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가을이 외 9편
문 현 미
개 같은 가을이 쳐 들어온다*는
시인의 마을에
충성스러운 삽살개 같은 가을이 오기를
바람 군단의 칼춤 대신
경쾌하게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명랑한 가을이
어긋난 사랑의 지독한 얼룩 대신
매혹의 단풍 세레나데를 부르는
달콤한 가을이
한 잎 붉은 열정을 싣고서
한 잎 노란 그리움을 달고서
분노의 강을 건너고 또 건너
더러운 것, 습기 잃은 것, 개 오줌 냄새도 품는
끝없이 출렁이는 바다를 꿈꾸며
가슴 태우도록 아찔하게 떨어지는 것들의
쓸쓸한 범람을 물리치는
전사의 심장 같은 뜨거운 가을이
모든 길들의 경계가 살아나고
떠나간 애인이 꿈결인 듯 다시 돌아오고
강물이 바다가 되는 그때에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그래도 봄은 오겠지요
한 남자가 숙제를 하듯 낙엽을 쓸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얼기설기 흩어 놓으면
늙은 추억을 모으듯 착한 손길이 빗금을 긋습니다
하루치 노동이 수굿하게 익어가는 가로수길
그와 나무들 사이에 아무런 경계가 없습니다
한 톨의 의심도
한 톨의 비난도
한 톨의 성냄도
긴 파랑波浪의 시간을 담은 이파리들이 뒹구는 대로
묵묵히 빈손의 빗질이 따라만 가고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는 발자국들이
지나간 자리를 쓸고 또 쓸고 있습니다
구릿빛 손등 위로 습기 없는 갈색 어둠이 내리는 때
가랑잎 하나 늑골 사잇길로 슬쩍 기웃거립니다
쓸어야 할 게 너무 많은데
언제, 어디서부터 쓸기 시작해야 할지
우두커니로 저물어 가는 어둑한 한 철
그래도 봄이 오기는 하겠지요?
노을 갈피를 읽다
들꽃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하다가
차라리 꽃을 곁에 두는 사람이 향기롭다고 생각해
본다
소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하다가
차라리 나무 몇 그루 키우는 것이 푸르르겠다고 생각해
본다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 주어야지 생각하다가
차라리 우산이 되어 비를 막아 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생각에서 생각으로 저물어가는 저녁답
한나절 떠돌던 말들이 침묵의 수의를 입고
산기슭 아래 긴 명상에 든다
고요가 능선 아래 가을시를 읽는 때
산보다 더 산 같은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바위보다 더 바위 같은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물드는 시간
울금빛으로 쓴 노을 갈피를 싸박싸박 넘기며
점점 더 얇아지고, 가벼워지고 있다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
사과는 사과를 먹으며 하는 게 좋을까
사과를 앞에 두고 하는 게 더 맛이 있을까
사과를 하려면 몇 개의 사과가 있어야지
사과는 사과일 뿐, 그저 한낱 사과일 뿐인데
땅 속 깊이 뿌리에서부터 물관을 타고 올라온
거친 근육의 힘으로 수줍은 듯 사과꽃이 피어나고
마음밭 귀퉁이에 또아리 튼 사과의 싹이 돋아나고
비바람과 햇살의 줄기찬 손길로 사과의 꿈이 여물어
마침내 고추잠자리 날갯짓으로 춤추는 가을이 익어간다
동그마한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면
아삭-아사삭 하는 소리가
유쾌한 속도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고
새콤달콤한 과즙이 사과의 단단한 식물성을 잊게 한다
해빙의 시냇가를 돌아, 짙푸른 초록 울창한 시간을 너머
단풍의 때를 기다리며 붉게 견뎌온 눈부신 사과들
