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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중 1권에서 이어집니다.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是故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이제부터는 서두에서 다루었던 오온(五蘊)을 비롯하여 십이처, 십팔계, 십이연기, 사성제 등 근본불교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든 교설에 대해, 대승의 공사상이라는 큰 진리 속에서 모두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올바로 알아야 할 것은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교설을 부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르침의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현상계인 십이처와 사성제 등은 속제(俗諦)이며, 이러한 현상이 부정된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 즉 진체(眞諦)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나와 내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현상에 대해 집착하거나 분별하지 말라는 뜻이다.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囑法)
십이처는 안근(眼根)[눈], 이근(耳根)[귀], 비근(鼻根)[코], 설근(舌根)[혀], 신근(身根)[몸], 의근(意根)[뜻, 마음] 의 여섯 감각기관[육근(六根)]과, 그것에 상응하는 여섯 개의 대상[육경(六境)]인 색경(色境)[빛깔과 모양], 성경(聲境)[소리], 향경(香境)[냄새], 미경(味境)[맛], 촉경(觸境)[촉감], 법경(法境)[생각, 마음의 대상]을 합친 것이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어떤 바라문이 물었다. “세존이시여, 이른바 일체란 어떤 것입니까?” “일체란 곧 십이처이니 눈과 빛깔,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신체와 촉감, 의식과 법이다. 이것을 일체라 한다. 비구들아, 만약 어떤 사람이 이것은 일체가 아니다. 나는 십이처를 떠난 다른 존재를 찾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며 알려고 해도 의혹만 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십이처설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현상에 대한 인식의 구조와 한계를 제시한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관점이다. 여기에서 근(根)이라 하면 기관 이외에 그 기능까지를 포함한다. 예를 들면 안근은 눈과 눈의 보는 기능까지를 포함한다. 우리는 눈[안근]으로 빛깔과 모양[색경]을 볼 수 있고, 귀로 소리를 들으며,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느끼며,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마음으로 많은 생각을 한다. 이는 모든 정신 작용[식(識)]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들 주관계인 감각기관과 객관계인 대상이 서로 만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십이처의 분류법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 분류법으로 인간의 인식 능력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불교가 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출발이 바로 인간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나라고 하는 주관적 존재와 내 외부에 나타나는 객관세계를 합쳐 일체(一切)라고 하는 것이며 이것을 육근(六根),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육근이란 눈, 귀, 코, 혀, 몸, 뜻의 주관적 인식기관은 외부의 객관 대상을 인식하는 의지처가 되므로 그 근본이 된다고 하여 근(根)이라 하였고 빛,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 등의 객관 대상(六境)들은 우리의 깨끗한 마음을 더럽히고 미혹되게 하기에 진(塵)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십이처의 교설 또한 오온무아에서처럼 근본불교 무아의 교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일체인 십이처는 항상 하지도 않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인과 연이 모이면 존재를 형성하고, 인과 연이 다하면 존재를 파괴하도록 만드는 연기의 법칙에 지배된다. 그래서 스스로의 자성(自性)이 없으며, 차별의 세계를 초월한 무분별(無分別)이 된다. 이것이 바로 공의 의미이다. 무(無) 안・이・비・설・신・의, 무(無)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말로써 육근과 육경[육진(六塵)]을 부정하고 있다. 십이처인 육근과 육경을 부정함으로써 공(空)의 참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육근과 육경은 현상계(俗諦)를 뜻하고, 이를 부정하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인 진제(眞諦)를 의미한다.
무안계 내지 무의식(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는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십팔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십팔계(十八界)란 인간의 주관적 감각기관의 요소인 안계・이계・비계・설계・신계・의계와 객관적 대상의 요소인 색계・성계・향계・미계・촉계・법계, 그리고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서로 만날 때 나타나는 인식작용인 안식계・이식계・비식계・설식계・신식계・의식계를 말한다.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란 십팔계의 첫 번째 안계에서부터 십팔계의 마지막 요소인 의식계까지의 열여덟 가지 모든 요소를 부정하는 말이다. 십팔계는 앞에서 말한 십이처에 육식(六識)을 합한 것이다.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식 기능을 가지고 있는 기관[육근]과 인식의 대상[육경], 그리고 인식작용[육식]의 3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십이처와 십팔계가 다른 근본적인 차이는 마음의 영역에 여섯 가지 인식을 하나로 합하여 하나의 의식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눈, 귀, 코, 혀, 몸, 뜻의 각각에 독자적인 인식작용을 내세우고 있는가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전자가 십이처의 의처(意處)이며, 후자가 십팔계의 여섯 가지 별개의 인식 -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이다. 이처럼 십팔계는 십이처에서 설명하였던 육근과 육경에 육식을 더하면 성립이 된다. 부파불교는 십팔계의 여섯 가지 식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유가(yoga)사 들은 명상을 통하여 식을 더욱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하나의 독립된 법체계를 이루었다. 이것이 유식사상(唯識思想) 또는 유식학(唯識學)이다.
모든 것을 부정한 이유는 공의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를 뜻하며, 깨달음의 세계는 무위(無爲)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1. 육식의 실체 - 공(空)
인간의 주관적인 감각기능(6근)은 반드시 객관적인 대상(6경)이 있어야만 일어난다. 귀는 있지만 소리가 없다거나, 코는 있는데 대상인 냄새가 없어도 안 되며, 반대로 객관계의 대상은 있지만 우리 주관계의 기관이 없다면 인식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육근과 육경이 합쳐졌을 때 일어나는 인식작용인 육식도 공하다는 것을 살펴보면 십팔계도 또한 공임이 밝혀질 것이다. 왜 육식은 공(空)한 것일까? 육근과 육경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온갖 마음 작용의 뿌리는 과연 무엇일까? 육식은 육근이라는 인간의 기관에 숨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육경이라는 대상 속에 숨어 있는 것일까? 육식은 육근에도 육경에도 숨어 있는 작용이 아니다. 다만 접촉, 결합, 연관, 인연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육근에도 없고 육경에도 없는 것이 어떻게 연관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한다면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육식(6識)은 육근에도 육경에도 없지만 서로 연관되고 접촉됨으로서 육식이 연하여 일어나는[緣起]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가지고 딱히 “육식이다.” 라고 고정되게 말할 수 없는 것[無我]이다. 또한 나무를 비벼 불을 냈지만 그 불도 인연이 다하면 꺼지게 마련이듯 육식 또한 인연이 바뀌게 되면 사라지는 것[無常]이다. 따라서 여기에 어떤 고정된 자아는 찾아 볼 수 없다. 의식은 항상하여 고정된 것이 아니며, 주위의 상황과 경계에 따라 인과 연에 의해 항상 바뀐다. 이처럼 육식에도 스스로의 자성이 없으므로 무아, 무자성이며, 항상하지 않기에 무상이고, 인과 연에 의해서 생멸을 반복하므로 연기이며, 이러한 사실을 모두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2. 부정의 논리에 대하여
반야심경에서는 앞서 근본불교의 중요한 교설인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를 부정하여 공사상을 천명하고 있음을 알았다. 반야심경에서 부정을 통해 공을 드러내는 논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근본불교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교설을 차례로 모두 부정하고 있다. 바로 십이연기와 사성제를 부정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일체 현상계의 구조인 오온과 십이처와 십팔계를 부정하고 이어 현상계의 법칙인 연기법을 통해 현상계의 괴로움의 근본 원인을 차례로 섭렵하는 내용인 십이연기를 부정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근본불교의 모든 교설을 포섭하고 있는 가르침인 사성제를 부정하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오직 현상계의 올바른 중도적 관찰[조견]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설은 모두가 현상계, 일체, 제법, 현실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반야심경에서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를 우선 다루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처님께서 현상계 일체제법의 법칙[연기]과 속성[삼법인], 존재방식[업과 윤회], 그리고 이 모든 교설의 총설인 사성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당장 현상계, 일체, 제법이 무엇인가를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아는 것이 우선이다. 이것을 토대로 하여 현상계에 대한 여타의 관찰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반야심경에서는 우선 현상계의 구조인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먼저 부정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다른 모든 교설에 대해 각각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십이연기, 사성제만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십이연기를 먼저 다룬 것은 사성제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기 때문이다. 즉 사성제의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이며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원인의 진리인 집성제를 알기 위해서는 십이연기를 알아야 하기에 우선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일체의 구조를 관찰 하고 십이연기의 교설을 통해 기초 작업이 끝나면 사성제의 부정이 나온다. 이러한 연관 고리를 염두에 두고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부정을 통하여 드러나는 참 진리를 살펴보겠다. 반야심경에 나온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며, 근본불교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언급하신 교설로의 진정한 회귀를 위하여 방편상 부정의 논리를 이용하고 있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한편 반야심경에서 일체를 부정하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법을 설하실 때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기 위한 내용을 펴셨다. 그러나 출가 수행자에게는 현실을 떠난 깨달음의 세계를 설하셨기 때문에 일체를 부정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3. 사성제와 십이연기
석가모니부처님의 교설을 체계 있게 정리하고 그 실천법을 설해놓은 교설이 바로 사성제와 팔정도이다.
경전에서는
『비구들아, 모든 동물의 발자국은 다 코끼리의 발자국 안에 들어온다. 그와 같이 모든 법은 다 네 가지 진리에 포섭된다. 그 네 가지의 진리[사성제]란 무엇인가? 괴로움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고 말씀하셨다.
『마라가야,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때 이웃들은 급히 의사를 불러 왔다. 그런데 그는 나를 쏜 자는 누구일까? 나를 쏜 활은 어떤 활일까? 또 그 활은 어떤 모양일까? 이런 것을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는 어떻게 되겠는가? 마라가야, 그는 알기도 전에 죽고 말 것이다. 마라가야, 세계는 유한 한가 무한한가?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 다른가? 인간은 죽은 다음에도 존재 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 하더라도 인생의 괴로움은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의 삶 속에서 괴로움을 소멸시켜야 한다. 마라가야, 내가 설하지 않은 것은 설하지 않은 대로, 설한 것은 설한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내가 설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괴로움이다[苦]’ 라고 나는 설했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集]’라고 나는 설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滅]’ 라고 나는 설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道]’라고 나는 설했다. 왜 나는 그것을 설했는가? 그것은 열반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성제와 팔정도의 교설은 마치 코끼리의 발자국이 다른 모든 동물의 발자국을 포용하듯이 불교의 다른 모든 가르침을 포괄하는 가르침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교의 모든 교설은 이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에 포함되며 이 가르침은 부처님의 교설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포괄할 수 있는 가르침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 다섯 사람의 수행자에게 처음 가르침을 펴신 초전법륜(初傳法輪)에서 설하신 진리가 바로 사성제와 팔정도의 교설이다. 이 가르침은 진리를 설함에 있어 상당히 논리적이며 실천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사성제의 구체적 내용은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이다.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연기(緣起)의 이치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중에도 십이연기의 가르침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인 집성제와 괴로움의 소멸인 멸성제를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므로 사성제는 곧 십이연기를 실천적으로 재조직한 교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 고성제(苦聖諦)
불교는 지극히 현실적인 종교다. 그러므로 불교의 총설이라고 할 수 있는 사성제(四聖諦) 교설의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현실과 현상의 세계를 관찰하고 그 관찰을 토대로 한 현실의 판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관찰해 보고는 괴롭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현상의 세계를 괴롭다고 하니 혹자는 불교는 허무주의라고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실로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인 고성제(苦聖諦)는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관찰해서 얻어낸 결론이다. 현상세계에서는 즐거움은 잠깐이고 근심, 걱정, 갈등 등과 같은 괴로움은 크고 길다.
2) 집성제(集聖諦)
집성제는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가르침이다. 현실에 대한 여실한 통찰을 통해 현실을 괴롭다고 파악했으므로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절차다. 괴로움이란 연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항상 하지 않고 고정되지 않은 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서로 모이고 쌓여 일어나기에 한 번 생겨난 것은 반드시 멸하기 마련이다. 그처럼 연기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부처님께서는 노・병・사의 괴로움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하여 고요히 일체의 경계를 여실히 보시고는 그 원인이 생(生)에 있음을 아셨다. 태어났기에 노・병・사(老・病・死)의 괴로움이 있다고 파악하셨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니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삼계의 생사 윤회하는 테두리인 유(有)에 근원이 있음을 아셨고, 그 원인은 다시 어떤 대상에 집착하는 취(取)에 있음을 아셨고, 또 그 원인은 애(愛), 그리고 그 원인은 수(受) …….
이렇게 하나하나 그 원인을 고찰해 올라가니, 결국에는 무명(無明)이 생・노・병・사의 근본 원인임을 여실히 아셨다. 이것이 바로 십이연기이며,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이라고 한다. 유전문을 일어나는 순서대로 관찰하는 것을 순관(順觀)이라 한다. 집(集)은 모여서 일어난다는 뜻으로 집기(集起) 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는 연기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므로 십이연기설로 괴로움의 원인을 고찰해 본 것이다. 십이연기의 유전문[순관] 해석 방법은 근본불교의 전통적인 해석법이 있으며 부파불교로 오면 이러한 근본불교의 해석 방법에 업(業)과 윤회(輪廻) 사상을 대입하여 삼세양중인과의 업감연기를 통한 해석법이 있다.
경전에서는
『그때, 세존은 우주벨라 마을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아래에서 비로소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한 번 가부좌를 하신 채 7일 동안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고 계셨다. 그러던 중, 초저녁에 연기를 일어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셨습니다.
①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②행(行)이 있고,
행으로 말미암아 ③식(識)이 있고,
식으로 말미암아 ④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으로 말미암아 ⑤육처(六處)가 있고,
육처로 말미암아 ⑥촉(觸)이 있고,
촉을 말미암아 ⑦수(受)가 있고,
수로 말미암아 ⑧애(愛)가 있고,
애로 말미암아 ⑨취(取)가 있고,
취로 말미암아 ⑩유(有)가 있고,
유로 말미암아 ⑪생(生)이 있고,
생으로 말미암아 ⑫노(老), 사(死), 우(憂), 비(悲), 고(苦), 뇌(惱)가 생긴다. 이리하여 모든 괴로움이 생기는 것 이니라』이를 하나하나 알아본다.
① 무명(無明)
무명은 밝음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지혜가 밝음이라면 밝음이 없는 상태인 어둠은 바로 무지하여 어리석은 상태를 말한다. 무명이란 연기의 진리를 모르기에 실재하지 않는[無我] 일시적[無常]인 존재를 실재하는 것으로 알아 상을 짓고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는 상태를 말한다. 일체제법의 일시적인 형체를 ‘나다’・‘너다’ 하고 집착하고 분별하며 ‘내 것’ 이다. 라고 집착하여 괴로워하는 상태가 바로 무명이다. 한 마디로 진리에 대한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다. 무명은 집착심과 분별심이며 이는 번뇌를 낳는 근본 원인이다. 이로 인해 갖은 악업을 짓고, 그로 인해 괴로움의 업보를 받게 된다. 집착하는 마음에서 탐심(貪心)이 나오고, 분별로 인해서 진심(瞋心)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탐(貪), 진(瞋), 치(癡)가 곧 무명이다.
경전(한글대장경『잡아함경』)에서는
『이른바 무명으로 인하여 지어감[행]이 있다면 어떤 것을 무명이라 하는가? 만일 과거를 알지 못하고, 미래를 알지 못하며, 과거와 미래를 알지 못하며, 안팎을 알지 못하고, 업을 알지 못하고, 갚음을 알지 못하며, 업과 갚음을 알지 못하고, 부처를 알지 못하고, 법을 알지 못하며, 스님을 알지 못하고……, 참다운 지혜가 없어 어리석고, 컴컴하며, 밝음도 없고, 크게 어두우면 이것을 무명이라 하느니라.』
② 행(行)
이상과 같은 근본무명으로 인해 그것을 연하여 행(行)이 있게 된다. 무명에 의해 집착되고 분별된 대상을 실재화(實在化) 하려는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행은 행위를 뜻한다. 이것은 또한 업(業)이라고도 한다. 업은 세 가지가 있음은 앞에서 확인한 바 있다. 즉 몸으로 짓는 행위인 신업(身業), 입으로 하는 행위인 구업(口業), 그리고 생각 ․ 뜻으로 짓는 행위인 의업(意業)이다. 우리가 하는 생각, 말, 행위 하나하나가 모두 그저 흘러가서 없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아뢰야식(제8식)에 하나도 빠짐없이 종자로 저장되며, 저장된 종자는 나를 형성하는 힘이 되어 나 자신에게 뿐 아니라 모두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현재의 나의 모습은 그저 아무 원인 없이 이런 모습으로 생활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계속해서 해오던 나의 생각, 말, 행위들이 아뢰야식(제8의식)에 쌓이고 쌓여서 바로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나를 보고자 한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위를 바라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미래를 바꾸고자 한다면 먼저 지금 현재 이 순간부터 내 생각, 말, 행위를 바꾸어야 함은 당연한 인과법의 이치다. 부파불교에서는 이 연기설에 업(業)사상을 결합하여 삼세양중인과설을 제시하고,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을 전개하였다. 이는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삼세를 거치며, 십이연기 각각의 지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윤회・업 사상을 통해 설명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업감연기설에 의하면 무명(無明)과 행(行)은 과거세의 원인이라고 한다. 즉 과거에 어리석은 마음[無明]으로 인해 행(行)을 지어 그 행위의 업력에 의해서 이번 생으로 윤회 하여 몸을 받아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무명과 행으로 인해 이번 생에 몸을 받았다면, 몸을 받은 뒤에는 업력으로 인하여 식이 생긴다.
③ 식(識)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 식은 인식작용으로서 안식 등 여섯 가지 식(識)이 있다. 예전에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 경험이나 행위(行)로 지금 그 음식을 보면 그 음식에 대한 각종의 인식이 일어난다. 전에 보고[眼], 먹고[舌], 냄새 맡았던[鼻] 행이 잠재의식으로 아뢰야식에 저장되어서 지금 그 음식을 보면 예전에 보았던 것을 인식[眼識]하며, 냄새 맡았던 식[鼻識], 먹어보고 느낀 식[舌識]을 떠올려 식 작용으로 이어지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
경전(한글대장경『잡아함경』)의 말씀을 인용해 보면,
『지어감[行]을 인연으로 하여 식(識)이 있다면 어떤 것을 식이라 하는가? 이른바 여섯 가지 식이니, 눈의 식[眼識], 귀의 식[耳識], 코의 식[鼻識], 혀의 식[舌識], 몸의 식[身識], 뜻의 식[意識]이니라.』
부파불교의 업감연기설에 의하면 과거세의 무명과 행으로 인해 이번 생에 몸을 받는다고 한다. 이렇듯 우리의 행위에 의해 우리의 몸이 형성되면 그곳에 식(識)이 발생한다. 이것은 식별, 인식이라고 해석된다. 몸이 형성되자 우리는 무의식적인 습(習)으로 그곳에 ‘나다’ 하는 아상(我相)을 짓고, 따라서 ‘나다’라는 생각으로 인해 거기에 분별하는 인식작용이 발생한다. 부파불교 업감연기설에서는 인간이 이 생에서 몸을 받자마자 그 업력으로 인하여 몸에 여섯 가지 기관[六根]이 생기고 그 기관에서 제각각의 식별[六識]을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여섯 가지 식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러한 여섯 가지 식이 성립하기 위해서 우리 몸에서 인식할 수 있는 감각기관과,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이며 이것을 표현한 것이 십이연기의 네 번째인 명색[육경]과 다섯 번째의 육입[육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식, 명색, 육입은 따로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항목은 시간적으로 선후 관계가 아닌 동시적 관계다.
④ 명색(名色)
색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키고, 명은 비물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인식의 대상은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한다. 명색이란 우리의 주관적인 감각기관인 육근의 대상으로 육경을 나타내는 것이다. 육경 중 정신적인 것이라 함은 여섯 번째 의식의 대상인 법경(法境)을 말하는데, 의식의 대상인 정신적인 생각 등을 말한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명색을 오온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즉 색은 물질적인 것이고 수・상・행・식은 정신적인 것으로 본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에 ‘명・색이 양반인데...,’하는 말이 있다. 이때의 명색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명색, 오온이다. 앞에서 일체를 분류할 때 물질적인 것에 어두운 사람을 위해서 십이처[육근과 육경]로 분류했으며, 정신적인 것에 어두운 사람을 위해 오온으로 분류한 것을 보면, 이는 같은 것의 다른 분류 방법이므로 명색(名色) 또한 어떤 것이라 해도 옳은 것이다. 그러나 십이연기에서는 오히려 오온보다는 육경을 명색으로 정의하는 것이 세 번째 식(識)과 다섯 번째 육입(六入)과 연관 지어 설명할 때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전(한글대장경 『잡아함경』)에서는
『의식을 인연하여 정신과 물질이 있다면, 어떤 것을 정신이라 하는가? 이른바 네 가지 형상 없는 쌓임이니, 즉 느낌(受), 생각(想), 지어감(行), 의식(識)의 쌓임이니라. 어떤 것을 물질이라 하는가? 이른바 사대(四大)와 사대로 된 물질로서 이 물질과 앞에서 말한 정신이니, 이것을 정신과 물질이라 하느니라.』
⑤ 육입(六入) 육입은 육처(六處)라고도 하며, 여섯 가지 인간의 주관적 감각기관을 말한다. 앞의 장에서 일체의 구성을 십팔계로 살펴보았다. 앞의 식, 명색, 육입은 바로 이 십팔계(十八界)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일체의 구성요소인 십팔계는 어느 것이 먼저이고 나중이라고 할 것 없이 인간의 주관인 감관[육근 = 육입]과 그 감관에 대응하는 대상[육경 = 명색], 그리고 그 두 가지가 만날 때 필연적으로 생기는 인식작용[식]을 나타내고 있다.
⑥ 촉(觸)
육입을 연하여 촉이 있게 되는데 이 촉(觸)은 접촉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촉은 여섯 감각 기관인 육근과 그 대상인 육경이 만나는 것이지만 단순히 육입이 육경과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접촉으로 인해 육식이 일어나는 것까지를 말한다. 다시 말해 식, 명색, 육입이 서로 화합하는 작용을 바로 촉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성유경』에서는 근(根), 경(境), 식(識)의 세 가지 요소가 모여서 촉(觸)을 만든다고 한다. 이를 삼화성촉(三和成觸)이라고 한다.
