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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적 생성과 초월의 서정미학
― 이운룡의 시세계
이언 김 동 수
I.
중산(中山) 이운룡(李雲龍: 1938〜) 시인은 전북 진안 출생이다. 고등학교 재학중 전주 시내 남녀 학생 10여 명과 ‘영토’ 동인을 결성, 매월 자작시 발표를 하였는가 하면, 졸업 기념으로 시집 『황무지』를 발간(1958)하는 열혈 문학청년이었다. 전북대 국문학과 재학 중(1962년)에는 경북대 주최 전국대학생 문예작품 현상 공모에서 시 「기도」가 당선(김춘수 심사)되어 문명을 떨치기도 하였다.
1964-1969년 『현대문학』지를 통해 시 3회의 추천을 완료하고 등단한 이래 1983년 『월간문학』지에 문학평론 「시와 자기 부정의 변증법」이 당선되어 시와 문학평론을 겸하여 활동하고 있다.
1958년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 전주기전여고(1965), 전주성심여중 ․ 고, 전주해성중 ․ 고 교사를 거치는 동안 한남대 대학원(문학석사)과 조선대 대학원(문학박사)을 수료(1989년)하였다. 1998〜2003년까지 중부대 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정년퇴임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집 『가을의 어휘』(1974년) 등 14권, 시비평서 『시와 역사현실의 명암』 등 11권을 펴내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월간문학동리상, 조연현문학상, 한성기문학상, 서울신문향토문화대상, 전라북도문화상(문학부문), 전북문학상, 표현문학상, 모악문학상, 작촌문학상 등을 수상하면서 현재 『전북문학관』 초대〜2대 관장으로서 자료 발굴과 정비 등 삼국시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북문학사를 총체적으로 정리 전시하는 한편 시창작에도 여전히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의 시세계는 대략 3단계로 구별된다.
1960년대 그의 시는 자연서정에서 출발하였으나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왜곡되고 억압된 현실과 사회적 불의에 대한 비판 및 민중의식으로 전환, 리얼리즘의 성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이 종식된 1990년대 이후부터는 보다 심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본질 탐구에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2010년에 이르러서는 시 형태를 간결한 산문체로 전환, 새로운 광맥을 탐구하는 시적 변모를 보여주고 있다.
겨울 아침 뜨락에 나와 앉았다.
덜 깬 꿈을 쫓듯
나무는 長身의 귀밑에 달린
말방울을 울리고 있다.
가끔씩 고요를 잡아채면서
겨울 낯
가운데
한 발 들여놓고 있는
뜨락,
몇 마리 햇볕이 내려와
종알거리며 노란 깃을 접었다.
마악 모이를 들고 나온
神의 손바닥 위에
모여든다.
아, 나날은 빛나는 부리.
어느새 쪼아 먹은 神의 말씀.
― 「겨울 뜨락」 전문, 1974년 『시문학』 4월호
첫 시집 『가을의 어휘』에 실린 작품이다. 이 시를 보면 ‘겨울 뜨락’과 ‘신(神)의 손바닥’, ‘햇볕’과 ‘새(鳥)’가 등가(等價)의 개념, 곧 하나가 되어 모이를 ‘쪼아 먹은’ 초월 은유의 세계를 보이고 있다.
‘뜨락이…고요(靜)를 잡아채고(動)’, ‘햇볕이 (새처럼) 내려와 종알거리며 깃을 접고’, ‘나무(視)’가 ‘말방울(聽)을 울리는’ 등 정령사상(animism)을 바탕으로 한 문학적 상상과 사유의 깊이로 장자(莊子)의 물아일체를 이루고 있다.
이는 정(靜)과 동(動), 주(뜨락)와 객(노란 깃=햇빛), 사물과 사물이 시공을 넘나드는 신비로운 물화지경(物化之境)의 모습이다. 이런 경향이 이운룡 시의 초기 모습이다. 이처럼 주체와 대상이 조화 ․ 혼융되어 일체를 이루어 가는 정경교융(情景交融)은 인간이 자연에 다가가는 것이 도(道)이고, 도는 곧 미(美)와 낙(樂)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동양미학의 정수이기도 하다.
