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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린다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린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상대가 누구인지를 파악 못하고 함부로 덤볐다가 혼이 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속담이다. 그만큼 어린 강아지는 자기 판단이 서툴다는 의미가 담겼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이 하룻강아지 같다. 한시라도 관리하지 않으면 어리석게 행동하고 생각하며, 자기가 어떤 위험상태에 놓여있는 줄도 모르고 貪(탐)하며, 自慢(자만)에 빠져 자기가 제일 잘났고, 자기만이 최고이며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에 젖어있고 자기의 결점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마음은 이 같이 한시도 가만히 있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은 늘 관심권 안에 놓고 다스려야 할 대상이다.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제일로 하고 있다. 팔만대장경을 가마솥에 넣고 엿을 고듯이 하면 마지막 남는 것은 마음심[心]자 하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듯이 마음 다스림을 제일로 삼는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마음을 어떻게 정의 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佛敎思想史(불교사상사)를 간략히 알아보는 것이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佛敎의 思想史(불교의 사상사)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와 계시다가 入寂(입적)하신 이 후 약 100년 동안에는 經障(경장)과 律障(율장)이 정비된 시기이다. 이 기간을 불교사에서는 初期佛敎(초기불교)라고 한다. 그 후에 長老(장로)를 중심으로 한 보수 자들의 모임인 上座部(상좌부)와 젊은 신자들이 중심이 된 大衆部(대중부)로 갈리며, 각 부는 다시 분열하여 20개의 부파가 발생한다. 이들은 주로 경과 율에 대한 견해차이가 분열의 주 이유였다. 분열된 각 부파는 각자의 세력을 형성하고 서력기원(B.C) 전후까지 계속된다. 이 기간을 部派佛敎(부파불교), 또는 부처님의 가르치심인 교리에만 매였다고 하여 아비달마불교라고 한다.
이 후 불교는 상좌부와 說一切有部(설일체유부)가 중신이 되었으며, 상좌부는 남인도를 거처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등 동남아시아에 전파되었는데 이를 소승불교 또는 남방불교라고 한다. 한편 설일체유부는 개혁세력으로 초기경전인 아함경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재구성하고 다시 편찬하여 이것을 佛說(불설)로 인정하였다. 이를 대승불교 또는 북방불교라고 한다. 이 때 만들어진 경전이 반야경, 금강경, 해심밀경, 화엄경, 법화경 등이다.
반야경을 중심으로 발전된 이념이 空思想(공사상)으로 대승불교의 기본이념이 되었다. 공사상은 만법은 因緣(인연)에 의하여 잠시 존재할 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하는 공 중심 사상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치심의 근본 사상은 執着(집착)하지 말라는 뜻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잘못 받아들여 허무주의, 즉 惡取空見(악취공견)에 빠졌으며, 有․無(유무)에만 매달려 본래 뜻한바가 왜곡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인도의 龍樹(용수) 선사께서 이를 현실적으로 다시 해석해서 가르침을 주신 것이 中觀思想(중관사상)이다. 중관사상은 유․무를 떠나 不生不滅(불생불멸), 不常不斷(불상부단), 不來不去(불래불거), 不一不二(불일불이) 등 八不中觀說(팔불중관설)을 펼치셨다. 중관을 중용이라고도 하는데 불교의 중용은 유교의 중용과 근본이 다르다. 유교에서는 有邊(유변) 중심을 말하나, 불교에서는 無邊(무변) 중심을 뜻한다.
이 후 불교의 심리학이라고 하는 唯識思想(유식사상)이 인도의 유가사(yoga師)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를 무착(395~470)과 세친(400~480) 형제가 집대성하여 완성시켰다. 유식사상은 의식을 前5識(5根과 5境)과 제6의식(了別意識, 요별의식), 제7의식(말라식: 自我意識, 利己心), 그리고 제8의식(아뢰야식: 根本識)으로 구분하고, 인간의 마음작용을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깊이 있게 분석하고 있다.
이 유식사상을 근간으로 불교이론이 계속 변천해서 마음은 迷惑(미혹)의 씨앗이 되기도 하지만 깨달음의 토대가 되어 중생은 모두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는 如來藏思想(여래장사상)이나 법화경을 所衣經典(소의경전)으로 하여 理事無碍(이사무애)로 一乘(일승)을 근간으로 하는 天台思想(천태사상), 그리고 重重無盡(중중무진)의 법계가 깨달음의 본질이라는 華嚴思想(화엄사상), 아미타부처님께 본원적으로 의지하는 淨土思想(정토사상), 不立文字(불입문자)․ 敎外別傳(교외별전)의 禪思想(선사상), 다라니․ 진언․ 만다라 등을 상징으로 하고 儀禮(의례)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 중심 불교의 密敎思想(밀교사상)과 起信論(기신론) 등으로 대승불교의 근본이념이 변천하였다.
여래장사상은 하나의 마음속에 세상의 이치를 모르고 생사를 윤회하는 어리석음과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는 마음이 함께한다고 하면서 眞如(진여)인 理(이)와 중생의 마음이 하나임을 가르치고 있다.
기신론은 인도 사람 마명의 論(논)이라고 하나, 인도 고대어 판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그 진위여부가 가려지지 않았다. 기신론에서는 一心二門(일심이문)을 주장한다. 즉 하나의 마음에 두 가지 문(처한 경우)이 있다고 한다. 그 하나는 우리 같은 중생의 마음이요, 또 다른 하나는 出世間(출세간), 그러니까 깨달은 자의 마음[佛心]이라는 의미이다.
空思想(공사상)에서의 마음
우리가 사물을 認識(인식)한다는 것은 마음의 작용에 의하여 가능하다. 그러므로 마음을 인식하려는 것도 마음작용이기 때문에 마음이 마음자체를 인식할 수는 없다. 「마음이 무엇이냐」하고 물을 때 물음의 대상이 되고 있는 마음은 마음이 개념화된 것이며 마음자체는 마음의 인식대상에서 빠져나와 도리어 묻는 자가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어떤 모양으로도 포착되지 않으므로 無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마음을 無(무)[空(공)]라고 인식하여 “내 마음”이라는 집착에서 떠나야 함이 불교공사상의 근본 가르치심이다.
『과거의 마음은 포착할 수 없다. 현재의 마음도 포착할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포착할 수 없다.』 -금강경-
⇒無[空]란 諸法(제법, 온갖 현상)은 實體性(실체성), 固定性(고정성)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因緣(인연)으로 이루어진 相(상)에 불과할 뿐이다.
『마음의 本性(본성)은 淸靜(청정)하여 더러움에 물드는 일이 없다. 마치 하늘에 구름, 먼지, 안개 등이 뒤덮여 맑고 깨끗하지 못하다 해도 그 이면의 허공의 본성이 더렵혀지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 -勝思惟梵天所問經(승사유범천소문경) -
『중생이 영원에 걸쳐 죄를 짓는다 하여도 그 심성(心性)은 더렵혀지지 않는다.』 -寶匧經(보협경)-
『온갖 중생의 심성은 본래 청정하여 貪 ․ 瞋 ․ 癡 (탐진치)등 번뇌가 더럽히지 못한다. 마치, 허공을 더럽히지 못하는 것과 같다.』 - 大集經(대집경)-
『중생이 境界(경계)를 망령되이 인정하므로 마음에 差別(차별)[分別心(분별심)]이 생긴다.』 - 起信論(기신론)-
唯識佛敎(유식불교)에서의 마음
2006년도에 인기리에 상영되었던 영화 「다빈치 코드」가 있었다. 그 영화에서 “눈은 마음이 보고자하는 것만 본다.”는 대사가 나온다. 이는 유식불교 사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유식불교는 「心外無境(심외무경)」「一切唯心(일체유심)」이라고 하여 모든 법(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현상)은 마음이 존재함으로서 비로소 존재한다고 본다.
내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피부를 통하여 감각하는 모든 대상[境(경)]은 눈, 귀, 코, 입, 피부 등[5根(근)]이 감각을 통하여 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5근이 5경을 감지한다 하여도 ‘그것이 무엇이다.’ 라고 분별하지 못하면 5근과 5경의 기능은 한낮 기계적 작용에 불과하다. 이를 마음[의식]이 받아들여 분별해야만 인식이 가능하게 된다. 즉, 눈이 연꽃을 보고 연꽃이라는 물체가 눈이라는 감각기관인 망막에 그려지기만 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를 시신경을 통하여 마음[意(의)]으로 전달됨으로서 비로소 “아! 연꽃이구나, 연꽃은 비록 더러운 환경 속에서 자라면서도 청결함을 잃지 않는 고결함이 있으며,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다.” 등의 판단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마음은 眞如「진여(절대 진리, 우주의 이치)」에서 나온다. 우리의 의식은 절대계인 진여에서 나오는 마음으로부터 지배를 받으며 그 의식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눈으로 차창 밖을 보면서 잠시 지나간 옛일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다 보면 차창 밖의 풍경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음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창밖의 풍경을 보기 때문이다.
강의를 들을 때 강사는 열심히 강의를 하였는데 듣는 사람이 사무실의 복잡한 민원문제에 골똘하다 보면 강의의 내용을 기억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는 소리를 귀로 듣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소리를 듣는다는 증거이다.
이와 같이 마음인 주체가 물체, 소리, 냄새 등 객체를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은 감각기관이 아니고 「마음」임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객관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주관인 마음이 인정을 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객관 없는 주관이 없는 것과 같이 주관 없는 객관의 존재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心外無境(심외무경, 마음 이외에 별도로 어떤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뜻)이며, 一切唯心(일체유심, 이 세상에 사물이나 현상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이를 인정하기 때문이지,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고 한다.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을 놓고 받아들이는바(느낌)가 서로 다를 수 있다.
넓은 초원에 크고 반듯하게 생긴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고 하자
지나가는 나그네가 그 나무를 보고 느끼는 마음은 “아 그늘에서 좀 쉬었다 가자.”는 마음일 것이고, 화가라면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캔버스를 꺼내 들을 것이다. 또 목수는 나무를 베어서 가구를 만들 것을 생각할 것이고, 상인은 잘라 팔면 얼마의 돈이 생길 것이라고 계산을 할 것이다.
길에 만 원짜리 지폐 한 다발이 떨어져 있다고 가정하자.
어떤 사람은 이 돈을 보고 주인이 누구인지를 찾을 것이며, 주인을 찾을 수 없으면 경찰관서에 신고할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주어 갖자니 양심이 절리고 신고 하자니 아깝다고 생각이 들어 못 본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남이 볼세라 아주 빠른 동작으로 주어서 호주머니에 넣고 잽싸게 사라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같은 사물과 현상을 놓고 이렇게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느낌과 판단이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서로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마음은 과연 무엇일까?
앞에서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5根(근)]과 다섯 가지의 대상[5境(경)]을 설명하였는데 유식불교에서는 이 것을 前5識(전5식)이라고 하며, 5근이 5경을 보고 받아들이는 느낌[認識作用(인식작용), 分別作用(분별작용)]을 弟6意識(제6의식)이라고 한다. 제6의식의 인식작용은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의식의 種子倉庫(종자창고)인 제8의식(아뢰야식)에 있는 종자를 근거로 인식한다. 이 때 제7의식(말라식)이 모든 인식을 이기적으로 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쓴다. 제7의식이 강한 사람은 我慢(아만), 我癡(아치), 我見(아견), 我愛(아애)에 빠지기 쉽다.
제8의식이라는 창고 속에는 언제부터인가 내가 존재하기 시작한 이 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여 지은 業(업)이 종자로 변하여 저장되어 있다. 이 창고(아뢰야식) 속에는 前生(전생)과 現生(현생)에서 선한 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선한 종자가 많이 들어 있고, 악한 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악한 종자가 많이 쌓여 있다. 그래서 善心(선심)과 惡心(악심)은 이 창고속의 선한 종자와 악한 종자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현생에서의 순간판단을 요할 때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은 과거의 업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것이다.
그 창고 속에 善種子(선종자)가 하나도 없을 수는 없다. 따라서 잔혹한 살인을 한자라도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 후회의 눈물은 선종자가 발동하기 때문인데 이 선종자를 眞諦(진제)라 하며 중생마다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어도 아주 없을 수는 없으므로 一切衆生 悉有佛性(일체중생 실유불성, 즉 어떠한 중생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부처가 될 근본 바탕인 씨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평소 선업(선한 생각과 행동)을 지어야 함이 여기에 있으며, 그래서 수양이란 선한 종자를 많이 저장하여 악한 종자의 수를 줄여나가기 위하여 평소 선업을 쌓아야 함이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생활불교이어야 한다.
유식불교에서는 마음을 이와 같이 설명하면서 우리의 마음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였다.
하나는 遍計所執性(변계소집성)이라 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객관의 세계[對象(대상)]가 있다고 분별하여 집착하는 허망 된 마음으로서 중생의 마음을 말한다. 중생은 집착으로 말미암아 욕심과 미움이 생겨 마음이 어리석어져서 깨달음을 방해 받는다. 두 번째는 依他起性(의타기성)이다. 의타기성은 더렵혀진 마음과 깨끗한 마음이 한데 섞여있는 아뢰야식으로 보살의 마음이다. 세 번째는 圓成實性(원성실성)이라 하여 이는 순수 청정한 佛心(불심), 佛性(불성)을 뜻한다.
이 세 마음 중에서 의타기성에서 변계소집성을 멸한 상태를 원성실성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善[淨心(정심)], 惡[染心(염심)]이 혼합되어 있는 아뢰야식에서 惡(악)[染心(염심)]을 없애는 것이 마음을 다스리는 목적이므로 생활 속에서 선업을 쌓고, 꾸준한 정진을 통하여 깨달음을 구해야 할 것이다.
『마음에 의하여 온갖 존재가 만들어 지고 마음에 의하여 果(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 마음은 因緣(인연) 따라 생기한다.』 -제법집요경-
『마음은 본래부터 自性(자성)이 淸淨(청정)하건만 無明(무명)이 있어서 그것에 의하여 더렵혀진 까닭에 染心(염심)이 있게 되는 것이다.』 -기신론-
유식불교에서는 아뢰야식(제8식) 속에는 절대계인 眞如(진여)의 세계와 상대계인 俗界(속계)가 함께 존재함을 인정하고 있다. 아뢰야식은 윤회의 주체이며 우리의 인식활동을 지배하는 원천이고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절대계인 眞如(진여)는 佛心(불심), 佛性(불성)이며 우주의 근본심이다. 한편 상대계인 속계는 世俗界(세속계)를 말한다.
絶對(절대)는 相對(상대)를 가지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운명에 놓여있다. 절대는 상대에 相卽(상즉)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에서 상즉은 서로 대립적 관계에 있는 것이 서로 다른 역할을 통하여 더욱 향상된 다른 역할을 창조하는 system을 말한다. 예를 들면 지남철은 남극과 북극이라는 대립적 관계의 양극이 있기에 지남철이라는 또 다른 하나의 독립된 새로움을 창조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대승기신론은 유식사상의 불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一心二門(일심이문)이라고 하였다. 하나의 마음에 두개의 문, 즉 처하는 경우가 있다는 뜻인데 원효대사는 일심을 絶對界(절대계)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절대계인 일심에는 眞諦(진제)와 俗諦(속제)가 있다고 하였으며, 眞諦(진제)는 불심이고 俗諦(속제)는 중생의 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眞諦(진제)는 唯識(유식)에서 말하는 圓成實性(원성실성)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번뇌에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그리고 寂然(적연)한 마음 상태를 뜻하며, 俗締(속제)는 번뇌에 찌든 마음, 즉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은 마음이다. 유식에서는 우리 중생들의 마음인 依他起性(의타기성)에서 遍計所執性(변계소집성)을 제거하면 깨달은 자의 마음인 圓性實性(원성실성)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같은 중생의 마음속에는 眞諦(진제)인 淨心(정심)과 俗諦(속제)인 染心(염심)이 함께 존재함을 뜻한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한번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지옥계와 천상계를, 인간계와 축생계를 오간다고 할 것이다.
지옥계와 천상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네 마음 머무르는 곳이 곧 우주의 중심이 된다.」
無我(무아), 無自性(무자성)이라고 했는데 마음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초기불교의 근본사상을 다시 살펴보면 緣起(연기), 無我(무아), 無自性(무자성), 四聖諦(사성제), 心性本淨(심성본정)을 들 수 있다.
연기는 존재하는 모든 것과 현상[萬法(만법)]은 인연에 의하여 잠시 존재할 뿐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주의 진리를 부처님께서 깨달으시고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신 만고의 진리이며, 存在本性(존재본성)이다. 이 論理(논리)에서 諸行無常(제행무상)과 諸法無我(제법무아)가 성립되며, 불교이론의 근간이 된다.
무아와 무자성은 연기법에 논리적 근거를 두고 있으며 불교만이 가지는 독특한 교리이다. 즉, 만법은 연기에 의하여 假定的(가정적) 존재일 뿐이므로 그 실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교리이니 이는 인도의 브라흐만(Brahman) 교리와도 확연히 다른 불교교리이다. 연기의 근본 논리는 無(무) ․ 空(공)이 아니다. 다만 假合(가합)에 의하여 잠시 존재할 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 이였다. 執着(집착)은 자아를 낳고, 자아는 욕심을 낳아 번뇌를 일으키므로 집착하는 어리석음에서 헤어나도록 가르치신 거룩한 뜻이 잘못 전달되어 惡取空見(악취공견)에 빠졌으며, 달(Moon-깨달음, 眞理:진리)을 가리키는 손가락(方便:방편)만 바라보고 달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무아, 무자성이란 일체 법은 여러 요소가 모여 그 현상을 이루고 있을 뿐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현상[法(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현상은 현상으로 존재하지만 그 현상이 인연에 의하여 잠시 존재할 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실체가 없으니 그 것에 집착할 것이 못된다는 의미이다. 즉 만법은 固定的(고정적), 實體的(실체적)인 樣相(양상)이 없다는 뜻이다.
무아라는 말에는 ①자아가 아니라는 뜻과, ②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①아집을 떠나라, ②자아 아닌 것을 자아로 인정하는 것을 잘못이라는 의미로 이 말을 썼다고 한다. 그 이유는 몸을 자아로 생각하는 태도와 집착으로 인하여 번뇌가 발생하므로 이를 배제하기 위하여 그렇게 설교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 후 설일체유부에 오자 人無我(인무아)를 주장하여 자아를 부정했으나 諸法(제법)은 實際(실제)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차츰 자아와 제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이 생겨 대승불교의 교리가 되었다. 대승불교에서는 空觀(공관)의 입장에서 자아뿐 아니라 일체의 존재에는 고정적 실체가 없다고 주장하여 人無我(인무아), 法無我(법무아)의 二無我(이무아)가 역설되기에 이르렀으니 我(아)가 自我(자아)의 뜻에서 벗어나 本體(본체) ․ 自性(자성)의 의미로 확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호흡을 생명의 본질로 보고 그 자체를 아로 인정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자성이란 불은 뜨겁고 타는 성질이 불의 자성이며, 물은 차갑고 습한 것이 물의 자성이다. 그러나 물의 경우 H원소 2개와, O원소 한 개가 인연에 의하여 만나 물을 이루고 있으나 그 인연이 다하여 원소가 흩어지면 물의 존재, 자성은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무자성이라 한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논리가 불교의 연기이며 무아, 무자성의 교리이다. 참으로 불교는 현대 과학으로 입증이 가능한 과학이다.
그렇다면 왜 心性本淨(심성본정: 마음 바탕은 본래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음)이라고 하여 마음의 자성은 본래 淸淨(청정)하고 寂然(적연)하다고 하여 마음바탕이 무가 아니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하였을까?
이러한 문제는 대승불교의 최대 근본 사상인 공사상과 유식 및 기타 종파사상에서 풀어야할 과제이다.
즉, 「무아, 무자성인데 심성본정의 심은 어떤 존재인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마음이란 존재는?」
이와 같이 서로 대립하는 교리를 풀기 위해서는 역시 만고의 진리요 부처님의 최대 가르치심인 연기론을 동원시켜야 한다.
나라는 존재는 육신과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육신은 地, 水 火, 風(지수화풍)이 인연에 의하여 만나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존재한다. 그러나 육신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존재했다 사라진다. 길어야 백년이다. 정신은 受, 想, 行, 識(수.상.행.식)으로 구성되어있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정신과 육체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여러 요소가 연기하여 가합된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나[我], 自性(자성)이라함은 지, 수, 화, 풍, 수, 상, 행, 식으로 이루어진 가합의 나[我], 자성(自性)을 뜻하는 것이며, 마음[心]은 나를 이루고 있는 여러 요소 중의 하나를 말한다. 그러므로 공사상에서 무아, 무자성이라는 가르치심과 유식사상과 여래장사상, 그리고 기신론에서 마음을 俗諦(속제)와 眞諦(진제)로 구분하고 마음[識]이 輪廻(윤회)하는 실체로 인식한 것은 상호 相卽關係(상즉관계)이지 모순되는 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참나[眞我, 완성된 나]는?
깨닫는다는 의미는 마음의 자유로움을 말한다. 마음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자유로이 흘러가는 구름같이 걸림이 없이 자유로운 상태를 깨달은 상태라고 할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 『無 所得 無罣碍(무소득 무괘애)』라는 의미의 가르침이 있다. 즉 얻음이 없으니 걸림이 없다는 뜻이다.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니 떳떳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와 같이 참 나는 조금도 더러움이 없이 깨끗한 마음을 뜻한다. 이는 불심, 불성을 말한다.
「열반경」에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모인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자신을 등불로 삼고[自燈明], 법을 등불로 삼아[法燈明] 정진하라.」고 이르셨다. 그 동안 부처님께서는 無我(무아), 無自性(무자성), 我無(아무), 法無(법무)라고 하셨는데 열반에 드시면서 이 후부터는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나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전자의 아무와 법무는 나[我]가 완성되기 전이므로 경거망동을 삼가고 집착함이 없이 貪(탐: 각종 욕심), 瞋(진: 미워하고 질투하고 화냄), 痴(치: 무명에 젖어 어리석음)를 여의여 淸淨寂然(청정적연)한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 열반경에서의 我(아)와 法(법)은 이와 같이 깨달은, 완성된 나와 법을 말한다 할 것이다.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린다.
이제까지 우리의 마음 바탕을 살펴보았다. 불교사상사를 통해서 불교사상이 어떻게 변천해 왔나를 확인해본 결과 마음에는 衆生心(중생심)과 菩薩心(보살심)이 있고 佛心(불심)이 있음을 알았다.
중생심은 연기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의 利益(이익)에만[利己心(이기심)] 눈이 어두워 六道輪廻(육도윤회)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된다. 보살심은 연기의 이치를 이해하고 자기의 이익과 남의 이익[自利利他(자리이타)]을 같이 헤아리면서 부처님의 가르치심에 따르는 자를 말한다. 불심이란 깨달은 자의 마음[利他心(이타심)]으로 오르지 남의 이익을 위하여 자기를 낮추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우리가 선과 악을 구분 짓는 기준은, 모두에게 이익이 되면 선이고, 나에게만 이익이 된다면 악이라고 할 것이다.
마음이 이와 같이 단계가 있으므로 우리는 중생심에서 벗어나 보살심으로, 또 보살심에서 불심으로 발전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치심과 冥想(명상)으로 정진하여야 할 것이다.
마음은 철없이 항상 경솔하고 이기적으로 흐르며 자만에 빠지기 쉬운데 이러한 마음은 자신에게 번뇌를 심어주고 남에게 해를 끼치므로 악이 되기 때문에 멀리해야 한다. 그러므로 늘 관리해야 한다.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중생심은 보살심을 스승으로 하여 따르고, 보살심은 불심을 스승으로 모시고 늘 정진해야 함이다.
마음이 마음을 관찰하면서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명상을 해야 한다. 명상은 대승불교에서는 禪(선)이라하고(간화선), 동남아 등 남방불교에서는 사마타(samatha), 위빠사나(vipassana)라고 한다. 생활 속에서 잠시잠시 짬을 내어 명상을 하여 마음이 철없이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도록 관리해야 한다. 또 하나 키워야 할 마음은 집착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집착은 번뇌를 가져오는 근본 원인이 된다.
이러한 자세가 우리 在家佛者(재가불자)들의 진정한 태도가 아닐까 한다.
불교의 공(空)과 윤회(輪廻)사상
공-연기(緣起), 업(業)-윤회사상
불교에서 공사상과 윤회사상은 이념이 서로 달라 대치되므로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라고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다.
공-연기사상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인 연기론(緣起論)에서 비롯되며, 대승불교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法]은 물질을 형성하는 기본인 원자나 분자가 인연에 의하여 일시 만나 하나의 형체를 이루고 있으나, 인연이 다하면 서로 흩어져 소멸한다는 논리이다.
