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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매호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張鶴鳳
왜 다시 민중신학인가?
세계화의 먹구름이 짙게 깔린 현 세계를 한국의 신학은 어떻게 진단하고 해석하는가?
빈곤과 부채로 인해 질식할 것 같은 현실을 사는 수많은 민중에게 교회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민중신학을 70, 80년대에 한때 유행하던 기독교 사회운동의 전투적 이론으로서, 그저 흘러간 옛 노래나 빛바랜 그제 신문쯤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는가?
외국에 신학을 공부하러 가면 그곳의 지도교수에게서 듣는 처음 질문이 “기독교가 전래된 지 200년이 넘는 당신네 한국의 신학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라 한다. 한국에 있을 때 민중신학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공부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이 질문으로 인해 민중신학과 토착화신학을 다시 들여다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특히 민중신학은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으로서 독창적인 체계를 갖춘 제3세계 신학으로 세계에 잘 알려져 있다.
한국민중신학회(회장: 권진관 성공회대 교수)가 지난 2년 동안의 월례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들을 엮어 한권의 책으로 펴내었다. 매월 정기적으로 모여 토론하는 주제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세계화와 성서신학적 재해석, 그리고 오늘의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이나 이웃 종교, 타 학문과의 연계성 등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한결같이 새로운 민중신학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있다. 이 책은 민중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기 위한 모색이라 할 수 있다.
민중신학은 오늘의 세계를 어떻게 담지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 한국의 대중적 문화와 정신을 들어다보면 더욱 우려할 것들이 보인다. 한국이 갑작스레 잘살게 되며 많은 사람들이 ‘돈맛’을 알게 되어 각박한 세상으로 바뀌었다. 돈과 이익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고 있고, 성공도 돈으로 환산되고 있다. 성공하지 못하면 낙오된 자라는 강박에 매여 있다. 한국민의 정신은 불구가 되고 말았다. 한국의 개신교회를 들어다보면 더욱 불구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돈(맘몬)을 중시하고, 재물의 축적과 재산의 확장이 신앙의 축복이라고 확신하는 신앙관이 개신교인들 안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는 그러한 유형의 신앙관만이 소통되고 있다. 이러한 백성과 이러한 교회가 어떻게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일을 제대로 감당해낼 수 있을까?
민중신학은 한반도에서 새로이 일어나는 정신적인 각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한반도의 죽어 가는 생명의 입장에서 생명과 평화 그리고 정의를 외쳐야 하며, 현재 그렇게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희생당한 자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선포하는 일이 얼마나 필요하고 귀중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신학적인 흐름이 한국에 별로 없다는 것을 볼 때, 민중신학의 앞으로의 성과와 공헌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민중신학의 유산과 전통을 새롭게 이어가는 것은 귀중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부심을 갖는다.
민중신학은 닫힌 이론 체계가 아니라, 열려서 살아 있는 민중의 성서적 지혜를 추구함으로써 오늘의 현실을 설명해내고, 대안적 현실을 보여줄 수 있는 예언자적인 신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그리하여 한국 교회와 사회를 향해서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으로 한국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는 일에 제대로 공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새로운 민중신학은 계속 모색되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민중신학은 언제나 우리를 둘러싼 상황, 특히 민중의 상황에 조응하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황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충실하게 신학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라야 한다. 민중신학은 시대마다 시대적인 화두를 발견하고 그 화두를 사회를 향해 던져야 한다. 우리 시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뿌리에서 그 근원을 찾아내고, 그것을 화두로 혹은 담론으로 이 사회와 교회를 향해 던져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오늘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그 뿌리와 깊이에서 분석하고 그것에 대해 신학적인 대답을 감행해야 한다.
이 책은 오늘의 상황에 대한 민중신학적인 응답이다. 이 책을 검토해 보면 오늘날 소장 민중신학자들의 관심과 고민이 무엇인지, 그들의 현실인식이 어떠한지를 살필 수 있다.