중국 성당(盛唐)시대의 시인 우량사(于良史)가 지은 시 「춘산야월(春山夜月)」에서 ‘두 손으로 물을 뜨니 손 안에 달이 있고(掬水月在手), 꽃과 함께 노니 향기가 옷에 가득하네(弄花香滿衣)’라고 노래한 바와 같이 ‘달과 물’, ‘꽃과 향기’가 일체로 물화(物化)되어 있음도 곧 이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나의 막강한 무기는
번쩍이는 칼날보다
쓰러진 풀잎을 일으키는 데 있다.
나의 버림받은 언어는
천 개의 무딘 혀보다
두근거리는 심장에 있다.
누가 이 풀잎의
이슬방울 속에 들어와
세상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누가 이 풀잎의
풀꽃 속을 헤쳐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오, 보이지 않는 얼굴의
보이지 않는 미소여!
오, 떨어지지 않는 손의
떨어지지 않는 체온이여!
― 「나의 무기」 전문, 1977년 『현대문학』 8월호
‘번쩍이는 칼날’의 위세보다, ‘쓰러진 풀잎을 일으켜 세우는’ 억눌린 자들에 대한 연민과 상생(相生), 이는 일찍이 딜타이가 천명한 ‘문학은 인간을 무지와 불안, 공포로부터 영원히 지켜주는 위대한 초병과도 같다’는 시정신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뿐만 아니다. 감언이설의 ‘혀’보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보이지 않는 얼굴의/보이지 않는 미소’를 보는 통찰의 휴머니즘을 통하여 이후 이운룡 시에서 일관되게 드러나고 있는 ‘그늘의 미학’이 엿보이기도 한다.
소를 팔 때에 나는 울었다.
아버지를 따라 읍내 쇠전에 갔을 때
젖이 불어 새끼를 찾는 소들이
젖이 그리워 어미를 부르는 소들이
말뚝에 매여
그 무엇보다도 길게 울음을 보내고 있을 때
나는 소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
- 중략 -
제가 숙일 수 있는 머리를 끝까지 숙여
마지막엔 제 살 뼈 가죽까지 바쳤어도
소가 소 이상일 수 없는 소.
― 「쇠전의 哀歌」 부분, 1982년 『꺼지지 않는 횃불로』, 창작과비평사
시인은 전북 진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산골에서 소는 농사를 짓는데 없어서는 안 될 가축으로 우직하고 순박한, 그러면서도 인간과 친근한 동물이다. 그러나 일생 동안 주인을 위해 고된 노동만을 일삼다 끝내는 무참하게 도살당하고 마는 것이 소의 운명이다. 이러한 소의 참혹한 운명에 대한 시인의 연민과 분노가 남달리 뜨겁다.
이 같은 소의 운명 앞에서 시인은 절망 대신 도전의 길을 택한다.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다 죽어가는 무력한 소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소의 운명에 도전하여 보다 넓은 세계로의 탈출을 꿈꾸는 ‘무서운 뚝심’이 시의 내면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운명의 사슬에 얽매인 채 제 꿈을 펼치지 못한 뭇 생명들에게 바치는 헌사요, 자신의 또 다른 분신에 대한 실존적 인식과 자존에서 비롯된 뜨거운 생명의식의 분출이라 하겠다.
이 가슴 울리지 않는 북이 되어
한 천 년쯤 두들기면 소리 날까요?
멍들어 시펄시펄한 세월
먹피를 사발로 퍼내면서
- 중략-
북이여, 나의 가슴이여
둥둥둥 둥둥둥 울려만 다오
곤장을 맞으면 몇 개가 더 부러져야
이 가슴 북이 되어 울릴 것인지
억울한 울음에도 소리 나지 않고
혼자 코 먹은 눈물 훌쩍이는 나의 북이여.