업-윤회사상은 인도문화에서 내세사상으로 중생(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이 평소 쌓아온 공덕(功德, 業)의 정도에 따라 죽은 후에 천상,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과 같은 여섯 종류의 세계에 각각 태어난다는 사상이다.
공사상에서는 모두가 공인데 어찌 극락 등 6도가 별도로 있느냐고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고도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중생을 계도하여 고통[煩惱]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므로 중생을 도덕적으로 선도할 수 있는 이념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이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업설이며, 윤회설이다. 일상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선하면 선업(善業)을 쌓아 천상에 태어나고, 악하면 악업(惡業)을 쌓아 지옥에 태어나 갖은 고통을 격어야 한다고 보는 업-윤회는 불교도덕을 성립시키는데 필수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이 공-연기와, 업-윤회사상이 불교이념의 양대 축이며, 새의 양 날개와도 같이 뗄 수 없는 핵심사상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이념적 대립이 있다면 큰 문제이다.
보살도(菩薩道)
우리 모두는 부처님의 가르치심 중에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도(中道)를 소홀히 하고 있다. 무량무변(無量無邊)의 세계에서 내가 설 곳이 어디인가? 그것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에 의하여 결정된다. 즉 네 마음 머무르는 곳이 우주의 중심이 된다. 중도는 그러한 가르침을 뜻한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둘을 한데 아우르는, 조화시키는 그것이 중도이다.
공-연기와 업-윤회사상은 하나로 아울러서 조화롭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곧 보살사상이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하여야 한다. 보살은 깨달음을 위해 부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수행을 해야(상구보리) 하는 한편 중생을 바른 길로 계도(하화중생)하여야 한다.
상구보리, 즉 깨달음은 연기라는 진리를 익혀 공의 세계(부처님 세계)에 이르러야만 가능하다. 하화중생, 즉 중생계도는 5계, 6바라밀, 8정도, 3업10계 등을 가르쳐 중생이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보살의 정도이다.
부처님은 현실세계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현실세계를 정견과 정사유를 통하여 바로 보고나서 깨달음을 얻었다. 현실은 엄연히 존재한다. 존재하는 현실위에 깨달음의 세계(부처님 세계)를 설하셨다. 그러므로 현실세계의 주인인 중생과 깨달음의 세계가 별도로 존재하며, 중생을 계도하면서 동시에 자기 수양을 통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보살의 길이 함께 존재한다.
공-연기의 사상과 업-윤회의 사상은 이러한 이유에서 함께 존재하면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임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대승기신론에서 밝히는 일심이문(一心二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마음 안에 무명의 중생심과 깨달음의 부처님 마음이 같이 있다.
이 세계에는 오직 마음뿐이다. 견제상비상(見諸相非相)이면 견여래(見如來)(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깨달으면, 곧 부처님을 볼 수 있다)라는 금강경의 사상과 유식무경(唯識無境)(오르지 마음뿐이며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식불교의 가르침은 모두가 이를 말하고 있다.
연화화생(蓮花化生), 영기화생(靈氣化生)
우리는 사찰이나 궁궐과 같은 전통건축물에서 무늬 그림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모양이나 색상이 이상하다고 하여 기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그 무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오해인 것 같다.
단청의 무늬나 조각 형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치 구름이 하늘을 향하여 오르는 모습과도 같고, 어떤 형형할 수 없는 기운이 솟구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 무늬의 형상은 氣(기)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우주만물의 근원을 연화화생(蓮花化生)이라고 하여 연꽃에서 시작하였다고 보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영기화생(靈氣化生)이라 하여 신령스러운 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불교나 중국의 우주 탄생관은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부처님이 계신 사찰이나, 임금님이 거처하시는 궁궐은 신령스러운 기운이 가득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단청의 모습을 그렇게 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현명하다.
사찰에서 사용하는 종에 있는 비천상도 같은 원리라고 할 것이다.
영기화생(靈氣化生)
우주의 탄생
우주가 언제 어떠한 경로를 거처 탄생했으며, 생명이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는 현대 과학에서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우주가 약 150억 년 전에 탄생했을 것이라는 데는 많은 과학자 들이 대체로 뜻을 같이 하는 것 같다. 150억 년 전에 대폭발에 의하여 우주가 형성되었다고 하는 표준대폭발이론(standard big-bang theory)이 현대과학자들의 우주기원에 대한 설명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우주가 「특이점」이라고 하는 초고온, 초고밀도 상태에서 10-43/초로 폭발하여 오늘과 같은 차갑고 희박한 상태에 이른 대폭발(big-bang)이 있었으며,
대폭발 직후에 10-35 ~ 10-24/초의 짧은 기간 동안에 공간이 1028배 이상 급격히 팽창하면서 물질이 만들어 졌다고 한다.
이 같이 급팽창할 때 발생한 미세한 밀도의 차이가 중력으로 인하여 점차 커지면서 별과 은하계 등 우주의 거대한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영기(靈氣)무늬
임금님이 거처하는 궁이나, 부처님이 거처하는 사찰의 건축물을 살펴보면 양식이나 문양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찰의 건축물은 신라나 고려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숭유억불 정책에 의하여 불교가 어려움을 격은 조선조 때 건축된 건물도 궁의 건축과 같은 수준이다. 조선조 때 건국이념이 유가(儒家)에 의하여 불교가 억압을 받았다고는 하나 궁궐내의 지배층이나 대다수 서민들은 불교에 의지하면서 영생을 바라고 고단한 삶을 이길 수 있었다.
궁의 주인인 임금님이 자기가 신봉하는 부처님께서 거쳐하는 집을 자기가 거처하는 집의 수준으로 짓게 함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는 필요에 의하여 사찰의 건축 수준이나 규모, 문양을 궁궐의 것을 그대로 따르는 데 동의 하였다.
궁이나 사찰건축물의 도리를 중심으로 공포나 보 등에서 비롯된 각종 장식물이나, 처마 밑 장식물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양과 무늬가 있고, 때로는 용이나 봉황, 연꽃, 연 줄기 등이 사실적으로 또는 형상화 되어 만들어 지거나 그려져 있다.
장엄한 이들 모양과 문양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그 동안 일본학자들이 일본에 있는 호류지(法隆寺) 5층 석탑의 공포가 구름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일본 건축학자 세키쿠치의 학설을 따라 그 신비스러운 모양과 문양을 단순히 「구름」으로 알고 있었다.
강우방 교수는 이 것을 일본학자와는 다르게 「우주에 충만한 영기를 가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주가 big-bang후 급격히 팽창하면서 물질이 만들어 졌다고 하였다. 팽창 후 물질이 만들어 지기까지는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했다. 팽창에 의하여 기(氣, 힘, energy)가 만들어 지고 그 기가 원소를 이루었으며, 원소가 나름대로 서로 만나 물질이 된 것이다. 이 과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삶 자체가 만남과 흩어짐의 연속이다. 만나서 생명체를 이루고, 흩어지면 죽음이다. 이러한 과정을 윤회라고 한다.
이 물체를 이루기 이전의 상태에 있는 기를 영기(靈氣)라고 하며, 신령스러운 힘(氣, energy)이라고 하였다. 이 영기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도록 모양과 문양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궁이나 사찰의 건축물에 있는 문양이다.
이 건축물에 있는 모양과 무늬를 살펴보면, 덩굴형식을 하고 있으며. 그 덩굴 마디마다에서 연꽃 봉우리나, 연 줄기, 봉황, 용 등이 나오고 있다.
궁에는 봉황이나 용을 사용했고, 사찰에서는 연꽃봉우리나 연 줄기를 주로 사용하였으나 아주 드물게 용이나 봉황도 볼 수 있다. 임금에게 우주를 창조한 기운이 함께하기를 비는 마음에서 영기 모양과 무늬를 사용했고, 사찰에서는 부처님 몸에서 발생하는 기운이 우주를 창조하는 기운과 같다고 하여 영기무늬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궁에서는 영기화생(靈氣化生)이라 하며, 불교에서는 연화화생(蓮花化生)이라고 한다.
만물은 어느 특정인이나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우주가 만들어낸 기(靈氣)가 인연 따라 생멸하는 것이다. 우주는 지금도 팽창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언젠가는 대폭발하여 다시 기의 상태로 변할 것이라고 한다.
마음[心]
1.
우선 "불심회"란을 통하여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노력해 주신 분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우리는 가끔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된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면서 마음속에 지나간 여인을 골똘히 떠올린다거나, 복잡한 생각에 잠겨있을 때 옆에 있는 친구가 어깨를 툭 치며
"어 ! 저 사람 아무개 아냐?"하면
"응-? 응-!"
하고 얼버무렸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분명히 옆 친구는 그 사람을 보았는데 나는 못 보았다. 같은 피사체에 둘이서 같이 시선을 두고 있었는데 누구는 그 물체를 보고 누구는 못 보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본다고 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냄새, 맛, 소리, 촉각, 의식 모두가 마찬가지다. 오직 마음으로만 볼 수 있고, 냄새를 맛을 수 있고, 맛을 알 수 있으며, 소리를 듣고, 피부로 느끼며, 생각할 수 있다. 마음을 떠난 6감은 그 작용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 心>을 아주 중요시한다. 아니 불교의 전부다. 불교는 마음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끝나는 종교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다. 일체유심(一切唯心)이며, 심외무불(心外無佛)이다.
2.
마음은 일반적으로 육체나 물질의 상대적인 말로서 정신, 의지, 또는 이념 등의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마음은 정신에 비하여 주관적이다. 나<我>다.
부처님께서 처음 이 세상에 나오셔서 하신 말씀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 혹자는 그 뜻을 알지 못하여 부처님이 지나치게 독선적이라고 오해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뜻은 그렇지 않다.
유학에서 중용이라는 말이 있다. 중용은 유극(有極)한 중용이다. 즉 일정한 카테고리 안에서 존재하는 중심이다. 그러나 불교의 중심-마음을 가운데에 둠-은 무극(無極)의 중심이다. 그렇다면 그 중심은 어디일까? 이는 곧 각자의 자기 마음이 중심임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우주의 중심은 내 마음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천상천하에서 가장 존귀하지 않은가?
내 마음이 곧 부처요. 내 마음 밖에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
성리학에서, 특히 주자는 마음을 성(性)과 정(情)으로 구분하고 성은 천리(天理)이며, 정은 인욕(人慾)이라 하였다. 그래서 성은 하늘이 부여하였고<천명지위성, 天命之謂性>, 정은 사람이 태어날 때 후천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스며든다고 하였다. 그래서 성은 취하고 정은 버려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다 후에 성과 정은 따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정 속에도 선이 있고 악이 있다고 보고 정 속의 선은 취하고 악은 버려야 한다고 인식하게 된다.
성리학의 대성자인 주자는 유년시절 10여 년 간은 불교 공부를 하였다. 그가 후에 성리학의 이론을 개편하면서 불교의 선(禪)이론을 유학해석의 기본으로 삼았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도교의 교리가 선불이론에 가깝기 때문 이였다. 그래서 주자의 성리학은 불교의 근본이념에 기초하고 있으며, 성리학의 이해는 복잡한 불교를 단순화하여 실천 불교로 정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본다.
3.
신앙은 생활 속에서 실천적으로 존재하여야 한다. 우리 불교가 너무 난해하고 현실과 먼 듯한 느낌을 갖는 문제가 있다. 신앙이 영혼을 구제한다고는 하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아니한다면 한낮 공염불이 될 수 있다. 불교의 근본적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처님 앞에서 절이나 몇 번하고, 금강경을 왼다고 하여 진정한 불제자라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함이 크다.
우리의 마음은 불심(佛心)과 인심(人心)으로 나눌 수 있다. 불심은 깨달은 자의 마음으로 청(淸), 정(淨), 적연(寂然)하여 맑고 깨끗하고 고요하며 움직임이 없는 경지를 이른다. 이 깨달음의 경지는 선(善)도 악(惡)도 동(動)도 부동(不動)도 없다. 즉 무(無)의 세계이다. 이때의 무는 없음이 아니고 ‘있음이며 없음’이다. 즉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무를 무라고 한다면 그 무는 이미 존재함을 뜻한다. 그래서 무는 유이다.
중국의 선사 유식(唯識)과 성철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설파하지 아니하였던가? 이 뜻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기 전에는 산이 산 이였고, 물은 그대로 물 이였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산과 물은 한낮 환상이며 허상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즉 무<無 : 空>의 세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러나 산문(山門)을 나와 다시 보니 역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 이였다. 즉 무<공>의 세계에서 색(色 : 現實)의 세계로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이 공의 세계와 색의 세계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영혼이 아니고, 곧 내 마음이다. 공에 이르는 것은 불심이며, 색에 머무는 것은 중생심이다. 이 모두가 마음의 작용이다. 사물의 존재와 이치는 체(體)인 마음을 근본으로 하여 나타나는 상(象, 불교에서는 相으로 표현함)에 불과하다.
불심에 비하여 중생심은 감각적 욕망이 강하고 희 ․ 노 ․ 애 ․ 락이 있어 감정에 치우치기 쉽다.
우리가 불제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다 함은 중생심(衆生心)속에 내재되어 있는 감각적 욕망을 최소화하고 불심으로 접근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부처님의 마음속으로 들기 위해서는 어떠한 실천강령(實踐綱領)이 필요한가?
그것은 불탐(不貪), 불진(不瞋), 불치(不痴)와 육바라밀을 실천하고, 베푸는 마음을 키워야 한다. 늘 탐하지 아니하며, 미워하고 시기하고 성내지 아니하며,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는 복을 비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을 닦는데 있다. 기도는 어떠한 자세를 취하여도 좋다. 호흡을 가다듬고(궁극에는 호흡을 멈추는 상태에까지 다다라야 함), 마음을 청(淸), 정(淨), 적연(寂然)하게 다스려야 한다. 이러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따라야 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성은 때 묻지 아니하고 깨끗한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이는 곧 깨달음이다. 태어날 때 어쩔 수 없이 묻어 나온 때<육체적 욕망>을 깨끗이 벗겨내면 본래의 순순한 마음, 즉 불심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해(苦海)를 벗어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생활 속에서 소리 없이 탐・진・치를 버리고 자비로운 마음을 길러야한다.
무소유(無所有)
우리들은 필요에 의하여 소유하게 되지만, 때로는 그 소유로 인해서 적잖게 마음을 쓰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가진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필요에 의하여 가졌던 것이 오히려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 만큼 많이 얽매여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 글은 법정스님의 <무소유>(1976 초판)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없어서 고생하는 사람도 있지만, 많아서 고생하는 사람도 흔히 볼 수 있다.
적게도 많게도 아닌 적당한 소유가 곧 편안한 삶이 아닐까?
적당한 가짐이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만족하는 수준으로 보면 어떨까?
무소유란 적당한 소유이며, 중도(中道)의 실행이다.
중도는 곧 정도(正道)이다.
부처님 오신 날에 부처님을 생각하며
무명(無明)에서 번뇌에 휩싸여 생사윤회의 고뇌에 시달리는 우리 중생을 광명(光明)으로 인도하시어 생명이 있는 모든 중생이 한 결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사바세계(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오신 부처님을 기리면서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부다(Buddha)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우주의 진리[眞如]는 그 분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이미 존재하는 진리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달[眞理, 眞如]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어둠속에서 헤맬 때 「달은 저기에 있노라.」하고 손가락으로 진리를 깨달을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의 손가락만 바라보고 달을 볼 줄 모르는 어리석음에 싸여있어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딱한 처지입니다.
불기 2550년 4월 8일(음력), 부처님 오신 날을 생각하며 광명을 찾는 길을 함께 생각해 봅시다.
우리 중생이 주변의 사물을 본다거나 생각할 때는 의식(意識, 의식 중에서 아뢰야식)속에 있는 형상(形象)을 인식(알아차림)하는 것이지 사물의 존재가 우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기차를 타고 차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내 곁을 스쳐간 옛 여인을 생각하였다면 차창 밖으로 지나간 풍경을 분명 눈으로 보았는데도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에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사물을 보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지 눈이 아님을 확신시켜 주는 결과입니다. 눈은 다만 감각기관(도구)에 불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5근(根)(눈, 코, 귀, 혀, 몸)이 있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5근이라는 감각기관을 이용하데 아뢰야식에 이미 식의 종자가 담겨있지 않으면 의식작용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식상(識上)의 형상(形象)을 인식할 때는 ①객관적으로서의 식상의 형상[相分]과 ②주관으로서의 식, 즉 상분을 인식하는 주관적 작용[見分]이 있습니다. 상분(相分)은 외부대상, 즉 법(法)(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그 현상)이며, 견분(見分)은 내부, 즉 아(我)[나]입니다.
우리 중생이 고민에 휩싸이고 공포에 떨며, 불행한 것은 두 가지의 요소, 즉 법(法)과 아(我)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이를 아집(我執), 법집(法執)이라 합니다. 아집과 법집은 탐(貪), 진(瞋), 치(痴)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욕심이 과해지고, 분노와 복수심이 일며, 어리석은 언동을 하게 됩니다. 이는 결국 번뇌를 일으켜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다.
아집으로 인하여 생기는 네 가지 번뇌가 있으니
첫째, 아치(我癡)의 번뇌입니다. 이는 나에 대한 무지, 집착에서 비롯되며 아집은 번뇌장(煩惱障)을 일으키고, 법에 대한 집착, 즉 법집은 소지장(所知障)을 일으켜 우리를 육도 윤회하게 만듭니다.
두 번째는 아견(我見)의 번뇌입니다. 이는 나라는 존재는 인연(因緣)에 의하여 잠시 존재함에 불과한데도 마치 나는 영원하며, 내가 제일이고, 내가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마음과 이에 집착하는 사견(邪見)입니다. 모두가 이기심입니다.
세 번째는 아만(我慢)의 번뇌입니다. 하잘 것 없는 나를 밖으로 들어내고 높이면서 남을 멸시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행동은 주위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결국 자기 파멸에 이를 것입니다.
네 번째는 아애(我愛)의 번뇌입니다. 마음 속 깊이 집착한 자아에 대하여 참으로 소중하다고 애착하는 정신입니다. 무명으로 말미암아 인연법으로 설정된 일시적인 가아(假我)를 고정적인 것으로 탐심과 애착심을 야기하는 마음입니다.
이 네 가지 번뇌는 결국 자신을 상일주재자(常一主宰者)로 착각하여 잘난 체하고 남을 업신여기며, 히쭉거리는 언행에서 비롯되니 감히 삼가야할 바입니다. 어리석은 번뇌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온과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 수양이 필요합니다.
먼저 과한 욕심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겸손하며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자기 고집만 피울 것이 아니고 자기만이 최고며 자장 잘났다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벗어나 나와 남의 입장을 함께 생각하면서 양보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다음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정진하는 자세가 요구되며, 무리지어 소인배 행동을 삼가고 무리와 함께하되 떼를 만들어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과 보살과 깨달은 자를 구분하여 설법을 하셨으니, 중생은 중생이 지켜야 할 도리가 있고, 보살은 보살도가 있다. 우리 중생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깊이 깨달아 욕심을 버리면서 어리석은 언행으로 남을 괴롭히고 꼴불견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욕심 없이 누가 보아도 반듯한 사람, 겸손한 사람, 교양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면 결국은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모든 사람으로부터 우러러 존경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이 가질 수 있는 행복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 옷깃을 여미고 마음을 챙깁시다. 나무 시아본사 사생자부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다
평소 호흡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도 외부의 강압적 작용으로 호흡이 부자연스러울 때는 죽음을 연상하게 된다. 그만큼 호흡이 중요하다. 호흡이 고르지 못하면 마음이 산만하게 된다. 또 갑작스럽게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호흡에 지장을 받아 생명을 위협받기도 한다. 호흡과 생명은 불일불이(不一不二)이다.
이 호흡을 통하여 마음을 다스려 보자.
먼저 마음이 심히 산만하거나 집중이 안 될 때 반가부좌 자세를 취하고 허리를 곧게 편 다음, 반쯤 숨을 들이쉬고 숨을 멈춘다. 참는 데까지 참는다.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비로소 숨을 쉰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복부로 큰 호흡이 된다.
이 때부터 온 마음을 호흡에 집중한다. 조용히 숨을 들이 쉬면서
‘숨을 들이 쉰다.’ 천천히 내 쉬면서
‘숨을 내 쉰다.’고 마음으로 의식하면서 단전호흡을 한다.
단전은 배꼽 밑 5cm부근을 말하며 단전호흡이란 숨을 깊이 들이쉬어 단전에 모은 다음 잠시 머물렀다 다시 내 쉬는 호흡을 말한다.
이와 같이 숨을 들이쉬고, 내 쉬는 동작을 마음속으로 느끼면서 차분히 반복한다. 그리하면 머리가 맑아지고 온 몸이 뜨거워짐을 느낄 것이다.
모든 의식 작용을 참거나, 일부러 일으키거나, 버리려고 마음 쓸 필요는 없다. 다만 모든 감각기관(눈・코・귀・혀・피부: 5감)의 인식작용을 중지하고 오르지 호흡에 마음집중(mindfulness)하다가 다른 생각이 일면 자연스레 그 생각을 쫓는다. 예를 들면 명상 중에 허리가 아프다면 ‘허리가 아프다.’하고 느끼면서 그 곳에 마음을 둔다. 마음은 늘 흘러 다니기 마련이다. 흐르는 마음을 의도적으로 고정시키려 하지 말고 흐르는 대로 쫓으며 마음을 집중하여 알아차린다.
마음이 집중된 다음에는 하나의 명제를 가지고 집중 관찰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데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등 등
이러한 훈련을 하면 마음이 맑아지고 겸손해져서 경솔함을 고칠 수 있다.
바 람[風]
조용한 호수위로
바람이 건듯 부니
물결이 이는구나.
바람이 가고
다시 조용해지니
물결이 자는구나.
이 시에서 호수는 마음의 본바탕[本性]이고,
바람은 집착심과 분별심이며,
물결은 번뇌를 비유한 말이다.
오 감(5感)
오감(5感)이 주는 쾌락, 욕망(慾望)!
욕망은 왜 나를 끌고 갈까.
욕망의 속박에서 벗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보건만,
끝내 나를 찾지 못하고,
다시 속박된다.
저기만 가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고,
허겁지겁 갔건만,
허탈할 뿐이다.
다시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건만,
외로움이 엄습한다.
욕망은 끝없는 것,
욕망도 버리고, 또 나도 버린다면
그 곳이 곧 극락(極樂)이 아닐까?
마음으로 쓴 연하장
연말연시가 다 지나갔다.
연말이라고 해서, 또 연시라고 해서 세상의 모습이나 현상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우리 인간이 지닌 습성에 의하여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지내곤 한다.
이 때가 되면 가까운 어른이나 친지를 찾아 절을 올리고 안부를 여쭙는다. 그러면서 덕담을 주고받는 세시풍습이 언제부터 인가 아름답게 전해지고 있다.
이를 세배라 하는데, 세배는 정월 보름까지 가능하나 이 기간 내에 부득이 세배를 못 올릴 입장이라면 서신으로 대신하였다.
부득이한 경우에 제한 적으로 사용되던 서신, 연하장이 최근에는 보편화 되었다.
자주 만나는 사람에게서 연하장을 받고 보면 다소 씁쓸한 느낌이 든다. 그래도 안 받는 것 보다는 낫다. 다량으로 인쇄된 인사말에서 정을 찾기는 어려우나, 다행히 이름 석자만은 자필인 듯 하여 반가운 마음에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도 아니다.
요즘은 어떤가!
인터넷,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인사를 대신한다. 매우 기계적이다. 사람의 숨결이 배어있지 않고 보낸 사람의 체취가 나지 않는다.
금년에는 아주 오랜 만에 친히 쓴 연하장 서너 통을 받았다. 인쇄된 것은 힐끗 보고 버리기 일쑨데 친필연하장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거기에는 보내준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서려있고, 진심으로 나를 생각하며 한자 한자 써 내려간 그 사람의 손끝에 배어있는 사랑이 내 가슴을 찌~o 하게 저민다.
읽고 또 보았다. 이제는 아련히 잊혀진 줄 알았는데 그 연하장을 받는 순간 아름다운 미소가 내 눈 앞에 크게 다가선다.
‘나도 그렇게 해야지’하면서도 실행하지 못한 내가 왼지 작아 보인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곧 자기완성이다
「삶을 즐거워하는 것이 미혹이 아닐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어려서 집을 잃고 돌아갈 줄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미녀 여희는 중국 '애'라는 곳의 변방지역의 딸 이였다. 그녀를 진(晋)나라로 데려갈 때 너무 울어서 눈물로 옷깃이 흠뻑 젖었다. 그러나 여희는 궁궐에서 왕과 아름다운 침실에서 잠자리를 같이하고 맛있는 고기를 먹게 되자 자신이 집을 떠날 때 울던 일을 후회하였다.
