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본글은 <공지>, 그것도 <"전체" 공지>라는 특성상, 필요시 수정 보완될 수 있습니다. 단 기본 내용은 변하지 않습니다. ┃
┗━━━━━━━━━━━━━━━━━━━━━━━━━━━━━━━━━━━━━━━━━━━━━━━━━━━━━━━┛
지금 적는 글의 내용은,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고 스스로 세우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고 응용하여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 방식은 아주 다양할 수 있고, 자신에게 적합한 것은 자신이 찾을 수 있어야 보다 깊고 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측면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부처님 가르침을 도식적이고 형식적으로만 접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결국 이 글은 스스로 세우는 일에 도움이 되길 바라고 권장하는 측면에서, 하나의 예시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어쨌든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 응용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 방식을 세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하나의 예시에 지나지 않지만 전체 공지의 형식으로 글을 올린다.
먼저, 이 본글의 제목을 보고 다음의 의문이 생길 수 있다.
[ "불교의 토대-정법의 기준"이란 공지글에서 '무아'를 정법의 기준으로 거론하였다. 그런데 이번 공지글에서는 하필 '나'를 세우라고 한다. 이는 모순이지 않은가? ]
만약 위의 의문이 발생한다면, '무아'의 일차적 의미조차 그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의문이 발생한 사람은 좀 서운할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다. 분명히 할 것은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다.
중생을 중생이게 하는 오랜 습관에 젖어 있는 이에게 '나는 없다' 즉 '무아'라는 언명이 제시되면, 우선적으로 '무아'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무아'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무아'는 취해야 할 하나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는 '무아'를 알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열반이 선명하려면, 괴로움이 선명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무아가 선명하려면, '나'가 선명해야 한다. '나'라고 생각하고 취한 것들을 선명하게 알면, 그것들은 나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는 거다. 이러한 측면은, 불교의 아주 두드러진 특징이다.
부처님이 제시한 접근 방법은 다음과 같다.
<<
열반을 아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아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
무아를 아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아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
부처가 아니라 중생에 초점을 맞추는 것...
그리하면...
괴로움의 종식 즉 열반이 선명해지고...
나는 없다는 사실이 선명해지고...
부처가 선명해진다.
그리하여...
무엇을 찾아 헤매지 않으며, 드러난 바로 이 법에서 끝장낸다.
>>
접근 방법에서조차 이미 그릇되면,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고서는 오히려 해로움만 생기게 한다. "아리타경, 알라가뚜빠마경"에서 말하듯,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붙잡지 못한 까닭이다. 염소가 물을 먹으면 젖을 만들지만, 독사가 물을 먹으면 독을 만드는 것과 같이...
위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붙잡지 못한 까닭"이라는 표현이 못마땅한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붙잡는다? '붙잡는다'는 것은, '취하고 달라붙는다'이지 않은가? 그리고 '취하고 달라붙는 것' 즉 '집착'은 지양해야 할 것이 아닌가? ]
위의 의문 역시 부처님 가르침의 일차적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한 경우에 발생한다. '집착하지 말라'는 말에 집착하는 것이며, 이해의 부족으로 그냥 말에 먹혀 버린 것이다. 그래서 속된 말로, 말쟁이 말장난을 하는 것이다. 서운해도 할 수 없다. 왜 그런가? 분명히 할 것은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은 까닭이다.
물론 취하고 달라붙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긴 하다. 하지만 이미 무언가에 달라붙어 오온이 (조건으로) 있는 상태이면서, 그러한 사실이면서...무조건적으로 취하고 달라붙는 것을 배격하려고만 한다면...속된 말로, 자기 꼴리는 대로 그냥 막살겠다는 말과 같다. 즉 취하고 달라붙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배격하는 자세는, 단견에 가깝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아닌가?