- <머리말> 중에서
1부는 ‘시대와 민중신학’으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현 세계 질서 속에서 한국 교회와 신학이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를 살펴본다.
<한국 교회의 ‘세계화 신학’을 위하여>는 토론토 대학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을 전공한 김영철 목사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한국 교회 신학이 취할 길을 제안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영향과 과정들은 오늘날 사람들의 삶과 피조세계에는 물론 교회와 신학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제3세계 국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세계화의 부정적 현실 앞에서, 교회들은 목회적 윤리적 신학적 나아가 영적인 도전들을 받고 있다. 세계 에큐메니칼 교회들은 세계화에 대한 연구프로젝트, 의식화 프로그램, 캠페인, 개발프로젝트 그리고 지역별 공동협의회를 개최해 왔으며, 이러한 노력들과 에큐메니칼 신학의 대응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구축하는 데 공헌해 왔다.
세계화의 영향은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에도 큰 도전을 던져 주었다. 특별히 1997년의 한국 경제 위기는 한국 교회에게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영향을 깊이 체험하고 대응의 필요성을 절감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한국 교회는 경제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숙고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신앙적 대응을 전개하게 되었고, 한국 교회의 ‘세계화 신학’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한국 교회의 ‘세계화 신학’은 우리가 그 일부이기도 한 세계 에큐메니칼교회의 세계화에 대한 교회적 신학적 대응과 조응하며 정립해 나갈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이 글이 제시하는 세계화의 기본적 관점 즉 “아래로부터 세계화/지역화”(Glocalization from Below)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다문화 사회의 떠돌이 민중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한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는 류장현 교수의 글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2009년 5월 1일 기준 110만6884명으로 주민등록인구의 2.2%에 해당하는 수치로 지난해보다 24.2% 증가한 것이다. 따라서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숫자가 전체 인구의 2%를 넘어 사회학적으로 한국 사회는 이미 다문화 사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년 그 숫자가 증가하고 있어 2050년에는 인구 10명당 1명이 외국인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사회는 이미 다문화 사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문화 사회의 떠돌이 민중의 생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떠돌이 민중과 공생할 수 있는 다문화 사회와 다문화 신앙공동체의 구체적 형태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그것이 21세기 한국 교회의 새로운 신학적 과제라고 생각한다.
다문화 사회의 떠돌이 민중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역사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구원의 주체이며 하나님의 선교를 증언하는 선교의 주체이다. 그들이 꿈꾸는 다문화 사회는 모든 억압과 착취와 차별이 없는 사회, 곧 하나님 나라에 상응한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생명공동체이다. 그것은 떠돌이 민중이 성령을 통해 자기 초월성과 종말성을 가지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극복하는 해방운동을 통해서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떠돌이 민중을 이주민과 나그네와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가족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그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또한 한국 교회는 떠돌이 민중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위임받은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고 그것에 상응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그것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 막 12:31)는 하나님 말씀의 구체적 실천방법이다.
<사회윤리의 과제와 방법>에서 한신대에서 사회윤리를 강의하는 강원돈 교수는 이 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독교사회윤리학은 제도적인 것을 규율함으로서 보다 선하고, 보다 정의로운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의 진지한 노력을 성찰하는 것을 그 과제로 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환경과 맺고 있는 관계들은 제도화되어 있기에 기독교적 관점에서 인간관계들의 제도적인 측면에 윤리학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윤리학적 시도가 바로 기독교사회윤리학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서 이 글은 한편으로는 교의학과의 관계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문·사회과학과의 관계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의 과제와 방법을 논의하고 있다.
첫째, 이 글은 칼 바르트가 강력하게 주장한 바와 같이 윤리학을 교의학의 과제로 보는 전통적인 관점을 부정하고 있다. 기독교사회윤리학이 교의학적 관점에서 제도를 해석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해석은 제도 현실에 대한 분석적 접근을 대신할 수 없다. 물론 기독교사회윤리학은 교의학을 자기 나름대로 활용하는데, 그것은 윤리학적 원칙들의 신학적 근거를 명료하게 밝히고자 하기 때문이다.