한 마디 사과 대신, 한 입 사과의 싱싱, 상큼한 맛이
오래 묵혀둔 사과의 멋쩍게 머뭇거리던 시간을
눈깜박할 사이에 성큼 되돌려 놓는다
사과와 사과의 저 단단한 껍질들 사이에서
사과를 먹고, 씹고, 사과를 되새김질하고
사과는 사과보다 더 맛있는 걸음으로 한 발자국 내딛고
나무에 기대어 약속하다
찬 바람이 이쪽, 저쪽 가리지 않고 분다
바람의 뒤축을 좇아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낙엽들
뺨을 후려치는 바람의 갈퀴를 붙들고
꿋꿋이 서 있는 나무의 결심을 잠시 빌린다
추락할 때는
중심을 잡고 사뿐 우아하게 떨어질 것
짓밟힐 때는
너무 아작아작 밟히지는 말 것
누구를 따라 가더라도
영혼 없이 무리 지어 휩쓸려가지는 말 것
고개를 숙이더라도
비에 젖은 가랑잎처럼 되지는 말 것
쓸쓸함이 이스트처럼 부풀어 오르더라도
붉고 노랗게 물드는 가슴을 유지할 것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더라도
안녕-이라는 다정 한 움큼을 잊지 말 것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못난 짐승 한 마리 내 속에 살고 있어서
자꾸만 꿈틀거리고
자꾸만 바스락거리고
울먹하다
산수유가 꽃등을 켜는 봄날이다
노란 그늘 멍석 펼쳐진 언저리에
고양이 가족들 웅크린 채 야옹거린다
날카로운 목청으로 허공의 문을 두드리니
투명 기둥이 잠시 기우뚱하는 듯
그때 은발의 노인 한 분 다가와
길 모퉁이에 먹잇감을 조심조심 쏟아 놓는다
새끼들이 잽싸게 달려와 핥아 먹는 동안
어미는 앞발을 가지런히 모은 채 바라만 보고 있다
궁기를 실컷 채운 새끼들 물러서자
그제서야 남은 걸 허겁지겁 먹어 치우는 어미
천성을 꾸욱 누른 눈물겨운 인내 앞에서
목젖을 치고 올라오는 몇 그램의 울컥
오래된 못된 습관 하나 버리고 싶다
바람의 독서
어떤 때는
빛 밝은 연두로 이어지는 새순의 길섶에서
오종종한 여린 낯바닥에 밑줄을 긋고 가기도 하다가
어떤 때는
아침 이슬로 눈과 귀를 씻어내는 꽃봉오리들 앞에서
오랜 묵상을 하기도 하다가
연초록, 진초록의 나무와 나무들 사이
허공의 아스라한 침묵을 훑고 가기도 하다가
정말 어떤 때는
푸른 바다, 물파랑 흘림체로 써 내려간 경전을
순식간에 모조리 엎어 버리기도 하다가
때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넓디 넓은 들녘의 서가에 공손히 이마를 땅에 대고
풀 내음 향긋한 흙의 갈피를 넘기기도 한다
언제나
스스로 새 길을 만들고 낡은 길을 덮어버리며
사라진 왕국의 암호같은 흔적, 낱낱이 받아쓰기도 하며
세상의 처음과 끝, 중심마저 마음껏 읽고 가는
천의무봉의 눈길, 손길......
적막의 곁
-추전역
드문드문 길고양이가 기웃거릴 뿐
해와 구름과 별들이 한바탕 놀다 가고
간혹 찬비 내리고 상고대에 바람이 몰아친다
아무리 둘러 보아도
세상에서 그토록 쏟아내었던 말들
둥지를 틀 곳 하나도 없다
한껏 손을 뻗치면 하늘에 닿을 것 같은
즐거운 착각이 새록새록 돋아나고
싸리꽃 향기가 코끝을 스칠 것 같은
멀미가 허공에 자욱하다
고요한 마침표가 된 간이역에서
갑옷으로 껴 입은 말의 쇳조각들 던져 버린다
바위에서 배어나는 침묵의 말
나무에서 번져 나오는 그윽한 인내의 말
바람이 들려주는 서늘한 생기의 말
하늘에서 떨어지는 푸른 말의 여운들
긴 적막의 곁, 얼어붙은 마음의 휘장이
눈석이물의 속도로 걷히고 있다
떨리는 입술의 첫 고백인 듯
참말과 거짓말 사이
원로화가 부부와 구름정원에서 농익은 차담을 나누었다 인디언 소녀의 얼굴 같은 담쟁이 덩굴손이 리기다소나무 등마루를 타고 하늘로 뻗어 있다 마천루가 뉴욕에만 있는 게 아니라 유량골 산자락에도 있다니 단풍물이 쓸쓸한 맨살에 배일 즈음 솔바람차를 마시던 남자 지인이 불쑥 말한다
“두 분은 천생연분이시군요.” 화가가 서리 내린 수염을 쓰다듬으며 “저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곁눈질하는 눈동자가 후끈 흔들린다 순간 목젖이 떨리며 하르르 떨어지는 말의 비늘들, “다른 여친에게도 이렇게 말하는데......”