죽은 사람들도 전에 자기들이 삶에 집착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까?」
- 이글은 장자(莊子) 제2장 26에 나오는 내용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는다. 죽을 때 얼마나 슬플까? 얼마나 아플까? 정든 가족과 어떻게 헤어지나? 죽은 후에 나는 어디에서 어떻게 존재할까? 혹시 지옥에라도 가면 어쩌나? 등등 생각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답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희는 산골에서 낳아 그곳에서 자랐다. 세상 밖 구경을 몰랐던 그녀가 아름다운 미모로 왕에게 발탁되어 본의 아니게 정든 가족과 친구, 집과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녀는 고향을 떠나면서 '앞으로 더 할 수 없는 고통과 외로움, 심지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선입견과 편견으로 매우 초조하고 불안하여 한 없이 울었다.
그러나 막상 떠나 온 곳의 생활이 기대보다 좋으므로 고향을 떠나올 때 울었던 일이 후회스럽고 어리석었음을 알고는 몹시 부끄러웠다.
혹 우리의 죽음도 그런 것이 아닐까?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하지만 죽음 후의 세계에 가보니 이곳보다 더 편안하고 안락하다면 지금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이 후회스럽고 어리석으며,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하기 보다는 조용히 명복을 비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장자(莊子, 기원전369~기원전286)는 이 글에서 '도는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의식세계이다'하는 뜻을 전달하고자 했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이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고, 죽음도 또한 그렇다. 우리가 마음을 우주만큼 크게 개방한다면 삶과 죽음이 한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으므로 삶과 죽음이 구분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을 우주만큼 크게 연다는 것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현상[萬法]에 대하여 하나하나 꼬치꼬치 따지지 말고 분별(分別)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분별하지 않는 마음은 만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因是] 비우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空]이 곧 자기완성(自己完成)이다.
불기2553년을 맞이하여
지금부터 2633년 전에 히말라야 산기슭에 있는 카필라 성의 외곽 룸비니 동산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 날이 4월 8일이다.
아이의 아버지 숫도다나 왕은 아들이 모든 뜻을 소원대로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싯다르타(Siddhartha)라는 이름을 주었다. 싯다르타는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고, 45년 동안 인도 갠지스강의 동쪽 하구에서부터 서쪽 상류지역까지 손수 답지하며 많은 법을 설하셨다.
그는 80세 되는 해인 기원전 544년에 열반에 드셨다.
하루는 어느 스님께서 대중 법회에 나가셨는데, 대중 속에서 한 사람이
"스님, 불교는 너무 어려워요." 하소연을 한다.
스님께서는
"보살님, 불교 공부를 얼마나 해 보셨습니까?"하고 물었다.
"공부는 안 해봤는데요."보살이 대답한다.
"공부를 안 해보고 쉬운지 어려운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하니 보살은 아무 말도 못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마곡사의 큰 스님을 찾아왔다.
"스님, 불교가 무엇입니까?"
약간 떫은 기분으로 묻는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긴 큰 스님께서
"불교는 선하게 살자는 것입니다."하신다.
"아니 그래 누가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누구나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요. 불교가 그런 것이란 말입니까?"
이 말을 듣고 있던 큰 스님이
"보살님은 연세가 어떻게 되셨습니까?"
"70입니다."
"그러시다면, 70세월을 살아오시면서 선을 얼마나 착실하게 실행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노 보살은 말없이 한 참을 있다가 슬며시 일어나 큰 스님에게 오체투지로 3배를 올리면서
"스님, 제가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앞으로 남은 생은 오로지 선을 실행하며 살겠습니다."하고는 촘촘히 자리를 떴다.
열반경에도 있고 법구경에도 있는 게(偈)가 있다.
온갖 선 다 실천하고
모든 악을 멀리하며
마음을 스스로 깨끗이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치심이다.
이를 칠불계게송(七佛戒偈誦)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부처님과 그 이전의 부처님 모두가 이와 같이 가르치셨다는 뜻이다.
악을 멀리하고, 선하게 살면서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한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명료한가? 이것이 불교다. 그런데 왜 불교가 어렵다고 하는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가르치심을 주신 두 번째 내용은 욕심을 멀리하고, 네 것 내 것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다.
생명체를 가진 인간은 누구나 먹어야하고, 입어야 하며, 거처해야 할 곳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면 안 된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다 보면,
남을 해롭게 하고,
남의 것을 넘보게 되며,
거짓말을 하고 속이며 아첨하며,
남의 여자(남자)와 관계를 품게 되며,
술이나 담배, 마약 등과 같은 해로운 물질을 가까이 하게 된다.
이 것은 욕심에서 비롯된다. 이 욕심을 제거하지 못하면 곧 범죄이다.
욕심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또, 네 것, 내 것을 분별하다 보면 경쟁심이 생겨 질투하고, 시기하며, 욕하고, 화내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러한 마음은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는 원인이 된다. 곧 번뇌다.
그러므로 분별하는 마음을 삼가야 한다.
결국, 불교는
마음을 활짝 열고 모두를 용서하며, 용서를 구하면서, 다 내주고, 다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닦는 자기 수양이다. 이렇게 하여 마음의 근심과 걱정을 놓고 평온하게 사는 삶이다.
삼성산 아미타불상
관악산 서쪽으로 삼성산이 있다.
높이 481m로 그리 높지 않은 삼성산은 북서로는 서울의 금천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북쪽은 관악구, 그리고 서남쪽은 경기도 안양시와 접하고 있다.
삼성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금천구 방면에서는 금지산(호암산)을 넘어 접근이 가능하고, 관악구 쪽에서는 서울대 입구에서 출발하여 계곡을 따라 삼성산 방면으로 오르면 된다.
안양시에서는 경인교육대 옆으로 나있는 차길을 따라 오를 수 있으며, 안양예술공원을 거쳐 올라와도 된다.
경인교육대에서 오르다 보면 관음보살을 모신 삼막사가 나온다. 삼막사를 동쪽으로 비껴서 찻길을 따라 좀 오르다 보면 길이 심하게 우측으로 굽는데 그 지점에 너른 바위가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거북바위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북쪽을 따라 약 200m쯤 산행을 하다보면 능선길과 일반등산로 중간에 우뚝 서있는 바위 하나를 만난다. 관심 없이 찾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바위 뒤편(북쪽)에서 보면 독수리가 하늘을 날다가 막 양 날개를 접으며, 바위에 앉으면서 하늘을 응시하는 모양이다.
앞(남쪽)면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글자가 새겨져 있고, 연꽃문양이 있다.
그리고 동쪽 측면에는 大淸光緖二十年甲午三月 이라고 내
리글씨가 새겨져 있다. 글자와 연꽃무늬는 모두 음각이다.
바위의 높이는 3.5m이고, 앞면의 폭은 1.7m이며, 두께는 1.2m, 둘레는 5m이다. 나무아미타불 글자 한 자의 크기는 22cm, 24cm이다.
대청광서20년 갑오삼월은 1894년에 해당하는 연도이다. 그 무렵에는 500년 사직이 석가래 채 무너지는 국란의 시기이다. 어느 불자, 또는 스님께서 쓰러져 가는 국가의 운명을 비통해 하면서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굳건하고 모두가 잘 사는 행복한 나라를 세우기 위한 일념으로 이 글자를 한자 한자 새기지 않았을까?
110 여 년 전 우리 조상의 손길과 염원이 담긴 이 아미타불상을 오늘에 사는 우리가 소홀히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산에서
설악산 오색에서 한계령까지 등정기
오색약수터에서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까지는 5.1km이다. 출발 후 2.3km쯤에 이르니 동해 바다위로 아침 해가 붉게 떠오르고 있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바라보는 태양은 거룩하기까지 하다.
우리 민족을 배달만족이라고 한다. 이는 「밝달」즉 밝은 태양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태양은 지구, 금성, 목성, 화성 등 여러 위성을 거느리고 태양계를 이루면서 우주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태양은 절대적이다. 절대자의 권위아래에 여러 위성이 존재한다. 우리 인간은 일찍이 그 이치를 깨닫고 태양에 견주는 천제를 최고 정점으로 하여 위성겪인 임금을 두고 그 아래에 이를 실행하는 여러 신하를 통하여 하늘-임(하늘에 계신 임), 즉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렸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자인 군주라 하여도 백성의 뜻, 즉 하늘의 뜻을 거스르면 바꿔칠 수 있다는 논리를 개발하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 또는 몇몇의 이익에만 급급한 지도자는 하늘의 이름으로 가차 없이 처단하였다.
막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잠시 쉬었다. 여러 번 수해를 입은 오색계곡의 등산로는 인공적으로 가꾸어졌다. 처음 50분 거리의 등산로는 돌계단 식으로 다듬어져 있는데 각도가 60도는 된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만나는 가파른 길을 오르고 나니 숨이 찬다.
해발 1,700여m인 설악산 초고봉의 정상이 600m 남은 지점에 이르렀다. 배가 고프다. 초콜릿과 물로 허기를 채우고 정상을 향해 올랐다. 8부 능선쯤부터는 눈이 보인다. 양지 바른 쪽은 눈이 녹아 있으나 음지, 또는 나무 밑에는 제법 쌓여 있다.
드디어 정상이다. 3시간 35분이 소요되었다. 보통 4시간 30분이 걸린다고 등산 안내 책자는 소개하고 있으니, 다소 빠르게 오른 셈이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설악산은 맑고 시원하게 탁 트였다. 그러나 내설악 쪽은 운무가 쌓여 장관을 이룬다. 나는 대청봉을 여러 번 올랐으나 오늘 같이 맑은 모습으로 나를 반기는 설악산을 본적이 없다. 늘 구름 아니면 안개에 가리고 비, 또는 바람으로 정상에 서 있기가 힘들었는데 오늘은 왼 일인가. 기분이 몹시 상쾌하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다. 중청을 향하여 내려오다 보니 갑자기 운무가 몰려와 다시 모습을 감춘다,
중청대피소의 취사장에서 라면으로 허기를 채우고 다소 여유를 부리다가 또 다시 서북능선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다. 능선 길은 눈이 많이 쌓여 있고 내리막길도 있으므로 아이젠을 착용했다. 중청을 지나 가리봉을 지나고 저 멀리에서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유혹하는 귀때기청봉을 향하여 걷고 또 걸었다. 내리막길이 있는가 하면 다시 오르기도 하고,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걸었다.
산에서는 목적지를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도 없고, 목적지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할 필요도 없다. 그냥 산속에 있다는 그 자체가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며, ‘나는 산 사나이 이다.’고 생각할 때 한 없이 가슴이 뿌듯하다. 산에서는 서두르며 빠르게 걸어서도 안 되고, 자만해서도 안 된다. 특히 자만은 금물이다. 언제나 속세의 탐심(貪心:욕심)과 진심(瞋心: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한다거나, 화내는 마음)을 여의고 느긋한 마음으로 한발 한발 정성을 드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걷는 그 자체가 소중하고 보람이다.
능선을 걷자니 내 외설악이 환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운무에 가려 앞을 가늠하기 힘들 때도 있다. 다행히 눈길은 잘 다져지어서 걷는데 별다른 지장은 없다.
눈길은 계속되고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드디어 귀때기청봉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눈앞에 우뚝 선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약간 한 쪽으로 치우친 듯한 모습으로 늠름하게 서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대장부다. 서북능선은 계속 이어지고 있으나 나는 이곳 한계령 삼거리에서 방향을 바꾸어 한계령을 목적지로 걸음을 옮겼다. 한계령계곡은 지난해 비 피해를 심하게 입어 나를 몹시 귀찮게 했다. 더구나 남향이다 보니 눈이 녹아 지척거리는 비탈길은 많은 주의와 체력을 요구하였다. 이럴 때 한 순간 방심하면 미끄러져 계곡으로 구를 염려가 있을 뿐 아니라 돌너덜이 심하여 넘어지면서 자칫 몸의 일부를 상하기 십상팔구다. 잔득 긴장하고 내리고 오르기를 거듭하면서 지루한 하산 길을 마쳤다. 드디어 목적지인 한계령에 도착했다.
이 번 산행은 휴식 시간을 합하여 모두 9시간이 소요 되었다. 날씨는 바람이 없고 간혹 시기하는 운무를 제외하고는 쾌청하여 산행하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였다. 9시간을 산행하였으나 특별히 피곤하거나 다리가 아프지 않다.
한계령 휴게소에 이르니 이른 봄기운을 받으며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많다. 인제에 있는 「감자네」 집에서 민물매운탕에 소주를 곁들인 늦은 점심을 먹고 이번 산행을 마감했다. 나를 포근하게 맞아준 설악산에게 감사를 표한다.
“설악산아
한울산꾼들의 설악산 등정기
백담사에서 만해를 만나다
내가 큰 산을 갈 때마다 설레는 마음은 오래 전이나 나이가 든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 한산꾼산악회에서는 백담사 - 봉정암 - 소청 - 중청 - 대청을 거쳐 오색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설악산 종주를 계획한 것은 한 달 전이다. 중청대피소를 이미 한 달 전에 예약하였다.
나는 일박하는데 필요한 공동장비인 코펠과 버너를 챙기고 개인 준비물인 핫반, 라면, 김치, 김 등 주식과 과자, 과일, 초콜릿, 물 등 행동 식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하산 후에 갈아입을 내복 등 여유복과 급격한 기온변화와 비에 대비하여 쟈켙, 판쵸우의를 준비하였다. 그랬더니 70ℓ 대형 배낭이 제법 빵빵하다.
9월 27일 금요일 밤 11시50분에 구청 앞에 오니 벌써 모든 대원이 와있었다. 약속대로 24시에 정확하게 출발하였다. 매번 그랬듯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번에도 양주를 한잔씩 마시고 잠을 청했다. 한참을 자고 나니 내설악 휴게소이다. 이때가 28일 오전 3시 반이다. 이곳에서 황태해장국으로 이른 아침을 때웠다. 구수한 황태 맛이 일품이다. 한 그릇 가득 비우고 마음도 가다듬고, 배설물도 정리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이동하여 용대리 삼거리를 거쳐 백담계곡 매포소에 도착하였다. 선잠을 잔 탓인지 버스에서 내리자 까실하게 한기가 느껴온다. 하늘을 바라보니 흰 조각구름이 제멋대로 흩어져 둥실 떠있고 그 사이로 비추는 팔월 스무 하루의 달빛은 우리들이 준비한 랜턴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서울 하늘에서는 별 볼일이 없어 무관심했던 별이 청정한 강원도 하늘에서는 주먹만한 것이 유난히도 밝게 껌뻑인다.
드디어 첫발을 내디뎠다. 오전 4시 30분이다. 이번 산행은 오후 5시까지 중청대피소에 도착하여 1박을 하고 다음날 대청봉에서 해맞이를 한 다음 오색으로 내려갈 요량이다. 그래서 시간이 충분하여 여유를 갖고 쉬엄쉬엄 산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등산안내도에는 백담계곡매표소에서 백담사까지 7㎞이며 2시간 반이 소요되는 것으로 소개되어있다. 길은 아스팔트길이다.
우리 일행은 요요한 달빛을 받으며 말없이 걸었다. 대원들의 굿은 표정에서 당찬 각오를 읽을 수 있다. 계곡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낭랑하고 달빛을 받은 맑은 담(못)의 물은 선녀가 나신으로 목욕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수교, 강교, 셔틀버스 종점을 지나 백담사에 이르렀다. 아침 6시다. 이미 날은 밝아 계곡 양편의 숲이 가을빛이 역력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2시간 반 길을 1시간 반에 걸었다. 매우 빠른 산행이다. 백담사에 들렀다. 백담사는 봉정 암에서부터 백담사에 이르기까지 담(못)이 1백 개가 있다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백담사의 모습이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초라하던 산사가 퍽 여유 있게 신장되었다.
전두환 대통령께서 머물렀던 요사채도 구경하고 만해 한용운 선생의 흉상도 만났다. 한용운 선생은 충남 홍성군 갈산에서 출생하시어 승려신분으로 대한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셨으며, ‘님의 침묵’으로 더욱 잘 알려지신 분이다. 개인적으로는 고향어르신으로 늘 마음에 품어오던 분이신 데 이곳에서 뵈니 더욱 감회가 깊다.
30분을 머물고 출발하였다. 전 대통령이 머무르시던 요사 채에 걸려있는 본래무물(本來無物)이란 글귀가 마음을 붙잡는다.
막 백담사를 벗어나려 하는데 비구니 스님 두 분과 친구인 듯한 20대 후반의 여인이 앞에서 부지런히 걷는다.
“걸음이 참 빠르십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하고 말을 건네니
“봉정 암까지 갑니다.”
해맑은 목소리다.
“예서 그 곳까지는 얼마나 걸리는지요?”
하고 되물으니
“저도 초행길이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한다.
“아, 그러세요, 이곳 소속이 아신가가 보군요.”
하고 대꾸하니
“예, ”하면서
“저희는 놀면서 천천히 가겠습니다. 앞을 서시지요.”
하면서 비켜선다.
살며시 미소 짓는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때만은 그 비구니의 모습이 ‘인생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인간이 번뇌에서 벗어나 적연한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수도승이 아니고 소풍 나온 여인네 모습이다. 아마 하안거를 마치고 오랜만에 운수 행을 나선 스님이신가 보다.
그 잔잔한 미소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되돌아보니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요염한 단풍에 끌리어
백담사에서 수렴동까지는 평범한 길이다. 백담사가 해발 400m이고 갈림길이 600m이다. 계곡물을 벗 삼아 바위 기슭 길을 걷는다 하면 소나무 숲이 울울한 곳을 번갈아 걷게 된다.
갈림길을 지나 너른 바위에 않아 휴식을 취하며 간식을 먹었다. 맑은 계곡물이 방문자에게는 곁눈도 주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조잘거리며 흐른다. 손을 담그니 제법 시리다.
수렴동대피소에 도착하니 8시 5분이다. 이곳은 해발 600m이며, 4시간 20분이 소요되는 거리이다. 우리는 휴식시간을 포함하여 3시간 반 만에 도착하였다. 대원 모두는 조금도 지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면서 무심히 걷기를 계속하였다.
수렴동대피소는 가야동계곡과 용아장성릉, 그리고 구곡담 계곡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우리는 계획대로 구곡담 계곡으로 들어섰다.
수렴동 계곡까지는 아직 단풍이 이르나, 여기서부터는 한창이다. 특히 용아장성릉의 바위에 붙어있는 붉다 못해 새빨간 자주 빛 단풍은 이 둔한 필체로는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다. 그 요염하고 아름다움을 감히 전하지 못함을 용서를 빌 뿐이다. 또, 건너편 백운동계곡에 있는 단풍은 노란 떡갈나무 사이사이에 있어 더욱 붉다.
제법 가파르고 험한 산길을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여인의 유혹에 혹하여 힘든 줄 모르고 오를 수 있었다.
특히, 잘 다듬은 돌조각과 같은 수직 계곡을 마치 비단결에 살포시 드러난 여체의 곡선같이 흐르는 만수폭, 용수폭, 용아폭, 쌍룡폭포는 그야말로 가관이다.
하나 아쉬움이 있다면 안내 표지판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들은 등산지도를 갖고 있어 불편함이 없으나 그렇지 못한 등산객은 알 길이 없어 답답할 것이다. 쌍룡폭포를 지나면 제법 가파르다. 이 가파르고 위험스런 길은 봉정암까지 계속된다.
모든 대원은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다.
자식 위해 이 한 몸을
드디어 봉정암에 다 달았다. 이 암자는 해발 1,300m에 있다. 암자라는 이름과는 달리 그 규모가 크다.
특히, 많은 신도가 함께 머무를 수 있도록 요사채가 잘 갖추어져 있다. 산을 오르면서 느낀 점이지만 이곳에 이르고 보니 더욱 믿기지 않는다. 나이 드신 중년이상의 부인들이 수 백 명이 와있다. 그토록 힘든 산길을 어떻게 왔으며, 또 그토록 힘들여서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까지 오르면서 많은 오르내리는 여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한 할머니에게
“올해 몇이십니까?”
하고 물으니,
“칠 하나에 칠입니다.”
선 답을 한다.
“예?”
하고 얼른 알아듣지 못하니까
“77이예요.”
하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던 길을 재촉한다. 퍽 여유롭다.
또, 대청봉에서도 소청봉에서도 여인들을 만나면 어디까지 가십니까? 하고 물으면 영락없이 봉정암에 간다고 한다. 도대체 봉정암이 어떠한 곳이기에 그리하며,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는다.
어렴풋이 알아보니 대학 수학능력 시험 때문이란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기 한 몸을 가벼이 여기는 우리 여인들의 모정이 거룩하다.
그러나 어디 그뿐이겠는가?
봉정암 절 뜰에 마련된 긴 의자에 않아 막 점심을 먹으려하는데 앞산에 구름이 걸리는가 하더니 갑자기 비가 내린다. 배낭에서 꺼낸 도시락통과 김치 통, 수저 등을 주섬주섬 챙겨들고 비 피할 곳을 찾다가 마땅한 곳이 없어 요사채 문간방 처마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 김밥을 먹는데 건너 산에 걸려있는 구름사이로 간간이 보였다 사라지는 산 풍경이 제법이다.
이 곳에서 40분간 머무르다 11시 반에 출발하였다. 우리는 미리 준비한 오버트러우져와 판초우의를 입고 가파른 길을 계속 올랐다. 오르다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쉬며 봉정암을 되돌아보니 암자 뒤편에 높게 솟은 기암절벽이 일품이다. 어찌 보면 스님 모습이고, 어찌 보면 장군 같기도 하다. 점심을 먹은 직후이며 우의를 갖추고 가파른 산실을 오르니 숨이 차고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는다.
12시 10분에 소청봉대피소에 도착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데 빗줄기가 제법 굵다. 출발하려 하니 비가 머쓱해 진다.
여기부터는 관목지대이다. 그래서 단풍나무는 없고, 나뭇잎의 색깔도 칙칙하다.
다시 가파른 길을 오른다. 12시 10분 소청봉을 지나 오후 1시에 중청대피소에 이르렀다. 비가 내리다 말다 한다.
당초 우리들의 계획은 이곳에 오후 4시나 5시에 도착하여 1박 하려하였으나 1시에 도착하고 보니 생각이 달랐다.
등정 계획을 변경하다.
우리는 당초계획대로 이곳에서 자고 내일 내려갈 것인가, 아니면 오늘 오색까지 갈 것인가를 놓고 상의했다. 그 결과 소수의 다른 의견도 있었으나 대부분 이대로 오색까지 가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죽어도 go’했다.
대원들이 다소 무거워한다. 대청봉을 향해 출발하였다.
산행을 하다보면 한고비, 한고비 힘들 때가 있다. 이때는 발하나 움직이기 힘들고 자칫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기 쉽다. 퍽 조심스러운 때이다. 이럴 때는 주위에 관심을 두지 말고 오직 정신을 집중하여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힘써야 한다. 상체의 중심은 늘 발끝에 두데 오를 때는 약간 앞에 두고, 내려올 때는 다소 뒤에 둔다는 마음으로 걸어야 한다.
나는 오를 때 힘이 부치면 곧잘 이런 생각을 한다.
‘마음도 무거워 버리고, 무심(無心)으로 오른다.’
대청봉에 오르니(15분소요) 흐린 날씨지만 바람이 없고 조용하다. 기념으로 사진 한방을 박고 1시 반에 하산을 시작하였다.
매우 지루하고 힘든 하산길이다. 전과는 달리 폭우에 씻기고 패여 앙상한 돌을 밟으면서 내려오다 보니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조금만 방심해도 미끄러져 사고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주변은 붉게 물든 단풍이 마치 갓 피어난 소녀의 자태와 같이 고와 지루함을 잊을 수 있다.
지친 몸에 길이 험하여 투덜거리면서 오색에 도착하니 오후 4시 37분이다.
오늘 하루 12시간의 산행을 마치는 순간이다. 대원 모두는 축하의 박수를 치며 서로를 격려하였다.
이번 산행의 특징은 휴식 시간을 많이 갖지 아니하고 속보를 한 점이다. 그래서 일정을 변경하였고 짧은 시간에 24㎞의 설악산 종주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동료의 환대에 감사한다.
오색매표소에 도착하니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우리와 함께 근무하던 오영화 전직 계장을 만날 수 있었다. 미리 연락이 되어 이곳까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준비해온 차를 이용하여 주문진에 이르렀다.
설악산 중에서 설악동은 속초시에 속하고 대청봉과 오색은 양양군에 속한다. 속초시 밑에 양양군이 있고 그 밑에 주문진, 강릉이 있다. 주문진은 강릉시 주문진읍이다. 오영화 계장은 사직을 하고 가업을 이어서 주문진읍 주문진 312에서 건어물 직판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주문진 해안도로, 수협해수탕 건너편에 있으며 상호는 해주상회이다.
