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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람 : 예수와 사람의 아들의 수수께끼(월터 윙크)
The Human Being: Jesus and the Enigma of the son of the Man
제5부 유대교 신비주의와 영지주의 속의 참사람
다음 두 장은 신약성서 안의 사람의 아들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기원후 처음 세기들 동안에 지중해 연안 및 그 밖의 지역에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원형들이 어떻게 발전되었는가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유대교 신비주의는 에스겔에 이해 도입된 참인간적인 하느님 개념을 더욱 발전시켰다. 유대교 신비주의는 또한 인간이 하늘에 올라가서 무한한 권위와 권능을 부여받는다는 매우 위험한 생각의 유희에 빠졌다. 여기서 복음서 기자들과 유대인 신비가들은 서로 얼마나 가까운지를 깨닫지 못한 채로, 나란히 동행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성찰 내용은 서로 달랐지만, 그 구조는 놀랍게도 비슷했다. 이런 가족적 유사성을 고려하지 못한 탓으로, 형제간 경쟁으로 심지어 형제살해로 내달아, 특히 유대인들이 더 큰 재앙을 당했던 것이다. 일단 우리가 도처에 편만한 참사람이라는 원형을 인정하면, 예수가 이 세계의 유일한 구세주요 주님이라고 선포하는 편협성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유대인들이 "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마가 3:35)라고 인정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유대인들의 통찰이 우리의 통찰과 마찬가지이며, 어떤 경우엔 우리보다 더 나은 점도 있음을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처음 기독교인들은 모두-예수를 포함하여- 유대인들이었다(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반드시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영지주의에 대한 다음 장은 신약성서 속의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데, 이는 영지주의가 복음서가 써진 후 상당히 나중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의 아들이라는 원형을 이해하려면, 이들 열광적인 형이상학자들의 지나친 사변들에 대해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영지주의에 대한 이차적인 보고서들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나그함마디 문서들이 발견되고 심층심리학이 출현하기 전에는, 대체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들이다. 나그함마디 문서들에서는 영지주의자들이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를 적어도 50회 이상 사용했는데, 실질적으로 언제나 하늘의 존재, 혹은 존재들의 위계서열을 말한 것들이었다. 무엇이 보다 완전한 인간됨인가 그 의미를 배우고 싶으면, 우리는 영지주의의 신화적인 심리학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융(Jung)은 정당하게도 그들 영지주의자들이야말로 심층심리학자들이라고 불렀다.
이들 고대의 신화를 만들어낸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가 배울 필요가 있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이 비방했던 이단자들(heretics)이었다. 그 사상이 아무리 정교할지라도, 그 누군가의 사상을 배척하려면, 그저 "영지주의자(Gnostic)"라고 오명을 덮어씌울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오늘날처럼 아메리카 원주민, 선불교, 힌두교, 유대교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그들의 진가를 인정하는 시대에도, "영지주의자"라는 말은 여전히 더러운 말로 여기고 있다. 나그함마디 문서를 세상에 발표한 학자들의 노력에 힘입어서, 초기 교회 신학자들이 얼마나 영지주의자들을 나쁘게 풍자했는가를 우리는 알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영지주의의 깊은 지혜를 제대로 평가하고 또한 그것에서 유익한 것을 얻어야 할 위치에 있다.