팔순이 넘도록 미친 사랑을 억누른 말벗들이 있어서 그림이 된다고, 그런데 마음 길을 누가 막을 수 있느냐고 되묻는다
붉어서 두근거리는 감정의 실타래, 실오라기 하나 붙들고 수십 년 감쪽같이 이어져 왔다니
조금의 감정
조금 더 기다리면
아카시아 은방울 종소리 하얗게 울려 퍼지는
초록의 시간이 돌아올텐데
저리 긴 행렬, 캄캄한 침묵으로 이어지고 있다
꽃단장 하나 없이 먼 길, 얼음발로 가고 있다
그믐달처럼 사위어가는 길일지라도
눈물을 말리는 착한 햇살이 따라올 것이고
아픔을 다독이는 따스한 바람이 불어올텐데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일상에서 사라진 것들 해빙의 속도로 움틀 것이니
터지고 구멍난 가슴마다
파릇한 숨소리 싣고 나비떼 날아올 것이니
외딴 섬에서 달빛과 파도 소리로 견디는
아득히 그리운 사람에게
바다 내음 그득한 곰솔 숲에서 씻은 마음
알알이 새겨 넣어 해당화 소인을 찍어 부친다
조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우리
봄의 중심에 있을 심장, 꽃눈들로 열리리니
산문
영혼의 우물에서 길어 올리다
죽음의 가스실로 들어가기 직전 시인을 찾았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사라질 절망적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왜 시인을 찾았을까. 그 답은 오직 하나다. 자신들이 겪은 끔찍한 나날을 후대에 전하고 싶어서였다. 유대인들은 굳게 믿었다. 시인이야말로 그들의 참혹한 현실을 추호의 가감도 없이 진실 그대로 쓸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이 찾은 시인은 바로 이작 카체넬존이었다. 이 시인은 자신도 곧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끌려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낱낱이 적어 시집 6부를 남기고 한 줌 재로 사라졌다. 곧 죽게 될 남은 자들이 시집 원고를 유리병에 집어넣어 수용소 앞 전나무 아래 파묻어 두었고, 나머지는 여행 가방 가죽 손잡이를 뜯어서 그 속에 넣고 꿰매어 두었다. 정작 당사자인 시인은 이미 죽음의 가스실로 사라졌는데 시는 살아남아 마침내 『유리병 속의 편지』(한마당, 1995)로 출간되었다.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단언할 만큼 수용소 유대인들의 삶은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현실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처참한 이야기를 시로 남기고자 했다. 절망의 상황에서도, 죽음에 직면해서도 시는 살아 있었고 살아남았다. 그렇게 시는 인간과 함께했고 함께하고 있으며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는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샘솟는 열정의 언어로 쓰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그런 피를 먹물로 삼아 쓰는, 아무 죄 없는 영혼의 진정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시경에 있는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 사무사”(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시 삼백편을 한 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에 담긴 뜻이 그러하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한 말도 같은 맥락이다. 즉 그는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이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어 있는지 그리고 글을 쓸 수 없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인지 스스로 물어보라고 했다. 그만큼 시는 진정성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진실을 담아내야 하며 치열성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수 없는 밤을 지새며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이런 시쓰기가 내게 있는지, 이런 시정신이 있는지 끈질지게 질문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니면 그중 일부라도 내려놓을 수 있을까. 도무지 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이토록 답을 찾지 못하는 질문도 있는가. 혹은 답을 찾고 싶지 않은 것인가.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해일처럼 온몸을 덮친다.
한국 근현대 문학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이 생각난다. 시대와 사회가 그녀를 구속했고, 온갖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던 그녀. 자유로운 삶을 얼마나 갈망했을지 상상해 본다. 문학이 자유혼의 구가라면 시는 더욱 그렇다. 어쩌면 인간은 현실의 모든 것에 구속되어 있는 존재이기에 구속으로부터 탈피하고 싶은, 자유를 희구하는 열망에서 문학이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칠레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은 연인과 사랑을 나누었던 때에는 시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사랑이 사라지고 슬픔의 늪에 빠져있을 때 다시 시가 찾아왔다. 안타깝게도 행복에 가득차 있을 때에는 시가 있을 자리가 별로 없다. 고통과 부재와 결핍이 찾아드는 그때 시가 문을 두드린다. 물론 기쁨이 충일한 때에 시를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시의 씨앗은 움틀 수 있다.
시는 일종의 자기 고백인 동시에 타인과 소통하려는 손짓이다. 개인의 고통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도 품고 시대와 역사의 고통마저 받아들여 숙성시키고 발효시킨 후 떨어지는 진액이 시의 언어다. 어찌 나의 울음만 울 수 있겠는가. 그런 울음에서 비롯된 시는 울림이 미약하다. 타인의 울음도 껴안고 진정으로 울 수 있는 거기에 시가 있다. 그렇게 울어주는 곡비哭婢야말로 시인이 아닐까.
모두 어디론가 가파른 속도로 내달리고 있다. 성과를 위해서 혹은 발전이라는 명분 하에 세상이 돌아간다. 내면의 고요를 잃어버리고 자기만의 성벽을 쌓아 둔 채 불안과 고독 속에서 방황하곤 한다. 이런 때 굳어진 심장을 말랑말랑하게 하는 시가 필요하다. 시는 발효의 미학으로 세워진 언어 건축물이다. 질주하는 사회에서 발효를 기다리는 것 혹은 느리게 산다는 것은 뒤처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를 찾는 길인 동시에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는 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가 있다. 아름다운 그 섬에 가고 싶다.
문현미 부산 출생. 1998년 <시와 시학> 등단. 시집 『시를 사랑하는 동안 별은 빛나고』 외. 박인환문학상 외 수상. 백석대학교 백석문화예술관장.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