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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성인의 어린 시절
“성인들의 성 미카엘”는 1591년,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도시 비크(Vich)에서 태어났다. 당시 비크는 고대로부터 기독교 신앙의 씨앗이 뿌려진 유서 깊은 지역으로, '아우소나(Ausona)'라는 고명으로도 불렸다. 중세 시기 오토 (Otón) 왕이 이 지역을 비크 교구에 하사하였고, 이후 몬카다 가문과 함께 소유하게 된 교회령(敎會領)의 중심지였다. 무어인의 정복 이전부터 이미 주교좌가 자리했던 이 도시는, 스페인 교회 역사 속에서도 가장 오래된 문서가 남아 있는 교구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비크의 주교들은 종종 타라고나와 톨레도에서 열린 지방 공의회에 참석함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지키고 신앙 공동체에 기여해 왔다.
이와 같은 깊은 신앙 전통을 지닌 도시에서, 미카엘 성인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성인의 부친은 엔리케 아르헤미르(Enrique Argemir)였으며, 모친은 몬세라트 마르가리타 미트쟈나(Montserrat Margarita Mitjana)로, 비크 출신의 여성이었다. 두 사람은 오랜 기도와 성찰, 주변의 조언 끝에 결혼을 결심하였고, 이 지역의 전례적 관습에 따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성령의 은총 안에서 합의되었으며, 이 결혼이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서문이 붙은 혼인 계약서(결혼 장)를 작성하였다. 이 혼인문서는 오늘날에도 비크 교구의 문서보관소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두 사람의 결혼은 사기몬 페레레스(Sagimón Ferreres) 주교 대리의 주례 아래 경건하게 이루어졌다.
성인의 가정은 많은 자녀를 두었으나, 그 중 세 명인 마리아나(Mariana), 오노프레(Onofre), 요한(Juan)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 뒤로 막달레나, 하이메, 그리고 일곱 번째 자녀로서 미카엘이 태어났다. 1593년, 막내 하신토(Jasinto)가 태어난 이후에는 어머니 몬세라트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가족은 ‘유프라시나(Eufrasina)’라는 여인을 들여 어린 미카엘과 자녀들을 돌보게 하였으며, 그녀는 오랫동안 미카엘의 양육을 맡게 되었다.
성인의 가정은 그리스도 신앙의 향기가 가득한 집안이었다. 부모는 날마다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성무일도를 바쳤으며, 매주 대성당의 주일 미사에 온 가족이 참석하였다. 주일마다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신앙서적을 낭독해 주었고, 식사 전후에는 정해진 기도를 함께 바치는 전통을 지켰다. 또한 '로톤다 지역의 성모 경당'을 자주 방문하며 성모께 특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자녀들 가운데 막달레나와 하이메는 특히 경건함으로 이름났으며, 미카엘 또한 이러한 신심의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레 기도와 경건의 삶을 체득하게 되었다.
이렇듯, 성 미카엘은 신앙의 뿌리가 깊은 고장과 경건한 가정 안에서 성장하였다. 성인의 어린 시절은 고통과 죽음, 사랑과 기도가 함께한 시간들이었고, 훗날 자신의 모든 존재를 봉헌함으로써 하느님께 나아가는 성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1595년 2월 2일, 미카엘의 어머니 몬세라트가 세상을 떠났다. 부친 엔리케는 사랑하는 아내의 시신을 하루 동안 집에 모셔 두고 온 가족을 곁에 불러 모아 마지막 작별 기도를 올렸다. 이어 그는 사제들에게 간청하여 장엄 미사를 봉헌하게 했고, 아이들—특히 막내딸 막달레나가 아직 아홉 살이 되기 전이다— 과 함께 어머니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집안일은 가정부 유프라시나가 맡았고, 자녀 교육을 위해 ‘클란셋’이라는 교사를 들였다.