유대교 신비주의 속의 참사람
유대교의 메르카바(Merkabah, "throne chariot, 전차의 보좌") 신비주의는 이사야 6장, 에스겔서 1장, 다니엘서 7장 속에 나오는 하느님의 환상들에서 직접 유래된 것이다. 그 초기의 흔적들이 기독교 이전의 묵시문학들, 사해문서 두루마리들, 바울(고후 12:1-10), 그리고 요한계시록 1, 4-5장 등에 나타난다. 그리고 기원후 200-700년 기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른바 헤칼로트(Hekhalot, "Divine Palaces, 신의 궁전들") 문학으로 널리 퍼졌다. 이처럼 뚜렷한 신비주의 전승에 대한 나의 관심은 주로 같은 시대에 기독교 정신들 속에 일어나고 있었던 놀라운 병행구들에 있다. 이들 유대교 신비가들은 하느님이 궁극적으로는 참 인간적이라는 에스겔서 1장의 계시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들은 또한 인간들이 하늘로 올라가서는, 그들도 마치 승천한 예수처럼 세상을 심판하고 구원할 신적인 권위를 받는다고 말했다. 이들 유대교 신비가들도 복음서들이 "사람의 아들"이라고 그 정체성을 말한 그런 똑같은 원형적 실재를 심오한 수준에서 경험하고 있었다. 그런 경험들로부터, 이들 신비가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중요한 것으로 지속되는 비의(秘儀, esoteric) 전통을 낳았다. 유대교 신비주의에 관한 이 장과 영지주의에 대한 다음 장에서는, 에스겔의 환상으로 시작된-그리고 에스겔의 환상의 원인이 된- 심리적 교란과 변혁의 깊이와 넓이를 드러내 보자.
이 장에서는 오직 두 가지 점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데, 그 신비가들이 하느님을 그려낼 때 사용한 신인동형동성론과 인간들이 하늘에 올라가는 현상이다. 이런 주제가 널리 또 꾸준히 존재하는 것 자체가 그 당시에 집단 무의식 속에서 뭔가 강력한 것이 작용하여 참사람을 탄생시킨 것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A. 유대교 신비주의에서 참사람으로서의 하느님
창세기의 처음 이야기들 속에서, 하느님은 자주 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그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느님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곧 참인간이라고 인정함으로써 이런 명백한 혼란을 완화시킬 수 있다. 이런 이야기는 일찍이 얍복 강가에서 야곱이 한 사람(ish, "man")과 씨름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사실은 하느님이었음이 알려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창 32:22-32).
하느님과의 그런 만남의 많은 경우가 히브리성서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성서 이후 시대의 유대교 신비주의 속에서 살아 있는 중심은 하느님을 보기 위해서(혹은 신비가들이 그걸 보고도 살아 남을 수 있었던 하느님의 얼굴이나 하느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 하늘 보좌가 있는 방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략 기원후 500년경에 유대교 신비가들이 상승(ascent)이 아니라(비록 그들이 하늘을 말하기 위해서 "저 위에"란 말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하강(descent), 즉 메르카바, 혹은 신적인 보좌 전차에로 하강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심층심리학에 친숙한 사람은 이런 변화(상승에서 하강으로의 변화)를 보면서, 신비가들이 7층 천국을 통과하는 우주적인 여행이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심리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스겔의 환상(4세기 혹은 5세기)"에서는, 에스겔이 7개의 메르카보트(merkabot, 전차)를 가지고 있는 7층천이 그발 강물에 반사된 것을 본다. 상징적으로 말해서, 이런 환상은 사람이 하늘의 신비를 보기 위해서 무의식이라는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에스겔에게 7개 숨은 방들을 열어주었고, 에스겔은 그 속을 들여다보고는 모든 천상의 실체들을 보았다." 이런 내향적 성찰 요소가 유대교 신비주의를 다른 어떤 전통들보다도 더욱 심리학적인 것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로서 정신분석학의 시조가 되게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1770년에 미에드찌르젝이 마기드 도브 바에르가 한 다음과 같은 말에 그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의로운 사람들은 하느님을,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자신들의 무의식으로 만들어버린다."
왜 유대교 신비가들은, 믿을 수 없는 인간들의 손에 닿지 못하도록 하늘의 비밀들을 지키려는 적대적인 천사들과 맞서가면서, 그토록 집요함과 영적인 용감성을 지니고 하늘의 문들을 향해 쇄도했는가? 신플라톤주의적 열망을 가지고 하느님과의 합일을 얻고자 열망했던 기독교 신비가들과는 달리, 유대교 메르카바 신비가들은 다만 하느님을 보고 듣기만 원했다. 왜 유대교 신비가들은 나중에 중세기 카발라(Kabbalah)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예의를 차리는 만큼의 거리를 두고 만족하였던가? 부분적인 대답은 인간의 사망과 유한성에 대한 건강한 인식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메르카바 신비를 찾는 구도자들은 신의 경외스러운 위엄 앞에서 그들 자신의 허약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바라보기를 원하는 대상 바로 그것처럼 된다는 원칙에 따라, 그들은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했다.