둘째, 기독교사회윤리학은 윤리적 판단의 규준과 윤리적 행위의 준칙을 구별함으로써 인문·사회과학적 현실 분석을 윤리학적 성찰에 통합하는 적절한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 윤리적 판단의 규준은 세상이 하나님 나라에 투명하게 되도록 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며,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당위적인 것을 규명하고자 한다. 반면에 윤리적 행위의 규준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면서도 역사적 현실 조건들 아래서 제도적인 것을 규율하는 지침이나 대안적 구상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인문·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으며 제도적인 현실을 분석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셋째, 바로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기독교사회윤리학은 인문·사회과학적 현실 분석을 선택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사회윤리학은 이데올로기적 가면들을 폭로하고, 역사와 사회를 지배한다고 참칭하는 법칙들에 대한 미신을 타파하고, 미래에 대한 책임을 촉진하고, 시민사회의 담론을 통하여 민주주의와 공공성을 구현하는 데 이바지하는 인문·사회과학의 통찰을 수용한다.
<민중과 디아코니아 - 안병무의 민중신학에 대한 디아코니아적 구상>은 한신대 홍주민 박사의 글이다. 이 글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전기와 신학, 그리고 그의 실천 안에서 디아코니아적 요소를 밝혀보고자 하였다.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아주 구체적인 실천을 요구하고 추동해내는 신학, 운동으로서의 신학이다. 특히 신약성서 가운데 복음서에서 역사적 예수가 곧 민중임을 밝히고, 민중과 함께 하는 사건 속에 구원이 연결됨을 밝힌다.
안병무는 진정한 의미의 디아코니아적 교회를 희구하였다. 평신도와 성직자의 간극이 없는 프로테스탄트적 교회, 교권이 사라지고 진정한 사랑과 자유의 영이 활동하는 교회, 예수의 얼굴이 살아 있는 교회를 원했다.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져 평신도 교회인 향린교회, 갈릴리교회, 그리고 한백교회를 세웠다. 또한 민중교회를 통해 새로운 교회를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한국 디아코니아 자매회를 통하여 그가 바란 수도원적 공동체를 현실화한다.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이론뿐 아니라 이러한 실천적 측면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2부 ‘민중신학과 성서’에서 민중신학은 전통적인 성서 해석(교리적 성서 해석) 방법론에 제한되지 않은 새로운 성서 해석을 지향한다.
먼저 <야웨의 배우자이자 민중종교로서 ‘아세라’ 여신>에서 성공회대학 구약학 교수인 김은규 신부는 “왜 ‘유일신 하나님’에 모순되는 ‘배우자 아세라 여신’을 말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구약성서의 야훼 하나님은 해방적 모습과 지배적 모습이 계속 엇갈려 나타난다. 모세 때 보여준 해방적 모습은 다윗 왕조가 들어서면서 지배와 통제의 모습으로 변질된다. 왕정기간 동안 이스라엘 민중들은 야웨 하나님의 지배적 모습에 실망하여 당시 지중해 지역에 보편적이었던 여신 ‘아세라’를 섬긴다. 아세라는 당대에 팽배한 신앙의 대상인 ‘바알’과 거의 쌍벽을 이루며, 제사장 숫자(바알 450명 : 아세라 400명)도 비슷했다. 성서에 나오듯 바알 제사장들이 한곳으로 불려 들어가 야웨 지지자들에 의해 몰살을 당했으나(열왕기상 18:40), 아세라 제사장들은 소집되지 않았다. 야웨 예언자들이 바알 신을 격렬하게 비난하였지만, 아세라 여신과 그 숭배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였다. 이는 “여성들과 민중들이 자신들의 아픔을 하소연하고 들어줄 여신을 찾는 것에 예언자들이 암묵적으로 지지해 준 것은 아닐까?”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대량학살의 기억과 반제국주의 운동>은 한신대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는 이병학 교수의 글이다.
