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가끔씩 마음을 휘젓고 다니다가 다시 가라앉길 반복하고 있었다.
3월 24일 영어 공부를 시작한 뒤론 공부에 집중하는 것으로 글을 쓰는 걸 아예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어공부와 관련된 많은 얘기가 있지만 오늘은 다른 얘기를 하고 싶다.
아이 넷을 대안학교를 보내면서 아이들이 잘 자라주어서 기쁨도 있었지만, 그 이면엔 그것보다 더 힘든 일과 늘 맞닥뜨리며 보낸 세월이 가엾기만 한다.
아이들이 잘 자라는 모습은 그중 일부였음에도 크게 느껴지는 것은 넷이라서 네 배의 기쁨이었기도 하지만, 힘든 보다 기쁨의 크기가 더 커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늘 함께하는 일들로 얼마나 힘들었던가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보낸 학교라 남편의 지지를 받지 못한 늘 반쪽짜리 부모역할에 부부싸움은 일상이었고 학교와 아이들 이야기는 맘 편히 대화한 적도 없었다.
재정적인 면에서도 외벌이라 남편의 수입에 의존하다 보니 학비가 생활비의 70%까지 차지할 때도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습이 남아 있어 생활비는 7인가족 기준에 훨씬 못 미칠 정도로 아껴 쓰고 있으니,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부족하다는 티하나 낼 수 없었으며 부족한 부분은 우유 배달일을 하면서까지 버텨야만 했다.
사실 재정이 어려웠던 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학교의 이전으로 인해 차입을 한 돈이 묵여서 그랬다.
생활이 어렵다고 말하면 학교에 맡긴 돈을 빼오라고 말할 테고 받을 수 없는 상황을 뻔히 아니 재촉할 수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일부 학부모들은 찾아갔지만 학교 사정을 아니 그럴 수도 없었다.
재정이 나를 목 조르듯 죄어와도 한 번도 학비를 미뤄 낸 적은 없었다. 학교의 운영이 오롯이 학비로 밖에 충당할 수 없으니 말이다
남편의 월급으로 한 달을 생활하는 것처럼 학비가 완납이 안되면 아이들의 식비조차 외상을 하여야 할 판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 외상이 어디 있는가? 언제부턴가 대안학교도 자격조건만 갖추게 되면 일부분 지원이 가능도 했지만 그것도 정해진 것이 아니라 해마다 달랐으며, 보장할 수도 없고, 정권이 바뀐 뒤론 사정이 더 안 좋아진 것 같다.
더군다나 둘째가 고등학교로 다닌 대안학교는 지원이 전혀 없던 걸로 알고 있다. 지원요건이 너무 까다로워 아예 안 받는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수업료가 잘 들어오지 않으면 선생님들은 온전히 아이들만 바라볼 수가 없다는 것을 전에 다니던 대안학교 재정을 오랫동안 맡아봐서 잘 안다.
지원 없이 학교를 꾸려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선생님들의 희생이었다.
그러나 그 희생이 언제까지 갈 수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뿐이다.
나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나 선생님들도 생활인지라 끝까지 버텨달라고 애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기까지 와 주신 것만으로 도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지
전국의 대안학교 수가 최근 들어 많이 줄었는데 이유는 학생수가 줄어 재정적으로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버티고 계신 학교에 재직 중인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들 드립니다.
요즘 여러 매체에서 선생님의 노고에 대해 많이 얘기하는데 대안학교라고 어디 다르겠습니까?
셋째와 넷째는 중등1학년과 초등 5학년을 마지막으로 대안학교를 마치게 되었다.
선택이 아닌 학교가 문을 닫게 되어 할 수 없이 나오게 됐지만 아직도 엄마의 욕심에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다.
다닐 수 있을때 맘껏 누리길 남아 있는 분들께 말해 주고 싶다.
부모든 학생이든 선생님이든.
참고: 큰아이: 공동유아 1년 반, 대안학교 10년 반
둘째아이: 공동육아 1년 대안학교 13년
셋째아이 : 언니들 대안학교 시작년도에 임신하여 13살때까지 다님
넷째아이 : 12살까지 다님
엄마: 51년을 다녀 부모로써 거듭남
아빠: 51년을 끌려왔어도 부모로써 거듭남
(학교 설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날은 미포함)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가슴이 찌~잉~~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