― 「이 가슴 북이 되어」 부분, 1982년 『신동아』 4월호
‘울고 싶은 북’ 그러나 ‘울리지 않는 북’의 모습 또한 앞의 ‘고삐에 얽매인 소’의 이미지와 다르지 않다. 두 편의 시에서 드러나 보이는 ‘소’와 ‘북’의 이미지는 현실에서 분리된 소통 부재의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중심에서 밀려난 주변인들의 모습들이다. 그만큼 현실을 벗어나 보다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열망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울리지 않는 북’은 이미 북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세상과의 단절로 사회적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화자의 우울한 초상에 다름 아니다. 그 무엇에도 억울함을 해소할 곳이 없던 1980년대 초 종교마저 억울함을 달래주지 못해 서러움이 더욱 증폭되었던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하여 볼 때, 이 시에서의 ‘울리지 않는 북’, 아니 ‘울 수 없는 북’은 당시 군부 독재라는 시대상이 투사된 상관물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나는 시대에 민감한 시를 쓰고자 한다. 그러니까 자연히 현실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바탕으로 사회나 역사적인 문제가 개입된다. 신神의 문제나 인간과 사물의 본질세계를 다루어야 한다든지 하여 문학의 영원한 감동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한편 나는 이런 궁극적인 문제를 현실생활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 1982년, 시집 『이 가슴 북이 되어』(『창작과비평사』) ‘서문’에서
II.
그러나 1990년에 들어와 시집 『사랑의 반지름』 상재를 계기로 그의 시는 이전보다는 보다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쪽으로 차분하게 기울어져 가게 된다. 그 첫 시도가 ‘사랑’에 대한 본질 탐구의 세계다.
내 사랑의 반지름 긋고
그리움으로 팔을 뻗으면
그대 사랑의 반지름 만나
하나의 지름으로 사랑의 다리가 됩니다.
무한대로 반지름 긋고
무지갯빛 찬란한 원을 그리면
비로소 우리는 하나의 사랑
사랑의 우주를 이룹니다.
지상에서의 만남과 헤어짐이나
목숨이 더 길고 짧은 것이나
기쁨과 슬픔이 부딪쳐 하나일 수 없음도
이 우주 속에 일렁이는 섭리이며
태초의 소용돌이 같은 것.
사랑은 생성하는 힘이오라
그대와 나의 반지름 만나
지름다리로 잇는 영원인 것을
우주의 숭고한 숨결인 것을.
― 「사랑의 반지름 ․ 1」 전문, 1988년 『경향잡지』 9월호
이운룡 시인은 궁극적으로 원(圓) 같은 큰 사랑을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의 출발은 ‘내 사랑’이라고 하는 ‘반지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나머지 반은 ‘그대 사랑’이다. 나와 그대의 사랑이 ‘그리움’으로 ‘무지갯빛 찬란한 원’을 그리면‘ 비로소 하나의 사랑’이 완성된다는 논리다.
다시 말해 ‘나의 사랑’이라는 반지름과 이 반지름을 축(軸)으로 하여 ‘그리움’(혹은 창조적 에네지)이라는 추동(推動)의 ‘팔을 뻗어’ 원을 그려나가다 보면 나머지 ‘그대 반지름’을 만나, 비로소 ‘우주의 숨결’이라고 하는 보다 큰 ‘사랑’(圓)을 이루게 된다는 보다 큰 사랑의 방정식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사랑은 ‘사랑=그리움’이고, 이 사랑의 그리움 속에서 ‘만남과 헤어짐’,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 등이 갈등과 화합을 반복하면서 변증법적 통합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사랑의 우주’ 혹은 ‘우주의 숭고한 힘’이라고 명명한다. 그의 사랑은 이처럼 나와 너, 생성과 소멸, 색(色)과 공(空)의 세계를 넘나들며 점차 존재의 본질과 그 실재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으로 우주 자연과의 합일을 꾀하게 된다.
수천만 은행잎의 눈빛이 휘황찬란하다.
제가 켜든 말의 불빛에 놀라
온 몸이 자지러지는 듯
하늘로 오르는 길
땅으로 내려가는 길을 잊고서
어쩔 줄 모르는 은행잎들,
깊이 떨어진 것들은 밟히고
부대끼면서
한 생의 아픔은 이런 것이라고 침묵한다.