우리는 수협해수탕에서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씻고, 피로를 풀었다.
상쾌한 기분으로 오영화씨 집에 오니 벌써 생선회에 술상이 준비 되였다. 하산후의 술맛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눈 꿈쩍할 사이에 먹어 치우고 길 건너에 있는 포구에 갔다. 파장한 포구는 쓸쓸했다. 여기에서 대게(큰 게) 4마리를 사서 소주를 곁들여 포식하고 해주상해로 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코 골이 대원 2k와 G, J 등은 거실에서 자고, 평소 잠자리가 조용한 대원은 방에서 편안히 잘 잤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오징어 물회에 물곰(곰치)해장국을 맛있게 먹었다. 곰치해장국은 처음 먹어보는 음식인데 그 깊은 맛이 지금도 입가에서 맴돈다.
오영화 계장이 경영하는 해주상회에서 건어물을 한 꾸러미씩 사서 챙기고, 강릉고속버스터미널에서 서울행 버스로 돌아왔다.
희망은 성취하기 전이 좋고, 성취한 후에는 무미건조 하다고 한다. 그러나 산행은 처음에는 기대와 두려움이 반반이지만 성취한 후의 기분은 한 마디로 째진다.
지리산 백무동에서 대원사 간 산행 기
9월 초 하룻날 밤 11시에 울산꾼산악회 대원 7명이 지리산을 향하여 의기도 당당하게 출발했다.
차는 다음 날 2시 반에 백무동계곡(경상남도 함안군 마천면) 입구에 도착했다. 아침 식사 할 곳을 찾다가 불은 켜 있는데 인기척이 없는 식당을 찾아 문을 두드리니 할머니 두 분이 부스스 모습을 보인다.
“식사 됩니까?”하고 물으니 된다고 하여 모두가 식당에 들렀다.
그 제서야 국거리를 다듬어 해장국을 끊이느라 늙은 손이 바쁘다. 많이 해본 능숙한 솜씨로 만든 다슬기 해장국을 내 놓는다. 뚝배기 보다 장맛이라고 맛이 제법이다. 모두가 맛있게 그릇을 비우고 산행 준비를 한다.
등산화 끈을 단단히 조이는 대원들의 마음이 비장하다. 12시간 예정으로 시작하는 산행이니 기대가 반이고 걱정이 반이다.
나는 물 2L, 호박떡 한 덩어리, 배추김치, 초코렡 3개, 햄(캔) 1개, 컵라면 2개와 하산 후에 갈아입을 옷과 랜턴, 스틱, 그리고 비상시에 사용할 에어파스, 정로환, 반창고를 준비하였으며 덤으로 압박붕대, 로프 10m를 챙겼다.
백무동 계곡 매표소를 통과한 시간이 오전 4시이다. 일기가 좋지 않은 날과 4시 이전에는 이곳 매표소에서 입산을 통제한다. 우리의 산행 코스는 백무동계곡 - 장터목 - 천왕봉 - 중봉 - 치밭목 - 유평리 - 대원사이다.
이 코스를 잡은 것은 지리산 삼성재에서 천왕봉을 거처 중산리로 산행을 한 경험이 있다. 지리산 종주는 삼선재 - 천왕봉 - 대원사 계곡을 해야 완전 종주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구름이 윤 7월 10일의 달을 가려 어둠이 짓게 깔렸다. 등산 대장이 앞에서 길을 밝히고 2개 그룹으로 나누어 출발했다. 나는 이곳 산행이 네 번째이다. 백무동계곡의 산행 길은 특징이 돌이 많다는 것이다. 바위가 아닌 부스러기 돌이라서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그러데 이번에 와보니 국립공원답게 정리가 잘 돼있다. 산돌을 정리하여 보행에 지장이 없도록 하고 산이 물에 씻기는 것도 방지할 수 있다. 우리 관내에 있는 호압사에서 민주산까지의 등산로를 이와 같이 하자고 몇 번 건의 하였으나 이 핑계 저 핑계로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주민들께 미안한 감이 든다.
산행 중에는 물을 자주 마셔야 한다. 산행에서 물은 곧 생명이다. 목이 마르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다. 미리미리 마셔두어야 한다.
하동바위를 지나 참샘에 도착하는 동안 1L의 물을 마셨다. 참샘에서 물을 보충하고 소지봉에서 휴식을 취했다. 휴식 때 마다 과일 한 개씩이라도 먹어야 지침을 방지할 수 있다. 소지봉에 도착하니 5시 20분이다. 날이 훤히 밝았다. 이 곳까지는 길이 가파르고 돌로 이뤄졌으나 다음부터는 육산이다. 비교적 완만한 장터목 대피소까지 2시간을 더 올랐다. 휴식 시간까지 포함하여 모두 3시간 20분이 소요되었다.
장터목 대피소에 이르니 싸늘한 기운이 제법 차갑게 느껴진다. 이곳에서 일박을 한 산사람들은 파카를 입고 있다.
간식을 먹었다. 20분간 휴식을 취하고 천왕봉을 향해 출발했다. 흘린 땀이 갑자기 찬 기운에 식어 한기가 느껴진다.
나는 모자를 착용했다. 산에서 모자는 필수장비이다. 우리 몸은 체온의 70%를 머리를 통하여 발산한다고 한다. 그래서 겨울에는 체온 유지를 위하여 모자를 써야하고, 여름에는 직사광선을 피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모자를 쓰고 초입의 가파른 산길을 힘껏 오르니 온 몸에 땀이 밴다. 몸의 한기도 가시고 다시 정상 컨디션을 찾았다.
우리나라 산의 대부분이 1500m가 넘으면 평지에서 볼 수 없는 이국적 분위기가 펼쳐진다.
장터목 대피소와 천왕봉 사이에는 훼손된 자연을 복원하기 위하여 보호를 받고 있다. 보통 평지에서는 9, 10월에나 볼 수 있는 구절초 꽃이 만발 하였고, 소위 참외풀 꽃이 널려 있어 벌써 가을이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천왕봉이다. 지리산 정산이다. 8시 35분이다. 1915m인 이 봉우리는 우리민족의 정기가 서린 곳이다. 이 곳에 도착하니 한기가 느껴진다. 비상용으로 준비한 등산용 남방샤츠를 꺼내 입었다.
구름이 바람에 날려 흩어지고, 또 멀리서 닥아 오는 모습이 우리 산사람들을 반겨주는 향연 같다. 정상에서 사진촬영을 하면서 20여분 간 휴식을 취하고 다시 ‘대원사’라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을 향하여 발길을 옮긴다. 발길이 다소 무겁다.
1874m인 중봉에 도착하니 9시 30분이다. 천왕봉에서 30 ~ 40분 거리이다. 중봉을 뒤로하고 다시 걸으니 내리막길인가 하면 다시 오르고, 또 내려가는 길이 반복된다. 오솔길 같은 산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잠시 쉬면서 중봉을 뒤 돌아보니 천년을 살고 고사한 주목이 하얗게 속살을 드러내고 서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배가 고파온다. 얼큰한 국물에 시원한 막걸리 생각이 난다. 한 참을 오르고 또 내리다 보니 치밭목 대피소가 앞에 보인다. 반가운 걸음을 재촉하는데 곰이 앞길을 막는다. 다행이 관리사 두 명이 곰을 따르고 있었기에 안심하였다. 그 곰은 올해부터 방사되었는데 등산객이 휴대한 음식(과일, 라면, 고기 등) 때문에 산에서 야생에 적응을 못하고 치밭목 대피소 주의를 배회한다고 한다. 관리사 말에는 이 곰이 적응을 못하여 올 가을에 회수할 계획이라고 한다.
아담하게 능선에 자리한 대피소 마당에는 간단히 취사를 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100m거리에는 아주 시원하고 물맛이 그만인 샘이 있다. 준비한 가스버너와 코펠을 이용하여 라면을 끊여 먹었다. 힘든 산행 후의 얼큰한 라면 맛은 글쎄 필체가 둔한 나로서는 어떻게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주위에서 호시탐탐 우리의 라면을 노리는 곰 놈 때문에 긴장해서 맛이 좀 덜했다. 가져온 떡과 과일을 함께 먹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치밭목 대피소의 의미는 ‘치나물 밭이 있는 고개’라고 한다.
12시 20분에 다시 하산 길에 올랐다. 대원들은 지친 기색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한다. 여기서부터 유평리까지의 등산길은 한마디로 “지루함”이다.
첫째, 숲 속을 걸어야 하니 시야가 좁아 지루하고,
둘째, 잔 돌이 많아 한시도 발에서 시선을 뗄 수 없어 지루하며,
셋째, 별 특이한 볼거리가 없는데 끝도 없이 오르고 내림이 계속되니 지루하다.
그러나 잠시 산마루에서 내려다 본 대원사 계곡 전체의 모습은 거대한 공룡의 꼬리 같이 웅장하고 의연하다. 천왕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의 산세는 요즘 한창 뜨는 영화 「괴물」의 꼬리를 연상하게 한다.
우리 대원 모두는 체력은 문제가 없어 보이나 정신적으로 지루하게 느끼고 있음이 역력하다.
대원사 계곡 등산로의 마지막인 유평리가 나온다. 마을을 보니 반갑다. 여기서부터 대원사까지는 콘크리트로 포장된 4Km 길이다. 도보로 1시간 거리이다. 여기에 도착하니 오후 3시, 그러니 총 11시간 동안 산행을 하였다.
우선 목마름을 달래기 위하여 막걸리를 청했다. 연거푸 3잔을 마시고 나니 정신이 알딸딸하다. 그 동안 대원사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우리 차를 이곳까지 오라하여 차로 이동하였다.
산청 읍내에 들러 어죽국수로 식사를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구청 앞에 9월 2일 오후 9시 30분에 도착하였다. 그러니 총 22시간 30분의 산행을 무사히 마친 것이며, 이 때 마시는 호프 맛은 산사나이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쾌감이다.
겨울 소백산 산행기
소백산은 경상북도 풍기와 충청북도 단양사이에 높게 솟은 산이다. 높이가 1,439m에 면적은 320,5㎢로 1987년 12월에 우리나라에서 18번째로 국립공원이 되었다.
소백산에서 북쪽에는 태백산이 있다. 예로부터 태백산과 소백산은 종속의 관계가 아니라 한 덩어리로 인식해 왔다. 이름에 소자가 붙었다고 해서 얕보아서는 안 된다. 다만 태백산이 과묵하고 후덕하다면, 소백산은 역동적인 맛이 있다.
우리 정서에 맏이는 과묵하고 보수적이며, 가정과 부모를 먼저 생각하는데 비하여 둘째는 활동적이고 비교적 이기적인 면이 있다고 본다.
신라의 三韓統合(삼한통합)에 공이 많은 김춘추(신라 제29대왕, 태종무열왕)는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 문희와 결혼한 후 왕위에 오른다. 문희는 언니로부터 비단치마 하나로 꿈을 산 것이 원인이 되어 문명왕후가 되고 그가 낳은 아들이 문무왕(661~681)이 되었다.
또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할아버지 되는 당 숙종이 고려의 예성강가에 이르러 寶育(보육)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보육에게는 딸이 둘이 있었는데 큰딸을 薦枕(추침)하였으나 그녀가 손님방의 문지방을 넘다가 코피를 흘리는 바람에 둘째딸 辰義(진의)로 교체하였다.
그 날 밤 일로 진의는 작제건을 낳고, 작제건은 용의 딸과 결혼하여 융을 낳았으며, 융은 왕건을 낳아 고려를 창업하였다.
위 두 사례에서 볼 때 큰딸은 우연인지, 아니면 고의인지 행운을 놓치고, 또 동생에게 양보하는데, 둘째딸은 행운을 거머쥔다. 이러한 현상은 맏이는 보수적인데 비하여 둘째는 행동적임을 뜻한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이름만 듣고 소백산이 태백산보다 오르기가 더 쉬울 것이라는 선입견은 갖지 말아야 한다. 작은 고추가 더 매운 법이다.
쓸데없는 얘기 그만두고 본론에 들어가 보자.
우리일행 7명은 2002. 1. 26(토) 22:00에 승용자가용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서울에는 겨울비가 청승맞게 내리고 있었지만 태백산에는 눈이 내리고 그 눈은 다음날 오전까지 계속된다는 일기 예보가 있어 내심 걱정이었다.
영동고속도로를 따라가다 원주에서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풍기에 이르니 새벽 1시30분이다. 차 속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해장국집에서 이른 아침을 먹었다. 풍기 기차역전에 있는「30년 전통의 원조해장국」이라는 밥집 이였는데 애교스런 이름에 비하여 맛은 별로였다.
당초 산행코스를 잡을 때는 희방사에서 시작할 예정 이였으나 눈이 쌓여 미끄러울 것 같아 산행에 익숙하지 못한 대원들을 염려하여 코스를 변경하였다.
「죽령휴게소」에 다다르니 눈이 심하게 내렸다. 걱정이 앞선다. 대원들에게 바람과 눈길, 그리고 미끄러움에 대비하여 철저하게 복장과 장비를 갖추도록 일렀다.
04:30에 출발하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대열을 이탈하지 말도록 당부하고 나는 후미를 맡기로 하였다. 천체관측소가 있는 연화봉에 이르는 길에는 내린 눈이 녹은 후에 다시 얼고, 또다시 눈이 내려 산행이 어려웠다. 대원 한 명이 벌써 다리의 통증을 호소하였다. 그 대원에게 잠시잠시 휴식을 취하게 하면서 선두가 서둘러 나아가 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였다. 산행시간이 자꾸 지연된다. 어둠 속에서 눈은 계속 내리고, 어느 곳에 이르면 바람이 심하고 어려웠다.
제2 연화봉을 800m 앞둔 곳에서 따뜻한 물로 목을 축인 후 출발하였다. 그런데 가다보니 한국통신 송신소가 나타났다. 길을 잘못 들은 것이다. 난감했다. 돌아서 다른 길을 찾는데 어둠에 눈이 쌓여 갈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찬바람이 어찌나 세게 부는지 미간을 때리는 추위로 머리에 통증이 왔다. 온 길을 찾으려 하였으나 바람과 눈으로 흔적이 없어졌다.
순간
“대원을 철수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헤드랜턴 빛이 언덕 아래로 지나가는 것이 보였고 여명에 의지하여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잠시 방심하여 안내판을 잘못 확인한 결과가 이렇게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된 것이다.
다시 길을 찾아 제2 연화봉을 돌아 천체관측소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풍기 해장국집에서 만난 서울 중구청 직원들이 이미 와 있었다. 앞에서 우리에게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한 팀이 이들 이였나 보다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그들은 결국 한 두 명의 대원이 낙오하여 우리보다 처진 후에 다시 소식을 알 수 없었다.
다리에 통증이 있는 대원이 점차 심해져 마사지를 하여 걷게 하였다. 눈이 쌓여 산행은 느려도 비교적 순탄한 길이다. 천체관측소에서 왼쪽 길을 찾아 잠시 걷다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희방사에서 오르는 길과 마주친다.
소백산 모두가 눈으로 덮여있고, 나무에는 온통 눈꽃이 피어 환상적이다.
임을 떠나보낸 여인이 남몰래 숨어 흐느끼며 흘리는 눈물과 같이 가늘게 내리는 눈은 시야를 50~100m 이내로 제한하였으나, 희뿌연 속에 핀 눈꽃으로, 내가 마치 극락에 와있는 착각에 빠지게 하였다.
어느 시인이, 어느 화가가, 누가 감히 이러한 모습을 시로, 그림으로, 글로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 - 참 멋있다.” 그리고는 몸을 날려 저 멀리 솜같이 하얗게, 보드랍게 펼쳐진 언덕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으로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내가 몹시 작게 느껴졌다.
오르고 내리기를 계속하다 인공계단을 한참 오르고 나면 제1 연화봉에 이른다.
여기서부터는 비교적 순탄한 능선길이다. 여전히 시야는 100m를 넘지 못한다.
걷다보면 천동굴에서 올라오는 길과 마주치는 갈림길이 나오고 조금 가다보면 3거리가 나오는데 우리는 오른쪽 길을 택했다. 왼쪽 길은 내려올 때 이용하기로 하였다.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예서부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만들어 놓은 길이다.
나는 대원을 뒤로하고 혼자 앞으로 나아갔다. 하얀 눈안개로 보이지 않는 정상을 향해 거의 뛰다시피 올랐다. 얼음에 가까운 알갱이 눈이 초속 20~30m(느낌이지 측정한 것은 아님)의 강풍을 타고 날아와 사정없이 온 몸을 때렸다. 견디기 힘든 강풍과 눈보라.............,
정상에 올랐다. 바람은 더욱 심했다. 소백산의 정상 비로봉이 나를 심하게 대한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올라온 대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서둘러 하산하였다. 방한복과 장비를 준비한 덕에 추위와 바람을 피할 수는 있었으나 자칫 바람에 몸이 날릴까봐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엉엉 울면서 내려오는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안쓰러웠다.
죽령휴게소에서 비로봉까지 우리가 오른 코스는 산행안내 지도에는 250분이 소요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우리는 340분이 걸렸다. 정상보다 90분이 더 소요되었다. 눈길에 힘들었고, 어려움을 겪는 대원이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하였다.
내려오다 보면 주목군락 보호구역이 있다. 이 구역은 천연기념물 제 244호로 지정된 곳이다. 주목은 우리나라와 중국 동북부, 일본이 원산지이며, 다 자라면 10~18m까지 된다.
부근에 있는 대피소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컵라면으로 요기를 하면서 준비해간 양주로 반주를 곁들였다.
우리는 당초계획대로 천동계곡을 통하여 천동리주차장에 이르렀다. 이때가 오후 1시 30분이었다. 휴식시간을 합하여 총 9시간의 산행을 무사히 마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웠다. 무사 산행을 신에게 감사드린다.
소황병산 설산 산행 기
다섯 시 삼십분이다. 오늘 산행은 진부에서 노인봉(해발 1,322m)을 거쳐, 소황병산(1,407m)까지가 목표이다. 여기에서 삼양목장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계획하였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데 사방은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고, 하늘에는 주먹만한 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우리는 어느 정도 러셀(russel)이 되어있을 것으로 판단되어 스패츠는 착용하지 아니하고, 아이젠만을 착용하였다. 오늘 일행은 나를 비롯하여 여덟 명이다.
랜턴으로 비쳐보니 사방이 눈이다. 스틱을 짚어보니 산행 길 옆 평지에 30cm정도 쌓여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몸이 풀리지 않은 첫 발길은 무겁다. 시흥 홈에버 앞에서 새벽 한시에 출발한 봉고차는 아무 걸리는 것 없이 세시 경에 동부휴게소에 도착하였다. 진부의 산행초입에 있는 휴게소에서는 식사가 안 된다는 정보에 의하여 여기에서 명태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하였다. 산행길 입구에 도착하니 네 시 반이다. 산행시간이 이르다고 판단하여 다섯 시 반 산행을 목표로 좀 자기로 했다.
노인봉에 이르는 길은 비교적 순탄하다. 눈길인데도 많은 사람이 이미 다녔기에 눈은 잘 다져졌다. 좀 오르다 보면 내리막이 있는데 여기가 삼거리이다. 전번에도 여기에서 주춤거린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착오를 일으켰다. 왼편 내리막길로 접어든 후 이 300m쯤 내려가다 다시 왼편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평길 인 듯 오르는 듯 하면서 이어지는 산행은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스틱으로 눈 깊이를 재어보니 평균 30cm정도 쌓여있다.
건너편 산허리에서 여명이 비친다. 시계를 보니 일곱 시 이다. 이제까지는 랜턴으로만 바라보던 눈이 여명을 받아 온 천지가 하얗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이 확 열리는 느낌이다.
노인봉 삼거리이다. 여기에서 노인봉 정상까지는 200m쯤 가면 되고, 동쪽으로는 소금강에 닿을 수 있는 삼거리이다. 러셀은 여기까지만 되어있다. 조금 내려서니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아담한 무인대피소가 우리를 반긴다. 불도 없고, 현관문은 열린 그대로여서 을씨년스럽다. 전에 왔을 때는 나지막한 초가에 싸리울타리 이였으며, 싸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차향이 가득한 찻 집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인간의 자취는 느낄 수 없고, 차가운 현대식 건물이 냉랭하게 서있을 뿐이다. 적이 실망스럽다.
랜턴을 끄고 챙겨 넣으면서 스패츠를 착용하였다. 동쪽, 소금강쪽으로 두어 명이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우리는 그 곳으로 들어섰다. 안내판에는 「소금강 분소」라고 쓰여 있다. 좀 가다가 일행은 의심을 제기하였다. 되돌아와서 지도를 보며 방향을 찾는데 일행 중 한 명이 오른 쪽으로 들어선다. 발길이 보이지 않는 길이였으나. 경험에 의하여 좀 가다가 손짓을 한다. 그 길이 맞다하여 모두는 용감하게 휀스를 뛰어넘어 그 쪽으로 향했다.
한 두 팀 정도가 지나갔을 것으로 보이는 눈길이다. 거의 새로 러셀하는 거나 같았다. 눈길은 끝도 없이 계속된다. 눈 깊이를 재어보니 평균 50~60cm쌓여있고, 깊은 곳은 1m가 넘기도 한다. 눈은 내리면서 날씨가 추워서 백무리 가루처럼 응결되지 아니하여 걷기가 더욱 힘들었다.
능선 길이다. 확 트인 시야가 가슴을 시원스럽게 하였고, 머릿속을 맑게 하였다. 날씨는 바람 한 점 없이 좋았다. 소황병산을 향하여 즐거운 산행을 계속하는데 시장기가 느껴왔다.
가다보니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요기를 했다. 떡, 과일, 김치, 빵 등 각자가 가져온 간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니 배가 든든하다.
지금부터는 소황병산에 오르는 길이다. 오른 편에 있는 황병산은 국가시설이 있어서 일반인은 오를 수가 없다. 황병산은 누루황자(黃)에 자루병자(柄)를 쓴다.
오르는 길이 계속된다. 눈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여있다. 내가 처음 산행훈련을 받을 때 눈길을 오르면서는 앞 발꿈치로 눈을 차면서 올라야 미끄러지지 않으며, 내려올 때는 뒤 발꿈치로 눈을 힘껏 내려 밟으면서 내려와야 미끄럼을 방지할 수 있다고 배워서 그렇게 올랐다. 대원 중에 한명이 다리통증을 호소한다. 눈길은 평소 산길보다 배 이상의 에너지 소모를 가져오며, 평소 산행 때 사용하지 아니한 근육을 쓰게 되므로 엉뚱한 근육이 통증을 일으킬 수 있다.
계속되는 오르막길을 힘겹게 한발 한발 오르는데 까마귀가 크게 짖어댄다. 나는 평소 깊은 산에서 까마귀 울음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묘했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까마귀나 독수리와 같은 새가 우리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사자로 생각해 왔다. 아마도 그러한 정신이 나에게는 남아 있나보다.
오늘도
‘까마귀야, 네가 내 영혼을 가지러 왔느냐?’하고 마음속으로 물었다. 까마귀는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까~악~, 까-악~.”하고 짖는다.
‘그래, 네가 내 영혼을 가지러 왔다면 내 영혼을 염라대왕께 잘 데려가 다오.’
하고 생각하니 기분이 맑아졌다.
염라대왕은 내 전생과 이생에서 내가 한 생각과 일을 빠짐없이 비디오를 보듯이 다 알고 계시므로 그 분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실지 자못 궁금하다.
드디어 정상이다. 정상이 뾰족한 산이 아니고, 너른 평원이다. 여기서부터 삼양목장이 시작된다. 너른 평원에 인간의 흔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설원이다. 오늘은 바람도 없고 햇빛이 좋으나, 언젠가에 바람이 몹시 세계 불었던 흔적을 눈은 간직하고 있었다.
사진을 촬영하고 하산 길을 찾았다. 길이 어디로 나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막막하다. 겁이 난다. 눈길을 잘 못 들어서면 조난당할 염려가 있으며, 조난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한 대원이 앞서 나아간다. 그 대원은 여기가 처음이 아니다. 전에도 눈 싸인 이곳을 와본 경험이 있다. 나는 뒤를 따랐다. 한 참을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모르고 있다. 백두대간을 타고 대관령까지 가는 길을 알고는 있으나 러셀이 전혀 돼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무리이다. 그렇다고 바로 내려가자니 계곡이다. 오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잠시 오르다 보니 저 멀리에 제설된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백설위에 내려 쪼이는 햇빛은 눈이 부시고, 나를 어리어리하게 만든다. 제설된 흔적을 찾는 순간 사지(死地)에서 빠져나온 기분이다. 순수자연이 아닌 인간의 흔적이 그렇게 반갑기는 처음이다. 나는 역시 인간의 무리를 떠날 수 없는 속물인가보다.