이를 『아함경』에서는
『여섯 감관을 인연하여 닿임[觸]이 있다면, 어떤 것을 닿임이라 하는가? 이른바 여섯 가지 촉신(觸身)이니 눈의 닿임, 귀의 닿임, 코의 닿임, 혀의 닿임, 몸의 닿임, 뜻의 닿임이니라.』 집성제(集聖諦)-3[십이연기]
⑦ 수(受)
수는 감수작용(感受作用)으로 느낌을 말한다. 식 ․ 명색 ․ 육입이 서로 만나게[觸] 되면, 그 다음으로 좋다, 나쁘다, 그저 그렇다 하는 느낌[受]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수, 즉 느낌이다. 수에는 삼심수(三心受)라 하여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고수(苦受)라고 하여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느끼는 괴로운 느낌이고, 둘째로, 낙수(樂受)라고 하여 즐거운 느낌을 말하며, 셋째로, 사수(捨受), 혹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라고 하여 괴로움과 즐거움의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그저 그런 느낌이다.
경전에서는『닿임(촉)을 인연하여 느낌(受)이 있다면, 어떤 것을 느낌이라 하는가? 이른바 3수(受)이니 괴로움의 느낌, 즐거움의 느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니라.』 한글대장경 『잡아함경』 제12권
부파불교의 삼세양중 업감연기를 알아본다. 앞에서 무명과 행이 과거세의 두 가지 원인이 되었음을 말했는데, 그러면 그 과거세의 두 가지 인의 결과는 무엇일까? 바로 현재세의 결과로 식, 명색, 육입, 촉이 그것이다. 과거세에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해 업[行]을 지었고, 그로 인해 현세에 인간의 감각기관이 생기고[六入], 그에 따른 대상이 생기며[名色], 그 두 가지가 만나 인식작용[識]이 일어나게 된다. 이 세 가지가 합쳐지는 작용을 촉(觸)이라고 한다. 이렇듯 네 가지는 현재세의 결과라고 한다. 이를 시간적으로 따져 본다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식(識)이란 처음으로 어머니의 태속에 들어가는 단계이며, 명색(名色)은 아이가 어머니 태속에 있을 때 심신(心身)이 점차로 발육하기는 해도 아직 오관이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와 같은 것이고, 육입(六入)은 심신이 완전해서 감각기관인 안, 이, 비, 설, 신, 의 여섯 가지가 모두 갖추어진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촉(觸)은 어린 아기가 출생한 후 외계에 접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후 두세 살까지는 육근으로 육경과 접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현생을 살아가며, 죽기 전까지는 항상 식, 명색, 육입, 촉의 작용이 동시에 이루어지게 되므로 위에서의 동시적이란 설명과 함께 이해해야 할 것이다.
⑧ 애(愛)
수(受)를 연하여 애(愛)가 발생한다. 애(愛)란 앞서 수(受)에서의 좋고 싫다는 느낌이 더욱 깊어진 상태로 좋은 것을 취하려 하고 싫은 것은 멀리하려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즐거움의 대상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려는 욕심이므로 욕망, 갈애(渴愛)라고도 한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에 대한 애착심 뿐 아니라, 싫어하는 것에 대한 증오심도 애(愛)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애(愛)를 번뇌 중에서 가장 심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수행에도 커다란 장애 요인으로 꼽는다.
경전에서는
『느낌을 인연으로 하여 욕망이 있다면, 어떤 것을 욕망이라 하는가? 이른바 세 가지 애(愛)이니 욕심의 욕망, 빛깔의 욕망, 빛깔이 없는 욕망이니라.』 이렇게 세 가지의 욕망(욕계, 색계, 무색계)이 있다.
첫째, 욕심의 욕망[욕계(欲界)의 욕망]으로,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욕심을 다 충족시키려는 것이고,
둘째, 빛깔의 욕망[색계(色界)의 욕망]이란 물질을 한없이 갖고 싶고, 이성을 한없이 사랑하고 싶은 욕망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취착(取着)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셋째, 빛깔이 없는 욕망[무색계(無色界)의 욕망]이란 물질도 갖고 싶지 않고, 이성도 사랑하고 싶지 않은 욕망으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 중에는 죽을 때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 애착심이 있다. 첫째는 자체애(自體愛)라 해서 자신의 몸뚱이에 대한 애착을 나타내는 것이고, 둘째는 경계애(境界愛)라 하여 사랑하는 사람, 자식, 부모, 재산, 명예 등 내 주위 경계에 애착을 나타내는 것이며, 셋째로는 당생애(當生愛)라 하여 다음 생에 좋은 세상에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애착심이다.
⑨ 취(取)
애(愛)를 인연으로 하여 취(取)가 일어나는데 이는 취하고자 하는 행동으로 욕망에 의해 추구된 대상을 완전히 자기 소유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취착(取着)이라고 하여 취하여 집착하는 올바르지 못한 집착을 말한다. 앞의 욕망이 커지면서 발생하는 강렬한 애착심을 말한다. 즉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감각 작용이다. 여기에서는 아상(我相)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취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욕취(欲取)로서 다섯 가지 욕망이다. 재물욕, 성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과 색, 성, 향, 미, 촉의 다섯 가지 대상에 대하여 집착하여 갖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로 인하여 ‘내 것이다’라고 하는 소유욕의 아상이 생긴다.
두 번째는 견취(見取)로 그릇된 의견, 사상, 학설에 얽매여 고집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편견과 고정관념에 쌓여 자기주장만을 옳다고 내세우고 취하려는 욕망이다. 이로 인해 내가 옳다는 아상이 생긴다.
셋째는 계금취(戒禁取)로 사람들의 그릇된 행동을 청정하고 올바른 행위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따르려는 것으로서 올바른 계율을 범하려고 하는 욕구를 말한다. 이것은 몸뚱이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몸뚱이를 편하게 하고자 하는 욕구다. 넷째는 아어취(我語取)로 내 견해, 내 말만 옳다고 집착하고 고집하는 것이다. 총체적인 아상을 이르는 말이다.
취에 대해 설한 경전을 보면,
『욕망을 인연으로 하여 잡음[取]이 있다면, 어떤 것을 잡음이라 하는가? 이는 네 가지 취이니 욕심의 취, 소견(所見)의 취, 계의 취, 나[我]의 취이니라.』 한글대장경 『잡아함경』
⑩ 유(有)
취를 인연으로 하여 유(有)가 있다. 유(有)라는 말은 생사하는 존재 그 자체가 형성되는 것으로써 업(業)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집착하여 취하려 하므로 그에 따른 행위로 업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지분에서 나온 행(行)도 업이라고 했으므로 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행은 그 원인이 무명이므로 어리석음으로 인해 생기는 보다 근본적이고 소극적인 업이라고 한다면, 이 유(有)는 애(愛)와 취(取)를 조건으로 하여 생기는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업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행은 태초에 처음 무명으로 인하여 한 생각이 일으킨 근본적인 업(業)이며, 유(有)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보편적인 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전에서는
『가짐[取]을 인연으로 하여 존재(有)가 있다면, 어떤 것을 존재라 하는가? 세 가지 존재이니 욕심의 존재(欲界), 빛깔의 존재(色界), 빛깔이 없는 존재(無色界)이니라.』라고 하여 유를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라고 설명하고 있다. 삼계는 아직 욕망이 남아 생사고해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여 윤회하는 존재들이 사는 곳이다. 부파불교의 삼세양중 업감연기에서는 앞의 세 가지 애(愛), 취(取), 유(有)가 현재생의 세 가지 원인으로 작용하며, 이 결과로 미래의 두 가지 결과인 생(生)과 노사(老死)를 초래한다고 하였다. 현재 살아가면서 애착하고 취하려고 하기 때문에 업[有]을 낳고, 그 업력으로 인하여 다음 생(生)을 받게 되며, 자연히 노, 병, 사(老, 病, 死)의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⑪ 생(生)
유(有)를 인연으로 하여 생(生)이 발생하는데 생은 말 그대로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유를 업이라고 했으니 그 업력에 의하여 생(生)을 받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앞에서 고(苦)를 설명할 때 노, 병, 사의 근본 원인이 바로 생에 있음을 언급하였다. 이처럼 생이 바로 노, 병, 사의 시발점이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존재(有)로 인연하여 태어남(生)이 있다면, 어떤 것을 태어남이라 하는가? 만일 이러저러한 중생이 이러저러한 몸의 종류로 한 번 생기면 뛰어넘고, 화합하고, 태어나서 쌓임을 얻고, 계(界)를 얻고, 입처(入處)를 얻고, 명근(命根)을 얻나니 이것을 태어남이라 하느니라.』
⑫ 번뇌
생이 있으므로 노(老), 사(死), 우(憂), 비(悲), 고(苦), 뇌(惱)가 있게 된다.
경전에서는『태어남을 인연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면, 어떤 것을 늙음이라 하는가? 만일 털은 희고, 정수리는 드러나며, 가죽은 늘어지고, 기관은 무르익으며, 사지는 약하고, 등은 굽으며, 머리를 떨어뜨리고, 끙끙 앓으며, 숨길은 짧고 숨을 헐떡이고, 앞으로 쏠리어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몸은 검누르고, 저승꽃이 피며, 정신은 희미하고, 행동하기도 어려워서 쇠약에 빠지면 이것을 늙음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죽음이라 하는가? 이러저러한 중생이 이러저러한 종류로 사라지고 옮기되,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다하며 더운 기운이 떠나고, 목숨이 멸하여 쌓임을 버릴 때에 이르면 이것을 죽음이라고 하나니 이 죽음과, 앞에서 말한 늙음을 늙음과 죽음이라 한다. 이것을 연기라고 하느니라.』 한글대장경 『잡아함경』
이렇게 해서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집(集)이 있게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인생의 괴로움임을 여실히 보시고 그 원인을 살펴보셨다. 그 결과 궁극의 괴로움의 원인은 무명(無明)임을 아셨다. 그러므로 모든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바로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태초에 근본무명으로 인해 한 생각 잘못 일으킨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근본을 끊으려면 밝은 지혜를 닦아야 한다. 그러나 무명이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라고는 하지만 나머지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모두가 생, 로, 병, 사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십이연기의 지분 중에서 괴로움의 가장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요, 오직 바로 지금의 현실이기에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올바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십이연기의 각 지분 중 생, 로, 병, 사를 초래한 세 가지 원인이 가장 현실적이고 우리에게 직접적인 괴로움의 원인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애(愛), 취(取), 유(有)이다. 결국, 괴로움과 고성제의 원인은 애욕과 애욕으로 인해 그 대상에 집착하여 취하려는 취착심, 그리고 그러한 애욕과 취착으로 인한 잘못된 행위[有]가 바로 괴로움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번뇌(煩惱)라고 한다. 번뇌는 결국 집착하는 마음, 분별하는 마음, 사견(邪見)으로 인한 어리석은 마음이다. 다시 말해서 탐(貪), 진(瞋), 치(癡)이다. 이러한 번뇌의 근본원인은 무명에 있는 것임을 올바로 일러주는 교설이 바로 십이연기설의 교설이다. 이런 식으로 십이연기의 관찰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을 밝힌 것이 사성제의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인 집성제다.
3) 멸성제(滅聖諦)
멸이란 니르바나(Nirvana)의 음역으로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하며, 흔히 열반이라 표현한다. 괴로움의 원인인 온갖 번뇌의 불길이 모두 꺼진 상태로 고(苦)가 소멸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최고의 행복, 절대적 행복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멸성제는 사성제 중의 집성제와는 반대되는 경지이다. 집성제는 십이연기의 유전문[순관]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을 고찰해 십이지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 근본원인이 무명(無明)이라고 관찰한 것이다. 이를 차례차례로 바른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을 순관(順觀)이라고 한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어리석음도 없고[無無明],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다[無老死]고 한 것은 바로 이 유전문의 이치에 대한 부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근본불교에서는 이렇게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설명하고 있지만 반야심경에서는 이것도 없다고 부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멸성제] 어떻게 하면 될까? 불교는 현상계가 괴롭다고 하여 그 원인을 밝히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을 두지는 않는다. 괴로움의 원인을 밝힌 것은 원인을 제거하여 괴로움이 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작업일 뿐이다. 괴로움의 원인을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통해 살펴보면 그 근본 원인인 무명에서부터 차례로 하나씩 지분을 소멸시켜 나가는 환멸문[역관(逆觀)]을 통해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노, 병, 사의 괴로움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생(生)을 멸해야 하고, 생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유(有)를 멸해야 하고, 유를 멸하기 위해 취(取)를 멸해야 하고……. 이렇게 해서 결국에는 무명(無明)을 멸하면 괴로움의 모든 고리가 풀려서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의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것을 십이연기의 환멸문(還滅門)이라 하며 이렇게 관찰하여 열반의 상태에 이르는 관법이 바로 역관(逆觀)이다. 반야심경에서 어리석음이 다함도 없고, 나아가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다는 말은 바로 이 십이연기의 환멸문도 사실은 없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열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살아있는 동안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 하여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하고,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고 한다. 후자는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므로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고(苦)가 모두 소멸된 완전한 열반의 경지를 뜻한다.
4) 도성제(道聖諦)
도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로서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 도성제는 괴로움을 멸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그 열반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준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며 양극단을 떠난 길이다.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아니고, 반대로 극단적인 고행 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의 길이다.
『소나경』은 이러한 중도에 대한 좋은 비유를 들려주고 있다.
『"소나야, 너는 집에 있을 때 비파를 잘 타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파 줄을 너무 강하게 죄면 소리가 잘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비파 줄을 아주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잘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야, 그와 마찬가지로 노력도 너무 지나치면 마음의 동요를 가져오고, 너무 느슨하면 나태하게 된다. 그러므로 소나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나 존자는 세존의 가르침대로 행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거문고 줄이 지나치게 팽팽하거나 지나치게 느슨하면 좋은 소리가 날 수 없고, 가장 좋은 소리를 위해서는 그 줄이 적당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듯이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 또한 극단적인 상태를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팔정도(八正道)이며, 팔정도의 정(正)이 바로 중도의 중(中)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리불의 옛 친구가 물었다.
『"사리불이여, 왜 세존과 함께 청정한 수행을 하는가?"
"벗이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있는가?"
"길은 있다. 그 길은 팔정도이니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그것이다."』
(1) 팔정도(八正道)
① 정견(正見) - 바른 견해
정견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견해를 말한다. '나다' 하는 아상이 없이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이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불교의 진리인 연기의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 사성제의 진리를 여실히 보는 것을 말한다. 정견은 나머지 일곱 가지 정도의 실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궁극인 지혜의 견해라 하겠다.
② 정사(正思) - 바른 생각
정사는 바른 생각과 바른 사유로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생각할 것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을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우리가 미리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바르게 되어있음을 뜻한다. 바른 생각을 통해 바른 행동, 바른 말, 그리고 바른 생활이 나오기 때문이다.
③ 정어(正語) - 바른 말
바른 구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을 행하지 않고 진실 되고 부드러워 화합하는 것이다.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이란 거짓말<잘못된 말인 망어(妄語)>, 아부<아첨하는 말인 기어(綺語)>, 이간질하는 말인 양설(兩舌), 욕설 등의 험악한 말인 악구(惡口)를 뜻한다. 삼업(三業) 중 구업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④ 정업(正業) - 바른 행동
정업은 바른 신업(身業)으로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선한 행위를 말한다.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 업에도 유루(有漏)와 무루(無漏)가 있다. 유루의 업은 번뇌가 있는 행위라는 뜻으로, 아상에 기초한 행동이며 탐 ․ 진 ․ 치 삼독심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므로 그 과보를 반드시 받게 되는 업을 말한다. 무루의 업은 아상이 모두 사라져 번뇌가 소멸되고 탐 ․ 진 ․ 치 삼독심을 벗어난 행위이므로, 이것은 과보를 받지 않는 수승한 행위이다.
⑤ 정명(正命) - 바른 생활, 바른 직업
정명은 몸으로는 청정한 행위를 하고, 입으로는 청정한 말을 하고, 뜻으로 청정한 생각을 하는 것으로, 십선업(十善業)을 닦는 생활을 의미한다. 정사유, 정어, 정업이 삶 속에서 드러나는 생활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바른 직업을 가지고 올바른 생활을 통해 올바른 의, 식, 주를 영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⑥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
정진은 노력한다는 의미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는 마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부지런히 실천해 가는 힘이다. 물론 나쁜 방향으로 정진해서는 안 되며, 정진은 항상 선한 것을 바르고 둥글게 키워나가기를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⑦ 정념(正念) - 바른 관찰
올바른 통찰, 관찰이라는 의미로서 신체의 움직임이나 좋고 싫은 느낌, 마음의 온갖 분별,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고 잘 관(觀)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본불교의 핵심적 수행방법인 사념처(四念處) 수행이며 요즈음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위빠사나(Vipassana) 수행이다.
⑧ 정정(正定) - 바른 선정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는 것으로 평상시 산란하고 복잡한 번뇌・망상과 분별심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집중력이다. 마음을 순일하게 하여 삼매(三昧)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정신집중을 의미한다. 정(定)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禪)이므로 이 둘을 합해 선정(禪定)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의 참선도 이 정정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사마타(Samatha)이다.
(2) 삼학(三學)
이상에서 살펴본 팔정도는 불교 수행의 세 가지 핵심인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발전시키고 완성하는 것을 돕는다. 따라서 팔정도는 계, 정, 혜 삼학을 중도설에 입각하여 세분하여 구체화한 것이다.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은 계(戒)를 의미하며, 이러한 계행을 통한 올바른 생활을 바탕으로 올바른 수행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정(定)으로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세 가지가 그것이다. 이러한 바른 수행을 통하여 밝은 지혜를 증득할 수 있으니 이것이 혜(慧)이며 정견(正見)과 정사(正思)가 여기에 해당된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無無明 亦無無明盡 내지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이제까지 근본교설에서 말하고 있는 사성제와 십이연기를 알아보았다. 이 사성제와 십이연기는 현상계를 괴로움으로 규정하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설하고 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괴로움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하며[유전문(流轉門)], 그 괴로움의 원인을 올바로 알아 소멸[환멸문(還滅門)]시키면 된다. 이것이 십이연기를 설한 연유이다. 사성제와 십이연기는 현상계에 대한 교설로서 현상의 세계가 있다고 하는 전제 아래 설해진 교설이다. 내가 있고 남[타인]이 있으며, 객관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이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고 설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괴로움을 설할 수 있으며, 괴로움의 원인을 설할 수 있고, 괴로움에서 소멸된 상태를 설하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을 설할 수 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이상세계나 깨달음의 세계, 또는 부처님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범부 중생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으며 이 세계에서 과감히 벗어날 것을 설하셨다. 그러나 사성제에서 인정한 이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과연 존재하는가? 공의 입장에서는 현상계를 인정할 수 없다. 현상계를 오온, 십이처, 십팔계라고 정의한 뒤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과 십이처와 십팔계가 공이라는 것을 앞에서 자세히 알아보았다. 지금까지 반야심경에서는 현상계에 대한 단순한 겉모습을 살펴본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현상계를 지탱하고 있는 근본적인 모습 - 공상(空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공상에 의거해 본다면 역시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사실도 인정할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공에 있어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현상의 일체 세계가 철저히 부정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이 본래 공하고 현상의 세계가 모두 공하다면 괴로움이 붙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게 된다. 괴로움이 없는 마당에 괴로움의 원인과 소멸, 그리고 소멸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있겠는가? 앞에서 오온개공이라 하였고, 무(無) 안, 이, 비, 설, 신, 의, 무(無) 색, 성, 향, 미, 촉, 법이라 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체의 현상계를 부정한 공의 바탕 아래에서는 사성제나 십이연기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성제와 십이연기를 공이라고 하는 연유다. 깨달음에 이르는 근본 수행인 육바라밀 중에서 지혜 - 반야바라밀은 바로 이 점을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지혜다. 즉 현실을 괴로움으로 인정하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근본불교에서 설하고 있는 사성제와 십이연기라는 교설의 주요 목표라면, 대승불교의 공사상에서는 본래 ‘나’가 없고 현상계가 없다는 것[空]을 올바로 철견(哲見)하여 괴로움이라는 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無自性] 인연의 가합상[緣起]임을 올바로 알아 거기에 집착하지 않을 것[無執着]을 요구하고 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간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소승에서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이므로, 고(苦)의 원인인 번뇌를 멸하는 것이 수행의 목표」였다. 그러나 대승에서는 「일체개공(一切皆空) 이므로 번뇌라는 실체가 당초부터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대승불교에서 괴로움[苦]이 본래 없다는 것을 올바로 알기에 괴로움의 원인[集]과 소멸[滅], 또 소멸에 이르는 길[道]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은 이치를 올바로 철견(照見)했을 때 진정으로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되고 그 두 극단을 분별(分別)하지 않게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어느 한쪽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中道) ․ 중관(中觀)의 실천적인 삶이 나타난다. 이것이 반야심경에서 설하고 있는 반야바라밀을 통한 대자유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모두가 공의 본질을 나타내는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므로, 단편적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다.
연기(緣起) = 공성(空性) = 무자성(無自性) = 무집착(無執着)・무분별(無分別) = 중도(中道)라는 공식을 조심스레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공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느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며, 이것이다, 저것이다, 내 것이다, 네 것이다 하고 분별해서도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일체의 물질과 정신적인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공의 입장에서 삶을 조명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일체의 집착과 분별에 매달리지 않고 놓고 가는 생활이 필요하다. 이 놓고 가는 삶 - 비우는 삶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방하착(放下着)! 방하착! 하는 것이다.
