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존제하였던 천년의 국가 마한의 흔적을 더듬어 봅니다 우리 역사를 곱씹어 보면은 어떤 부분은 이것이 뭐지 하는 의문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글은 여러 사서 울 비교하여 편집하였을 뿐 다른 생각은 첨가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연구하고 탐구하여 진실을 찾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저는 살아진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에 관하여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천년의 역사 가야 역사도.......) 어원은 여러 설에 의하면 막 조선이 마한이 되고 진 조선이 진한이 되고 번 조선이 변한 이 되었다고 합니다 --------------------------------------------참고문헌(한단고기)------------------------------------------------- 47대 고열가 단군(高列加, 58, B.C.295, 대장군) 계해 58년(B.C.238) 중원의 진나라(진시황) 영향으로 단군조선을 폐관하고,대부여라고하고 三韓을 三朝鮮으로 개정하여 이후 6년간 오가(五加)들이 함께 다스린다. 진조선(진한)=B.C 239년 해모수 웅심산에서북부여건국 변조선(변한)=B.C 21년 기자 가 조선왕이됨 후일 위만) 막조선(마한기자)=후일 지자 준왕이 한반도에서 마한건국 해모수B.C 232년진조선국통을계승 위만 침략 기자조선 41대 애왕(준)은 한반도로 도피 마한(무강왕)을 건국하고 한왕이됨(기원전194년) 고두막한 졸본에서 동명왕으로 즉위(위만 망함 기원전108년 ) 북부여 5세 단군 오름. ---참조 끝--- 언제부터 삼조선으로 분열되었는지 기록이 안 보이는데요 그 한 적을 추적해볼까 합니다. 청주 한씨 족보에 의하면 23대 아홀 단군(阿忽, B.C.1237, 환단고기) 시기에 BC1175년 문성 대왕이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합니다 =조선국은 연합(담로)국가인듯합니다. 그 후 BC194년에 위만 침입으로 기자조선 41세 무강 왕(준왕)이 바다 건너 한반도 금마부 도착하여 54개국을 연합하여 국호를 마한으로 하고 평양에서 한 왕으로 즉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때 같이 진 조선, 번조선, 일부도 한반도로 들어와서 삼한으로 태동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조선 마지막 고열가 단군( 47대) 진시황제의 침략으로 삼한으로 분열조짐) BC194년 중원은 한나라가 있었고 한나라는 조선을 수없이 침략합니다. 기자조선 준왕은 한나라 방어를 해준다는 위만 세력에 속아 땅을 주어서 거주하게 하였는데 위만이 약속을 어기고 기자조선 준왕을 쫓아냅니다 그래서 준왕은 한반도로 오고요 한나라 침략을 잘 방어한 위만도 기원전 108년에 기자조선 후예 4명 의 장군에게 찬탈당하고 4명의 장군은 낙랑 진번 임둔 현도 4제후국으로 분활하고 중추세력은 한반도 평양 부근에 낙랑국을 건국하여 4군의 종주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기를 쓴 사마천도 한나라가 한사군을 두었다고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한사군은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두었다고 배웠는데 아닌듯합니다. 한나라는 조선을 침략한 아끼는 한나라 장군들이 전부 참수되었다는 기록만 있다고 합니다. (승리한 장군을 처벌하는 예는 없습니다.이것은 폐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나라는 한사군 제후들에게 벼슬을 하사하면서 자기들이 종주국인 양하지만 한사군보다도 먼저 한나라는 망 하지만 한사군은 이후에도 존제합니다. 종주국이 없는 제후국은 존제하자않습니다 1976년 덕흥리에서 발견된 고분 600 여자 묵서에서 유주자사는 요서 요동에 있는 백제 담로국 후왕과 지역 후 왕들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한사군이 존재하였던 곳이고 이를 통치 한나라가 낙랑국 이라고 합니다. 고구려 대무신왕자 호동이 침략한 나라가 바로 낙랑국이며 그 후 중원 쪽에 있는 낙랑 담로 지원을 받아 명맥을 이어오다가 300년에 신라로 귀속하고 중원의 낙랑은 미천왕 때 고구려로 귀속합니다. 