그러나 유대교 신비가들이 하느님의 비전을 찾기 위해 그토록 참고 견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을 보고나서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고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아담과 이브의 자손들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지된 것을 오히려 원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은 범죄라기보다는 차라리 초월을 향한 목마름이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 얼굴을 보려고 하지 말라고 금지했다기보다는 미리 경고했던 것이다. (여기서도, 하느님은 매우 참인간적이다.) 하느님은 인간들이 이해하거나 망라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존재라서, 하느님의 성스러운 광채에 의해 그들이 그만 절멸될 수도 있었다. 그런 마치 한 임금이 그의 새로 결혼한 아내에게 성채 안에서 문을 열면 안 되는 방 하나를 제외하고는 성안 어디나 다 드나들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한 것과 같다.(그리고, 물론 그 방 열쇠는 문밖의 못에 걸려 있다) 유대교 신비가들은 7층천을 거쳐서 동심원 형태의 7중 궁전들에 올라갔다(나중엔 내려왔다). 거기서 그들은 자신들이 천국의 지리와 의전에 대한 무지 때문에 파멸될 모험을 감행하였다. 마침내 친절한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7번째 하늘의 7번째 궁전에 있는 거룩한 보좌에 잠입하여, 인간으로서는 그것을 보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 즉 보좌에 앉아있는 영광을 보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전모를 볼 수는 없었고, 구도자들이 견딜 수 있는 정도만큼의 신의 광명을 본 것이다.
성서에 이런 말들이 있다; 첫째로,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출 33:20). 둘째로,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셨는데도 그 사람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오늘 우리는 보았습니다"(신 5:21). 셋째로,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이사야 6:1).
그러나 훨씬 더 근본적으로 유대교 신비가들은 하느님의 얼굴을 보기를 원했는데, 그건 하느님이 그렇게 하라고 초청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들과 동반자로서의 친교를 원한다. 이리하여, 출애굽기 24장에서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명령해서, 아론, 나답, 아비후와 70명의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와서 "멀찍이 떨어져서 예배하라"(출 24:1)고 했다. 그들은 산에 올라갔고, "그리고 거기에서, 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 발아래에는 청옥을 깔아 놓은 것 같으며, 그 맑기가 하늘과 꼭 같았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손으로 치지 않으셨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뵈며 먹고 마셨다"(출 24:10-11). 역시 하늘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 즉 내부에 있다는 직관이 있다; "청옥을 깔아놓은 것"같다는 것은 하늘 푸른색의 두 배나 됨을, 즉 "그 맑기가 하늘과 같다"는 것을 이중으로 강조한 것이다. 『헤칼로트 랍바티(Hekhalot Rabbati)』에 의하면, 하느님이 인간을 동반자로 삼고 싶은 열망이 얼마나 강렬한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룩, 거룩, 거룩(Holy, holy, holy)"하고 땅에서 외칠 때마다, 하느님이 하늘의 보좌 전차에 새겨 넣은 야곱/이스라엘 이미지를 허리 굽혀 안아보고 입맞추고 끌어안으신다고 한다. 댄 머커는 이를 일러, 하느님이 그 상상의 이미지에 생기를 불어넣는데, 이는 곧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는 것은 찾고자 하는 대상인 하느님이 그 찾음을 시작한 것이라는 뜻이라고 말한다. 이 날카로운 문장은 이런 환상들의 전례 맥락을 강조한다. 하늘로의 여행은 보좌에 앉아계신 하느님을 보려는 것만이 아니라, 찬양의 우주적 전례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늘로 들어가는 것은 땅위의 공동체들을 하늘의 예배에 통합시켜서, 그 예배를 하늘과 땅을 함께 끌어안는 참으로 우주적인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다.