미카엘의 아버지 엔리케는 아내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자녀들의 장래를 준비했다. 큰딸 막달레나는 이웃 카탈리나 캄파나에게 맡겨 돌보게 했고, 가정교사 파우 카브라나를 들여 아이들의 학문과 신앙을 지도하게 했다. 한편 형제자매들은 차례로 마리아나 안드레아, 오노프레 베르나베 파블로, 요한, 아구스틴 베드로, 비올란타 막달레나 안젤라, 하이메 요한 프란시스코, 일곱째 미카엘, 막내 요한 프란시스코 하신토로 기록된다. 어린 미카엘에게는 유프라시나가 사실상 어머니 같은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이 무렵부터 미카엘의 비범한 영적 기질이 두드러졌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마다 미카엘은는 《성모의 비애와 애가(Plantu y de dolores de Nuestra Señora)》를 읽으며 십자가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것은 단순한 어린아이의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죄가 예수님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의 고통을 초래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깊은 회개의 눈물이었다. 여섯 살 무렵 어린 미카엘은 친구들과 ‘미사놀이’를 하며 제대에 서는 사제 역할을 자연스레 맡았고, 학교길에도 성당에 들러 기도하곤 했다. 친구 아로미르는 “쉬는 시간마다 사라진 미카엘을 늘 ‘라 메르세드 (La Merced)’ 성당에서 찾았다”고 증언한다.
결정적으로 아홉 살이 되던 해, 미카엘은 비크의 도미니코회 수녀원인 산타 클라라 성당에서 또래 친구들과 함께 개인 서원을 바쳤다. 미카엘이 선언한 것은 평생을 하느님께 바치는 순결의 서원이었다. 이는 누가 시킨 것이 아닌, 어린 영혼 깊숙이 울려 퍼진 내적 부르심의 응답이었다. 부친 엔리케가 장난스럽게 “언젠가는 네가 결혼도 하지 않겠느냐?” 하고 묻자, 미카엘은 단호히 “이미 주님께 정결을 서원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처럼 어머니의 죽음과 가정의 시련 속에서도, 미카엘은 그리스도와 성모님께 향한 순수한 사랑과 결심을 더욱 굳건히 다져 나갔다.
“성인들의 성 미카엘”은 어린 시절부터 깊은 신앙심과 극기 생활로 주변의 경외를 샀다. 미카엘의 형 하이메와 친구 마르파의 증언에 따르면, 미카엘은 불과 일곱 살 무렵부터 매주 이틀 또는 사흘씩 단식했고, 사순 시기에는 절반 이상을 금식으로 보냈다고 한다. 미카엘은 단지 음식을 절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빵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며 실제적 자선을 실천했다. 또 다른 증언자인 마날트는 추운 날씨에도 단 한 벌의 셔츠만 입고 다니며, 자신의 점심을 굶고 이를 어려운 이들에게 베풀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미카엘은 이러한 선행을 결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허영이나 형식적인 습관으로 하지 않았다. 미카엘은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더욱 깊이 일치하고자, 도시의 번잡함을 떠나 보다 철저한 희생의 삶을 추구했다. 어린 나이에 성 프란치스코를 본받아 가시덤불 위에 몸을 던지며 고통을 통해 주님과 일치하려는 열망을 품었다.
이러한 갈망은 그를 은수자의 삶으로 이끌었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친구 마르파와 또 다른 친구를 데리고 몬세니 산으로 올라가 수도 생활을 시도했으나, 결국 어린 나이에 느끼는 외로움과 두려움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실패는 끝이 아니었다. 아홉 살이 되자 미카엘은 또다시 친구들을 모아 두 번째 시도를 감행했다. 이번엔 동행 중 한 사람의 이름이 세히스문도 비녜스로 전해진다.
그러나 반복된 산속 생활이 쉽지 않았기에, 미카엘은 동료들에게 각자의 집에서 회개의 삶을 이어가자고 제안했고, 자신들의 집에 작은 기도방을 만들어 회개와 정결의 삶을 계속해 나갔다. 이 기도방에서 성인은 거룩한 성모 마리아의 상 앞에서 다시 한번 정결의 서약을 바쳤다.
이 무렵 미카엘의 부친 엔리케는 비크와 만례우를 오가며 가정을 부양하고 있었다. 그는 루이스 펙사우라는 이웃의 집 근처에 두 개의 토지를 구입했고, ‘산타 클라라 벨라’라 불리는 지역 너머에는 밭과 포도밭도 마련했다. 이 작은 언덕이 바로 미카엘이 가시덤불 위에서 극기 수련을 했던 장소였다. (한때 이곳에는 작은 경당이 있었으나, 오늘날은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엔리케는 지역 사회에서도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그는 1602년 비크 시의 시장으로 선출되었고, 학문과 신앙의 중심지였던 비크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같은 해, 미카엘이 열한 살이 되던 해에 엔리케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일곱 명의 증인 앞에서 유언장을 작성하며, 남겨질 자녀들에 대한 깊은 걱정을 드러냈다. 유언에 따라 집은 하이메, 미카엘, 하신토 세 형제에게 상속되었고, 오랜 시간 아이들을 돌보아 준 가정부 유프라시나에게는 30리브라(바르셀로나 화폐)가 유산으로 남겨졌다.
