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4:1~22 곤고한 자들이 2021. 1. 13
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2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4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5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1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12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16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1)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17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21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22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34편 표제어입니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이 배경은 사무엘상 21:10~15절입니다. 시편에서 아비멜렉으로 되어 있지만, 사무엘서는 가드 왕이 아기스입니다. 이런 것은 애굽의 왕을 바로라고 하듯이 각 개인의 이름도 있지만, 왕의 공식적인 이름으로 보면 무리가 없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가드 왕에게 망명하려고 하니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합니다. 사울은 천천이며 다윗은 만만이라고 백성들이 노래한 자가 다윗이라고 아기스 신하들이 왕에게 보고하자 다윗이 위기를 느낍니다. 그래서 갑자기 성문에 몸을 끄적거리며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는 미친 짓을 해서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말하면서 여호와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곤고한 자들이 즐거워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시편 34편은 알파벳 순서로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시편에서 이런 시편이 여러 편 나옵니다. ‘알렙’으로 시작하여 ‘타브’로 끝이 나는데 이러면 외우기 좋은 형태가 됩니다. 그래서 1절을 히브리어 순서로 보면 ‘아바라카’로 시작합니다. ‘알렙’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니 ‘아바라카’로 시작하는데 그 뜻은 내가 여호와를 찬양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2절은 ‘베트’로 시작하니 ‘바예호와’입니다. 전치사 베트를 여호와라는 단어에 붙여서 여호와께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 내용은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찬양하고 여호와를 자랑하는 일을 노래하는데 이 찬양을 듣고 누가 기뻐합니까? 곤고한 자들이 기뻐한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누구를 칭송하거나 자랑하면 곤고한 자들은 괴롭습니다. 누가 주식에 투자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주식에 투자해서 손해만 본 사람은 화가 나는 겁니다. 시험에 합격하였다는 자랑을 하면 시험에 떨어진 사람은 의기소침하여집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랑하는 재미로 살아가기에 거짓말로도 자기 자랑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명품이라는 것들이 등장하는 것은 자랑을 돈으로 사는 겁니다. 물론 물건을 조금 좋게 만들겠지만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사서 내가 누린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이러한 자랑들은 곤고한 자들을 더욱 곤고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간증이라고 하는 것들을 들어보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은 하지만 결국은 지금은 무언가 잘 되어 있는 상태를 간증합니다. 간혹 그렇지 않고 지금도 힘들게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며 산다는 간증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런 간증들이 정말로 곤고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 기쁨이 되겠습니까? 2절에서 곤고한 자들이라는 이 단어가 성경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찾아보면 가난한, 곤란한, 곤궁한, 고난받는, 가련한, 겸손한, 빈민, 빈궁한 자, 궁핍한 자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여호와를 자랑하는 말을 듣고 기뻐하려면 여호와를 자랑하는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무엘상 21:10~15절입니다. “10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14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다윗이 미친 짓을 하여 겨우 살아서 도망갑니다. 고대에 미친 짓을 하는 자를 죽이면 그 미치게 한 신의 능력이 자기에게 임할까 두려워하여 죽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다윗을 누가 따라가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이런 말을 하면서 여호와를 찬송하고 여호와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고 하여도 숨기려고 합니다. 부끄러운 이야기도 영웅담으로 바꾸어 말합니다. 남자들이 군에 갔다 온 이야기 할 때 자기 못남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하고서 그런 말을 있는 그대로 하는 사람은 바보 취급을 당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런 일을 겪고서 하는 찬양이 항상 여호와를 찬송하고 여호와를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누가 받아들일까요?
사무엘상 22:1~2절입니다.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갑니다. 다윗의 가족들도 연좌제로 묶이기에 하는 수 없이 다윗에게로 갑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에게 누가 갑니까? 사울 치하에서 환난 겪은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에게 다윗의 이야기는 기쁨이 됩니다. 그 이유는 기름 부음 받은 왕이 배척받는 미친 세상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본문 3~5절입니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자랑합니다. 이 찬송에 함께 기뻐하는 자들에게 권합니다. 나와 함께 여호와가 광대하시다고 하며 그 이름을 높이자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건지셨다고 합니다. 다윗이 두려워 미친 척하여 살아남았는데 이것을 찬송하자고 합니다. 이 찬송에 참여하는 자들은 주를 바라보는 자들이며 그러면 그 얼굴에 광채가 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이 부끄럽지 않다고 합니다. 이런 얼굴이 누구의 얼굴입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는 얼굴임을 누가 알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의 얼굴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얼굴인 줄 누가 알겠습니까?