9세기의 미드라쉬(midrash, 애매한 본문의 의미에 대한 풀이 혹은 상충되는 본문을 조화시키는 꾸밈)인 『페시크타 랍바티(Pesiqta Rabbati)』는 하느님이 두려움을 모르는 소수의 신비가들에게 하느님의 환상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그 환상을 시나이 산에서 민주화(일반화)시켜 주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각 개인이 거룩한 빛의 눈부신 광채에 의해 압도되지 않도록 돌봐주는 천사들에 의해 보호되기는 하지만, 이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비전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이 7층천의 문들을 열어주어서 하느님 자신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선 앞에,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영광과 장대함 속에서, 하느님의 왕관과 영광의 나타남으로 계시했다. 그들이 "나는 야훼 너의 하느님이다"(출 20:2)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의 영혼이 그들을 떠나갔다. 하느님이 이슬을 내려 보내서, 그 이슬로 성도들의 영혼을 생명 속으로 끌어내어 그들을 되살려내었다....하느님이 무슨 일을 하였는가? 하느님이 일백이십만 명의 돌보아주는 천사들을 그들에게 땅 위로 내려 보냈다. 한 명의 이스라엘 사람마다 천사가 두 명씩 배당되어서, 한 천사는 그 손을 그들의 가슴에 대고 영혼이 가슴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하고, 다른 천사는 그의 손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 그들이 하느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하였다. 왜 하느님이 자신을 그들에게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드러내었는가? 하느님이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나의 영광과 장대함 속에서 나를 너희들에게 드러낸 것을 보라! 장차 어느 세대에 너희들을 잘못 이끌어 '자 우리 다른 신들을 경배하자' 하고 말하는 일이 생기거든, 그들에게 말하여라; '우리는 우리가 섬겨야 할 주님이 있다'라고. 우리가 하느님을 내버리면, 하느님이 우리를 지옥에 내려 보낸다. 그리고 하느님은 온 이스라엘에 하느님의 통치를 이루실 것이다."1)
『신명기 랍바(Deuteronomy Rabbah)』에서 우리는 다시 하느님이 모든 하늘의 비밀들을 이스라엘에게 적극적으로 계시하는 일을 본다; "토라(Torah)가 주어진 그 날에, 하느님은 하늘을 열어젖혀서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야훼(Yahweh)는 이스라엘을 많이 사랑하지만, 가령 후대의 하시디즘에서 보듯이 사랑하는 하느님에 대한 담론은 매우 적다고, 유대교 신비주의에 대한 위대한 학자 게르숌 숄렘은 말한다. 하느님은 압도적으로 타자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하느님은 특이하게도 참인간적이며, 그래서 신비가들은 하느님의 모든 찬란함과 신비 가운데서 참인간의 모습을 본다. 16세기의 루리아 카발리즘에 대한 숄렘의 관찰을 초기의 메르카바 신비가들에게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합하다; "황홀경은 부과된 제한 안에서만 가능하고....그것은 침묵의 명상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만나기 위한 인간의 뜻의 내려감, 그리고 거룩한 무링 그의 의식을 익사시킬지도 모르는 황홀경 속으로 별안간 준비없이 빠져버리지 않도록, 신비가들이 기댈 수 있는 난간 같은 기도 속의 황홀경이다."