방하착이란 공의 실천이며 연기법의 실천이고 중도와 무집착, 무소득, 무자성의 온전한 실천행이다. 일체 애욕과 집착 이유는 우리가 잡고 있는 일체가 다 공이며, 연기이고 무자성이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원숭이를 잡기위해서 커다란 공모양의 기구에 원숭이가 손을 펴고 겨우 넣을 만한 구멍을 내고 그 안에 바나나와 같은 원숭이 먹이를 넣어둔다. 그러면 원숭이가 구멍 속으로 손을 넣어 먹이를 쥐고는 손을 빼려고 한다. 그러나 먹이를 쥔 손은 빠지지 않아 결국 원숭이는 사람 손에 잡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살기 위하여 먹이에 집착한 원숭이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도 혹 그런 어리석음에 싸여있지는 않을까? 집착하는 마음에서 탐심(貪心)이생기고, 분별하는 마음에서 진심(嗔心)이 생긴다. 탐심과 진심은 번뇌의 근원이니 이 두 마음을 여읜다면 곧 번뇌를 여의어 깨달음을 얻게 된다.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위에서 『반야심경』은 일체 현상계에 나타나는 모든 존재를 모두 부정하고 있으며 이어서 그 현상계를 조견(照見)했을 때 나타나는 진리인 사성제와 십이연기까지도 차례로 부정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부정의 논리를 통해서 공의 세계를 드러내는 이유는 지혜 - 반야바라밀을 체득하기 위함이며 그 지혜에 의지해서 모든 보살은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나 열반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 장에서는 우리가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더 이상 부정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긴 근본에 대한 부분까지 모두를 부정하게 된다. 더 이상 부정해서는 안 될 지혜 - 반야바라밀과 그 지혜를 통해 얻어지는 깨달음과 열반까지도 부정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반야심경』이 부정의 논리를 통해 공의 세계를 드러내는 마지막 부분이다. 지혜(慧)란 우리가 현상계의 조견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의 안목이며 얻을 것[得]이란 그 바른 지혜에 의해서 얻게 되는 깨달음의 세계인 해탈과 열반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는 석가모니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며 최후의 목표인데도 불구하고 이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지혜를 닦아 나가는 것이다. 깨달음의 피안으로 가기 위해 고해[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는 배의 이름이 지혜[반야]다. 깨달음의 길이 지혜라고 하니까 모두가 이 지혜에 집착한다. 지혜를 증득하는 것에만 얽매이게 된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이 지혜조차도 부정하고 있다.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배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지혜라고 했을 때 분명 지혜조차도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알고 보니 우리가 바라 볼 것은 오직 깨달음 열반의 기쁨뿐이다.
그러나 무득(無得)이라고 하여 반야심경에서는 궁극의 깨달음마저도 부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와 궁극의 깨달음까지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이 모두가 공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공사상은 현상계의 본질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상세계인 해탈, 열반의 본질이기도 하다. 일체가 공이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그 속에 지혜가 있다던가 해탈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일체가 공이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은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심지어 지혜나 열반에도 집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후대에 반야 공사상이 악취공견(惡取空見)에 빠지고 있다. 반야 공사상에서는 아함불교의 6근, 12처, 18계 등 현실세계를 부정하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현실을 중시 하셨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니 번뇌라는 요물이 있어서 괴롭다고 지적하셨으며, 그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집착심과 분별심을 여의라고 누누이 가르치셨다. 한편 대승불교의 반야심경에서 이와 같은 현실세계를 부정하여 공을 내세운 이유는 깨달음의 세계, 즉 번뇌를 여읜 세계만을 강조한 일면성 때문이다. 이러한 악취공견의 일면성을 바로잡기 위하여 후에 유식불교와 여래장불교가 나왔고, 이를 종합한 논이 「대승기신론」이다. 결국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궁극의 목표이므로 중생계(衆生界)와 보살계(菩薩界), 그리고 부처님 세계[佛界]를 인정하고 불법에 따라야 할 것이다.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모두가 붙잡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는 뜻의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는 바로 모든 부정의 논리인 파사분을 전체적으로 덮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지금까지 파사분에서는 일체 현상계의 존재인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부정하였고, 이어서 현상계의 조견을 통해 보았던 진리의 모습인 사성제와 십이연기도 부정하고 있음을 알았다. 결국 이 모든 부정의 논리의 궁극적 모습인 지혜와 깨달음마저도 부정하고 있다. 왜 이렇게 없다 고만 하는 것일까? 그 이유가 바로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를 설하는 이유이다. 다시 말해 일체의 모두가 붙잡을 것이 없다는 뜻이다.
현상계도 없으며, 진리의 모습 또한 없고,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와 깨달음 그 자체도 없다는 것은 일체를 붙잡고 구할 것이 없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바로 무소득이라는 이 부분은 반야심경의 의미상 핵심을 이루는 단어다. 얻을 것이 없는 이유는 일체가 공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제법이 공이라는 것이야말로 반야심경에서 설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이다. 본래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인 공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목적이 오직 소득에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행복은 무언가를 얼마나 많이 얻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꾸준한 소득 - 얻음의 연장이다. 우리의 삶은 이처럼 딱한 세상의 논리에 철저히 길들여져 왔다. 이 세상의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에 사로잡혀 수동적인 노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조금 냉정히 생각을 돌이켜 보면 어떤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은 과연 어떤 방향인가? 진리를 추구하는 방향, 진실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우리의 소신(所信)이다. 이 세계의 현실이 가지고 있는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공(空)이다. 다시 말해 연기이며 무자성이고 무아다. 이러한 진실에 걸 맞는 생활 방식은 무집착이어야 하며 무분별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에서 강조하는 무소득, 무집착의 삶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거꾸로 살아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본래 텅 비어 공이기에 걷잡을 수 없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부여잡는 생활만을 하고 살아왔다. 모든 것을 소유하는 방향으로 생을 이끌어 온 것이다. 이제는 우리의 삶을 과감히 바꾸어야 할 때에 왔다. 진실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리와 하나 되는 삶의 모습으로 바꾸려는 큰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제까지 우리가 붙잡고 살아온 일체의 물질적, 의식적인 내 것의 관념을 과감히 놓아야 한다. 무소유, 그것은 순수(純粹)다.
『금강경』제26 법신비상분에,
『만일 모양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거나 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금강경』 제32 응화비진분에
『일체 하염있는 법[유위법(有爲法)]은 꿈, 환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같이 관할지어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 행림보살 찬불게에는,
『만약 바른 생각으로 닦아 익혀 밝게 올바른 깨달음을 요달(了達)해 보면 모양도 없고 분별도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법왕자(法王子)라 하리로다.(若修習正念 明了見正覺 無相無分別 是名法王子)』라고 하셨다.
일체의 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는 말로써 일체의 어떠한 존재에도 집착하여 붙잡을 것이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열반 내지 깨달음에 대해서도 어떠한 상을 지으려 한다면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열반도 집착하여 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지역무득 이다.
『금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금강경』 제5 여리실견분에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함이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일체의 모든 존재를 상이 있는 것으로 본다면 이는 허망한 것이며, 상을 깨고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아 집착하지 않아 구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일체의 모든 사실은 어디에도 붙잡을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체 만유가 시간과 공간적으로 실제 존재한다는 상을 가지고 있고, 그러다 보니 스스로 지은 상으로 인해 집착을 하고 분별심을 일으켜 온갖 괴로움을 느낀다. 진정으로 어떠한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공이 가지는 실천적 의미다.
보리살타 의(依)반야바라밀다고(故)
앞에서 관세음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보고 일체의 고통과 액난에서 벗어났다고 하였다. 오온이라고 설명되는 일체 현상계가 모두 공하다는 사실을 여실한 안목으로 통찰하게 되면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절차로써 괴로움을 여의고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수행이 필요하다.
심무괘애(心無罣碍)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를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보리살타가 보리살타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보리살타 보살이란 반드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야 한다는 속뜻을 읽을 수 있다. 이처럼 보살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면 어떠한 공능과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이어서 나타나고 있다.
첫째, 마음에 걸림이 없게 되며, 둘째, 걸림이 없기에 일체의 공포가 없고, 셋째, 뒤바뀐 허망한 생각 - 전도몽상(顚倒夢想)을 멀리 여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현실에서 부딪치는 괴로움, 공포, 잘못된 생각 등 모든 잘못을 치유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공덕이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괴로움의 뿌리를 끊고 열반의 즐거움에 이를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처럼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공능은 한량없이 큰다. 마음에 걸림이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익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이다. 공의 세계에 무슨 걸릴 것이 있겠는가? 나와 너 모든 일체가 스스로의 자성이 없어 무아이고, 그 존재 속에서 벌어지는 선악, 빈부, 귀천 등 모든 것이 공(空)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걸릴 것이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언가 크나큰 장벽이 나를 가로막고 서 있다고 느끼는 적이 많이 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 보면 나를 막아서고 있는 장벽은 실은 나를 막아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되어 인연 따라 잠시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장벽을 장벽으로 보면 나를 괴롭히는 장벽이 될 것이고 공으로 본다면 다만 고정되지 않고 잠시 왔다가 스쳐 가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허깨비이며, 꿈과 같은 환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무괘애고 무유공포(無罣碍故 無有恐怖)
앞에서 무괘애라고 하여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을 통해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이익이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처럼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을 통해 어떠한 경계가 닥치더라도 여여(如如)하여 걸림이 없음을 체득한 보리살타에게 공포가 없음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마음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공포심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떠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마음에 걸림이 없어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느 마음을 딱히 찍어 두려움이나 공포심이 몰려올 수 없다. 여기에서 공포심이라면 작게 생각하여 두려움이나 공포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마음에서 느낄 수 있는 온갖 괴로움과 불안 등 모든 괴로운 마음으로 확대 해석해야 할 것이다.
『대품반야경』에서는 공포에 대해 이렇게 설하고 있다.
『모든 선남자 선여인이 이 반야바라밀을 듣고 받아 지니며, 가까이하고 독송하며 바르게 사유하여 일체지(一切智)의 마음을 여의지 않으면 이 모든 선남자 선여인은 혼자서 빈집에 있거나, 혹은 무서운 황야를 가거나, 혹은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 있게 되어도 마침내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는다.』
보시바라밀을 실천할 때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두려운 마음을 없애주는 무외시(無畏施)를 큰 보시라고 한다. 재시는 재물, 돈에 시달려 굶주리는 사람을 위한 보시이고, 법시는 진리에 목마른 사람에게 법을 베풀어주는 보시이지만, 무외시는 마음이 불안한 사람들을 불안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최고의 보시다. 반야바라밀은 이 모든 공포심에서 후련하게 벗어나 진정으로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로우며 행복한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어두운 밤중에 뱀을 보고 기겁을 하여 도망갔다가 다음 날 와보니 새끼줄임을 알았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뱀이 아니라 새끼줄인 것을 밝게 깨쳐 알고 난 다음에는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여 마음을 괴롭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도(顚倒)된 몽상(夢想)을 멀리 하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들이 느끼는 두려움이나 괴로움 등의 온갖 감정들은 이렇게 전도된 몽상(뒤집어진 꿈같은 생각) 때문에 일어난 것들이 상당히 많다. 현실 그 자체가 괴로움이거나 두려움은 아닌데 다만 우리의 마음이 착각을 일으켜 괴로워하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된다.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서 생을 힘겹게 살아간다. 행복이란 사실 우리가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가족이 화목하며, 이 몸을 좀더 편하게 하고자 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히게 마련이다. 우리가 돈을 버는 목적도 바로 행복의 추구다. 그런데 요즘은 돈을 얻기 위해 남편과 아내 혹은 연로하신 부모님을 교묘히 죽이거나, 자기 신체를 회생시켜 보험금을 받으려고 애쓰는 등의 비윤리적인 방법을 행하는 대담한 사람들이 매스컴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 얼마나 전도된 행복의 추구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내 몸이 올바로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이고 가족과 함께 누릴 수 있는 단란한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본바탕을 망각하고 돈을 위한 수단으로 근본을 버리는 방법을 사용하여 주객이 전도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어리석게 살고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이러한 뒤바뀐 허망한 생각을 크게 네 가지[四顚倒]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깨끗하지 않은 것(不淨) 가운데서 깨끗하다(淨) 하는 뒤바뀜이 있고, 괴로운 것(苦) 가운데서 즐겁다(樂) 하는 뒤바뀜이 있으며, 항상함이 없는 것(無常) 가운데서 항상함이 있다(常)고 하는 뒤바뀜이 있고, 나라는 것이 없는 것(無我) 가운데서 나라는 것이 있다(我)는 뒤바뀜이 있다.』 이 네 가지 뒤바뀜으로 인해 어리석은 중생들이 미혹된 세계의 참모습을 올바로 보지[正見, 照見] 못하고, 잘못 본 전도된 모습을 진실로 착각하여 그 곳에 집착을 하게 되기 때문에 괴로움과 두려움 등의 망심(妄心)이 일어난다.
이와 같은 전도된 분별망상들에 빠지고 집착하면 괴로움이며 불행이지만 그것에 빠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 이러한 분별망상을 여의게 된다. 일체의 모든 현상에 전도된 몽상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반야심경』에서 강조하는 수행이 바로 반야바라밀다 수행이다. 반야바라밀다 수행의 핵심은 일체의 모든 현상계가 공임을 올바로 조견하여, 전도된 몽상을 일으켜 공상에 집착하지 않을 것을 강조하는 수행체계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반야바라밀다는 공인 일체의 현상계에 집착을 놓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로 방하착(放下着)의 수행이다. 집착을 놓는 것이 바로 공의 적극적인 생활 실천이며 반야바라밀다 수행의 실천이다.
삼세제불(三世諸佛)
삼세제불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말한다. 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이 모두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우선 삼세제불이 나타내고 있는 대승불교의 부처님을 살펴본다. 소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을 한 분으로 한정시켜 역사 속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신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신앙하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의 부처님이 등장한다. 시간적으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서 등장하시며, 공간적으로는 시방(十方)이라 하여 동, 서, 남, 북 사방과 4 간방(間方)인 동남, 남서, 서북, 북동, 그리고 상하의 두 방향을 합하여 열 방향을 설정하여 이 모든 시간과 공간에 상주하고 계신다고 한다.
누구라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게 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방삼세의 어떠한 중생이라도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우리 모두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모두의 가능성, 최고의 존엄성을 일러주고 있다. 부처님의 명호는 각각 다르고, 중생의 모습은 각각 다르지만, 사실 본래 몸은 하나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을 이름하여 법신(法身)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라는 삼신불(三身佛)의 개념이 등장한다.
법신(法身)이란 영원불멸의 진실한 모습으로 진리 그 자체를 몸으로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것은 순수하여 차별상이 없으므로 공(空)과 같은 개념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절대 진리 그 자체를 인격화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실상반야의 지혜가 바로 법신의 모습을 깨달아 그것과 하나 된 지혜다. 이러한 법신불을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부처님이라 하고, 『대일경(大日經)』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라고 하는데, 큰 절에 가보면 비로전에 바로 이 법신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수인(手印)은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계신다. 두 번째, 보신(報身)은 진리 그 자체인 법신이 인연 따라 나타난 불신(佛身)이다. 한량없는 시간에 걸쳐 무수한 수행을 쌓은 결과 모든 것이 진리와 하나 되어 무한한 공덕이 갖추어져 있는 부처님이시다. 대표적으로 아미타부처님을 들 수 있는데 이 부처님은 법장(法藏)이라는 비구로 여러 생을 수행하며, 48대원(大願)을 성취하여 부처님이 되셨고, 스스로 극락(極樂)이라는 정토를 만들어 중생을 교화하고 계신다. 세 번째, 화신(化身)으로 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아미타부처님과 같은 보신불(報身佛)을 친견하지 못한 인연 없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몸을 드러내 주시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석가모니부처님이시다. 2,500여 년 전 이 땅에 태어나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사시며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석가모니부처님이 바로 화신불이다.
법신의 진여실상, 상주불변하는 모습을 곧잘 달에 비유하며, 보신은 법신에서 온갖 공덕이 생겨 두루 일체를 비춘다고 하여 달빛에 비유하기도 한다. 또한 화신은 인연 따라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하여 출현하시는 몸이기에 달그림자가 물에 비치는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렇듯이 소승불교에서는 오직 석가모니부처님을 교주로 하여 믿고 있는 데 비해서, 대승불교에서는 시간적으로 삼세, 공간적으로 시방에 항상 상주하고 계시는 법신과, 인연 따라 모습을 보이시는 공덕의 몸인 보신, 그리고 이 세상에 직접 출현하셔서 중생의 어리석음을 일깨우시는 화신의 부처님을 설명하고 있다. 1)
구경열반(究竟涅槃)
우리는 무엇 때문에 불교를 믿는가? 과연 불교가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궁극의 결과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행복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목표는 말할 것도 없이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젊은 사문이 깨달음을 얻어 석가모니부처님이 되신 것처럼, 열반 해탈을 증득(證得)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 수행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이익의 궁극적인 목표도 마찬가지로 구경열반에 있다고 할 것이다. 현실생활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온갖 두려움, 괴로움, 마음의 걸림, 전도된 몽상 등을 깨끗이 씻어내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궁극의 열반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수행이 바로 반야바라밀다 이다. 그렇다면 열반이란 과연 무엇인가? 원어 니르바나(nirvana)의 음역으로 원래의 의미는 불을 끈다는 뜻이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끈다는 의미다. 이 말은 괴로움이 모두 소멸된 상태인 절대적인 행복과 최고의 행복을 뜻한다.
『잡아함경』에서「탐욕(貪慾)・진에(嗔恚)・우치(愚癡)가 다하고, 일체 번뇌가 다한 것을 열반이라 한다.」라 함은 탐・진・치・삼독심이 모두 소멸된 상태를 열반이라 함을 알 수 있다. 본래 내가 공하여 무아(無我)이며, 무자성(無自性)이고 공(空)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보지 못하여 ‘나다’하는 아상에 얽매여 있으므로 탐・진・치・삼독심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탐・진・치・삼독이 모두 소멸하여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 내 맘대로 한다고 하는 아상이 모두 소멸되었을 때 열반에 드는 것이다. 열반에는 유여(有餘), 무여(無餘)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증일아함경』에서는「이 두 가지 법의 열반계가 있으니, 유여(有餘), 무여(無餘)이다. 유여는 어떠한 것인가? 이에 비구가 다섯 가지(貪, 瞋, 身見, 戒禁取見, 疑)를 면하면, 곧 저것이 반열반으로서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또 무여는 어떤 것인가? 이에 비구들이 유루(有漏-번뇌가 있음)를 다하고 무루(무루(無漏-번뇌가 없음)를 이루면 의(意) 해탈, 지혜 해탈이니 제 몸으로 증(證)을 지어서 스스로 생사에 유희해 마치고, 범행(梵行)이 이미 성취되어서 다시 유를 받지 않고 여실히 아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열반계는 마땅히 방편을 구하여 무여열반계에 이른다.」라 하여 열반은 일체의 괴로움이 모두 소멸한 최고의 행복의 경지이지만 우리들은 열반에 대해서 너무도 멀게만 느낄 뿐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보통 불심이 깊다고 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소망이 무엇이며, 왜 절에 다니는가를 물어보면 대부분 자식 대학 붙게 하기 위해서, 남편 직장에서 진급할 수 있기 위해서, 가정의 화목 때문에, 병 낫게 하기 위해서 등의 대답을 자주 들어 볼 수 있다.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서 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열중의 하나도 찾아보기 힘들지 않은가 생각이 된다. 불교는 현세이익적인 종교가 아니고, 집착하는 마음과 분별하는 마음, 그리고 사견(邪見)에 빠져 온갖 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무명을 벗어나 광명의 세계를 구하고자 하는 종교임을 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불교를 자력불교라고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당장의 이익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깨달음, 열반이 되어야 한다.
의(依)반야바라밀다고(故)
이상에서 언급한 시공간 속에 생생히 살아 계시는 모든 부처님은 과연 무엇에 의지하여, 어떤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었는가? 그 해답을 『반야심경』에서는 의반야바라밀다고라 하고 있다. 하나같이 모든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의 수행이야말로 모든 수행의 기본이며 핵심이라 하였다. 반야바라밀은 공의 지혜, 무소득의 지혜, 무집착의 지혜, 무분별의 지혜이며, 오온개공의 이치의 조견(照見)을 통해 나타나는 비움의 지혜다. 그러므로 모든 수행의 기본이 되는 가르침이다. 이것이야말로 지혜 중의 지혜다. 그래서 시간적으로 삼세, 공간적으로 시방(十方)의 모든 부처님이 이 반야바라밀에 의지해 깨달음을 이루셨다.
『대품반야경』문상품에는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시다. 반야바라밀은 능히 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은 이 법에 의지하여 행하고, 이 법을 공양, 공경, 존중, 찬탄하신다. 무엇을 이 법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반야바라밀이다. 모든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머물고, 이 반야바라밀을 공양, 공경, 존중, 찬탄하신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기 때문이다.』
득(得)아뇩다라삼먁삼보리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에 의지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된다. 여기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는 최상의 깨달음을 뜻하는 것으로 앞에서 언급한 구경열반(究竟涅槃)과 상통하는 뜻이다. 앞에서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공포가 없으며, 뒤바뀐 허망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을 증득 한다고 하였다. 이 부분에서 보살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열반을 증득하는 모습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고 했을 때, 이처럼 보살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증득한 결과는 무엇일까? 이미 언급했듯이 구경열반이 그 궁극적인 경지이다. 구경열반이라는 것은 바로 부처님이 되었다는 것이다.『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바로 삼세에 걸쳐 존재하는 모든 부처님의 열반 또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혹은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라고 번역한다. 그 뜻은 말 그대로 가장 높고, 바르며,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뜻으로 최고의 깨달음을 의미한다. 무상(無上)이란 더 이상, 이보다 높은 깨달음이 있을 수 없는 최고의 가르침이란 의미이며 정(正)이란 객관적이고 타당성이 있는 편견 없는 가르침으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조견(照見)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팔정도의 정(正)과 같은 의미이며, 중도의 중(中), 공사상의 공(空)과 같은 의미다. 등(等)은 보편적인 가르침을 의미한다. 어느 한 쪽에만 타당한 가르침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게 동시에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결국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상정등정각이란 이 보다 더 높은 것이 없는 보편타당한 가르침이며, 일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깨우친 바른 진리, 최고의 진리라는 뜻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바로 이 보편타당하고 더 없이 높은 가르침인 무상정등정각에 오르신 것이다. 이렇게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가능했다는 것을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고지(故知)반야바라밀다
반야바라밀은 어떠한 상을 짓고 이해하고자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떠한 모양도 내세울 수 없는 무자성(無自性), 무소득(無所得), 무집착(無執着), 무분별(無分別)의 철저한 공성(空性)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어떠한 결론을 두게 된다면 그 언어에 걸려 오히려 집착할 수 있기 때문에 『반야심경』에서는 이 ‘반야바라밀을 신비하고도, 밝으며, 위없고[無上], 어느 무엇에도 견줄 것이 없는 주’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반야심경』의 반야바라밀을 공부해 오던 수행자들에게 그 가르침 자체에 대한 상을 과감히 타파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동시에 수승한 비밀의 주를 설함으로써 여기에 더 없는 공능을 담아내고 있다. 반야심경에서 어쩔 수 없이 언어를 빌어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언어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진리를 설할 수 없다. 언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도 있고, 저마다 스스로 정해 놓은 언어의 고정관념을 색안경처럼 만들어 놓고 그에 투영하여 자기 나름의 이해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결분에서는 총괄적으로 결론을 지으면서 그런 말의 허물로 인해 그 밝은 이치가 훼손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다.