6~10절입니다. 여기서 다시 곤고한 자가 부르짖는다고 합니다.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다고 합니다. 그 구원을 천사들이 둘러서서 진을 치고 구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합니다. 곤고한 자가 부르짖어 구원을 얻었다는 수많은 간증이 이 땅의 썩어질 것들인지 썩지 아니할 영원한 것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주께 피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서 주려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젊은 사자는 힘이 좋아서 사냥을 잘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냥을 잘하는 사자도 단독 사냥 성공률은 약 10%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젊은 사자도 주리는 일이 있지만,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좋은 것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편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이 사회가 가르쳐준 좋은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겁니다. 물론 피조물을 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드셨기에 햇볕과 비와 공기가 다 좋은 겁니다. 이런 좋은 것들을 인간의 탐심이 망쳐놓았지만 이런 것들보다 더 근원적인 좋은 것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12~15절입니다.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자기 욕심에 속아서 참으로 좋은 것을 모르고 세상의 썩어질 것을 좋은 것이라고 여기며 사는 자는 결국 사망에 이릅니다.
이어지는 16~18절입니다.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겁니다. 이 좋은 것을 받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짐으로 우리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고 함께 하늘에 앉히심이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일입니다.
본문 11~17절입니다. “봉독” 여호와의 구원을 경험한 자가 이제 그 구원이 무언지 자녀들에게 말하는 겁니다. 야고보서에서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합니다. 진리로 거듭난 자가 그 진리를 전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 경외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하라고 합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십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십니다.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다시 율법적인 조문이나 조건으로 제시하여,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을 받기를 원하면 네 혀를 금하라고 하면 적용을 잘못하는 겁니다. 혀를 악에서 금하라고 하는 것은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은 자로써 고난을 겪을 때 이를 조롱하는 자들이 악을 행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이것을 조롱하고 침 뱉고 고개를 도리질하는 그들이 악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곤고한 자들이 주의 이름을 자랑하는 일에 기뻐한다는 것은 다음의 말씀을 봅니다.
본문 18~19절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충심으로 크게 뉘우치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서는 자기 죄가 어떠함으로 알고 회개합니다. 그때 고백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의인이 고난이 많은 이유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의와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그대로 버려두시면 그것이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은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에 고난이 많은 겁니다.
본문 20절입니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문자대로 본다면 다윗이 고난 중에도 그 뼈가 꺾어지지 않았다는 말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뼈란 사람의 가장 깊은 심연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 중심이 꺾어지지 않았다는 말로도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떠한 고난에도 버림을 당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내용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를 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서 먹을 때에 불에 구워서 먹는데 그 뼈는 꺾지 말라고 합니다(민9:12). 그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뼈가 꺾어지지 않습니다. 두 강도는 다리를 꺾어 죽이는데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셨기에 창에 허리를 찔러서 죽음을 확인합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악이 악인을 죽입니다. 오늘 살펴본 말씀에서 악이 무엇입니까? 의인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롱함이 악입니다. 시편 22편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그 탄식을 이해하지 못함이 악입니다. 욥의 고난을 인과율로만 해석하는 욥의 친구들이 악의 모습입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악이란 대신 희생하는 그분을 믿지 않는 것을 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악인들이 벌을 받는데, 그 벌이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지 못하는 벌입니다.
본문 2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십니다.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은 한결같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 고난을 통하여 여호와께 피하여 들어갑니다. 여호와께 피하여 들어가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그 약속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께 피하여 들어간 자들입니다. 이들은 벌을 받지 않습니다. 어떤 벌을 받지 않는 것입니까? 영원한 사망이라는 벌을 받지 않는 겁니다.
로마서 8: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1)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하던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는 알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무엇이 복인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복을 말합니다. 죄와 사망에 법에 갇힌 우리를 해방하시려고 예수님이 죄 아래 오셨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고후5:21).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되셔서 우리를 해방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도망 다니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자랑함으로 그 말을 듣는 환난 받고 빚지고 원통한 자들이 즐거워한 것처럼 바울이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그 십자가를 기뻐하는 자들이 곤고하지만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