이들 신비가들은 영적인 언어로 말했다. 그들이 추종자들에게 남겨준 것은 관습과 실천들로서, 이것들은 여행기, 대화록, 익살스러운 이야기들, 환상적인 이야기들, 꿈 이야기들, 하느님의 몸을 측정함, 마술, 선서들, 그리고 초심자들이 메르카바로 신비적인 강하를 하는 데 안내서로 사용할 수 있는 끝도 없는 신들의 이름 목록들 속에 들어 있다. 이것들은 구도자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환상을 경험하도록 자리를 잡아줄 수 있는 상상의 훈련 연습들이었다. 그것들은 이그나시우스의 영성 훈련법이나 융의 적극적인 상상과 비슷하다. 대부분의 종교 전통들은 가령 방언을 하기 원하는 오순절주의자들로부터 비전 탐색을 하는 샤만에 이르기까지, 환상이나 그 밖의 다른 신적 경험들을 유도해내기 위한 교훈들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헤칼로트 랍바티(Hekhalot Rabbati)』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한다; "메르카바의 환상을 보기를 원하며, 그리고 해를 입지 않고 올라가고 내려감을 원하는 사람이 부를 찬송가들은 어떤 것들인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경험들을 통과하는데, 그러나 그것들은 놀랍게도 비슷한 반복이다. 하느님을 보는 것도 똑같다. 각각의 경험은 독특하지만, 그럼에도 대체로 비슷하다. 이들 신비가들 중에 비전의 탐색을 경솔하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 여정의 엄격함은 너무도 괴롭고 위험하고 힘에 벅차서 장난삼아 하는 사람들은 곧 흥분하여 미치게 된다. 성서, 미슈나(Mishnah, 율법 해석,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랍비들이 구전 토라를 편집한 3세기의 책), 할라카(halakah, 구전 율법), 그리고 하가다(haggadah, 구전 전승)를 공부하고,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한 모든 율법들을 실천한 사람들에게만 메르카바에 내려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위에 열거한 것들 외에도 여러 가지 수단들이 시용되었다. 즉 기도, 장기간 금식, 철야기도, 명상 훈련, 운율적 반복의 영창, 특별한 절식, 주술적 이름들, 부적, 눈물 흘려 울기, 목욕하기, 몸가짐 수행들, 침묵 수행, 상담 등, 이 모든 것들이 실재 자체의 근원과 만남에서 "하늘의 열림"에 공헌할 수 있다.2) 그런 일이 일어나면, 하느님만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외적인 구성의 틀은 빠져나간다. 이제는 사람이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는다(believes)"가 아니라 "안다(knows)."
그런 신비한 환상들과 그 밖의 다른 형태의 종교적 경험을 유도하기 위한 명상의 기술들은 인간 사회 도처에 존재한다. 사람은 자기가 찾는 신을 쉽게 얻게 된다고 해서, 그 찾음과 발견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수 받은 전통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국지적 원형들"이 그 종교경험의 모양, 색깔, 짜임새를 결정한다. 근본적인 원형들의 이런 국지화는 불가피한 것이며, 종교경험의 엄청난 다양성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모두 지식과 변혁의 욕망이요, 또한 하느님의 형상으로서 인간들 속에 심어진 욕망임을 증언해준다고 신비가들은 주장한다. 그러니 신비가들이 단지 "환각을 유도하거나" 혹은 스스로 망상에 빠지거나, 혹은 단지 신경회로를 조작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우리의 모든 경험은 심리적인 그리고 생리적인 부산물들을 발생시킨다. 정신과 육체와는 별도로 무엇인가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심리적-육체적인 요소들이 경험을 창조한다기보다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유사 종교적 경험들과 사이비 종교 안내자들이 있다. 사람들은 환각을 경험한다. 참된 환상과 거짓 환상을(혹은 선한 영과 악한 영을) 구별하는 것은 언제나 영적 스승들의 역할이다. 예수 자신도 그의 세례에서 본 환상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지 혹은 악령에게서 온 것인지를 분별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바로 광야에서의 유혹의 이야기의 중요한 점이다(마태 4:1-11// 누가 4:1-13). 그러나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오랜 역사를 단지 전기화학적 흥분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특별히 서글픈 형태의 유물론적 환원주의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도록 회로를 설계하였다. 사람은 설계된 회로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경험한다.
