실히 하여 일체 분별심과 산란한 마음, 일체의 경계를 맑고 밝은 참주인공의 본바탕에 일임하여 맡기고 방하착하며 살아간다면 인생은 고가 아니다.
이제까지 알아 본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을 되짚어 보면 조견오온개공을 실천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도일체고액할 수 있다는 실천적 가르침이다.
사리자(舍利子)
사리자는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모두 공하여 실체가 없다는 참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이러한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 관자재보살이 법을 설하고 있는 광경을 설정하고 있다. 사리자는 사리불(舍利弗)이라고도 하며, 범어로 사리푸트라(Sariputra)라고 한다. 음을 그대로 옮기면 사리불(舍利弗) 또는 사리자(舍利子)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리자는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지혜제일의 제자다. 사리자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육사외도(六師外道 )51)중의 한 분인 「산자야 벨라티풋타」의 제자로 목건련과 함께 회의파의 교단에 속해 있었다.
사리불과 목건련은 부처님보다 먼저 입멸했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이 모두 부처님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석존의 입멸 장소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은 것을 보더라도 이것은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두 제자의 죽음에 대해 두 사람의 죽음으로 모든 비구들이 허전해 하는 것 같다고 술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교단에서 지혜가 가장 출중한 사리불이 반야심경에 등장하여 관자재보살로부터 반야지혜에 대한 법문을 듣는 것은 반야심경의 반야지혜야말로 사리불의 지혜보다 더 큰 대 지혜임을 알 수 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교단에는 10대 제자52)가 있었다.
연 기 법(緣 起 法)
색이란 물질을 나타내는 것이며, 오온[색, 수, 상, 행, 식] 중에서 물질적 개념인 색을 나타낸다. 공(空)은 앞에서 누차 설명했던 연기 ․ 중도 ․ 무자성(無自性)을 의미한다. 공이란 없다는 의미의 단순 부정이 아니라 만법이 인과 연에 의해서 모였으므로 인과 연이 다하면 반드시 사라진다는 연기의 법칙을 의미한다. 공이 곧 연기라는 논리로 설명되고 있다. 연기에는 시간적 개념에서 바라본 연기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이치가 있고, 공간적 개념에서 바라본 연기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제행무상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이며, 제법무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근본불교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법과 삼법인의 제행무상과 제법무아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본다. 불교의 근본사상을 연기법이라 한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연기법이라 할 수 있다고 경전에서는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우루벨라 마을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으신 내용의 핵심이 바로 연기법이다.
『소부경전』의 우다나 편에 보면
『참으로 진지하게 사유하여 일체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그의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것은 연기의 진리를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부처님의 의혹이란 생사에 대한 의혹과 일체에 대한 궁금함이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연기의 진리를 알았기에 일체의 존재가 밝혀졌고, 의혹은 씻은 듯 사라졌다고 말씀하셨다. 즉 생사의 매듭이 풀리고 깨달음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일체 존재의 실상을 연기를 통해 깨쳤다고 하셨다.
『중아함경』 제7권에서는 연기를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 것이요, 진리를 보면 바로 연기를 본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으며
『잡아함경』 제12권에서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연기법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던지 안 하던지 간에 항상 존재한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해탈을 성취해서 중생을 위해 분별 연설하며 깨우치나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연기는 빠알리어로 Paticca-Samuppada이다.
『잡아함경』 제15권 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此有故 彼有] - 공간적 상의성[無我],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此生故 彼生] - 시간적 상의성[無常]』이는 일체의 모든 것들은 항상 무엇과 서로 말미암아 일어나서 함께 공존하며, 함께 변해가고 이윽고 함께 의존하여 사라진다는 것을 말한다.[생주이멸(生住離滅), 성주괴공(成住壞空)]
우리들은 자기 생각으로 이것과 저것을 갈라놓고, 나와 남을 갈라놓으며 살아가지만, 사실은 이것은 저것이 바탕 되어 일어나며, 나는 남을 의지하여 남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변해 가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혼자 존재하는 것은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하나’라고 부르짖고 있다. 이러한 사유 방법은 그 당시에는 새로운 개념이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사리불은 자기 친구에게 비유로써 연기를 설명하였다.