다시 오른편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경사가 있고, 눈이 60cm 정도 쌓여있다. 처녀 눈 위에 첫 발자국을 찍는 내 기분이 묘하다. 저 아래에는 사슴이 여유롭게 지나간 자욱이 보인다.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면서 눈 위를 지나갔을 사슴의 모습을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인다.
대월들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내려온다. 설산을 배경으로 단체사진과 개인 사진을 촬영하였다. 좀 전에 본 제설된 길은 삼양목장 입구에서 군사 시설까지 이동과 보급을 나르는 길이였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 내려왔다. 그 곳에서 삼양사 정문 까지는 11km이며, 우리가 차에 오를 수 있었던 곳까지는 13km정도이다.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어려운 산행은 즐거움을 배가 시켜준다.
오늘 산행은 약 22km에 여덟 시간이 소요되었다. 첩첩히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산, 그 위에 하얗게 싸여있는 눈은 잊을 수가 없다. 긴 여운으로 남는 추억은 나를 다시 산에 오르게 하는 힘이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산을 오른다.
재약산(載樂山)을 다녀와서
재약산은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는 해발 1,189.2m 산이다. 이 산은 수미봉과 사자봉을 거느리고 있다. 얼마 전 만 해도 재약산, 천황산 이였는데 천황산은 일제 때 일인들이 자기나라 천황을 기리기 위하여 천황산이고 하였다는 이유로 재약산 사자봉으로 고쳐 부른다.
산행 코스는 여럿 있으나, 이번에는 표충사(表忠寺) 입구에서 우측 개울을 따라 오르는 코스를 택했다.
밀양은 인구가 10만 명이 채 안된다고 한다. 밀양하면 「밀양아리랑」을 떠 올릴 만큼 밀양아리랑의 고장이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후렴)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정든님이 찾아 와도 인사도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빵긋.
-후렴-
정선 아리랑이 슬픈 애환을 그리는 반면, 밀양아리랑은 리듬이 경쾌하고 명랑한 것이 특징이다. 산행을 마치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그 곳 사람에게 밀양아리랑을 불러 보라고 하니, 나이가 좀 드신 남자 분은 부를 줄 아는데, 그 동생이라는 젊은 여자는 자신 있게 부르지 못한다.
문명화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영혼을 황폐하게 만드는 과정인 듯싶다. 문명은 우리들 생활을 외형적으로는 분명 안전하고 편하게 만드는 면이 있지만 영혼을 살찌우지는 못한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영혼을 평온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리석게도 영혼을 황폐하게 만드는데 동참하는 어리석음에 젖어 있으면서도 이를 눈치 채지 못하는 무명에 빠져있는 듯하여 마음이 아프다.
표충사 일주문 앞에 이르니 아침 5시이다. 랜턴의 도움 없이 산행이 가능하다. 등산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매고, 각오를 다진다. 표충사 우측으로 발길을 내 디딘다. 개울의 물소리가 새벽 공기와 부딪히며 온 중생을 무명에서 일깨운다. 산길은 비교적 편안하다. 한 동안 평탄한 길을 걷고 나니 제법 경사가 급한 곳에 이른다.
40 ․ 50분 쯤 오르니 우측에서 시원한 물줄기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있어 시선을 돌리니 홍룡폭포가 자태를 뽐내며 거만을 떤다. 산은 웅장하고 계곡은 깊으며, 나무들은 한결 같이 건강하다.
오르고 또 오르는데 출렁다리가 나타난다. 층층폭포다. 올 봄에 비가 잦은 탓에 수량이 많아 폭포 물줄기가 아름답다. 높이가 20여m에 이르는 바위로 만들어진 넓은 공간이 충분한데 여인의 품과 같이 감미롭고, 웅장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물소리는 경외롭다. 한번 떨어진 물이 여인의 비단 옷자락 같이 고요히 고였다가 다시 흘러 떨어져 제2의 폭포를 만든다고 하여 층층폭포이다.
이 곳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세수도 하고 사진도 촬영하며 잠시 휴식을 가졌다. 한 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르는데 30여m 쯤 오르니 갑자기 큰길이 나타난다. 이 길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이이다. 이 길을 따라 걷다 산길로 다시 접어들었다. 조금 걷다보니 다시 신작로가 나타난다. 콘크리트로 대충 바른 길인데 산속에 왜 이 같은 길을 만들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콘크리트길을 오르다 보니 지루하고 허리가 아프다.
한참을 오르니 길은 끝나고 다시 산길이다. 여기에서 내 고도계는 해발 600m를 가리킨다. 이제 등산다운 등산이 시작된다. 좌우 시야를 제로로 만드는 키 높이 관목 숲을 지나니 바위와 함께 시야가 확 트인다. 흰 구름이 산골을 메우고 있어 전체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동쪽으로 사자평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해발 600~700m 위치에 이와 같이 넓은 평지를 이루고 있는 산은 흔하지 않다. 이곳은 70 ․ 80년대만 하여도 『고사리 분교』라는 초등학교가 있었고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평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고단한 삶을 가졌을 법하다. 지금도 일부 밭을 일구며 농사를 하는 것 같다.
땀을 흠뻑 적시며 한참을 오르니 재약산 수미봉이다. 여기까지 2시간 40분이 소요되었다. 기압은 881이고, 안개가 말끔히 걷히니 시야는 100이다. 높이 1,108m 수미봉에서 바라보는 주변 산세는 첩첩 산이며, 웅장하다. 나는 이 같이 거대한 산 중에 있을 때면 이 위대한 자연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고마움과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 적이 많다. 평소 나 자신이 대단하다는 생각에 오만에 젖고, 미워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며 욕심을 내지만 이 거대한 자연 속에서는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에 감사할 뿐, 사랑도 미움도 여의고 겸손만 남는다.
수미봉에서 기념사진도 촬영하고 간식을 먹고 나서 사자봉을 향해 출발했다. 다소 경사가 있고 잔 돌이 많은 내리막길을 20여분 걸어 내려오니 내원암 방면에서 올라오는 등산길이 나타난다. 이 등산길을 따라 60은 족히 넘어 보이는 남루한 남자가 등에는 무언가를 잔득 짊어지고 손에는 막걸리 병을 서너 개 들고 올라온다. 아마 장사에 필요한 물건들이 질서 없이 흩어 진 것으로 보아 여기에서 음식을 팔기위해 오는 사람 같다.
여기서부터 다시 오름길이다. 오전 8시가 넘으니 해살이 따가워 땀이 제법 많이 흐른다. 다리에 서서히 무거움이 느껴진다. 30~40cm 정도의 관목만이 있는 민둥산이다. 흙은 화산재인 듯 검고 입자는 고우며 토층은 30cm 정도이다. 숨이 가빠오고 허벅지에 무게가 느껴지며 등에 진 배낭이 무거워 진다.
나는 이 같이 피로한 산행 때에는 마음마저 무거워 버리고 무심(無心)으로 오른다. 마음을 텅 비우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으며, 아픔도 괴로움도 함께 비워진다. 가파른 길을 한참 오르니 정상이 우뚝 코앞에 다가 선다.
사자봉은 1,189m 이다. 기압은 774로 낮은 편이고 기온은 20.8도이며, 시각은 8시 46분이다. 여기서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정상 주를 한잔하며 한담을 나누었다. 따스한 해살아래 시원한 바람이 땀에 젖은 몸을 감미롭게 감싸는데 탁 트인 시야가 한 없이 펼쳐진 이곳에서 나누는 한담은 아주 맛이 난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아무 욕심도 없고, 분별심과 집착심도 사라진다. 그저 평온함, 그 뿐이다.
‘행복한 평온을 접고 이제는 속세를 향해 하산해야 한다. 인간은 돌아갈 집이 있기에 여행을 다니는 여행객일 수 있다. 만약 돌아갈 집이 없다면 떠돌이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다. 왜 이 같이 평온한 산 정상에서 복잡한 곳으로 다시 내려가야 하는가? 생각해 보니 집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집으로 가는 것이다.
하산 길은 초반부터 경사가 급하다. 1시간 30분가량 급경사 길을 내려오고 나니 시원한 물소리가 산중에 무게 있게 퍼지고 있다. 금강폭포와 은류폭포이다. 두 폭포가 양 계곡에서 쏘다져 내려와서 한 곳에서 만난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모습이 아름답다. 이곳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세수도 하고 스틱과 등산화를 닦으며 마무리 정리를 했다. 여기서부터는 잠시 바위길이 있기는 하나 평탄하다.
표충사에 이르니 11시가 좀 넘었다. 총 6시간이 소요된 산행이다. 표충사 경내를 휘 둘러 보았다.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해인사, 송광사에 견줄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부처님 앞에 합장을 하고
“생명을 가진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의 자비와 가피를 입어, 하나 같이 평온하게 살수 있도록 보살펴 주십사.”하고 기도를 올렸다.
적어도 이 시간만은 행복하다. 이 행복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빈다.
마등령에서 바라본 설악산
9월 초순의 밤 날씨는 제법 싸늘하다.
금천의 시흥에서 밤 12시에 출발하여 새벽 3시 30분에 설악동에 도착하였다.
차 안에서 1시간 쯤 잠을 자고나서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신흥사 매표소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산행준비를 한다. 복장을 매만지고, 등산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맨다. 언제나 그렇듯이 큰 산을 오르기 전에 등산화 끈을 맬 때는 감회가 새롭다. 마음으로는 무사산행이 되기를 기원한다.
오늘 산행 일정은 신흥사에서 마등령을 거쳐 오세암을 경유하여 백담사까지 이다. 등산 안내 지도상의 기록으로는 8시간이 소요된다고 안내되어 있다. 복장은 여름 복장이라서 준비가 수월하다. 물과 간식, 그리고 등산용 긴팔 셔츠를 걸쳤다.
5시에 신흥사 입구 매표소 앞을 출발하였다. 랜턴을 밝히며 비교적 빠른 속도로 걸었다. 비선대까지는 길이 넓고 경사가 없어서 수월하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맑고 청량하여 발걸음이 가볍다.
산행중간에 있는 가게에서 아무머니가 혹여 우리 일행이 자기 가게를 들르지 않을까 잔득 기대하고 바라보는 모습이 안쓰럽다.
비선대에 도착하니 5시 40분이다. 땀이 온 몸을 촉촉이 적셨다. 여기에서 다시 복장을 정리하였다. 긴팔 셔츠는 벗어 배낭에 넣고, 랜턴도 집어넣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각오를 새롭게 하고 마등령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산행은 언제나 자기 체력과 습관에 맞도록 해야 한다. 산행 중에 욕심은 금물이며, 절대 남을 의식할 필요도 없다. 욕심을 내거나 남을 의식하여 무리한 산행을 하다보면 체력이 안배되지 않아 탈진하거나 실수할 수 있다.
산행은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자기 능력에 맞도록 체력을 안배하면서 해야 하다. 산행은 곧 자기 수행이다.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하는 정신을 기르고, 욕심과 경쟁심, 그리고 헛된 잡념을 여의게 한다. 산행 중에는 항상 마음을 활짝 열고, 움켜쥐지 말고 내려놓고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과 행동을 늘 알아차려야 한다.
산행 중에 마음을 긴장하면 근육이 굳어져 허리가 아프고 다리동작이 유연하지 못하게 된다.
비선대에서 1025 고지까지는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30분 산행하고 잠시 휴식을 가지면서 올랐다. 쉬는 시간에는 초코렡 등 간식과 물을 충분히 마셨다. 산행할 때 갈증을 느낄 때까지 참는 것 보다는 미리미리 물을 마셔두는 습관이 필요하다.
잠시 쉬면서 바라보는 설악산의 모습은 한마디로 장관이다. 아직 푸름을 그대로 간직한 나무와 속살을 숨김없이 드러낸 바위가 한 커플이 되어 잘 어울린다.
천불동 계곡과 공룡능선의 깊고 수려한 모습은 나의 마음을 하나도 남김없이 빼앗아 간다. 어느새 나는 설악산과 하나가 된다. 웅장하면서도 부드럽고 아름다운 설악산은 때로는 어머니 품과 같고, 어느 때는 여인의 사슴과 같이 평온하다. 그런가 하면 강인한 기상이 남아다워 가슴을 열고 웅심을 기르기도 한다.
비선대에서 가파른 길은 1시간가량 계속된다. 다음부터는 평탄한 듯 하면서도 흙길과 바위, 너덜길이 계속 이어진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공룡능선이 한 고비를 넘으면 저만치 물러서고, 이제 마지막이겠지 하고 또 한 고비를 넘으면 다시 저만큼 물러나서 빙그레 웃는다. 비선대에서 마등령까지 산행은 설악의 주봉인 대청봉을 왼편으로 바라보면서 계속된다. 마치 대청봉을 가운데 두고 원을 그리는 듯하다.
마등령에 도착하였다. 8시 40분이다. 매표소에서 여기까지 3시간 40분이 소요되었다. 마등령은 명성에 비해서 초라하고 휴시공간이 좁다. 참고로 마등령에서 저항령으로 가는 길은 본래 백두대간길이나, 산양 서식지로 밝혀져 보호차원에서 출입을 금하고 있다.
여기에서 떡과 과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오세암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나는 오색에서 대청봉을 거쳐 공용능선을 타고 마등령을 경유하여 신흥사 방면으로 산행을 한 경험은 있으나 이 길은 초행이다.
1시간 30분 쯤 소요되는 길이지만 경사가 급하고 다듬어진 길이 아니라서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이런 길에서 실수하면 계곡으로 굴러 몸을 다치기 쉽다. 한발 한발 신경을 써야하고 스틱을 놓는 자리도 안전한지 살피는 주의가 필요하다.
오세암은 익히 알고 있지만 방문은 처음이다. 주불은 관세음보살님이시다. 법당에 관세음보살 한 분만을 모신 것이 퍽 새롭다.
오세암에서 백담사 계곡까지 내려오는 길은 비록 육산이기는 하나 다듬어지지 않은 길이라서 비좁을 뿐 아니라 오르내림이 계속된다. 오세암을 찾는 불도들이 계속 줄을 잇는다.
백담사 계곡 길에 이르러 계곡물로 세수도 하고 쉬었다.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는 거리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오름이 심한데도 나이 드신 불자 분들의 행렬이 계속 이어진다. 백담사에 도착하니 12시이다. 총 산행시간은 7시간이 소요되었다. 백담사에서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주차장까지 내려와서 소주 한 잔을 곁들인 점심식사를 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한 산행이라서 특별히 지루하다거나 다리가 아프다거나 피곤함이 없다.
몸이 가볍고 마음이 탁 트인다. 열린 마음은 언제나 자유롭다. 이것이 산을 오르는 이유이다.
지금 사진이 급한 게 아니에요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이다.
가을 단풍을 감상하기 위하여 친구 셋이서 경상북도에 있는
주왕산을 찾았다.
일박에 필요한 텐트 등을 가득 짊어지고 주왕산 등산길을 가는데 가을 단풍과 산세가 한데 어우러져 풍광이 그만이다.
사진을 촬영하고 싶은 욕심에 지나가는 2명의 여학생에게
"학생 사진 좀 부탁할까?"하니 우리 카메라를 들고 촬영자세를 취한다.
우리 셋은 한 친구는 앞에 엉거주춤 쪼그리고 앉고 둘은 뒤에서 섰다. 그런데 카메라를 쥔 학생이나 옆에서 보고 있던 여학생도 카메라 사타를 누를 생각은 안 하고 키득키득 웃고만 있다.
"아니, 학생! 찍지 않고 뭘 해?" 우리는 다소 짜증석인 목소리로 재촉했다.
"지금 사진 찍을 상황이 아니에요."하며 한참을 키득거린다,
그러나 우리의 다그치는 소리에 순간 '찰칵' 사타가 눌렸다.
서울에 올라와서 현상을 해본 우리는 그때 비로소 학생들이
사타를 누르지 못하고 키득 이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앞에 앉은 친구의 청바지와 팬티가 찢어져 불알이 그 틈을 비집고 나와서 가관 이였다.
지금은 40 이 훌쩍 넘었을 그 여학생들은 그 때를 떠올리며 무슨 생각을 할까?
다링하버여 안녕
DARLING HARBOUR여 안녕
이 글은 호주를 방문한 공식 귀국보고서가 아니고, 필자가
개인적으로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보고, 느낀 점을 적은 글임을 먼저 밝힌다.
서울을 떠나 호주로
구청직원과 구의회의원으로 구성된 「금천구청 호주방문단」은 7박9일의 일정으로 호주를 방문하였다. 정확하게는 Sydney(시드니시)에 있는 우리구와 자매도시인 Burwood Council을 방문한 것이다.
2005년 9월 16일 오후 7시 출국수속을 마치고 인천공항 Boarding Hall에서 대기 중에 밖을 보니 어둠이 깔렸다. 왠지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서러움이 살며시 다가선다.
“새들도 날이 저물면 제집을 찾아 드는데 나는 이 시간에 가족을 떠나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찡하다. 그러면서도 먼저 이국땅에 간다는 기대감에 설레기도 한다.
호주의 공식 국가 명칭은 Commonwealth of Australia이다. 6개의 주와 2개의 직할 지구로 구성된 연방국가이다. 면적은 768만6,850㎢이며, 인구는 2 천만 명 정도이다.
호주의 최대도시인 Sydney(시드니)는 400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수도는 시드니에서 남쪽으로 400여 ㎞ 떨어진 Canberra(캔버라)이다. 인천공항을 20:00에 이륙하여 Sydney 현지 시각 07:00에 도착하였다, 10시간 비행하였다.
하늘은 쪽빛이나 불어오는 바람은 옷깃을 여미게 한다. 시드니는 우리와 반대인 남반부에 있으나 위도가 비슷하여 지금 입춘을 맞이하고 있다. 태평양 연안에 있으면서도 서쪽에 펼쳐진 광활한 사막의 건조한 기후의 영향을 받아 건조하다. 습도가 약할 뿐만 아니라 공기 중의 산소량도 우리나라보다 약 15%정도 적다고 한다.
시드니 대부분의 나무와 잔디 등은 사계절 푸름을 간직한다. 정작 여기보다 400여㎞ 남쪽에 위치한 Canberra가 우리나라 계절과 비슷하다. Canberra는 지금 벚꽃이 만발하고 이름모를 꽃들이 막 피어나고 있었다.
Bondi beach와 Gap park
Sydney는 해안도시이다 보니 “S"자 곡선의 Bay가 무수히 많고 이에 걸맞게 Harbour라는 지명이 많다.
사계절 파도타기가 가능한 Bondi beach는 제법 쌀쌀한 바람과 함께 파도가 밀려와 하얗게 미소를 지으며 부셔지는 모습이 퍽 아름답다. 그러나 식인상어가 나타나므로 멀리 바다 가운데에 상어 방어망을 설치했다 한다.
Sydney는 태평양과 직접 접한 항구도시이면서도 물결이 잔잔하고 수심이 깊어 조용하고 고요한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Sydney Bay 입구에는 North head와 South head가 마주보면서 천혜의 방파제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 두 head 안에는 크고 작은 bay가 수도 없이 있으며, 각 bay마다 harbour가 자리 잡아 아름답고 부드러움을 더해 준다.
Gap park는 South head에 있으며 빠삐용이 마지막 탈출하는 장면을 촬영한 곳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빠삐용 영화를 본 사람은 수직 벽 밑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차 한 잔으로 쌀쌀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녹이고 Darling harbour에 있는 four point Sheraton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이곳은 우리일행이 Canberra에서 1박하는 날을 제외하고 여행 중 내내 머물 곳이다.
바로 앞에 바다가 있고 -사실은 바다라기보다 호수 같다- 그 가에는 선착장과 음식점, 술집들이 늘어서 있어 많은 사람이 모이는 번화가이다.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장소로 이동했다. Burwood council Mayor인 David의 안내로 star city에 있는 Buffet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star city는 호주 내에서 가장 큰 casino이다. 큰 건물전체가 돈 놓고 돈 먹기 판이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구경을 하는데 큰 돈을 배팅하는 사람은 대부분 중국계이다. 어느 중국인은 4천 호주달러를 단 10초 만에 날리고서도 아무표정 없이 자리를 옮긴다.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날은 casino 개장 10주년 이벤트가 있는 날에 토요일이라서 많이 붐빈다.
Buffet식당은 David가 예약을 했다는데 약속시간을 못 지켜 꾸불꾸불 늘어서 줄의 대열에 끼여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얼마나 음식 맛이 특별한지는 몰라도 복잡한 복도에서 숨 막히는 기다림을 참는 데는 인내가 필요하다.
겨우 자리를 얻어 보이는 것 몇 종류의 음식을 날라다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Burwood의 Festival
Sydney의 아침은 상쾌하고 맑고 하늘은 푸르다. 06시에 일어나 Darling harbour해변에 나가 가볍게 뛰었다.
오늘은 우리민족의 최대 명절인 추석이다. 차례 준비를 해야 할 시간에 이국땅에서 혼자 있는 마음이 쓸쓸하고 죄스러워 해변에 앉아 서울 집으로 전화를 하였다. 차례 준비는 되었느냐고 물으니 아내가 염려하지 말고 몸 건강히 잘 지내다 오라고 한다.
울컥 목이 메고 눈물이 나와 할 말을 다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우리 일행은 삼실과 포, 술을 준비하여 합동으로 추석 제례를 지냈다. 정성이 중요하지 않은가!
오늘은 우리 금천의 자매도시인 Burwood council의 festival이 있는 날이다. 여러 민족(호주는 80여 민족이 있음)이 만나 삶의 장을 꾸려나가는 호주의 축제는 과연 어떠하며 우리와 어떤 면이 다를까 하는 기대를 갖고 갔다. Burwood는 매년 9월 중순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간 관내에 있는 Croydon park에서 축제를 갖는다.
우리 일행이 우리 고유 명절인 추석에 조상님께 결례를 하면서도 Burwood를 방문한 이유는 Burwood 측에서 자매도시인 우리 구를 자기들의 축제에 초대하였기 때문이다.
11시쯤에 도착하니 축제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무대에서는 춤과 노래가 진행되고, 한편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와 지글지글 익는 버터냄새가 하나가 되어 축제 분위기가 물씬 난다.
축제는 공원 중앙에 설치된 stage가 하나 있고 길가에 간이로 설치된 Road stage가 있으며, Burwood의 메인 스트리트를 차량통제한 후 벌리는 거리축제로 구분된다. 공원 내 무대를 중심으로 일정하게 줄을 세워 간이 텐트로 가가(假家)를 열었다.
음식점, 토속 품 판매점, 악세사리 판매점 등이 늘어섰고, Road stage옆에는 Burwood council 홍보관과 자원봉사자로 구성되어 운영하는 SES(State Emergency Service) 홍보관이 있다.
SES는 우리나라의 119구급대 역할을 하는 자원봉사단체인데 최고 책임자격인 여성대원의 자랑이 대단하고 자부심이 보통이 아니다. SES옆에는 NSW(New South Wales)주의 경찰 홍보관이 있다. 청소년 선도를 주로 하는 여자경찰 두 명이 완전무장을 하고 안내를 맡았다. Burwood council에는 자치경찰이 없고 주(NSW)경찰이 치안을 담당한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한국에도 여자경찰이 있느냐고 묻는다. 조금 있으나 점차 증가 추세라고 하니 한국에도 더 많은 여경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청소년 담당 경찰관이 왜 완전무장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니, 경찰은 의무적으로 무장을 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전에는 이곳 공원 내에서 범죄와 성문란 행위가 자주 있어 CC-TV를 설치하고 관리한 결과 이제는 많이 정화 되었다고 한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 곳에서 녹화한 CC-TV화면은 공원관리소에서는 판독이 안 된다. 판독해 보아야 흐려서 개별식별이 안 된다. 다만 범죄가 발생하면 주 경찰국에서 명확하게 판독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인권을 고려한 제도라고 생각되어 우리도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곳 축제와 우리의 축제를 비교하면 춤추고 노래하고 먹는 것은 같다. 다르다면 술이 없다. 그래서 분위기가 차분하고 질서 있고 축제의 의미를 마음으로 음미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민족이 살다보니 각 민족별로 고유의 의상을 갖추고 고유의 춤을,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고 아름답다. 이들은 이러한 축제를 서로 다른 민족끼리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하는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술에 취하여 마지막 판에 멱살잡고 욕하며 다투는 우리의 축제분위기와는 많이 다르다.