신비가들이 하늘과 땅의 경계를 허물도록 허락함으로써, "하느님 자신이 결과적으로 그들의 힘에 굴복했다.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방법으로, '저 멀리 있는 우주의 전능자'가 그의 운명을 인간에게 맡겼다"고 피터 쉐퍼는 말한다. 데이비드 할페린도 비슷하게 말한다; "인간의 특성이 하늘에 침투하였다. 이제 인간의 침입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주장은 종교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놀랄 일이 아니다. 중보기도, 마술적 서원, 금욕적 자기비하, 그리고 영웅적인 자기부정 등 모든 방법들이, 단지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로 가져오는 길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으로 하여금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하시도록 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시대의 유대인들의 기도들은 개인과 국가의 운명을 놓고 하느님과 씨름하는 이런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것이 또한 예수가 기도했던 방식이고 또 그렇게 기도하기를 가르쳤던 길이다. 이런 전통에 의하면, 인간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한, 하느님도 인간의 뜻에 내맡겨지기를 원하신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신비가들에 의해 "사용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그 때문에 율법에 순종하는 보호 의상을 입지 않고 거룩한 보좌에 접근하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로 가득 찬 작품들이 있는 이유다. 그래서 심지어 그처럼 신비한 여행을 할 수 없거나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도, 우리가 뭔가를 알 수 있는 제한적 방법들로나마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명령을 받는다.
메르카바에 내려간 사람들은 "이 세상, 오는 세상, 그리고 세상들 위의 세상들"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단지 미래의 삶이 승인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세계도 변혁되고, 구도자의 삶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내 귀가 이런 위대한 신비를 들었을 때,
세상이 내 위에서 순결하게 변화되었다.
그리고 내 가슴은 마치 내가 새로운 세계에 도착한 것 같았다.
매일 나의 영혼에는
마치 내가 영광의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본문은 에녹이나 혹은 어떤 메르카바 신비가도, 하느님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댄 머커는 말한다.
사람이 하느님의 눈부신 옷을 보면, "그의 눈알들이 소용돌이치듯 빙글빙글 돌아간다. 그리고 그의 눈알들에서 불꽃이 뿜어 나와서 그를 불태워버린다. 왜냐하면 보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온 불이 그에게 불을 붙이고 그를 태우기 때문이다." 이 불타는 것은 신비가들이 자주 마주치는 위험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이는 "메르카바에 내려가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변화의 언어일 뿐이라고 숄렘은 지적한다. 그 불은 신비가에게서부터 나오는 것으로, 그 자기 속에서 창조적 에너지들을 방출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것은 이기심의 찌꺼기들을 태워버리는 개성화(자기실현)의 불꽃이다.
환상의 신비주의에서는 신인동형동성론이 불가피하다.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환상 속에서 모든 요소들을 보아야만 한다. 그래서 환상은 심지어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상상의 형태로 표현한다. 보다 침착한 많은 랍비들은 하느님에 관한 신인동형동성론을 반대하여서, 전통 속에서 그런 요소들을 제거해버리고자 온갖 노력을 다한다.3) 그러나 신비가들은 고집스럽게 또한 도발적으로 하느님과 참인간의 유사성을 강화했다. 유대인 민간전승에서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자녀"라고 수없이 불렀는데 어떻게 신인동형동성론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 언어는 신과 인간의 유사성과 어버이 하느님의 이미지가 이스라엘인들의 의식 속에 확고하게 주입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메르카바 신비가들은 그런 은유를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4)
동시에,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에 거의 유쾌한 장난끼도 있었다. 솔로몬의 잠언에 대한 미드라쉬에 의하면, 심판의 날에 랍비들이 탈무드만 공부하고 하느님의 광채를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한 메르카바를 게을리 한 것에 대하여 하느님이 질책한다는 것이다. 랍비들이 깊이 생각했어야만 하는 것은 이것이다. 즉 "어떻게 내[하느님]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보여질까. 내 손바닥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내 발톱의 크기가 얼마인지....그리고 이것이 나의 위대함이 아닌가, 그리고 이런 측정을 통하여 나의 장려함을 내 자녀들이 알게 될 나의 영광, 나의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보다 합리적인 랍비들은 이에 대하여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이렇게 하느님의 몸과 그 차원들에 매혹하는 것을 메르카바 신비주의의 타락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이를 신비주의가 그 경험의 직접성을 상실하고 난 뒤에 미신으로 타락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숄렘은 하느님의 몸에 대한 이런 추측들이 이미 초기의 헤갈로트 문서들 속에도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들은 집단적으로 쉬우르 코마아(Shi'ur Qomah) 곧 하느님의 "몸의 측정"으로 알려진 것이다. 이런 전통들은 신인동형동성론을 신성시한 것으로서, 하느님의 형체가 우주의 끝에 닿는 거대한 인간의 모습으로 보인 것을 나타낸다.