어머니 몬세라트의 죽음에 이어 아버지까지 여읜 미카엘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지만, 가난과 고통, 단식과 침묵 속에서도 신앙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련은 그를 더욱 깊은 성화의 길로 이끌었다.
아버지 엔리케의 죽음을 맞이한 미카엘은 이미 어린 나이에도 지상의 삶에 너무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린 미카엘은 아버지를 위해 무엇보다 기도로 영적 도움을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마음을 품고 비크 대성당으로 향했다. 당시 제단위에서 봉사하는 복사였던 어린 미카엘은 전례에 따라 참회시편을 천사의 목소리처럼 아름답게 읊으며 기도에 전념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친 후, 작은 헌금을 남겨 사제에게 미사를 청하였다. 만일 사제가 직접 미사를 집전할 수 없다면, 자신의 기도가 아버지의 영혼을 위한 것이니 양해해 달라는 부탁도 전했다.
그러나 아버지를 잃은 이후, 미카엘과 그의 형제들은 고아가 되어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요한 따라발 (Tarrbal)의 집에서 거처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미카엘은 극심한 학대를 겪었다. 따라발은 어린 미카엘에게 수차례 뺨을 때렸고, 얼굴 전체가 피로 뒤덮일 정도로 코피가 터지는 등 무자비한 폭행이 반복되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이러한 비극적인 시절은 무려 4년 반이나 이어졌고, 따라발이 사망한 이후에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미카엘은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찾아 베드로 카르세르의 집에 머물게 되었고, 그곳에서 5~6개월을 지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미카엘의 자비의 실천은 멈추지 않았다. 따라발의 집에서 거처할 당시에, 요한 마날트 (Juan Manalt)는 미카엘이 자신의 식사를 몰래 나누어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을 목격했으며, 미카엘은 그 사실을 따라발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마날트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한 때, 미카엘은 집 안의 포도주 저장고에 몰래 숨어 들어가 조용히 기도하곤 했다. 어린 미카엘은 장사를 도맡아야 했던 일상 속에서도 자신은 성직자의 길을 원한다고 밝히며, 세속적인 삶과 거리를 두고자 했다. 한편, 따라발 가문에서 일하던 유모 ‘에스페란사 포르나보치 (Esperanza Fornabochi)’가 미카엘에게 치즈 한 덩어리를 건네자, 어린 미카엘은 그것을 먹지 않고 뒷문으로 나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이 치즈를 준 사람에게 하늘나라를 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러한 경건함은 카르세르 부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녀는 매일 밤 묵주기도를 드리는 미카엘의 신심을 매우 기쁘게 여겼다.
어린 시절부터 미카엘은 수도자가 되기를 갈망했다. 미카엘의 형 하이메는 미카엘이 수도자의 삶을 단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선택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또 다른 형인 아구스틴은 미카엘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성장이 더디다는 이유로 마을의 수도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그를 받아주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멜 수도원의 원장은 미카엘의 깊은 신심을 높이 평가하며 받아줄 뜻을 밝혔다.