앞에서 소소하게 설명한 것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하나의 방편이었다면, 총결분에서는 이제 손가락도 필요 없고 그저 깨달음의 세계인 달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앞의 본론 부분 내용을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뗏목에 비유한다면, 총결분은 뗏목을 버리고 나아갈 것을 말하고 있다. 언어(뗏목)를 버리고 이제 깨달음의 세계를 직언하고 있는 것이다. 고지(故知) 라는 것은 ‘그러므로, 알라’ 라는 말로서 지금까지 언설(言說)로서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언급했던 『반야심경』의 본문 내용에 대해 주의 환기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비밀의 주를 설하고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올바로 이해 체득하고 있다면 이것은 도무지 언설로서는 견줄 수 없음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이어서 나오는 내용에는 언어를 초월한 반야바라밀다에 대한 새로운 결론적 총괄의 해석이 나온다.
주(呪), 진언(眞言)에 대하여
주는 자신과 타인의 재액(災厄)을 없애거나 적에게 재액을 주기 위해 외우는 주문이란 뜻으로 보통 사용되는데, 전자를 선주(善呪)라 하고, 후자를 악주(惡呪)라고 한다. 다른 말로는 주문(呪文), 신주(神呪), 금주(禁呪), 밀주(密呪)라고도 한다. 주는 보통 범어 만트라(mantra)의 번역으로 보는데, 다라니(dharani), 비디야(vidya)의 번역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만트라(曼陀羅)를 밀주(密呪), 다라니(陀羅尼)를 총지주(總持呪), 비디야를 명주(明呪)로 번역하여 구분하기도 한다. 주를 외우는 것은 인도에서 예로부터 있었던 전승으로 추측되며, 불교 경전에도 종종 주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술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셨으나, 특별히 수행상 일신(一身)의 보호를 위해서 약간의 주에 의지하는 행위를 묵인하셨다고 경전에서 전한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어느 정도 세속의 신앙에 대해 유화적이고 포용력 있는 자세를 견지하셨음을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유화적인 태도로 인해 이후에 밀교가 생겨날 즈음에는 주(呪)가 다라니, 만트라, 진언이란 이름으로 불교 수행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우선 만트라는 인도의 오랜 종교적 전통을 불교에서 수용한 것으로, 찬가(讚歌), 제사(祭詞), 주문(呪文) 등을 나타내는 말이며, 보통 문자 또는 언어의 의미를 가진다. 대승불교에서 만트라는 산스크리트 문자나 불타에 대한 찬가(讚歌), 기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특정한 말을 가리킨다. 한자로는 진언(眞言)이라 음역하며 밀교에서는 다라니라고 부르기도 하여 진언, 다라니, 만트라를 혼용하기도 한다. 다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례는 장구(長句)로 된 긴 것을 다라니, 몇 구절로 된 짧은 것을 진언, 한 자 두 자 등으로 된 것을 주(呪)라고 하는 것이 통례다. 예를 들면 천수경 앞에 나오는 짧은 어구인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나 정법계진언(淨法界眞言) ‘옴남’ 등은 말 그대로 진언이라 부르고,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기제’로 이어지는 긴 것을 신묘장구대다라니라 하여 다라니로 부른다. 또한 ‘옴’ 과 같이 한 글자로 되어 있는 것을 주라고 한다. 진언(眞言)이라고 하면 진실한 말이라는 의미로, 부처님의 참된 경지를 밝히는 말소리라는 뜻이다. 또한 입으로 불러서 무명을 타파하고 마음을 통일하는 거룩한 귀절이기 때문에 명(明), 명주(明呪)라고도 한다. 다라니(陀羅尼)는 본래 정신을 집중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간직하는 것, 혹은 그 결과로서 얻게 되는 정신집중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나중에 이것이 재앙을 막는 등의 공덕을 짓는 주문의 의미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만트라와 다라니의 구분은 그다지 엄밀하지 않으며, 대체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다라니는 보통 총지(總持)・능지(能持)・능차(能遮)라고 번역하는데, 모든 선법(善法)을 능히 지녀서 산실(散失)하지 않게 하므로 총지, 능지라 하고, 악법을 막아서 일어나지 않게 하므로 능차라고 한다.
다라니 힘의 작용을 네 가지로 나눠서 말하기도 한다.
첫째, 법다라니(法陀羅尼)로 이는 부처님의 교법을 듣고 잘 기억해 지니고 잊지 않는 작용을 한다.
둘째, 의다라니(義陀羅尼)로 모든 법의 한량없는 뜻을 모두 지녀서 잊지 않는 작용이 있고,
셋째는 주다라니(呪陀羅尼)로 선정에 의하여 발한 비밀어로서 부사의(不思議), 신묘(神妙)한 영험이 있는 작용을 한다.
마지막으로 인다라니(忍陀羅尼)는 모든 법의 실상을 깨달은 경지에 안주(安住)하여 있으면서 인지(忍持)하여 잊지 않는 작용이 있음을 말한다.
이처럼 다라니는 무량무변한 작용을 가지고 있어 모든 악한 법을 버리고 한량없는 좋은 법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보통 다라니라 하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지혜(智慧), 혹은 삼매(三昧)를 말하며, 둘째는 진언(眞言)을 말한다. 삼매는 말을 잊지 않고 뜻을 분별하며 우주의 실상에 계합하여 수많은 법문을 보존하여 가지기 때문이며, 진언이라는 것은 번역하지 않고 음(音)을 그대로 적어서 외우는 것이다. 이를 번역하지 않는 이유는 원문의 전체 뜻이 한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과 밀어(密語)라 하여 다른 이에게 비밀히 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을 외우는 사람은 한량없는 말을 들어도 잊지 아니하며, 끝없는 이치를 알아 학해(學解)를 돕고, 모든 장애를 벗어나 한량없는 복덕을 얻는 등 많은 공덕이 있으므로 다라니라 한다. 이처럼 주(呪)는 온갖 나쁜 잡신(雜神)이나 귀신, 혹은 재앙으로부터 몸을 지켜주고 복을 불러들이는 기능을 하는 음성(音聲)적 기운이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과연 이렇게 많은 주문 중에서 어떠한 것이 가장 수승한 것일까? 물론 주문의 특성과 성질상 상황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주를 말할 수 있다.『반야심경』의 반야바라밀 수행을 닦아가는 수행자에게는 다음의 경전이 그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받아 지니며, 가까이하여 독송하고 바르게 사유하여 일체지(一切智)의 마음을 여의지 않으면 독약 냄새를 맡게 해도, 혹은 사악한 요술을 사용해도, 불구덩이에 떨어뜨려도, 깊은 물 속에 빠뜨려도, 칼로 죽이려고 해도, 독약을 먹여도, 이와 같은 온갖 나쁜 것들이 다치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은 큰 밝은 주문(大明呪)이며 위없이 밝은 주문(無上明呪)이기 때문이다.』
『대품반야경』 대명품 제32 반야경에서는 이처럼 진리가 파동 쳐서 재앙을 없애주는 주문 가운데 가장 수승한 주문을 「반야바라밀」이라고 설하고 있다. 우리가 불공을 드리고 축원이 끝날 때쯤이면 항상 ‘마하반야바라밀’하고 외운 대목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반야바라밀’은 이미 이 언어 자체에 진리가 함축되어 있다고 하여 귀의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반야바라밀 주문을『반야심경』에서는 수승한 이유를 네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 대신주(大神呪)라는 것으로 크고 신비로운 주문이라는 뜻이다. 둘째, 대명주(大明呪)로서 크게 밝은 주문이며, 세째, 무상주(無上呪)로서 이 보다 더 높은 것이 없는 최고의 경지의 주문이고, 네 번째, 무등등주(無等等呪)라 하여 비교될 만한 것이 없는 최상의 주문이라는 의미가 언급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지혜의 완성을 의미하는 반야바라밀은 일반적인 언어로서는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최고, 최상의 것이기 때문에 주문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내용인 반야바라밀의 수행은 너무나도 깊고 오묘해서 하나의 주문으로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주문이야말로 지혜의 광명과도 같은 것으로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뜨리고 밝은 깨달음으로 향하게 할 수 있는 지고안온(至高安穩)한 것이다.
능제일체고 진실불허(能除一切苦 眞實不虛)
앞에서 설명한 이 주문이야말로 일체의 괴로움을 없애주며, 진실하여 조금도 헛됨이 없다는 뜻이다. 텅 비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며, 집착할 바가 없는 반야 공의 이 도리야말로 위대한 주문인 까닭에 일체의 모든 고통과 불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다 소멸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은 것이다. 본래 텅 비어 무소득이며, 무자성이고, 공이요, 무아, 무분별인 본바탕에 또 다시 어떠한 허망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물질세계[色]와 정신세계[受, 相, 行, 識]가 모두 공하였으니 따로 허망할 것이 없다. 불생불멸(不生不滅)로 본래 나고 죽음이 없으므로 생멸에 따른 온갖 괴로움도 여의었고, 불구부정(不垢不淨)으로 더럽고 깨끗한, 부귀하고 천한 등의 관념을 여의었기에 상대세계의 모든 분별을 타파할 수 있으며, 부증불감(不增不減)으로 더하거나 줄어들 것이 없으므로 내 것, 네 것 하며 나누어 서로 많이 소유하고자 다투고 투쟁하는 이 모든 분별을 여의게 된, 더없이 맑고 밝아 허망하지 않은 진실한 주문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반야심경의 핵심 구절인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도일체고액의 경지, 즉 일체의 고통과 액난을 뛰어넘었으므로 진실하여 조금의 헛됨도 없는 경지를 다시 한번 설함으로써 지혜의 완성을 마무리 짓고 있다. 이 부분이 내용상의 총결 부분이다. 지혜의 완성된 경지는 그 어떤 방편을 설한 도리가 아니라 직접 공의 이치, 반야의 이치를 설한 도리이기에 진리로서 허망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설(故說) 반야바라밀다 주(呪) 즉설주왈(卽說呪曰)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
언설을 세움으로써 오히려 진실이 왜곡될 수 있고, 본래의 의미를 상실할 수 있기 때문에 반야심경에서는 이 모든 내용을 하나의 진언으로 내세워 총괄적으로 결론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 진언이 바로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이다.
주(呪)의 산스크리트어는 ‘가테가테파라가테파라상가테 보디스바하’ 이다. 그 의미를 살펴보면 가테(gate)는 간 사람이여, 파라(para)는 저 언덕, 피안을 의미하고, 상(sam)은 완전히 라는 의미를 가진다. 보디(bodhi)는 깨달음의 뜻이고, 스바하(svaha)는 영원 하라, 행복 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진언의 힘을 빌려 『반야심경』이 가지고 있는 깨침의 소리를 함축하고 있는 이 주문은 어떠한 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대략 아래와 같은 의미로 연결하여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가세, 가세, 저 깨달음의 세계로 가세, 우리 함께 저 깨달음의 세계로 가세, 깨달음을 꼭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정도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주문이야말로 반야심경 전체의 결론이며, 불교 전체의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주문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야할 궁극의 경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게송에서는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명쾌히 내려 주고 있다. 우리들은 누구나 어딘가로 향해 길을 가고 있는 나그네다. 그러나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리는 모두가 가야할 곳을 올바로 보고, 그 길에 전력투구하여 혼신의 신명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해답은 모두가 서로 다를 것이다. 돈을 향해서, 또는 온갖 재물을 쌓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 명예를 가지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 정의의 실현을 위하여, 스스로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족의 이익, 사회의 공익, 국가의 평화를 위하는 방향으로 전 생(生)을 바쳐 내달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 세계를 환경오염에서 구해 보고자 이리 뛰고 저리로 뛰어 다니는 사람들도 있으며, 사회의 온갖 부정부패를 척결해 보고자 사회 곳곳에서 모니터 역할을 자청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회의 어두운 부분, 힘들고 가난에 시달리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온 힘을 기울여 나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지혜의 완성을 향해 가라고 하는 인생의 목표 설정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 준다. 자신만의 안락을 위하는 재물과 명예를 향한 길, 개인이나 가족만을 위한 길, 사회와 내 국가의 안락을 위한 길, 모든 인간을 위한 길 이 모두는 결코 궁극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인류와 모든 생명이 있고 없는 일체를 위해 모두가 온전한 존재로서 하나라는 동체대비심의 마음으로 이 모두가 함께 깨칠 수 있도록 하는 진리의 길이야말로 우리가 가야할 궁극의 경지다. 언뜻 보아서는 사회와 국가를 위하는 것과 모든 인간을 위하는 길이 훌륭한 듯 보여도 사실은 집단이기주의이거나, 나와 너, 인간과 자연을 갈라놓고 분별하는 좁은 의미의 이타(利他)일 뿐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오늘도 부처님의 가르치심에 따른다.
왜?
마음의 평온(平穩)을 위하여!
제2장 유식불교(唯識佛敎)
유식(唯識) 이란? - 유식무경(唯識無境)
불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고통의 현실 세계를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와 나와 우주의 배후에 있는 진리는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過程)이라고 할 것이다. 현실 세계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하여 현실을 부정하고 있으며, 그 부정을 뒷받침해 주는 진리가 연기법(緣起法)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연기법에서 온갖 것과 현상은 인연 따라 존재할 뿐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후에 부파불교에서는 만법은 공이나 그 만법을 이루는 요소는 존재한다는 유적 존재관을 주장하였으며, 다시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공적 반야사상이 나타났다. 공사상의 공을 설명하기가 난해하므로 보충적으로 설해진 것이 중관사상이다. 그러나 중관 사상 역시 현실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있어 다시 나타난 사상이 바로 유식사상이다. 유식은 아비달마의 유적존재관(有的存在觀)과 반야 공사상의 무적존재관(無的存在觀)을 중관적으로 인식한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사상을 논리화 하고자 하였다. 반야사상이 지나치게 출가자 중심의 사상 이었다면 유식사상은 중생과 보살, 그리고 깨달은 자를 구분하여 현실성을 인정하면서 인간의 심층심리를 다루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중국의 청원유신(靑原唯信) 선사가 이런 말을 하였다.
“노승이 30년 전에 아직 참선을 시작하기 전에는 산을 보니 산 이였고, 물을 보니 물 이였다. 그러나 30년 동안 참선을 하고 나서 산을 보니 산이 아니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산을 보니 여전히 산이고, 물을 보니 물일 뿐이다.”
우리는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일체 만법은 연기에 의하여 공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여기에서 공사상이 탄생하였다. 이 말씀은 현실세계를 인정한다는 전제하에 항상함이 없으니 집착하지 말라는 뜻 이였다. 그런데도「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는 ‘모두가 공이다’라고 하여 사람들이 허무하다[惡取空者]라고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인도의 용수(龍樹)선사가 중론(中論)을 내 세우면서 현상을 인정하데 항상함이 없다고 하여 비유비무(非有非無)를 주장하였다.
유식불교는 용수의 중론을 좀더 현실화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의 삶의 공간인 현실, 즉 대중세계를 인정하고, 깨달음, 즉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하여 노력하는 중간 단계인 보살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를 구분함으로서 대승불교의 이론을 현실성 있게 체계화 하였다. 여래장사상이나 화엄사상, 천태사상 등은 모두 유식불교의 이 이론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유식불교의 영향을 받은『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속제(俗諦)[心生滅門, 심생멸문]와 진제(眞諦)[심진여문, 心眞如門]를 구분하고, 일심이문(一心二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마음[心]이란?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종교라고 한다. 팔만대장경을 한손에 넣고 쥐어짜면 남는 것은 마음 심자(心) 하나라는 말이 있다.『잡아함경』에서는「마음은 일체법의 근본이 된다」고 하였으며,『증일아함경』은「마음이 번거로우면 중생이 번거롭고,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이 청정하다」고 하였다.『해심밀경』에서는 유식무경(唯識無境), 심외무경(心外無境)이라고 하여 인식대상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즉 식의 표상(表象)에 불과하다고 하였으며,『화엄경』은「마음은 마치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사를 그릴 수 있다」고 하였다. 또 「만약 사람들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응당 법계의 본 바탕을 알아야 한다. 일체는 오르지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하였다. 이 모든 경전은 마음을 떼어 놓고는 불교를 논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행복과 불행의 가치는 우리들 마음에 있다고 할 것이다. 마음은 나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주체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마음이라 할 수 있을까? 마음은 큰 의미에서 식(識)이며, 정신(精神)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식이란 다섯 감각기관이 그 대상을 인식하는 감각적 인식(전5식)과 이를 판단하고(상, 想), 기쁘다 슬프다는 감정을 느끼며(수, 受), 상상하며 사유(思惟)하는 작용(식, 識)과 행동을 유발하는(행, 行) 인식활동이라고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식을 이렇게 정의 할 수 있으나, 유식불교에서는 이 식 외에 인간의 정신세계가 제7식 말라식(manas)과 제8식 아뢰야(alaya)식으로 이루어 졌다고 한다. 이러한 식을 넓은 의미에서 마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좁은 의미로는 제8식만을 두고 이르는 경우가 있다.
마음은 작용을 통하여 겉으로 들어난다. 즉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곧 마음의 작용이다.
유식이란?
글자그대로 ‘오로지 식뿐이다’라는 뜻이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고 하여 ‘만법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식(識)의 표상(表象)에 불과할 뿐이다’ 라고 본다. 우리가 일상을 통해서 받아들이기를 나와 나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과 그들의 현상[이를 만법(萬法)이라 한다]은 아주 자연스럽게 사실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 이들 만법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인식하는 근본이유는 내 몸에 있는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입. 피부가 나의 주변에 있는 정보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받아들이는 정보는 한계가 있다. 눈이 볼 수 있는 한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한계 등과 같이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면 그 기능은 제한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가지는 한계 밖의 정보까지를 알아차린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보지 않고도 보고, 들을 수 있는 이유는 왜일까? 그것은 감각기관의 기능을 초월한 식(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식은 언제부터인가 알 수 없는 때부터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느끼고, 피부로 느낀 것들을 저장해서 계속 유지하여 오고 있다. 오늘의 나의 존재는 이렇게 쌓여온 식이 있기에 가능하다. 만법이 실제 존재 한다 기 보다는 식이 저장해 놓은 종자에 의하여 우리는 세상을 보고 있다. 식이 없다면 만법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유식무경이라고 한다.
광활한 초원에 우뚝 솟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하자. 이 나무를 보고, 지친 나그네는 쉬어가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목수는 베어서 가구를 만들고 싶어 할 것이고, 상인은 팔아서 돈을 벌고자 할 것이다. 또 화가는 스케치하기에 바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사물을 놓고 각자 생각과 행동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식이 곧 마음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기차를 타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옛 여인이 생각나서 골똘히 그 여인만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 이 때 “이봐, 저것 좀 봐, 참 아름답지?”하고 옆 사람이 건드리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니 아름다운 경치는 지나가고 보이지 않았다. 기억에도 없다. 분명히 눈으로는 보았는데, 보았다는 기억이 없다. 왜 그럴까?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식이다. 곧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알고, 피부로 느낀다는 것은 식(識, 마음)이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다만 도구에 불과 하다. 눈은 마음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본다.
팔식(8識, 여덟 가지 식)
전오식(前五識)
여러 번 되풀이 되는 말이지만 우리가 사물과 현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눈・귀・코・입・피부(眼・耳・鼻・舌・身) 등 오근(五根)이 물체・소리・냄새・맛・촉감(色・聲・香・味・觸) 등 오경(五境)을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느끼고, 피부접촉을 통하여 좋다, 나쁘다, 그저 그렇다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림 즉 인식을 식(識)이라고 한다. 다섯 가지 뿌리가 다섯 가지 대상을 접하고서 ‘아! ~이다’라고 알아차리는 것을 식이라고 한다. 이 식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이를 의식(意識), 말라식, 아뢰야식과 구분하기 위해서 전오식(前五識)이라고 한다.
(1) 안식(眼識)
안근(眼根)으로 색경(色境)을 바라볼 때 나오는 마음이 안식(眼識)이다. 눈[안근]으로 모양이나 빛깔[색]을 보고 ‘아! ~이다’하고 단순히 알아차리는 정도로 분별하는 마음이 바로 안식이다. 빛깔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희고, 검고, 파랗고, 붉은 등의 빛깔을 의미하며, 다른 하나는 길고, 짧고, 모나고, 둥글고, 높고, 낮은 등의 모양을 의미한다. 전자는 현색(顯色)이라 하고, 후자를 형색(形色)이라고 한다.