남은 잎들은 제 운명을 서서히 삭히면서
허공을 만나
삶과 죽음을 한 물로 섞고는
더 밝은 빛을 반짝인다.
하늘과 땅이 지상에 한 살림 차린 것이다.
이 늦가을 마른 옷자락 잡고 투정하려고
손을 내민 목숨의 절정 몇이
안타깝게
지금, 막
몸을 날려 허공에 매달린다.
몸을 흔들고 시간을 늦추면서
더 오래 매달리려 안간힘을 쓰지만
이윽고
작은 우주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만다.
길은 조용하다.
― 「길이 환하다」 전문, 2004년 『월간문학』 4월호
은행잎들이 한 때 ‘눈빛이 휘황찬란’하도록 제 몸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오르는 길’을 시도한다. 어떻게든 더 오래 생명(나뭇가지)에 매달려 보려고 ‘몸을 흔들고 시간을 늦추면서… 안간힘을 쓰지만’ 끝내는 땅 바닥에 제 ‘작은 우주(몸)’를 내려놓고 조용하게 최후를 맞는다. 그 때에야 비로소 ‘길이 환하게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불가(佛家)의 『열반경』처럼 해탈이 곧 열반이고, 열반이 곧 해탈인 셈이다.
은행잎의 일생이라 할 색계(色界)를 통해 우주의 본질적 법계(法界)를 시인은 이렇게 입상진의(立象盡意)의 선적 비유를 들어 일깨우면서, 상반된 모순 속에서도 동일성의 추구, 곧 견성(見性)의 깨침으로 정신적 사유의 내연과 외연을 넓혀가고 있다.
산새의 집에는 어떤 슬픈 비밀을
숨겨놓았는지
아무리 엿보려 해도 창이 없다.
침 발라 구멍을 뚫고
눈을 밀어 넣으려 해도
창호지 봉창이 안 보인다.
오직 방문 하나
빠끔히 열어놓고 사는 집이거니와
하늘 전체가 門인 산새의 집.
그래서 하늘 문을 열어놓고
새들은 깃을 쳐 파랗게 하늘을 쓸고는
저들끼리만 마음대로 들고 난다.
하늘의 마당은 넓기도 하지만
아무나 발 들여놓지 못 한다.
몸을 줄이고 뼛속까지 파내어 가벼워진 새,
그 중 뼈 몇 개만 추리고 또 추려서
얽어맨 산새들만 들락거린다.
호롱 호오롱 호오로롱……
뼈아픔 삼키다 걸려 속울음 내뱉는
죽음보다 더 슬픈 눈비가 되어
하늘의 집을 지키면서.
― 「산새의 집에는 창이 없다」 전문, 2004년 『시문학』 10월호
‘산새의 집’이 곧 ‘하늘의 집’이라는 견성의 초월적 은유가 이 시의 주요 내용이다. 양자(兩者), 곧 대상과 대상, 주체와 객체 사이에 창이라는 벽이 가로놓여 있지 않기에 ‘산새의 집’이라고 하는 소혈(巢穴)이 ‘하늘의 마당’이라고 하는 대우주의 문(門)과 서로 통하게 된다는 등식이다. 경계를 허물면 우주와 통하게 된다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의 경계다.
‘산새의 집’이면서 ‘하늘의 집’이 되는 ‘소(小)와 대(大)’, ‘색과 공’, 어둠과 밝음이 하나가 되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법계(法界)에서, 그의 시는 상반된 모순 속에서도 동일성의 길을 찾아 보다 큰 세계로 생성해가는 대이화지(大而化之)의 길을 지향하고 있다.
III.
최근에 이르러 그의 시는 산문시의 형태를 취하면서 존재론적 본질 탐구와 그에 따른 언어의 미적 탐구에 열중하면서, 이러한 수행의 결과로 2013년 12월, 이운룡 시인은 제32회 조연현문학상(한국문인협회)을 수상하게 된다.