이 글은 요한계시록의 ‘일곱 나팔들의 환상’을 로마제국 한복판에서 출애굽을 다시 일으킨 하느님의 반제국주의 운동의 신학적 틀로서 해석한다. 로마제국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무죄한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잔혹하게 멸절시켰다. 지배자들과 권력자들이 강요한 은폐, 침묵, 그리고 망각으로 인해서 로마제국이 자행한 대량학살의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은 점차 지워졌지만, 요한은 희생자들의 편에 서서 대량학살의 기억을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재현하여 그의 수신자들에게 전수하였다. 대량학살은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서 창조하고 억눌린 자들을 바로의 압제의 사슬에서 해방시킨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반창조와 반출애굽의 행위이다.
패권적 제국주의에 의한 경제의 세계화에 의해서 민족 국가들이 약화되고 있는 현시대에 반제국주의 운동은 요한묵시록의 저자의 시대보다도 훨씬 더 절박하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강요하는 규제가 없는 자유 시장 정책에 의해서 부채와 빈곤으로 내몰린 수많은 가난한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연이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대량 자살이 지금 이미 세계 도처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일곱 나팔의 환상은 패권적 제국주의에 의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덫에 걸려 있는 약자들의 해방과 구원을 위해서 한국에서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출애굽을 다시 일으키고 있는 하느님의 반제국주의 운동에 남녀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하고 있다.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투쟁 없이는 국가의 자주권과 민족 통일도 기대할 수 없으며, 국민의 식량권과 건강권도 기대할 수 없으며, 그리고 성 평등과 생태 보존도 기대할 수 없다.
일곱째 나팔이 울리면 수많은 무죄한 자들을 살육한 폭력의 역사의 종말과 함께 정의와 인권과 평화가 지배하는 새로운 대안적인 세계가 열린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반제국주의 운동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희망과 투쟁을 통한 참여를 전제하고 있다. 이 논문의 중요한 목적은 폭력의 역사의 일부로 한국전쟁 전후에 발생한 민간인 대량학살을?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취급하면서 남북의 자주적인 민족?통일운동과 평화운동을 신학적으론 지지하는 데 있다.
<칭의론과 그리스도의 믿음 - 갈라디아서 2:15-21을 중심으로>는 덕성감리교회 담임목사인 김종길 박사의 글이다.
이 글은 사회-수사학 비평(socio-rhetorical criticism)이라는 새 관점에서 갈라디아서 2장 15-21절을 중심으로 칭의론(稱義論)의 의미와 기능을 살펴보고, 이와 관련하여 칭의론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믿음’을 다루고자 한다.
개신교신학은 루터신학의 영향 아래,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려는 구원론적 입장에서 바울의 칭의론을 취급하였다. 전통적 관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칭의의 조건으로 본다. 칭의는 오직 (인간의) ‘믿음’으로 말미암고, ‘행위’와는 무관하다. 즉, 옛 관점에서는 믿음과 행위가 분리되고, 복음과 율법이 대립한다. 개신교는 루터의 칭의 사상을 편향되게 수용하여, ‘오직 믿음’을 강조한 결과, 윤리적 실천이 취약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은 선교적 정황에서 칭의론의 사회적인 의미를 찾고자 한다. 초대 교회 때의 안디옥 사건은 이방인에 대한 차별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는 율법의 행위를 비판한다. 강자인 유대인 신자를 견제하고 이방인 신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 칭의론을 사용하였다. 칭의론은 사회적 조정 기능을 지닌 변론, 곧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부당한 관계를 바로잡으려는 이론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전통적 입장은 칭의론과 관련하여 두 가지 명제를 내세운다: (1)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2)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새 관점을 수용한 본 연구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1) 칭의의 근거는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2) 칭의는 믿음과 아울러 율법 준수를 요구한다.
칭의론은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의미를 넘어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지닌다. 칭의는 해방을 가져오는 그리스도 사건이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하느님 선교의 차원에서 바울의 칭의론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칭의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하여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이루기를 기대한다.