눈으로 사물을 바라볼 때 색깔과 모양만 분별하는 마음이 바로 안식이다. 안식으로는 사물의 내면에 있는 오묘한 마음까지는 분별하지 못하며, 오직 현재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만을 인식하는 기초적인 분별작용만 하게 된다. 즉 내 앞에 꽃이 한 송이 있다고 가정해 보았을 때, 안식이 의식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꽃의 빛깔과 꽃의 모양에 불과하다. 그러나 안식에서는 꽃을 보면 직감적으로 좋아하는 기초적인 인식을 할 수만 있다. 이러한 인식 이외에 이것이 꽃인가 나아가 꽃이면 무슨 꽃인가, 그 꽃은 언제 피며, 어느 나라의 어느 지방에서 잘 자라는지, 무궁화라면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꽃이구나 하는 정도까지 유추해서 의식 할 수는 없다. 이 기능을 위해서는 제6의식의 작용이 함께 해야 한다. 이때 제6의식은 과거의 경험과 기억 등을 생각해 내고, 다른 것들과 비교 판단하며, 때로는 잘못 인식하기도 하는 등의 구체적인 인식작용을 한다.
이렇게 현재 드러난 것을 눈으로는 모양과 빛을, 귀로는 소리를, 코로는 냄새를, 혀로는 맛을, 몸으로는 촉감을 그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는 작용을 겉으로 드러난 것을 분별한다고 하여 유식에서는 현량(現量) 이라고 한다. 여기에 좀 더 깊고 오묘한 부분까지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6의식(第六意識)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것은 나머지 네 가지 식도 마찬가지이다.
(2) 이식(耳識)
이근(耳根)으로 성경(聲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이 이식(耳識)이다. 이것은 귀[이근]로 소리[성경]를 들을 때 느낄 수 있는 좋고 싫은 마음의 분별[이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식의 대상은 오직 소리이다. 소리를 유식의 용어로 하면 성경이다. 이식 또한 들어서 좋은 소리가 있고 나쁜 소리가 있기 마련이다. 부드러운 음악 소리가 있는가 하면, 철공소에서 쇠를 자를 때 나는 날카로운 소리도 있다. 또한 사람의 소리에도 두 가지가 있고 그에 대한 반응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예를 들어 욕을 얻어먹었을 때 당장에 기분 나쁜 감정이 생기며, 칭찬을 들었을 때 기쁜 마음이 생기는 것은 매우 본능적인 것이며 직감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이다.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이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욕을 듣고서 지금 당장 표면에 드러난 감정으로는 기분이 나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를 위해 필요한 욕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달게 받을 만한 소리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욕이라도 오직 이식(耳識)으로만 인식한다면 싫다는 감정만 생길 뿐이다. 제6의식으로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단순한 욕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좀 더 복잡한 마음의 작용은 이식(耳識)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6의식(第六意識)의 도움이 필요하다.
(3) 비식(鼻識)
비근(鼻根)으로 향경(香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이 비식(鼻識)이다. 즉 코로 냄새를 맡을 때 생기는 좋은 냄새, 나쁜 냄새 하는 즉각적인 마음의 분별이다. 당연히 비근의 대상은 냄새이다. 향이라고 하나 향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우리가 맡을 수 있는 모든 냄새를 총칭하는 말이다.
(4) 설식(舌識)
설근(舌根)으로 미경(味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이 설식(舌識)이다. 이것은 혀로 음식 등을 먹을 때 느끼는 맛있고 맛없고 등의 마음 작용이다. 여기에는 다만 맛이 있고 없는 것 뿐 아니라 뜨겁고 찬 것, 달고 짠 맛, 맵고 싱겁고, 신 맛 등 혀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한다.
(5) 신식(身識)
신근(身根)으로 촉경(觸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의 작용인 신식(身識)이다. 이것은 우리의 몸으로 물질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이다. 신근의 대상은 촉경이라고 하여 물질계를 말하는데, 물질계란 단순히 딱딱한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전체를 그 대상으로 한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물질인 지(地)의 성질뿐만 아니라, 축축하거나 건조한 것 등의 수(水)의 성질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신근의 대상이며, 무덥거나 춥고, 뜨겁거나 찬 것 등 화(火)의 성질, 그리고 호흡이나 불어오는 바람 등도 우리의 몸인 신근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이다. 이처럼 촉경의 범위는 대단히 넓다.
이상 다섯 가지의 인식작용은 모두 감각적인 작용과 선과 악, 좋고 나쁜 등의 직접적으로 드러난 부분에 대한 식별만이 가능하다. 즉 빛과 소리, 냄새, 맛, 촉감 등 스스로에게 주어진 자성(自性)만을 분별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분별작용을 자성분별(自性分別)이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분별은 현재 사물의 겉모습만을 헤아린다고 하여 현량(現量)이라고 한다. 자성(自性)은 물질이 가지고 있는 본래[自]의 바탕성질[性]을 말한다. 물은 습하고, 얼음은 차며, 불은 뜨거운 것이 각각의 자성이다.
제 6의식(第六意識) - 識
유식사상에서 말하는 제6의식은 십팔계의 의식으로서, 의근(意根)에 의지하여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모두를 포함한 일체 유형무형의 모든 대상, 즉 법경(法境)을 분별하는 마음이다. 제6의식은 전5식의 감각적 인식을 종합적으로 인식하면서 동시에 기억, 회상, 추리, 상상, 망상 등의 작용을 한다. 제6의식은 분별작용을 하여 진(瞋)의 번뇌를 가져오며, 제7식과 제8식을 의지처로 한다. 이 제6의식은 앞에서 말한 전5식과는 전혀 다르다. 우선 전5식은 의지처가 눈, 귀, 코, 혀, 몸 등 모두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만, 제6의식은 순수한 정신적 기관인 말라식(제7식)과 아뢰야식(제8식)이 그 의지처 이다. 대상 또한 객관적인 물질계뿐만 아니라 정신적, 물질적인 모든 경계를 그 대상으로 한다. 그러면 의식(意識)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마음작용을 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 유식에서 바라보는 의식의 작용을 알아보겠다.
전오식은 스스로에게 주어진 성품만을 분별하는 자성분별을 하는데, 이 제6의식은 자성분별(自性分別)은 물론 그 외에 수념분별(隨念分別)과 계탁분별(計度分別) 등 더 복잡한 분별작용을 한다. 수념분별이란 과거를 회상한다거나 미래를 생각하는 등의 분별작용을 말하며, 계탁분별이란 착각을 하여 대상을 인식하는 데 오류를 일으키는 분별작용이다. 전오식은 현재 나타난 사물에 대해 기본적인 사유를 일으켜 헤아리는 작용인 현량(現量)을 일으키는데, 제6의식은 여러 가지를 비교하고 분석하여 판단하는 작용인 비량(比量)을 일으키기도 하며 대상을 판단할 때 오류를 일으켜 잘못 헤아리는 비량(非量)을 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나무가 타고 있는 불과 연기를 보고 ‘나무가 타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은 현량(現量)이고, 산 넘어 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 것을 보고 ‘아- 불이 났구나’하고 미루어 생각하는 것을 비량(比量) 이라고 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불이 난 것이 아니고, 저녁밥 짓는 연기였다면 비량(非量)이다. 제6의식은 다른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오구의식, 몽중의식, 독두의식, 정중의식, 광연의식 등이 있다. 이 이름들은 제6의식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작용과 역할을 나누어 따로 붙인 이름이기도 하다.
(1) 오구의식
오구의식(五俱意識)은 우리 주위의 모든 대상을 관찰할 때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즉 전5식과 함께 작용하여 대상을 분별하고 의식한다. 안식과 함께 일어나는 의식을 예로 들어 보겠다. 우리가 눈으로 대상을 볼 때, 단순히 보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온갖 분별심을 일으킨다. 거리를 지나가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예쁜 아가씨를 보았을 때 그저 보고 스치는 것이 아니라 다리가 잘 빠졌다든가(現量, 自性分別), 미니스커트가 너무 짧다(自性分別), 내 여자친구보다 더 예쁘거나 혹은 못하다(比量), 저런 겉멋이 든 여자는 집안일에는 신경도 안 쓸 거야(非量, 計度分別) 하는 등의 상상을 하게 되고, 심지어는 저런 여인과 결혼을 해서 아이도 낳고, 오손 도손 살면 얼마나 좋을까(隨念分別), 과거의 내 여자 친구를 생각하며 참 많이 닮았다(隨念分別) 등 온갖 분별심을 머리 속에 떠올리게 된다. 이처럼 복잡한 마음의 작용은 안근(眼根) 단독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작용이다. 이렇게 분별하고 헤아림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제6의식의 분별작용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귀로 어떤 소리를 들었을 때나, 코로 냄새를 맡았을 때, 혀로 맛을 볼 때, 몸으로 어떤 대상을 감촉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각종의 분별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이렇듯 제6의식은 전오식과 함께 작용하여 각종의 분별작용을 일으키는데 이 의식을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몽중의식
몽중의식(夢中意識)이란 말 그대로 꿈 가운데 나타나는 의식이다. 누구나 꿈을 꾸게 마련이며 꿈은 천태만상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꿈도 제6의식의 영역이다. 전생, 또는 그 이전에 내가 지은 행위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제8식인 아뢰야식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꿈을 꿀 때 제6의식을 통하여 다시 나타나게 된다. 보통 때에는 식이 맑지 못하고 복잡하고 번잡하여 아뢰야식이라는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다가 꿈을 꾸게 되면 복잡한 식이 가라앉고,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식들 중에 영향력이 강한 것들이 들쭉 날쭉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몽중의식이다. 그러나 꿈이라고 해서 모두가 진실인 것만은 아니다. 본인의 현실이나 이전의 업과 다른 꿈을 꿀 수도 있다. 이는 이전의 행위들이 체계적으로 아뢰야식 속에 정리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전혀 다른 행위들이 서로 얽히게 되어 하나의 불완전한 행위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의식에는 언젠가 남에게서 들었거나 책에서라도 한 번쯤 읽었다던가, 또는 직접 경험했던 것들이 드러나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것들이 아뢰야(alaya)식에 종자(種子)로 저장되어 있다가 유사한 환경을 만나면 표상(表象)되는 데 이를 우리는 의식이라고 한다. 반면 아뢰야식에 저장된 상태로 드러나지 않은 것을 무의식(無意識)이라고 한다.
(3) 독두의식
다음은 독두의식(獨頭意識)이다. 이것은 객관세계의 대상과 함께 작용하는 여타의 의식과는 다르게 내면에서 단독으로 사유하고 생각하는 의식을 말한다. 여기에는 크게 본다면 몽중의식과 정중의식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의식으로 인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면서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고, 미래에 있을 일을 추측하고 계획을 세운다. 이 독두의식으로 인해 우리들은 온갖 분별심을 내고 본래 고요한 본심을 흐려 놓아 마음을 뒤흔든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무상하여 얽매여 집착할 바가 아님을 깨닫지 못하고 애써 끄집어내어 스스로 그 속에 빠져 괴로워하고, 때로는 즐거워하는 등 스스로를 관념의 울타리에 가두고 있으며,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에 대해서 미리부터 걱정을 하거나, 희망의 꿈을 꾸면서 그 관념, 상상의 나래에 갇혀 스스로 괴로워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이 모든 어리석은 의식을 독두의식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땅히 우리가 닦고 닦아 정화해야 할 마음공부의 주된 대상이다. 바로 이러한 스스로의 분별심을 맑게 정화하고 고요하게 텅 비게 만드는 마음 수행을 통해 우리는 어느 정도의 맑은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다. 이 수행을 통해 이를 수 있는 단계의 의식이 정중의식이다.
(4) 정중의식
정중의식(定中意識)이란 앞에서 말한 모든 의식에서 나타나는 장애와 번뇌, 괴로움을 모두 정화하여 나타나게 되는 청정하고 맑은 의식을 말한다. 수행을 통해 삼매에 든다고 하거나, 마음을 비운다고 할 때 나타나는 맑은 의식이다. 우리에게 행복과 안정을 가져다주는 인식의 주체가 바로 이 정중의식이다. 정중의식을 생활화하는 것이야말로 요즘과 같은 복잡다단한 시대에 우리를 고요하고 평화롭게 하여 망상과 잡념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지름길이다.
(5) 광연의식 - 제6의식의 별명
제6의식은 물질과 정신세계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여 수많은 광범위한 인식작용을 일으키므로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도 부른다.
(6) 의식의 오염
제6의식이 수많은 분별심을 일으키고 각종의 광범한 의식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번뇌(煩惱) 때문이다. 번뇌는 의식을 산란하게 하는 주된 요인이다. 그래서 유식에서는 번뇌를 6가지 근본번뇌(根本煩惱)와 20가지 수번뇌(隨煩惱)로 나눈다. 근본번뇌는 탐(貪, 탐냄), 진(瞋, 성냄), 치(痴, 어리석음), 만(慢, 교만심), 의(疑, 의심), 악견(惡見, 잘못된 견해)의 여섯 가지이며,
20 수번뇌는 1.분(忿, 분함, 약하게 성냄), 2.한(恨, 원한), 3.부(覆, 죄업을 숨김), 4.뇌(惱, 분함, 한탄함), 5.질(嫉, 시기, 질투), 6.간(慳,아끼고 베풀지 않음), 7.광(속이고 교만함), 8.첨(諂, 아첨), 9.해(害, 남에게 손해를 끼침), 10.교(교만하여 남을 멸시함), 11.무참(無慙, 잘못을 저지르고 참회하지 않음), 12.무괴(無愧, 포악한 일을 하고 반성하지 않음), 13.도거(掉擧, 마음이 요동함), 14.혼침(昏沈, 혼미하고 침체함), 15.불신(不信, 진리를 못 믿음), 16.해태(懈怠, 게으름), 17.방일(放逸, 방종하고 방탕함), 18.실념(失念, 진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산란함), 19.산란(散亂, 정신이 밖으로 내달려 악견(惡見)을 유발함), 20.부정지(不正知, 대상을 항상 오해하는 어리석음)가 있다. 이처럼 수많은 번뇌 때문에 제 6의식이 산란하게 된다.
유식불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제6의식까지 만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가사(yoga師)들이 유가 명상을 하면서 제6의식만 가지고는 윤회를 설명할 길이 없고, 더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는 의식[潛在意識]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찾아낸 것이 제7의식(말라식, manas)과 제8의식(아뢰야식, alaya식)이다. 유식불교가 다른 불교사상으로부터 독립될 수 있는 것은 이 두 의식을 찾아낸 덕분이다.
제7식(말라식, manas)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험적 정보에 의존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이 전부인양 판단한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고를 이기심(利己心) 이라고 하며, 본능이라고 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이기적 사고를 최소화 하며, 궁극적으로 멸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고, 이를 최고의 수행 목표로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기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는 말라식이 아뢰야식을 의지처[所衣]로 하고, 동시에 그것을 인식대상으로 하여 자아라고 착각하고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집착심은 탐심(貪心)을 내어 번뇌를 가져온다.
우리는 자기의 존재에 집착한다. 나라는 사람, 내가 여기 있다, 나는 고귀한 존재로서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잘 났다고 생각하는 등 자기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러한 고정적이고 실재적인 자아의 존재를 부정한다. 자기 존재성은 자아(自我)라 하며, 자아를 인식하는 정신작용을 자아의식(自我意識)이라고 한다. 이 자아의식을 일으키는 주체는 바로 제7식인 말라식이다. 그래서 이 의식을 자아의식이라 한다. 자아의식은 선천적인 것[구생기, 俱生起]과 후천적인 것[분별기, 分別起]로 나누고, 선천적인 것 중에서 제7식 말라식이 제8식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자아처럼 집착[착각]함으로서 자아의식이 발생한다.
(1) 제7식 말라식의 특징
자아에 대하여 집착한다.
자기는 존재한다는 개념적인 자아의식이 있고, 또 개념이나 이름을 초월한 본능적, 선천적인 자아의식이 있다. 몸이 넘어지는 순간 손을 써서 다치지 않게 찰라 동작이 반사적으로 나온다거나, 어떤 물체가 눈으로 날라 들어올 때 눈을 보호하기 위하여 눈을 감는 동작들이 자아의식 때문에 가능하다. 죽음이 예상되는 순간에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의식과 행위, 자기를 아름답게 치장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행위,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는 노력 등이 모두 자아의식 때문이며, 자아의식은 자기에 대한 집착에서 나오며 본능적 의식이다.
말라식은 깊고 명확하게 대상을 인식하며, 항상 살피고 헤아린다. 또 아치(我癡), 아만(我慢), 아견(我見), 아애(我愛)의 네 가지 번뇌와 함께 일어나고, 제8식 아뢰야식을 자기 것인 양 착각하는 특징이 있다. 의식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제7식 말라식은 소멸의 대상이다. 이 식을 소멸시키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속박과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불교의 수행은 제7식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말라식은 아라한, 멸진정, 출세도 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유식30송 제7송).2)
제8식,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한다.
자아의식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다. 유가사(yoga사)들은 말라식의 대상으로 아뢰야식을 생각하였다.「말라식은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해서 아뢰야식이 자아라고 착각한다」고 『유가론』에서 말하고 있다. 인도의 유가사 안혜는 ‘말라식은 아뢰야식을 자아로 삼고, 종자(種子)를 자아의 소유로 삼는다’고 하였으며, 호법은 ‘말라식은 아뢰야식의 견분(見分)을 자아로 삼는다’고 하였다. 아뢰야식은 폭포수와 타는 촛불과 같이 찰라 생멸하는 존재이므로 고정적이고 실재적인 실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말라식이 아뢰야식을 자아로 착각하여 일으키는 자아의식은 실체가 없는 허상(虛相)에 불과하다.
네 가지 번뇌와 상응(相應)한다.
네 가지 번뇌는 아치, 아견, 아만, 아애를 말하며, 상응이란 함께 일어남을 뜻한다.
첫째, 아치(我癡)
아치는 무명(無明)이다. 현장법사가 편찬한 『성유식론』에서 ‘아치는 무명이다. 나의 참 모습에 어두워 무아의 이치를 모른다. 그래서 아치라고 한다’고 하였다. 무명이 진리, 진실을 덮어서 감춘다고 한다. 『성유식론』에서 ‘모든 중생은 일체에 있어 항상 무명으로 진실의(眞實義)를 덮고, 지혜의 눈을 막는다’고 하였다. 진실이 어리석음으로 덮여있는 무명은 단순히 지식과 지혜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유식무경이라 하여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심층심리에 깔려있는 어리석음이다.
둘째, 아견(我見)
아견은 자아가 실재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성유식론』에서 ‘아견은 아집(我執)이다. 자아가 아닌 법을 망령되게 분별해서 자아로 삼는다’고 하였다. 제7식 말라식은 자아의식이라고 하였다. 자아의식의 자기중심적 사고는 바로 아견에서 비롯된다.
셋째, 아만(我慢)
아만은 거만이다. 자아에 집착하여 자기가 잘났다고 믿는 어리석음이다. 아견은 아뢰야식이 자아로 잘못 인식된 데서 비롯되며 자아는 존재한다는 교만이 생기게 된다.
넷째, 아애(我愛)
아애는 아탐(我貪)이다. 자아에 대하여 애착심을 갖는 의식작용이다. 우리는 자기의 몸은 물론이고, 명예, 자존심 등을 사랑하고 집착한다. 이 세상에 자기 밖에 없다고 착각하면서 남을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의 생명을 해하며,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등 악한 행위를 하게 되는데 이는 아애에서 비롯된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 세상에서 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심에서 자아에 대한 강한 집착심이 작용한다. 아애는 인간의 고통 중 하나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이로 인해서 생사윤회하는 고통의 바다에서 떠돌게 된다.
제8식(아뢰야식, alaya식)
제8식 아뢰야식의 존재
인도의 유가사(yoga師)들이 명상을 하면서 ‘윤회의 주체는 무엇인가?’ 하고 깊이 있게 의심을 제기하였다. 요가는 표층적인 제6식의 활동을 멈추고 마음을 오로지 하나의 대상(화두, 마음 챙김)에 몰두하는 것을 본질로 하고 있다. 표층적인 마음작용이 멈출 때 그 속에 잠재되어 있던 심층심리(深層心理)가 전개된다. 이 심층심리가 아뢰야식의 세계이며, 유심(唯心), 유식(唯識)의 세계이다. 서양에서는 20세기 초에 비로소 융에 의하여 무의식(無意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아뢰야식은 표층에 떠오르지 않을 만큼 미세하다고 유가사들은 말한다. 유식불교의 소의경전(所衣經典)인 『해심밀경, 解深密經』에는
『아뢰야식은 매우 깊고 미세하며, 일체종자식은 폭포의 흐름과 같다. 나(아뢰야식)는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에게 열어 보이지 않으니, 그들이 분별하고 집착해서 자아로 삼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매우 깊고 미세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며, 총명한 사람의 지혜로도 알기가 어렵다는 의미이다.
제8식 아뢰야식의 의미
아뢰야식의 아뢰야(alaya)는 ‘저장하다. 저장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저장하다는 능동적인 상태이고, 저장되다는 수동적인 태도이다. 그러면 무엇을 저장한다는 말인가? 종자(種子, bija)를 저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을 통해서 하는 생각과 행동은 하나도 빠짐없이 종자로 변하여 아뢰야식 속에 저장된다. 이는 무시(無始)이래 계속되고 있으며, 저장된 종자는 지워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전생에서 이생으로, 이생에서 내세(來世)로 계속 이어지면서 존재한다. 종자는 아뢰야식 속에 있으면서 스스로 자기 결과를 일으키는 특수한 에너지(氣, energy)이다. 자기결과를 우리는 업(業)이라 한다. 여기에서 인과응보(因果應報), 업보(業報)사상이 나온다. 자기가 한 행동과 생각이 빠짐없이 아뢰야식 속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가 그와 유사한 환경에 처하면 의식으로 살아나서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우리는 우연히 이러한 경험을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어느 지방을 방문하였을 때 전에 전혀 와본 기억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포근하며, 전에 보았던 것 같은 느낌이 와서 친근감이 들 때가 있다. 이러한 경우라면 전생에서라도 그곳을 방문한 경험이 있으며, 그때의 경험이 종자로서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같은 환경을 만나 아뢰야식 깊숙이에 잠재되어 있던 그 종자가 표상작용을 통하여 의식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그래서 신토불이(身土不二)이며 신토불이는 몸과 마음을 안정시켜 긍정적이다.