다니엘 마트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쉬우르 코마아의 (하느님의 몸에 대한) 그 엄청난 체형 추측은 무제한한 자기의 경험을 묘사한 것일 뿐 아니라 모든 것이 됨으로써 모든 것에 연결됨의 경험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추측들은 어린이의 경계 없는 첫 경험의 발달단계나, 혹은 세상속에서 살아갈 필요에 의해 우리 속에 주입된 서로간의 격리를 초월한 경험을 반복하거나 회복함을 표시하는 것이다. 자아의 겉치레 견고함을 뚫고 봄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착각을 벗어나게 된다고 다니엘 마트는 말한다. 하느님의 엄청난 광대함에 경외감을 느껴서, "하느님이 없는 곳이 없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Dov Baer, 18세기 유대인 신비가). 사람은 더 이상 독립적인 자기가 아니라, 창조주의 무제한한 몸속에 포함된다. 겸손이란 우리의 육체적인 능력과 정신적인 모든 능력과 우리의 기본적인 존재가 우리 내부에 있는 신적인 요소들에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은 결과다.
에녹 3서 48A:9(기원후 5-6세기)는 단언하기를, 하느님이 마침내 이방인들에게 하느님의 위대한 팔을 계시할 때(즉, 하느님이 유대인들을 구원하실 때), 하느님의 팔은 "전 세계만큼 길고도 넓다"고 한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하느님을 무한한 크기의 인간의 모습으로 과장되게 그리는 것은 이른바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의 질적 차이를 포기하는 현명한 방법이다. 그것이 주장하는 바는 그 대신에 인간은 단지 양적으로만 하느님과 차이가 난다는 것이니,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 이미지, 그리고 비슷함으로 창조되었으나 단지 무한히 작고, 덜 지혜로울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인간들은 왜소한 인간들이고, 하느님은 거대한 참인간이다. 랍비 아키바가 한 말 가운데, "[하느님]은 말하자면 우리와 비슷하지만, 그러나 모든 것보다 더 위대하다. 그리고 그게 바로 우리들에게는 감추어진 하느님의 비밀이다"라는 말이 있다.