잠시 짬을 이용하여 가가를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가장 토속적인 것이 무엇 일까하고 찾아보았으나 없다. 호주정부는 이곳 대륙의 원래 주인인 aborigine(이를 보통 ‘애보리지니’라고 함)을 일정한 장소에 격리 수용하고 외부 인의 접촉을 일체 금지하고 있다.
원래 이 땅의 주인을 침입자인 백인이 총으로 죽이고 위협하여 말살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의 주인은 축제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토속품을 팔지도 못한다. 나는 꿩 대신 닭이라고 Africa사람이 만든 목각을 하나 샀다.
우리는 Road stage에서 이곳 주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의식을 치르고 공연을 관람한 후 시드니 올림픽 경기장을 보러갔다.
경기장 내부는 공개하지 않았으나 전체 규모는 짜임새 있고 품위 있게 건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드니는 88서울올림픽 때 우리와 유치 경쟁을 벌이다 고 정주영 선생의 탁월한 솜씨에 눌려 유치를 빼앗겼다. 이때 사용할 시설비를 가지고 Darling Harbour를 만들었다고 한다.
메인 경기장 주변에 역대 올림픽을 치른 도시의 상징 탑이 있고 영상공연장이 잇다. 서서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원형 영상공연장에서는 대한민국 선수들이 체조부문과 양궁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는 장면이 잠시 스쳐지나간다. 현지에서 다시 보니 감격적이다.
시드니 올림픽에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건이 있었다. 이 호주 땅의 주인인 Aborigine 여자선수가 400m 경기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 화면이 자랑스럽게 비교적 길게 상영된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 소녀에게 기도하였다.
“Aborigine이여 영원 하라!”
모두들 나와 같은 지 숙연하다. 이때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나는 조크를 던졌다.
“저 선수가 앞으로 호주의 손기정이 될 거야” 이 말에 모두들 의미 있는 웃음을 뒤로하고 경기장을 떠났다.
Burwood Council 방문
Sydney 3일차인 19일에는 Burwood council을 방문했다. 준비된 자료로 브리핑을 받고 선물도 교환하였으며 시장집무실, 의회의사당 등을 둘러보았다. 버우드의 쓰레기 정책이나 도시 관리, 세원증대를 위한 노력 등은 현재 우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만큼 우리가 외국의 선진 사례를 들여와 시행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다만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투명하며 의사결정과정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하나의 정책결정을 위해서는 이해관계자와 사전 대화를 통하여 서로 이해하고 믿음이 선 다음에 결정으로 이어 짐을 볼 수 있었다.
Burwood시에서는 「Burwood Observer」라는 책을 정기적으로 발간하여 시민에게 시책을 홍보하고 있다. 또, 「Burwood Management Plan Summary」와 같이 정기간행물을 발간하고, 「accent>>」라고 하는 수시 홍보물을 발간하고 있다. accent와 같은 유인물은 시장의 치적을 홍보하고, 앞으로 계획을 밝혀 주민의 의사를 들어보는 채널역할을 한다.
이들은 사전 의사소통을 통하여 모두가 합의하여 모두가 책임을 공유하고 결과에 승복하는 정책에 익숙해있었다. 우리가 본 받을 만한 일이다.
필자가 프랑스의 파리에 있는 13구 리뷰꼬시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곳은 세계에서 알아주는 도시 리모델링 지역이다.
“반대민원이 발생하면 어떻게 처리합니까?”하고 물으니,
“우리도 한국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민원인이 이해할 때까지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입니다”하고 대답한 기억이 난다. 모두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점심을 먹고 호주의 수도 Canberra로 이동했다. 4시간이 소요된다. 어디를 가나 80여종의 다양한 모양을 가진 유칼립스 나무가 숲을 이룬다. 그렇지 않으면 드넓은 초원이다. 초원위에서 풀을 뜯는 양떼, 소떼, 말, 염소 등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이다.
Canberra는 Sydney보다 산도보이고 기후나 나무종자가 우리나라와 유사한 면이 많아 친숙한 느낌이다. 저녁식사는 중국인이 경영하는 뷔페식당에 갔다. 역시 깔끔하고 정갈한 맛은 없다.
호주는 80여 민족이 같이 살다보니 호주는 없다. 즉 호주다운 문화는 없다. 중국음식점에 들어오면 내가 중국에 와 있는 듯하고, 스페인 풍의 건물을 보면 아하 여기가 스페인이구나 하게 된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노래방이나 식당에 가면 영락없이 서울의 한 귀퉁이에 내가 앉아있는 착각을 한다.
Canberra의 아침은 아름다운 꽃과 새소리와 함께 찾아왔다. 우리가 묵은 호텔 앞에는 강을 막아 만들었다는 Rydges호수가 있다. 이 도시는 만들어진 행정도시라서 밤이면 쥐죽은 듯 조용하고 어둡다.
고층건물도 없고 정부청사와 각국의 대사관이 모여 있는 지역이 있고, 주거지, 그리고 외부 인이 와서 묵는 Hotel이 있을 뿐이다.
나는 호숫가로 뛰어 나갔다. 가볍게 뛰고 있는데 이곳이 한국의 어는 시골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정서가 비슷했다. 버드나무, 벚나무, 물오리... 등. 한 가지 다르다면 너무나 상쾌한 공기와 사람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는 야생 동물이다.
이곳 호주는 환경을 제일로 치고 있다. 모기를 쫓기 위하여 F-Killer하나를 못쓰게 한다. 아예 소독약이 없다. 만약 우리와 같이 분무기로 모기퇴치 활동을 한다면 바로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호주 정부는 호주전지역을 청정지역으로 선포하고 이를 지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자연을 아끼다 보니 야생동물 -갈매기, 물오리 등-이 사람을 피하질 않는다. 같이 생활한다.
호수 주변을 달리다보니 어찌나 상쾌한지 금천구에도 이런 것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Australian War Memorial 방문
우리는 호주의 전쟁기념관이라고 할 수 있는 Australian war memorial에 갔다. 가는 도중에 「한국전쟁 참전 기념탑」이 있다. 들렀다.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피를 뿌려 오늘의 평화와 높은 삶을 보장해준 호주 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올린다.
전쟁기념관에 들렀다. 일직선으로 뻗은 길을 따라 반대편 언덕에는 우리가 잠시 후에 들를 Australia′s Parliament(호주의사당)가 보인다.
전쟁기념관의 규모는 용산에 있는 우리 것보다 더 크다고는 볼 수 없으나, 호주가 독립된 호주군의 명칭으로 1916년경 출전했던 터키전쟁부터 베트남전쟁까지 기록해 놓았다.
1․ 2차 세계대전 참전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그 외의 전쟁은 소규모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전 기념관도 있다.
나는 2층 벽에 새겨진 역대 전사자의 이름을 쭉 흩어 보고 1층 성화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호주 석유회사가 제작하여 기증했다는 성화는 물속에서 꺼지지 않고 계속타고 있다. 관람객이 던진 동전이 많이 물속에 잠겨 있다. 마치 전쟁에서 죽어간 호주 젊은이들의 넋 같이.
타오르는 성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물었다.
“호주의 젊은 넋이여 그대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누가, 무엇이, 어떠한 명분이 그대들의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생명을 빼앗았단 말인가? 평화? 정의? 국가? 신? 무엇이 그대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인가?”
알 수 없는 얼굴들이 영령이 되어 나의 머릿속에서 헤맨다.
“내가 왜 싸웠지? 왜 죽었지?”
“호주의 젊은 넋이여 영원히 잠드소서! 그대의 죽음이 죽어야 할 만한 이유와 명분과 가치가 없었다 하여도 그대들의 죽음이 오늘의 호주를 만드는 힘이 되었음을 자랑으로 삼고 영면 하소서!”
눈을 떠보니 우리 일행이 건너편에서 나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전쟁기념관을 관람한 후 호주 정부 의사당에 들렀다. 간단한 몸 검색만 하면 누구나 관람이 가능 했다.
학생들이 교육 겸 많이 오고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위엄이 보였다.
다음에는 각국의 대사관저가 있는 지역을 차를 타고 둘러보았다. 미국대사관은 아예 독립된 한 불럭을 차지하고 살벌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큰 대사관은 중국이다. 황금색으로 칠한 것이 인상적이다. 한국대사관은 우리말로 뒷골목에 있어서 관저는 보이지 않고 대문만 보였다.
대사관저를 보는 것을 끝으로 Canberra를 떠났다.
Chullora Waste facility 방문
시드니방문 5일차를 맞았다. 우리는 Sydney시에서 운영하는 재활용쓰레기 분리 수집장을 방문하였다. 400만 호주 최대인구의 도시인 시드니에서 운영하는 수집장이다 보니 당연이 호주에서 제일 큰 규모라고 자랑이 많다.
시드니 시에서 배출되는 자원 쓰레기 통계다.
음식물쓰레기 27%, Green(나무. 풀 등) 28%,
알미늄 1%, 철 3%, 유리3%, 플라스틱 6%,
일반종이류 5%, 종이상자 3%, 옷 종류 4%,
기타 재활용이 안 되는 쓰레기 14%,
(Hazardous waste 2, Contaminated waste 6,
inert 3, nappies 3) 등
이곳 WSN에서는 종이류만 취급하고, 다른 쓰레기 분류 처리는 또 다른 곳에 있다고 한다. 쓰레기 분류 과정은 환경이 많이 열악하다 물론 우리나라의 음식물쓰레기 처리 공장 보다는 좋지만.
각 가정에서는 일반쓰레기, 음식물쓰레기, 재활용 쓰레기로 분류하여 배출한다. 배출 쓰레기통은 세 종류가 있고 색상이 각각 다르다.
재활용 쓰레기는 종이. 플라스틱 등을 구분하지 아니하고 한 통에 혼합 배출하면 시에서 대강 분류한 다음 종이류만은 이곳으로 운반한다. 들어온 종이 쓰레기는 콤바인으로 이동시키며 이 과정에서 종이류 이외의 물질은 사람의 힘으로 분류한다.
모아진 종이 쓰레기는 자동으로 1톤 단위로 묽음이 되어 나온다. 물론 종이와 함께 들어온 플라스틱류 등도 분리되어 가지런히 종류별로 모아진다.
이렇게 분류된 재활용품은 전량 외국으로 수출된다고 한다.
이 공장을 방문한 사람에게는 작업과정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고, 홍보책자, 모자, Memory card game 등이 담긴 주머니를 하나씩 준다. 시드니 시에는 어린 학생과 가정 등 사회교육을 통하여 쓰레기 불리 배출과 재활용을 철저히 다루고 있다.
memory card game은 어린이 교육용 카드이다. 예를 들면 신문지를 그림으로 표시하고 이것은 재활용이 가능한 것인지를 게임으로 알아맞히는 카드이다. 재활용이 가능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가능하기도 한 것은 “엄마에게 물어봐”라는 메시지가 쓰여 있어 유치원생부터 이러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점심을 마치고는 오페라 하우스와 Harbour bridge를 관광 하였다. 사전에 그림이나 책, 또는 미리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듣고 보아 별다른 점을 발견할 수는 없었으나, 오페라 하우스를 소개하는 안내 책자가 한글로 된 것이 있다. 그만큼 한국관광객이 많다는 표현이기 도하다.
관광이 국력인지, 아니면 관광을 유치하는 기술이 국력인지 잘 모르겠다.
Burwood Girl′s High School 방문
6일차이다. 오늘은 David 시장의 소개를 받아 버우드 카운실 내에 소재하는 공립 여자고등학교를 방문했다.
학생수는 모두 1,036명이라고 한다. 30명 단위로 반이 구성되었으며, 72개국의 학생이 같은 공간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한국 학생은 23명이 있으며, 선생님이 80명이고 그 외 직원까지 하면 Staff는 100여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 학교를 방문한 목적은 금천구 학생들과 Home stay를 맺기 위함이다.
Mia kunmar교장 선생님과 상담을 하였다. 이 교장선생님은 매우 넉넉한 몸집에 제스추어도 시원하다. 이 학교는 주립학교이다 보니 주 교육청의 인가가 필요 하다고 한다.
Home stay를 맺으면 이곳학생이 한국으로 올 때의 비용과 사고에 대비한 보험 등 안전장치를 주 교육청에서 부담한다고 한다. 그러한 몇까지 조건이 충족되면 ok이다.
한국 학생이 Burwood에 머무는 동안 이 학교에서 특별 프로그램을 짜서 이곳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학교를 둘러보았다. 공부하는 교실, 강당, 도서관 등.
우리의 주입식 교육과는 비교가 안 된다.
호주 교육제도는 12년 의무교육이다. 초등학교 6년, 고등학교 6년이다.
고등학교 3년을 마치면 졸업 후 실업계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대학에 진학할 것인지를 판단하여 별개의 교육을 시킨다. 우리가 방문한 학급은 실업계 학생들이 요리공부를 하고 있었다. 강당에서는 연극 연습이 한창이다. 또 마당 한 구석에서는 비디오카메라로 연출하고, 연기하며 촬영이 한창이다. 이 모두가 이수해야할 학과라고 한다.
졸업을 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운동 한 종목, 악기하나씩은 필수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부럽다.
도서관에 갔는데 동양계 학생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인다. 확인하니 한국에서 이민 온지 몇 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교장선생님에게 인사를 갔는데 또 다른 한국 학생 한명을 데리고 왔다. 7년 전에 이민 온 학생이다. 왼지 어깨가 처져있다.
“학생 어깨를 쭉 펴!” 하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 말과 함께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차마 그 말을 못하고 헤어 졌다.
다음은 David 시장이 학교 바로 옆에 조성중인 공원으로 안내 한다. 자랑삼아 장황하게 소개한다. 농담으로 이 공원 이름은 「금천공원」으로 부르자고 하니, 2백만 호주달러를 부담하라고 한다, 약16억원, 가능하다 다시 한번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 그와는 별도로 이 공원에 korea section을 조성하기로 하였다.
오후에는 parliament of New south wales(뉴 사우스 웨일즈 주 의회)를 방문 하였다. 의사당에 들어서니 David시장이 미리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시장은 주 의회 사무국 책임자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로비에서 마침 회의라서 의사장에 들어서는 주 의회 의원과 주 장관들을 일일이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사진도 촬영하였다.
로비 벽 3면에는 Aborigine의 미술품들이 전시되어있고 기념품 판매장이 있다.
안내 유인물 상자에는 한글로 된 안내물이 있다.
Council 의회 의사당에 가니 Aborigine의 기가 호주기와 Burwood, NSW기와 함께 걸려 있다. 호주인들이 진정으로 각급 의사당에 Aborigine의 기를 세우고 그들의 혼이 담긴 미술품을 전시한다면 왜 원주민 말살정책을 쓰고 있는가? 악어의 눈물과 같은 모순이 아닌가!
주 의회는 상하 양원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입법의회이다.
하원은 임기 4년에 93명으로 구성되고, 상원은 임기 8년에 4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 수상과 대부분의 장관들은 하원의원이기 때문에 많은 법안과 정부사업이 하원의회에서 제안된다.
때 마침 의회가 열려 있어 방청할 수 있었다. 토의 주제는 호주 훝볼에 관한 내용인 것 같다. 상정된 의안을 놓고 여야 의원이 나와서 발언을 하고 들어간다.
의사당은 좌 ․ 우로 위원이 배치되고, 의장은 앞 중앙에 앉으며 뒤편과 좌우로 보좌관, 행정부 관계관이 앉는다.
의석은 지정석이 아니고, 발언대도 원탁 테이블이며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발언을 할 수 있다. 상대당이 정책을 발표하면 ‘에이-’ 하면서 야지를 놓고 하는 풍이 아주 자유스럽다. 아니 자유스럽다 라기 보다는 좀 무질서하다. 의장이 한국 서울의 금천에서 방청을 왔다고 소개해 준다. 속기록이 있다면 기록 되었을 것이다.
Sydney 한 복판에는 Hyder park가 있다. 이 공원은 영국 왕실소유이다. 그 안에 Art gallery of NSW(NSW주립 미술관)가 있다. Hyder park는 정말 부러운 공원이다. 쾌적하고 고요하다. 넓은 잔디 광장, 세계 각국에서 갖다 심었다는 희귀종의 식물, 선인장류, 꽃 등, 공원 산책을 마치고 그 속에 자리 잡은 미술관에 갔다. 미술관에는 19, 20세기 호주 및 유럽 미술품과 1층에는 아시아 갤러리가 있다.
아시아 속에 한국은 없다. 중국관과 일본관, 인도관과 동아시아관이 전부다. 한국의 청자가 일본관에 전시된 것을 보고 매우 실망했다.
호주에 있는 대사, 총영사, 영사 분들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상한다.
이 미술관은 매주 금요일과 크리스마스 때만 제외하고 매일 10시에 열어 5시에 끝나는 것을 모르고 여유 있게 감사했다. 5시 마감이 되어 쫓겨나다시피 퇴장했다.
Blue Mountain을 가다
호주방문 마지막 일정이 있는 날이다. 내일은 아침 일찍 서둘러 공항에 나가야 한다.
Blue mountain을 둘러보기로 했다. 가는 길에 교민이 운영하는 Marubel도 들렀다
Blue mountain은 시드니 서쪽에 있는 높이 1,100m정도의 산이다.
이름이 푸른 산이라 숲이 우거져 푸른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안개가 끼기 때문에 푸르게 보인다고 한다.
1천여m가 되어 우리나라 산과 같이 오른다고 생각하면 또 착각이다.
Bus를 타고 한참을 가다보면 정상이다.
이곳 광장에는 호주 관광청에서 허락하여 관광객을 상대로 사진도 찍고 고유의 악기로 불어주는 원주민 한분이 있다. 처음 보는 Aborigine이다. 언뜻 보니 폴리네시안 종으로 보인다. 태평양섬에 분포된 종족이다. 내가 다가가 악수를 청하니 우리말로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한다. 선배 관광객 분들의 공인가 싶다.
어찌하여 이 땅의 주인이 한 낱 원숭이와 같이 관광객의 노리개가 되었단 말인가!
오호 통제라!
너무 잔인한 인간세계가 무섭기까지 하다.
Scenic world 관광코스가 있다. Rail way, walk way, fly way가 있다. Railway는 경사 50도 레일 위를 와이어로 내려주고 끌어 올리는 car에 타고 내려가는 코스다. 옛날 이곳에서 탄을 캘 때 사용하던 석탄운반 Rail을 응용하여 관광수입을 올리는 노력이 가상하다. walk way는 약 2km의 계곡을 걷는 코스다. 자연을 훼손하지 아니하도록 판자로 walking로를 만들어 놓고 산책한다. 신선한 공기맛과 희귀한 나무가 많아 이색적이다.
이어지는 Fly way는 케이블카를 타고 처음 장소로 되돌아오면 끝이다. 블루마운틴은 신비의 원시림이 있다고 알려졌다. 그 원시림은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미국의 그랜드 캐년 보다 계곡이 깊고 웅장하다고 하나, 우리나라의 큰 산을 많이 오른 경험이 있는 나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설악산의 웅장하고 거친 모습과 비교되지 않았고, 지리산의 포근함만 하려면 아직 멀었다 싶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연자원을 제한적으로 활용하여 외국 관광객을 끌어드리는데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숙소를 돌아오는 길에 동물원에 들렀다. 1990년에 open한 동물원은 시드니 서쪽40km에 있으며, 야생동물원이다. 동물원은 Feather dale wildlife park내에 있으며 호주 내에서 서식하는 동물들만 있다. 호주는 대륙과 멀리 떨어져 있어 동물들도 독특하게 독자로 진화하여 특이한 것이 많다. 대표적으로 캥거루와 코알라가 있다. 이곳 동물원에서는 캥거루 코알라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호주 내에서 누구도 코알라를 안을 수 없으나 여기서 만은 허용이 된다. 코알라는 하루에 18시간 내지 20시간을 잔다. 코알라의 주식인 유칼립스 나뭇잎에는 앨콜 성분이 많이 함유 되 있어 잠을 많이 잘 수밖에 없다고 한다.
진정한 이 땅의 주인인 캥거루를 보고 실망했다. 작은 종만 놓아두고 키2m가 넘는 캥거루는 사람을 해한다고 호주정부에서 멸종 시켰다고 한다. 잔인한 인간들!
아쉬운 마지막 밤이 저문다. Darling harbour 동쪽에 있는 아이맥스 건물에서 LG상표가 밝게 빛난다. 시드니의 가장 높은 건물에서는 LG상표가 빛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Harbour Bridge꼭대기 에서는 SAMSUNG이 빛나고 있다.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부풀어 오른다.
한국 기업인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면서 깊어가는 시드니의 밤을 접는다.
Darling harbour여 안녕 !
VIETNAM과 CAMBODIA를 다녀보고서
인간은 의식을 가진 동물이다. 눈과 귀, 코, 입, 신체적 접촉 등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분석하여 반응하는 일련의 작용을 의식이라고 할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걸쳐 쌓아놓은 정보의 양과 질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넓은 초원의 한 가운데에 아름드리나무가 늠름하게 서 있다고 하자.」
이 곳을 지나가는 나그네는 그늘에 앉아 쉬고 싶은 생각을 할 것이고, 목수는 나무를 베어서 가구를 만들 생각을 할 것이며, 상인의 입장에서는 베어 팔면은 얼마쯤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을 할 것이다. 또 화가라면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에 데상(dessin)을 시작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을 놓고,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생각하고 판단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사물이나 현상을 평소의 지식으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지혜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아주 크게 다를 수 있다.
「거미줄에 잠자리 한 마리가 걸려 있는데, 벗어나기 위해서 바동거린다.
이 때 거미가 빠른 동작으로 나타나 거미줄로 칭칭 감고, 잡아먹는다.」
이를 보고 느끼는 바는 서로 다를 것이다. 거미를 악하다고 단정 지으며, 잠자리를 측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도덕기준으로 의무론에 해당될 것이다. 이 의무론은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원칙이 의무로 주어져 있다고 본다.
또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거미의 입장을 이해하고, 잠자리의 입장도 이해하는, 즉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아무 편견[idea, 觀念] 없이 판단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번 견학을 떠나면서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사실을 받아들이고 판단할 것인가를 놓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우선 편견 없이 바라보고 생각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오랜만에 나가는 해외 나들이 이다 보니 마음이 설렌다.
북베트남(North Vietnam)에 들어가다.
이번 일정은 북베트남, 즉 하노이와 하롱베이를 거처서 캄보디아의 씨엠립에 가서 앙코르 와트의 유적을 보고 다시 남베트남으로 가서 호치민 시내를 반문하기로 되어 있다.
하노이 상공에서 내려다보니 논과 밭이 번듯하게 정리된 데에 자못 놀랐다.
‘하, 그래! 사회주의 국가니까 가능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간다. 나는 평소 베트남 하면 전쟁을 곧바로 떠올리고, 그 외는 「민족주의가 강한 후진국, 호치민, 프랑스와 미국과 같은 강국을 물리친 국민」정도로 밖에 아는 것이 없는 나로서는 그러한 사실이 첫 번째 놀라움 이였다.
베트남항공[VN]기가 노쇠한 몸뚱이를 힘겹게 땅에 내려놓는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숨이 콱 막혀 온다.
“어, 이거 장난이 아니네!”
“와~~ 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하노이 노이바 국제공항의 규모는 우리나라 지방공항 수준 이였다. 공항에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Halong Bay 국립공원으로 이동했다. Halong은 한자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즉 하룡(下龍, 용이 내려오다)이 베트남식 음으로 표시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과 음이 비슷한 면이 많다.
또 하노이는 하내(河內)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니 더욱 그러하지 아니한가? 베트남은 중국의 한나라 건국 이래 직・간접으로 근 1천여 년을 중국의 지배를 받아왔다고 한다. 그러한 영향으로 언어, 풍습, 문화 등 여러 곳에서 중국의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인도차이나 반도는 고대에 인도의 문화권에 있었으나, 베트남만은 중국의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캄보디아, 태국, 라오스, 미얀마 등은 오른 손을 이용하여 밥을 먹으나 베트남에서는 수저 등 도구를 사용한다.
Halong Bay는 3천여 개의 섬이 있는 만이다. 그래서 바다라기보다는 잔잔한 호수와 같았다. 6월 9일에 이곳을 답사 했다. 마치 우리나라 남해안의 놀잇배 모양으로 선상에서 술과 음식을 할 수 있고, 가무시설을 갖춘 배에 올랐다. 3천여 개의 섬 중에 한 섬에는 천궁동굴(天宮洞窟)이 있다. 규모는 작으나 아기자기한 것이 동굴로서의 모습은 갖추고 있었으나 불행하게 죽은 동굴 이였다.