현재의 생각과 행동은 종자로 저장되며, 저장된 이 종자는 다시 생각과 행동을 일으킨다. 이를 ‘현행(現行)은 종자를 낳고, 종자는 현행을 낳는다’고 한다. 아뢰야식에 저장되는 것을 훈습(薰習)이라고 하며, 종자를 습기(習氣)라고도 한다. 종자는 좋은 종자와 나쁜 종자가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통해서 행한 나쁜 생각과 행동은 나쁜 종자를 낳고, 선한 생각과 행동은 선한 종자를 낳는다. 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렇다고 한다. 종자가 현행으로 나타날 때도 악한 종자는 반드시 악한 행동과 생각을 낳고, 선한 종자는 선한 행동과 생각을 낳는다. 저장된 종자는 업(業)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의 심신을 오염된 상태에서 청정한 상태로 질적 변화를 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이며, 수행을 통해서 아뢰야식 속에 있는 악한 종자를 남김없이 소멸시켜야 완성된 인간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유식불교에서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고 계속 반복해서 요가를 실천함으로서 아뢰야식 속의 악한 종자를 다스려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아뢰야식의 기능
첫째, 신체를 유지하는 기능이 있다.
우리의 몸은 색(화 , 수 , 지 , 풍)과 식(수, 상, 행,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누누이 배웠다. 식은 신체에 의지하여 생장(生長)하며, 모든 감각을 일으키고, 서로 의지하는 등 식과 신체는 안위동일관계(安危同一 關係)이다. 이 둘은 어느 한 쪽이 양호한 상태[安], 또는 좋지 못한 상태[危]이면 다른 한 쪽도 이에 상응해서 같이 양호, 불량한 상태가 되는 상관관계에 있다. 혼(魂, 靈魂)과 신체(身體)가 하나냐, 둘이냐를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그러나 인류가 문명을 성장시키기 이전부터 혼과 육신은 따로 존재한다는 의식이 지배적 이였다. 그렇다면 혼과 육신은 서로 다르게 존재하고 있으나, 서로 의존적인 관계이며 안위동일체라고 볼 수 있다. 세계의 문명종교는 이를 이론으로 하고 있다.
둘째, 종자를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종자는 아뢰야식 속에 저장되어 존재한다. 종자와 아뢰야식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종자는 사물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힘, 즉 기(氣, energy)이므로 아뢰야식도 사물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윤회의 주체이다.
윤회는 전생의 업이 현생으로, 또 내생으로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즉 전생의 업에 의하여 현생의 나를 형성시키며, 현생의 업은 내생의 나를 만든다. 그러므로 윤회는 전생과 현생이 같은 존재임을 증명시킨다. 아뢰야식 속에 있던 종자는 사람이 죽으면 등류습기(等流習氣)로 변하여 있다가 다른 중생이 성적 관계를 가질 때 합류하여 새로운 생명을 받는「씨」이다. 하나의 생명체의 탄생은 정자 +난자 +등류습기에 의하여 가능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제기된다. 불교는 자아를 부정한다. 그런데 사람이 죽은 후에도 종자가 등류습기로 존재하다가 다음 생으로 전생의 업이 이어진다면, 자아의 존재가 아닌가? 전생의 업을 현생의 나에게 전달시키는 등류습기는 자아인가? 결론을 먼저 말하면 그렇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등류습기는 폭포수와 촛불과 같이 찰라마다 생멸(生滅)을 반복 하면서 상속하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무아란 현존하는 유기체인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일주재자(常一主宰者)적인 자아를 부정한 것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3)
8식의 관계
전5식은 대면하는 대상[경, 境]에 따라서 하나, 둘, 또는 다섯이 동시에 일어나지만 제6식과 제7식, 제8식은 항상 함께 일어난다. 예를 들면, 눈으로 장미꽃을 보았을 때, 순간 눈(전5식)은 형태와 빛깔을 구분하고, 제6의식은 아! 장미꽃이구나. 장미꽃은 영국이 본산지 이며 사랑을 상징하고 붉은 색도 있고 흰색도 있으며, 검은 장미도 있다고 분별한다. 이 분별작용은 제6식 혼자서 독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제8식에 저장된 종자에 의지하며, 동시에 제7식은 장미를 갖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꺾어 가지려고 하는 행동을 일으키게 한다.
종자(種子)
우리가 무시(無始)이래 해온 정신적 육체적 행위는 하나도 빠짐없이 종자(또는 습기, 習氣)로 훈습(薰習)되어 제8식 아뢰야식에 차곡차곡 저장된다. 저장된 종자는 유사한 환경을 맞이하면 현행으로 되살아난다. 한번 훈습된 종자는 언젠가는 반드시 현행(現行)되는데 선을 쌓으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악을 쌓으면 악의 결과를 가져온다. 악의 종자는 업장소멸을 위한 수행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고 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 불교의 수행은 아뢰야식에 저장된 악의 종자를 소멸해 가는 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길을 가다가 만 원권 돈다발을 발견했다고 하자. 이 때 어떤 사람은 남이 볼가 봐 빠른 동작으로 호주머니에 넣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다소 머뭇거리다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자기 것으로 취할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남이 보든 말든 돈을 주워서 돈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서 경찰관서에 가지고 가서 신고를 할 것이다. 이 세 사람은 왜 이런 차이를 보일까? 그 차이는 그들이 과거에 정신적 육체적 경험에 의하여 축적돼온 종자의 차이 때문이다. 선행은 선종(善種)을 낳고 다시 선행을 가져오며, 악행은 악의 종자를 낳고 다시 악한 행동을 생산한다.
유식사상사(唯識思想史)
유식불교는 공・중관학과 함께 인도 대승불교를 형성한 핵심이다. 유식불교는 유식무경(唯識無境), 심외무경(心外無境)의 식일원론(識一元論)에 입각하여 부파불교의 유적존재관(有的存在觀)과 반야공불교에서 악취공자(惡取空者)의 무적존재관(無的存在觀)을 아우르는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논리화 하였다.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upanisad) 시대부터(어쩌면 그전 veda 시대부터) 명상을 수행의 방법으로 하여 실천해 왔다. 숲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자아의 내면에 있는 진리를 찾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들을 유가사(瑜伽師, Yoga사)라고 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명상은 인도 수행자들의 보편적인 방법 중의 하나에 속했다. 불교는 이 요가 수행방법을 받아들였으며, 불전에서는 디아나(禪), 사마디(samadhi, 定)로 표현하고 있다.
심일경성(心一境性)과 정견(定見)을 얻고자 했던 초기불교의 선정(禪定)법은 점차 지관(止觀)이라는 불교의 독자적인 수행방법으로 정립되었다. 부파불교 시대에는 부파마다 아비달마론사와 유가사가 병존하여 교학연구와 실천수행으로서 교단을 유지하였다. 유가사들은 교학연구에만 치중하여 번쇄한 철학보다는 그들이 오랫동안 명상을 통하여 체험한 자신들의 선관(禪觀)을 더 중시 하였으며, 특히 윤회의 주체는 무엇인가 하고 그 주체를 찾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 속 아주 깊은 심층(深層)에서 끊임없이 흐르면서 찰라 변화하는 식, 즉 제7식 말라식과 제8식 아뢰야식을 발견하였다.
유식사상의 성립
인도에서 유식사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는 4세기 중엽쯤으로 보고 있다. 이 무렵 미륵(彌勒, 350~470)과 무착(無着, 395~470)에 의하여 조직되고, 세친(世親, 400~470)에 의해 정리 되었다.
미륵
현재 도솔천에서 수행정진 중에 있는 미륵보살이 유식불교 성립에 관여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에 의하면 무착이 삼매(三昧, samadhi)에 들어 도솔천으로 올라가서 미륵으로부터 유가유식의 가르침을 받고 이 세상에 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미륵을 역사적 실존인물로 보는 견해가 점차 높아가고 있다. 생각하건데 유가유식은 아주 먼 시대부터 자연스럽게 전하여 오던 설을 미륵과 무착이 이론화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무착(395~470년경)
무착은 유식불교를 체계적으로 이론화 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서북인도의 간다라 지방에서 태어난 바라문 출신이며, 세친이 그의 친동생이다. 무착은 처음에는 부파불교에 출가하였으나 대승에 귀의하여 공관과 유가유식을 공부하였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무착은 미륵을 통하여 유가유식을 전수받아 집대성 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친(400~480년경)
세친은 무착의 친동생이다. 그는 설일체유부에 출가하였으나, 형 무착의 권유로 대승에 귀의하여 활발하게 활동 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첫째, 여러 분야의 대승경전 주석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유가유식학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화엄, 반야, 법화, 열반, 여래장, 정토 등 여러 방면에서 경전을 알기 쉽게 해석하여 널리 전파하였다.
둘째, 설일체유부, 경량부, 승론파 등의 외경실재론(外境實在論)의 주장을 반박하여 유식무경사상을 천명하였다.
셋째, 무착에 의하여 조직된 유식교학 체계를 정리하여 대성 시켰다.
그는 저술에 천재적 능력을 발휘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특히『유식이십론』『유식삼십송』『대승성업론』 등을 통하여 유식불교를 완성시켰다. 유식불교의 소의경전이『해심밀경, 解深密經』이나 실은 세친의『유식삼십송, 唯識30頌』을 인도의 여러 논사들이 주석을 저술하였고 이를 다시 중국의 삼장법사 현장이『성유식론, 成唯識論』을 편찬하였다. 오늘의 유식불교는 이 유식삼십송과 성유식론을 중심으로 이론이 발전하여 왔다.
십대 논사(10大 論師)
세친은 『유식삼십송』을 통하여 유식불교를 체계화 하였으나 만년에 저술하다보니 미처 본인의 주석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세친이 세상을 떠난 후에 호법(530~561), 안혜(510~570) 등 십여 명의 논사가 주석서를 저술하였다. 이들은 세친의 학문적 의도를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어 서로 다소 다른 이론을 내 세웠다.
유식불교의 중국 전래
중국에서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 떠난 당나라 삼장법사 현장(玄裝, 602~664)이 인도에서 호법 논사의 재가제자인 현감거사로부터 유식삼십송에 대한 10대 논사들의 주석서를 얻어 귀국하였다. 현장은 그의 제자 자은 기(慈恩 基)에게 번역하도록 하였다. 자은 기가 10대 논사들의 주석을 살펴보니 각자 다른 면이 있고, 양적으로도 방대하여 그대로 번역하면 오히려 유식이론에 혼선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므로 스승에게 건의하여 승낙을 받고서 호법 이론을 중심으로 번역하되 다른 분들의 주석을 참고 하였다. 이 것이 『성유식론 成唯識論』이다.
중국에는 이미 유식불교에 대하여 『십지경론』을 소의로 한 지론종과 『섭대승론』을 소의로 하는 섭론종이 있었다. 여기에 『성유식론』을 소의로 하는 새로운 이론의 유식불교가 중국에 소개되면서 자은 기가 거처하는 자은사(慈恩寺)를 중심으로 확산되어 「법상종, 法相宗」이라는 새로운 종파를 이루었다.
이 무렵 신라에서 중국으로 유학 간 원측(610~696)스님의 영향으로 중국의 법상종이 신라에 전래되었고, 이를 원효(617~686)대사가 한반도에 뿌리 내리게 했다.
무상유식(無相唯識)과 유상유식(有相唯識)
인도에서 유식불교는 세친 이후 무상유식론과 유상유식론의 두 사조로 나뉘었다. 이 두 학파는 당시 인도 철학이 가지고 있던 무형상인식론(無形象認識論)과 유형상인식론(有形象認識論)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무형상인식론은 우리의 5감이 대상을 인식할 때 인식되는 형상(形象)은 그 대상 자체에 속한 것이며, 인식은 다만 그 형상을 반영할 뿐이라고 본다.
반면 유형상인식론은 우리가 대상을 지각하는 것은 식이 대상의 형상을 표상화(表象化)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 지각(현량, 現量)된 대상은 그 자체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식상황 속에 있는 대상의 형상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유식학파의 입장은 모든 현상된 존재는 아뢰야식이 전변(轉變)되어 형성된 것으로 가유(假有)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공식 입장이므로 유형상인식론에 접근 한다. 그러나 인식상의 형상이 허위로 부정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진실한 것으로 그 존재성을 인정할 것인가에 따라 무상유식론과 유상유식론의 사조로 갈리었다.
무상유식론(無相唯識論)
무상유식론은 인식상황 속에서 식상(識上)에 형성된 형상은 변계소집성이므로 허망 되다. 그러므로 부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길가의 새끼줄을 순간 뱀으로 잘못 인식하였다가 자세히 보고나서 새끼줄임을 알게 되었을 때, 먼저 식상의 뱀의 형상이 표상화 되고 나서 다음 순간에 다시 새끼줄의 표상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표상의 진실 된 것이 아니며, 인식의 본질이 아니다. 이는 사량(思量)의 소산이며 허망된 것이다.
무상유식론은 무착 - 세친 - 안혜 - 진제로 이어졌으며, 진제가 중국에 와서 번역한 『섭대승론』을 소의로 성립된 섭론종의 교의도 무상유식론 이다.
유상유식론(有相唯識論)
유상유식론은 식상(識上)의 형상은 전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실재(實在)로 간주한다. 그러나 실재한다 하여도 식상의 형상은 아뢰야식의 표상에 의하여 실재하는 것이므로 식상의 형상으로 보았을 뿐이다. 즉 외부대상[境]이 실재한다 하여도 자기의식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면 존재가 부정된다. 눈은 마음[식]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식[마음]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외부대상은 인식 속에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 이론은 진나 - 무성 - 호법 - 계현으로 이어 졌으며, 호법의 제자인 계현에게서 수학한 삼장법사 현장이 호법의 학설을 중심으로 편찬한 『성유식론』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법상종(法相宗)은 유상유식론의 입장이다.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다
이공(二空)의 진리를 보다
유식불교는 심리학이면서 종교학이다. 인간의 심층심리를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는 학문이면서 동시에 윤회의 씨를 찾아 업의 근원을 믿음으로서 종교이다.
유식불교는 사마디(samadhi)와 위빠사나(vipassana) 수행으로 자기혁신을 꾀하여 무명의 세계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는 수행이다. 자기혁신이란 의타기상(依他起相)에서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을 제거하여 자기완성을 이루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아공(我空), 법공(法空)의 이공(二空)의 진리를 깨쳐야 한다. 우리 범부들은 아법이공(我法二空)의 원리를 깨치지 못하여서 윤회의 고해 속에 머무르게 된다.
아집(我執)은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자아가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상[常主]은 정해진 추체, 주인을 뜻하며, 일[獨一]은 혼자서, 단독으로 라는 뜻이고, 주[主王]는 제왕적 주인을 말한다. 또 재[司宰]는 맡아서 주재한다는 뜻이니, 상일주재란 특정한 주체가 혼자서, 독단적으로 제왕적(帝王的) 위치에서 주제하는 개체(자아)라는 뜻이며 이러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나라는 존재는 항상 상대적이므로 아견, 아애, 아만, 아치에 빠지지 말고 자신을 낮추고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자신에게 집착하면 탐, 진, 치의 번뇌를 가져와서 괴로움에 빠지기 때문이다. 무아란 상일주재성을 지닌 인격적 실체를 부정하는 것이지 상대적인 나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법집(法執)은 외계사물(境), 존재하는 구성요소(法, dharma)가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아집에 의하여 번뇌장(煩惱障)이 생기고, 법집에 의하여 소지장(所知障)이 생긴다. 이 두 장애로 인하여 중생은 윤회를 되풀이 한다. 역으로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집과 법집을 버려야 한다. 이공(二空)은 아와 법의 집착에서 떠나야 함을 말한다.
『성유식론』에서
『두 가지 공을 깨달으면 장애도 따라서 소멸한다, 윤회의 삶을 계속하게 하는 번뇌장(煩惱障)을 소멸함으로서 참다운 해탈을 증득한다. 지혜를 막는 소지장(所知障)을 소멸함으로서 대보리를 얻는다.』고 했다.
‘나’에 대한 집착인 아집은 번뇌장을 일으키며, 만법이 실재한다고 믿는 법집은 소지장을 가져온다. 아집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공이며, 아공은 번뇌장을 끊어 해탈[열반]을 얻는다. 법집에서 벗어나는 것이 법공이며, 법공은 소지장을 끊어 깨달음[보리]을 얻는다. 결국 자기 본질을 바라보는 무아(無我)의 이치를 깨닫고, 만법의 현상을 바로보아 무법(無法)을 깨달으면 자기완성을 이룰 수 있다. 반야사상에서 누누이 강조한 집착심과 분별심을 여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진리와, 아공 ․ 법공의 이공을 이루면 깨달음과 열반에 이른다는 유식사상은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자성(三自性)
나를 포함한 만법은 인연생멸(因緣生滅)하므로 항상 존재하지 않으니 공이라는 반야사상의 공성(空性)을 유식사상에서는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이라고 한다. 원성실자성은 진리, 진여를 뜻한다.
「밤길을 가다가 뱀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아침에 가서 확인해 보니 뱀이 아니고 새끼줄 이였다」
위 예문에서 ①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여 실제 뱀이라고 믿었던 점, ② 아침에 확인하여 보니 뱀이 아니고 새끼줄 이었다는 점, ③ 새끼줄도 결국은 짚이라는 물체가 만들어 낸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
변계소집자성은 분별된 존재성이다. 언어에 의하여 존재하며, 마음을 떠나 그대로 실재한다고 생각되는 사물이다. 예문에서 뱀은 변계소집자성이다. 실재 있지도 않은 아와 법을 착각으로 존재한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계소집자성은 공이며, 집착이 만들어 낸 가상이다. 마땅히 버려져야할 대상이다.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
의타기자성은 인연에 의하여 존재하는 법이다. 예문에서 새끼줄이다. 새끼줄은 실재한다. 그러나 새끼줄은 짚이 인연에 의하여 잠시 새끼줄이라는 형체를 이루고 있을 뿐 새끼줄을 풀면 짚만이 존재한다. 짚도 썩으면 사라진다. 의타기자성은 인연에 의하여 생겨나는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을 항상 실재하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허망분별(虛妄分別)이다. 허망분별심은 아뢰야식을 자아로 착각하여 일어난다. 아뢰야식 자체가 폭포수와 같이 찰라마다 생멸(生滅)을 반복하기 때문에 결코 자아가 될 수 없다. 의타기자성은 아뢰야식이다. 그러므로 정(淨)과 염(染)이 같이 존재하는 염정식(染淨識)이다.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
원성실자성은 궁극적인 진실, 불변의 진리, 곧 진여이다. 예문에서 뱀은 실재하지 않는 새끼줄의 환영(幻影)이라는 사실, 짚도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는 사실이 곧 진리이다. 이 진리가 원성실자성이다. 원성실자성은 불변이며, 실재하는 유(有)이다. 만법이 공인데 어찌 유라고 할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진여, 깨달음 그 자체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유식30송』제25송에
「이것(원성실성)은 모든 법의 승의(勝義)이며, 곧 진리이다. (원성실성은)상주하고 평등한 것이면서 그것의 자성이기 때문에 곧 유식의 참다운 성이다」라고 하여 원성실자성을 유(有)라고 하였다. 이 점이 반야공의 일체개공의 사상과 유식사상이 가지는 차이점이다.
삼성(三性)의 관계
「유식삼십송」에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의타기자성이 변계소집자성을 멀리 여읜 것이 원성실자성이다.」
의타기자성은 아뢰야식, 곧 마음[心]이다. 허망분별의 의타기자성에서 분별에 의하여 전혀 사실과 다르게 착각하여 존재한다고 믿는 변계소집자성을 제거시키면, 진여만이 남는다. 아뢰야식인 의타기자성 속에는 변계소집자성이 있기에 오염(汚染)된 식이 된다. 염정심(染淨心)인 의타기자성에서, 염심(染心)인 변계소집자성을 제거하면 청정심(淸淨心)인 원성실자성만 남는다.
유식의 수행단계(修行段階)
유식의 수행단계는 이상에서 설명된 유식의 성품(性品)과 양상(樣相)을 몇 가지 단계로 볼 것이며, 어떻게 들어가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먼저 두 가지 종성(種性)이 갖추어 져야 한다.
하나는 본성(本性)에 머무는 종성이다. 언제부터인가 알 수 없는 옛날부터[무시, 無始] 근본식에 의탁해서 본래부터 있는 무루법(無漏法)의 원인이다.
두 번째는 훈습(薰習)으로 이루어진 종성이다. 법계로부터 들어서 얻은 지혜 등이 훈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두 가지 종성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유식수행의 단계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자량위(資糧位)이다.
자량위 단계는 유식을 이해하고 믿음이 깊으나 아직까지는 ‘능취(能取)와 소취(所取)가 공(空)이다’하는 단계에는 미치지 못한 상태이다. 이 단계는 외부를 향한 문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소지장(所智障)과 번뇌장(煩惱障)4)을 제어하고 단멸하는 단계가 아니다. 해탈을 위하여 복덕(福德)과 지혜(智慧),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행을 쌓는 단계이다.
지혜는 6바라밀의 지혜를 말하며, 복덕은 보시, 지계, 인욕, 선정, 정진을 가리킨다. 자리는 팔정도, 칠각지, 오근 등을 수행함을 말하고, 이타는 4선법(4攝法)과 4무량심(4無量心)5)을 실천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가행위(加行位) 이다.
가행위는 자량위에서 닦은 지혜와 복덕을 잘 비축하고 나서 인식대상(所取)과 인식주체(能取)를 점차 제어하고 제거하여 번뇌가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명칭, 대상, 자성, 차별 등 모든 인식대상이 허망 된 존재[假有]로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추구하고 관찰하는 단계이다.
세 번째는 통달위(通達位)이다.
통달위에서는 모든 보살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조견하여 집착심과 분별심을 여의고 있는 그대로 존재의 성품과 현상을 통하여 체득한 경지이다.
네 번째 단계는 수습위(修習位)이다.
수습위 단계는 끊임없는 수도 단계이다. 있는 그대로 통달한 진리를 반복해서 닦아 익힌다. 이 단계에서 아집과 법집을 여읜다.