「여기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있다고 합시다. 그 두 개의 갈대 묶음은 서로 의존하고 있을 때는 서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개의 갈대 묶음에서 어느 하나를 떼어 낸다면 다른 한 쪽은 넘어질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므로 이것 또한 없는 것입니다.」하고 연기법이란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서로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한문으로 사람인자[人]를 보자. 둘이 서로 의지하고 있다. 어느 하나가 없어지면 사람은 존재하지 못함을 뜻한다. 덩그러니 이 세상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것 같은 우리 존재는 이 우주 만유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일러준다. 서로 의존하며 서로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연기라는 말은 인연(因緣)에 의해 생긴다(起)는 말이다. 인연생기(因緣生起) 한다는 뜻이다. 혹은 인연에 의해 생하고 멸한다는 인연생멸(因緣生滅)의 법을 따로 인과(因果)의 법칙이라 이해하기도 한다.
인연이란 일체 모든 것은 인과 연의 결합에 의해서 생겨나고 변화해간다는 것이다. 인(因)이란 결과(果)를 생기게 하는 내적(內的)인 직접원인이며, 연(緣)이란 외부에서 이를 돕는 외적(外的) 간접 원인을 뜻한다. 이것을 내인(內因), 외연(外緣), 혹은 친인(親因), 소연(疏緣)이라고도 한다. 일체만유가 변화함에 대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바로 이 인연화합의 법칙은 일러주고 있다. 유(有)는 원래 스스로 무(無)인데 인연이 이룬 것이다. 본래 불[火]은 있지 않았으나(無), 나무와 나무[因]를 서로 비벼 줌으로써[緣] 불이 생(生)하는[果] 것이다. 이렇게 무(無)에서 생긴 유(有)도 나무가 다 타면 불이 꺼지고 마는 것처럼 사라지고 만다. 인과 연이 화합하므로 불이 일어나고 인과 연이 다하므로 불은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본래 불이 있었던 것이 아니며, 다만 인연의 소산에 불과한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불이란 있지 않다. 단지 인과 연이 화합하면 잠시 나타났다가 인과 연이 멸할 때 소멸되는 인연생 인연멸(因緣生 因緣滅)일 뿐이다.
그러면 업보(業報)란 무엇인가? 업보는 인간의 의지적 작용이다. 인과의 도리를 인간의 행위에 관련시켜 설명하면 업보(業報)가 된다. 인간의 의지적 작용[因]에 의해 그 결과[果]가 분명히 나타나므로, 인과의 법칙, 인과응보(因果應報), 혹은 인과율(因果律)이라고도 한다. 이 인과율은 주체적 인간[육근(六根)]과 객체적 대상[육경(六境)] 사이에서의 법칙이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물론 성립하는 관계이다. 일체 정신이 있고 없는 물질계와 정신계를 아우르는 법칙이다.
일체 만유(萬有)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모든 것[一切]에 의지해 있다. 의상조사 법성게 중에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은 바로 이런 사실을 읊은 것이다. 한 티끌 속에 온 우주를 머금었다는 화엄의 법계연기의 도리이다. 일즉일체 다즉일(一卽一切 多卽一)도 마찬가지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나’라는 존재는 일체 모든 만유(萬有), 만생(萬生), 유정(有情), 무정(無情)의 중생들이 자연과 연관되어서 공생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결국 나 홀로는 살아갈 수가 없다. 나, 내 것이다 하는 관념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고정된 실체로서의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일체가 함께 돌아가는 세상 그 자체가 바로 나인 이 마당에 ‘나다, 너다’를 가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는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존재다. 나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하는 존재이기에 항상 변화한다. 이 세상에서 항상하는 것은 전혀 없다. 연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행무상이요, 제법무아이고, 일체개고라 한다.
연기가 불교 깨달음의 핵심 사상이라고 한다면 깨달음의 핵심은 ‘나’라고 하는 울타리를 깨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연기법을 깨달으면 아상이 깨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연기의 이치를 올바로 보아 깨친다면 너와 나라는 상이 깨지므로 일체에게 모든 자비를 베푸는 삼륜(三輪)이 청정한 무주상보시를 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교의 양 수레바퀴라고 할 만한 지혜와 자비가 따르는 것이다. 연기의 법칙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어떻게 신 ․ 구 ․ 의로 갖은 악업을 지을 수 있겠는가. 도둑질하거나, 살생하거나, 간음하거나, 욕하고 이간질하고, 거짓말할 수 있는가. 어찌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53)
제행무상(諸行無常)
“세존이시여, 자주 무상 무상하시는데 무엇을 무상이라고 합니까?”
