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00년을 거치며 불교는 '박제'가 되었다. 승려는 천민신분이었다. 유생들이 사찰을 찿을때면 승려는 가마를 메거나, 술시중을 들어야 했다. 신라와 고려를 거쳐 내려오던 '선맥'도 가물가물해졌다. 일제 식민시대는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불교는 이름만 있을뿐, 숨결을 찿긴 힘들었다.
그때 '한국불교'에 불씨를 지핀 이가 경허선사다. 그에게 내로라하는 제자가 셋이
있었다. 수월과 혜월, 그리고 만공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경허의 세 달'로 부른다. 그 중 경허의 맏상좌였던 수월은 '꽉 찬 달'로 통한다. 그러나 오도송(깨달을 때의 게송)도 없고, 열반송(입적할 때의 게송)도 없다. 이렇다 할 설법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그에세 붙는 '칭호'는 특이하다. '그림자없는 성자' 그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은둔의 선사였다. 하지만 수월의 사제로, 경허의 법을 이은 만공선사는 생전에 "수월사형만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며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나타냈다. 만해 한용운은 자신의 펴낸 잡지에서 그를 "조선의 마지막 대선사"라고 평한 것으로 보아 수월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인들 사이에선 '참보살'로 추앙받는 존재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나 수월은 간도로 건너가 말년을 보냈기에 남북이 분단되고, 오랫동안 중국과 국교마자 단절돼 있어 '잊혀진 전설'로 사라져 갔다.
수월스님의 손상좌뻘인 명선 스님(여수 흥국사 회주, 조계종 원로의원)은 "10여년전 연변 일대에서 수월스님을 기억하는 노인들은 만난 적이 있다. 떨어진 벼이삭과 마을사람들이 버린 배추잎을 주워 말린 뒤 겨우내 산속 동물들이 찿아오면 던져주던 수월 스님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며 "수차례 그분들께 고증을 받아 수월 스님의 진영을 그렸고, 이곳 수월 정사에 모시게 됐다"고 밝혔다. 스님은 "수월스님은 머리를 기른 채 함경도 삼수갑산에 은거해 살던 스승 경허스님을 쫓아 북쪽으로 와(1912년부터) 이 곳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스승이 열반하자 장례를 치른 뒤 옛 고구려 땅인 흑룡강성 나자구 왕청현 송림산에 들어가 3년을 보내다 1928년에 열반했다"고 말했다.
출가 전, 수월스님은 머슴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부잣집에 들어가 머슴살이를 했다. 하루는 그의 방에 탁발승이 잠을 청했다. 탁발승이 밤새 들려준 이야기에 그는 '출가'를 결심했다. 그러나 주인은 허락하지 않았다. 가죽신을 던져주며 "신발이 다 떨어지면 떠나라"고 했다. 수월은 2년의 세월을 더 보냈다. 일을 마친 밤, 그는 들판에 나가 끝없이 벼 포기를 걷어찼다. 결국 가죽신이 떨어지던 날, 그는 수행자의 길을 떠났다.
그는 서산 천장암으로 경허 선사를 찿아갔다. 그리고 자나 깨나 '천수경'을 외었다. 그게 그의 '화두'였다 결국 '난'는 없고 '천수경'만 흐르던 날, 그는 깨달음을 얻었을 터이다. 무식하고, 못 생기고,, 키도작고, 볼품없던 수월 선사는 수차례나 방광(放光 수행자의 몸이나 성스러운 물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현상)을 했다고 한다. 전깃불도 없던 시절, 마을 사람들이 밤에 불이 난 줄 알고 달려나왔다가 합장을 한 뒤 돌아갔다고 한다. 그건 '나 없는 나'에 우주가 온전히 응할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한 동안 스님은 금강산 마하연에서 조실로 계셨다. 그 때 있었던 일이다. 스님은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수행에 정진하셨다. 절에서 가꾸는 채소밭이 있는데 멧돼지 피해가 심했다. 그래서 수월 스님이 채소밭을 가꾸고 돌보자 맷돼지와 벌레들의 피해가 사려졌다고 한다. 어느 날 공양주가 무가 너무 잘 자라 먹음직스럽자 몰래 무를 하나 뽑아 먹다 턱이 빠지고 말았다.