그의 시는 어둠을 짜내어 진동을 일으키는 눈빛이 되고, 꿈이 되고, 향기가 천지를 덮는 현학적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어두워야 빛이 나는 삼라만상, 그런 눈빛을 읽 어낼 줄 아는 통찰력과 어안魚眼, 철학적 시안詩眼을 높이 평가해 문학상 수상자로 선 정했다. -심사위원(김후란, 이근배, 윤후명, 장윤익, 김우종, 박성배)의 심사평에서
이운룡 시인 자신도 시집 『어안魚眼을 읽다』의 ‘머리말’에서, “물고기는 살아서 또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일언이폐지왈 생사불이(生死不二)이다. 어안魚眼은 궁극적으로 시적 상상력을 표상한 사물이며 그 이미지인 것이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곧 실재와 현상 너머의 세계를 어안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최근 그의 그의 시적 담론인 ‘모순된 세계에서의 동일성 추구’라는 화두가 그것이다.
눈물은 꽃이다. 눈물이 없으면 별은 반짝이지 않고 눈물이 없으면 마음꽃은 향기를 품지 못한다. 눈물은 반짝이며 흐르는 향기이고 내가 당신에게로 흘러가는 사랑이다.
눈물은 만나서 바다가 되는 큰사랑이다. 눈물을 마음껏 흘리자. 흘려서 가슴속에 퍼 담자. 눈물이 마른 가슴은 돌이고 어둔 허공이다. 그래, 가슴이 예쁜 사람은 눈물도 아름답다. 아름다운 눈물을 퍼 담는 일은 나와 당신이 만날 수 있는 희망이다. 가슴 이 넓은 사람에게는 눈물과 사랑도 많다. 그러므로 눈물은 일평생 길눈 뜨고 손잡고 갈 발을 따뜻이 적셔준다.
― 「눈물」 전문, 2010년 『시안』 봄호(통권 47호)
시가 논리적이고 명쾌한 은유로 엮어져 있다. 여기에서도 남다른 형이상학적 인식의 깊이와 통찰에 의해 그의 시는 보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생명미학, 곧 휴머니티 추구와 맞닿아 있다. ‘눈물’이란 인간 본연의 순수와 진정성 그 자체로서 공자가 일찍이 말한 ‘사무사(思無邪)’의 세계와 동맥을 이루는 시적 뮤즈(Muse)의 세계와 다름이 아니다. 이러한 ‘눈물’이야말로 메마른 우리의 가슴에 ‘꽃’을 피우게 하고, ‘반짝이게’ 하는 ‘별’이 되어 ‘당신의 바다’ 앞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랑’이라고 명쾌하게 천명하고 있다. 그는 7순 기념시집 『산새의 집에는 창이 없다』(신아, 2006)의 ‘책머리에’서도
시정신의 근본 틀은 존재의 본질 파악이나 삶의 궁극에 근접하려는 몸짓에 있 다. 그 하나, 하나의 몸짓이 나의 시인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필생의 업으로 삼고 있 는 언어 작업이란 것을 ―존재의 표현이든 미의식의 표현이든― 다른 측면에서 규명 한다면 서정적 본질을 객관적으로 형상화한 존재의 실체라고 말해야 좋을 것이다. (…) 시 또한 언어로 그린 개개인의 다종다양한 초상화요 그 자신의 내면세계를 재구 성한 존재의 미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와 사물과 삶과의 은밀한 소통 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비집고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편이며, 존재의 실체를 파악하려 는 긴장의 절정에서 집중된 영혼의 언어로 그 대상을 표상하려고 진력한다.
