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비라는 생각
허연
그대가 젖어있는 것 같은데 비를 맞았을 것 같은데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너지는 노을 앞에서
온갖 구멍 다 틀어막고 사는 일이 얼마나 환장할 일인지
머리를 감겨주고 싶었는데 흰 운동화를 사주고 싶었는데
내가 그대에게 도적이었는지 나비였는지
철지난 그 놈의 병을 앓기는 한 것 같은데
내가 그대에게 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살지 않는 것 이 나라에 살지 않는 것
이 시대를 살지 않는 것
내가 그대에게 빗물이었다면 당신은 살아있을까
강물 속에 살아있을까
잊지 않고 흐르는 것들에게 고함
그래도 내가 노을 속 나비라는 생각
-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
지금도 그날의 흰 운동화는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 시를 쓴지 3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눈앞에 있는 듯하다. 나는 흰 운동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란의 감독 마지드 마지디의 영화 중에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영화가 있다. 한국에서도 꽤 인기를 얻은 작품인데 이 영화의 주요 모티프는 ‘운동화’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알리는 실수로 여동생 자라의 신발을 잃어버린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남매는 새 운동화를 사달라고 조르는 대신, 운동화 한 켤레를 두 명이 신는 불안한 생활을 시작한다. 오전반인 자라가 집에 오면 오후반인 알리가 그 운동화를 신고 학교로 전력질주하는 영화장면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마라톤대회가 열리고 3등 상품으로 운동화가 걸린다. 알리는 오로지 운동화를 타기 위해 마라톤대회에 출전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3등이 아닌 1등을 하게 된다. 너무 잘 달린 것이다. 1등을 하고도 고개를 떨구는 소년의 모습은 많은 관객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난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운동화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면 영화가 이토록 감동적일 수 있었을까. 만약 알리가 잃어버린 것이 게임기였다면, 아니면 물놀이 용품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축구공이거나 인형, 혹은 돈이었다면 어땠을까. 이토록 가슴이 아팠을까.
운동화는 이들에게 자유를 의미했다. 운동화는 이 남매를 학교로 갈 수 있게 해주는 방주였고, 그들에게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구름으로 만든 비행기 같은 것이었다.
물론 영화는 남매의 아버지가 자전거에 운동화를 싣고 가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해피엔딩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누구에게나 운동화에 관한 기억은 있게 마련이다. 내게도 마찬가지다.
잊을 수 없는 흰 운동화가 있다. 십대 후반 무렵 첫사랑과 관련되어 있는 추억이다. 그때 같은 동네에 살던 동갑내기 여학생이 있었다.
아주 말랐고, 크고 검은 눈이 인상적이었던 우울한 소녀였다. 교복세대였던 우리는 어른들이 드나드는 곳에 드나들 수 없어 만나면 하염없이 걸었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우리는 걸었고, 비가오거나 눈이 올 때도 걸었다. 나란히 길을 걷는 내내 나는 습관처럼 소녀의 발을 내려다봤다. 작은 발에 신겨져있는 흰 운동화. 그 운동화가 왜 그렇게 마음에 남았는지.
소녀는 그렇게 늘 흰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검은 교복과 흰 운동화는 잘 어울렸다. 우리는 대학에 들어갈 무렵 헤어졌다. 어른이 된 우리는 이제 그만 소녀 소녀의 시절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막연히 우리가 걸어 다니던 동네를 벗어나면 더 큰 미래가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된 우리는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향해 떠났다.
12가지색 볼펜으로 썼던 12장의 연서도, 밤잠 설치며 접은 종이학도, 그녀가 내게 주었던 시가 수놓아져 있던 손수건도, 둘이 함께 지나다녔던 혜화동 로터리의 분수도 이젠 없다.
하지만 그녀의 흰 운동화는 내 뇌리에 남았다. 그리고, 시가 한 편 남았다.
신기한 건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흰 운동화를 사주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를 몇 년 동안 만나면서도 단 한 번도 발 치수조차 묻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아마 두려웠을 것이다. 그녀의 작은 발을 소유하는 것이 버거웠던 것 같다. 발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통제하는 걸 의미하기에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허연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세계》등단.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 외. 현대문학상 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