이에 대해 가혹한 따라발 가문에서의 기억을 떠올린 여성 코말라다는 미카엘이 다시 혹독한 생활을 겪을까 염려해 말렸지만, 미카엘은 어느 날 꿈속에서 아버지가 나타나 자신에게 수도자의 길을 걷도록 격려했다고 담담히 전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 미카엘은 마침내 바르셀로나의 수도원으로 향했고, 뜻밖에도 가르멜회가 아닌 삼위일체 수도회(Orden de la Santísima Trinidad)에 입회하게 된다. 미카엘의 수도자 여정은 바로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카엘 성인이 바르셀로나로 떠나게 된 여정의 순간은 다음과 같다. 미카엘은 친구인 마르파에게 떠나야만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여비가 없었기에 마르파에게 “네가 가진 돈을 빌려 달라”고 솔직히 청했고, 친구는 다음 날 친척 신부를 찾아가 모은 돈을 모두 미카엘에게 건넸다. 며칠 뒤, 가게에 나타나지 않은 미카엘을 통해 사람들은 열두 살 소년이 먼 도시로 떠나 수도자가 되려 했음을 알게 되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미카엘은 삼위일체 수도회 공동체를 찾아가 봉사장 (Ministro) 수사 따파야(Tafalla)에게 수도복을 청했다. 나이가 너무 어려 수도복 수여는 미뤄졌지만, 어린 미카엘은 1603년 말에서 1604년 초 즈음 정식으로 입회해 1606년까지 수련 생활을 이어 갔다. 당시 바르셀로나를 방문했던 베드로 아스나르 (Pedro Aznar) 신부는 “미카엘 아르헤미르라는 소년 수련생을 만났는데,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미카엘은 늘 “수도자가 되고 싶다, 성인이 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성사와 전례에 지극히 충실하여 그 순간을 하느님과 실존적으로 일치하는 시간이라 여겼다. 미카엘은 매일 영적 지도자를 찾아가 성무일도서를 공부하며, 종이에 묵상과 기도문을 적어 내 신심을 다졌다.
수련기 동안 미카엘의 고행은 더욱 깊어졌다. 미카엘은 소음이 나지 않는 실리치오(사슬 고행복)를 몸에 착용해 잠을 줄였고[1],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금식을 긴 시간 계속하였다. 미카엘에게 금식은 “완덕과 애덕의 으뜸”이었다. 또한 수도원 내에서 맡은 일을 묵묵히 수행해 청소·환기·잡무에 누구보다 성실했으며,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라 고백했다. 실제로 입회한 지 며칠 뒤 친구 마르파가 찾아왔을 때도, 미카엘은 말끔히 바닥을 쓸며 구석구석을 정돈하고 있었다. 이렇게 미카엘은 극기·순명·겸손으로 빛나는 청년 수도자로 자라게 된다.
미카엘의 청년기에는 특유의 섬세한 관찰력과 뜨거운 성체 신심이 한층 빛을 발했다. 갈리에랑(Galierán) 신부는 “그는 언제나 형제들의 필요를 재빨리 알아채고, 맡은 소임에 완벽히 집중하는 눈썰미 좋은 수도자”라고 회상한다. 새벽기도에서 전례 임무를 맡으면 누구보다 먼저 경당에 나와 한참을 머무르며 기도로 준비했고, 예복 매무까지 꼼꼼히 살폈다. 이런 성실함이 깊은 성체 신심과 맞물려, 미카엘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복사로 봉사하며 미사에 참여했다. 아스나르(Aznar) 신부와 갈리에랑 신부는 그를 “세라핌 대천사와 같은 존재”라 칭했고, 미카엘의 경건한 얼굴을 보려고 신자들이 일부러 찾아올 만큼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그렇게 헌금·봉헌이 급증하자, 공동체 수도자들은 “비크 출신 고아 한 명 들어왔을 뿐인데 주님이 이렇게 풍성히 돌보신다”며 놀라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카엘은 갈리에랑 신부에게 더 엄격한 삶을 향한 갈망을 털어놓았다. “스승님, 저는 개혁 삼위일체 수도회로 가고 싶습니다.” 하느님과 더 온전히 결합되고자 했던 미카엘은, 기존 공동체에서 첫 서원을 마친 뒤 개혁 수도회로 옮기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는 이후, 개혁 삼위이체 수도자와의 만남에서 결실을 맺게 된다.
공동체는 미카엘의 열정을 존중하여 더 넓은 학문과 수련 기회를 줄 곳을 찾았고, 예로니모 수사의 제안으로 스페인 북동부 사라고사(Zaragoza)의 성 람베르토 지역 공동체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대행자(visitador)[2]의 일정 탓에 즉시 이동하지는 못했지만, 1606년 갈리에랑 신부의 동행 아래 드디어 사라고사에 도착했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감실 앞에 꿇어앉아 주님께 인사드리는 것이었고, 이어 봉사장(Ministro)에게 “저를 순명으로 이끌어 주십시오”라며 깊은 복종 의사를 밝혔다. 그렇게 개혁 이전 수도회에서 양성을 이어가게 된다.