다섯 번째 단계는 구경위(究竟位)이다.
구경위는 최고의 바른 깨달음, 즉 열반(涅槃)에 들음을 말한다. 장애를 벗어나 원만한 지혜를 갖춘다. 미래가 다하도록 중생을 교화 한다. 열반은 곧 무득(無得)의 세계이고,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으며, 선(善)이고, 상주(常住)하는 것이며, 안락(安樂)이고, 해탈신(解脫身)이므로 법신(法身)의 세계이다.
전의(轉依) - 자기완성(自己完成)
유식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성취하는 원리를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전식득지는 현상세계의 허망한 식(識)을 진여(眞如)의 무분별(無分別)로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의에서 전은 전사득지(轉捨得智)를 뜻하며, 이는 번뇌장과 소지장의 종자를 버리고 열반과 보리를 전득(轉得)하는 것이다.
의(依)는 의타기자성을 말한다. 염정식인 의타기자성을 청정식인 원성실자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의타기자성인 아뢰야식 속에는 악의 종자와 선의 종자가 함께 들어 있다. 악의 종자는 변계소집자성이다.
불교수행은 우리들 마음인 아뢰야식 속에 있는 악의 종자를 여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전의(轉依)라고 한다. 여기에서 의(依)는 依他起自性)을 의미한다. 불자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 전오식을 성소작지로 전환하고, 제6의식을 묘관찰지로 전환하며, 염오식인 말라식을 평등성지로 전환하고, 아뢰야식을 대원경지로 전환하는 것을 실행해야 한다.
① 성소작지(成所作智)는 해야 할 일을 하여서 마치는 지혜이다. 안식(眼識) 내지 신식(身識)의 감각작용인 전5식이 변화한다.
② 묘관찰지(妙觀察智)는 관찰하는 지혜이다. 모든 사물의 자체와 보편적인 특질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제6의식의 이것, 저것 하는 개별적인 인식상태인 분별작용이 변화된다.
③ 평등성지(平等性智)는 평등한 본성을 보는 지혜이다. 말라식에서 근원적인 자아의식 작용이 없어져서 자기와 남이 평등하다고 보는 지혜이다.
④ 대원성지(大圓性智)는 큰 거울과 같은 지혜이다. 아뢰야식 안에 있는 모든 오염[染心]이 제거되어 마음이 근본적으로 티끌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인 거울처럼 된 상태이다. 크고 둥근 거울에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 지는 것과 같이 대원경지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항상 치우침이 없이 나와 우주가 하나 된 지혜이다. 대원경지는 곧 깨달음에 들어간 상태이다.
수행은 성소작지에서 대원성지에 이르는 단계를 목표로 삼고, 꾸준히 정진하여 한 단계, 한 단계 오르는 과정이다. 수행을 통해 마음의 때가 조금씩, 조금씩 닦여져서 최후에는 티끌하나 없이 닦여진 순선(純善)의 본성(本性), 즉 진여(眞如)가 나타난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성(性)은 완성된 자기이다.
불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하였다. 절대신(絶對神)이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혹독한 정진(精進, 修養)을 통해서 자신을 완성시킬 때, 그 때가 깨달음을 얻은 시점이며, 그리하면 영원히 평온할 수 있다.
제3편 불교 수행(修行)
부처님 제자[佛者]인 우리들은 신・해・행・증(信・解・行・證)의 단계를 거쳐 부처님께 접근하여야 한다.
먼저 목숨을 다하여[至心歸命禮] 삼보(三寶)님께 귀의하기로 믿음을 일으키고, 두 번째는 부처님은 무량(無量)한 공덕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 세 번째는 법(法)은 큰 이익이 있다고 믿어야 하며, 네 번째는 승가는 능히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수행하여 우리를 바른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다고 믿는 것이다.
불교는 절대자, 즉 신에게 복종하는 종교가 아니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수행을 통하여 진리를 찾는 실천 종교이다. 수행은 마음을 닦는 과정(process)이다. 과정이므로 계속, 반복적으로 닦아가야 한다. 수행의 방법에는 많은 종류가 있으나, 수행의 전 단계로서 기도가 있다. 기도에는 염불, 주력, 간경, 절, 참회, 사경, 사불 등이 있다.
수행으로는 기도를 포함하여 조사선, 간화선, 묵조선, 사마디(Samathi), 비빠사나(Vipassana) 등을 들 수 있다. 깨달음을 위한 수행에는 어느 한 방법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관(止觀)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수행방법을 실천하면 되는 것이고, 염불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을 염불수행을 하면 된다. 다른 수행도 또한 같다고 할 것이다.
절
절은 오체투지가 기본이며 3배, 7배, 108배, 1080배, 3000배 등이 있다.
주력(呪力)
주력은 진실한 말의 힘이다. 참말이기 때문에 진언이라고 한다. 진언은 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언을 설하기 전에 부처님의 목적과 마음을 이해하고서, 마음을 바르게 먹고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으면서 지극정성으로 하여야 한다.
간경(看經)
간경은 부처님의 가르치심인 불경을 읽고 외우는 것을 말하는데, 단순히 읽고 외우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의미를 알고 마음속 깊이 생각하면서 해야 한다.
사경(寫經)
사경은 경전을 베껴 쓰는 일이다. 삼배하고 한자 쓰고, 다시 또 삼배하고 한자 쓰는 수행을 말한다.
염불(念佛)
염불이란 부처님이나 보살님을 마음속으로 간절히 떠 올리는 것이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관세음보살 등을 마음으로 염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부처님 마음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염불을 통하여 삼매에 들 수 있도록 정진하는 것을 정근(精勤)이라 한다.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나 두려워서 물러서려고 하는 수행자를 위하여 여래는 「뜻을 오로지하여 전의염불(專意念佛)6)을 하면 원에 따라 타방정토(서방정토 등)에 태어나 항상 부처님을 친견하기 때문에 끝내 물러섬이 없다」고 기신론을 밝히고 있다.
염불은 부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입으로는 부처님을 부르고, 귀로는 듣는 5감을 총 동원한 지극한 칭명염불이어야 한다.
기도(祈禱)
기도는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거나, 부족한 점을 얻기 위하여 부처님과 보살님의 신비한 힘에 의지하여 간절하게 비는 것을 말한다. 기도할 때에는 자신을 한 없이 낮추고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면서 불보살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참회(懺悔)
참회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계(戒)와 율(律)에 어긋나는 생각과 행동을 하였을 때 잘못을 뉘우치고, 깨끗이 씻어내는 것을 말한다. 즉 잘못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하는 것이다. 참회는 참된 마음으로 하여야 한다.
발원(發願)
불교는 자신이 스스로 진리를 찾는 수행의 종교라고 하였다. 기도는 부득이한 경우 최소한으로 불보살님의 가피력에 의지하는 것이지 모두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부처님과 보살님께 내가 어떻게 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종교가 아니라, 내 스스로 어떻게 하겠다는 목표를 지향하고, 의지를 가지고 정진하는 것이 주이다. 발원은 바로 이러한 원(願, 誓願)을 세우고 부처님께 맹세하면서 전심전력으로 수행하여 나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목표를 세우고 나는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할 때 반듯이 이루어진다는 심념을 보여야 한다. 발원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 사홍서원이다.
6바라밀의 실천
수행에 의하여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수행방법이 있으나, 「대승기신론」에서는 「수행에 다섯 가지 문이 있는데 첫째는 보시문이요, 둘째는 지계문이며, 셋째는 인욕문이고, 넷째는 정진문, 다섯째는 지관문이다」라고 하였다.
6바라밀 중에서 지혜바라밀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바라밀을 다 실천한 다음에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단계이므로 이와 같이 다섯 가지 문을 제시하였다고 이해된다.
보시(布施)바라밀은 소유한 것을 능력에 따라 베푸는 재시(財施)가 있고, 남에게 자비를 베풀어 편안하게 하여 주면서 두려움과 공포에 떠는 사람을 구제하여 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치심인 법을 한 구절이라도 외우고 지녀서 남이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법보시(法布施)가 있는데 보시는 곧 자비(慈悲)의 실천이다.
지계(持戒)바라밀은 계율을 지니고 실천함을 말한다. 재가불자는 먼저 재가 5계와 3업 10계를 착실히 실천하여야 한다.
인욕(忍辱)바라밀은 남이 나를 괴롭힌다고 하여도 참으면서 보복할 생각을 품지 않아야 하며, 이익과 쇠락, 비방과 찬탄, 칭찬과 헐뜯음, 즐거움과 고통을 능히 참아야 하는 것이다.
정진(精進)바라밀은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수행하기 위하여 쉼 없이 노력하는 자강불식(自强不息)수행을 말한다.
끝으로 선정(禪定)바라밀은 선정, 참선, 사마디, 위빠사나 수행이다.
선정(禪定)[冥想, yoga]
세계의 4대종교 하며는 불교와 기독교, 유교, 이슬람교를 꼽을 수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사막인 중동에서 발생했고, 불교는 인도, 유교는 중국에서 각각 일어났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일신교(一神敎)이고, 불교는 다신교(多神敎)이며, 유교는 치세와 처세를 다룬 도덕적 성격이 강하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종교는 수도 없이 많으나 대부분이 다신교이다. 그러나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일신교이다.
최근에 종교로 인해서 세계적으로 많은 문제가 일어나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필요한 종교가 그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공포에 휩싸이며, 가난의 고통 속에서 헤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또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야기하는 종교는 많은 부분이 사막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 두 종교는 사막의 환경적 특성과 같이 존재와 죽음이 뚜렷한 사상을 가지고 있어 주와 종의 관계를 설정하여 복종을 의무로 한다. 중국에서 발생한 유교는 도덕률이 강하지만 중국문화를 대표하는 또 다른 사상인 주역(周易)은 물론 치세술(治世述)이 있지만 점(占)이 주이다. 요행을 바라고, 그리고 기복이 강한 중국인의 문화적 특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는 숲의 종교이다. 열대지방의 자연적 환경의 특성으로 더위를 피하여 숲 속에서 조용히 생각하며, 온갖 존재와 현상에 대하여 깊이 있게 관찰하는 명상(冥想)이 발전하였다. 불교는 교주(敎主)가 따로 존재하지 아니하고, 석가모니부처님은 중생을 여래(如來)의 세계로 인도하여 고통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서 현세에 오신 지도자요 스승이시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네란자라 강가에서 깊은 명상에 드신 후 깨달음을 얻으셨다.
명상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남방불교의 사마디 (samadhi)와 위빠사나(vipassana)가 있고, 다른 하나는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 온 간화선(看話禪)이 있다.
제1장 사마디(samadhi),
위빠사나(vipassana)
사마디는 마음을 집중하여 고요[止]하게 하는 것이며, 위빠사나는 사물과 현상을 직관[觀]하여 보는 불교 수행법이다. 사마디가 한문으로 삼매(三昧)로 번역되어 지금도 몰아(沒我)에 빠지는 상태를 삼매라고 하고 있다. 사마디는 고요와 평온(平穩)을 뜻한다. 오온의 주와 객이 통일된 고도의 정신집중과 고요함이다. 이것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서 이루어진다. 사마디의 특징은 흐트러지고 산만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방황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사마디는 위빠사나를 위한 전 단계로 마음 집중을 가져올 뿐 깨달음 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위빠사나(비빠사나 라고도 함)는 사물이나 현상을 꿰뚫어 본다는 뜻이다. 위빠사나를 일반적으로 통찰력(洞察力)으로 번역한다. 수행초기에는 사마디[지, 止]와 위빠사나[관, 觀]을 구분하기도 하지만 완성단계에서는 지관쌍수(止觀雙修)가 된다.
사마디와 위빠사나의 수행을 위한 경전이 있는데 『대념처경(大念處經)』이 그것이다. 대념처경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그 개념만을 알아보기로 한다. 대념처경에서는 「4념처(4念處)」를 설하고 있다. ① 몸에 대한 마음 챙김[身念處], ② 느낌에 대한 마음 챙김[受念處], ③ 마음에 대한 마음 챙김[心念處], ④ 법에 대한 마음 챙김[法念處]이다.
몸에 대한 마음 챙김[身念處]
명상을 위해서는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조용한 장소를 택하여 가부좌, 또는 반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바로 세우고, 눈을 가늘게 뜨고서 시선은 1m쯤 앞에 두거나 콧등에 둔다. 몸에 대한 마음 챙김에는 ① 호흡에 대한 마음 챙김, ② 동작에 대한 마음 챙김, ③ 분명한 앎 등이 있다.
호흡에 대한 마음 챙김.
호흡에 대한 마음 챙김은 마음을 챙겨 숨을 들이 쉬면서 ‘숨을 들이 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내쉬면서 ‘숨을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이 상태를 계속 한다. 이 때 숨을 의식적으로 길게 하거나 짧게 할 필요는 없다. 호흡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마음이 따라 가면 된다. 호흡하는 몸의 상태에 마음을 집중하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한다. 이 단계에서 호흡에 대해서는 조그마한 상태라도 놓침이 없이 마음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동작에 대한 마음 챙김.
동작은 행, 주, 좌, 와(行, 住, 坐, 臥)를 말한다. 이 수행은 걸어 갈 때는 ‘걸어 간다’ 고 알아차리고, 서 있을 때는 ‘서 있다’,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다’고 알아차리며, 누워 있을 때는 ‘누워 있다’ 라고 알아차린다. 이와 같은 알아차림의 필요성은 마음속에서 자아(自我)를 지우기 위함이다. 자아에 대한 집착심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이 수행의 목적이라고 할 때 ‘나’ 라고 하는 행위의 주체를 개입시키지 않아야 한다.
분명한 앎[正知]
분명한 앎이란 앞으로 나아갈 때, 뒤로 돌아설 때, 앞을 볼 때, 주위를 볼 때, 식사를 할 때, 대소변을 볼 때 등 일상의 모든 육체적인 행위와 동작을 할 때에는 분명히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마음 챙김[正念]과 분명한 앎[正知]은 서로 분리 될 수 없는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관계이다. 마음 챙김이 있으면 분명한 앎이 있고, 분명한 앎이 있으면 반드시 마음 챙김이 동반된다. 마음 챙김이 대상에 마음을 보내서 그 대상을 잊지 않고 놓치지 않는 마음의 작용이라 한다면, 분명한 앎은 마음 챙김과 동반되는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인식, 파악을 뜻한다.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의식이 깨어 있는 모든 순간에 자신의 육체적인 모든 행위와 동작에 마음을 챙기고 분명한 앎을 지녀야 한다. 한 순간 방심도 없이 마음 챙김이 없어질 때, 마음 집중[定]과 지혜[慧]가 성숙된다.
『대념처경』에서는 몸에 대한 마음 챙김으로 육체에 대한 싫어하는 마음 챙김, 4대(지, 수, 화, 풍)에 대한 마음 챙김, 묘지에 대한 9가지 관찰 등을 설하고 있으나, 현대 사회에서는 수행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여기서는 소개를 생략한다.
느낌에 대한 마음 챙김[受念處]
느낌에 대한 마음 챙김은 현재의 마음에서 느끼고 있는 상태를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즐거울 때는 ‘나는 즐겁다’라고 알아차린다거나, 슬플 때는 ‘나는 슬프다’라고 즉각 알아차리는 것이다. 또 기분이 그저 그럴 때는 ‘나는 지금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라고 알아차린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느끼는 모든 상태를 빠짐없이 즉시 알아차려야 한다.
집중수행을 하고 있는 수행자는 몸과 마음에서 생겨나는 감각적인 느낌을 생생하게 파악하게 된다고 한다. 수행 중에는 육체적인 느낌[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경험이 약한 수행자는 좌선할 때 다리와 허리의 통증을 느끼게 된다. 일상생활에서는 몸에 통증이 생기면 그 통증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을 취한다. 그러나 수행 중에는 이러한 조건 반사적 행동을 취하면 감각적인 느낌의 본질을 알지 못하게 된다.
수행은 자극에 반사적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 자체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다리나 등에 통증이 있을 때 견디는 데까지 견디면서 느낌 자체를 관찰하면서 그 본질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 때 통증을 견디면서도 마음은 평온을 유지해야 한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 불쾌한 느낌 등의 자극을 반사적인 반응 없이 알아차려 나갈 때 그 느낌의 본질을 직접 이해하게 된다. 즉 모든 느낌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서 조건이 없어지면 사라져 가는 것이라는 본질을 관찰을 통해서 직접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이해가 생기면 고통을 이겨내는 힘도 강해지고 즐거운 마음에 집착하는 마음도 없어지게 된다. 집중수행을 하는 사람과는 달리 일생생활을 하면서 느낌에 대한 관찰을 수행하는 수행자는 입장이 다를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수많은 감각적인 자극들로 가득 차 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무방비 상태로 개방된 채 많은 자극들을 소화도 못 시키고서 받아들이고 있다. 마음으로 이러한 자극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즐거운 느낌이 있으면 더욱 많이 가지려 하고, 더욱 오래 느끼려 하며, 불쾌한 느낌은 즉시 없애려고 애를 쓴다. 이러한 마음 작용으로 탐욕이 생겨나고 증오심이 일어난다. 번뇌는 느낌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느낌을 아주 없앨 수는 없다. 느낌은 감각기관[6근]이 대상[6경]을 접촉하므로 생긴다. 문제는 느낌 자체가 아니라 느낌에 대한 집착과 거부감이다. 예를 들면, 무더운 여름날에 덥다고 짜증만 낼 것이 아니라 ‘여름이기 때문에 덥다’는 짜증[번뇌]의 원인을 파악하여 이를 이해하게 되면 덥다는 느낌[번뇌]에서 벗어 날 수 있게 된다.
마음에 대한 마음 챙김[心念處]
마음에 대한 마음 챙김은 수행자가 탐욕이 있는 마음이 있을 때는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아차리고, 탐욕이 없는 마음은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① 탐하는 마음이 있다, 없다. ② 화나고 증오하는 마음이 있다, 없다. ③ 어리석은 마음이 있다, 없다. ④ 마음이 침체되어 있는가, 산만한가. ⑤ 선정으로 인해서 마음이 커졌는가, 아니면 선정 수행을 하지 않아 마음이 커지지 않았는가. ⑥ 선정에 의해 잘 집중된 마음을 잘 집중된 마음이라고 알며, 잘 집중되지 않은 마음을 잘 집중되지 않은 마음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⑦ 또 자유로워진 마음과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와 같이 마음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고,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현상을 의식적으로 사라지게 하려고 마음 써서도 안 되고, 사라져 가는 현상을 붙잡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다만 마음은 이들을 느끼면서 알아차리면서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말고 그 느낌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면 즐거움도, 슬픔도, 고통도, 쾌락도, 성욕도, 증오심도 사르르 녹아 없어진다. 하나의 현상이 사라지고 나면 또 다른 현상이 있는 곳으로 마음을 옮겨 가면서 집중하면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의식의 순간들을 말한다. 마음, 또는 의식이란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의해 생겨났다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순간순간의 마음의 총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변하는 마음은 동일한 두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교계의 기본 입장이다. 그러나 공사상과 달리 유식사상에서는 마음이 마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마음을 만들어 낸 조건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변하므로 동일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동일한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흐르는 폭포수와 같이, 타고 있는 촛불과 같이 매 순간순간 흘러가 변하므로 동일한 마음이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는 한 마음으로 생각되는 것이라도 영화의 필름이 장면 마다 모두 다른 것과 같이 마음 또한 그러하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은 이렇게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마음을 일정순간 한 범주를 정해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수행도중에 경험하는 마음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며, 그러한 마음에 집착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탐심이 일어나면 ‘아! 탐심이 일고 있구나’하고 알아차리면 된다. 알아차리면 생겨난 탐심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탐심이 일어나는 순간 탐심을 알아차리면 탐심의 진행은 차단된다. 알아차리는 순간 탐심은 끊어져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수행에 의해 생겨난 지혜의 힘에 의해서 번뇌가 제어되는 과정이다.
탐심과 같은 부정적인 마음뿐 아니라, 탐심이 없는 긍정적인 마음도 정확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탐심을 알아차린 후 탐심이 사라졌으면, 탐심이 사라졌음을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 알아차림 이라는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부정적인 마음들은 사라지고, 긍정적인 마음, 청정한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이 때 주의해야 할 점은 긍정적인 마음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마음이 사라짐으로서 생겨난 긍정적인 마음도 집착의 대상이 된다면 결국 또 다시 부정적인 탐심이 생겨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마음이 생겨나면 생겨났음을 바로 알아차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정적인 마음도 긍정적인 마음도 거부나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 챙김(알아차림)의 대상이 될 때 수행은 제대로 진행될 수 있다.
그 어떠한 것이라도 생겨나고 경험된 것은 알아차림(마음 챙김)의 대상이지 집착의 대상은 아니다. 부정적인 요소가 사라지고 긍정적인 요소가 생겨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요소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수행의 바른 길이다. 순간순간의 마음을 잘 살피고, 마음 챙김을 굳게 지닐 때 부정적인 마음은 사라지고, 마음은 청정(淸靜)해 지며, 더욱 더 지혜(智慧)로와 질 수 있다. 마음 챙김 수행의 이로움은 바로 스스로 청정해지며,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혜를 갖추게 해주는 것이며, 긍정적으로 이렇게 얻은 지혜의 힘으로 최상의 행복인 열반을 얻는데 있는 것이다.
법에 대한 마음 챙김[法念處]
네 가지 마음 챙김 가운데 네 번째인 법에 대한 마음 챙김은 다섯 가지 덮개[5蓋]와 다섯 가지 덩어리인 오온(5蘊), 6근과 6경의 12처,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인 7각지(7覺支), 그리고 네 가지 진리인 4성제(4聖諦)를 말한다.
다섯 가지 덮개[5蓋]에 대한 마음 챙김
다섯 가지 덮개란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욕망, 분노(악의), 혼침(졸음), 회한(우울), 의심을 말한다.