이운룡 시인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본질 탐구>와 그 본질에 핍진하여 다가가려는 <미적 언어 표현>이 그의 시의 요체임을 밝히고 있다. 기표(記票)이면서 기의(記意)가 되고, 존재이면서 본질이 되는 언어 미학, 그 하나하나의 몸짓이 되기를, 그리하여 ‘나라고 하는 사람은 여기에 이렇게 있는 하나의 자연, 그 실존이고 실재이고 존재 자체가 아닐 수 없다.’(<시작노트>)는 말마따나 그는 궁극적인 자아(실체)와 우주적인 자아가 하나로 습합되기를 꿈꾸고 있는 형이상학적 초월의 언어미학자라 하겠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아름답고(beautiful) 속성적으로 진실(true)하다’는 워렌(Warren)의 말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어찌 보면 유미적 예술지상주의 혹은 영원주의와도 다르지 않은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어 현상보다는 본질에 가깝게 다가가고자 하는 시인이 이운룡이다. 그러면서도 관념적인 본질이 아니라 현상적인 본질, 현상(色身) 속에서 법신(法身)을 보는 시인, 더불어 ‘현상의 법신관(法身觀)’을 그의 시로써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는 시인이라 할 수 있으리라.
VI.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최근에 들어와 그의 시는 실재하는 삶의 영토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먼 곳’으로까지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그것은 물리적, 심리적 개념만이 아닌 보다 근원적, 존재론적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그의 시의 특장(特長)인 ‘그늘의 시학’, ‘뒤꼍의 미학’이 연조를 거듭하면서 다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뒤꼍’은 가시적·현상적인 색계(色界)가 아니라 불가시적인 ‘우주적 도(道)’와 맥을 같이하는, 보다 큰 본래적 자연의 세계이다.
모든 빛깔에는 뜨거운 그늘이 있다. 우리의 몸 그늘도 뜨겁다. 때가 절어 더께 앉 은 어린 손, 오그라든 손바닥을 펴서 겨우 내민 걸인의 손을 잡고 마음이 상한 손 그늘도 뜨겁다. 눈물보다 눈물의 그늘은 더 뜨겁다. 세상의 입방아에 장치한 시한 폭 탄 뇌관을 십초 내에 해체하는 가슴 떨림의 빛깔도 뜨겁게 곱다.
장님의 지팡이 끝에 부딪친 투박한 울림의 소리그늘은 깊은 파문을 일으킨다. 사람 과 사람 사이, 자동차와 자동차 사이, 벽과 벽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빠져나가고 꺾 어 돌고 건너뛴다. 그의 눈 그늘은 더욱 환하다. 어둠 속에 뜬 한 수저의 밥, 밥상을 들고 나가는 뒷모습, 손끝에 물든 색채가 진풍경을 이루는 순간의 빛깔도 뜨겁다. 귀 와 입의 그늘은 체온보다 뜨겁다. 닫힌 귀를 노크하면 말들의 아메바가 황급히 뛰쳐 나와 찐득찐득 묻어난다.
― 「뜨거운 그늘」 일부, 2011년 『동리목월』 여름호
높은 산, 아름다운 산의 뒤편에는 깊은 계곡의 그늘이 있다. 세상의 모든 빛깔 그 뒤편에는 이처럼 ‘그늘’이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것도 그냥 ‘그늘’이 아니라 ‘뜨거운 그늘’이라고 한다. 만상(萬象)이 눈에 환히 보이는 양지보다는 음지에 가려 보이지 않는 ‘인간의 그늘’을 거두어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있음’은 ‘없음’으로부터 나온다는 노자의 유생어무(有生於無)와도 같은 맥락이다. 진정한 힘이란 오히려 ‘무(無)’로부터 나온다는 선사상(禪思想)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보이는 현상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투시할 줄 아는 혜안과 통찰(insight)이 이운룡 시인의 시안(詩眼)이다.
통찰은 무(無)의 유(有), 유의 무, 곧 공즉색(空卽色) 색즉공(色卽空)의 분별과 경계가 없는, 아니 경계를 뛰어넘는 절대자유의 중도(中道)에 의해서만 정신적 개안이 가능한 개안이다. 이러한 중도의 위치에서 이 시인은 세상을 정관하고 있다.
낙엽!
너는 하늘의 깊은 침묵이다.
너의 가냘픈 충격이 지구를 짓눌렀다.
가을 잎인가, 가을 파편인가?
하늘 잎인가, 하늘 파편인가?
나풀
나
푸울……
떨어지는 가을 잎, 가을 파편이
하늘 잎, 하늘 파편이
지금 막 땅바닥에 몸을 부려버렸다.