사라고사에서 학업과 영성을 함께 익히던 미카엘은 열여섯이 된 1607년 9월 30일, 베드로 힐(Pedro Gil) 신부의 손으로 첫 서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운명을 바꿀 인물을 만난다. 개혁 삼위일체 수도자 마누엘 데 라 크루스(Manuel de la Cruz) 수사가 공동체를 방문하자, 미카엘은 눈길을 떼지 못했다. 검소하지만 기품 있는 개혁 수도복, 침묵 속에 배어나는 열정을 보며 미카엘은 “저것이야말로 내가 찾던 길”임을 직감했다. 곧장 봉사장에게 부탁해 마누엘 수사를 시중들 기회를 얻었고, 함께 기도하고 대화하며 개혁 수도회의 영성을 깊이 들었다. 특히 관구장으로 있던 ‘원죄 없는 잉태의 세례자 성 요한’(San Juan Bautista de la Concepción) 이야기는 미카엘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이후 미카엘의 눈은 하느님의 더 좁고도 깊은 길을 향해 있었다. 성체 앞에서 타오르는 사랑, 철저한 순명과 섬세한 봉사, 그리고 개혁 수도회에 대한 갈망은 그를 더욱 순금처럼 정화시켰고, 마침내 성인의 면모를 완성해 나갔다.
첫 서원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카엘 성인은 마음 깊숙이 더 큰 부르심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개혁 삼위일체 수도자’가 되는 소명이었다. 미카엘이 택하려 했던 이 길은 단순한 수도 생활의 연장이 아니라, 보다 엄격하고 철저한 회개와 자기를 비우는 삶, 곧 '좁은 길'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의 결단이 곧바로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미카엘은 수도회 내 개혁 이전 분파에 속한 수사들의 거센 반대에 직면했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몸이 약했던 미카엘은 순명 안에서 인내하며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지만, 요청은 번번이 거절당했다. 미카엘은 그만큼 더 깊은 고행에 몰두하며, 봉사장(Ministro)을 자주 찾아가 간절히 호소하였다. 허락을 받지 못한 날이면 밤마다 감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 속에 하느님의 뜻을 묻곤 했다. 미카엘의 가슴 속에 이는 실망과 좌절은 실로 컸으나, 그 모든 고통 마저도 하느님의 뜻 안에서 견디어 낼 줄 아는 이였다.
미카엘은 고백했다. “개혁 이전 수도회 역시 올곧은 길이지만, 제가 가고자 하는 길은 그것보다 더 좁은 길입니다.” 미카엘의 이 말은 단순한 소망이 아닌, 하느님과의 더욱 깊은 일치를 향한 갈망이었다.
마침내, 미카엘 성인은 그토록 바라던 개혁 수도회로의 이동을 허락받는다. 미카엘가 수련하고 사랑하며 성장해 왔던 수도원 형제들과의 작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함께한 형제들의 따뜻한 애정과 돌봄은 미카엘의 삶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고, 이별의 순간 미카엘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눈물 속에는 더 큰 순명이 깃들어 있었다. 세상보다 크신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미카엘은 다시금 침묵으로 응답한다.
혹독한 겨울이 채 가시기 전, 미카엘은 곧장 개혁 삼위일체 수도회의 팜플로나 (Pamplona) 공동체로 발걸음을 옮긴다. 더불어 이 새로운 공동체에서 미카엘은 다시금 수련자로서의 삶을 시작해야 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겸손히 배우며, 더 깊은 가난과 침묵, 회개의 영성을 익혀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마누엘 델라 크루스 수사 앞에서 개혁 수도복을 입는 은총을 받게 된다. 검소하면서도 경건한 그 수도복은, 단지 겉옷이 아닌 미카엘의 영혼이 하느님께 바치는 또 하나의 봉헌이었다.
미카엘 성인의 이 전환은 단순한 이동이 아닌, 미카엘의 영혼이 완덕을 향해 나아가는 결정적인 발걸음이었다. 세상의 넓은 길이 아닌, 하느님의 마음 안에 있는 가장 좁은 길을 걷고자 한 이 청년 수도자의 결단은, 후일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덕의 본보기가 되어주었다. 미카엘 성인이 걸어간 그 좁은 길 위엔, 침묵과 기도, 고행과 사랑이 날마다 새롭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1] 당시 고행의 형태로 채찍으로 등을 때리는 고행 형태가 있는데, 이는 채찍 소리와 신음소리가 크게 났었다.
[2] 당시, 관구장이 여러 곳에 가기가 힘들 때에 Visitador대행자를 파견하여 관구장 업무를 대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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