놀랍게도, 쉬우르 코마아는 하느님의 웅대한 얼굴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으로 끝낸다; "그리고 이게 바로 모든 인간의 크기다." 그륀발트는 강조하기를, 하느님은 이런 거대한 크기를 우리 인간과 함께 공유하는데, 이는 하느님이 인간을 신의 거룩한 이미지대로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확실히 실제로는 이런 크기가 아니므로, 우리는 인간이 타락 이전에는 이런 차원들을 가졌었다고 상정해야 한다. 이런 과장된 측정들은 우리가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인해 이런 영광을 빼앗기기 전에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비슷했음을 나타낸다. 죄악이 우리를 쭈그러들게 만들어 현재와 같이 왜소한 상태를 초래했다. 이런 관찰들은 하느님만이 진정으로 참인간이고, 우리는 인간됨이 의미하는 것의 단지 모사(模寫)요 근사치요 혹은 희미한 감지(glimpses)에 불과하다고 앞에서 내가 주장한 것과 병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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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것을 금지한 것에도 불구하고, 랍비들은 이스라엘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 얼굴을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랍비 요하난은 말했다; "조각상을 바라보듯이, 1,000명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각 사람은 말하기를, '그것이 나를 보고 있구나', 그래서 거룩한 분은,...님은 찬양받으시길, 각개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여금 그 분이 그 사람을 보고 있다고 느끼도록 하였다." 요하난의 제자인 랍비 레비는 말했다; "그 거룩한 분은, 님은 찬양받으시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시나이 산에서 수많은 얼굴로 나타나셨다; 화난 얼굴로, 거절하는 얼굴로, 무례하고 도전적인 얼굴로, 기쁜 얼굴로, 웃는 얼굴로, 친절하고 우호적인 얼굴로, 등등"
2) Ithamar Gruenwald는 이런 테크닉이 실제로 환상 경험들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확신한다. 어떤 메르카바 신비가들은 분명히 금식을 하면서, 엘리야가 가르멜 산에서 했던 방식대로(왕상 18:42), 그들의 머리를 무릎 사이에 끼고 찬송을 암송하였는데, 이리하여 그들의 숨쉬기를 압축하였다. 나중에 Hai Gaon은 동일한 권고를 반복하면서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나서 마치 자기 눈으로 일곱 궁전들을 보는 사람처럼, 그는 내부를 향하여 그의 [심장의] 방들을 응시하게 될 것이다. 그는 마치 궁전을 돌아보면서 각 방에 무엇이 들어있나 살펴보는 사람처럼 명상할 것이다". Martha Himmelfarb는 묵시론적 (확대하여 Merkabah) 문서의 본문들이 하늘로의 승천하는 경험을 유도하기 위해 사용되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휴거", 즉 하늘로 들려 올려짐은 의식 절차를 요구하지 않는데, 이는 환상을 보는 인간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도하기 때문이고," 그리하여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본문에 반영되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주도가 강조된 곳을 발견하지 못했고, 모든 주도는 열렬한 신자들이 시작하는 것이다. Himmelfarb는 이런 문서들은 개인적 경험을 가공한 이야기를 포함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결론짓는다. 물론 상황은 이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의심할 여지없이, "메르카바에 대한 설명은 많았으나, 그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실제 경험으로 시작한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경험들에 의해 덧붙여져서, 메르카바의 추종자들이든, 혹은 쿤달리니 요기든, 혹은 유대교나 기독교의 성서 묵상에서든, 모든 종교들에서 보듯이 유도된 경험의 근거가 되었다. Himmelfarb가 주장하듯이, 많은 사람들이 그 경험을 반복할 수가 없어서, 단지 이야기들만 만들어냈음도 의심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성령세례"를 경험할 수 없는 오순절 교인들의 자녀들 속에서 불 수 있다.
3) 타르굼은 일반적으로 성서 본문에서 신인동형동성론을 회피하였다. 하느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곳에서, 타르굼은 "아담의 모습과 비슷한 것이 있었다"라고 쓴다(bar Adam이라고 써서, 첫 단어는 아람어이고 둘째 단어는 히브리어 고유명사로 되어, 이것이 하느님의 환상임을 미리 방지한다). 그러나 Haiperin은 대부분의 랍비 문서에는 타르굼이 신인동형동성론을 싫어하는 것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히브리성서에는 하느님이 우리가 사람에게 돌린 육체적 심리적 특성들을 갖거나 혹은 사람인 모습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4) 스가랴서를 주석하면서, "'그리고 보라, 한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을'에서 '사람'은 오직 거룩한 분을, 님은 찬양받으시길, 지칭하는 것으로, '주님은 전쟁의 사람이요, 주님(the Lord=Yahweh)이 그 이름이다'라고 말한다"(출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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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국교회 시스템은 짬뽕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는지 모르고 제 멋대로 입니다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나
그저 은혜!
그저 복!
그저 쉽짜가!
속으론 뮈니뮈니 해도 money! ~ㅎ
나귀님 수고에 감사 드립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