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 <광장>(2002. 9. 8)
선구적인 분단소설 혹은 정치허무주의
-최인훈의 <광장>
김용락(시인, 문학평론가)
최인훈의 <광장>은 1960년 10월에 발표된 이래 현재까지 40여년 이상을 꾸준히 주목받아온 작품이다. 우선 이 작품에 대한 평가를 보자. 문학평론가 김현은 <광장>에 대해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1960년은 학생들의 해이었지만, 소설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광장>의 해이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광장>에 대해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이후 <광장>에 대한 많은 비평들은 김현 특유의 과장 섞인 이 평가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은 칭찬 일변도였다.
다음으로 <광장>은 1960년 <새벽>지에 발표된 이후 정향사판, 신구출판사판, 민음사판, 문학과지성사 전집판 등 6개의 판본을 거쳐 전면개작 및 부분개작을 10여 차례 이상 행한 한국문학사상 작가가 가장 많이 고친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는 한국 현대소설사에서 가장 복잡한 원본확정의 과정을 거쳐 연구해야하는 작품으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아울러 이 작품은 4.19로 인해 가능했던 자유의 공간에서 씌어진 작품으로 어떻게 보면 정치적 상황의 덕을 가장 많이 본 작품이다. 이에 대해서는 초판 서문에서 저자 자신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아시아적 전제의 의지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 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여기서 새 공화국이란 4.19 이후 성립된 민주당 정권으로 곧이은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붕괴되고 만다. 민주당 정권은 5. 16 군사정권에 의해 방종과 무질서한 정권으로 매도되었지만 사실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사상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공간이었다는 게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좋은 작품이 탄생하기 위해서 정치적 사상적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작품이 반증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문학사에서 분단소설의 맨 첫머리에 얹히는 <광장>은 4.19의 소산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칠게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 이명준은 남한에서 대학교 철학과 3년에 다니는 대학생이다. 그는 부패한 남한실정에 염증을 느끼고 월북한다. 이 과정에 해방직후 박헌영계열의 남로당 간부로 활동하다 월북해 평양에서 대남방송 요원이 된 아버지 때문에 경찰서에 붙잡혀가서 고문을 당한다. 고문하는 형사는 일제 때 특고형사로 이명준은 마치 일제시대 때 고문 당하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된다. 이런 사정이 그의 월북을 부추기는 한 원인이 되기도한다.
북한 체제 역시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모든 게 당을 위해 존재하고 개인의 존재는 찾을 수 없는 폐쇄적이고 무거운 분위기는 그를 질식시킨다. 혁명도 아닌 혁명의 흉내 뿐인 북한 체제에 대해서도 역시 남한과 마찬가지로 절망한다.
이명준은 1950년 한국전쟁에 인민군으로 참가하여 포로가 된다. 포로 석방 때 그는 남북이 아닌 제3의 중립국을 택한다. 중립국으로 향하는 인도 배 타고르호에서 그는 실종된다.
이 작품이 한국 소설사에서 분단소설의 첫머리에 놓이는 까닭은 북진통일을 외치는 호전적인 이승만 정권 아래서, 혹은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 아래서 어느 누구도 마음 놓고 쓰지 못했던 남북한의 이념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점은 앞서 언급한대로 4.19가 가져다 준 정치적으로 자유로웠던 공간 때문에 가능했다.
분단문학이란 민족의 고통스런 분단현실을 작품의 소재로하면서 분단 극복의지를 작품에서 구현해야 된다. 이런 점에서 분단된 남북한의 정치체제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면서 민족이라는 집단적인 삶과 개인의 실존적인 삶을 교직한 이 작품은 뛰어난 분단소설로 읽힐 여지가 충분하다.
군데군데 작가의 지나치게 사변적인 진술이 소설의 긴장을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분단 현실에 대해 이 작품 만큼 진지하게 정공법을 택한 작품도 그리 흔치 않다. 남한 현실에 대해 "추악한 밤의 광장. 탐욕과 배신과 살인의 광장. 이게 한국 정치의 광장 아닙니까?"라고 일갈하기도 하고 북녘에서 만난 잿빛공화국에 대해 "이게 무슨 인민의 공화국입니까?"라고 반문하는 주인공의 태도에서 어느 한쪽도 이상적으로 정초되지 못하고 있는 민족 현실에 대해 주인공이 느끼는 분노에는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러나 내가 보기로 이 작품의 명백한 한계는 주인공 이명준이 남북 어느 곳도 선택하지 못하고 제3국을 선택한다는 사실이다. 명준이 포로수용소에서 중립국행을 주장하자 남한의 설득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식인일수록 불만이 많은 법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 몸을 없애버리겠습니까? 종기가 났다고 말이지요. 당신 한사람을 잃는 건 무식한 사람 열을 잃는 것보다 더 큰 민족의 손실입니다. 당신은 아직 젊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할일이 태산같습니다.....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서 , 조국을 재건하는 일꾼이 돼주십시오"
그러나 이명준은 나지막히 짧게 중립국이라고 말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중립국으로 향하게 된다.
이 설득자의 말처럼 종기가 났다고 자신의 몸을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이것은 남북한 공히 마찬가지이다. 그가 책임감 있는 인물이라면 섣부른 제3국행이 아니라 두 체제 가운데 어느 한 체제를 선택해 체제개혁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역사와 민족 뿐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대해 책임지는 태도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의문이 되는 것은 부패한 남한체제에 절망해 월북하고, 다시 획일적인 북한체제에 적응하지 못해 제3국을 택하는 주인공의 태도가 과연 옳은가 하는 점이다. 이는 정치허무주의와 지식인의 기회주의에 다름 아니다.
길게 지적할 여유는 없지만 이명준의 이런 선택은 이미 예고되어 있다. 북한에서 인민군의 신분으로 낙동강 전투에 투입된 후 전쟁터에서 벌이는 애인 은혜와의 사랑 놀음도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하다. 물론 전쟁터라고 사랑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만 그것도 정도 문제이다. 손에 수술용 가위를 들고 또 한 손에 작전보고서를 들고 전선을 이탈하여 동굴에서 사랑을 나누는 이명준과 은혜의 태도는 비현실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소설에서 이런 상황의 설정은 작가의 리얼리즘 정신의 부재를 의미한다. <광장>이 평단에서 소위 자유주의 비평가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반면 리얼리스트들에게 외면 당하는 가치의 편중 현상은 주인공 이명준이 보여주는 제3국행이라는 정치허무주의적 태도와 전투장면에서의 비현실적인 상황설정, 그리고 소설 내면으로 녹아들지 못한 작가의 날익은 사변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점을 수긍한다고 하더라도 <광장>이 분단문학에서 갖는 선구적인 의미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광장>이 태어나던 1960년 이전까지 한국 소설은 그만큼 민족 분단에 대한 인식을 게을리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구대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