“라타야, 우리들의 신체(색, 色)는 변한다. 우리들의 감각(수, 受)은 변한다. 우리들의 표상(상, 想)은 변한다. 우리들의 의지(행, 行)는 변한다. 우리들의 의식(식, 識)은 변한다. 라타야, 이같이 관찰하여 일체를 떠나라. 일체를 떠나면 탐욕은 없어지고, 탐욕이 없어지면 해탈할 수 있다. 해탈하는 그 때에 미혹된 삶은 끝난다."
제행무상이란 오온인 색・수・상・행・식 모두가 변하는 진리를 말한다. 오온이란 나라는 소우주와 일체라는 대우주를 의미하며, 일체만유, 삼라만상이라고 표현되는 전체 우주법계를 의미한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일체가 다 항상 하지 않고 변한다는 이치를 뜻한다. 이와 같이 일체가 변한다고 관찰함으로써 일체 모든 것에 대한 집착과 분별로부터 벗어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체를 떠나게 되면 탐욕이 있을 수 없게 된다. 탐욕이 없어야 해탈을 하는 것이며 그 때 비로소 어리석은 삶은 끝난다. 제행무상이란 연기법의 시간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존재를 시간적으로 볼 때는 무상하다. 세상 그 어떤 것이라도 지금은 항상 하는 것 같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변하게 된다.
여기에서 제행이란 일체의 만들어진 것으로 인연따라 생겨나 생멸변화하는 유위(有爲)의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존재와 모든 현상을 말한다. 무상이란 글자 그대로 항상 함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제행무상은 모든 존재는 항상 함이 없이 변한다는 뜻이다. 일체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정견(正見)할 때, 가장 먼저 드러나는 존재의 속성은 바로 모든 것이 변한다는 가장 평범한 진리이다. 다만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 말고는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한다는 그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니다. 우리의 작은 분별심으로 재어 볼 잣대가 아니란 뜻이다. 제행무상이란 그대로 진리의 모습 존재의 여실한 모습일 뿐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수루나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신체는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
“세존이시여, 변하나이다.”
“변한다면, 그것은 괴로운 것이냐, 즐거운 것이냐?”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변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을 관찰하여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본질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세존이시여, 그럴 수 없습니다.”
제법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현실세계의 일체 모든 것을 뜻한다. 제행무상에서의 제행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무아는 일상생활에서 나라는 행위의 주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현상도 다른 현상과 서로 의존하지 않으면서 완전히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무아라는 말은 아(我)가 없다,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말은 고정 불변하는 ‘내’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라는 상을 깨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라는 상이 없는데, 내 것이라는 것과, 내가 옳다는 생각이 있을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나다’라고 하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으며 한결같은 속성인 상일성(常一性)이 있어야 하고, 나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주재성(主宰性)이 있어야 한다. 오늘도 나고, 내일도 나로 항상 해야 참된 나라고 할 수 있지 늘 변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찌 나라고 할 수 있겠으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나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그것을 어찌 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시간적 관점에서 색의 공함을 논함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서론의 핵심 사상인 조견오온개공의 이치를 보다 자세하고 극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과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의미는 어찌 보면 비슷한 의미인 듯하다. 그러나 이 말들이 만약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반야경의 핵심만을 뽑아 놓은 심경에서 굳이 네 번이나 반복해서 표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앞의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모든 반야경에서 공의 이해를 위해 자주 사용되는 불(不)이라는 부정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으며, 뒤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즉(卽)을 통해 긍정의 논리를 펴고 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시간적 관점에서 색이 공하다는 무상을 설명했으며,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공간적 관점에서 무아를 설명한 것이다. 이 두 논리의 차이점은 화엄경의 사법계(四法界)에서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를 그리고 있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물질들이 제각기의 인연으로 인해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이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시간적으로 보면 언젠가는 인과 연이 다하여 반드시 멸하는 것이기에 공(空)하다고 결론짓는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는 것은 색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통해 이(理)와 사(事)가 서로 걸림이 없다는 화엄의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우리의 눈에는 이법계와 사법계가 나뉘어 보이지만, 즉 공과 색이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은 이법계와 사법계가, 그리고 공과 색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적인 개념에서 본 무상의 이치를 바탕에 깔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생(生)이 곧 사(死)요, 사가 곧 생이다.