그날 밤 공양주 꿈에 산신이 나타나 꾸짓는 게 아닌가
"그 무를 누가 가꾸는데 감해 함부로 손을 대다니"
공양주는 이튼 날 새벽 수월 스님을 찿아가 용서를 빌었다.
"뭐 그 깐 일로 그래, 좀 봐 주게나"
그러자 공양주의 빠진 턱이 금세 나았다는 것이다.
간도로 건너온 후의 행적도 기이한 일이 적지 않다. 흑룡강성 왕청현 태평촌에 살던 방씨 노인의 전언에 따르면, 수월은 매일 아침 공양 뒤에 산에서 내려와 탁발을 하거나 들판에서 이삭이나 무시래기 등을 주워서 짊어지고 올라갔다. 왕청 송림산은 겨울이면 눈이 많이 쌓여 먹이를 구하지 못한 산짐승들이 굶어 죽는 일이 많았다. 수월은 겨울이 오기 전 쌓아둔 이삭과 무시래기를 새와 산짐승들에게 나눠주어 아사를 면케 했다. 또 수월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300리 산길을 단시간에 다녀와 사람들은 축지법을 쓴다고 생각했다. 또 수월이 손을 대기만 하면 병자들이 나아서 그 고을에선 의사가 필요 없었다.
방씨가 12살 소년이었을 때 수월은 소년의 부모에게 찿아와 "이래로 있으면 호랑이 밥이 되니, 내 곁에 두라"고 말해 단칸 흑집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그때 보니 수월은 일절 눕지 않았고, 아예 잠을 자지 않았다. 5일째 되는 날 오줌이 마려운데도 나가지 못하게 하던 수월이 밖을 향해 "이놈아, 이제 그만 가거라"리고 밖을 내다보니 눈에 불을 켠 호랑이가 있었다고 한다.
수월 선사가 머물던 도문시 일광산(一光山) 수월 선사는 그곳에 작은 초막집을 짓고 살았다. 바로 뒤가 천길 낭떠러지였다. 그 아래 두만강이 흘렀다. 일제시대, 국경을 넘는 동포들은 두만강을 건너고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 수월 선사는 그 고개 정상에 손수 만든 짚신과 주먹밥을 놓아두었다. 누가 두었다는 흔적도 없이, 20여 년간 북간도에 머물면서 나라를 잃고 떠돌던 조선 민초들에게 묵묵히 짚신과 주먹밥을 나누어주며 그들의 아픔을 달랬다. 스님은 겨울이 오기 전 쌓아둔 이삭과 무시래기를 새와 산짐승들에게 나눠 주었다. 수월스님 주변에는 만주 들판의 사나운 짐승들도 순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산으로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수월은 자비로웠다. 특히 천수경을 좋아해 평생 천수경을 외우며 살았다고 전한다. 수월이 열반에 들자 마을 사람들이 다비하고는 현장을 살피기 위해 올라갔는데, 하얗게 수북이 쌓인 가을 서리 위로 남쪽을 향한 발작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수월 선사의 법문은 오직 하나만 남아 있다. 몸을 다친 독립군 연설단원이 화엄사에 머물 때 수월 선사가 들려준 법담이다. 거기서 수월 선사는 "도를 닦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하늘천 따지를 하던디, 하나둘을 세던지, 주문을 외든지, 워쩌튼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 겨. 무엇이든지 한가지만 가지고 끝까지 공부혀야 하는 겨"라고 말했다. 이 법문을 기억한 그 독립군 단원은 몽골에서 스님이 되었다.
수월(水月), 스승이 내린 법명처럼 그는 쉼 없이 흐르는 '달'이었다.
※ 작년에 여름에 읽었던 역사기행 교재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