저, 한 잎 생生의 파편,
너 때문에 나는
세상으로 가는 길을 잃고 말았다.
― 「낙엽」 전문, 2013년 월간 『창조문예』 200호
‘낙엽’이 곧 ‘하늘’이요 ‘우주’라고 하는 우주적 통찰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기에 하나의 ‘낙엽’은 지구의 현신(現身)이요,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도 이와 다르지 않은 정서적 등가물이 되어 있다. 덧붙여 말하면 ‘하늘 잎(낙엽)’과 ‘땅바닥’이 하나가 되는 물화지경(物化之境) 앞에서 시인은 하나의 게송을 읊고 있는 셈이다. ‘땅바닥이 하늘인가?/하늘이 곧 땅바닥인가?/시방천지가 다 하늘이고 땅이거늘/어디를 향해 길을 찾아 간다 하는고!’가 그것이다.
장자(莊子)는 말한다. 도안(道眼)으로 관(觀)하면 ‘이룸(成)이 곧 헐음(毁)이고 헐음이 곧 이룸으로 통하여 하나가 되기 마련이다’라고. 그러니‘길을 잃음(亡)은 곧 새로운 길을 얻음(生)’인 것이다. 그래서 낙엽이 ‘하나의 길(낙엽)을 잃더니 또 하나의 길(땅)로 떠나간다.
하지만 우주와 합일되니 ‘이 아니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시인이 되묻고 있는 셈이다. 절대우주 앞에 한 잎의 낙엽으로 내려앉은 실존적 자아의 우주적 통찰이 시와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된 형국이다. 마치 ‘시와 도(道)’, ‘도와 시’가 하나가 된 시선일여(詩禪一如)의 경계가 아닐 수 없다.
만해가 백담사에서‘천지가 다 고향인데(男兒到處是故鄕), 그 누가 타향의 설움을 노래하는가(幾人長在客愁中)’라고 읊었던 오도송(悟道頌)처럼, 이운룡 또한 미몽의 소지(小知)에서 대지(大知)의 각(覺)으로 거듭나는 장자의 대이화지(大而化之)라는 법열 앞에 하나의 오도송을 읊고 있다. 이제까지의 길을 접고, 또 다른 길, 또 다른 파편으로 어디를 향해 또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햇살 속에서 햇살의 뉘를 골라내었네. 햇살들을 가슴에 퍼 담고 보니 하늘 건반을 뛰어 다니는 詩알갱이들이 오선지에서 푸른 그네를 타네.
그 소리방울 속에서는 지상의 꽃도 새소리도 피어나고…
그대 사랑, 새소리 한 아름 하늘꽃잎 팔랑팔랑 향기롭게, 천사의 하늘말도 봉긋봉 긋 피어나네.
— 「하늘건반」 전문, 2013년 『한국문학예술』 여름호
동심처럼 맑고 신선한, 그러면서도 천진무구한 별유천지비인간의 선경이다. 이리하여 탁류의 역사와 사회적 모순 갈등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치열한 리얼리즘은 사라지고 철학적 사유와 명상의 각자(覺者)로 거듭나 있음을 보게 된다.
삶의 궁극과 존재의 본질 탐구, 열린 의식으로 보다 깊고 심오하게 우주 자연과 더불어 생성 혼융되고, 자연과 물화(物化)를 이루어가는 그의 초월 은유의 서정미학은 이런 의미에서 한국시사에 새롭게 자리매김 되리라 본다.□
첫댓글 물결처럼 술술술 흘러나오는 문체와 시적 상상력이 청춘과도 같은 이운룡 시인의 시세계를 현미경처럼 섬세하게 써내려가신 글 참 잘 읽고 공부하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이운룡 교수님의 시세계는 서정적이라기보다는 명상적이지요
삶을 통찰하는 깊은 시세계, 교수님의 평론과 더불어 한층 더 빛이납니다 ^^*
교수님! 이 모든 자료 너무 감사합니다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좋은자료 시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날렵한 시의 정곡, 통쾌합니다, 수고 많으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