<고통 가운데서도 파멸하지 않는 인간의 삶 - 『욥기』 다시 읽기>에서 천안 한살림교회 공동체의 최형묵 목사는 ‘착한 사람이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정의가 무색해진 세상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아무런 잘못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좌절의 고통을 안아야만 하는 사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들의 개인적 무능 탓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정의의 최종 보루인 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성서 『욥기』에서 답을 찾는다.
『욥기』를 들여다보면 욥은 인내와 순종의 표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도발과 항변하는 인물을 대표하는 듯하다. 욥은 일관되게, 사람들이 자명하게 여기는 상식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제기하고 항변한다. 욥은 사람들이 상식으로 여기는 믿음들이 어째서 현실에서 통용되지 않은지 집요하게 문제 삼는다. 『욥기』의 진가는 바로 거기에 있다. 사람들이 자명하게 여기는 하나님, 그리고 세계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하나님과 세계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실마리를 『욥기』는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다. 하지만 욥의 도발과 항변은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과의 대면, 그리고 새로운 세계의 실현으로 인도하는 희망의 언어다. 고통 가운데서도 결코 폐허의 잿더미로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삶과 그 희망을 『욥기』는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제3부 ‘다시, 민중신학이다’에서 민중신학은 새로운 문제의식과 이론들이 등장한 ‘오늘’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중진국 상황에서 민중신학하기 - 민중론을 중심으로>에서 권진관 박사는 이 논문을 다음과 같이 해제하고 있다. “민중신학은 1970-8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 신학으로서 세계 신학계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2010년 오늘날의 상황은 한 세대 전의 상황과 크게 달라졌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 끼인 중진국으로서, 많은 후진국들보다는 훨씬 발전된 국가가 되었다. 이전과는 달리 오늘날에는 100만 명 이상의 외국인들과 노동자들이 국내에 들어와 있고, 그 수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그리하여 이전과는 다른 민중 구성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민중신학을 논해야 하는가? 이 논문은 본격적인 신학적 작업을 뒤로 미루어 놓고, 부제가 보여주듯이 민중론을 토론하였다. 이 논문의 필자는 오늘날의 민중은 다중과 인민이 가지고 있는 함의를 모두 갖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서 민중은 다중이나 인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또, 오늘날의 남한의 민중은 인민보다는 다중의 모습을 띄고 있고 당분간 그렇게 지속될 것이라고 보았다.”라고.
<민중 메시아론의 과정신학적 재구성>은 한신대 김희헌 박사의 글이다. 이 글은 민중신학의 핵심 사상인 민중 메시아론을 과정사상의 범재신론으로 재해석한다. 그동안 민중 메시아론은 급진적 인간론으로 전통적인 기독론과 속죄론을 대체하려 했다는 오해를 받아 왔다. 이러한 해석은 교회의 즉자적 정서에 의해 지지받아 왔지만, 실상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이 전제하고 있던 메시아와 피구원자 사이의 절대적 간격이라는 이원론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이 글은 어떻게 전통적 서구 신학의 근본 문제인 신학적 이원론을 극복하여, 민중 메시아론에 함축된 역동적 의미를 밝혀낼 것인가에 주목한다. 그 핵심은 신과 민중의 유기체적 관계론의 이해이다. 이를 밝히기 위한 방법론으로 범재신론이라는 신학 지평을 새롭게 조성하고, 과정 사상의 유기체론을 통해 신학적 이원론의 뿌리가 되었던 실체 철학의 문제를 걷어낸다. 이 글은 과정 범재신론과 민중 메시아론의 대화를 통해, 민중 메시아론에 대한 변론을 넘어 민중신학이 포스트모던이라는 새로운 조건을 맞고 있는 21세기의 신학 담론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논증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라깡과 민중신학>은 프랑스에서 라깡을 공부하고 예일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는 강응섭 박사의 글이다.
