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6 (요3;1-13)
디도서 3;5 명사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벧전 1;23 동사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다.
생명의 근원은 땅에서부터 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나는 것이다.
다른 복음에는 없다.
니고데모 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용어의 문제이다.
각자 수준에 맞는 용어를 선택하여 쓰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에는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어린아이와 같아야 신령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교회에 나오기를 거부하는 사람 – 교만한 사람이다.
디도서
바울의 이해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을 선민적 교리와 연결하고 있다.
갈4;28-29
누가 낳은 아들이냐? -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
이삭은 약속의 자녀이고
이스마엘은 약속을 받지 못한 자녀로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이삭 – 성령으로 난 자
이스마엘 – 육신으로 낳은 자
택함을 받았다는 말은 – 선민사상이다.
육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한 차원 언약적인 차원에서
아브라함에게 두고 약속의 자녀인 이삭에게 두었다는 말이다.
교리적 측면에서 중생
구원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주도적인 구원의 역사가 한 개인의 심령에 나타나서
시작하는 출발점을 중생이라고 할 수 있다.
종자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씨앗은 생명을 뿌린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화분이나 땅
씨앗이 들어가지 아니하면 백년을 지나도 그 안에서 풀 한포기
나지 않는다.
생명의 씨앗이 들어가야만 싹이 나게 되어 있다.
아무리 건강한 여자라도 혼자서는 임신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의롭고 선해도 나의 노력과 선행을 통해서는 구원의
역사가 있을 수 없다.
반드시 위로부터 성령이 임하여야만 한다.
신비로운 역사가 있고서야 중생의 역사가 시작된다.
일생에 한 번 이루어지는 일회적인 사건이다.
중생의 시작은 생명의 시작이고 한 번뿐인 사건입니다.
다음으로 씨앗이 점점 자라듯이 생명이 성장을 하고 점차적으로 커지면 온 인격, 지식, 감정, 의지를 지배하게 된다.
거룩해진다. 혹은 성화라고 이야기 한다.
중생 성화 영화
본문속의 중생
지식도 명에도 가진 자가 주님을 찾아왔다.
밤에 – 위신 체면
예수님은 세리나 창녀 등을 만나는 분인데
길게 자신을 설명한다. 인사가 길다.
긴 것은 진실성이 결여된다.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믿으라.” 이게 더 간단하고 명확하지 않은가?
하나님께로 오신 분이고
-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씀 하신 것이다.
- 쉽게 말하면 가면을 벗으라는 말이다.
단순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간음하다 현장에 잡혀온 여인에서 혹은 세리에게
중생을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중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1. 자세를 낮추어서 자리에 앉아라.
2. 신기원적 – 공부를 많이 해서 알게 되거나, 도를 닦고 거룩한
생활을 많이 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역사하는 것이다.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 – 퓨뉴아 (영)
성령과 바람이 히브리어로는 같다.
성령 - 귀신으로 생각한다. 잘못된 일이다.
영이란 보이지 않는 어떤 힘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이 저기 계시는데 그 분의 역사가 보이지 않게 우리에게
와서 닿는다는 뜻입니다.
바람으로 표현한 것이다.
바람 자체는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움직일 때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힘을 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의식 이전의 역사다.
중생의 역사란 의식 보다 먼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지, 정, 의가 있는데 어느 것이 먼저인가?
생각하는 것, 아는 것, 느끼는 것 어느 것이 먼저인가?
먼저 알고 사랑하는가?
아니다. 먼저 사랑하고 다음에 생각하는 것이다.
느낌이 생각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의 역사는 의식보다 앞섭니다.
의식은 생명보다 훨씬 뒤에 있다.
예) 4살 이전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말이다.
의식은 생명보다 훨씬 뒤에 있다.
더구나 자의식을 가지게 되는 일은 더더욱 뒤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생일은 한참 뒤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육신의 생일은 신비로운 것으로 의식 이전의 일이요
의식으로서의 생일은 훨씬 뒤의 일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부터 믿었느냐?
언제부터 구원의 역사가 내게서 나타났느냐?
이것은 모르는 일입니다.
예) 구원파의 주장
아주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특수한 사정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중생한 날을 모른다.
어느 때에 누구에게 듣고 은혜를 받았는지 잘 모른다.
성경대로 바람이 임의로 불매 나에게 들어왔음으로
나는 언제 사로잡혔는지 모르게 사로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로운 일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신비롭게 나를 붙잡은 것이 중생의 역사다.
이것은 의식 훨씬 전에 일어난 것이다.
어려서 들었던 말씀이 씨앗이 박혀서 어느 순간 예수 믿게 될
수도 있다.
예) 어머니의 성경책
바람이 임의로 불매
내 편에서 성령을 끌어들였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자기 뜻으로 불어 나에게 임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 내가 열어야 한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의 영에 붙들림을 받을 때
비로서 천국을 보기도 하고
진리를 알기도 하고
그리스도를 영접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말씀이므로 지식이 많다고 알게
되지 않는다.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읽어야 성령이 내 마음을 감동해서
구절구절이 내게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니고데모의 반응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어색하고 난감하다.
네가 이스라엘의 랍비로서 그것을 모르느냐?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중생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성령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성령을 알겠는가?
신비로운 역사인 동시에 신비한 역사입니다.
내 안에서 죽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이다. 예) 얼굴이 변한다.
그래서 위로 난다고 번역하지 않고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만한 영적인 인격이 있었는데
다 잠들어 버리고 타락해 버렸습니다.
이제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중에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천국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고백
네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너를 알게 하신 것이다.
성령에 의해 신앙을 고백하고
성령에 의해서 죄를 이기고
성령에 의해서 진리에 깊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