[경]을 보면, 부처님께서도 깨달으시고는 "내가 깨달은 이 법(연기)을 의지하여 살겠다"고 다짐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미 무언가에 달라붙어 오온이 (조건으로) 있는 상태에서는, 부처님 스스로 깨달은 법을 '나'로 세우겠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즉 이미 무언가에 달라붙어 오온이 (조건으로) 있는 상태에서 '나'는 의지처가 되는 것이다. 상좌부 대반열반경의 "자신을 의지처로, (곧) 법을 의지처로"라는 표현도 동일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의지처'라는 것은, 분명 취하고 달라붙은 것이기는 하다. 다만 위에서 알 수 있듯, 이미 무언가에 달라붙어 오온이 (조건으로) 있는 상태에서의 필요성에 따라 취하고 달라붙은 것이다. 그런즉 그 조건을 떠나서까지 의지처로 삼을 것에 달라붙을 까닭이 없다. 그것은 부적절하다. 부처님 가르침을 방편이라고 말하는 의미 중 하나이다.
스스로 세워야 하는 '나'는 무엇인가? 무엇을 '나'로 세워 의지처로 삼을 것인가? 위에서 알 수 있듯, 당연히 '법(일차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의지처가 되어야 할 것인데...이는 획일적으로 확정할 수 없다. 사람마다 조건이 다르고, 동일한 사람이라도 스스로를 형성하는 가운데 조건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만 불교에서 제시하는 나름의 기준은 있는데, 그 기준 중 하나가 소위 '상승심'이다. 그리고 그 상승심은, (주어진 상황에서 세속적이든 초세속적이든) 가장 먼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보다 행복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비라고 이름하며, '오직 나 하나를 위한 가르침'이라고 이름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보다 행복해지도록 '나'를 세우자. 부처님께서는 아라한에서조차 '마음도 편안하고 몸도 편안한 공덕 있는 아라한'과 '마음은 편하지만 몸은 불편한 공덕 없는 아라한'을 분별하시고는 '공덕 있는 아라한'이 되려고 노력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주어진 상황에서 보다 행복해지도록, 더 나아가 오랜 세월 유익하도록 할 것인가? '우선 (아래와 같이) 자존심과 허영심을 구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무엇이 허영심이고, 무엇이 자존심인가?
외적인 것에 의존할 수록 허영심이고,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을 수록 자존심이다.
예를 들면,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것은, 허영심에 상처를 받은 것이다. 허영심으로 배가 아파하는 자신을 보며 손상되는 감정이,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것이다.
위와 같이 허영심과 자존심을 구별하여 허영심이 상하는 것은 허영심이 상하는 것으로 알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으로 알아서, 자존심이 상하는 것에 무게를 실어주는 습관을 들이면...점점 자존심이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점차 허영심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여러 괴로움들이 사라지거나, 설령 발생하더라도 그 힘을 크게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그 자존심이 바로 (의지하면 유익한) '나'다.
뭐...사람이 허영심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니 허영심을 없애려고 하기 보다는, 허영심으로 상처 받는 자신을 측은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측은하게 여겨 잘 돌보는 방법 중 하나가, 자존심에 무게를 실어주는 것이다.
위와 같은 행위를 1년 그리고 10년 나아가 평생을 두고 쭈욱 반복하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점점 더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나'를 세우게 된다. 스스로를 측은하게 여기는 '나'를 세우게 된다. 즉 자존심과 측은함으로 세워진 '나'가 있게 된다. 외적인 것으로 외적인 것을 여읜 '나'를 세우게 된다.
자존심과 측은함으로 세워진 '나', 외적인 것으로 외적인 것을 여읜 '나'... 그러한 '나'를 세워 의지함이, 어떻게 '법(일차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처로 한 것이며, 주어진 상황에서 보다 행복하며 더 나아가 오랜 세월 유익한가?
괴로움의 드러남은 물론 괴로움의 스러짐까지 알려주는 연기는, 무차별적 측면도 제시하지만(공의 측면, 제일의제의 측면), 동시에 연기에 의지해 행위하려는 이에게는 괴로움을 여의는 길과 함께 상대적으로 더 안전하고 행복한 괴로움이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연기를 이해하는 것에는, 위에서 언급한 공덕 있는 아라한을 지향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불교의 토대-정법의 기준"이라는 공지글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괴로움은 이런 저런 압력에 노출되어 시달리는 위험한 상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외적인 것에 의존할 수록, 그러한 압력과 시달림이 더욱 커진다. 반면 자존심과 측은함은 색계의 요소이다. 즉 자존심과 측은함으로 세워진 '나'는, 욕계에서 욕계의 요소인 외적인 것에 매몰되지 않아 색계의 요소인 나를 세운 것이다. 허영심으로 인해 초래되는 두번째 화살을 지양하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더 안전하고 행복한 상태를 지향하는 일이 된다. 두번째 화살로 발생할 괴로움을 그치게 하여 주어진 상황에서 보다 행복하게 하며, 색계를 지향함으로써 보다 오랜 세월 행복하도록 한다. 또한 동시에 연기를 위와 같이 분명하게 이해하고 연기에 입각하여 행위한다는 점을 알면서 행하므로, 오랜 세월 유익하다.