마한왕 8세( 원왕) 때 박혁거세가 신라왕으로 그 후 동명왕이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고 청주한씨 족보는 말하고 있으며 마한 9세 성왕 때 백제국 온조에게 기자조선은( 한 왕) 1131년 만에 멸망하고 비류가 마한 진왕으로 승계되었다고 합니다. 기준이 세운 마한은 온조에게 건국한지 9 왕 202년만에 망하고 한왕에서 진왕으로 비류가 통치합니다. (중원에서는 백제인이 한왕을 페하고 진왕을 세웠다라고 기록함) 마한왕 성제 때 원산성 과 금현성이 백제에 항복하고(AD9년) 망했다고 청주 한씨 족보와 삼국사기는 말하고 있으나 마한은 지배 구조가 담로 국이므로 영산강 유역은 백제와 대등한 관계인 듯합니다. 마한의 3 왕자는 제1왕자는 황룡국의 선우씨 시조가 되고 2 왕자는 신라 귀속 청주 한씨 시조 3 왕자 백제 귀속 신주기 씨 시조가 되었다고 기록하여 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의 통치방법은 담로국(제후국) 형태이므로 마한 54국 진한 12국 변한 12국으로 총 권한은 마한의 한왕에게 있어 외교는 마한이 행사한 것 같습니다. 중원국가에서는 대동강유역 낙랑국 을 조선으로 기록하기때문에 기원후까지도 문헌에 조선의 있습니다. 나주지역에 분포해있는 고구려 신라 백제 와 사뭇 다른 장대한 고 유적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가 있나요? 이 지역은 마지막 고열가 단군 때 내려온 대부여 후예들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백제 20대 비유왕은 이곳에서 배출하여 후기 백제의 명맥을 이어가는 부여씨입니다 백제는 4 번왕 통이 바뀌 는데 제1차=온조(해 씨) 제2차=고이왕(진 씨) 제3차=비류왕(해 씨) 제4차=비유왕(부여씨) 1-3차는 동명 왕조 제사를 지내는 왕조이지만 4차는 동명제사가 없다고 합니다. 제4차 이들이 비류와 온조 보다 먼저 한반도에 정착한 대부여 후손이며 마한의 진정한 후손일 것입니다. 한반도에 머물다가 광개토태왕에게 깨저서 왜로 떠난 응신천황의 담로국이며 한성백제와 사뭇 다른 분류라고 보여진다고합니다. 응신이 떠나고 아신왕이 아들 전지 태자를 질자로 보내 대신 한반도 내의 옛 백제 땅 침미다례(현 제주) 현남(차령산맥 이남), 지침(차령산맥 서쪽), 곡자(황해 지역), 동한 지지(현 경남 해안)를 주었다고 일본속기는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산강지역(마한본거지추정)세력은 동성왕 시절에 대륙 배제도 개척하여 동성왕은 영산강유역을 통합하고 북위의 침공을 토벌후 공이 있는 세력을 달래기 위하여 남제에 책봉 을 요구합니다. 495년 오랑캐(북위) 또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니 모대(백제왕)가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장군을거너리고 크게 무찔렀다 (남제 백제전) 이것은 대륙 백제 활동 이야기입니다. 이때 동성왕은 후왕을 책봉 합니다. 사법명 정로 장군 매 라왕/찬 수류 안국 장군 벽 중왕/해례곤 무위 장군 불중후/목간나 광위장군면중후 동성왕이 삼근왕을 폐하고 백제왕이된후 큰아버지 개로왕이 망할때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던 영산강유역 세력들을 탐라정벌의 핑개을 들어 무진주로 진격하여토벌합니다. 폐한세력들이 일부 일본으로 도망간 새력중일부가 무렬천황으로 등극합니다. 후일 무렬천황은 무녕왕이 형인 계체천황과 함께 페위시키고 세시대을 열어갑니다. 동성왕이 백 가에게 살해당하고도 백가가 무령왕의 공격이 있기 전까지 무사했던 것은 영산강 세력이 잔존했기 때문일 것이입다.(아래문헌참조하세요) 마한은 천년 이상의 국가입니다. 영산강 유역 진서 내용을 보면 마한의 중심국인 목지국이 백제에 멸망한 후에도 절반 이상인 29개 마한소국이 침미다례(신미제국)를 중심으로 건재하였다고 합니다. 또 동이마한이라는 표기로 보아 진나라가 침미다례를 마한의 정통성을 잇는 국가로 인식하고 있고 매년 풍년이 들고 사마(士馬)가 강성해졌다는 기록은 진나라가 침미다례를 통해 급성장한 백제를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중국 사서인「진서 장화전(282년)」에 ‘동이마한 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 20여 국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다. -편집글- (박영자 기자hpakhan@hanmail.net)님의글 (추후 백제중시조에 해당하는 비유왕에 대하여 탐구해볼 에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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