라깡에 따르면 인간 정신이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발달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은 세 단계의 논리적 순서를 가진다고 한다. 첫 번째는 객관적인 타자가 주관에 담김으로써 상상적인 것(Imaginaire) 즉 주관적인 타자로 이해되는 단계이며, 두 번째는 주관적인 타자가 객관적인 것으로 다시 상징화(Symbolique)되어 발견되는 단계이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주관 속의 타자가 객관 속의 타자가 아니라고 해도 완전히 “아닌 것은 아니고 그것 자체도 아닌” 것 즉 “환상화된 타자”로 동일화(Identification)되는 단계이다. 현실적 존재인 실재란 세 번째 동일화의 논리를 통해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는데, 라깡은 이 과정을 환유(metonomie)와 은유(metaphore)가 만나는 지점에서 “환상화”되어 나타난다고 이해한다. 다시 말해, 객관적 실재는 사진 찍히듯이 주관의 정신에 담기지 않고, “아닌 것도 아니고 그것 자체도 아닌” 형태로 즉 환상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재를 파악하여 기표(시니피앙)로 나타내려는 학문의 시도는 항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학문이 기표로 표시하고자 하는 것은 그 본성상 기표로 표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자에 갇히지 않는 실재의 모습을 가리켜 “미끄러진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미끄러지는 것, 즉 기표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승화시켜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고, 그것의 되풀이되는 의미를 묻는 것이 종교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종교가 학문(도그마)에 갇히는 순간 그 본성은 상실된다 하겠다.
저자는 이런 정신분석학적 전제를 가지고 성서의 본문을 읽는다. 시몬의 집에서 향유를 예수께 붓는 한 여인의 이야기(눅 7:36-50)를 가지고, 1) 텍스트에 담기기 전의 예수(상상계의 예수), 2) 텍스트에 담긴 예수(상징계의 예수), 3) 텍스트 안팎의 예수(실재계의 예수)를 구분하여 읽어낸다. 이렇게 새로운 성서독법을 소개하면서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를 포착하는 활동이 가지고 있는 중층적 의미구조를 밝힌 후,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 인식에 잡히는 듯하지만 잡히지 않고 미끄러지는 예수를 ‘신조’에 넣음으로 그 예수를 고착화시킨 것은 ‘학문으로서 종교’가 지니는 딜레마입니다. 이런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개념 중심의 신학’을 벗고 ‘사건 중심의 신학’으로 전환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성서의 본문이 짤막한 사건들로 이루어진 것도 아마 이런 것에 좌초하지 않기 위한 작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건 중심의 신학으로 볼 수 있는 민중신학이 이런 면에서 학문적으로 정리되기를 바라면서도 그렇게 되는 것을 지양하고 지금의 사건을 과거 사건의 분출 또는 반복으로 보는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탈근대 시대의 가난한 자, 사이 그리고 혼종성>은 감신대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학술연구 교수인 박일준 박사의 글이다.
신학은 ‘가난한 자를 향한 시선’을 통해 기존 세상과 체제를 전복하고 뒤집어 노는 작업이다. 그것은 우리의 체재 담론은 언제나 ‘있는 자’(those who are, ta onta, 고전 1:28)의 시선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체제 담론으로 ‘존재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시선,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시선, 즉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시선이다. 체제란 시대의 담론이고, 시대가 바뀌면 체제의 담론도 바뀐다. 따라서 ‘가난한 자’란 본래부터 체제 담론으로부터 비존재 혹은 불법적 존재로 규정되는 존재이지만, 시대와 담론이 바뀌면 그 경계도 변한다. 지구촌 시장과 소비 자본주의의 세상 속에서 이제 우리들의 가난한 자는 단순히 ‘공장 노동자’라기 보다는 ‘이주민 노동자’, ‘불법 체류자’, ‘성매매 여성’ 등으로 다변화된다. 이 글은 그 가난한 자의 다변화하는 경계들을 힐라스(Paul Heelas)와 이정용과 호미 바바(Homi Bhabha)의 글들을 통해 살펴본다. 그를 통해 우리 시대 유일한 보편의 이름 가난한 자가 어떻게 조명될 수 있을까를 모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