흔히들 그런 말을 한다. 알아차림이나 삼매연습등 [정]과 관련한 수행이 잘 안된다...
뭐...솔직히 딱 깨놓고 말해, 나이를 먹을 수록 집중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알아차림이나 삼매연습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위와 같은 방식의 생활습관은 나이를 먹을 수록, 더 잘할 수 있다. 뇌가 완전히 굳어 버리기 전에 시작하기만 하면 말이다.
게다가 위와 같은 방식의 생활습관이 있지 않으면, 고작 하루 몇 시간하는 연습으로 나아감을 제대로 얻기 어렵다. 왜 그런가? 경계한다는 것은 통어한다는 것이고, 통어한다는 것은 집중의 요소다. 그리고 알아차림이든 삼매연습이든 집중력을 토대로 하는 것인데, 폼 잡고 있는 몇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경계함이 없이 욕계적 요소에 휩쓸리기만 하는 산란한 마음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렇게 행하면서 어떻게 산란함을 지양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스스로의 행위가 스스로를 규정한다.
마지막으로...허영심과 자존심과 같은 분별에서, 절대적 빈곤은 허영심 이전의 문제라는 점은 분명하게 직시해야 한다.
'어디까지가 절대적 빈곤 상태인가?'는 사회의 수준이나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어떻든 절대적 빈곤 상태에서 수행을 기대하기는 아주 어렵다. 그런즉 불자는 '절대적 빈곤 상태를 지양하는 사회'를 지향함이 적절하다고 본다.
첫댓글 정리가 잘 안된 글인데 말입니다. 꼭 필요해지면 좀 손질하든가 하겠습니다.
일단 어제 질문했던 것은 지웠어요.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나'] 라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요
[외적인 것으로 외적인 것을 여읜 '나'를 세우게 된다] 라는 말의 의미는 선뜻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잖아도.. 하루에 한시간씩 호흡법을 하는 것도 여의치 않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드러난 바로 이 법]에서 끝장내는 삶이 될까가 의도하는 바의 질문을 하려고 했었어요.
글을 읽는다든지, 머릿속으로 궁리해본다는 것 만으로는.. [드러난 바로 이 법에서 끝장낸다]는 행동이 되질 않아요.
삭제된 꼬리말도 봤는데요. 이틀간 갑자기 피곤해서, 밤에 컴퓨터를 안켜가지구요.
위 본글은, 비공개 게시판에 1월3일에 적은 글을, 좀 손질해서 2월 10일에 공개 게시판으로 옮긴 겁니다.
위 본글의 "드러난 바로 이 법에서 끝장낸다"는요. 불교를 접근함에, 열반등이 아닌 괴로움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구요. 일단, '바른 접근을 위한 하나의 기본 자세'로 제시된 거라고 보면 됩니다.
본글에서 말하는 허영심등이 없다면, 본글에서 말하는 측은함과 자존심등을 제대로 확고하게 세울 수 있겠습니까? 비유를 들자면요. 좋은 환경에 의해 좋은 성격일 수 밖에 엄어 좋은 성격인 사람은, 나쁜 환경이 오면 금새 나쁜 성격이 됩니다.
하지만 나쁜 환경에서도 나쁜 환경을 역류하여 좋은 성격을 확립한 사람은요, 좋은 환경이든 나쁜 환경이든 좋은 성격일 수 있습니다. 물론 좋은 환경에서도, 의지를 굳건히 하여 좋은 성격을 확립할 수도 있습니다. 뭐...의지적 요소가 중요한 겁니다.