하롱베이가 내가 첫 번째로 본 베트남의 모습이다. 베트남 하면 전쟁의 비극을 극복하고 활기차게 일어나는 나라로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보다는 무질서 하고 무기력해 보였다. 물론 내가 본 베트남의 한 부분이 그 나라 전부를 판단하기에는 역 부족이다. 그래서 가벼이 결론을 말할 수는 없지만 노이바 공항에서 하롱베이에 이르는 3시간의 버스 이동 시간 차창에 비친 베트남의 모습을 통해서 바라본 베트남과, 하롱베이에서 하룻밤을 머물면서 느낀 점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길가의 주택은 노선에 접한 면의 폭이 3~4m이며 길이는 길다. 이러한 현상은 공산주의를 하면서 보다 많은 사람에게 큰 도로에 접한 토지를 고르게 분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건물의 기능이 많이 떨어지고, 앞으로 재개발이나. 재건축을 할 때 문제가 많이 따를 것 같다.
논농사가 주인 이곳에서는 2모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남쪽에서는 3모작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기계화가 되지 않아 축력과 인력으로 농사일이 이루어진다. 전체 인구의 70%가 농사에 종사하는 농업국가로서는 무기력해 보였다.
베트남의 장례풍습이 이채롭다. 사람이 죽으면 마을 앞(논길)에 시멘트로 가묘를 만들고 시신을 3년 동안 안치한다. 3년 후 탈골된 유골을 수습하여 분쇄해서 다시 조그마한 무덤을 만든다. 옛날에 우리나라의 일부 지역에서 시행된 풍장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백제의 무렬왕이 장사 3년 후에 지금의 무렬왕능으로 이장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우리나라도 고대에는 일부 지역에서 그러한 장례문화를 가지고 있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답사를 통하여 전반적으로 느낀 점인데 베트남이 외부에 개방하여 외국인이 많이 드나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간판이나 안내판이 영문으로 된 것이 없다. 이곳 하롱은 아예 영문을 찾아 볼 수 없어 내가 필요한 곳을 찾는 것이 불가능했다.
DAIW00 HANOI HOTEL에서
다시 하노이로 돌아왔다. 시내는 온통 오토바이 물결이다. 베트남의 상징과도 같이 된 거리의 오토바이는 무질서의 표본과 같이 느껴졌다. 각자가 자연스럽게 울려대는 경적 소리와 오토바이의 2기통 엔진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내는 소음은 더운 날씨에 찌든 나그네를 매우 피곤하게 만든다. 혼란스러움 바로 그것이다.
하노이로 들어와서 대우하노이호텔에 짐을 풀었다. 김우중 회장께서 지으셨고, 또 최근까지 머물렀던 곳이라고 생각하니 정감이 간다. 규모나 시설 면에서 과히 세계수준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방송 YTN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저녁을 마치고 Bar에 앉아 마시는 한 잔의 맥주 맛은 이국의 나그네 피로를 일시에 쫙 풀어준다. 생으로 연주하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귀를 기우리며 아오자이 속에 가무잡잡한 속살을 살짝 드러내며 서빙하는 베트남 여인의 가녀린 몸이 나그네의 외로움을 돋운다.
Ho Chi Minh 묘 탐방
다음 날 호치민의 시신이 안치된 묘와 생가 등을 찾았다. 베트남 국부로 추앙받는 Ho Chi Minh은 1890년에 태어나서 베트남을 프랑스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했으며, 베트남 전을 이끌어 승리한 영웅이다. 그는 베트남전이 한창 진행되던 1969년에 죽었다. 그는 민족주의자로서 일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베트남 민족을 이끈 자이다.
그러나 내가 호치민을 숭배해야 할 이유는 없다. 1969년에 호치민이 죽자 베트남 공산당에서는 그의 죽음을 숨기고 시신을 약품 처리하여 보관해 왔다. 1975년 4월 30일에 전쟁이 끝나자 그의 시신을 미라와 같이 처리하여 안치하고 성역화 하였다.
나는 그의 묘를 방문한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민족주의자라고는 하나 베트남 공산당을 이끌고 자유진영과 싸우지 않았는가? 내가 존경하지도 않는 사람의 무덤을 찾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시신을 39년간 부패하지 않게 보관한 그 사실은 나의 흥미를 일으켰고, 또 강하게 유혹했다.
입장하는데 매우 엄격하게 통제하며, 모자를 벗고 오른 손으로 들으라는 명령조의 지적을 받고 내심 불쾌했다. 다행히 그의 시신에 경배를 올리는 의식은 없었다. 만약 그러한 의식을 요구 했다면 나는 방문을 포기했을 것이다.
시신이 안치된 방에 들어서니 장례예식장의 시신 안치소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가 나고, 음울한 불빛이 시신을 엷게 비치고 있다. 살아있을 때의 호치민의 모습을 모르기에 시신이 어느 정도 사실성 있게 보관되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산 사람이 조용히 잠자는 느낌이었다.
베트남은 북쪽의 하노이가 정치・경제・행정 중심도시이고, 남쪽의 호치민시(전, 사이공 시)는 상업・문화 도시이다.
하노이의 중심지이며 정치의 중심지인 이곳은 공산당 당사가 있으며, 각종 중앙청 청사가 있다.
나는 한 가지 깜짝 놀란 일이 있다. 베트남이 한자 문화권의 나라라는 사실이다. 문묘를 방문하니 이 나라가 과거에 과거시험(科擧試驗)을 거처 관리를 등용하고 한문을 숭상했던 점을 보고 놀랐다.
현재 사용 중인 베트남어는 17세기 초에 프랑스 선교사 로드가 로마자를 이용하며 음을 문자화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후 한자와 함께 사용하다가 19세기말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로 통치하고부터 급격히 보급되어 이제는 유일한 국어가 되어있다.
Cambodia Siem Reap에 들어가다.
하노이를 출발하여 캄보디아의 씨엠립(Siem Reap)에 도착 하였다.
씨엠립은 인구 12만 명 정도에 우리 교민은 700명이 있다고 한다. 이 도시가 관심을 끌게 된 이유로 앙코르톰과 앙코르 왓트의 관광객 덕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관광객이 연 40만 명이 찾는다고 한다. KAL과 Asiana가 정기 운행하고 있다.
씨엠림 공항건물을 보니 퍽 정겹다. 그곳 전통가옥을 모방하여 만든 아담한 모습이 나를 포근하게 맞아 준다.
시내는 한산하나 전형적인 열대 분위기다.
저녁식사는 평양 식당에서 했다. 식당에 들어서니 미모의 여성이 반갑게 맞아 준다. 나를 만나자 마자 물건을 사라고 소개한다. 뱀술을 살라기에 나는 뱀술을 먹으면 까무러친다고 했더니, 다음에는 북한산 씨알리스를 권한다. 그게 뭔데? 하고 짓 굳게 물으니 남조선 아버님들이 많이 산다고 대꾸한다.
평양냉면은 시켰더니 밥이 나온다. 밥은 필요 없고 냉면이나 달라고 했더니 대답은 아니 하고 규정에 정해진 대로 밥을 가져온다. 술을 한잔 하고 있으니 냉면이 나온다. 냉면 맛은 서울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공연시간인가 보다. 열심히 식사 서빙을 하던 여자가 갑자기 노래를 하고 춤을 춘다. 주방에서 일하다가도 노래할 순서가 되면 뛰어나와 노래를 부른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감정을 바꿀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니, 마치 잘 훈련된 병사의 행동 같았다. 내 마음이 머쓱해 진다.
캄보디아는 오랫동안 외침과 내전을 겪다 보니 국가운영이 형편없다.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행정적으로 무능하며 무질서한 면이 곳곳에서 보인다. 국가는 국민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국민들은 각자가 알아서 자기 살길을 찾아야만 한다. 다행히 열대이기에 그런대로 생존이 가능하지 그렇지 않으면 국민 모두가 굶어 죽던지, 아니면 추위에 얼어 죽을 것만 같다.
앙코르(Angkor) 유적 사원을 찾아서
나는 평소 인류의 유적 중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두 곳이 있었다.
하나는 잉카제국이 남긴 유적지이고, 또 하나는 바로 앙코르왕조가 남긴 유적지, 이곳이다.
이번 답사여행에서 이곳이 없었다면 나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하였다.
먼저 앙코르톰을 찾았다. 앙코르는 왕도(王都)라는 뜻이고 톰은 크다(大)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 앙코르톰은 곧 큰 왕도가 된다.
숙소에서 잠시 이동을 하니 매표소가 나온다. 매표소라고 하여 담장이 있고, 시설을 갖춘 것이 아니라 평원 속에 난 길 중간에 1평정도의 건물이 전부다. 1일 관람권이 20불이다. 한 장만 가지면 당일에는 앙코르와트와 앙코르톰을 관람 할 수 있다.
앙코르톰은 이곳에서 남쪽으로 1.5Km정도 떨어져 있는 앙코르와트와 함께 세계 7대 볼가사의한 문화 유적중의 하나이다. 어떻게 이렇게 거대하고 정교한 석조사원을 정글의 한 가운데에 만들어 놓았을까?
그 힘은 어데서 나왔는가? 왕권인가? 신인가?
어느 것 하나 똑 부러지는 답을 얻기가 어렵다.
앙코르톰은 1200년경에 자이바르만 7세가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1면의 길이가 정확하게 3km인 정사각형 성벽을 쌓고 그 주변에서 해자를 파 놓았다. 성벽에는 5개의 외부와 통하는 문이 있으며, 문의 앞면에는 7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뱀을 악신과 선신이 껴안은 상의 열로 난간을 만들었으며 문은 4면상으로 탑을 이루고 있다.
이곳 유적은 앙코르왕조가 13세기 말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15세기 경에 완전히 멸망함에 따라 그 거대한 모습을 정글 속에 묻히게 된다. 그 후 19세기 중엽에 프랑스의 박물학자가 표본채집을 위하여 다니다 주민들의 말을 듣고 찾아가 보니 거대한 석조건물 군이 있음을 발견하고 나서 세상에 알려졌다.
오랫동안 가꾸지 아니하고 자연 속에 방치되다보니 훼손정도가 심하다. 권력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을 왕조는 어디가고, 부식되고 허물어진, 그리고 나무뿌리에 그 모습을 잃어가는 거대한 석조물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제행무상이라, 어느 것 하나 그 존재가 영원함이 없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닺는다.
나는 앙코르톰 남문을 거쳐 바이욘사원에 이르렀다. 우람한 다리를 건너서 긴 회랑이 나온다. 사원의 많은 부분이 파손되어 있었으나 회랑 벽에 새겨진 부조는 조금도 손상됨이 없이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부족간의 전투장면, 일상생활 풍습, 당시의 복식과 생활방식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은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하고서 보존하여 오고 있다. 현재 프랑스, 일본, 중국 등에서 자기예산과 유네스코 보조금으로 복원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와의 갈등 속에서 파손되고 외침과 내전이 끊이지 않았던 관계로 그 복원이 원만하지 못할 것 같다.
사원의 구조는 흰두교와 불교문화가 교차되고 있다.
건축양식은 인도의 영향을 일부 받았다고 하나 대부분이 앙코르 왕조의 독자적 양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힌두교는 범아일여(梵我一如)라 하여 우주의 최고신인 브라흐만과 자기를 일치 시키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불교는 무아(無我)라 하여 나의 존재를 떠나서 분별과 소유에 집착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 앙코르 왕조는 인도의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왕이 죽으면 그가 믿던 신과 하나가 되어 왕이 곧 신이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왕은 즉위와 함께 자신이 신이 되어 머물 신전, 즉 사원을 건립하는데 주력하였다. 고구려 때 권신들이 살아 있을 때 자기가 들어갈 무덤을 꾸미는 일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당초 그러한 목적으로 건립된 사원이 후에 불교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의 바라문의 신상(神像)은 파괴되고 불상(佛像)을 모시게 됨에 따라 불교사원이 되었다.
바리욘사원 등 모든 사원이 보통 3단의 구조로 되어 있다. 1단은 욕심에 찌들어 자기만을 생각하는 중생들이 머무르는 공간이고, 2단은 보살, 즉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 하여 나의 이익과 남의 이익을 함께 생각하는 수행자가 머무는 공간이다. 그리고 최 상단은 깨달은 자, 즉 부처님이 사시는 공간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3단의 세계에 이르는 계단은 발을 디디는 폭이 좁고 경사가 급하여 네 발로 경건하게 오르지 않으면 아니 되도록 구조를 가지고 있다.
바이온 사원을 보고, 바푸온 사원을 거쳐 피메나카스 사원을 보고, 다시 왕궁터에 이르니 주춧돌 하나 남아있지 않다. 이어서 따께오 사원과 타프롬 사원의 관람을 오전 중에 마쳤다. 이러한 모든 사원이 사방 3Km의 공간속에 들어있다.
이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음미 하면서 보려면 며칠이 필요한 것 같다. 대충보고 나오는 마음이 무겁다.
혼자 생각해 보았다. 이 사원을 건립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을까? 여기에 동원된 사람은 노예일까? 아니면 정당한 임금을 받은 노동자일까?
이 거대한 축조물을 세우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국력이 있어야 가능하며,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과연 앙코르왕조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모두 지배한 왕조였단 말인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더위를 식히고 점심을 먹었다.
Angkor wat 사원
오후에 앙코르와트 사원에 도착 했다. 더위에 지친 몸에다 점심 후라서 나른하기 이를 데 없다. 우선 해자 폭이 200여m는 될 성 싶다. 푸른 물이 가득히 고여 있어 당시 이곳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해야 했을 것이니 과히 철옹성 이였을 듯싶다.
이 사원 해자를 건너는 다리에도 7개의 머리를 가진 긴 뱀을 한쪽에는 악신이 한쪽에는 선신이 끌어당기는 형상의 조각물이 늘어서 있다.
세계 7대 볼가사의의 하나라고하니 그 규모와 신비함. 정교한 회랑의 조각물이 신의 솜씨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앙코르와트 사원은 동서로 1.5km 남북으로 1.3km의 직사각형의 외벽 안에 있다. 사원의 특징은 참배객이 회랑을 따라 할 수 있도록 제1회랑은 215m×187m에 높이가 4m이고, 제2회랑이 115m×100m에 높이12m 제3회랑이 60m×60m에 높이가 25m이다.
중앙에는 높이 60m 규모의 수미산을 연상하는 인공 탑이 있다.
제1회랑의 벽에는 캄보디아의 신화를 부조로 새겨놓은 것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것 같다. 그러나 일부는 미완성된 채로 남아 있다.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왕이 승하하였을 것 같은데 그는 과연 깨달음의 세계, 또는 브라흐만의 세계에 도달 하였을까?
동양 최대의 톤레삽 호수
동양에서 가장 커다란 톤레삽 호수에 가보았다. 폭20여m의 운하를 따라 배로 달린다. 운하 주변에는 수상가옥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수상가옥을 관리하기 위하여 학교도 있고 경찰서도 있다. 여기에 사는 사람은 90%가 톤레삽에서 물고기를 잡아 파는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한참을 달리니 호수라기보다는 바다와 같은 넓은 호수가 나타난다. 멀리에는 띄엄띄엄 수상가옥이 보인다.
우리배가 호수에 다다르니 주위에서 벌떼 같이 구걸에 가까운 잡상인이 모여든다. 나는 그들을 외면해야만 했다. 그것이 이곳 정부 방침이라고 한다.
이 호수는 에베레스트산의 눈 녹은 물에서 시작하는 강줄기가 여기에 모여들고, 다시 이곳에서 강을 만들어 흘러서 베트남의 메콩강을 만든다.
호수관람을 마치고 배에서 내리자 구걸하는 아이들이 벌떼 같이 모여든다. 굳이 외면하는 내 곁으로 유달리 얼굴이 검고 남루한 차림의 소녀가 “완 달라, 완 달라.” 하면서 접근 한다. 나는 끝까지 외면했다. 그러면서 가끔 그녀와 눈빛을 마주쳤다. 조용한 눈빛에 서려있는 완곡한 호수와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내가 탄 버스가 떠날 때 그녀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며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나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 나는 울었다.
흐느끼지도 못하고 눈물을 닦아야만 하는 내 심정은 누구도 몰랐다. 그 소녀는 알고 있을까? 지금도 나의 망막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그녀와 나는 무슨 인연일까?
나의 옛 연인이 사후에 그녀로 환생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와 그녀는 전생에 죄가 많았었나 보다. 다음 생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내가 호치민 묘를 방문했을 때 고산족을 만났다. 소년 소녀들의 어두운 눈빛, 초라한 옷차림 등에 끌려 20달러를 건네니, 그렇게 좋아하던 모습과, 그 소녀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캄보디아의 빈민은 누구를 원망이나 할까?
몇몇 욕심쟁이들의 권력다툼에 희생되고 무능한 정치인과 무관심한 행정인 들의 착취 속에서 그들은 헤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캄보디아의 어리석은 정치가들이여 진정 자신을 낮추고 순박한 국민을 위하여 욕심을 거둘 수는 없단 말인가?
호치민 시에서
호치민시의 탄손누트 공항에 착륙하니 비가 억수로 내린다. 비가 내린다기보다는 물동이로 들어붙는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공항건물을 나서니 시내는 물바다 이다. 그 곳에 즐비하게 달리는 오토바이는 하노이 보다 더 심하다.
무질서, 소음, 정비되지 않은 시내도로, 휴지가 제멋대로 나뒹구는 거리 등 무엇 하나 정돈된 것이 없다. 보도를 자기 가게로 사용하는 상점, 그들이 파는 음료수와 도시락 반쪽으로 한 끼 식사를 때우는 많은 서민들의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호텔 밖 5m를 벗어나면 매춘녀가 붙잡고 집요하게 늘어진다.
아침에 시내 산책에 나섰다. 조그마한 공원이 있기에 벤치에 앉아 있는데, 20대 중반의 여성 셋이서 자연스럽게 마약을 투약한다. 섬뜩하다. 무질서의 극치이다.
싸이공하면 전시에도 낭만적으로 비춰졌던 내 기억과는 너무나 거리감이 있어 실망했다.
메콩강의 많은 여러 개의 섬 중에서 유니콘 아일랜드를 찾았다. 섬 속에는 과일 농장이 있고, 수공업으로 각종 농산물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다.
탄손누트 공항에서 새벽 1시30분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하여 대기 중인데, 캄보디아 여인이 서울에 간다고 한다. 우리말도 못하고 서울에 와본 경험도 없다고 한다. 여권을 보니 한국비자가 있었고, 입국목적이 남편과 함께 살기 위해서라고 적혀 있었다.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에 불안과 초조가 깃들었고 순진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내가 돌보기로 하고 인천공항까지 안내해 왔다. 그런데 국내에 연락처가 없어 입국이 안 되기에 내 주소와 연락처를 대고 입국 시켰다. 입국장에 나와 보니 기다릴 것으로 믿었던 초청인이 보이지 않는다. 안내방송을 해도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더 기다릴 수 없어서, 기다리다 초청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연락하라고 내 전화번호를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연락은 없지만 자꾸 그 여인이 잘못되지는 않았나 하고 걱정이 앞선다. 캄보디아의 톤레삽에서 만난 10세쯤의 어린 소녀와 인천공항까지 동행한 22살의 여인의 얼굴이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지난날 우리의 모습이 그랬는데 그들도 우리와 같이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 국가를 부흥시키고 잘 살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또 우리도 오늘을 지키면서 내일을 일구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피곤한 몸으로 버스에서 내리니 반갑게 맞이하는 아내가 있어 나는 여정을 마칠 수 있었다. 만약 나에게 돌아갈 가정이 없다면 여행은 끝이 없이 이어질 것이다. 이것은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다.
이번 여행을 통하여 보고 느낀 점이 전부가 아니며 이 글이 그 나라의 모두를 말한다고는 말 못한다.
사실을 편견 없이 직관적으로 표현했는지는 나도 자신이 없기에 두려운 마음으로 이글을 맺는다.
쎄느강의 리브꼬쉬
(SEINE강의 RIVE GAUCHE)
이 글은 네델랜드와 프랑스 빠리의 도시계획 실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방문하고 돌아와 제출한 보고서를 수정한 것이다.
NETHERLAND ALMERE(네델란드 알메르)
물의 나라, Netheland는 중서부 유럽에 위치하며, 북해를 통하여 북부 유럽과 통하고, 도버해협과 영국해협으로 대서양에 이를 수 있는 바다에 접한 나라이다. 이러한 자연적 여건을 활용하여 이들은 일찍이 해양권을 장악하고 해외식민지를 개척하여 16, 17세기에는 부를 누렸으며, 지금도 그 당시 건축된 화려한 건축물을 Amsterdum 시내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Netherland의 수도인 Amsterdum은 면적이 637㎢이며, 인구는 74만 명이다. Netherland 최대 무역항이며 중서부 유럽의 허브공항으로 역할을 다하는 Schiphol 공항이 있어 유럽의 인적 ․ 물적 이동의 중심지이다. Amsterdum은 13세기에 어민들이 Amster강가에 dum을 만들어 정주한데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Amsterdum은 17세기에는 세계 최대의 상업도시로서 그 황금기를 누렸다고 하는데 현재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Netherland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하고 있다. 이곳은 크고 작은 운하가 동․서․남․북으로 있어 70여개의 섬을 500여개의 다리로 연결하여 생활하고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Amsterdum은 인구, 국가 기능의 집중으로 지가상승 등 도시가 가지는 병폐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주민들은 자연스레 쾌적한 교외 지역을 선호하게 되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신도시 개발을 계획하고 추진한 것이 「Almere 신도시 건설 계획」이다.
Almere 新都市(신도시)
Almere는「큰 호수」라는 뜻이다
Almere 신도시는 Amsterdum 동북쪽 30㎞ 지점에 위치하며 Amsterdum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있다. 교통은 하나의 다리에 철도, 일반도로, 고속도로가 있다. Almere는 Netherland 특유의 기술인 방조제 공사와 연계하여 만들어진 도시다.
Netherland 정부에서는 1967년부터 Markemeer만에 방조제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1969년까지 방조제 축조를 완료하고 1976년까지 토지 건조를 마친 후,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시 건설을 시작한 것이 Almere 시이다. 2004년 현재 37년째이다.
면적은 18천ha(5,420만평)이며, 현재 인구는 18만 명이나 2020년까지는 40만 명으로 계획하고 현재도 도시가 형성되고 있다. 9천여 개의 공업시설이 활동하고 있으며, 계획 인구밀도는 22.2인/ha 이다.
6개 권역으로 구분 개발
Almere 신도시는 전 지역을 동시에 개발하다 보면 실수도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 실패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6개로 권역을 나누어 단계별로 개발하고 있다
Almerestad 지역은 Almere 신도시의 중앙에 위치하며 교통, 관공서, 상가, 병원 등이 있고, Almere시의 중심적 기능을 하고 있다.
Almerepoort 지역은 Almere의 서부지역에 해당하며 Almere Haven지역은 서남부에 있다. 또 AlmereHout지역은 동남쪽에 위치하면서 주택지, 스포츠 시설이 특화된 지역이며 AlmereBuiten은 동부에 위치한다. 끝으로 Almere시의 서부지역에 있는 AlmerePampus는 Marke meer과 접한 지역으로 그 여건과 걸맞게 수상스포츠 등 관광위락지로 개발하고 있다
계획된 도시
Almere는 바다를 막아 물을 퍼내고 만든 땅에 계획된 도시로서 도시를 계획하는데 장애는 없었을 것으로 본다. 다만, 도시가 해수면보다 낮기 때문에 물 처리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이들의 전문적인 기술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Almere는 이러한 개발환경에 맞도록 이상적 도시를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다. Almere지역은 크게 농지, 녹지, 수로(호수), 건물지로 나눌 수 있다.
농업으로부터 자연을 지키기 위하여 20만평 정도의 농지를 소유한 자에 한하여 젖소 100두 정도를 사육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고 한다. 젖소가 배설하는 배설물과 젖소 먹이를 얻을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고려한 자연지킴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Amsterdum과 Almere를 연결하는 교통수단은 다리 하나에 설치된 철도와 일반자동차 도로, 고속도로가 유일하다.
그래서 18만 명인 현재 인구가 이동하는데 많은 교통정체를 빗는다. 그래서 Almere시 당국에서 Amsterdum과 연결하는 교통대책은 수립 중에 있다고 한다.
Almere시를 건설할 당시 4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위성도시로 계획했으나 현재 18만 명인데도 이러한 시행착오가 발생한 것은 계획 당시의 착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Almere시는 자족 도시로 육성시켜 나가고 있다.
그림 같은 건물 구조
서울의 거리를 걷다 보면 건물 모양이나 색상이 비슷비슷하다. 특색이 없다는 말이 되겠다.
물론, Amsterdum, Paris, Madrid, Risbon 등의 도시 중 구시가지도 형편은 비슷하다. 그러나 이들 도시의 신시가지를 보면 건물의 다양함은 예술이다.