그러면 색불이공만 이야기하면 될 것을 다시 한번 공불이색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반야심경에서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실인 색에 대하여 공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여 현상계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는 부정만으로는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고 한 쪽으로 치우칠 우려가 있기에 다시 한번 현실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라는 지혜의 안목을 통해 현실을 파악하자니 우리 범부 중생의 사량으로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어쨌든 색이 공이라고 부정을 하고, 그 부정인 공이 다시 색과 다르지 않다고 긍정을 함으로써, 부정과 긍정 모두의 극단을 떠난 절대 긍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난 후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강한 긍정의 논리를 펴고 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공간적 관점에서 공을 논함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는 논리는 공간적인 무아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물질적 존재인 색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지없는 공이라는 것이다. 이 공간 내에서 이해할 수 있는 공이라는 것이다. 앞의 논리처럼 시간적으로 미래에는 공일 것이라는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 공간에서의 공이라는 뜻이다. 앞에서 공은 연기이며 무자성(無自性)이고 무아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 공은 무아를 의미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색이 곧 무아(無我)라는 뜻이다. 54) 시간적 개념의 무상이란 인간이 현재는 살아 움직이지만 언젠가는 죽어 멸하게 마련이다. 현재의 존재는 가유(假有)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며, 공간적 개념의 무상이란 현재 존재하는 것들은 여러 요소가 인연에 의하여 존재할 뿐이다. 자동차의 경우, 많은 부품의 조합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으나, 바퀴 한개만 떨어져 나가도 자동차의 가치가 상실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색불이공 공즉시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도 있다. 색이 사바세계, 즉 중생의 세계이며 공은 깨달음의 세계라고 보아서 중생계[俗諦]와 깨달음의 세계[眞諦]가 서로 다르지 않다. 이러한 뜻에서 하나의 마음속에 두 가지의 세계가 같이 있으므로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서 중생계와 깨달음의 세계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한 마음속에 변계소집성과 원성실성이 함께 존재한다는 유식불교와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 부처님의 씨를 간직하고 있다는 여래장 불교와 같은 맥이라 하겠다.
수상행식 역부여시(受想行識 亦復如是)
이상의 논리에서는 색에 한정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여기에 오면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까지도 모두 포함하여 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수・상・행・식 모두를 앞의 논리에서 색에 대비할 수 있으므로 다음과 같다. 수불이공(受不異空) 공불이수 수즉시공(受卽是空) 공즉시수, 상불이공(想不異空) 공불이상 상즉시공(想卽是空) 공즉시상, 행불이공(行不異空) 공불이행 행즉시공(行卽是空) 공즉시행, 식불이공(識不異空) 공불이식 식즉시공(識卽是空) 공즉시식. 일체제법인 물질과 정신적 존재는 모두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또한 일체제법과 다르지 않으며, 일체제법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일체제법이라는 논리와 같다. 이것은 결국 일체제법은 시간적으로 제행무상이며 공간적으로 제법무아이고 그렇기에 연기적 존재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연기법의 시간적 해석이 바로 제행무상이고, 공간적 이해가 바로 제법무아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승의 반야 공사상이 바로 연기의 사상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제법은 연기하는 존재로서 모두가 공이며, 무자성이고 무분별, 무아, 중도라는 중관(中觀)사상도 이 반야경의 공사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질인 색에서 보았을 때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며 정신인 수・상・행・식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사리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반야경의 핵심 사상인 공(空)이란 존재 본질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현상계에 나타나는 모든 존재의 본질을 공상(空相)이라고 하였다.『금강경』에서도 ‘일체의 모든 상이 상이 아니고 공임을 올바로 본다면 여래(如來)를 보리라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하였다.