어쨌든 외적 대상, 욕계의 대상에 휘둘리는 경향이 강할 수 밖에 엄는 우리 욕계 중생의 경우...허영심등이 있어서, 측은함과 자존심등을 굳건히 세울 수 있습니다. 허영심등은 속박인 동시에, 허영심등을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되는 겁니다.
위 본글이 하나의 예시로 제시한 방식은요. 불교를 접하기 전, 아주 어릴 때부터 행하던 하나의 습관입니다. 불자가 아니라도 유익해요.
외부의 영향에 의해 괴로움에 노출되었을 때......그 외적인 것을 살피니 외적인 것은 ‘나’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외적인 것은 있지 않음을 안다.
외적인 것이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기에 외적인 것을 버리고 이제 외적인 것으로부터 상처받은 내적인 것을 살피게 된다. 그와 같이 [외적인 것으로 외적인 것을 여읜 ‘나’를 세우게 된다. ]
그러했다면 이제... [외적인 것으로 외적인 것을 여읜 '나']를 세워 이제 그 내적인 '나'를 살피는 일을 한다. 그 내적인 '나'를 살피는 일이야 말로 수행의 시작이며, 보다 안정적이고 행복한 상태로 이끌어주는 길이 된다.
밝혔듯, 위 본글은 하나의 예시구요. 그 주요 취지는,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고 세우라"는 겁니다. 꼭 불자가 아니어도, 결단으로 일으켜 세워 확립한 (자아) 정체성은 유용합니다. 어릴 때 우리집이 부자였는데요. 몬사는 친구들 보고 저에게 생기는 감정들에 거부감이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적었듯, 불교를 전혀 모를 때, 이미 위 본글의 예시와 같이 살았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으로 살아야 하잖아요.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겨요. 도대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이 뭐냐는 거죠. 그 대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요. 스스로 일으켜 세워 확립한 자아 정체성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 중 하나라는데 별 이견이 없을 겁니다.
===
무조건 도식적인 불교 교리로 치달으면요. 공염불이 되기 쉬워요...
위 본글에 적었듯, 무아가 선명하려면 '나'가 선명해야 합니다. 우리가요. [경]에서요. "무상-고-무아"가 나오는데요. 그게 오온이라는 '법'과 관련한 거란 말입니다. 색수상행식으로 현상을 분별해서, 색수상행식이 선명해서 아는 무상이란 말입니다. 그거 일정 수준 이상 아니면요. 실생활에서 모릅니다. 그냥 말만 무상이라고 무상인게 아니구요...
"전체 공지"로 두개의 글을 적은 이유는요. 어떤 '최소한'을 제시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거만이라도 충실하자는 거예요. 그러면 그거 그래도 문지방은 넘은 거구요. 실제 문지방을 진짜 넘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
오온이 선명하면 좋은데요. 그게 쉽지 않거든요. 그러니 '나'라도 선명하게 세우라는 겁니다. '나'라도 선명하게 세우는 작업을 해보라는 거예요. 그거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행위기도 하니까요.
오온이 선명하게 알려지는 것보다는요. 오온이 선명하게 알려지는 마음을 세우는 것보다는요. 위와 같이 뭉텅그린 '나'를 세우는게 더 쉬워요. 훨씬 쉬워요. 그러한 '나'가 선명하면요. 그러한 '나'의 무상도 나름 선명해요. 자존심을 '나'로 세우는데요. 허영심이 자꾸 생겨요. 자존심이 무상하기 때문이예요.
'있지 않다'등도요. 말로 그치지 않으려면, 고도의 집중으로 알거나, 현실에서 조건을 찾아 조건으로 있음을 살펴야 합니다.
네.. 저도 불법을 공부하기 시작한지 이제 제법 여러해가 지났는데요.. 요즘은 불법을 배운바가 그저 <<공염불>>에나 그치고 말게 될까봐 그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만일 <<공염불>>로서의 불법으로 끝나고 만다면 그거야 말로 우습고 허무한 일일거예요. 요즘 그 부분을 가장 경계하고 있습니다.
여튼 그간 배운바는 있으니 그 배운바에 따라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고 세우라"는 겁니다>> 라는 말씀의 의미를 잊지 않으려 노력할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