Almere시는 이러한 EU국가의 경향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공건물이나 상가의 건물이 같은 모양, 같은 색상을 갖지 아니하고 모두가 특화되어 있다.
Almere stad의 주택지를 일예로 소개하면 일정단위로 Block화하고 그 Block을 운하로 구획한 후 Block별로 건축 전문가가 참여하여 건물의 모형과 색상 등을 특화하였다.
주택지는 영구임대주택지와 고급주택지로 구분 개발하고 있으며, 어린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10분 이내 거리에 학교를 배치하였다. 주택지 Block 중간 중간에 충분한 녹지 공간을 주어 주민의 휴식공간과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모든 전선은 지하화 하였다. 입주한 집주인이 자기 집을 수리할 경우 외부 모형이나 색상을 임의로 바꿀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다.
이러한 계획 개발은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비인간적이라는 일부 주민의 평도 있다고 한다.
Almere시 견학을 마치고
Almere시는 당초 Amsterdum의 Bedtown으로 계획하고 추진하였으나 현재는 미래지향적 신도시로, 자족(自足) 도시로 육성되고 있다.
단기적 계획추진으로 인한 시행착오를 없애기 위하여 사업기간을 충분히 주고 6개 구획으로 나누어 단계별로 개발함으로서 한 곳에서의 시행착오를 다음 곳에서는 시정하는 신중한 도시건설이 우리에게 생각할 바를 시사하고 있다. 도시는 한번 건설하면 단시일 내에 시정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충분히 긍정할 부분이다.
섬으로 이루어진 Almere를 건설하면서 Amsterdum에서 연결되는 다리를 하나만 만들어 결국 계획 인구의 반도 아니 되는 인구가 이동하는데 교통문제가 발생한다면 당초 계획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Almere 내부에서는 충분한 도로망을 갖추고 있다. 계획 단계에서 3개정도의 접근 주도로를 구상하였으면 그러한 착오를 없었을 것으로 본다.
신도시를 계획하면서 인간 중심의 친환경적인 면에서 접근하였다 건물 중심지 중간에 농지를 배치하고, 건물지 사이사이에 충분한 녹지 공간을 두어 경제적 가치만을 지향하는 우리의 도시계획과는 많은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지나치게 인위적인 도시구성은 우리의 정서에 반할 수도 있음을 마음에 두고 도시계획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FRANCE의 PARIS 13구 재개발사업
Paris Rive Gauche 재개발사업
「Paris 13구의 Rive Gauche재개발 사업」은 France의 수도인 paris시의 13구내의 Austerlize 역과 Massen의 거리 일대 130ha를 재개발 하는 사업을 말한다.
이 지역의 재개발 사업은 Paris시가 주도하여 1991년부터 「Paris Rive Gauche(파리 리브 고쉬)」재개발 사업 계획」을 수립하여 본격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다.
France의 지방자치 제도
Rive Gauche 재개발 사업의 성격과 이해를 돕기 위하여 먼저 France의 지방자치 제도를 알아보기로 한다.
EU에서도 전통적으로 중앙집권성이 강했던 France는 1982년 이후 지방자치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 되었다. France는 자치단체가 자율적으로 시행하는 「자치행정」과 국가에서 지방에 파견하여 국가 행정을 수행하는 「국가의 지방행정」이 있다. 지방자치 행정은 분권(分權)이 원칙이고 국가의 지방행정은 분산(分散)이 원칙이다.
지방자치구조는 Région과 Département, Commnne가 있다.
레종(Région)은 총 26개가 있으며, 법인격을 보유한 자치단체이면서 국가의 지방행정기구 역할도 한다. 자치행정권은 의결권과 집행권 모두를 레종의회에서 행사 한다.
데팡트망(Département)은 레종과 같이 법인격을 갖춘 지방자치단체 이면서 국가의 지방행정 기구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창설된 이래 현재는 100개가 있다.
꼬뭰(Commnne)은 최소 행정단위 이면서 동시에 법인격을 갖춘 자치단체이다. 주민직선에 의한 의원으로 의회가 구성되고 의결권을 가지면서 의회 의장은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집행기구를 통괄한다.
레종과 데팡트망의 단체장은 의회에서 선출하고 있으며 president라고 한다. 꼬뭰의 단체장은 시의원 중에서 선출하고 시장이라고 한다. 현재 꼬뭰은 36,779개가 있다.
Paris 13구
paris시는 데팡트망과 꼬뭰의 성격을 가진 자치행정 단체이며 20개의 구로 이루어졌다. 인구는 200만 명으로 전체 규모가 서울시의 5분의 1정도이다. 13구는 paris시 남동쪽, 세느강 남단에 위치하고 20개 구 중에서 세 번째 규모이다. 자치행정권이 없는, 즉 꼬뭰의 자격이 없으면서도 주민이 직선한 36명의 의원이 있고 시장이 있다.
자치권이 없으므로 도시계획, 복지정책, 주택정책 등 모든 분야에서 계획은 paris시에서 하고 구는 계획단계에서 의견을 제시하며, 집행권만 갖는다.
13구에서는 복지정책으로 탁아소, 놀이방 등을 늘리고 자전거 도로 등 대중교통확보와 노인복지정책, 특히 복지주택 건설과 일자리 창출에 역점을 두고 있다.
Rive Gauche 재개발 사업
재개발을 추진하게 된 이유
13구는 1724년경 구획정리가 시작된 이후 1860년경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공업이 발전하였으며 공장근로자가 다수 거주하게 되었고 이에 편승하여 해외 이주자가 모이게 되었는데, 특히 Asia 출신자가 많이 증가하여 현재 도시 인구의 12%가 아시아인이다.
이러한 현상은 주택의 질이 낮아지고 사회복지 비용을 증가시켰으며 복지주택 건설의 요인을 제공하였다. 현재 13구의 81%가 사회복지주택, 즉 임대주택이다. 또 무주택자, 불량자시설의 수요를 증가시켜 13구에 있는 이들 시설은 paris시 전체의 41%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복지주택과 일반주택, 복지시설이 혼재하여 행정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으나 각종 800개 정도의 시민단체가 힘을 보태고 있다. 인구 면에서도 젊은 노동자 계층이 많으면서 기업체 간부급, 고용주 등이 복합성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 ․ 행정적 측면은 주민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고 행정적으로 많은 관리 비용을 요구하게 되었다.
한편 도시 구조적 측면에서 보면 이 재개발구역은 몇 년 전만해도 폐쇄된 창고, 거의 사용되지 않는 철도, 하향일로에 있는 소규모 기업들과 불량 주택이 소수 있던 미개척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곳의 소규모 기업들마저 다른 곳으로 이전해 감에 따라 이 지대는 거의 황무지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곳은 Paris시가 아니라고 할 정도로 낙후된 곳이었으며, 열악한 도시시설을 정비하기 위하여 재개발을 필요로 했다.
재개발 사업 계획
Rive Gauche 재개발 사업지구는 13구 전체 면적의 10%에 해당하는 면적이며 Paris 면적의 2%에 달한다. 이러한 규모는 19세기 오스만 지사 이래 최대의 건설 사업이다.
<사업 규모>
◦ 총면적 - 1,289천㎡(39만평)
- 135,700㎡(41,100평) : 주거 공간(이중 50%는 사회복지 APT 건설 용지)
- 70,000㎡(21,200평) : 사무실(직장인 5 만 명 수용)
- 150,000㎡(45,500평) : 상업, 서비스업, 수공업등의종사자시설(10,000여명취업보장)
- 17,500㎡(5,300평) : 항만시설
- 250,000㎡(75,760평) : 국립도서관
- 250,000㎡(75,760평) : 공공시설
⇒대학(200,000㎡), 병원, 문화시설 등
- 99,000㎡(30,000평) : 녹지공간
- 기타 : 도로 14.9km.가로수2,850그루,
가로등 3,900주.
<사업주체> - Semapa
재개발 주체는 Paris시 이나 실질적 계획과 사업을 주관하는 민관혼합회사인 Semapa를 설립하여 운용하고 있다. Semapa는 파리시(주식의 57%소유), 정부(5%), 일드 프랑스(5%), 파리주택공사(10%), 프랑스 국립철도청(20%), 기타의 자본으로 구성된 혼합회사이며 사장은 13구의 시장이 맡고 있다.
Rive Gauche 개발과 관련하여 모든 법적, 기술적 문제의 책임 을 담당하는 50여명의 각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공사기간>
이 지역을 활기찬 새로운 Paris의 동부 중심지로 개발하기 위하여 1980년 6월부터 개발계획이 시작되었으며, 행정적으로는 1991년부터 이다. 실질적 개발 주체인 semapa가 설립되어 계획, 공공시설 착공 등 전문적인 계획과 시공권을 시로부터 위임 받았다. 실제 공사에 들어간 것은 1994년 국립도서관 주변에 거주지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1994년부터 2000년 기간에 국립도서관과 그 주변을 시작으로 재개발 공사가 진행, 완료 되었으나, 나머지 구간을 완료하기 까지는 2010년~2015년이 될 것이다.
<지역별 계획>
Semapa는 Rive Gauche 재개발의 기본 방침으로 크게 5개의 중심지역을 만들고 각 지구별로 컨셉을 몇몇 도시전문가에게 위임하여 계획 했다.
프랑스(Fance) 거리
이 거리는 오스테를리츠 역과 마세나 거리를 잇게 되고 개발지역의 중심은 지나는 거리로서 세느강에 이르는 13구의 길들이 이 거리에서 만나게 했다
이 거리는 매우 넓은 보행자 중심도로로 만들어지며 양 끝 차선은 버스전용차선으로 활용 된다
똘비약 (Tolbiac) 지구
국립도서관 주변 지역으로 1994년부터 시작하여 이미 APT에 입주하였고 주변 사무실도 완료된 상태다
이 지구의 공공시설은 탁아소, 유치원, 교회. 주차장(470대 수용), 공원(6,600㎡), 주변시설과 상가 등이 조성되어 있다. 1층 상가, 2층 이상은 주거용으로 건물이 완성되어 APT에는 입주가 완료되어 있으나 상가는 비어있다. 그 이유는 첫째 APT입주자가 소란하다는 이유로 상가 입주를 반대하고, 둘째 paris 주민은 대부분 시내에서 쇼핑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타산이 없어 상인이 입주를 기피하기 때문이다.
오스테를리츠 (Austerlitz) 지구
이 지역은 Rive Gauche와 파리 중심지를 연결하는 지구로 개발 이전에 이미 많은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주거지역은 대부분 재 보수되어 보존되며 추가로 학교와 주차장(700대수용), 세 개의 공원(9천㎡)이 더 건립될 예정이다. Austerlitz 기차역은 현재 위치에서 동쪽으로 이설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기차역과 철길을 지상에서 복개하고 있다. 복개된 위에는 도로를 만들고 녹지로 활용하게 된다. 이설 공사가 완료되고 나면 현 기차역과 철길 부지는 새로운 시설로 개발하게 된다.
쉬발르헤 거리(Chevaleret)
이 거리는 파리 남쪽 지역과 잇는 길로 13구의 역사적인 옛 건물들이 들어서 특별한 개발 연구가 실시되었다. 이 지역의 개발목표는 옛 건물들과 새로운 개발 지역을 조화롭게 연결하는 것이다
마세나(Messna) 지구
Rive Gauche 동쪽이며 산업 건축물은 그대로 보존될 것이다. 파리7대학과 동양어 문화국립 연구소 등 연구 중심 단지로 조성될 계획이다
개발계획의 수정 시행
전체 공정의 40%정도가 시행된 상태(2000년 보고서)에서 계획이 일부 수정(2003년)되었다.
당초 계획보다 수정된 내용은
◦ 고등교육 부지가 130,000㎡ 확장되고(총 210,000㎡), 연구․개발 중심지구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 이 재개발 구역 내에 paris 7대학, 건축학과, INALCO 어학학교 등이 들어서며 대학생과 연구원용 APT를 400개 추가하여 1,000개를 만든다.
◦ 4,000㎡의 부지에 문화시설을 만들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 등은 복원하여 문화예술을 위한 장으로 용도를 변경한다.
◦ 사무실용 부지는 200,000㎡ 줄이고 연구소와 상업, 각종 서비스 시설용 면적을 더 늘리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 주거용 시설은 50%를 국영주택으로 할 계획이다
◦ 세느강에 수영장을 갖춘 배를 띄우기 위해 현재 건조하 고 있으며 극장을 추가로 건립할 계획이다
◦ 녹지를 20,000㎡ 확대 한다
이러한 계획 변동은 공사기간이 2010~2015년인 Rive Gauche 재개발 사업이 앞으로 어떻게 다시 변경될지 모르는 실정이다. 실제로 Semapa 부사장도 이점을 염려하며 다음과 같이 말을 맺었다
ꡒ그때 건축가가 누가 참여하느냐에 따라 달리 수정될 수도 있다, 본래의 개발지침을 유지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개발과정에서 조화시켜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본다.”
부사장에게 질문을 하였다.
“많은 영세민을 이주시키는데 어려움은 없었는가?”
그랬더니,
“나도 한국의 입장을 잘 안다. 우리는 주민이 이해할 때까지 대화를 한다. 그러다 보니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 말에 나는 깊이 감동했다.
<별첨> 참고 내용
1. Paris 13구에는 70년대 건축 붐을 타고 대형 고층 건물이 33개가 들어섰으나 지금은 최고 높이 38m로 제한하여 통제하고 있다. (paris 전체의 경향도 그렇다)
2. paris 도시계획의 기본이념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paris시민의 일반적인 정서이다
3. paris 13구는 지역개발의 목표를 경제와 연계하여 일자리 창출에 힘쓰고 있다.
4. paris 13구에서는 복지 주택의 건설에 따라 기존 일반 주거지 주민의 반발이 일고 있다. 이때 구에는 주민과 대화를 통하여 해결하고 있다. 이 방법 외에 달리 수단이 없다. 주민 대화 방법은 의원과 주민 간에 이루어지며 의회에서 각 사안별로 하나하나씩 해결한다.
◦ 불우시설을 이 곳에 수용하는 데에 따른 민원 발생시에는 시설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경우 주민이 사업소세, 주민세를 더 많이 납부해야 함을 알려 설득 한다
◦ 복지주택 입주자격과 절차는 매우 복잡한 기준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소득이 적은 사람이 우선이다. 13구에 거주기간 등 많은 문서를 받아 시청과 국가기관에 제출하면 신중한 절차를 거쳐 결정 된다
◦ paris 13구에서는 기존 건물을 매입하거나 Rive Gauche 지구에 건물을 신축하여 대학 기숙사를 확보하여 대학생 20-30만 명을 유치할 계획이다.
쪽빛 바다를 찾아서
-백령도의 사곶 바다축제-
태양이 붉게 타오르는 여름이다. 모두가 더위를 피해서 계곡, 바다 등 물을 찾는다. 조용히 밀려와서 철석하고 하얀 모습을 드러내고는 이내 사라지는 파도가 있고, 젊음과 낭만, 추억이 있는 바다를 찾는 것은 여름 피서로서는 최고일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욕망을 채워줄 축제가 있다고 해서 찾았다. 인천직할시 옹진군에서는 『2007, 쪽빛축제』를 열고 있다. 옹진군에 소속된 백령면(도)은 그 일환으로 「사곶 해변축제」를 열었다.
우리 금천구와 백령면은 자매기관이다. 두 기관은 1997년 자매결연을 맺은 이래 상호방문을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특산물을 판매해 주고, 현안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는 등 선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번 백령면 축제에 우리구의 축하단을 이끌고 백령면을 방문하였다. 방문은 8월 1․ 2일 양일이다.
백령면은 면적 46㎢에 5천명이 좀 안되는 주민이 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여덟 번째로 큰 섬이며, 서해 최고 북쪽에 있다. 주민의 37%가 농업에 종사하고, 15%가 어업에 종사한다. 이곳은 모든 식량을 자급하며 백% 자연산임을 자랑으로 한다.
바다를 건너다.
8월 1일 오전 9시에 출발하는 쾌속정에 몸을 실었다. 이 쾌속정은 정기 여객선이 아니고 축제에 오는 관광객과 초청인사들을 위하여 임시로 마련한 배이다.
날씨는 누군가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이 잔득 찌푸리고, 바람이 우리를 긴장 시킨다. 3백 명 가까운 인원을 태운 배는 우울한 마음으로 “우~~~웅~~~” 출발 신고를 한다.
배가 1시간쯤 항해하였을까 싶은데 여기저기에서 뱃멀미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시간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서 보기 민망하고 안쓰럽다. 나는 다행히 멀미를 하지 않았다. 내가 화장실에 갈려는데 파도에 흔들려 이리 부딪히고 저리 처박히는 등 여간 고역이 아니다. 배는 소청도 대청도를 경유하여 5시간 20분 만에 백령도 연안부두에 닿았다. 얼굴이 모두 누렇다.
함께 축제를
오후 7시부터 축제가 시작된다. 축제 장소인 사곶해변은 천연기념물 제391호로 지정된 천연 비행장이다. 폭 0.2㎞, 길이 3㎞가 석영으로 구성된 모래로 이루어져 별도 인공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군용비행기의 이착륙이 가능하다.
6․ 25때에는 UN군이 비행장으로 이용하여 군사적으로 요긴한 백령도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천연비행장은 이탈리아 나폴리와 여기 백령도뿐이라고 한다. 전 세계에서 두 곳밖에 없는 소중한 자원이다.
축제는 코미디언 황기순이 진행한다. 먼저 노래자랑이 열린다. 미리 예선을 통하여 선발된 10여 명의 지역 주민과 해병대 장병, 지역인사가 자기 나름대로 갈고 닦은 노래 실력을 뽐낸다. 보통 우리구에서 진행하는 주민노래자랑과 별반 차이가 없다. 좀 다르다면 군(軍)의 참여이다.
이 곳은 군사요충지이다. 만약 백령도를 우리 군이 장악하지 못하였다면,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은 무용지물이 되어 서
울의 안보가 불안하여 오늘과 같은 국가발전을 이루지 못했을 것은 자명하다. 그러니 참으로 요긴한 곳이다.
군은 평소 주민과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여 주민의 협조를 받고, 주민은 군에 의지하며 공생하고 있다. 그 모습이 참으로 눈물겹게 받아들여진다.
이번 축제도 군과 민이 함께하는 장이다. 함께 춤추며 노래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1부 주민노래자랑에 이어 2부는 뽀식이 이용식이 연예인과 함께하는 놀이가 펼쳐진다. 밤은 깊은데 해수욕장을 찾아 여름 피서를 온 피서객과 한데 어우러져 흥이 한껏 높다. 무대위도 무대 아래에도 한바탕 춤과 노래가 흥건하다. 열기가 한창일 때 백사장 하늘을 수놓는 폭죽의 황홀한 불빛은 한 순간 숙연하다가 탄성을 자아낸다.
광란의 시간은 지니고 어둠 속에서 찰랑 찰랑 아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짓는 파도가 나를 반긴다.
해병대를 방문하다.
다음날 부대를 방문했다. 이 섬을 책임지고 있는 해병대 제6여단 본부를 찾았다. 상황실에서 부대 소개를 듣고, 관측소에 올랐다. 날이 맑으면 북한 해안까지도 보인다고 하는데 오늘은 불행히 바다 안개가 심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군사시설을 방문하였다. 겉으로는 평화스럽게 보이는 백령섬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촌각을 다투면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유사시에 즉각 대응하여 기필코 이기겠다는 장병들의 의지와 시설, 시스템을 보고는 마음이 숙연해 진다. 늘 고생하는 장병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백령도의 볼거리
심청각, 인당수, 연봉바위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공양미 3백석에 팔려간 심청이가 몸을 던진 곳이 이곳 백령도 북단에서 가까운 인당수 이다. 백령도에 효녀 심청상을 세우고 효심을 돋우는 장이 되고 있다. 여기서 장사곶 인당수가 가물가물 보인다. 또 심청이 연꽃으로 환생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연봉바위가 있다.
물범바위
물범은 천연기념물 제33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백령도에 200~300여 마리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두무진
두무진은 백령도 최고의 비경으로 꼽힌다. 돌의 미학을 볼 수 있는 곳으로 하늘로 쭉 뻗은 바위들이 모여 용맹한 장군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는 것 같은 모양이라 하여서 두무진(頭武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두무진에는 코키리 바위, 선바위, 장군바위 등이 있다.
콩돌해안
콩돌해안은 콩과 같이 동글동글한 작은 돌이 1㎞에 걸쳐 깔려있다. 콩돌은 물에 젖으면 오색을 발하는데 그 빛이 장관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탐내는데, 콩돌해수욕장은 천연기념물 제392호로 지정되었기에 한 개의 돌도 반출을 금한다.
왜 백령(白翎)인가?
옛날 황해도 어느 마을에 글 읽기로 세월을 보내는 선비 한분이 살고 있었다. 그는 사또의 어여쁜 딸을 사랑했고, 사또의 딸 역시 선비를 사모하고 있었다. 어느덧 장래를 약속하는 사이가 된 둘은 용기를 내어 사또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사또는 절대 안 된다고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혜여지지 못하고 매일 남몰래 만났고, 이를 안 사또는 결국 딸을 외딴 섬으로 보내고 말았다. 한숨 속에 세월을 보내야 했던 선비는 여인의 행방을 백방으로 수소문 했으나 알 길이 없었다. 선비는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생각으로 시름시름 알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백학이 꿈속에 나타나서 무언가를 보여주며
“여기 쓰여 있는 곶을 찾아가라. 그러면 그 여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하고는 사라졌다. 선비가 놀라 깨어보니, 학의 깃에 주소가 적혀 있었다. 주소대로 장산곶에서 배를 타고 여인이 있는 섬까지 온 선비는 그녀와 감격스런 재회를 했고, 어느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여기에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은 이 섬을 “학이 알려 주었다.”고 하여 “백학도”라 하였고, 오늘 날에는 “백령도(白 : 흰백, 翎 : 새깃 령, 날개 령)”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백령이여 안녕!
방문일정을 마치고 돌아올 시간이다. 머무는 동안 먹었던 이 곳의 특산음식인 냉면과 콩국수, 순두부국 맛이 기억에 남아 생각하니 입안에 침이 가득히 고인다. 또 저녁상에 오른 회 맛은 일품 이였다. 해삼, 전복 등 평소 선호하는 생선을 마음껏 먹고 좀 남겼는데 아쉬움으로 남는다.
연안부두에서 까나리 젖을 한통 샀다. 아내가 신신 당부하기에 11㎏ 한 통을 3만원에 사고, 택배비 7천원을 지불했다.
떠나오는 자리에 백령면 면장님과 환경팀장이 배웅해 주셨다. 두 분은 우리가 방문하는 동안 바쁜 일정에도 우리를 극진히 안내해 주셨다. 이 지리를 빌어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돌아오는 배는 잔잔한 바다를 조용히 항해한다. 시간도 4시간 남짓 걸렸다.
이번 방문을 통하여 내 관념의 세계를 넓히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기억은 경험에 의하여 이를 무의식 속에 넣어 두었다가 필요한 환경을 맞으면 의식화 되는 것이라고 한다. 한 뼘 넓어진 세상을 얻어 기쁘다는 소견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압록강에서 바라본 북한
내가 이곳을 방문한 때는 3월이다. 아직 한기가 가시지 않은 압록강을 중국의 단동에서 배를 타고 수풍 수력발전소가 있는 수풍 땜까지 올라가며 바라본 북한의 모습이다.
단동항에서 북한 땅을 배경으로 잠시 폼을 잡아 보았다. 압록수는 맑고 차가웠다. 왼지 싸늘한 느낌과 함께 측은한 마음이 든다.
북한은 경제사정이 어렵다는 말은 들어 알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때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공장 건물들이 관리는커녕 수리도 안 되고, 아마도 잔재를 철거할 기운마저 잃은 듯 방치되고 있다. 주민들은 정부에서 공급한 듯 비슷한 모양의 집에서 살고 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국민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주민들이 집단으로 일하러 가고 있다. 집단노동인가보다. 주민들 손에는 플라스틱바가지 등 간단한 도구가 들려있고, 어린이부터 장년층, 남과 여가 함께 이동하고 있다.
북한군은 우리가 가까이 접근하면 초소에서 나와 게으른 동작으로 한번 살피고는 다시 지하에 있는 방카로 들어가는데 동래 꼬마들은 우리에게 돌을 던지며 적개심을 보인다.
압록강 가에 있는 급한 경사의 산과 피폐한 산을 볼 수 있다. 산에는 정상까지 옥수수를 심는다고 한다.
수풍 땜과 수력발전소가 보인다. 한 때는 동양최대를 자랑하던 발전시설인데!
저 자 전 만 수
펴낸 날 2009. 5. 27
연락할 곳 010- 9310-7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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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계속 내용을 추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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