①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있다’고 알아차리고, 감각적 욕망이 없으면 없다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욕망이 일어나면 알아차리고, 사라지면 사라짐을 알아차린다. 이미 사라진 감각적 욕망이 이후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② 내적으로 악의(惡意, 분노)가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악의가 있다’고 알아차리고, 악의가 없으면 없다고 알아차린다. 생겨나지 않은 욕망이 일어나면 알아차리고, 사라지면 사라짐을 알아차린다. 이미 사라진 악의가 이후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③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있다’고 알아차리고, 없으면 없다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혼침과 졸음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사라지면 사라짐을 알아차린다. 이미 사라진 혼침과 졸음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④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우울)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우울)이 있다’고 알아차리고, 들뜸과 회한이 없으면 없다고 안다. 생겨나지 않은 들뜸과 회한이 일어나면 바로 알아차리고, 생겨난 회한과 들뜸이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사라진 들뜸과 회한이 생겨나지 않으면 알아차린다.
⑤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있다’고 알아차리고, 없으면 없다고 알아차린다. 생겨나지 않은 회의적 의심이 일어나면 알아차리고, 사라지면 사라졌음을 알아차린다. 또 사라진 회의적 의심이 생겨나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았다고 알아차린다.
법념처에서 다섯 가지 종류의 정신적 육체적 현상에 대한 마음 챙김이 설해지고 있으나 이러한 교리들이 이론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수행을 해 나가면서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법념처에서 마음 챙김의 대상으로 삼는 수행의 대상 또는 주제는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전체인 5온 이다.
일차적인 수행의 대상인 육체적인 현상(좌선할 때는 호흡이나 호흡에 동반되어 발생하는 복부의 움직임이며, 걷는 수행에서는 들어올리고, 앞으로 나아가고, 내려놓는 동작)을 마음 챙겨 알아차리다가 마음에서 수행에 방해가 되는 다섯 가지 장애가 생기면 생기는 바로 그 즉시 알아차린 후에 다시 이 장애들이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알아차려야 한다. 집중적 수행자가 아니라도 다섯 가지 덮개는 우리의 마음을 오염시키는 번뇌이므로 항상 주의 깊게 살펴서 마음에 새겨 이러한 번뇌들이 주인 노릇을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번뇌를 차단시키려면 항상 자신의 마음과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기민한 마음 챙김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마음 챙김이라는 문지기가 없으면 우리의 마음에는 갖가지 번뇌가 생기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집착된 무더기[五蘊]에 대한 마음 챙김.
수행자는 명상 속에서 ① 이것은 물질적[色] 현상이다. 이것은 물질적 현상의 발생이다. 이것은 물질적 현상의 소멸이라고 알아차린다. ② 이것은 감수[受] 작용이다. 이것은 감수 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은 감수 작용의 소멸이라고 알아차린다. ③ 이것은 표상[想] 작용이다. 이것은 표상 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은 표상작용의 소멸이라고 알아차린다. ④ 이것은 형성[行] 작용이다. 이것은 형성 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은 형성 작용의 소멸이라고 알아차린다. ⑤ 이것은 인식[識]작용이다. 이것은 인식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은 인식작용의 소멸이라고 알아차린다.
여섯 가지 인식 기관과 인식 대상에 대한 마음 챙김 [12처]
수행자는 안, 이, 비, 설, 신, 의를 알아차리고, 색, 성, 향, 미, 촉, 법을 알아차린다. 이 12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끊어진 족쇄가 이후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대념처경에서는 6근과 6경을 짝을 지어 하나하나 설명하였으나 여기서는 편의상 한데 묶어 표현하였다.
위빠사나 수행은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들을 생멸의 순간에 바로 포착하는 것이 마음 챙김이며, 이러한 마음 챙김이 있을 때 현상들에 대한 바른 이해인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다. 법에 대한 마음 챙김의 세 번째 항목인 여섯 가지 인식기관과 인식대상에 대한 마음 챙김은 인식기관이 인식대상과 부딪혔을 때 생겨나는 번뇌를 다스리는 가르침으로 제시된 것이다. 눈으로 사물을 보는 순간 마음 챙김이 없으면 우리의 마음에는 탐욕과 싫어함이라는 번뇌가 생겨서 속박되고 만다. 이때 번뇌가 생겨났으면 생겨났다고 바로 알아차리면 그 번뇌는 끊어지게 된다. 번뇌가 끊어지면 끊어졌다고 알아차리고, 다시 일시적인 마음 챙김의 대상으로 돌아와서 마음 챙김에 틈이 없게 해야 한다. 번뇌가 생겨나는 관문인 감각기관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 챙김 이라는 문지기를 감각기관의 문 앞에 굳게 세워 놓는 것이다. 마음 챙김이 굳게 자리하고 있을 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생각하는 등의 인식이 생겨서 마음을 얽어매는 족쇄인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다. 마음 챙김이라는 하나의 방패가 있을 때 온갖 번뇌를 극복할 수 있다.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7覺支]에 대한 마음 챙김.
수행자가 내적으로 마음 챙김의 깨달음의 요소[念覺支],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이 요소[擇法覺支],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精進覺支],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 심신이 편안함의 깨달음의 요소[輕安覺支], 마음 집중의 깨달음의 요소[定覺支],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捨覺支]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마음 챙김 등 7가지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고 알아차리고, 내적으로 이러한 7각지가 없을 때는 없다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7각지의 요소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완성되면 완성되었다고 알아차린다.
여기에서도 경에서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하나하나 설명하였으나 편의상 한데 묶어 소개하였음을 밝힌다.
몸과 마음의 현상들을 관찰하는 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支]가 경험되기 시작한다. 이때가 되면 몸과 마음이 안정되며 수행에 대한 확신도 강해진다. 마음 챙김이 더욱 예리해지고, 몸과 마음이라는 현상에 대한 이해가 심화된다. 수행의 핵심은 마음 챙김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가 경험될 때에도 현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네 가지 고귀한 진리[4聖諦]에 대한 마음 챙김
수행자는 ‘이것은 괴로움이다’하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 원인이다’라고 안다. 또 ‘이 괴로움은 소멸시켜야 한다’고 알며,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안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사성제는 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을 대표하는 교설이다. 불교는 다름 아니라 괴로움이라는 인간의 현실 상황에 대한 파악과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이상[涅槃, 열반]을 설한 가르침이다. 사성제에 대한 이해는 불교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이라 할 수 있다. 네 가지 마음 챙김 수행을 7년간의 긴 시간, 또는 단 7일 간만이라도 정성을 다하여 닦는 다면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의 지혜를 이루거나,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네 가지 마음 챙김은 모든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한, 괴로움과 마음의 언짢음을 없애기 위한, 올바른 길에 이르기 위한, 열반을 깨닫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이와 같이 세존은 설하셨다. 설법을 들은 비구들은 만족해하며, 세존의 설법에 대해 환희에 찼다.
제2장 간화선(看話禪)
서산 대사께서는「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셨다.
『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門佛決疑經』에서
『이 때 대범천왕이 영산회상(영축산의 법회)에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세상에 오시어 40년이 넘는 동안 갖가지 법을 베푸셨습니다. 어찌 말로 다할 수 있는 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 데 세상의 모든 사람과 하늘 중생을 위하여 가르침을 주시옵소서.”하고는 금색으로 된 천개의 잎이 달린 연꽃(바라화)을 부처님께 바쳤다. 그리고 물러나 몸으로 법상(法床)을 만들어 중생들에게 설법해 주실 것을 간절히 청하였다.
이 때 부처님께서 법상에 앉아 갑자기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자 아무도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침묵하였다. 그러나 그 모임 중에 오직 마하가섭 존자만이 얼굴에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을 하고 바로 서서 온화한 모습으로 침묵하였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마하가섭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래께서는 깨달음의 눈과 열반의 미묘한 마음과 모습 없는 참 모습인 묘한 진리가 있다. 이것은 문자로 드러낼 수 없는 것으로 교밖에 별도로 전한 것이니, 지혜가 있든 없든, 인연이 되면 증득할 것이다. 오늘 이것을 마하가섭에게 부촉(咐囑)하니 미래세에 모든 부처가 수기(受記)를 받아 성불하게 될 것이다.” 』
선(禪)은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이자 마하가섭만 빙그레 웃었다.”는 이 깊은 기연에서 시작된다. 부처님께서 한 송이 연꽃을 말없이 들어 보임으로서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가섭존자는 그 자리에서 그 뜻을 깨달아 말없이 미소를 지은 것이다. 바로 이심전심(以心傳心), 염화미소(拈華微笑)이다. 불교에서는 선의 기원을 여기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마하가섭 존자가 선의 첫 번째 조사(祖師)가 되는 겪이다. 이후 선은 달마대사를 통하여 중국으로 건너와서 하나의 종파를 이루었는데, 이를 선종(禪宗)이라 하였다.
조사선(祖師禪)
중국의 선종은 인도의 스물여덟 번째 조사이자 중국조사선의 첫 번째 조사인 달마(達摩 ? ~ ?)대사로부터 시작된다. 이어서 2조(2祖) 혜가(487~593), 3조 승찬(?~606), 4조 도신(580~651), 5조 홍인(601~674), 6조 혜능(638~713)선사로 이어져 선종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조사선이란 이와 같이 조사(祖師)를 중심으로 한 선사상을 뜻한다. 마하가섭 존자로부터 혜능선사에 이르기까지 선법을 이어온 전법조사들은 모두 서른 세분이다. 그래서 삼십삼조사(33祖師)라고 한다. 이후 조사선은 여러 종파로 갈리어 있다가 12세기 중반에 임제종 계통의 대혜종고(大彗宗杲 1089~1163)대사가 간화선(看話禪)을 체계화 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간화선(看話禪)
간화선은 화두(話頭)를 통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네란자라 강가에서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듯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깨치게 하는 수행법이다. 중국선이 신라 말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이루었고, 고려 때에는 조계종(曹溪宗)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간화선은 화두(話頭)를 간(看)하여 본래성품[本性, 體性]을 바로 보는 선법이다. 본성을 보고 깨닫는 것이므로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화두란 ‘말의 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졌기에 근기가 뛰어난 사람은 이 화두를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깨닫기도 한다. 간화선은 화두를 들고 화두에 정신을 집중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이다. 화두라는 말에서 “화(話)”는 “말[言]”이란 뜻이며, “두(頭)”는 접미사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화두란 “말”이라는 뜻이다. 말이되 보통 말이 아니라 선사들만이 쓰는 특별한 말이다.
화두는 일상적인 생각으로는 파악될 수 없다. 상식적인 사유와 분별을 끊는 힘이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은 있다, 없다. 나다, 너다. 좋다, 나쁘다 등과 같이 상대적이다. 그러나 화두는 “무엇이 진리냐”라는 질문에, “마른 똥 막대기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이 상식을 초월한 절대적인 말이다. 수행자는 화두를 긍정을 해서도 안 되고, 부정을 해서도 안 된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 그렇다고 또 다른 무엇을 갖다 대도 안 된다. 도저히 접근할 길이 없는 것이 화두이다. 오직 한 가지 의심만을 계속 파고 들어간다. 그래서 의문덩어리인 화두가 활활 살아난다. 간화선의 간(看)은 커다란 의심을 일으켜 끝없이 몰입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단지 커다란 의심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화두를 깊이 들어간다고 하여 참구(參究)라고도 한다. 화두란 일상적인 분별의식을 불태워 스스로 본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오직 분별의식과 집착하는 마음을 타파해야 자신의 본성이 밝게 드러난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어느 한 순간에 얻을 수 있다[頓悟, 돈오]. 그러나 그 후에도 수행을 계속하여야[漸修, 점수] 완성된 인간인 여래가 된다.
좌선법(坐禪法)
좌선을 위해서는 조용하고 청정한 곳을 찾는다. 그러나 장소나 환경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다. 달마 선사는 “밖으로 모든 인연을 끊고, 안으로는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이 장벽과 같이 되어야 가히 도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육조 혜능 선사는 “밖으로 모든 경계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좌(坐)라 하고,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다.” 라고 하셨다.
좌선에 들기 위해서는 먼저 큰 서원을 세워야 한다.
‘바른 법에 대한 신념이 견고하여 영원히 물러나지 않겠다.’
‘나고 죽는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결정코 본래 면목을 깨달으리라.’
‘반드시 부처님의 혜명을 잇고 모든 중생을 다 제도 하리라.’
이러한 원력을 양식 삼아 좌선할 때만이라도 모든 반연을 놓고 화두를 면밀히 참구해야 한다.
결가부좌와 반가부좌
결가부좌는 오른쪽 다리를 왼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왼쪽 다리를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 자세이다. 이 때 발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하고, 두 다리를 허벅지 깊숙이 올려놓아야 자세도 안정되고 오래할 수 있다. 반가부좌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위에 올려놓거나(길상좌),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위에 올려놓는다(항마좌).
허리를 곧게 편다.
허리를 자연스럽게 반듯하게 세우고, 팔은 몸통에 붙이면서 양쪽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양쪽 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코와 배꼽이 수직이 되도록 한다. 법당의 부처님 모습이 좌선하는 자세이다.
손의 자세
손은 길상좌인 경우 오른손 손등을 왼발 위 단전 앞에 자연스럽게 놓고, 그 위에 왼손 손등을 포개어 얹는다. 그리고는 양쪽 엄지를 가볍게 서로 닿게 붙인다(법계정인). 이 때 엄지가 지나치게 붙으면 안 되고 살며시 닿아야 한다. 항마좌인 경우에는 그 반대로 하면 된다.
입
입과 이는 긴장을 풀고 살짝 다물며, 혀는 살짝 말아서 혓바닥 아래쪽(끝부분)이 입천장과 이 사이에 닿도록 하며, 입술은 미소 짓듯 하여 양쪽 끝을 살짝 올린다. 눈은 가늘게 뜨되 부릅뜨지 말고 감지도 말고, 자연스럽게 마치 머리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1m 쯤 바닥에 시선을 내려놓거나 콧등에 둔다.
호흡
호흡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한다. 약간 깊이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쉰다는 생각으로 하되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화두만 참구한다. 음식은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약간 부족한 듯하게 한다. 허리끈은 여유 있게 하고 가능한 말을 하지 말며, 모든 긴장을 푼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명상 초에 마음집중이 잘 안 되면 적당한 선에서 호흡을 완전히 멈추고 참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렇게 하면 갑자기 호흡이 터지면서 깊은 호흡을 하게 되는데 깊은 호흡을 3~4회 하면 마음집중이 잘 된다.
마음가짐
몸과 마음을 통째로 화두에 바친다는 마음가짐으로 온통 화두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좌선이 잘된다는 생각도, 잘 안 된다는 생각도 모두 망상이니, 오직 화두 참구만 애써 노력한다. 간절하고 진솔하게 하되 속효심도 해태심도 내면 안 된다.
경책(警策)
좌선 중에 졸거나 정신을 집중하지 않아 자세가 흐트러지면 죽비로 경책을 한다. 경책은 바른 수행을 돕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이다. 경책을 할 때는 소임 자가 경책 받을 사람의 오른쪽 어깨위에 죽비를 가볍게 올려놓고 지그시 누르면서 경책할 것을 알린다. 그러면 경책 받을 사람은 졸음에서 깨어 합장하고 머리를 왼쪽으로 가볍게 기울여 어깨로 경책 받도록 한다. 경책을 받은 다음에는 합장하여 감사의 인사를 하고 다시 바른 자세로 되돌아온다.
좌선 시간
좌선 시간은 50분 앉았다가 10분 포행 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너무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 포행은 방선(放禪) 시간에 선방 안팎을 천천히 걸으면서 다리를 풀어주는 것을 말한다. 포행 할 때도 화두를 놓아서는 안 된다.
편찬을 마치면서
불교하면 경전이 8만4천이나 될 정도로 사상이 깊고 난해하다. 그래서 접근하기가 어렵고 불교에 귀의 한 사람이라도 딱히 불교가 어떠한 것이다 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항상 아쉬움으로 남았고 그 아쉬움을 채워줄 방편이 마땅치 않아 목마름으로 남아 갈증을 겪어왔음도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불교 경전이 다양하게, 방대한 량으로 존재하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일 것이고, 두 번째는 한자어로 표기된 경전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겠으며, 세 번째는 요약된, 그리고 이해하기 쉬운 text가 없었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던 차에 인터넷 불교사이트를 뒤지다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풀어놓은 글을 발견하고는 천하를 얻은 듯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글을 모아, 버릴 것은 버리고, 추가하여야 할 것은 더하였으며, 다듬을 부분은 다듬어서 이 글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제 2편, 제1장이다. 나머지는 필자가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편찬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칠보로 보시하는 것보다 부처님 말씀 한마디를 지니어 실천하면서, 남에게 이르게 하는 것이 더 큰 보시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글을 여러분께 드리는 저의 마음은 한량없이 뿌듯합니다. 이 글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으시어 불교를 보다 깊이 이해하시고 이를 실천하여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고, 마음의 평온을 얻으시어, 현실의 번뇌와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셨다면 더 없이 기쁘겠습니다.
이 회향의 기쁨을 삼보님께 바치면서 모든 분들이 정진하시 어 성불하시기를 빕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전 만 수 합장배례
인도의 불교역사
• 인더스 문명시작 BC3000~2000 무렵
• 아리아인의 인도 칩입 BC1300 무렵
• 「리그 베다, Rg Veda」성립 BC1200~1000무렵
• 「Veda」본집 결집 BC1000~800 무렵
• Upanisad 성립 BC800~500 무렵
yoga, 윤회사상의 성숙
• Buddha 탄생 BC624
• Buddha 성불 BC589
• 석가모니부처님 입멸 BC544(혹은 543)
• 제1결집(라자가하 결집) 석가모니부처님 입멸직후
• 근본불교 제1결집~제2결집
• 제2결집(베살리 결집) BC444(혹은434)
• 불교교단이 상좌부와 대중부로 근본분열 제2결집 이후
• 알렉산더 서북인도 침입(간다라 지방) BC327
• 야쇼카왕 불교에 귀의 BC261
• 불교사절단을 간다라, 스리랑카, 중국 등지로 BC250
• 설일체유부 성립 BC150 무렵
• 부파분열이 일단락되고, 초기 대승의 성립 BC100 무렵
•「소품반야」성립 1세기 전후
• 대승불교의 탄생「반야경」「법화경」「화엄경」「유마 경」등
• 초기 대승경전 성립 1세기~3세기 무렵
• 간다라 불교미술의 융성, 불상 등장 1세기 전후
• 공사상 연구 1세기~2세기
• 중관학파 성립, 용수의「중론」「12문론」「대지도론」 150~250
• 유식사상, 여래사상 발생 200~400
「해심밀경」「여래장경」「열반경」 등 유식계와 여래 장계의 대승경전 성립
• 미륵의 「유가사지론」「대승장엄경론」 저술 310~350
• 불교 고구려 전래 372
• 초기 밀교 발생 450 무렵
•무착「섭대승론」「현양성교론」「중순론」저술 310~390
•세친「유식20론」「유식30송」「불성론」저술 400~480
•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의 융합 8세기 전후
• 불교 티벹 전래 9세기 전후
• 이슬람 인도 침입 11세기 초
• 이슬람이 비크다 마쉴라 대학을 파괴(1203), 인도불 교가 인도 내에서 쇠퇴
참고한 문헌
간화선
불학연구서 편저. 2006. 10.10 조계종출판사
깨달음을 향한 불교예절 권영한 편저, 2003. 9.20. 전원문화사
금강심론
석김타, 2003. 6. 11 을지출판공사
대승불교의 세계 계환. 2005. 2. 15. 도서출판운주사
대학・중용 조지훈 외. 1070. 3. 15. 현암사.
목탁소리 불교전용 인터넷
불교대전
한용운 선사편찬, 이원섭 역주, 1980. 1. 25 현암사 발행
불교문화
대한불교조계종포교원. 2005. 1. 10. 한영문화사
불교미술기행 조병활 지음. 2005. 4. 20. 이가서
불교성전
조근태 펴냄, 2002. 5. 25 현암사 발행
불교성전
대한조계종 불교성전편찬회, 1973. 9. 24 동국역경원 발행
불교에서 보는 철학, 철학에서 보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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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유교 - 성리학, 유학의 옷을 입은 불교
아라키 겐꼬 저, 심경호 역, 2000. 4. 20 예문서원
붓다의 말씀(the word of the Buddha) 인터넷에서 받음
성유식론
호법 등 론. 현장 폍찬․한역. 묘주 옮김. 2003. 6. 20 동국역 경원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히로사치야 저, 강기희 역, 1994. 3. 20 민족사
신역금강경
최대림 역해, 1995. 4. 30. 홍신문화사 발행
신역 불교성전
불교성전편찬위원회, 1990. 1. 15 홍신문화사
역사문화수첩
한국역사연구회, 2000. 3. 20 역민사
유식사상 묘주 지음. 2003. 7. 20 경서원
유식철학
요코야마 고이치 지음. 묘주 옮김. 2004. 2. 20 경서원
유식학 강좌 고목 지음, 2002, 8, 7 도서출판 삼양
이 마음에 광명을 청담문도회 간행
인도철학과 불교 권오민 지음. 2004. 3. 10. 도서출판민족사.
초기․부파불교의 역사
후지타고타즈 외, 권오민 역, 1992. 9.30 민족사
티벳사자의 서
파르마 삼바바 지음. 로버트 A.F 서먼 영어로 옮김. 정창영 옮김. 2006. 6. 20 시공사
한국의 불교사상
고익진 저, 1997. 8. 30 동국대학교출판부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일아 옮김. 2008. 12. 22. 도서출판민족사.
해심밀경 묘주 역. 2002. 10. 30. 민족사
그 외 다수 논문 참조
전 만 수(田萬秀)
「내 고장 금천」
「금천의 주산 금지산」
「왜 금천인가? 시흥행궁터는? 시흥관아터는?」
「한국고대국가의 지방조직」
「무학이 삼봉에게 말하기를」
「essay, 단군이야기」
「한국고대국가의 건국신화」
「금천으로의 시간 여행」
「기자, 그는 누구인가?」
「거울속의 자화상」
편 찬 자 전 만 수
낸 날 2009. 5. 27
수 정 2010. 2. 7
연 락 010-9310-7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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