이 장에서 일체제법은 공이기에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고 하고 있다. 공의 모양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공은 진리(眞理)를 뜻한다. 진여, 즉 진리는 나지도 멸하지도 안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아니하고, 늘고 줄지도 않는 절대계(絶對界)요 무위(無爲)의 세계이다. 우리는 보통 법이라고 하면 진리를 떠올린다. 그러나 법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리, 최고의 실재(實在)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는 존재를 의미한다. 우리는 불교를 공부할 때, 언제나 법의 개념 정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떤 때에는 법이 진리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삼법인(三法印)의 법은 진리를 의미하지만 그 구체적인 법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 법은 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의미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무아라는 뜻이다. 모든 진리는 무아라고 잘못 해석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에서 법(法)도 역시 존재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해석하면, ‘이 모든 존재의 공한 모양은’ 또는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그 상이 공이다’가 된다. 이를 유식불교에서는 ‘오로지 식만이 존재할 뿐 경계는 식의 표상에 불과하여 공이다’와 같은 의미이다. 법은 많은 경우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태어남과 죽음, 만들어짐과 사라짐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이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인과 연이 화합하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 인연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다. 불생불멸에서 사실은 부정이 아니라 생멸이란 고정된 실체적 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불(不)이란 부정의 개념을 도입했을 뿐이다. 여기서 불이란 부정의 의미라기보다는 연기의 의미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인연생기하여 인연소멸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不]는 의미 이다. 이 불생불멸은 우리에게 존재 본성의 영원성을 시사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생겼다고 해도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멸했다고 해도 완전한 단멸(斷滅)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인연 따라 다른 모습으로 겉모양을 바꾸었을 뿐이다. 누가 죽었다고 했을 때, 우리는 슬퍼하며 인생이 허무함을 한탄한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이 육체가 인연이 다해 쇠해졌기에 겉껍데기를 갈아입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한다.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나름대로의 업에 걸맞은 껍데기를 찾아 다시 태어나는 것일 뿐이다. 선업의 과보는 천상이요, 악업의 과보는 지옥이며, 탐욕의 과보는 아귀, 성냄의 과보는 수라, 어리석음의 과보는 축생이 된다. 모든 존재를 바라볼 때 생과 사, 유와 무를 초월하여 인연 따라 다만 흐르는 것이라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바로 공성의 올바른 이해다. 연기된 존재이기에 불생불멸이며 그렇기에 공인 것이다. 우리의 본성을 비롯하여 모든 존재의 본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하여 본래 생과 사가 따로 없다.
중관사상(中觀思想)에서는 불생불멸을 이렇게 설명한다. 촛불이 타는 모습을 예로 들면서, 촛불의 중앙은 찰라찰라 변화한다. 초의 기름이 녹아 타오르고 그 기름은 바로 산화하여 빛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우리는 촛불이 변함없이 계속 타고 있다고 믿는다. 중앙의 촛불은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멸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이다.
불구부정(不垢不淨)
공의 두 번째 모양은 더럽지도 않고[不垢] 깨끗하지도 않다[不淨]는 것이다. 일체 모든 존재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은 더럽거나 깨끗하다는 분별이 없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의 본성은 절대 청정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에서 청정(淸靜)이라는 것은 더러움의 반대 개념의 청정이 아니라 어느 것에도 비견될 수 없는 절대적인 청정성을 의미이다. 우리들이 흔히 깨끗하다, 더럽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분별심일 뿐이다.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생각은 상황 따라 인연 따라 다른 것이지 본래 더럽고 깨끗한 고정됨이 따로 있지 않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다는 상을 내며, 더럽다는 상을 내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분별심일 뿐이다. 존재의 본성, 인간의 본성은 더러워질 수 없는 절대 청정한 것이다. 다만 현실에서 행위를 어떻게 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인연가합(因緣假合)으로 잠시 동안 귀천이 생기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숫타니파타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출생에 의해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이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다.』55)
부증불감(不增不減)
마지막으로 공의 모습은 늘지도 않고[不增] 줄지도 않는다[不減]는 부증불감의 속성이 있다. 현상계의 물질적 정신적 모든 존재는 양(量)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하여 무한한 존재로서 원만 구족한 성질을 가진다. 존재는 그 자체로서 이미 원만 구족되어 있으나, 우리의 분별심이 부족하고 적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차별을 일으키는 것이다. 본래 물질에는 내 것 네 것이 있지 않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이것은 내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울타리를 치고 있기 때문에 그 울타리 안에 있는 것만 내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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